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sserl과 Heidegger의 현상학에서 방법의 문제
- 반성(Reflexion)과 기분(Stimmung)개념을 중심으로-
이 종주(서울대 )
제 1 장. 사태와 방법의 통일
Heidegger가 Husserl로부터 현상학적 방법을 배웠으면서도 그것을 심화시켜 나가는 가운데 원칙적으로 동의했던 점은 '현상학'이라는 사유의 수행방식이 곧 방법으로서 지니는 다음과 같은 원칙이다. "모든 존재양식(Seinsart)은 .... 본질적합하게(wesenmässig) 자신의 소여방식들(Gegebenheitsweisen)과 그와 함께 인식방법의 방식들(Weisen der Erkenntnismethode)을 가진다."(IdeenⅠ. s.176) 여기서는 '본질 적합하게'라는 말에 강조가 두어져야 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존재양식은 '그때그때 경우에 따라서'(eventuell) 소여 방식들을 갖는 것이 아니고, 본질적으로 소여 방식을 갖는다는 점에서 소여 방식들과 독립된 존재양식 그 자체에 대한 논의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사태란 바로 이처럼 존재양식의 본질적 소여 방식들을 말함이다. 나아가 이런 사태로서 소여 방식들에는 그것에 고유한 인식방법의 양식들이 있다. 이것은 결코 인식방법은 상식적인 그리고 학적인 그러나 사태 외적인 선입견과 도식을 사태 자체에 강요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인식방법은 사태 자체에서 길러 내어져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Heidegger는 이와 같은 사태와 방법의 긴밀성을 '사태 자체에로'라는 격률 하에 다음과 같이 현상학에 대한 예비적 규정 속에서 표현하고 있다. 현상학은 "스스로 드러내는 것을, 그 자신으로부터 드러나는 그대로, 그 자신으로부터 보이게 한다."(SZ, S.46) 여기서 '스스로 드러내는 것'(was sich zeigt) 곧 사태로서 현상을 '그 자신으로부터 보이게 한다'(von ihm selbst her sehen lassen) 곧 방법으로서 로고스(logos)를 통해 드러낼 때 사태와 방법의 긴밀성은 바로 '그 자신으로터 드러나는 그대로'(so wie es von ihm selbst her zeigt)에서 요구하듯이 사태 자체에 철저히 방법이 기초해야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사태 자체에 철저히 기초해야 한다는 현상학적 요청에 Husserl과 Heidegger는 어떻게 부응하는가? 이때 그들 탐구의 방법적 측면을 다루는 시점에서 예비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사태와 방법의 긴밀성이라는 현상학의 근본원리-근본요청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Husserl이나 Heidegger 모두 공통적으로 처음에는 계획으로 혹은 예감으로 나중에는 부단한 탐구를 통해 스스로가 염두하고 있는 사태 그 자체의 두드러진 한 양상 속에서 바로 방법적 기능을 발견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Husserl의 경우 의식은 대상일반이 주어지는 소여성의 영역이다. 말하자면 대상은 항상 의식에서 자신의 소여성의 방식들을 가진다. 이 때문에 대상은 항상 의식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되, 의식 초월적 대상일 수 없다. 대상이 항상 의식의 대상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역으로 말한다면 의식은 대상없는 의식이 아니라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이라는 것이다. 의식이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이라는 것은, 의식이 자기 스스로 대상과 관계를 형성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의식의 본질이며 Husserl 현상학이 탐구하고자 하는 사태인 바 지향성이었다. 무엇에 대한 의식으로서 지향성은 그 고유구조에서 보자면 '무엇에로 향하고 있음'(Sich-richten-auf)을 말한다. 그런데 사태에 대한 인식역시 이런 내실적-지향적 체험에 수반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대상으로 삼는 반성적 의식으로서 '자아의 자신의 체험들에로 향해있음'이라는 지향성의 구조를 갖는다. 그래서 Husserl은 반성을 '의식 일반의 인식을 위한 의식방법'(Bewusstseinsmethode für die Erkenntnis von Bewusstsein überhaupt)(Ideen1. S.165)이라 칭한다. 여기서 말하는 의식방법이란 풀어쓰면 지향성의 구조를 지닌 의식의 한 두드러진 양상으로서 방법을 의미한다. 이 반성이 의식의 두드러진 한 양상으로서 방법적 기능을 부여받는 까닭은 이 반성 가운데에서 '모든 원리중의 원리'라고 표현하는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직관'(orginär gegebende Anschauung)의 유형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직관은 어떤 것이나 다 인식의 권리원천"이며 "직관에서 우리에게 원본적으로 .... 나타나는 모든 것은 다만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제한이 있긴 하더라도 존재하는 것으로서 단순히 받아들일 수 있다."(Ideen1, S.51) 이 원본적 직관 방식은 현상의 충실, 대상의 명증에 대한 척도이다.
