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의 파시즘
- 페터 한트케의 <소망 없는 불행 Wunschloses Unglück>에 나타난 기억과 형상화의 문제
정항균(서울대)
Ⅰ. 서론
독일인들의 의식 속에 잊혀지지 않는 사건으로 계속 남아 끊임없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유일한 테마가 있다면, 그것은 나치 과거일 것이다. 독일 통일 후에 대두된 구동독작가들의 도덕성 논란이 일시적인 논쟁으로 그쳤다면, 나치 과거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은 역사가 논쟁 Historikerstreit(1986), 골드하겐 Goldhagen 논쟁(1996), 발저-부비스 Walser-Bubis 논쟁(1998), 핑켈슈타인 Finkelstein 논쟁(2000)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독일문학을 중심으로 살펴보자면, 특히 1910년-1930년 사이에 태어난 나치 및 2차 세계대전을 체험한 세대들이 나치 과거의 청산과 극복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어왔다. 예를 들면 단테의 ?신곡 divina comedia?의 형식을 빌려 아우슈비츠를 지옥으로 묘사한 페터 바이스(1916년 생)의 ?수사 Die Ermittlung?(1965)나 나치독일에 대한 독일소시민의 책임문제를 다룬 귄터 그라스(1927년 생)의 ?양철북 Die Blechtrommel?(1959)을 들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최근에도 1920년대 후반에 태어난 여러 작가들이 자신들의 유년기를 회상하는 자전적 작품들을 출간하고 있다.
그러나 귄터 그라스, 마르틴 발저(1927년 생), 크리스타 볼프(1929년 생) 등 전쟁 체험 세대의 작가들과는 달리 40년대 이후 태어난 페터 한트케(1942년 생), 보토 슈트라우스(1944년 생) 등의 작가들은 나치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68운동 세대 작가로서 독일의 과거역사에 대해 이전 세대들과 전혀 다른 접근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슈트라우스는 나치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나치 과거를 바라보는 시각은 그것을 역사적으로 체험했던 사람의 시각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 슈트라우스는 나치의 생성배경과 원인에 대한 역사적 탐구나 나치시대 독일민족의 실제모습에 대한 정확한 서술보다는 나치라는 과거의 역사적 부담이 전후세대들에게 미친 영향에 더 관심을 갖는다. 본 논문에서 살펴보게 될 한트케의 ?소망 없는 불행?(1972)에서도 나치 시대에 대한 묘사가 상당부분 등장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한트케는 나치의 역사적 범죄와 만행을 고발하거나 나치의 등장과 급속한 세력 확장의 원인을 분석하지는 않고 있다. 나치시대라는 역사적 배경은 개성과 자아실현을 방해하거나 말살하는 억압적인 사회적 상황 중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다. 아니면 파시즘은 기껏해야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서술자의 어머니가 겪게 되는 숨막히는 고통스런 삶에 대한 비유로 사용될 뿐이다. 다시 말해 1960년대의 기록문학 및 참여문학이 1970년대의 신주관성의 문학으로 넘어가면서 나치시대가 지니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은 사라지고 나치는 단지 개인의 자유와 자아실현을 억압하는 초역사적 비유로서만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전후세대의 대표작가인 한트케의 ?소망 없는 불행?을 중심으로 평범한 한 여인의 일상 속에 나타나는 파시즘과 그것을 서술하려는 서술자의 시도 및 그 어려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전기 없는 삶으로부터의 탈출 시도: ‘일화’와 ‘상징’ 사이에서
이미 ?소망 없는 불행?에 관한 여러 연구문헌들에서 강조되었듯이, 이 작품은 서술자 ‘나’의 어머니가 살아온 삶이 시대적인 상황과 편견에 의해 얼마나 제약받아 왔으며 그것에 대한 저항이 어떤 결말로 끝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삶은 차별대우와 수치심의 강요에 시달려온 사춘기 소녀시절, 가정에 대한 의무와 과도한 가사로 짓눌린 결혼생활 그리고 그로 인한 말년의 질병과 죽음이라는 그 당시 여성들의 전형적인 삶의 궤적을 재현하고 있다. 이것은 그녀가 다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관습과 규범에 어느 정도 순응하고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위에서 언급한 사회적인 제약들을 무조건 따르지는 않고 그것에 저항하며 자신을 찾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다른 여성들과 차이가 있다.
어린 시절 학교 성적이 우수했던 어머니는 배움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무언가를 배움으로써 자신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욕망,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킴으로써 얻는 자아의 감정이 사춘기 소녀시절의 그녀에게는 아직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허리 위에 손을 당당하게 올려놓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찍은 그 당시 그녀의 사진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배움을 열망한 그녀의 첫 번째 소원은 아버지에게 거절당하고 만다. 하지만 여느 소녀들과 달랐던 그녀는 가출을 감행하고 직업을 얻고자 노력한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주방일과 설거지 그리고 보조요리사 일을 얻게 되는데, 이것은 사실상 집안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적 관습과 편견에 대한 첫 번째 도전은 이와 같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지만, 사춘기 소녀인 그녀는 아직까지 자의식에 찬 쾌활함과 삶에 대한 욕망을 지니고 있다.
나치가 오스트리아에 진군하는 역사적 사건은 서술자의 어머니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 역사적 사건은 우선은 시골에 사는 처녀인 그녀에게는 정치적 사건으로서보다는 일상의 지루함을 쫓는 축제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녀는 여기에서 의미 있는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을 느낄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가지지만, 그러한 환상은 얼마 가지 못해서 깨지고 만다. 또한 그녀는 이 시기에 민간인 때 직업이 은행원이었던 한 독일당원과 첫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는 그녀보다 키가 작고 나이도 훨씬 더 많았으며 서로 어울리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2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감정을 가졌던 그 시기를 그리워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랑함으로써 자신을 행동하는 사랑의 ‘주체’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유부남일 줄 알면서도 당당하게 사귀었던 그녀의 태도에서, 그녀의 사랑이 지닌 반사회적이고 저항적인 측면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녀는 이 관계에서 사회적인 통념에 순응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그가 지시를 내리면 그녀가 그것에 순종하는 모습에서 그들의 불평등한 연인관계가 드러난다. 이것은 그녀가 소풍을 갔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방귀를 뀌자 그가 나무라는데서 잘 나타난다. 여기에서 여성들에게 강요된 사회적 수치심이 잘 드러나는데, 이것 역시 여성들에게 자신의 욕구와 성적 욕망을 억압하는 방어기제로 작용하게 된다. 그 이후로 그녀가 다시는 사랑할 수 없게 된 것도 그녀에게 강요된 이러한 사회적 수치심의 결과이다.
