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의미와 무관한 명제(nonsensical proposition)’와 칸트의 분석판단*
박 우 현**순천향대학교
Ⅰ. 판단의 상충 ― 문제제기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후기 저작 ?탐구?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이 물체는 연장을 갖는다’에 대한 대답은 ‘의미와 무관하다(nonsense)’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물론’이라고 말하려 하는가?”(?탐구?, 252절). 이 질문은 철학을 전공한 사람들에게는 혼란을 야기하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주지하다시피, “물체는 연장을 갖는다”라는 명제는 칸트가 ‘분석판단’의 예로써 제시한 저 유명한 명제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질문에 대해 즉각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혼란스럽다. 비트겐슈타인이 그 논거 내지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했다면 우리의 혼란은 덜 했을 것이고 논점도 더욱 명료했을 것이다. 논거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논거를 분명하게 밝히면서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도 이 논의는 어렵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논의가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까닭은 서로 상충되는 듯한 주장을 하는 철학자들이 세계적인 철학자라는 사실과, 상당히 중요한 문장을 두고 각각 다르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와 관련된 논의를 확실하게 전개하기 위해서라도 두 철학자가 주장하는 명제들 사이의 상충 부분이 무엇인지를 명료히 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서로 상충된다면 두 철학자 가운데 어떤 철학자의 주장이 옳은가에 대해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 우리는 두 철학자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다.
Ⅱ. 비트겐슈타인의 명제의 구분
우리가 이 문제에 관해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이다. 하나는 특정한 철학자의 입장을 선택하여 그 입장에서 다른 철학자의 주장과 논거를 생각하면서 접근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둘의 입장을 동등하게 고려하면서 서로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비교하면서 접근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마지막 방법은 명제의 본성에 대한 연구 당사자의 견해를 근거로 접근하는 방법이다. 필자는 이 방법들 중에서 첫 번째 방법, 그 가운데서도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 서서 칸트의 분석판단을 생각하는 방법을 택할 것이다. 칸트가 제시한 문장과 거의 비슷한 문장을 인용부호를 사용해 가면서 비트겐슈타인이 언급한 것으로 보아, 아마 비트겐슈타인도 칸트의 그 명제를 사전에 알았다고 생각할 수 있고, 만약 그러했다면 그 영향력이 막강한 철학자의 주장에 대해 자기 나름의 근거를 갖고 비판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주어-술어의 형태로 된 명제를 셋으로 구분한다. 참 또는 거짓이 될 수 있는 유의미한 명제가 그 중 하나이고, 표현하는 내용이 없는 의미 없는 명제가 또 다른 하나이며, 참도 될 수 없고 거짓도 될 수 없는 의미와 무관한 명제가 마지막 하나이다.
“철수는 공부하고 있다.”와 같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명제들은 대부분 의미를 갖는(make sense) 명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한 상황에서 그러한 주장을 하게 되면 그 문장은 참 또는 거짓이 될 수 있다.
반면에 ‘돈은 돈이다.’와 같은 동어반복(tautology)과 ‘돈은 돈이 아니다.’와 같은 자기모순(self-cotradiction)을 대하면 우리는 그 기호만으로도 그 명제의 참․거짓을 알 수 있다. 동어반복은 그 자체로 참이고, 자기모순은 그것만으로도 거짓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명제를 의미가 없는(senseless) 명제라고 말한다. 아무것도 보여주는 바가 없기 때문이며, 참․거짓을 논할 필요도 없이 그 자체로 참 거짓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해야겠지만 여기서는, 좀더 설명하기 힘든 명제인 ‘의미와 무관한’ 명제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자. 이 명제가 칸트가 말하는 분석판단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의미와 무관한 명제’는 참도 될 수 없고 거짓도 될 수 없는 명제들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선(善)은 미(美)와 다소 동일하다’(?논고?, 4.003)와 같은 문장을 그러한 명제의 예로서 들고 있다. 이와 같은 명제를 비트겐슈타인은 의미와 무관한(nonsensical) 명제라고 주장한다.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은 명제에 대해서는 참․거짓을 논할 수도 없으며, 참․거짓을 확인할 수도 없다.