Heidegger는 「현상학에로 나의 길」(1963)이라는 소논문에서 1919년 이후 Husserl 가까이에서 자신이 연구도 하고 교수도 하면서 현상학적 봄을 시도하면서 무엇보다도 학습써클 시간을 이끄는 가운데 논거를 충분히 통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예감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경험하였다고 술회 한다. "의식 작용의 현상학에서 현상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알리면서 나타나는 바로 그것이 이미 근원적으로는 Aristoteles에 의해서 또 그리스 사유 전체와 그 당시 사람들에 의해서 알레테이아(ԡՋԾՈՅՉՁ)로 사유 되었으며, 이는 현존하는 것의 감추어져-있지-않음(Unverborgenheit), 즉 이런한 존재자의 탈은폐(Entbergung)이자 스스로 드러냄(sich-Zeigen)을 의미한다." 그런데 Heidegger에 따르면 이와같은 '스스로 드러냄'으로서 사태는 '다른 존재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빛인 방식으로'(SZ, S.177) 비추어져 있음(Gelichtetheit)이다. 이제 이처럼 자기 자신이 빛인 방식으로, Heidegger적으로 표현하자면 현존재가 자신의 현으로 존재하는 근원방식이 다름아닌 기분이며 기분은 현존재의 존재양식으로서 사태인 바 존재론적 특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개시작용을 근거로 해서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을 위해서 원칙적인 방법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SZ, S.S.185-186)
이처럼 Husserl, Heidegger 모두 현상학의 근본원리로서 사태와 방법의 긴밀성을 지향성과 그 두드러진 양상으로서 반성의 통일 혹은 현-존재의 한 근원양식으로서 기분과 그것의 개시가능성의 통일 속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제 2 장. Husserl의 현상학에서 반성의 방법적 의의와 그 한계
1절. Husserl 현상학의 보편적 방법으로서 반성
Husserl에 따르면 모든 존재자의 존재양식은 자신의 소여성의 방식들과 그와함께 그 방식들에 고유한 인식방법들이 있다. 그런데 존재자의 존재양식은 따로 있고 그때 그때 자신의 소여방식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Husserl에게는 의식은 존재자, 곧 대상 일반이 주어지는 소여성의 영역이다. 말하자면 대상의 존재양식은 항상 의식내재적으로 주어지는 방식 속에서 드러난다. 이 때문에 대상은 의식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되, 의식 초월적(transzendent) 대상일 수 없다. 대상이 항상 의식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은 역으로 말하자면 의식은 대상없는 의식이 아니라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etwa von Bewusstsein)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존재양식과 소여양식은 불가분적이다. 그러데 우리의 일상적 태도에서는 항상 대상에로 주제적으로 방향지워져 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것을 체험할 때-혹은 자아가 자신의 체험들을 체험할 때-"우리가 그 체험들을 시야속에 두고서 내재적 경험이나 그 밖의 내재적 직관이나 성찰의 방식에서 그 체험들을 파악하는 것은 아니다."(Ideen Ⅰ, S.162) 따라서 어떤 것에 대한 체험 자체, 곧 어떤 것에 대한 의식, 좀더 정확히 말해 대상의 의식내재적 소여성의 영역-내실적이든 지향적이든-에 대해서 그것에 고유한 인식방법, 곧 반성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테면 "시야속에 있지않은 모든 체험은 이상적 가능성에 따라-본질적으로, 원칙적으로-시야속에 포착되어, 자아의 반성이 그리에로 향하게 되면, 체험은 이제 자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IdeenⅠ,같은쪽) 그런데 이 자아의 반성적 시선(Blick) 역시 재차 체험이며 따라서 원칙상 새로운 반성의 기체(Substrate)가 될 수 있으며 이과정은 무한히 가능하다. Husserl에 따르면 현상학적 방법-예컨데 본질직관, 환원 등-은 철두철미 (durchaus) 반성작용들 속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반성은 현상학의 보편적 방법론적 기능을 지닌다"(Ideen Ⅰ,같은쪽)고 말한다. 곧 반성은 의식일반의 인식을 위한 의식방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성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의식일반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 "먼저 체험류(Erlebnisstrom)에 대해서, 그리고 체험류와 순수자아의 필연적 관련성에 대해서 알게 되고, 따라서 체험류가 하나이면서 동일한 자아의 사유작용들의 자유로운 수행의 터(Feld)라는 사실, 더 나아가서는 모든 체험류는 자아가 그 체험류를 향해 시선을 두고, 그것을 통해 자아에 낯선 다른 것들을 포착하는 한에서 자아의 것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된다."(Ideen Ⅰ, S.168) 체험류란 의식삶을 말하는 것으로 소여성의 영역이며, 그런 의식삶 속에서 체험류와 자아의 관련성이란 곧 자아의 사유작용(Cogitationen)과 그 사유된 바(Cogitata)의 관계, 곧 의식의 본질인 바 지향성을 인식하는 것이며 또한 체험류들이 자아의 것이 된다는 것은 자아의 사유작용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파악하는다는 의미이다. 