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성과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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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현의 개념과 종교적 인간
인간이 성스러움을 경험하는 것은 그 성스러움이 속된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서 스스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종교의 역사는 가장 원시적인 것에서부터 고도로 발달한 것에 이르기까지 많은 성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성현이란 어떤 성스러운 것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성스러움이 드러남으로써 사물은 어떤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하지만 그 후에도 그 사물의 물질적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성스러운 돌도 여전히 한 개의 돌이다. 즉, 겉으로 볼 때는 그 돌을 다른 일반적인 돌과 구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돌이 성스러운 것으로서 제시되는 사람들에게는 눈앞의 돌이 초자연적인 실재로 변한다. 다시 말하면 종교적 경험을 가진 인간에게는 모든 자연이 신성성으로 제시된다. 그 때 우주는 전체가 성현이 된다.
고대 사회의 인간은 성스러운 것 가운데에, 혹은 성화(聖火)된 사물에 아주 가까이 접근해 살려고 노력했다. 왜냐 하면 원시인 및 모든 전근대적인 인간에게 성스러운 것은 힘이며 궁극적으로는 무엇보다도 실재 그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것은 존재로 가득 차 있다. 성스러운 힘은 실재와 동시에 영원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종교적 인간은 존재하고자 하는 갈망, 실재에 참여하고자 하는 갈망, 힘으로 충만하고자 하는 갈망을 갖고 있다.
2. 인간에게 실재하는 공간의 의미
종교적 인간에게는 공간이 동일하지 않다. 종교적 인간은 성스러운 공간과 그 밖의 다른 공간,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넓은 공간 사이의 대립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비종교적 인간에게 공간은 동일하다. 성스러운 공간은 인간에게 세계를 발견하게 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삶을 획득하게 한다. 이에 반해 속된 경험의 공간에는 단지 흩어진 우주의 단편들만이 있을 뿐이다.
성스러운 공간의 체험은 '세계의 창건'을 가능케 했다. 성스러운 것이 출현하는 공간에서, 실재가 그 모습을 나타내고 세계가 출현한다. 성스러운 것의 출현은 지상과 천상 사이를 교류하게 하고, 하나의 존재 양식에서 다른 존재 양식으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한다. 속된 공간에 이 같은 단절이 생김으로써 하나의 중심이 창조되고, 그것을 통하여 초세계적인 것과 교섭하고 그에 따라 세계를 창건한다. 공간의 성현 혹은 공간의 정화는 우주 창조에 대응한다.
모든 세계는 신들의 작품이다. 종교적 인간은 성스러운 세계 안에서만 살 수 있다. 왜냐 하면 이러한 세계 속에서만 진정으로 실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종교적인 욕구는 억제할 수 없는 존재론적인 갈망을 표현하고 있다. 종교적 인간은 존재를 갈망한다.
이 존재론적인 갈망은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난다. 종교적 인간은 실제의 핵심, 세계의 중심에 자리 잡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즉, 신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고자 노력한다. 세계의 중심이라는 상징은 국가, 도시, 사원, 궁전뿐만 아니라 수렵민의 천막, 유목민의 유르트, 정착 농경민의 집과 같은 보잘것 없는 인간 주거의 형성 원리가 된다.
그러나 어떤 공간에 거주하는 것은 우주 창조의 반복과 같다. 그러므로 종교적 인간이 공간 안에 자리 잡는 것은 사실상 종교적 결단이 된다. 그는 자기가 거주하기로 선택한 세계를 창조할 책임을 떠맡으면서 혼돈을 우주화할뿐만 아니라 그의 작은 우주를 신들의 세계처럼 만듦으로서 성화한다. 종교적 인간은 '신의 세계'에 깊은 향수를 느끼고 후세의 사원이나 성전이 그러한 것과 같이 신들의 집과 유사한 집을 동경한다.
3. 인간에게 실재하는 시간의 의미
종교적 인간에게는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 역시 동일하거나 연속적이지 않다. 한편에는 성스러운 시간, 축제의 시간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속된 시간, 즉 일상적인 시간이 지속된다. 이 두 종류의 시간 사이에는 물론 단절이 있다. 하지만 종교적 인간은 의례(儀禮)를 통해 일상적 시간에서 성스러운 시간으로 이행한다.
이 두 종류의 시간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성스러운 시간은 원초적인 신화적 시간을 나타낸다. 종교적으로 축제에 참여하는 것은 일상적인 시간에서 탈출하여 신화적인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시간은 무한히 회복될 수 있고 반복 가능하다. 그러므로 종교적 인간은 두 종류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이에 반해 비종교적 인간도 역시 시간의 비연속성과 이질성을 체험한다. 그에게도 노동하는 단조로운 시간이 있는 한편, 오락과 위안의 시간, 즉 '축제의 시간'이 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애인을 기다릴 때나 혹은 만날 때, 그는 일하거나 피곤에 지쳐 있을 때 체험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을 체험한다.
그러나 종교적 인간과 비교하면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종교적 인간은 '성스러운 시간'을 체험한다. 그 시간은 신들에 의해 성화되고 축제에 의해 재현된 원초적인 시간이다. 이 전례의 시간은 비종교적인 인간으로서는 도달하기 어렵다. 비종교적인 인간에게 시간은 단절도 신비도 아니다. 그에게 시간은 그 자신의 삶과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처음과 끝이 있다.
