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시에르, <문학의 정치>, 인간사랑, 2009
"문학(미학)은 우연히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미학은 감각적 경험을 분해하는 채재이기 때문"(랑시에르)
습관적으로 밥을 먹는 날이 있고, 밥에만 오롯이 집중하는 날이 있다. 밥에 오롯이 집중하다보면 산다는 것이, 살아 있다는 것이 절실해 질 때가 있다. 문자중독증에 걸린 사람들은 니힐즘에 빠질 확률이 더 높다는 생각이 문득, 밥 먹다 들었다. 그 다음에 떠오르는 생각은 지금까지 문학으로 돈 벌어 밥 먹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 같다는 생각에 이르고, 이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온몸으로 하는 문학적 발언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이른다. 그러다 다시 '문학의 자본화에 나도 기여를 했다'라는 생각에 이르러...이 글을 쓴다.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택스트라는 것은 이미 오래된 메타포이다. 문학은(소설)은 혼돈스런 자아가 혼돈스런 세상을살아내는 흐름이 혼돈스럽게 이야기되는 공간이다. 소설의 주인공이 비루함에게 숭고함의 자리를 내어준 이유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하나의 세상을 이룬다. 그래서 하나의 텍스트는 저마다 하나의 세상이기도 하다.
랑시에르, 난 랑시에르주의자도 아니고 랑시에르 전문가도 아니다. 모든 발언이 대사회적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면...나 역시 정치적이다라는 생각을 낳고... 문학에 대해 발언한다는 문제를 지켜보면서 펼쳐든 책이다. 랑시에르는 인간의 감성(말할 수 있는 것, 볼 수 있는 것,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어떻게 선험적으로 나뉘며 프롤레타리아는 어떻게 그 선험적 형식의 '나눔 체계'를 재편성했는가에 주목한다. 문학은 그 '나눔 체계'를 대표하는 언어의 위계질서를 보여주는 수단이라고 보았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문학성'과 '정치성'을 담지하고 있다. "문학이 세계에 참여(앙가지망,engagement)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문학이 사물들에 다시 이름을 붙이고, 단어들과 사물들 사이의 틈을 만들고, 단어들과 정체성 사이의 틈을 만듦으로써 결국 탈정체화, 즉 주체화의 형태, 해방 가능성, 어떤 조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데 개입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입니다." (계간 <문학과 사회> 2009년 봄호, 자크 랑시에르 인터뷰)
문학의 정치성은 통상적 의미의 '정치행위'의 일종으로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담론 체계에 대한 인간 감성의 재조직 작업'이라는 것이다.
"미학은 우연히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다. 그러나 미학은 두 개의 상반된 정치들 사이의 해결되지 않은 긴장 안에서 정치적이다. 상반된 정치들 중 하나는 예술 형태들을 집단적 삶의 형태들로 변형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학을 해벙에 대한 약속으로 삼는 자율성을 모든 투쟁적 상업적 연루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랑시에르, <미학 안의 불편함>, 인간사랑>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성'에 대해, 랑시에르의 또 다른 저서 <불화>(1995)에서 그는 정치를 고대 그리스어인 폴리테이아(politeia)의 번역어가 '정치(politique)'일 뿐 아니라 '경찰(police)'이기도 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정치'라고 인식하는 '분배'("집단들의 결집이나 합의가 달성되는 절차들, 권력의 조직화, 장소와 역할의 분배, 그리고 이 분배를 법적으로 정당화하는 체계")가 사실은 정치가 아닌 경찰의 일임을 폭로한다. 단, 그는 푸코를 참조하여 경찰활동의 의미를 폭력행사에 의한 질서유지 활동에 국한시키지 않고, 구성원들 각자에게 정당한 '몫'을 찾아주기 위해 사회가 행하는 그 모든 활동으로 확장시킨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분배란 언제나 사회의 한 '부분'으로 이미 인정받은 사람들(서로 '호혜성'이 형성된 사람들)이 다소간 평등한 방식으로 공동체로부터 자신의 몫을 찾아가는 일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들 간에 때때로 분배방식 등을 둘러싼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분배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가 누구인가(즉 누가 그 사회의 '부분'인가)를 둘러싼 논란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다. 만일 공동체에 어떤 기여도 한 바가 없으면서 자기 몫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면, 이들이야말로 '도둑심보'를 가진 자들로 분배에서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결국 경찰활동의 목표는 이러한 배제의 실현이며, 정치철학은 이를 정당화하고 이론화한다.