그녀의 첫 사랑이자 서술자의 아버지이기도 한 독일인은 기혼자였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첫 아이를 해산하기 직전, 자신을 사모하던 한 독일인 하사관과 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그를 혐오했지만, 아이에게는 아버지가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에서 비롯된 의무감 때문에 그와 결혼한다. 이 결혼을 계기로 그녀는 두려움을 알게되고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전쟁 중 남편과 헤어지고 남편은 다른 여자친구와 함께 살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아이에 대한 의무감으로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다시 결합한다. 그녀는 이 시점에서부터 경제적 궁핍을 더욱 심하게 겪게 되고 남편에게 구타도 당하며 현실에 순응하는 법을 배운다. 전쟁 후 베를린에 정착한 그녀는 모험에 대한 욕망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으며 타인의 시선을 살피는 등 사회적 관습에 따라 행동한다. 그녀는 이제 일상적인 삶에 파묻혀 살고 중성적인 존재로 변해간다. 이 시기 대도시의 삶은 황폐화되어 있었고, 모든 사람들은 타인의 행동이나 낯선 관용어구를 흉내내며 자기 자신의 전기를 상실하고 하나의 유형으로 변해간다. 그녀 역시 자신의 개성을 점차 상실하고, 아내로서 또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삶에 대한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혼생활 후 그녀가 한 자율적인 행동 중 하나가 몇 차례의 낙태였다는 사실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자율적인 활동의 한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볼 때 인간의 생명을 살해하는 범죄행위로까지 간주되고 있는 낙태를 그녀가 남편 모르게 몇 차례나 자행했다는 사실은, 이 행동에 대한 도덕적 평가는 논외로 하고 그녀의 자율적 행위가 사회적 금기와 끊임없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상황에 처해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그녀는 역사적 상황과 사회적 관습에 의해 끊임없이 고통 당하고 개성상실의 위협을 겪게 되지만, 그것에 대한 저항을 완전히 포기한 적은 한번도 없다는 점에서 그녀의 삶의 독특함이 존재한다. 베를린에서 다시 오스트리아의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그녀는 공개적으로 담배도 피고 자신의 개인적 호기심도 완전히 버리지 않는다. 모든 주민들이 개성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그녀의 고향마을에서 ‘개인’이란 말이 욕설로만 사용되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녀의 태도는 비록 사회적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할 지라도 결코 전형적인 사회 순응적 태도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삶에 대한 그녀의 인식은 그녀가 서술자와 함께 팔라다, 함순,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작품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근본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독서를 통해 소설의 등장인물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기가 처한 상황을 깨닫게 된다. 이전부터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이제 일상의 에피소드나 일반적인 이야기 외에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로써 그녀는 자의식을 얻게 되지만, 이러한 자의식은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는 것을 도울 뿐, 새로운 삶의 전망을 열어주지는 못한다. 그녀는 남편을 이해하게 되고 그에게 더욱 관대해지지만, 그녀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어 인간다운 생활을 누리기 힘든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비록 그녀가 세계문학들을 접하게 됨으로써 자의식이 더욱 강화된 것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녀의 사회순응적인 모습은 그녀가 죽는 순간까지 계속된다. 그녀가 암에 대한 우려로 병원에 누워있는 순간조차 그녀의 남편이 따뜻한 식사를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모습에서 이러한 사실이 잘 나타난다. 미래에 대한 아무런 전망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녀는 또 한번 사회적 관습에 어긋나는 행위, 즉 자살을 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 역시 이중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녀가 사회적 관습에 따르면 좋지 않은 행위로 평가될 자살을 기도했고 자살 직후 서술자가 그녀의 자살행위를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은 자살이 지닌 저항적 측면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녀는 죽기 직전까지 사회적 관습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녀는 시신을 안치하는 것에 대비해 맞는 옷을 준비해 놓고, 심지어 관 위에 놓일 사자(死者)에 맞는 손 모양까지 신경 쓴다. 이러한 태도는 그녀가 죽기 직전까지 사회적 규범과 관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자살이 지니는 비극적 성격은 무엇보다도 그녀가 자율적으로 내린 결정이 자신의 삶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포기하는 부정적인 저항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에 있다. 여기에 그녀가 처한 실존의 비극성이 존재한다. 그녀가 서술자에게 보낸 마지막 유서에서 자신은 자살을 통해 행복하게 잠들 수 있게 되었다고 쓰고 있지만, 서술자는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술자의 어머니는 시대가 요구하는 전형적인 삶의 태도와 그 속에서 자신의 개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녀가 살고 있는 환경에서는 여성이 자신의 고유한 ‘전기 Biografie’를 가진다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여성으로서 이러한 환경에 태어난다는 것은 이미 처음부터 치명적인 것이었다.” 막스 프리쉬는 ?전기: 한 편의 연극 Biographie: Ein Spiel?과 ?세 폭 짜리 성화상 Triptychon?에서 죽음의 특성을 변화의 가능성이 배제되고 같은 것만이 늘 반복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서술자의 어머니 역시 시대적인 상황이 요구하는 전형적인 여성상을 강요당하면서 죽음과 진배없는 삶을 살게 된다. 그녀는 30세의 나이에 벌써 “내가 그 당시에는”이라는 말을 하곤 하였고,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이야기 할 거리가 없었다. 다시 말해 그녀에게는 자신의 고유한 삶으로서의 전기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보토 슈트라우스는 ?쌍들, 행인들 Paare, Passanten?에서 기억 및 서술능력의 문제와 관련하여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언급하고 있다. 그는 특히 결혼을 한 여성에게 기억의 토양이 파괴된다고 말한다. 어머니로서의 여성은 아이의 교육 및 양육과 관련하여 스스로를 희생하고 이로써 자신의 전기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기억능력의 상실을 초래한다. 