우리는 종종 의미와 무관한(nonsensical) 명제를 “가가가 나나다”와 같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혹은 횡설수설(gibberish)이라고 이해한다. 그리하여 의미와 무관한 것을 ‘헛소리’나 ‘비의미’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이 말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건 문제는 의미와 무관한(nonsensical) 명제가 어떤 명제인가 하는 데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의미와 무관하다’라는 단어는 논리의 바깥에 있는 것, 즉 세계 밖에 있는 것을 표현하려고 할 때, 바로 그 표현을 일컫는 용어이다. 우리는 논리 외부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의 세계 밖에 있는 것에 대해 말한다면, 우리는 그 말에 대해서 참 또는 거짓을 주장할 수가 없다. 세계 바깥에 있는 것에 관한 말은 참 또는 거짓일 가능성조차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말들에 대해서 우리는 ‘의미와 무관하다’라는 용어를 적용한다.
물론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했다고 해서 문제가 완전히 풀리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그런 것이 의미와 무관한 것이라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이 우리를 계속 따라 다니기 때문이며, 구체적인 사례와 그것에 대한 설득력 있는 명쾌한 설명이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의미와 무관한 명제들에 대한 설명은 일견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의미와 무관한 것’을 표현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또는 더욱 쉽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하기만 한다면 설명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다시 언급하겠지만 표현의 한계는 동어반복(tautology)과 자기모순(self-contradiction)처럼 의미 없는(senseless) 명제들이 결정한다.)
혹자는 “실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이것은 그 자체를 보여 준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논고?, 6.522)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근거로 하여 “세계 바깥에 있건 세계 안에 있건간에,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까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사는 세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 밖에 있는 것은 나의 생각의 한계를 넘어 존재한다는 것인데,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다.
‘어떤 것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 아니다.(“헤라클레스는 제우스의 아들이다”라는 명제는 의미가 없지도 않고 의미와 무관하지도 않다. 만일 이 명제가 의미와 무관하다면 공상 과학 소설이나 옛날 이야기들은 전부 의미와 무관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 표현이 우리의 언어의 한계 ― 그러므로 생각의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 표현이 우리의 언어의 한계 또는 생각의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표현을 세계의 한계 바깥에 있는 것을 표현하려는 명제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보자.
비트겐슈타인은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말할 수 없다”(?논고?, 4.1212)라고 단언했다. 예를 들어, 책상 위에 100원 짜리 동전이 있다고 해 보자.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동전 위에 있는 ‘100’이라는 숫자나 이순신 장군의 그림을 보여줄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똑같이 적용한다면, 우리는 그런 것들에 대해 말할 수 없는가? 이런 예가 적절하지 않다면, “내가 가진 동전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동전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인가?”라는 예는 어떠한가? 이런 것들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상식 수준에서도 의당 참․거짓을 논할 수 있는 문장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위의 명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강조한 부분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동전이 크기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동전은 크기를 갖는다”라고 말할 수 없는가? 이런 명제를 말할 수 없다고 하는 이유는 그 문장이 거짓말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 말이 논리적으로 세계의 한계 밖에 있는 것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의도하는 바는 이런 경우이다. 모두가 비슷한 말인 것 같은데 왜 마지막 예의 경우에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인가?