문학이 왜 정치적인가에 대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 <감성의 분할: 미학과 정치>(도서충판 b, 2008)을 참고한다. 원제는 "Le partage du sensible: esthétique et politique"이다. "감각적인 것의 나눔: 감성론/감각학과 정치"이라 할 때, 랑시에르가 말하는 "partage"는 사회 안/바깥의 개인들에게 각자의 몫과 자리를 나누어 주는 동시에, 그 몫과 자리에 따라 사회에 참여하도록/배제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두 뜻을 아우를 수 있는 좋은 우리말은 ‘나눔’이다.
또한 랑시에르는 이러한 나눔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감각하는 방식 사이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말할 수 있는 것 등이 "le sensible"이다. 이 단어는 자극이나 자극의 변화를 느끼는 성질을 뜻하는 감성보다는 문자 그대로 감각적인 것-감각되는 것과 감각할 수 있는 것을 동시에 뜻하는 것으로 세상으로 나간 문학은 생래적으로 분할의 운명에 놓이게 된다.
감각되는 것/감각할 수 있는 것을 나눈다니 무슨 말인가? 랑시에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1권의 표현에 주목한다. 거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불쾌의 감각에 바탕을 둔 소리(phonē)가 공적인 공간에서 하나의 말(logos)로 ‘들리지 않게’ 함으로써, 소리와 말,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나누었다. 이러한 나눔에 따라 사적 공간에 유폐되었던 노예, 여성, 노동자들은 동물과 다름없는 소리만을 가질 뿐, 의미있는 무언가를 논할 수 있는 말을 갖지 않은 존재로 지각되어왔던 것이다.
랑시에르의 대안은 명쾌하다. 자신의 말이 말로 셈해지지 않는 자들, 자신의 활동이 오로지 사적인 것으로만 간주되던 자들(랑시에르가 말하는 ‘몫-없는 자들’)이 바로 이 나눔의 방식을 문제삼기 위해서는 자신의 말이나 활동이 말로 그리고 공통적인 것으로 셈해지고 나뉘는 세계를 연출하여야 한다. 이로부터 필연적으로 두 나눔의 방식이 충돌하는 바, 이를 랑시에르는 불일치(dissensus), 계쟁(litige)이라고 이름짓는다. 한 마디로 정치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과 그에 대한 재편성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서 랑시에르가 말하는 "esthétique"은 단순히 미학이라기보다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게다가 랑시에르는 "esthétique"을 아름다운 것에 대한 이론이나 예술론, 혹은 감수성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그는 그 단어의 기원인 "aisthēsis"(어떤 대상, 행위, 표상에 의해 영향을 받는 방식, 감각적인 것을 겪는 방식)에 주목하는 동시에, 칸트가 말하는 감성적(미감적) 판단에서 그 단어를 끌어온다. 따라서 그것은 ‘감성(적)’으로 옮기는 것이 옳다. 요컨대 여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esthétique"은 ‘감성(적)’, ‘감성론/감각학’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랑시에르가 <문학의 정치>에서 예로 든 작가들 가운데, "플로베르가 구성한 감각적 사건의 시학에서 어떻게 작가의 입장과 그가 만들어낸 인물들의 입장이 구별되는지 분석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작가는 인물을 탈정치화하려고 하지만 그 인물의 병은 항상 정체화 되어 버린다. 따라서 앰마 보바리 또는 샤를르 보바리는 그 자체로는 무의미한 감각적 미시- 사건들과 대면하게 된다. 햇살, 물방울의 떨어짐, 플잎위의 곤충, 문 아래로 틈으로 새어드는 먼지 등등과 그리고 인물들은 이 사건들을 육화하려고 한다. 그들은 그 사건들의 개체성에 결부시키고, 결국 그들은 불행에 빠질 수밖에 없는 개체들 사이의 관계체계를 감수하게 된다."
문학의 정치는 먼저 사회를 해석하고 공통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이다.정치는 늘 공통세계와 이 공통세계에 우굴거리는 개체성의 형태들을 다시 서술하고 이 세계가 무엇을 포함하는지,ㅡ 어떤 가시성의 형태가 있는지, 그것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고,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정의하는 방식이다. 문학의 정치란 공통 세계를 재편성하는 정치다.