설령 결혼한 여성이 무언가를 기억할 지라도, 거기에는 기억에 대한 열정이 빠져 있고 기억의 배경이나 연속적인 기억의 흐름도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진부한 일화에 대한 기억에 그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슈트라우스가 언급하고 있는 일화에 대한 여성들의 기억은 알라이다 아스만이 ‘일화 Anekdote’와 ‘상징 Symbol’을 구분한 것과 관련하여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아스만은 일화의 특징이 특이한 것으로 간주된 사건이나 인물을 기억하여 그것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데 있다고 간주한다. 즉 일화는 반복적인 서술인 셈이다. 이에 반해 기억을 강화시키는 중요한 방식 중 하나인 상징은 기억의 내용을 언어화하고 거기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한 개인의 이력에 관한 자료는 상징적인 의미부여와 해석의 작업을 거쳐 전기로 변환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슈트라우스가 언급한 여성의 기억은 일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왜냐하면 결혼한 여성으로서의 어머니는 주로 자기 자신과 관련 없는 사소한 일상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며, 설령 자기 자신과 관련된 기억이라도 그것은 자신의 비판적 성찰과 해석이 결여된 이미 일어난 사건의 단순한 반복적 재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아버지의 기억은 과거에 대한 동경과 미래의 우월한 시점에서의 과거비판이 뒤섞인 해석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상징적 기억으로, 이를 통해서만 진정한 자신의 전기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물론 슈트라우스의 이러한 구분은 초역사적으로 적용될 수 없고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배경을 고려할 때만 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더 나아가 여성 일반적인 특성으로서의 일화적 기억은 ?소망 없는 불행?에 등장하는 어머니에게는 부분적으로만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서술자의 어머니는 기억하거나 이야기 할만한 것이 없는 죽음과 진배없는 단조로운 삶 속에서도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욕구를 버리지 않고 있다. 더욱이 그녀는 여러 소설가들의 작품을 읽게 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것은 분명 그녀 자신의 전기를 재구성하기 위한 발판이 될 수는 있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 그것의 완전한 성공을 보장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전기는 반성자가 현재의 더욱 우월한 관점에서 자신의 과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과거의 삶을 현재의 입지에 도달하는 ‘과정’으로 해석하는 식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술자의 어머니는 자신의 현재의 삶과 과거의 삶 사이에서 어떤 변화도 보지 못하고 있고 미래에도 변화의 가능성이 막힌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의 과거에 대한 반성은 올바른 자기 인식의 의미만을 지닐 뿐, 과거의 자신의 행동변화과정을 확인할 수도, 앞으로 그러한 변화를 예상할 수도 없게 한다. 어머니의 죽음 후 서술자는 전기 없는 어머니의 전기를 재구성하는 역할을 떠맡는다. 이 경우 전통적인 전기작가의 관점에서 출발한 서술자의 시도는 작품 마지막에서 철회되는데, 이것은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불행 속에서도 어떤 소망을 가질 수 있다면, 현재의 고통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인해 견딜만한 것이 된다. 그러나 소망 없는 불행은 현재 상태의 변화와 개선에 대한 전망이 전혀 없는 총체적인 비극상황이다. 이 작품은 서술자의 어머니의 이러한 비참한 상황을 시대적인 상황과 편견을 조망함으로써 객관적으로 기술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암울한 전망의 단순한 확인에 만족하지는 않는다. 서술자가 자신의 어머니의 불행한 삶을 어떻게 글로 형상화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은 어머니의 비극적 운명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러한 운명이 미래에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Ⅲ. 거리 두기에서 동일시로: 회상을 통한 제 2의 자아의 발견
작품의 서두에서 서술자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자신의 삶의 완결된 한 시기에 대한 기억으로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왜 어머니의 삶을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한 시기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할 때 비로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서술자에게 가지고 있는 의미가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서술자는 먼저 어머니가 살아온 삶의 과정을 서술하고 나서 그녀가 죽고 난 이후의 과정을 짧게 기술한다. 여기에서 서술자는 그녀의 장례과정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그녀의 장례식이 최종적으로 그녀의 개성을 완전히 빼앗아 갔고, 이로 인해 거기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의 마음이 가벼워졌다는 구절이다. 여기에서 장례식은 고인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녀에 대한 고통스런 기억을 잊는 절차로 밝혀진다. 이러한 묘사는 어떤 사람이나 사건에 대한 기억의 의무를 기념비나 동상 또는 의식(儀式)에 전가함으로써 고통스런 기억의 부담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기억의 대상 차원과 관련해서도 서술자는 나치의 범죄와 같은 역사적인 사건보다는 ‘일상 속의 파시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콘체트는 ?소망 없는 불행?에서 어머니의 삶 속에 나타나는 일상의 파시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한트케가 이 작품에서 나치의 희생자와는 달리 사회에 의해 희생자로 인식되지 못함으로써 사회에 의해 잊혀져 가고 있는 대중의 소외를 한 여성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비록 나치의 침공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이 이 작품의 시대적인 배경으로 나타나고 있을지라도, 나치의 역사적인 범죄행위와 비인간적인 학살이 서술의 중심에 놓이지는 않고 있다. 이와 같이 이 작품의 서술자는 사회적인 제도나 장치에 의한 의례적인 기억에 대한 회의를 표명하면서, 자신의 글쓰기 작업을 통해 진부한 일상 속에 잊혀져 가는 삶의 비극에 대한 기억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서술자가 어머니의 생애에 대한 글을 쓰기로 결심한 계기는 그녀의 죽음에 개의치 않고 진행되는 냉담한 자연의 반응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이 떠나가는 묘지로부터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나무들로 시선을 옮긴다. 어머니의 죽음에 개의치 않고 변함없이 자기 자신만을 가꾸는 숲과 자연은 이 순간 그에게 잔인하게 여겨진다. 자연은 어머니를 파멸시킨 경직된 냉정한 사회질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는 웅성거리며 묘지를 떠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모욕감과 절망감을 느낀다. 서술자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연마저 인간의 죽음에 무감각하고 냉담하게 반응을 보이는 것에 분노하며, 어머니의 비극적 삶에 대한 글을 씀으로써 그녀를 망각의 위험에서 구해내려고 시도한다.