우리가 이 주장을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비트겐슈타인의 ‘의미와 무관한 명제’들에 대한 견해를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칸트의 분석판단에 대해서도 좀더 분명하게 언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Ⅲ. 내부 성질을 표현한 명제와 칸트의 분석판단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성질이 그 대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면 그 성질은 내부 성질이다”(?논고?, 4.123)라고 주장하면서, 내부 성질(internal property or internal quality)과 외부 성질(external property or external quality)을 구분한다. 이런 표현은 그때까지의 철학자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에 대해 어떤 철학자는 “內部性質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 對象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성질이 內部性質이다”라고 비판할 수 있다. 이 말, 즉 ‘그 대상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는 성질이 내부 성질’이라는 말은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서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 그 대상이 주어지면 그런 성질 역시 동시에(필연적으로) 주어질 수밖에 없다는 그 이유 ― 때문에, 그 대상이 그런 성질을 갖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없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내부 성질과 외부 성질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다시 100원 짜리 동전의 예로 돌아가 보자. “이 동전 위에 ‘100’이라는 숫자가 쓰여져 있다.”라는 문장은 동전의 외부 성질을 표현한다. 이런 경우 그 말을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문장에 대해 참․거짓을 논할 수 있다. 반면에 “이 동전은 크기를 가진다”는 문장은 동전의 내부 성질을 표현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 동전이 크기를 가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문장에 대해 참․거짓을 논할 수 없다. 참도 아니고 거짓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와 같은 구분은 마치 록크(J. Locke)의 제1성질과 제2성질의 구분과 비슷하다는 지적도 가능할 것이다. 이런 지적은 적절한 지적이다. 왜냐하면 록크에 의하면, 대상 고유의 성질 ― 예컨대, 연장(延長), 크기, 모양, 등등 대상만이 가지는 성질 ― 은 제1성질이고, 대상과 주관의 관계에서 도출되는 성질 ― 가령, 색깔, 맛, 냄새, 등등 ― 은 제2성질인바, 비트겐슈타인의 내부 성질과 외부성질 역시 바로 그런 식의 구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에게 따르면 록크가 말하는 제1성질을 그 대상들이 갖는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한 차이점이다.
외부성질을 표현하건 내부성질을 표현하건, 똑같은 문장 형식으로 표현한 것 같은데, 왜 전자는 말할 수 있고 후자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인가? 그 이유는 후자의 문장에서 “크기”라는 성질은 동전의 논리적 성질(logical property)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크기없는 동전”은 있을 수가 없다는 뜻이다. 명제는 항상 부정될 수 있어야 하며, 무엇인가를 말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 동전은 크기를 갖는다”라는 명제는 부정될 가능성도 없고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명제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 문장은 단순히 ‘이 동전의 크기’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명제는 부정될 수 있는 동사가 포함되어야 한다. 술어 없는 명제에 대해 우리는 참․거짓을 주장할 수 없다. 명제는 분명하고 분절적(articulate)이어야 한다(?논고?, 3.141, 3.251, 4.032 참조). 우리는 단순한 단어들 또는 단어들의 집합에 대해서는 부정할(또는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이것과 비슷한 예를 ?탐구?에서는 “모든 막대는 길이를 갖는다”는 표현을 들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문법적인 명제에 덧붙혀진 그림은 “막대의 길이”라고 불리위지는 것만을 보여줄 수 있다고 하면서 “무엇이 그 반대의 그림일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탐구?, 251절). 우리는 막대가 길이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이것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에겐 더 이상의 설명이 불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길이’는 ‘막대’의 내부 성질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막대는 길이를 갖는다”라고 말하지 않고 “이 막대의 길이는...”이라고 말해야 한다. 어떻게 “이 막대는 길이를 갖는다”라는 표현이 부정될 수 있겠는가?