"문학은 수취인도 자신을 동반하는 주인도 없이 바람부는 진열대에서 작은 독서공간에 이르기까지 인쇄된 다발의 형태로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누구에게나 상황들 인물들 표현들을 제공한다. 이를 위해 인쇄물을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 문장은 문학의 문학에 대한 발언이다. 누가 문학을 위한 문학, 문학성만을, 문학의 순결성을 꿈꾸지 않겠는가?
문학의 정치는 작가의 정치나 몸소 실천하는 참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작가가 작품을 통해 사회구조, 정치적 투쟁 등을 표상하는 방식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문학의 정치라는 표현은 특정한 집단적 실천 형태로서의 정치와 글쓰기 기교로 규정된 실천으로서의 문학, 이 양자 간에 어떤 본질적 관계가 있음을 전제로 한다.
“문학의 정치는 작가의 정치가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자신이 사는 시대에서 정치적 또는 사회적 투쟁에 몸소 실천하는 참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작가가 저술을 통해 사회구조, 정치적 운동들, 또는 다양한 동일성들을 표상하는 방식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문학의 정치”라는 표현은 문학이 그 자체로서 정치행위를 수행하는 것을 함축한다. 따라서 이 표현은 ‘작가가 정치적 참여를 해야 하느냐’ 또는 ‘예술의 순수성에 전념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제기되지 않는다. 이 순수성 자체도 사실 정치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문학의 정치는 특정한 집단적 실천 형태로서의 정치와 글쓰기 기교로 규정된 실천으로서의 문학, 이 양자 간에 어떤 본질적 관계가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 책은 어떻게 문학혁명이 전통적 위계를 떠받들었던 감각적 질서를 전복시키는지 그리고 왜 문학적 평등이 문학을 정치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시도나 문학을 전통적 자리에 귀속시키려는 시도에서 비켜나는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이 책은 플로베르, 톨스토이, 말라르메, 브레히트, 보르헤스 등의 작품들을 분석하면서 이러한 가설을 증명한다. 또한 이러한 문학혁명의 결과가 어떻게 정신분석학적 해석, 역사적 서술 혹은 철학적 개념화에 영향을 미치는지 진술하고 있다.
자크 랑시에르(Jacoues Ranciere)는 1940년 알제리 출생. 프랑스 고등사범학교(Ecole Normale Superieure)를 졸업했다. 파리 8대학에서 1969~2000년까지 철학교수로 재직했고 2008년 현재 파리 8대학의 명예교수이다. 루이 알튀세(Louis Althusser)의 수제자로서 1965년 <자본론 독해, Lire le Capital> 작업에 참여해서 명성을 얻었으나 1968년 프랑스 학생운동을 기점으로 루이 알튀세와 결별했다. 결별의 이유는 마르크시즘의 엄격한 과학성과 결정론적 사상에 충실했던 알튀세와 실천 중심의 마오이즘(Maoism)에 경도되어 있던 랑시에르의 견해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특히 루이 알튀세의 단정적 언어해석 원칙에 반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알튀세와는 다른 노선을 추구했고, 1974년 <알튀세로부터의 교훈, La lecon d'Althusser>을 출간하면서 알튀세의 사상을 비판했다. 1970년대 말 이후에는 젊은 좌파성향의 지식인들-조앙 보렐(Joan Borell), 아를레트 파르쥬(Arlette Farge), 쥬느비에브 프레스(Genevieve Fraisse)-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노동해방 연구에 몰두하면서 <프롤레타리아의 밤>, <노동자의 꿈에 대한 보고서>를 집필했다저서로 <무지한 스승, Le Maitre Ignorant 1987>, <정치의 주변부에서, Aux bords du politique1990>, <침묵의 언어, La parole muette 1998>, <문학 정치, Politique de la litterature 2007>, <미학 안의 불편함, Malaise Dans L'esthetique 2004>, 외 다수가 있다.
문학은 문학의 자율성, 문학만의 오롯한 존재성을 말할 때도, 문학은 운명적으로 정치적이다. 직접 발로 뛰어든 정치든, 정치를 등진 탈정치의 정치든, "문학(미학)은 우연히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미학은 감각적 경험을 분해하는 체재이기 때문"이란 랑시에르의 말에 오늘은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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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우 "랑시에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http://blog.naver.com/sinthome/40065756441 를 읽다,
다른 포스팅에서 이런 문장을 읽었다.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을 가게 하지 않겠나이다." 야곱이 정강이를 걷어차이면서, 야뽁 나루터에서 '스스로 존재하는 자' 신에게 한 말이다.
“미학은 감각적 경험을 분배하는 체제다”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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