서술자는 어머니가 자살한 지 7주가 지난 시점에서 그녀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작업에 착수하고 싶다고 말하고, 그녀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하는 자신의 강한 욕구를 언급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야기 Geschichte’ 차원에서 논의되었던 어머니의 욕구 및 소원과 그것의 끊임없는 좌절이 ‘서술 Erzählen’ 차원에서도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술자가 어머니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을 때, 이 욕망 내지 소원이라는 테마는 이 두 사람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다리가 된다.
어머니는 무언가를 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망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전기를 가지고 싶은 욕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머니의 삶에 대해 글을 쓰려는 서술자의 욕구는 우선은 그녀의 삶을 망각에서 구해내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지만, 이것은 또한 어머니와 유사하게 자아와 개성을 위협받고 있는 자신의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욕구와도 관련이 있다. 어머니의 상황이 소망 ‘없는’(wunsch‘los’) ‘불’행(‘Un’glück)의 상황, 즉 결핍과 부정의 상황인 것처럼, 서술자의 상황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서술자가 어머니의 죽음에서 체험하게 되는 극단적인 ‘언어상실 Sprachlosigkeit’의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을 서술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데, 그것은 이전부터 그에게 항상 글을 쓰는 계기가 되어왔다. 또한 이것은 전형적인 글쓰기 방식으로부터 벗어나서 작가로서의 개성과 정체성을 찾으려는 작가의 욕망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어머니의 욕망과 서술자의 욕망은 서로 교차한다.
어머니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삽입되어 나타나는 서술자의 자기 진술들은 위의 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서술자는 사진이 실제 일어난 사건에 관해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을 착각으로 간주하고, 이것을 형상화하는 모든 차원에 적용되는 것으로 선언한다. 특히 단순한 보고의 차원을 넘어 사태를 보다 정확히 형상화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 허구적이 된다는 것이다. 반면 작가가 사건을 사실처럼 가장하면 할수록 사건은 타인에게 더 흥미로워지는데, 그 이유는 작가가 스스로를 단순하게 보고된 사실보다는 형상화 자체와 동일시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유추 끝에 서술자는 여기에서 ‘시(문학)에 대한 욕망 das Bedürfnis nach Poesie’이 생겨나는 것은 아닐까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즉 작가는 서술된 사실보다는 문학적 형상화의 방식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며, 그 때문에 자신을 발견하고자 할 때 문학작품을 쓰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술자가 어머니의 비극적인 삶에 관한 글을 쓰려는 욕망 역시 그녀를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거나 찾으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인 조건과 사회적 편견에 의해 어머니의 개성이 제약받았던 상황은 서술자의 어린 시절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 때문에 어머니가 받았던 고통과 불행, 정체성 상실의 위협은 그에게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상황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특이한 점은 서술자가 자신의 과거와 대결하기보다는 어머니의 과거를 형상화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인간적, 작가적 위기를 다룬다는 것이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글을 씀으로써 어머니의 고통을 내면적으로 이해하는 동시에 시에 대한 욕망을 실현시킴으로써 자신의 정체성과 개성을 찾으려고 한다.
어머니의 삶과 죽음에 대한 서술이 끝나고 나서 이루어지는 서술자의 자기 성찰과정에서, 서술자는 공포에 시달리며 스스로를 ‘썩어 가는 짐승 ein verwesendes Vieh’처럼 느낀다. 이것은 그의 어머니가 질병에 시달리고 고통스럽게 지내면서 ‘나는 더 이상 인간이 아냐 Ich bin gar kein Mensch mehr’라고 말한 것을 연상시킨다. 더 나아가 그는 꿈속에서 어머니가 느낀 감정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면서, 그러한 감정을 어머니의 제 2의 자아로서 직접 체험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서술자는 어머니의 삶을 개성을 상실한 진부한 일상적인 삶으로 묘사하면서, 자기 자신의 삶의 전개 및 변화 가능성에 대한 반성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어머니의 고통스런 삶을 표현하려고 하는데서 작은 즐거움을 얻고 공포의 체험에서 기억의 행복을 만들어내는 것도 이러한 기억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작가 한트케의 관점에서 볼 때 어머니에 대한 서술자의 기억은 개인적인 정체성 확립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작가는 고통스런 삶 속에서 자살 외의 다른 대안을 발견하지 못한 한 여인의 삶을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개인적 기억의 차원을 넘어선 문화적 기억의 차원이 문제가 된다. 한트케의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이한 점은 서술자가 한 개인의 과거에 나타난 트라우마를 극복하거나 치료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 속에 계속 보존하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문화적 기억으로서의 트라우마의 보존형식에 대해서는 리오따르의 글이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리오따르는 유대인에 관한 자신의 에세이에서 유대인 학살과 집단적 기억전수의 관계를 다룬다. 그는 이 경우 프로이트의 ‘심리적 억압 Verdrängung’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주지하다시피 심리적 억압은 망각의 형식이라기보다는 보존의 형식이다. 다시 말해 심리적 억압은 우리의 의식이 감추고 싶거나 억압하고 싶은 욕구가 무의식의 형태로 숨어서 보존되는 것을 의미한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이러한 심리적 억압은 그 억압의 원인을 밝혀냄으로써 치유되어야 할 병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반면, 리오따르는 심리적 억압을 문화적 기억의 차원에서 집단적 기억을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한다. 그는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기억을 전수하기 위해 가장 확실한 수단을 찾는 과정에서 문자나 동상과 같은 매체보다 트라우마의 형식이 자신의 목적에 더 적합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동상이나 문자는 기억의 대상을 재현하는 수단이 됨으로써 그것의 대상 자체와 멀어지고, 기억에 대한 우리의 부담을 덜어줌으로써 우리의 망각을 촉진시키는 것으로 간주되는 반면, 트라우마는 무언가를 재현하는 기호의 성격을 띠지 않기 때문에 잊혀질 수도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트라우마는 우리로 하여금 과거의 사건에 대한 기억을 통해 과거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고통을 자신 속에 간직하며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과거극복 Vergangenheitsbewältigung’이 아니라 ‘과거보존 Vergangenheitsbewahrung’인 것이다.