칸트는 이런 명제의 부정은 모순율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분석판단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이 명제는 절대로 부정될 수 없다. 따라서 이런 명제는 명제의 형식만 가지고 있을 뿐 판단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막대의 길이”라는 표현이 부정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막대는 길이를 갖는다”라는 문장도 부정될 수 없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질문으로써 대신한다. 여기에 저 유명한 명제가 등장한다. “‘이 물체는 연장을 갖는다’에 대한 대답은 ‘의미와 무관하다(nonsense)’는 것이다. 그런데 왜 ‘물론’이라고 말하려고 하는가?” (?탐구?, 252절).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물체는 연장을 갖는다”라는 명제는 칸트가 ‘분석판단’의 예로써 제시한 명제이다. 우리는 ‘연장 또는 부피를 가지고 있지 않은 물체’를 상상할 수 없다. ‘물체’라는 형식적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이 물체는 부피를 갖는다”라고 말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이 물체는 부피를 갖는다”라는 명제는 “이 물체의 부피는 ……”이라고 써야 할 것을 명제처럼 만들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위의 “이 막대는 길이를 갖는다”라는 명제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칸트가 ‘종합판단’의 예로 드는 “물체는 무게를 갖는다”라는 명제도 마찬가지이다. “이 물체는 무겁다” 또는 “이 물체의 무게는 어떠어떠하다.”라고 써야 한다는 말이다.
칸트의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의 구분은 ‘주어의 개념 속에 술어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즉 어떤 판단에 있어서 ‘주어의 개념 속에 술어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면, 그 판단은 ‘분석판단’이고, ‘술어의 개념이 주어의 개념 바깥에 있는 판단’이라면 그 판단은 ‘종합판단’이다. 필자는 그와 같은 칸트의 구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필자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서 볼 때, 설사 그와 같은 구분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물체는 연장을 갖는다”라는 명제가 “이 물체는 연장을 갖는다”라는 명제를 함의한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판단을 할 수 없다는 것만을 지적할 뿐이다.
우리는 이따금 누군가를 칭찬할 때, 다음과 같이 칭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신은 정말로 고운 피부를 가지고 있군요.” 그러나 고운 피부를 가지긴 누가 또는 무엇이 가지고 있는가? 내가 화장품을 가지고 있듯이, 고운 피부도 가지고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어디에(또는 어느 곳에) 고운 피부를 가지고 있을 수가 있겠는가? 당신의 피부가 고울 뿐 그 누구도 (고운) 피부를 가질 수가 없다.(이와 같은 말은 피부가 곱다는 말을 멋지게 표현한 문장일 뿐이다.)
만약 위의 명제들이 일상적인 명제들이라면, 우리는 그 명제들을 “당신의 피부가 정말로 곱군요”라는 의미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 물체는 부피를 가지고 있다”거나 “이 물체는 무게를 가지고 있다”라는 문장을 사용하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가 말이 되게(make sense) 사용하려면, ‘이 물체의 부피는 어떠어떠하다’ 또는 ‘이 물체의 무게는 어떠어떠하다’라고 표현하게 될 것이다.
칸트의 “물체는 연장을 갖는다”라는 분석판단(해명판단)은 “나는 공책을 가지고 있다”라는 종합판단(확장판단)과는 전혀 다르다. 나는 공책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물체가 연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는가? 이 물체는 연장을 갖지 않을 수도 없고, 가지고 있을 수도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물체는 부피를 갖는다”에 대해 ‘물론’이라고 말하려고 하는가? 우리가 그런 판단을 필연적으로 참인 판단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물체가 부피를 가지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그것의 반대를 상상할 수도 없다. 이러한 표현이 의미와 무관한 이유를 무어(G.E. Moore)는 문법 속에 내재된 것을 풀어쓰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비트겐슈타인은 의미와 무관한 것(nonsense)인가의 기준을 “상상불가능성 (unimaginability)”이라고 주장했다. 즉 “이 동전은 크기를 갖는다”는 것은 보여줄 수만 있는 것이지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Ⅳ. 내부관계와 말할 수 없는 것
위와 같은 설명은 내부 관계(internal relation)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가령, “명제들의 구조들은 서로서로 내부 관계를 나타낸다”(?논고?, 5.2). 비트겐슈타인은 ?논고?, 5.13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한 명제의 참이 다른 명제들의 참으로부터 도출된다면, 이것은 그 명제들의 형식이 서로에 대해 나타내는 관계들에 의해서 표현된다. 우리는 그 명제들이 이러한 관계들을 나타내도록 하기 위해 명제 안에서 그것들을 서로서로 관련시킬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이러한 관계는 내부 관계이고 내부 관계는 그 명제들이 존재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 의해 즉시 존재한다.