자아에 낯선 것이란 이를테면 세계나 타인의 의식삶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 역시 자아의 구성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Husserl이 반성에게 이런 방법상 보편적 기능을 부여하는 그 인식론적 권리 원천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가? 반성을 통해 체험류 및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명증적으로 파악하고 분석가능하게 될 때, 반성은 그 반성된 체험류와 동떨어진 다른 무엇이 아니다. 다시말해 반성은 논리적 장치나 조작이 아닌, 재차 체험자체이며, 반성은 이처럼 일련의 내재적 의식작용 속에서 수행되는 것이다. 그런데 Husserl에 따르면 대상의 본질적 존재양식, 곧 대상의 본질은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직관'(originäre gebende Anschauung)의 유형들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훗설이 표방하는 원리들중의 원리에 도달한다. "모든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직관이 인식의 한 권리원천이며, 직관에서 우리에게 원본적으로(말하자면 그것의 생생한 현실성에 있어서) 제시되는 모든 것은 다만 거기에(da) 존재하는 것이라는 제한이 있다고 하더라고, 주어지는 것으로서 단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IdeenⅠ, S.51) 이제 반성이 만일 이처럼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직관 속에서 수행되는 본질직관일 때, 이를테면 내재적 지각이나 내재적 파지(Retention) 속에서 수행될 때 절대적 권리를 갖게 되며, 내재적 기억이나 예상 속에서 수행될 때 상대적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IdeenⅠ, S.S.168-169)
2절. 반성과 환원
앞서 현상학의 방법들 이를테면 본질직관과 환원은 철두철미 반성작용들 속에서 움직인다고 했을 때 반성은 결코 일관된 한가지 과정이 아님을 간파할 수 있다. 더구나 반성을 통해서 우리가 통찰하게 되는 내용은 의식삶과 사유작용-사유된 것의 상관 관계 및 그 지향성의 여러 유형들, 이를테면 개별적 구성작용 뿐만 아니라 세계, 타인의 의식삶까지 이른다고 했을 때 결코 반성작용이 단순하지 않은 오히려 여러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역시 짐작할 수 있다.
우선 모든 반성은 본질적으로 태도변경에 입각해서(aus Einstellungs-
änderung) 생겨나는데 이런 태도변경을 통해 선행하는 체험 내지 체험자료-비반성적 체험-는 반성된 의식의 양상으로 변경된다.(IdeenⅠ, S.166) 이 반성된 의식에로 변경이 현상학적으로 함축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무엇인가? "반성의 과제는 그저 원체험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원체험을 자아의 대상으로 변경시킴으로써 그 속에서 목도되는(vorfindlich) 것을 고찰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현상학은 본질론이며 따라서 현존확인(Daseinsfeststellung)이 아니라 본질통찰(Wesenseinsicht)을 기도한다. 바로 반성을 통해 현상학은 비반성적 체험을 반성적 체험으로 대상화시킴으로써 본질통찰-본질직관(Wesensanschauung)-을 기도하는 것이다.(IdeenⅠ, S.172) Husserl이 현상학의 모든 방법들이 반성작용들 속에서 철두철미 움직인다고 할 때 우선 환원의 첫 번째 의미인 '형상적 환원'(eidetische Reduktion)은 반성을 통한 본질직관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이를테면 개체인식에는 반드시 본질에 대한 선이해가 수반하며, 이 선이해된 본질을 반성을 통해 명료하게 통찰하는 작용이 바로 형상적 환원으로서 본질직관이다.
그런데 현상학은 본질론이면서 동시에 초월론적(transzendental) 본질론이다. 다시말해 현상학이 궁극적으로는 의식의 본질로서 지향성에 관한 학이라고 할 때, 형상적 환원은 본질계가 사실계로부터 독립하여 그 자체로 존재하는 영역을 밝힐 뿐, 아직 본질과 의식과의 관계를 밝히지 않았다. 즉 형상적 환원에서는 본질이 사실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식으로부터도 독립되어 있는 것처럼, 즉 의식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 때문에 형상적 환원에서는 지향성은 여전히 은폐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향성은 의식과 대상의 객관적-인과적-관계도 초월적 관계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자기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자기관계란 본질이 의식밖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의식자신의 대상임을 뜻한다. Husserl에서는 본질이 의식의 자기 대상이라는 것은 본질이 의식의 지향작용에 의해서 구성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구성은 의식초월적인 것으로 간주된 본질을 의식내재화 시키는 것이다. 본질이 의식내재화 되는 과정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의식 초월적 본질에서 의식내재에로 시선전환이 필요한 바 이것이 선험적 환원이다. 형상적 환원이 사실계를 떠나서 본질을 밝히는 작업이라면, 선험적 환원은 이 본질이 선험적 의식에서 선험적 주관의 구성작용(noesis)에 의해 구성된 것(noema)을 밝히는 작업이다. 