리오따르가 언급한 문화적 기억방식으로서의 트라우마가 지니는 기능은 ?소망 없는 불행?의 서술자의 어머니에 대한 회상과 글쓰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다만 한트케는 유대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사건 대신 일상 속의 파시즘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리오따르와 차이가 있다. ?소망 없는 불행?의 서술자는 작품 초반에 어머니에 대한 회상을 현재의 보다 우월한 시점에서 일단락 된 과거의 한 사건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전개하고 있지만, 이러한 태도는 작품 후반에 수정된다. 그는 작품 마지막에서 어머니가 겪은 삶의 고통이 과거의 사건으로 종결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재까지 계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인식하고 어머니의 트라우마를 자기 자신의 트라우마로 계속 간직하려고 시도한다. 따라서 그의 글쓰기는 어머니에 대한 회상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고 확고한 자기 정체성을 찾는 치료학적 글쓰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글쓰기는 트라우마를 계속 보존함으로써 불완전한 상황에 있는 자기 존재를 끊임없이 인식한다는 의미에서 자기 발견의 글쓰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Ⅳ. “이 모든 것을 나중에 보다 상세히 쓸 예정이다” - 전통적인
서술방식을 이용한 전통적인 서술방식의 비판
이미 앞장에서 이 작품의 서술자가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따라서 서술자가 자신의 어머니를 어떻게 기억하는지의 내용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억하고 서술하는 방식 역시 서술자의 의식을 보여주는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서두에는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짤막한 신문기사가 나온다.
토요일 밤 A 지역(G. 구역)에 사는 51살 된 가정주부 한 사람이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여 자살하였다.
한 사람의 죽음이 지닌 개성적이고 특별한 의미를 보여주지 못하는 이 신문기사의 건조한 보고문체는 서술자 어머니의 비극적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술자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글로 형상화하고 있는지 하는 문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며, 작품 속에서 서술자가 글쓰기와 관련, 자기 성찰을 하는 부분들 역시 작품 전체의 이해를 위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서술자는 자신의 어머니의 자살을 비인격적으로 추상화시켜 다루고 있는 신문기사에 대한 비판적 반응으로 자신의 글을 쓰고 있다. 언뜻 보기에 서술자의 이야기는 주관적인 감정을 배제한 객관적인 문체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문기사와 유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서술방식은 단순한 신문기사와 달리 복잡한 서술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서술자의 형상화방식은 19세기 사실주의 문체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서술자 자신에 의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서술자는 자신의 계부가 실업보조금을 받은 돈으로 술을 먹고 나서 그를 찾아 나선 어머니를 구타하는 장면을 서술한다. 구타가 있은 다음날 아이들이 스스로 밥상을 차리는 동안 아버지는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 있고 어머니는 눈을 감고 자는 척 하며 그의 옆에 누워 있다. 서술자는 이러한 묘사가 19세기 서술을 베낀 듯 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러한 시대착오적 상황이 여전히 존재하는 지금 그러한 묘사가 불가피한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따라서 서술자가 이러한 서술을 자신의 서술방식으로 삼은 이유는 시대착오적인 사회구조와 관습을 서술형식차원에서 폭로하고 풍자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서술자는 어머니의 삶이 지닌 특수한 측면을 배제하고 이것을 단순히 일반화시키는 추상적 서술방식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그는 주인공 개인의 삶이 보편적 사실의 입증을 위한 계기로 사용되는 글쓰기 방식을 비판한다. 그는 그 대신 그 당시 여성의 일반적인 삶과 자신의 어머니의 특수한 삶을 비교하며 형상화한다. 따라서 보편적인 삶의 서술은 어머니의 특별한 삶을 서술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개성을 상실하고 사회의 전형적인 역할 및 기대에 순응하는 대체 가능한 개인들의 일반적인 모습은 이에 상응하는 표현형식을 얻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주어를 생략한 과감한 생략어구, 상투어 및 인용문의 빈번한 사용 그리고 대체 가능한 예들의 열거이다. 서술자는 자신의 어머니가 누가 그녀를 조금만 다른 방향으로 인도했어도 평생 가사에만 얽매이는 삶과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가능성으로서의 삶 대신 그녀가 실제로 살아온 진부하고 비참한 변화 없는 삶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술주정뱅이 남편의 해고를 다시 한번 철회하기 위해 이 오빠 저 오빠를 찾아가 탄원하는 일. 라디오 청취료를 내지 않은 것에 대한 고발을 취하해달라고 불법청취감시인에게 간청하는 일. 시민에게 맞는 행동을 하겠다는 맹세를 하고 주택자금을 타는 일, 극빈자 증명서를 떼기 위해 관청을 출입하는 일. 그 사이에 대학에 다니고 있는 아들을 위해 필요한 학비 감면 증명서를 매년 새롭게 떼는 일 [...]
또한 이러한 궁핍한 삶의 다른 예로 그녀의 집에 있는 일련의 낡은 물건들과 그녀의 여러 가지 질병들이 장황하게 열거되기도 한다. 이러한 열거는 그녀의 삶이 궁핍과 질병의 비참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생명 없는 반복의 삶’을 보여주고 있음을 형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 한가지 눈에 띄는 서술방식은 서술자가 어느 특정한 표제어를 먼저 내세운 다음 그에 해당하는 사실들을 전개하는 방식으로 어머니의 삶을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는 일요일, 도시생활, 1938년 4월 10일, 첫 번째 사랑, 전후 대도시 등과 같은 표제어를 내세우고 이러한 표제어에 맞는 사건들과 사실들을 서술하고 있다. 서술자는 처음에는 사실들에서 출발하여 이에 맞는 형상화방식을 찾았지만, 곧 자신이 이로 인해 사실 자체에서 멀어지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이제 미리 주어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어법에서 출발하여 어머니의 삶에 관한 사실들을 그 안에 분류해 집어넣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보편적인 것과 어머니의 특수한 삶의 비교 형상화 방법이다. 이렇게 특정한 표제어를 정해 놓고 거기에 맞게 어머니의 전기를 재구성하는 방식은 서술자가 이 작품을 연대기적인 질서의 규칙 체계 속에서 형상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서술자는 이러한 질서정연한 서술체계가 현실을 재현하기보다는 오히려 이야기의 환상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것은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부분에서 잘 나타난다.