4. 인간에게 실재하는 자연의 의미
이처럼 시간과 공간을 다르게 체험하는 종교적 인간에게는 자연도 결코 단순한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종교적 의미로 충만해 있다. 왜냐하면 우주는 신의 창조물이고 세계는 신들의 손으로 완성된 것이어서 성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인간에게 세계는 성스러운 것으로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세계는 실존하고, 실제로 거기에 있다. 세계는 카오스가 아니라 코스모스다. 따라서 세계는 신들의 작품인 피조물로 자신을 드러낸다. 하늘은 직접적으로 '자연스럽게' 무한한 거리, 신의 초월성을 계시한다. 대지도 우주적인 어머니이자 양육자로서 자신을 나타낸다.
따라서 종교적 인간에게 초자연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과 밀접하게 연결 되어 있다. 자연은 항상 그것을 초월하는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있다. 성스러운 돌이 존경받는 이유는 그것이 신성하기 때문이지, 돌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돌의 진정한 본질을 계시하는 것은 돌의 존재 양식 안에 나타난 신성성이다.
종교적 인간은 열려진 우주 가운데 살며, 그 자신도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 이것은 그가 신들과 교류하고 있다는 것, 세계의 신성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인간은 신들과 교류가 가능한 중심에 거주하기를 갈망한다. 그의 거주지는 소우주이며, 그의 신체도 역시 소우주이다.
'신체ㅡ집ㅡ우주'의 동일시는 매우 일찍부터 나타났다. 인도의 종교 사상은 이런 '집ㅡ우주ㅡ신체'라는 상징을 풍부하게 사용하고 있다. 등뼈는 우주의 기둥, 호흡은 바람이나 배꼽, 심장은 세계의 중심과 동일시된다. 말하자면 인간은 그에게 미리부터 운명 지워진 상황 속에 의식적으로 순응함으로써 스스로를 우주화 한다.
5. 현대의 비종교적 인간
이에 비해 현대의 비종교적인 인간에게 우주는 불투명하고 둔하고 말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우주는 어떤 메시지도 전해 주지 않으며, 어떤 암호도 갖고 있지 않다. 자연의 신성함이라는 의식은 오늘날 유럽의 경우 주로 농경민들 사이에 남아 있다. 왜냐 하면 그들 사이에는 아직도 우주적 제의로 체득한 그리스도교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서 산업 사회의 그리스도교는 중세 시대까지 지녔던 우주적 가치를 오래 전에 상실해 버렸다. 그들의 종교 체험은 더 이상 우주를 향해 열려 있지 않다. 결국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적 체험이 되어 버렸다. 즉, 구원은 인간과 그의 신에 대한 문제가 되었다. 기껏해야 인간은 신에게 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해서도 책임을 느끼고 있음을 인정할 뿐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인간ㅡ신ㅡ역사'의 관계 속에는 우주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러나 '종교가 없는' 세속적인 인간도 여전히 종교적 인간의 후예이며, 그는 자신의 역사를 지워 버릴 수는 없다. 그는 존재의 깊은 곳, '무의식'이라 불리는 영역을 간직하고 있다. 이 무의식의 내용과 구조는 시노하의 이미지와 유사하다.
무의식의 내용과 구조는 특히 위기의 상황이 낳은 결과이다. 이 때문에 무의식은 종교적인 분위기를 갖게 된다. 왜냐 하면 모든 실존적 위기는 세계의 실재성과 세계 내에서의 인간을 다시 한 번 문제 삼기 때문이다. 이는 곧 실존적 위기가 결국 '종교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비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근대인들에게 종교와 신화는 그들 무의식의 어둠 속에 '은폐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이러한 인간이 내면 속에 생의 종교적 인식을 회복할 가능성을 감추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비종교적 인간은 '의식된 종교 체험', 즉 '종교를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을 상실했지만, 그의 가장 깊은 존재 밑바닥에는 아직도 그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
『성(聖)과 속(俗)』은 세계 안에 있는 두 가지 존재 양식이다. 또한 인간이 역사의 흐름 가운데서 형성해 온 두 가지 생존 양식이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 1907~1986)』의 『성과 속(Das Heilige und das Profane)』은 성과 속이라는 개념으로 종교의 새로운 지평을 연 고전으로 손꼽힌다. 엘리아데는 1907년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났다. 부쿠레슈티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대학 시절에 만난 다스굽타 교수에게 산스크리트를 배우며 인도의 사상과 상상력에 매료됐다. 인도에 유학하여 1936년에 『요가 : 인도 신비주의의 기원』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연금술과 우파니샤드, 불교를 통한 상징 해석에 몰두했으며, 1949년에는 자신의 종교 연구를 집대성한 『종교 형태론』을 펴냈다. 1956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대학에 재직하면서 『이니시에이션의 의례와 상징』, 『탄생과 재생의 신비』등을 저술했다. 1982년에 『종교 관념의 역사』2권을 출간하고 그 보완 작업을 하던 중 1986년에 사망했다. 그는 신화, 상징, 의례 등을 연구함으로써 역사, 문화의 차이를 초월한 인류의 공통적 정신세계를 탐구했다. 엘리아데의 『성과 속』은 모두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거룩한 공간의 세계의 성화, 제2장은 거룩한 시간과 신화, 제3장은 자연의 거룩함과 우주적 종교, 제4장은 인간의 실존과 성화된 삶 등이 그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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