그런데 이와같은 선험적 환원역시 의식내재에로 시선전환이면서 동시에 그 지향성을 통찰한다는 점에서 반성을 통해서 수행되는 것은 물론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그러나 개별적 의식작용에서 이루어지는 환원이지만 "우리가 파악작용 가운데 개별적인 것에로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항상 통일적으로 현출하는 보편내부에서의 개별화이다."(Meditation, S.75) 또한 이러한 특정한 개별적 의식작용에서 지향성에 이르는 환원작업에만 머무르는 반성은 자칫 지향성을 단순히 '존재자에 대한 태도'정도로 오해하기 쉽다. Landgrebe 역시 이런 오해를 지적하며 "지향성이 의식의 활동(Leistung)-구성작용과 구성된 것 모두를 포함-으로 이해되고, 지향성의 가장 깊은 층이 시화(Zeitigung), 시간형성작용으로 이해될 때 지향성은 단순히 앞서 주어진 존재자에 대한 한갖된 태도가 아니라 존재자 일반을 만나게 해주는 가능조건으로 파악될 수 있다"라고 강조한다. 이처럼 보편적 관점에서 Husserl은 『성찰들』에서 이제 반성을 자연적 반성와 선험적-현상학적 반성으로 나누고 있다. 자연적 반성 속에서 우리는 존재하는 것으로서 앞서 주어진 세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반면, 선험적-현상학적 반성에서는 세계의 존재 및 비존재와 관련하여 보편적 판단중지(universale ՅՐՏՇ)를 수행함으로써 이와같은 기반없이 반성을 수행하는 것이다.(Meditationen, S.72) 그러나 우리는 세계의 존재 및 비존재에 대한 판단중지를 통해 이 세계를 단순히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된 바(Cogitatum)로서 견지한다.(Meditationen, S.75) 요컨데 지향성은 개별적 구성작용과 구성된 것의 상관관계 뿐만 아니라 보편적 차원에서 그리고 가장 깊은 기초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지평과 세계지평의 상관관계까지 포괄하는 다층적인 의식구조의 본질인 것이다. 보편학으로서 현상학이 추구하는 과제는 이처럼 '자신의 존재와 삶의 보편성 속에서 자아와 자아의 대상적이 상관자의 상관적 보편성의 관련'(Meditationen, S.89)의 규명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Landgrebe에 따르면 이처럼 세계에 대한 존재정립과 관련해서 보편적 판단중지와 더불어 수행되는 반성은 결코 그때 그때 이루어지는 반성(gelegentliche Reflexion)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때 그때의 반성은 다만 여하간의 실천적 목표정립, 대상적으로 방향지워진 인식실천에 기여할 뿐이며 결코 보편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 그때 반성은 어떤 특정한 행위를 하는데 관심을 가지며(interessiert) 이때 자신의 현실적 관심, 곧 현실적으로 나 자신인 바 그리고 얻고자 노력하는 것은 긍정되어 있다.(PM, S.92) 후설은 이처럼 자연적으로 세계 안에서 그날 그날 살아가며 경험하는 자아를 세계에 관심을 갖는 자아라고 부른다. 반면 보편적 판단중지에 의해서 가능한 보편적 반성만이 자아와 세계의 상관관계, 좀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존재와 의식 사이의 본질적 상관관계 및 의식활동에 대한 존재의 의존성에 보편적으로 접근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같은 보편적 반성을 수행하는 자아는 저 '소박하게 관심을 가진 자아'(naiv interessiertes Ich)을 넘어서 거처를 마련하는 '무관심한 방관자'(uninteressiertes Zuschauer)이어야 한다.(Meditationen, S.73) 보편적으로 반성을 수행하는 무관심한 방관자로서 자아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관심은 '보고, 충전적으로 기술하는 것'(zu sehen, adäquat zu beschreiben)(Meditationen, 같은쪽) 뿐이다.
이와같이 Husserl의 현상학에서는 방법으로서 반성의 보편성은 보편적 판단중지-선험적 환원-에 의해서 가능하며, 방법의 보편성은 동시에 무관심한 방관자의 태도를 요구하는 것이다. Landgrebe에 따르면 이와같은 사고에는 아주 오래된 사상이 포함되어 있는데, 곧 참된 존재는 오직 관상(thoria) 속에서만 드러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다만 무관심한 방관자의 사상은 옛날의 그것과는 달리 "이미 세계 안에 있는 주체의 단순한 이론적 봄이 아니라, 그 속에서 주관성 자신이 시간을 형성하는 그리고 세계를 형성하는 주관성으로서 그 자체로 드러나며, 모든 존재와 삶의 창조적 원근거로서 보존되는 봄이다."(PM, S.94)
3절. Husserl 현상학 내에서 반성의 방법적 한계
Husserl 현상학에서 방법으로서 반성이 지닌 한계를 논한다는 것이 훗설 현상학 일반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Husserl은 『성찰들』의 64절 결론에서 "우리의 성찰들은 ....자신의 목적 즉 절대적 정초에 입각하는 하나의 보편학으로서 철학의 Descartes적 이념의 구체적 가능성을 밝히는 일을 본질적으로 성취했다"(Meditationen, S.178)고 말하면서도 그 전에 하나의 단서를 붙인다. 곧 "모든 선험 철학적 인식론은 인식비판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선험 현상학적 인식의...비판으로 되돌아 오며, 현상학의 그 자체에 대한 본질적인 재귀관계에서 이 비판 또한 하나의 비판을 요구한다."(Meditationen,같은쪽) 여기서 Husserl은 현상학이 그의 방법적 의미와 관련하여 그 자신을 비판함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현상학의 제 방법들이 그 안에서 철두철미 움직이고 있는 반성작용들에 대해 비판을 한다는 것은 반성일반의 한계를 논하기 이전에 우선 환원과의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 반성에 국한된 비판임을 의미한다.