서술자는 만일 자신이 ‘이야기는 [...]로 시작되었다 es begann mit [...]’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서술되는 모든 대상들은 꾸며낸 이야기처럼 보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서술자는 자신의 이야기의 첫 구절을 바로 위의 문구, 즉 “그러므로 이야기는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곳이기도 한 바로 그 장소에서 그녀가 50년 전에 태어났다는 것으로 시작되었다”라는 구절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서술자가 자신이 서술하는 내용이 실제 어머니의 삶의 궤적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하는 것처럼 가장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연대기적인 서술방식은 처음에는 주로 일반적인 사람들에 대한 진술에서 출발하여 어머니 자신의 삶의 묘사로 옮겨가고 있다. 이것은 서술자 어머니의 고유한 전기가 가정주부로서의 여성일반의 전형적인 삶의 전기와 일치하지는 않을지라도 상당히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형식차원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점차적으로 자의식을 얻게 되고 그녀 자신의 삶이 강하게 부각되면서, ‘사람들 man’이라는 부정대명사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고 ‘그녀 sie’라는 인칭대명사만이 사용되게 된다. 이것은 분명 서술자 어머니의 고유한 전기와 정체성의 형성과정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지만, 그녀의 이름이 작품 마지막까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을 때 그 한계 역시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서술자가 전형적인 전기의 형식으로 어머니의 전기를 묘사하려고 할 때, 이것은 서술차원에서 기존의 글쓰기 관습에 대한 순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가 전형적인 사실주의 글쓰기를 풍자하거나 상투어나 인용문 또는 여러 문장의 나열을 개성을 말살시키는 사회적 관습에 대한 비판으로 사용할 때, 여기에는 저항의 측면도 담겨 있다. 다시 말해 내용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사회관습의 강압에 대한 어머니의 순응과 저항의 관계는 글쓰기의 차원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저항과 극복의 노력은 어머니의 전기에 대한 서술이후에 나타나고 있는 서술자의 자기 반성과 기억들 속에서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서술자는 자기 자신이 서술자인 동시에 서술대상인 경우에는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여 점차 자신에게 거리를 두고 서술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서술의 경우처럼 서술자의 역할만을 맡고 있는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그녀에 대해 거리를 취하는 것이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인공적인 인물로 만들어 캡슐에 가두어 넣고 묘사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녀와 관련하여 자신이 체험한 공포의 순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측면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어머니의 삶에 나타나는 이러한 측면 때문에 그녀의 이야기가 위안을 주는 결말이나 결말 자체를 기대할 수 있는 그러한 완결된 이야기로 나타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서술자가 전체를 조망하는 ‘조감도 Vogelperspektive’ 역시 불가능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술자가 앞에서 기술한 것처럼 자신의 어머니의 전기를 삶의 행로에 따라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이유는 자신이 이러한 공포의 순간의 지배자가 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서술자는 어머니의 삶과 죽음을 자신의 삶의 완결된 한 시기로 간주하고 있으며, 이러한 거리를 둔 서술을 통해 어머니의 죽음에 의해 상기된 기억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술자의 이러한 의도는 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잘 나타난다. 서술자는 어머니의 삶에 대해 서술하기 전만 해도 자신이 글을 쓸 때는 적어도 글을 쓰는 시점에서 볼 때 그 이전의 것에 대해 쓰게 되며 이렇게 글을 쓰는 자신은 ‘회상과 서술의 기계 Erinnerungs- und Formulierungsmaschine’로 외면화되고 객관화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점차 처음에 의도했던 것과 달리 자신의 글쓰기가 자신의 삶의 완결된 한 시기에 대한 회상이 아니며, 스스로도 서술의 대상과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고 그것과 동떨어진 회상과 서술의 기계로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의 글쓰기가 서술대상에 대해 거리를 두고 있음을 가장한 문장의 형식 속에 나타난 ‘끊임없는’ 회상의 태도였음을 인식한다.
서술자가 자신의 어머니의 전기를 전통적인 서술형식에 따라 연대기적으로 기술할 때, 이것은 근본적으로 서술자가 서술대상에 대해 객관적인 거리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서술은 현재의 시점에 위치한 서술자가 과거의 사건이나 인물을 ‘의식적으로’ 회상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데 작품 마지막에 이러한 전통적인 서술방식 및 기억양식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면서, 이제 새로운 글쓰기 방식에 대한 논의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서술자의 어머니의 생애와 그녀의 자살에 대한 서술 이후에 나타나는 기억의 편린들은 이전의 체계적이고 의식적인 기억과 달리 에피소드적이고 연상적인 주관적 기억의 형태를 띠고 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객관적이고 일반화하는 서술형식과는 다른 서술자의 개인적 감정을 담고 있는 주관적인 표현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빵을 자르는 서술자의 손에서 칼이 미끄러져 빠져나가는 것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아침에 작은 빵 조각을 따듯한 우유 속에 잘라 넣어주었던 것을 연상시킨다. 그 다음에는 어머니가 어린 시절의 서술자의 귓구멍과 코를 그녀의 침으로 재빨리 닦아주었던 것과 그럴 때면 그가 항상 뒤로 움찔 물러나곤 했던 기억이 이어진다. 이와 같이 각 기억의 편린들은 시간적으로 볼 때 서로 전혀 연관성이 없으며 체계적이지도 않다. 이러한 연상적인 기억들의 비약성과 연관성의 상실은 각 기억장면 사이에 나타나는 텍스트 내의 여백을 통해서 시각적으로 강조되기도 한다. 다만 이 주관적인 연상적 기억은 그것에 나타나는 기억의 내용에 의해 어느 정도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억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과 인간성이 서술자의 기억 속에 뚜렷하게 각인 되어 나타나고 있다. 위에서 예로 든, 빵 조각을 우유 속에 잘라 넣어주던 것과 같은 간접적인 암시에서부터 “그녀는 사람들을 따듯하게 대하였다”라는 직접적인 언급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의 사랑과 인간애에 대한 서술자의 회상은 쉽게 확인될 수 있다. 둘째 어머니의 고통에 대한 기억과 자신의 잘못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담긴 회상이 있다. 부엌에서 일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대한 그의 기억은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언급되고 있다. 또한 등산을 하다가 용변을 보기 위해 일행에서 빠져 나온 어머니를 보고 자신이 울음을 터뜨리자 어머니가 용변을 참았던 일, 침으로 자신의 귓구멍과 코를 닦아주었던 것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인 일, 엄청나게 큰 병실에 여러 사람과 같이 누워 있던 어머니가 한번은 자기 손을 오랫동안 꼭 쥐어주었던 일 등과 같은 어머니의 사랑과 자신의 잘못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뒤섞인 기억들도 있다.