이와 같은 주장을 삼단논법으로써 설명해 보자. 삼단논법에서의 결론은 전제들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이 경우 전제들이 참이기만 하면 결론도 참이 된다. 이때 결론이나 전제들은 ‘같은 명제들’이다. 그 명제들이 같은 명제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억지로 보여주려고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 전제와 결론에 해당하는 명제들이 존재하는 그 순간에 그들간의 관계, 즉 내부관계(전부 똑같은 명제라는 사실)가 존재하게 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만약 내가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려면 명제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나는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나는 명제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라고 주장했을 때, 하나의 명제는 다른 명제들로부터 추론된 것이다. 이렇게 어떤 명제들로부터 새로운 명제를 추론할 수 있는 근거(굳이 철학적 용어로 말하면 존재론적 근거)는 그 명제들 사이에 존재하는 일정한 관계 즉 내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그와 같은 명제들이 전부 명제라는 점에서 같다.) 그런데 그 관계는 명제들이 존재하는 그 순간에 함께 존재한다.
위의 예를 칸트식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려고 한다’는 명제이다.”라는 판단을 보자. 이 판단은 분석판단이다. 종합판단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어 개념(‘나는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려고 한다’) 속에 술어 개념(‘명제’)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명제들은 우리가 말하는 그 순간에(또는 그와 동시에) 그것들 스스로가 우리에게 ‘명제임’을 보여 준다. 명제들은 그것들이 명제인 한, 서로서로 명제라는 의미에서의 내부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명제들은 어떤 점에서는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명제와 그 명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도 서로서로 내부 관계를 나타낸다. 그 둘은 같은 것이 아닐 수가 없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논고?, 4.014에서 설명했던 좀더 쉬운 예를 들어보자.
전축판, 그 악상, 그 악보, 그 선율, 이 모든 것은 서로서로, 언어와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그림의 내부 관계(필자 강조)를 나타낸다. 그들 모두에 있어 논리적인 구조는 공통된다.(이것은 마치 소설 속의 두 젊은이, 그들의 말 두필과 그들의 백합들과 같이. 어떤 점에서 그것들은 하나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이유로 해서 그것들이 내부 관계를 나타낸다고 했을까? 그것은 바로 그것들 사이에 내재해 있는 관계를 우리는 구분할 수 없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는 어떤 음악의 악상과 그 악보의 관계가 똑같은 관계라는 것을 안다. 같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그것들의 ‘내부 관계’에 대해서 말할 수가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그것들은 서로서로 식별할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만일 구분된다면, 그때의 구분 근거는 ‘내부 관계’가 아니라 우리가 보통의 경우에 식별하는 근거로 사용하는(예컨대, ‘그 전축판을 가져 와라’와 ‘그 악보를 가져 와라’를 구분하는 경우에 그 근거가 되는) ‘외부관계’일 것이다.
우리는 “음악가가 악보로부터 교향곡을 읽을 수 있는 일반 규칙이 존재하고, 또한 음악가는 전축판 위의 홈(groove, Linie)으로부터 다시 그 교향곡을 재구성할 수 있고 이것으로부터 ― 첫번째 규칙을 수단으로 해서 ― 다시 그 악보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 안에, 처음 보기에는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던 이와 같은 것들 사이에 내적 유사성(필자 강조)이 놓여 있음”(?논고?, 4.0141)을 안다. 이 경우의 ‘내적 유사성’도 우리는 위와 똑같은 ‘내부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복합체에 관한 명제도 그 구성요소에 관한 명제에 대해 내부 관계를 나타낸다(?논고?, 3.24). 만일 그 명제와 그 구성요소에 관한 명제가 내부관계를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다른 명제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두 젊은이’에 대해 부가된 다른 기술이 없다면(예컨대, 한 젊은이는 안경을 썼고 또 한 젊은이는 안경을 쓰지 않았다와 같은 기술이 없다면), 그 젊은이들은 어떤 점에서는 같은 젊은이이다. 그들은 식별될 수 없다는 점에서 같은 젊은이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서로 내부 관계를 나타낸다. 그들은 같은 젊은이가 아닐 가능성이 전혀 없다. 젊은이들이 존재할 때, 그와 동시에 내부 관계가 존재한다.
