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배수아, 서울의 낮은 언덕들

나뭇잎숨결 2012. 9. 6. 05:47

 

 

 

배수아,  『서울의 낮은 언덕들』, 자음과모음, 2012

 

 

 

수많은 산과 강을 넘어 어느 정도 이상의 시간과 지리적 한계에 다다르게 되면, 내가 바로 지금의 나 자신이며 나 자신의 의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이 우주 전체의 섬광 속에서는 더 이상 배타적이고 유일한 사실이 되지 못하리라, 하고 경희는 다시 한 번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은 이 욕망의 정체는 무엇인가.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욕망,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원하고자 하는 이 애처로운 욕망. 그건 형태를 바꾸며 되풀이되는 영원한 성질과 같은 거야, 구름의 아래와 위에 동시에 자리한 다른 하늘과 마찬가지로. 그래, 그것은 허공을 나는 참매들이었어. 그러다가 무심코 머릿속의 떠오름을 입 밖으로 내어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앞으로 두 번 다시 예전과 같은 형태로는 만나지 못할 우리는 지금 이 생에서 저 생으로 떨어지고 있는 참매들인 걸까요?” ---p.56

“직업이란 여러 가지 의미가 있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결정적인 점은 우리를 더 이상 여행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니까요. 나는 사업상의 여행이나 호텔에서 지내는 몇 주간의 짧은 휴가 등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방랑을 말하는 거지요. 직업은 화폐와 더불어 자유의 정도를 나타내는 신분증이나 마찬가지예요. 나는 한때 끝없는 여행만으로 이루어진 인생을 꿈꾸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여행을 다니면서 글을 쓰고, 그것을 직업 삼아 살아가는 삶 말이죠. 지금은 거의 모든 사회적 성인들이 그런 것처럼 내 꿈 또한 좌절되어버린 것이 자명해 보이긴 하지만.” ---pp.61-62

근대는 지도의 세기였지. 세계의 그 어느 구석도 희게 비어 있어서는 안 되었으므로, 탐험가들은 그곳으로 가서 이름을 붙이고 산맥과 강줄기의 지형도를 만들었지. 그래서 그곳은 비로소 ‘영토’가 되었어. 나는 내가 죽는 그날까지 그 땅을 결코 보지 못할 것임을 알아. 하지만 일생 동안 꿈속에서 그 땅을 보게 되리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지. 나는 도시인이야. 석탄 난로가 있는 방 하나짜리 대학 기숙사 아파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내 아이들도 도심의 좁은 아파트에서 자라게 되겠지. 단 한 번의 지진으로 맥없이 허물어져버릴 빈자들의 아파트. 그건 제어할 수 없는 현기증이야. 민주주의의 현기증, 도시의 삶이라는 현기증, 밀도의 현기증, 이성과 실제의 현기증. ---p.121

언어란, 마치 교통 신호등이나 승무원의 유니폼처럼, 화장실의 표시나 혹은 스타벅스처럼, 어느 정도는 고안해서 만들어진 인위적인 상징에 불과할 테니까요. 나는 그렇게 해석 불가한 얼굴을 가진 사랑을 좋아해요. 그런 사랑 앞에서 미소 지을 줄도 안답니다. 그런 사랑만이 나를 태울 줄 알죠. 하지만 종종 나는 혼란스러운 가운데 생각하곤 해요. 나는 정녕 말을, 혹은 기억을, 아니 생각을 더듬는 것인데, 지금 자유롭고 무심한 청중들을 앞에 두고 무대 위에 있는 나 혼자만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아닐까? ---p.176

아버지는 내 일생 내내 계속해서 묘사한다. 그가 속삭인다. 그가 노래하고, 그가 듣는다. 그는 기록한다. 커다란 누런 표지의 노트에 사진과 함께. 그가 루핀을 발견한 날짜는 1990년 8월 8일 내가 태어난 날이고 장소는 ‘서울의 낮은 언덕 중 하나, 동이 터올 무렵’이라고 되어 있다. 그는 쓴다. 아무것도 없는 편평한 우윳빛 하늘 위로 태양이 떠오르고, 지금껏 그 어떤 순간도 이처럼 적막하고 고요한 빛으로 가득했던 적이 없다고. 그리고 그는 간다. 나는 서울에서 20년을 살았지만 루핀이 피어 있는 낮은 언덕이 어디인지 모른다. 나는 사람들에게 묻지만, 그들은 모두 그런 장소가 없다고 말한다. 다른 어떤 장소도 아닌 바로 서울에 결코 없는 사물들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루핀이 피어 있는 낮은 언덕이다, 하고 그들은 말한다. 나는 아버지가 어떻게 살았는지와 마찬가지로 어떤 상황에서 죽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가 루핀의 언덕을 산책한 이른 아침 그의 고향은 서울이 아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들어왔던 낯선 풍경을 나는 영원히 알지 못하고 만다. ---pp.306-307

나는 도시들에 대해서 글을 쓰고 싶었다.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는 기차여행에 관해서, 그리고 기차에서 읽었던 책들에 관해서, 도시에 자리 잡은 방들에 관해서, 그 모든 것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이야기들에 관해서. 여정을 문학화하는 작업의 현기증나는 아름다움에 관해서. 내가 쓰는 것은 우리 모두를 구성하는 영원한 이야기의 어느 부분에서 시작하여 어느 부분에서 끝나는 그런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는 나의 문학이 분절된 목소리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였다. 즉 스토리를 진행하되, 오직 파열된 단면으로서 나타내기. 목소리는 음성이며, 음색이란 것을 갖고 있다. 그것은 문장의 내용이나 문체의 스킬을 넘어선다고 믿는다. 그것은 작?의 지문이다.