Landgrebe는 선험적 환원을 통해 가능한 보편적 반성의 방법은 '단초들의 방법'(Methode der Leitfäden)(PM, S.94)이라고 말한다. 이는 곧 주관적 활동들의 다양성 속에서 우선 단순하게 주어지는 그대로의 존재자는, 그로부터 그것을 구성하는 종합적 활동(synthetische Leistung)에로 되물어가기 위한 단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지각사물에 있어서 우선 사물자체와 그것이 사념되는, 즉 음영들 속에서 그때 그때 주어지는 방식의 구별이 발생하며, 이 음영들은 감각적 자료들의 통각의 산물이며, 이 자료들은 이미 구성된 통일체들이며, 이 통일체들에는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내적 시간의식 속에서의 경과의 위상-展相-들의 다양성이 부과된다. 이렇게 앞서 주어진 통일체로부터 가장 근저에 흐르는 종합적 활동 곧 내적 시간의식의 시화에 이르기 까지 그 통일체를 구성하는 다양성들에로 되물어가려는 보편적 반성은 따라서 '소급적 반성'(regressive Reflexion)(PM, S.95)인 것이다. 그런데 소급적 반성은 통일체로서 앞서 주어지는 단초들이 없이는 도대체 지향적 활동들에 대한 반성을 수행할 수 없다는 점에서 바로 단초들에 의지하는 방법인 것이다. Landgrebe에 따르면 이제 현상학적 환원론에서 절정에 이르는 현상학-일종의 체계학-의 전체연관에서 바로 단초역할을 하는 가장 넓은 의미의 통일체는 '자연적 세계'(naürliche Welt)(PM, S.85)임을 지적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반성개념의 논의에 앞서 Husserl과 Heidegger의 공통된 확신으로서 언명한 바 >사태자체에로<의 격률의 본뜻을 새겨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태자체에 대한 인식방법은 그 사태자체의 자기소여방식 다시말해 자기자신에 즉해서 스스로를 보이는 방식에 의거해야 한다면 현상학에서 사태 자체란 바로 단초로서 '자연적 세계'이기 때문이다. M. Merleau Ponty역시 이점에 동의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사태자체에로의 복귀란 지식에 선행하며, 그것에 대해 지식이 항상 말하며, 그것과의 관계 속에서 모든 과학적 도식화는 하나의 추상적이고도 파생적인 기호-언어에 불과한 저 (자연적)세계에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제 Husserl 현상학의 방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과연 자연 세계는 형상적 환원과 선험적 환원에 기초한 선험적-현상학적 반성에 의해서 통찰될 수 있는가? 다시말해 자연세계는 무관심한 방관자로서 자아의 사유작용에 의해서 사유된 바-구성된 것-로서 스스로를 자신에 즉해서 모두 길러내어 지는가?"
세계는 모든 분석이전에 있으며 세계를 먼저 감각들을, 그 다음 여러 관점에 상응하는 사물들의 측면들-음영들-을 연결하는 일련의 종합의 산물로 만드는 것은 인위적이 아닌가? 왜냐하면 이때 감각들이나 음영들 모두 분석의 산물일 뿐 여하간의 선행하는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Merleau Ponty는 이와같이 세계를 사유된 바로 간직하려는 반성을 분석적 반성이라고 명명하면서 자신의 출발 내지 단초를 보지 못하는 불완전한 형식의 반성이라고 비판한다.(PP,같은쪽) 그러나 Merleau Ponty가 비판하는 분석적 반성이 앞서의 선험적-현상학적 반성과 합치하는지 여부는 의문이 있다. 왜냐하면 Merleau Ponty에 따르면 분석적 반성은 존재와 시간이 닻지 않는 주관성 속에서 수행된다고 보지만, 앞서의 선험적-현상학적 반성은 궁극적으로는 가장 근저에 있는 따라서 시간을 형성하는 의식에 까지 미치기 때문이다.