또한 만약 그것들이 내부 관계를 나타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에 대해 연산(operation)을 적용시킬 수 없다. 예컨대, “그 반의 이 학생, 저 학생, 그 학생, 등등 a부터 z까지의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와 같은 사실을 표현할 때, 우리는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라는 명제를 a부터 z까지 연속 적용시켜 “그 반의 모든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모든 학생’에 해당되는 학생들은 서로서로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내부 관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존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은 서로서로 내부관계를 띨 수밖에 없다.
“두 젊은이가 각자 말을 탄다”라는 명제가 참이려면, “한 젊은이도 말을 타고 또 다른 젊은이도 말을 탄다”는 명제가 참이어야 하는데, 이때 두 젊은이들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도 있을 수 없다.
지금까지 필자는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하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내부 성질과 내부 관계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와 같은 설명은 형식적 속성(formal property)이나 형식 개념(formal concept)에 대해서도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하게 적용된다.
“이 동전은 크기를 갖는다”라는 표현과 “1은 수이다”라는 표현은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크기”는 성질(property or quality)이며, “수”는 개념(concept)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고유 개념(proper concept, 예를 들면 “태양은 붉다”에서 “붉은” 또는 “붉은 것”)은 대상의 기술이지만, 형식 개념은 “1”, “2” 등등의 숫자가 쓰여지면 그와 동시에 “수”라는 형식 개념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고유 개념과 다르다. 이와 같은 형식 개념에 대해서 비트겐슈타인은 “대상 자체의 기호가 형식 개념을 보여준다”(?논고?, 4.126)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1’, ‘2’, ‘태양’ 등등이라는 기호가 ‘수’, ‘대상’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1은 수이다”, “태양은 대상이다”, “p는 명제이다”(?논고?, 5.5351) 등등이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1이라는 수”, “태양이라는 대상”, “p라는 명제” 혹은 단순히 “1”, “태양”, “p” 등등이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1”이 수가 아님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며, “태양”이 대상이 아니라는 것도 “p”가 명제가 아니라는 것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명제는 거짓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참도 될 수 없다.
필자가 의미없는 명제와 의미와 무관한 명제에 관해 시도했던 설명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을 할 수 있다. 참․거짓을 논할 수 없는 명제를 의미와 무관하다고 한다면 “가가가 나나다”와 같이 말도 안되는 소리는 의미와 무관한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은 반론은 마운스와 같은 사람들이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의미와 무관한 것을 횡설수설(gibberish)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며 의미와 무관한 것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단순한 글자들의 나열이나 단어들의 조합은 언어가 아니다. “명제는 글자들의 혼합이 아니다”(?논고?, 3.141). 그러므로 “단어들의 조합은 언어에서 배제된다”(?탐구?, 500절) 그러한 것들은 의미가 없다(senseless) (?탐구?, 500절). 왜냐하면, 그것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Ⅳ. 언어의 한계와 표현의 한계
