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주의의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는 라이프니츠를 조롱하는 철학적 소설 [캉디드]를 썼다. [캉디드]에는 팡그로스 박사가 등장하는데, 그는 말할 것도 없이 라이프니츠의 분신이다. 팡그로스는 세상의 온갖 불합리와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최선의 세계라고 믿으며 목적론적 세계관을 포기하지 않는다. 볼테르는 팡그로스를 조롱하면서 매우 시사적인 말로 [캉디드]를 마무리한다. “내가 내 밭을 일구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이 완전한 신에 의해서 최선의 세계로 창조되었다고 믿으면서 신의 섭리만을 기대하는 어리석음을 조롱하고 인간인 내가 무엇인가를 직접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편 프랑스의 또 한 명의 계몽주의 철학자 디드로는 라이프니츠를 어떤 철학자보다도 많은 업적을 남긴 사람이라고 말하고, 라이프니츠를 플라톤에 비견할만한 철학자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뿐만 아니라 디드로는 “우리가 우리의 재능을 라이프니츠의 재능과 비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저서들을 집어던지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퉁이에서 조용히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처럼 한편으로는 조롱을 받고, 또 한편으로는 천재라고 칭송되는 라이프니츠, 그는 도대체 어떤 철학자이기에 이처럼 조롱과 찬사를 동시에 받는 것일까? |

사실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핵심적인 사고를 집대성한 걸작이라고 할 만한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그의 주요 저서로 [단자론], [변신론] [인간 오성에 관한 새로운 시론], [형이상학에 대한 담론] 등이 꼽히지만, 그 어느 것도 그의 모든 철학 체계를 아우르는 저서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의 많은 저술은 학술지나 대중적인 잡지에 기고한 글이거나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로 구성되어 있고, 그의 저술은 현재까지도 완전히 출간되지 않은 상태이며, 여전히 새롭게 출간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그의 전체 철학체계를 조망하고 그의 핵심적 철학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퍼즐 조각을 맞추듯이 여러 저술들에 드러나 있는 그의 사상을 종합해야만 한다. 이런 이유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라이프니츠의 철학에 대한 해석은 매우 극단적으로 나뉜다. 볼테르의 조롱과 디드로의 찬사 이외에, 라이프니츠 철학체계를 매우 논리적이고 정합적인 체계라고 주장하는 철학자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그의 철학은 일관성이 없다고 비판하는 철학자도 있다.
우리는 라이프니츠 철학 중에서도 흔히 단자론이라고 알려진 그의 형이상학에 대해서 조망해보고자 한다. 그런데 단자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철학 체계에서 중요한 몇 가지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첫 번째 원리는 ‘어떤 명제도 동시에 참이면서 거짓일 수 없다’는 모순율이다. 라이프니츠는 이 모순율을 근본적 진리라고 불렀다. 이 원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것이고 달리 증명할 길이 없다는 뜻으로 근본적 진리라고 불렀을 것이다. | |
두 번째 원리는 라이프니츠의 진리에 관한 이론으로 유명한 ‘술어 포함 개념 원리’
이다. 이 원리는 참인 명제는 모두 궁극적으로 주어의 개념에 술어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이다’는 명제가 참인 한, 이 문장의 주어인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개념을 분석하면 ‘철학자’라는 개념이 들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개념에는 ‘철학자’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 ~한 철학자’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이다’는 명제는 결국 ‘~ ~한 철학자는 철학자이다’가 되고, 이는 ‘A는 A이다’라는 형식의 문장에 다름 아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이다’와 같이 참인 명제는 궁극적으로 ‘동일률(A는 A이다)’의 명제로 환원된다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술어포함 개념 원리 이다.
세 번째 원리는 충분 이유율인데, 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나 발생하는 현상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존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발생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술어포함 개념 원리로부터 파생되어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이다’가 참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자이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없고, 그가 철학자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에는 ‘철학자’라는 개념이 반드시 포함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술어포함 개념의 원리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이다’가 참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 개념에는 ‘철학자’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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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과 찬사라는 양 극단의 평가를 받았던 철학자 라이프니츠. |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이다’가 참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이기 위한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술어포함 개념 원리로부터 따라 나오는 충분 이유율은 형이상학, 물리학, 도덕철학 등의 토대가 되기 때문에, 라이프니츠는 이 원리를 인간의 모든 지식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유익한 것이라고 말한다.
네 번째 원리는 완전한 신은 그 행위에 있어서도 완전하고, 신은 항상 최선을 지향한다는 것으로 최선의 원리라고 한다.
다섯 번째 원리는 식별불가능자의 동일성 원리이다. 이 원리에 따르면 두 개의 대상이 모든 속성을 공유하고 있어서 그 차이를 식별할 수 없다면, 즉 두 개의 대상이 그 속성에서 있어서 완벽하게 같다면, 그 둘은 동일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속성에 있어서 완전하게 닮았음에도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대상이 존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앞에서 말한 최선의 원리와 충분 이유율을 이용해서 다음과 같이 증명할 수 있다.