                                                                                                                                                             ---저자 서문 중에서

 

견고하고 독보적인 문장,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일무이한 서사
작가 배수아의 새로운 장편소설


2011년 봄부터 여름까지 자음과모음 인터넷카페에 연재된 배수아의 13번째 장편소설 『서울의 낮은 언덕들』이 출간되었다. 현실에는 없는, 낭송극 전문 무대 배우라는 주인공의 직업이 매우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며 그가 어느 날 문득 태어나고 자란 도시를 떠나 먼 나라 낯선 도시와 낯선 사람들을 방문하는 여정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언제부터인가 ‘에세이형 소설’, ‘소설과 에세이의 혼종’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배수아만의 비서사적 소설세계 가장 깊숙한 곳까지 이어진다.

한국문학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귀중한 마이너리티의 감성, 배수아,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흐름 속에도 유난히 낯설고 독특한 모습으로 등장했던 이 작가는 그후 18년 동안 6권의 소설집, 13권의 장편소설, 1권의 에세이, 여러 독일어 번역문학을 쉼 없이 선보이며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로, 번역문학가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갔다. 그 과정에서 배수아는 내러티브 소설 작법에 따르지 않고 배수아 고유의 독특하고 견고한 문학적 세계를 창조했다. 그 세계에서 ‘소설’이란 구체적인 서사구조와 인물 없이도, 미문이나 아포리즘에 기대지 않고도, 작가와 화자의 의도적인 중첩 속에 사유와 문장을 쌓아나가는 방식으로 완성되는 이야기다. 그리하여 배수아의 소설은 언제나 양극단의 반응을 얻었다. 그의 소설이 지루하고 난해하여 읽는 것이 아니라 해독해야 한다고, 그의 문장이 번역투의 비문이라고 하는 ‘대중’이 존재했고, 또 그의 소설이 일관되게 담고 있는 단단한 언어적 사유와 상상력에 기반한 미적 성취에 열광하는 ‘매니아’가 존재했다. 꿈과 환상이라는 요소를 전면에 내세운 전작 『북쪽 거실』(2009) 이후 그보다 더 심화되고 확장된 모습으로 완성된 세계가 이번 장편소설 『서울의 낮은 언덕들』이다. 서사를 압도하는 진술체의 문장은 이제 ‘낭송극’이라는 무대로까지 나아간다. 사유의 문장을 통해 서사가 아닌 서사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이번 작품에서는 문자를 통해 음성(낭송)으로 감정과 감각을 확장시키려 한다.

“도시와 언어를 바꾸어도 소용이 없었다.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나를 빨아대는 이 어질어질한 현기증의 느낌”
주인공은 ‘경희’라는 이름을 가진 30대의 여성. 그녀는 낭송극 전문 무대 배우로 오래 활동해왔으나 점차 성우, 아니운서 등에 밀려 일거리가 줄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의 독일어 선생이었던 이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받고 “더 이상은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막연하고도 암울했으며, 더 이상은 아무런 행복도 불행도 느낄 수 없었고, 그러므로 불가능하게도 그를 찾아서, 걸어서 여행을 떠나야겠다”라고 충동적으로 결심한 경희는 먼 나라, 먼 도시로의 여행을 떠난다. 단출한 여행가방을 들고 낯선 도시의 공항에 도착한 ‘경희’는 그곳에서 ‘미스터 노바디’, ‘마리아’, ‘반치’, ‘치유사’ ‘동양인 남성’ 등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특정한 이름으로 좀처럼 호명되지 않으며 어떤 존재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종종 화자는 명확한 기준 없이 주인공 ‘경희’에서 갑자기 ‘우리들’이라는 구체적으로 정의되지 않는 주체의 복합으로 이동하기도 한다. 그리고 낯선 꿈으로 이루어진 숲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듯, 경희의 목소리를 따라 이 아름다운 혼란과 낭송의 소설을 읽어가던 독자의 눈앞에 어느 순간 ‘경희’라는 존재는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녀의 흔적과 기억을 더듬으며 그녀를 찾아나서는 ‘우리들’의 목소리로 서사는 가득 차오르면서 소설은 마지막 순간에 한 편의 낭송극 무대로 변신하여 막을 내린다.

“내가 고민하는 것은 그 스토리를 전달하는 비서사적 진술 방식의 발견이며, 내가 저항하는 것은 스토리텔링을 소설의 명품 필수 아이템 정도로 생각하는 사고 자체이다. 『서울의 낮은 언덕들』은 종결되었지만, 앞으로 나는 어떤 형태로든 이 이야기의 후속편 혹은 보완편을 쓰게 되리라는 예감이다” (배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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