비트겐슈타인은 “실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그 자체를 보여 준다”(?논고?, 6.522). 그러나 사람들은 보여 줄 수만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충동이나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경향성을 비판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와 같은 것을 고귀한 인간 정신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는 우리들이 그와 같은 표현에 대해 참이라고 긍정할 수도 없고 거짓이라고 부정할 수도 없다는 사실만을 지적했을 뿐이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참 또는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런 표현이 우리에게 이해가 되어야 하는데, 보여 줄 수만 있는 것에 대한 표현은 우리에게 이해될 수 없고, 이해되었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런 표현 안에 있는 이름들에 대해 어떠한 뜻(meaning)도 부여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올바른 방법 중의 하나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철학의 올바른 방법은 …… 누군가가 형이상학적인 것을 말하고자 할 때는, 언제나, 그가 그의 명제들 안의 어떤 기호에도 뜻(meaning)을 부여하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비트겐슈타인이 해명하고자 하는 논리적 명료화는 ‘언어의 한계’ 바깥에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한계’ 안에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어반복과 자기모순이 언어의 한계를 설정한다. ‘물체는 물체이다’라는 명제는 동어반복이다. 그러나 ‘물체는 연장을 갖는다’라는 명제는 동어반복 이상으로 명백하게 참인 명제처럼 보인다. 이것은 크기가 없는 원의 중심점 안에 다른 무엇인가를 그려 넣은 것과 같다. 정의상, 점은 위치만 있을 뿐 크기는 없다. 우리는 그 속에 어떤 것도 그릴 수 없다. 그리고 ‘선(善)은 선(善)이 아니다’라는 명제는 자기모순이다. 그러나 ‘선(善)은 미(美)와 다소 다르다’라는 명제는 원의 한계 바같에 있는 것을 표현하면서 원의 내부를 표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리하여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 모순은 명제 밖에서 사라지며 동어반복은 모든 명제들 안에서 사라진다. 그러므로 자기 모순은 명제들의 바깥 한계이며 동어반복은 명제들의 실체없는 중심점이다.(?논고?, 5.143).
그는 이것들을 의미(sense)와 관련시켜 “사태의 확실성, 가능성, 불가능성은 명제로써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표현이 동어반복, 의미 명제, 자기 모순이라는 사실에 의해서 표현된다”(?논고?, 5.525, 4.464 참조)라고 주장한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언어 ― 명제 ― 의 한계를 그을 수 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대부분 의미를 가진 명제이며 이런 명제들의 극단의 경우로서 한쪽은 동어반복이고 다른 한쪽은 자기 모순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언어의 한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의미(sense)는 없다. 즉 의미없는(senseless, sinnlos) 명제들이다.
이제 우리는 왜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논고?, 서문)라고 했는지를 알 수 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언어의 한계 내에 있기 때문에 분명하게 말할 수 있고, 말하는 바가 없는 것은 언어의 한계를 설정하기 때문에 그 기호만으로는 우리에게 말해 주는 바가 없다는 것이며, 말할 수 없는 것은 언어의 한계 밖에 있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자기가 설명한 문장들도 설명을 마치고 나면 그것 역시 의미와 무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은 상당 부분 필자의 설명에도 적용된다. 왜냐하면 필자 역시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할 때 언어의 한계라는 경계선을 들락달락했기 때문이다.)
Ⅴ. 결 론
“우리들의 인식은 모두 경험에서 비롯된다.” 이 문장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첫 문장이다. 선험적 인식론자인 칸트도 인식에 있어서 경험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칸트는 경험과 무관한 문장들에 대해 생각할 필요성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 결과 칸트는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의 구분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내놓게 되었을 것이다. 이 구분은 후세에도 많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콰인은 경험주의자들도 칸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리하여 콰인은 “경험주의의 두 가지 도그마”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현대 경험주의는 두 개의 독단에 의해 많은 부분이 결정되어 왔다. 그 중의 하나는 분석적 진리와 종합적 진리 ― 즉 사실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의미에 근거하는 진리와 사실에 근거하는 진리 ― 사이에는 몇 가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믿음이다.