오히려 Merleau Ponty의 비판은 반성보다는 그런 소급적 반성을 초래하는 선험적 환원에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반성으로 하여금 세계를 기술하지 않고 구성된 것으로서 통찰하게 하는 것은 선험적 관념론으로 귀결되는 선험적 환원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환원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가장 중요한 교훈은 완전한 환원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PP,ⅩⅢ) 흥미로운 것은 Merleau Ponty가 수긍하는 유일한 환원의 형식은 Eugen Fink가 언명했던 바 '세계 앞에서의 경이'(wonder in the face of the world) 뿐이다. 이와같은 경이속에서 이루어지는 반성은 더 이상 세계로부터 그 세계의 기초로서 의식의 통일체로 소급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초월의 형식들이 불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처럼 치솟아 오르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서 뒤로 물러설 뿐이다. 다시말해 그러한 반성은 우리와 세계를 결속시키는 지향적 끈을 결코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만 늦추어 그것들을 우리의 주목하에 둔다는 것이다. 반성이 오로지 세계의 의식-더 정확히 말해 세계에 의존해 있는 의식-인 까닭은 그러한 반성만이 저 세계를 낯설고 역설적인 것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PP,같은쪽) Merleau Ponty는 이와같이 경이에 기초한 반성을 '근본적 반성'(redical reflexion)이라고 명명함으로써 선험적 환원에 기초한 분석적 반성과 구별한다.(PP,ⅩⅣ) 명칭이야 어떻든간에 우리가 Merleau Ponty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사태자체와 멀어지고, 사태를 왜곡할 우려가 있는 선험적 환원을 비판하면서 다시금 사태자체로 육박해 들어가기 위해 '경이속에서 이루어지는 반성'이라는 '기분에 사로잡힌 반성'(gestimmte Reflexion)을 제안한 점이다. Landgrebe나 Merleau Ponty 모두 >사태자체에로<라는 현상학의 격률에 충실하고자 하면서 애초에 반성자체가 사태자체를 보고 기술하려고 하면서도, 항상 사태자체가 그 자신에 즉해서 스스로 보이는 바 소여양식을 주관적 의식내부에서만 보려함으로써 반성의 단초인 사태자체로부터 오히려 멀어질 수 있음을 우려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의식의 영역에만 국한한다 하더래도 사태자체에 대한 체험에 있어서 의식에 드러난 체험이전에 시선에 애초에 포착되지 않은 채 은폐되어 있는 의식의 가장 근저에 흐르는 체험은 과연 보고, 충전적으로 기술하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 무관심한 방관자의 반성만으로 드러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곧 "마침내 반성하는 의식에 의해 더 이상 확실하고 투명하게 인식될 수 없는, 다시말해 필연적으로 (이를테면) 해석학적 상황을 유발시키는 의식유형을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그와같은 의식유형은 예컨데 발생적 현상학적 의미의 선험적 주관의 최하부층으로서 근원 질료적인 것, 먼 과거라는 시간지평 속에 놓인 어두운 의식의 배경, 타자의 선험적 의식 등이 그 예다.
이처럼 반성은 Husserl의 현상학 내부에서도 그 자체 Husserl자신이 주장하는 것처럼 보편적 방법으로서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다시말해 이를테면 기분이나 해석과의 보완을 스스로 요청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절. 감정과 기분의 영역에서 반성의 방법적 한계
앞서 Husserl 현상학 내에서 반성의 방법적 한계를 논할 때 밝힌 것처럼 이때의 비판은 반성일반이 아니라 Husserl 현상학의 제방법들-형상적, 선험적 환원-을 기초로 하는 반성에 국한 되었다. 이제 Husserl 현상학을 넘어서서 반성일반이 지니고 있는 한계를 논하고자 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반성자체에 대해 비판하고자 할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또다른 더 높은 단계의 반성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역설은 반성자체가 본질적으로 지닌 무한 퇴행의 가능성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런 역설에도 불구하고 Husserl 스스로 반성일반의 한계를 암시하는 논의를 하고 있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이념들Ⅰ』에서 Husser이 선험적 태도에서 이루어지는 반성의 한가지 사례를 분석하는 가운데 우리는 반성일반의 한계를 암시하는 지적을 발견 할 수 있다. 특히 이런 암시가 감정이나 기분현상과 관련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예컨데 자유로운 이론적 사유진행에 수반하는 기쁨을 반성하고자 기쁨이 경과하는 동안 반성적 시선이 그 기쁨에로 향하게 될 때 '사유경과의 자유(Freiheit des Gedankenlaufs)가 손상되어(leidet)'(IdeenⅠ, S.164) 변양된 방식으로 의식될 뿐만 아니라 그 경과에 수반하는 기쁨 역시 본질적으로 함께 관련되어 변양된다는 것이다. 반성에서 변양이란 비반성적, 비대상적 원체험을 반성적, 대상적 체험으로 포착하면서 그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본질을 통찰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사유경과나 기쁨역시 반성적-대상적 체험으로 변양됨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동시에 반성적-대상적 체험에로의 변양 속에서 반성의 시선의 강한 빛 때문에 사태자체가 왜곡되어 드러나거나 은폐될 수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반성적 의식작용이 지닌 명증성의 정도문제 이전에 사태자체-특히 자유로움이나 기쁨 등과 같은 기분현상-가 스스로를 자신에 즉해서 내보이는 방식이 반성적 인식에 부적합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문제이다. 더구나 기분은 단순히 인식되어야 할 대상이기 전에 넓은 의미에서 인식기능을 지니고 있다면 반성과 기분의 관계는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의 관계로 국한시킬 수 없다. 우리는 이제 Heidegger의 실존론적 분석론과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의 체계내에서 기분과 반성이 갖는 방법적 측면을 비교 분석해보면서 기분과 반성의 기저연관을 규명해볼 필요가 있다.