1) 식별불가능자의 동일성 원리가 옳지 않다면, 이 세계(W)에 속성은 동일하지만 구별 가능한 두 개의 대상 A, B가 있을 것이다. 2) 모든 점에서 W와 동일하지만, A와 B의 위치만 바뀐 가능세계(W')가 있을 것이다. 3) 신이 W와 W' 중에서 W를 최선의 것으로 선택했다면, 그 선택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4) W와 W' 사이에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없다. 5) 따라서 식별불가능자의 동일성 원리는 성립한다.
이상의 원리들을 토대로 라이프니츠가 어떻게 그의 형이상학을 전개했는지 살펴보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의 핵심적인 물음이다. 그는 이에 대해서 지각과 의지를 지닌 활동적인 단위인 단순실체(simple substance)가 바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실재하는 것을 단순실체라고 주장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복합체는 단순체의 집합이다. 2) 복합체는 모두 그것의 존재에 있어서 단순체에 의존한다. 3) 실체는 그것의 존재에 있어서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기충족적인 것이다. 4) 그러므로 부분을 가진 것은 실체일 수 없다. 즉 실체는 복합체일 수 없다. | |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실재하는 단순실체를 단자(Monad) 라고 불렀다. 실체로서 단자는 단순하기 때문에 더 이상 나눌 수 없다. 더 이상 나눌 수 없기 때문에 물리적 대상일 수도 없다. 그러니까 단자는 공간에 존재하는 물리적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현실세계에 공간을 차지하는 물리적 대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라이프니츠는 이에 답하기 위해서 무지개의 비유를 든다. 무지개는 실제로는 무색의 물방울 입자로 구성되어 있지만, 색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실재 세계는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점과 같은 단순한 실체인 단자로 구성되어 있지만, 단자들의 표상에 의해서 물리적 대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 |

피타고라스의 Monad : 고대 철학자들에게 있어 Monad는 신, 즉 하나인 존재(더 이상 나눌 수 없는)를 지칭하기 위한 말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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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는 실체는 복합체일 수 없다는 주장을 증명하는 위 논증에서 ‘실체는 자기 충족적(self-contained)’이라는 전제를 사용한다. 실체가 자기 충족적이란 무슨 뜻일까? 앞에서 설명한 술어포함 개념 원리를 기억하자. 그 원리에 따르면 모든 참인 명제는 주어의 개념에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술어의 개념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 술어포함 개념 원리에 의해서 어떤 실체가 갖는 개념은 그 실체에 귀속될 수 있는 모든 술어를 포함해야 한다. 즉 X라는 실체 개념에는 X에 귀속되는 모든 술어가 이미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실체라고 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에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주어에 귀속될 수 있는 모든 술어(‘철학자이다’, 플라톤의 제자이다’, ‘알렉산더의 스승이다’ 등)가 포함된다. 어떤 실체 X의 개념에는 그것에게 과거에 발생했던 모든 것의 흔적이 포함되고 앞으로 발생할 모든 것의 표지가 포함되며, 또한 우주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의 자취까지 포함된다. | |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실체의 완전한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유일한 개별자로 기술하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개별자와도 구별해 주는 개념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실체의 개체성(thisness)은 그 실체의 속성 전체에 의해서 결정된다. 다시 말해서 실체는 자신의 개념에 의해서 다른 실체와 구별된다. 그리고 실체의 개념에 그렇게 모든 것이 포함된다는 의미에서 실체는 자기 충족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실체로서 단자도 자기 충족적이다. 이렇게 실체로서의 단자에는 우주의 모든 역사가 들어 있다는 점에서, 라이프니츠는 단자를 우주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즉 모든 단자는 자신의 방식으로 우주 전체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또한 식별불가능자의 동일성 원리에 의해서 본성에 있어서 동일한 두 개의 단자는 있을 수 없다. 만약 두 개의 실체, A와 B가 그 개념에 있어서 구별할 수 없다면, 그 개념들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A와 B의 완전한 개념은 그것의 개체성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즉 A와 B를 구별할 수 있게 해주는 근거는 바로 그 실체들의 개념에서 발견되어야 그 개념은 완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실체는 자신의 개체성을 보증해주는 완전한 개념을 가질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완전한 개념을 갖는 실체는 우주에 단 하나뿐이다.