서술자는 꿈속에서처럼 자신에게 덮쳐오는 이러한 기억들에서 벗어나려고 하기보다는 이것들을 이제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러한 고통의 기억을 간직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언젠가 어머니의 병실을 찾은 그를 어머니가 마치 그녀의 ‘학대받은 심장 Ihr geschundenes Herz’처럼 바라보았을 때 서술자는 놀라면서도 불쾌한 감정을 가졌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부터 서술자는 어머니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여태까지 나는 그녀를 매번 잊곤 했었다. 아니 기껏해야 가끔 그녀의 바보 같은 삶을 생각할 때 가슴이 쓰라려 옴을 느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내게 생생한 모습으로 다가와 구체적이고 생생한 형체가 되었으며,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손에 잡힐 듯 생생해서 나는 여러 번 순간적으로 그 모습을 완전히 체험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어머니에 대한 올바른 묘사는 서술자가 어머니와 거리를 두고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녀의 고통을 자신 속에 간직하고 기억할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게 된다. 그러한 묘사방식은 결코 서술자가 앞에서 행한 체계적인 연대기적 서술이 아니다. 언뜻 교양소설을 상기시키는 이 연대기적 서술방식은 주인공인 어머니의 운명이 사회에 의해 끊임없이 제약받고 좌절하는 내용과의 불일치를 통해서도 이미 그 문제성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연대기적 서술의 일직선적인 사건전개와 어머니의 진부한 삶의 끊임없는 반복적 순환 역시 서로 충돌하고 있다. 따라서 서술자가 어머니의 이야기를 마친 후에 또 다시 연상적이고 주관적인 기억을 하거나 자기 성찰적인 반성을 하는 것은 새로운 형상화방식을 발견하려는 의도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술자는 위에서처럼 연상적인 주관적 기억 외에 또 다른 대안을 생각해본다. 그는 어쩌면 이러한 고통을 포착하는데 음악이 더 적합한 수단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이 경우 음악은 폴 사이먼에 대한 암시나 작품 시작 전의 밥 딜런의 인용문에서 나타나듯이, 비언어적인 형식으로서의 음악보다는 대중 포크송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한트케는 개인에 대한 상세한 묘사 없이 한 인물의 이야기를 아주 단순하게 서술하는 대중 포크송에서 현실에 접근하는 이상적인 서술방식의 한 가능성을 발견한 것처럼 보인다. 또한 서술자는 그것이 꿈속에서 더 잘 형상화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는 이미 이전에도 꿈속에서 어머니의 이야기가 순간적으로 포착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꿈에서 그녀의 감정은 육(구)체화되어 나타나, 자신이 그것을 그녀의 제 2의 자아가 되어 체험할 수 있고 그 감정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언어로서 형상화될 수 없는 트라우마의 표현은 무의식의 상태를 그대로 표출하는 꿈의 형식을 통해서 가장 잘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순간에 최고의 표현 및 전달에 대한 욕구와 극단적인 언어상실이 서로 만나게 된다. 서술자는 이러한 이론적 성찰을 할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꿈을 꾸기도 한다. 물론 작품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 꿈들은 일차적으로 어머니에 대한 서술자의 복합적인 심정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이것은 새로운 이해 및 표현형식의 가능성으로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서술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형상화방식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서술대상을 과거에 이미 완결되었고 현재에는 극복된 것으로 묘사하는 서술방식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가 추구하는 형상화방식은 어머니의 고통을 생생하게 현재화할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것은 서술자가 ‘가난 Armut’과 ‘비참함 Elend’이라는 단어를 구분하여 설명할 때 구체화된다. 그는 가난이란 아름답고 어쩐지 고상한 느낌을 주는 단어라고 말한다. 이 단어를 떠올리면 가난하지만 깨끗하다는 표상이 떠오르며, 이러한 청결함이 가난한 사람들을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비참함은 사회에 편입되지 못한 사람들이 지닌 지저분함을 나타낸다. 이러한 이유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추상적인 것으로 나타나며,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다. 다시 말해 가난은 이미 가난을 극복한 사람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 나타나는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반면 비참함은 보다 감각적으로 묘사될 수 있다. 비참함의 묘사는 실제로 그것을 본 것보다 더 큰 혐오감을 준다. 요강으로 사용하던 것을 깨끗이 씻어서 그릇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묘사는 비참함의 묘사가 가난의 묘사보다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서술자는 자신의 어머니가 유쾌한 가난 속에 산 것이 아니라 비참함 속에 살았음을 인식하며, 다만 어머니가 이 비참함을 힘겹게 격식을 차리며 견디어 내는 과정 속에 자신의 영혼을 상실해가고 있음을 통찰한다. 그리고 가난이라는 말도 사실은 언어의 이데올로기적인 변형에 의해 미화된 말에 불과하다는 것이 폭로된다. 서술형식의 문제와 관련해서 보자면, 결국 가난의 묘사는 그 추상적인 성격 때문에 묘사할 것 자체가 별로 없고 쉽게 잊혀질 수 있으며, 더욱이 이미 가난을 극복한 자의 시점에서 묘사되기 때문에 서술자가 처음에 생각한 자신의 삶의 완결된 한 시점의 서술이라는 관점과 연결될 수 있다. 반면 비참함의 묘사는 비참한 상황이 주는 혐오감과 당사자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현재적으로 전달하기 때문에 어머니의 고통을 현재에도 계속되는 상황으로 서술하려는 서술자의 나중 입장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서술자는 여러 가지 형상화 가능성(대중 포크송 식 서술, 연상적․주관적 기억을 통한 서술, 꿈을 통한 형상화)을 생각해보지만, 어느 하나의 입장으로 결정하지는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그가 “수사반장”이라는 범죄영화에서 한 시골학교 선생이 말한 장면을 인용할 때 간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예감치 못한 새로운 종류의 절망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서술자는 이러한 파악할 수 없는 것을 전통적인 서술방식으로 형상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그 때문에 서술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서술의 위기를 극복하고 서술의 불가능성을 고려해 넣는 서술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녀를 이해하고 묘사하기 위해 “나는 항상 새롭게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따라 그의 새로운 글쓰기 방식은 현실의 재현으로서의 서술의 허구성을 인식한 ‘무한한 과정’으로서의 글쓰기 방식이 된다. 그 때문에 서술자는 이 작품을 “이 모든 것을 나중에 보다 상세히 쓸 예정이다”라는 열린 결말로 끝맺고 있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한트케는 이 작품에서 전통적인 서술형식을 통해 서술자가 3인칭의 인물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이야기를 서술하는 듯한 인상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 내에 삽입된 서술자의 자기 반성적 진술이나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행해지는 연상적 기억과 자기반성적 담론은 이 작품이 오히려 전통적인 서술방식의 불가능성을 역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작품은 전통적인 서술방식을 이용한 현대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Ⅴ. 결론