제 3 장. Heidegger의 실존론적 분석론에서 기분의 방법적 의의와 그 한계
1절. 실존론적 분석론에서 기분의 반성에 대한 방법적 우위
Heidegger가 실존론적 분석론에서 표방하는 현상학적 방법과 Husserl의 현상학과의 어떤 모종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하는데 머무는 논의에는 한계가 있다. 그 이유는 첫 번째, Heidegger의 현상학적 방법에 대한 논의는 Husserl의 선험적 환원체계에서 단초가 되는 '자연적 세계' 개념의 해명을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이라는 다른 혹은 어쩌면 더욱 근본적인 체계를 통해 시도하려는 가운데 요청되는 방법으로서 이미 실존론적 분석론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며, 두 번째로 나아가서는 이 실존론적 분석론은 또다른 동기, 궁극적으로는 존재물음이라는, Husserl 현상학에서는 은폐된 사태에로의 육박을 꾀하는 시도에서 Husserl 뿐만 아니라 Aristoteles, St. Augustinus, Kierkegaard, Nietzsche에서도 중요한 방법적, 사태적 단서들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실존론적 분석론의 수행에서 현상학적 방법의 이해에 중점을 두면서 보완적으로 Husserl 현상학과의 비교를 수행하고자 한다. 곧 우리의 관심은 실존론적 분석론의 체계내에서 기분의 반성에 대한 방법적 우위입증이다.
Heidegger는 『현상학의 근본문제』에서 자신의 현상학적 방법을 Husserl의 현상학의 용어와 비교를 한다. 그런데 Heidegger는 '이로써 사태상의 차이가 아니라 순전히 낱말 발음상으로만(dem Wortlaut, nicht aber der Sach nach) Husserl 현상학의 핵심용어와 연결'(GA24, S.29)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비교는 단순히 낱말 발음상의 연결을 넘어 실존론적 분석론과 선험적 현상학의 체계상의 상응성까지도 고려하고 있다. 이는 곧 양체계의 단초인 바 '자연적 세계'-Husserl의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과 Heidegger의 평균적 일상성-의 동일성까지 함축한다. 그러나 동일한 단초에서 시작함에도 불구하고 Husserl은 "현상학적 시야를 사물들과 인격들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자연적 태도에서부터 선험적 의식삶과 그것의 노에시스-노에마적 체험들-이 안에서 객체들은 구성된다-에로 환원하는"(GA24, 같은쪽) 절차를 밟는 반면 Heidegger는 "현상학적 시야를 그때 그때 소박하게 파악되는 존재자에서부터 존재자의 존재가 부각되어 주제화될 수 있는 방향으로 향한다."(GA24, 같은쪽) 이제 더 나아가서 Husserl은 그렇게 환원을 통해 도달한 선험적 주관성으로부터 존재일반의 의미를 구성하는 반면, Heidegger는 존재자에서 존재자의 존재에로 소극적 시선전환을 통해 제시되는 존재를 '그때마다 자유로운 기투'를 통해 적극적으로 시야안으로 끌어들임으로서 현상학적 구성을 요구한다.(GA24, 같은쪽)
이와같이 환원과 구성의 과정에서 Husserl의 경우는 무관심한 방관자의 이론적이고 관조적인 통찰로서 반성작용들이 철두철미 수행되는 반면, Heidegger의 경우는 존재자에서 존재에로의 시선전환은 바로 기분을 통해 가능하며 나아가 현존재 자신이 그리에로 던져진 존재 곧 존재가능을 가능성으로서 감내하면서 받아들임은 이해의 기투를 통해 가능하다. 더욱이 Heidegger에서 이런 기분적 이해는 일종의 '실존자체의 수행'-<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의 표현을 빌면 '현존재 안에서 일어나는 근본사건(Grundgeschen)으로서 형이상학'-에 다름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하이데거의 말은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실존론적 분석론은 그것대로 궁극적으로는 실존적 내지 존재적으로 뿌리박고 있다.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물음 자체가 그때 그때 실존하는 현존재의 존재가능성으로서 실존적으로 파악될 때만, 비로소 실존의 실존성을 개시할 가능성도 그리고 그와함께 충분히 근거지워진 존재론적 물음일반을 착수할 가능성이 성립하게 된다. "(SZ, S.S.13-14)
기분적 이해라는 실존자체의 수행으로서 실존론적 분석론은 결코 무관심한 방관자의 입장일 수 없다. 왜냐하면 무관심한 방관자에게는 자기 자신에게 마저 관심을 버린채 단지 의식속에 드러나난 것을 보고 기술할 뿐이기 때문이다. 반면 실존론적 분석론을 수행하는 자는 그런 수행자체를 현존재의 존재가능성으로 파악함으로써 스스로 기분에 젖어 이해된 자신의 존재가능을 뒤따르며(nachgehen) 부단히 분절화하고 해석하는 작업을 반복하는 것이다. 요컨데 무관심의 방관자처럼 전제로부터 자유로운 통찰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전제에로 파고들어가는 작업이다.