콰인이 칸트의 구분을 비판할 때 사용하는 기본 논거는 ‘포함’이라는 개념의 모호성과 관련이 있다. ‘포함’이라는 단어가 은유하는 것을 입증하려면 결국 경험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분석판단의 진리를 입증하기 위한 여러 방안 ― 예컨대, ‘정의’, ‘교환 가능성’, ‘의미론적 규칙’ 등을 수단으로 한 방안 등 ― 을 다각도로 검토하여 분석판단의 진리성은 보장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세운다. 이러한 콰인의 논의를 단번에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만큼 콰인의 논의가 치밀하고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과 콰인은 칸트의 분석판단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과 콰인은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의 구분이 불확실하다고 보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그러나 콰인은 분석판단을 일단은 의미가 있다고 인정하는 반면에, 비트겐슈타인은 칸트의 분석판단이 참․거짓을 논할 수 없는 ‘의미와 무관한 명제’라는 점에서 다르다. 칸트의 주장과 콰인의 주장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비교해서 논의해 보는 것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기회에 자세하게 해 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칸트의 분석판단과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마무리를 지을 필요가 있다.
필자가 이 논문에서 겨냥했던 목표는, 칸트의 분석판단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칸트가 주장하는 분석판단이 비트겐슈타인에게서는 왜 ‘의미와 무관한 명제’가 되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이 경우,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여기서의 ‘의미와 무관하다’라는 표현이 가치론적으로 ‘무가치하다’거나 윤리적으로 ‘부도덕하다’라는 의미가 아님을 확실하게 인지해야 한다. 자칫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표현은 단지 언어의 한계 바깥에 있는 것을 나타내려고 할 때 그 표현에 대한 지적일 뿐이다. 정신적인 가치와 관련된 표현이 아니다.
필자의 설명이 미진하다면 말할 것도 없고, 그 설명이 그럴 듯하게 진행되었다고 해도 칸트의 철학사적인 업적이 폄하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왜냐하면 칸트가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을 구분했던 목적은 선천적 종합판단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함으로써 구체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었고, 이 작업은 철학사적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논의했던 필자의 주장과 논거도 칸트의 업적 위에서 가능할 수 있었다. (콰인에 대한 논의는 자세하게 다루지 않았지만, 콰인은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그의 실용주의적 관점을 확고하게 만들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칸트의 철학사적 위상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사적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또는 논리를 탐구함으로써 그 결과를 근거로 세계의 본질을 알려고 노력했다는 철학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그들의 연구 결과가 상호 모순된다거나 어느 한쪽의 가치가 덜하다거나 하는 등의 논의를 하지 않았다. 필자는 또한 철학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 내지 방향에 있어서 이들 철학자의 견해 중에 누구의 견해가 맞느냐에 초점을 맞추지도 않았다. 필자는 다만 분석판단 또는 분석적 진리에 관한 그들의 견해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논의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얻는 결과는 명제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관점이 좀더 다양해질 수 있다는 것이며, 명제에 대한 견해가 철학사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한 번 더 부각시키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참 고 문 헌
임마뉴엘 칸트,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정명오 역 , 오늘의 책 1993.
W.V.O. 콰인,?논리적 관점에서?(FROM A LOGICAL POINT OF VIEW), 서광사 1993.
K. T. Fann,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황경식․이운형 공역, 서광사, 1989.
Gottlob Frege, “On sense and meaning” in Philosophical Writings of Gottlob Frege, Trans. Peter Geach and Max Black, Oxford, 1970.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 trans. G.E.M. Anscombe, Oxford: Basil Blackwell, 1978.
Ludwig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icus, trans. by C. K. Ogden and F. P. Ramsey, London: Routlege & Kegan Paul, 1981 and trans. by D. F. Pears and B. F. McGuinness, London: Routlege & Kegan Paul, 1961.
박우현, ?비트겐슈타인 TRACTATUS에 관한 연구?, 박사학위 논문, 1994.
박우현, “프레게와 비트겐슈타인의 의미(sense)와 뜻(meaning)”, 한민족철학자대회보, 1999.
강순전, “선험적 인식과 사변적 인식(1) ― 칸트와 헤겔의 모순율 해석”, 2000, 한국칸트학회 춘계 학술대회보.
[출처] 비트겐슈타인의 의미와 무관한 명제와 칸트의 분석판단(박우현)|작성자 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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