?관객모독 Publikumsbeschimpfung?이나 ?카스파 Kaspar?와 같은 실험적인 언어극에서 언어의 현실재현 기능을 문제시한 작가 한트케는 ?소망 없는 불행?이나 ?긴 이별에 대한 짧은 편지 Der kurze Brief zum langen Abschied?와 같은 소설에 이르면 전통적인 리얼리즘 서술방식으로 회귀한 것처럼 보인다. 교양소설의 형식을 띤 ?긴 이별에 대한 짧은 편지?와 연대기적인 서술구조를 지닌 ?소망 없는 불행?을 통해 한트케는 자신이 문제삼았던 바로 그 지점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본 논문에서는 ?소망 없는 불행?에서 사용된 전통적인 서술구조가 전통적인 서술기법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부정을 위해 사용되고 있음을 입증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작품의 서술자가 자신의 어머니의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고 극복하기보다는 그것을 끊임없이 열어두고 상기시키려고 하는 것처럼 한트케 역시 자신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문학형식에 대한 답을 이 작품에서 열어두고 있다. 아직까지 자신이 지향해야 할 글쓰기 방식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 한트케가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전통적인 글쓰기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이러한 ‘결핍 los’과 ‘부정 un’의 상황이 ?소망 없는 불행 Wunsch‘los’es ‘Un’glück?이란 작품을 탄생시킨 것이다.
참고 문헌
Assmann, Aleida: Erinnerungsräume. Formen und Wandlungen des kulturellen Gedächtnisses. München 1999.
Durzak, Manfred: Peter Handke und die deutsche Gegegenwartsliteratur. Narziß auf Abwegen. Stuttgart 1982.
Handke, Peter: Wunschloses Unglück. Frankfurt a.M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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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sammenfassung
Faschismus im Alltag
Eine Studie zur Erinnerung und Gestaltung in Wunschloses Unglück von Peter Handke
Jeong, Hang-Kyun(Seoul National-Uni.)
In Wunschloses Unglück geht es um die Lebensgeschichte einer Frau, die zwar ein tragisches Schicksal wegen der zeitlichen Bedingtheit und der Vorurteile erleidet, aber auf ihren Widerstand gegen die Unterdrückung ihrer Individualität nicht gänzlich verzichtet. Diese Erzählung wird durch die Antithese von gesellschaftlicher Anpassung der Mutter des Erzählers und ihrem Widerstand gekennzeichnet. Ihre Tragik liegt darin, dass sie trotz der Selbsterkenntnis am Romanende keine Selbstverwirklichungsmöglichkeit in der Gesellschaft sieht und ihr Widerstand in negativer Form wie Abtreibung und Selbstmord geleist wird.
Sieben Wochen, nachdem seine Mutter Selbstmord begangen hat, versucht der Erzähler ihre Lebensgeschichte zu rekonstruieren. Anfangs glaubt er, dass er ihre Lebensgeschichte aus heutiger Perspektive als abgeschlossene Periode seines Lebens darstellen kann. Jedoch erweist sich sein Glaube daran als Illusion. Im Lauf des Erzählvorgangs gelangt der Erzähler zu der Erkenntnis, dass die Lebensgeschichte ihrer Mutter einen Teil seiner Biografie bildet und immer noch auf sein Leben einen grossen Einfuss nimmt. Statt das qualvolle vergangene Leben seiner Mutter aus der Distanz zu erzählen und dadurch die Vergangenheit zu bewältigen, identifiziert er sich mit seiner Mutter und bewahrt ihr Leid in seiner ständigen Erinnerung.
Der Erzähler reflektiert über seine Identität als Autor, indem er sich eher mit der Gestaltung der Tatsachen identifiziert als mit Tatsachen selbst. In diesem Zusammenhang gewinnt die Schreibweise für die Identitätsfindung des Erzählers eine wichtige Bedeutung.
Die Lebensgeschichte der Mutter wird in traditioneller chronologischer Reihenfolge erzählt. Diese typisch konventionelle Erzählweise, die der gesellschaftlichen Anpassung der Mutter auf der Darstellungsebene entspricht, wird jedoch durch den Einschub der erzählerischen Reflexionen problematisiert, was wiederum den Widerstandsgeist der Mutter und ihres Sohnes unter Beweis stellt. In diesem Sinn veranschaulicht diese Erzählung die Unmöglichkeit des traditionellen Erzählens mittels dieser konventionellen Erzählweise und entpuppt sich als moderne Erzählung.
주제어: 순응, 저항, 자아발견, 회상
Schlüsselbegriffe: Anpassung, Widerstand, Identitätsfindung, Erinnerung
E-Mail: hkjeong11@hanmail.net
투고일: 2003.03.30 / 심사일: 2003.04.17 / 심사완료일: 2003.04.23
출전: 뷔히너와 현대문학, 제20호 (2003년 5월)
학회URL: http://buechner.germa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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