그러나 Heidegger와 Husserl의 이와같은 차이를 낳게한 더욱 근본적인 사태상의 근거는 Husserl의 현상학에서는 망각된 존재와 존재자의 존재론적 차이를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분석론은 그 차이를 망각으로서 상기하고 증시하고자 하는 것에 있다. Husserl의 현상학에서 환원과 구성을 통해 반성이 획득하는 것은 선험적 의식삶에서 선험적 주관성의 구성작용에 의해서 구성된 바로서 대상이다. Landgrebe는 바로 이와같은 측면에서 Husserl에게 존재란 의식 상관자로서 대상임(Gegenstand-sein)임을 지적하고 있다.(PM, S.99) 반면에 Heidegger의 실존론적 분석론에서 기분을 통해 드러나고 개시되는 바는 "현존재 자신이 있고 있어야 한다"는 현실성(Faktizität)이며 기분적 이해를 통해 받아들여지는 것은 현실적 실존(faktische Existenz)인 것이다. 여기에서는 반성되어야할 단초로서 대상이나 존재자는 없다. 더구나 체험속에서 목도되는 어떤 심리적 상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세계-내-존재의 현실적 실존에서 현존재 그리고 그것의 등근원적 계기인 세계는 존재자도 존재자의 총체도 아니다. 다시말해 '현존재가 세계내에 이미 던져져 있음'은 주관적 다양성들 속에서 통일체로서 구성된 대상의 도식에 의거해서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
2절. 기분과 반성의 기저연관
지금까지 논의를 통해 실존론적 분석론을 수해하는데 있어서 근본적으로 반성은 존재자의 인식에만 머무르는 반면 기분은 존재론적 차이를 경험케 해준다는 점에서 기분이 반성에 대해 차지하는 방법상 절대적 우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반성이라는 인식양상은 기분에 의해 기저지워져 있음을 밝혀야 겠다. 왜냐하면 "인식작용은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한 존재양상이어서, 그 존재적 기초를 이 존재틀 속에 가지고"(SZ, S.61) 있기 때문이다.
Heidegger는 "심정성은 둘러보고, 되돌아 보면서 비로서 자기를 포착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지 않고 오히려 >현<이 이 심정성 속에서 이미 개시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내재적 반성이 >체험들<을 목도할 수 있다"(vorfindlich)(SZ, S.136)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기저연관은 그것들이 드러내는 사태상의 기저연관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있다. 다시말해 기분을 통해 드러내는 세계-내-존재 전체에 기초해서 반성이 드러내는 바 '에로 방향지워져 있음'(Sichrichten auf)(SZ, S.137)-곧 지향성-도 가능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반성을 포함한 인식작용 자체는 현존재의 존재를 본질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우선 대개는 이미 세계 곁에 있음'에 선행적으로 근거해 있기 때문에 "인식이 전재자의 관찰적 규정(betrachtendes Bestimmen des Vorhandenen)으로서 가능하기 위해서는 세계와의 배려적 교섭에 대한 결행(Defizienz)이 선행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SZ, S.61) 여기서 말하는 결행이란 모든 종사와 이용의 중단으로서 '단지 곁에 체류할 뿐'(Nur-noch-verweilen bei...)(SZ, 같은쪽)이라는 양상으로 수행되는 인지작용을 의미한다. 관조적이고 이론적 반성은 이와같은 양상속에서 가능한데, 여기서도 단순히 무기분 속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유자적한 기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SZ, S.138) 곧 반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두철미-반성의 단초마련 및 결행 그리고 반성과정의 수행작용에 이르기까지-기분의 압도하에 수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Heidegger의 실존론적 분석론은 기분에 의해서만 존재론적으로 방법상으로 인도되어 수행되는가? 이미 우리는 기분은 현-존재의 한 가지 근원적 양식으로서 이해와 말과 등근원적임을 살펴보았다. 기분적 이해는 선술어적, 선이론적 앎이다. 따라서 기분적 이해는 실존전체를 막연하고 불투명한 양상 속에서 보여줄 뿐 실제로 그 양상이 참된 양상인지 그릇된 양상인지는 판별하고 있지 않다. 이와관련해서 Heidegger는 "본래적 이해와 비본래적 이해는 다같이 진정할 수도(echt) 있고 진정하지 않을 수(unecht)도 있다."(SZ, S.146)라고 말하면서 본래성과 비본래성 모든 영역에서 다시금 최종적으로 그 진정한지 진정하지 못한지를 판별해야할 필요성에 직면한다. 다시 그와같은 판별기능을 기분에 맡길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실존론적 분석론은 현존재의 그때 그때의 실존적 관심사가 아니라, 실존의 존재론적 구조에 대한 올바른 통찰을 목표로 하는 이론적 작업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같은 존재론적 작업역시 그것대로 궁극적으로는 연구자 자신의 실존적 이해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도대체가 상호의사소통의 충분조건으로서 보편타당성은 기분을 기초로 하는 바 다름아닌 반성적 자기의식이다. 요컨데 옳고 그름의 판별기능은 바로 반성적 자기의식에 의해서 수행되어야 한다. 기분은 반성을 사태상으로, 방법상으로 정초하지만 반면에 반성은 기분을 보완, 비판하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다시말해 발생적 차원에서는 기분이 반성을 정초하지만, 타당성 차원에서는 반성이 기분을 정초함을 의미한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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