단자가 자기충족적이라는 사실이 함축하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주장은 단자들 사이에는 어떤 인과관계도 없다는 것이다. 모든 실체는 자신이 갖는 속성에 대해서, 그 실체가 그러한 속성을 가질 이유를 그 개념 안에 포함하고 있다. 즉 실체의 모든 상태는 실체의 완전한 개념에 의해서 설명되고, 근거가 제공되고, 야기된다. 그렇기 때문에 단자들 사이에 인과관계는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각 단자는 신 이외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단자들은 서로 상호 영향을 주고받지 않으며, 서로 어떠한 인과적 영향도 주고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라이프니츠의 단자가 ‘창이 없다(windowless)’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 |

각 단자가 전체 우주를 비추지만 단자들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는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라이프니츠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유명한 괘종시계의 비유를 든다. 매 순간 정확하게 같은 시각을 가리키는 두 개의 괘종시계가 있다고 하자. 그 괘종시계가 매 순간 정확하게 같은 시각을 가리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가능한 첫 번째 대답은 두 개의 시계가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시계가 다른 시계에 영향을 줌으로써 항상 같은 시각을 알리도록 작동한다고 답하는 것이다. 두 번째 가능한 대답은 시계공이 매 순간 계속해서 같은 시각을 알리도록 뒤에서 조작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대답은 두 시계 모두 애당초 빈틈없이 정교하게 제작되어 독립적으로 작동하지만 매 순간 정확한 시각을 알려준다고 답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마지막 대답이 가장 설득력 있고, 이 우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주장이다. 즉 신은 애당초 두 개의 실체가 이미 스스로 타고난 고유의 법칙을 지킴으로써 서로 완전한 조화에 도달할 수 있도록 창조했는데, 이런 사실이 두 개의 실체가 마치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인식되거나 아니면 신이 언제나 손수 개입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신은 매 순간 각 단자의 지각이 매우 정교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각 단자와 단자의 본성을 창조했다. 요컨대 모든 단자는 완전한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창조될 때 그것의 완전한 본성을 부여 받고 그것에 따라 운동하고, 지각하고 발전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완전한 신의 예지에 의해 예정된 것이라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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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의 단자론 첫 필사본. |
18세기 철학자들의 공통된 과제는 자신들의 사상적 배경인 스콜라 철학과 17세기 등장한 기계론적 자연철학과의 갈등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였다. 라이프니츠는 그의 철학의 하부구조에 해당하는 논리학을 토대로 신의 완전한 이성이 이 세계를 어떻게 창조하고, 움직이도록 설계하였는지에 대한 형이상학을 제시한다. 그는 물리적 현상을 설명하는 자연법칙과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도덕법칙이 어떻게 신의 완전성을 통해서 조화를 이루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스콜라 철학의 목적론과 근대 자연철학의 기계론이 결코 갈등관계에 있지 않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 |
- 술어포함 개념 원리
모든 참인 명제는 그것이 보편명제든, 특칭명제든 술어의 개념은 주어의 개념에 포함되어 있다는 주장으로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의 토대가 되는 원리 중 하나이다.
- 단자
하나를 의미하는 그리스 어의 모나스(monas)에서 나온 ‘모나드’의 번역어로 실재를 구성하는 단순실체(simple substance), 개체적 실체(individual substance)이다. 단자는 외부 세계로부터 독립된 지각을 지니고 있고,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힘인 단자의 욕구는 창조 때부터 내재해 있다.
- 글 송하석 / 아주대 철학 교수
- 불어불문학을 공부하다 철학에 관심을 갖고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학교에서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클레어몬트 대학에서 진리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언어철학, 심리철학, 논리학에 관한 여러 논문을 발표하였고, 우리 사회가 논리적인 사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리더를 위한 논리훈련]을 출간하였다. 지금은 아주대학교 기초교육대학에서 철학과 논리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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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르네상스의 출발지인 플로렌스에서 활약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을 그린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건축가, 도시설계, 기계설계, 무대의상, 수학, 철학, 해부학 등 다루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로 만능 천재였다. 약 200년 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난 라이프니츠 역시 철학, 수학, 물리학, 지리학, 생물학, 정보기술, 법률가, 어학, 중국학 등등 수많은 분야에서 ‘처음으로 …을 했다’라는 평을 듣는 다빈치와 동일한 유형의 인간이었다.
물론 다빈치와 라이프니츠와 같은 만능 천재들은 평생 한 우물을 파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를 파면 샘이 나올지를 직감과 영감으로 알아차렸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샘솟는’ 아이디어를 주체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호기심을 좇아 방랑하는 지적 유목민(nomade)이었지만 동시에 후원자(patron)를 찾아 이곳 저곳을 돌아다녀야만 했다. |

라이프니츠는 20살이 되던 해인 1666년에 [조합의 기술에 대하여(On the Art of Combinati ons)] 문헌에서 모든 개념들을 제한된 수의 단순한 개념들의 조합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생각을 피력하였다. 예를 들어, 모든 명제를 복합명제(분자명제)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단위명제(원자명제)들로 분류하고, 전자를 후자의 조합으로 보는 현대 명제논리학의 기본적 발상은 사실 라이프니츠에서 출발하였다. 라이프니츠의 이 발상은 19세기 말 독일의 논리철학자 프레게(G. Frege)가 [개념표기법(Begriffsschrift)]에서 형식적으로 완성하였다.
특히 우리의 일상언어가 갖는 애매함을 제거하고 모든 문화권에서 사용할 수 있는 보편언어의 발명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관심은 20세기 초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 -Philosophicus)]에서 피력한, 세계를 그림처럼 기술할 수 있는 ‘이상언어(ideal language)’의 발상과 다를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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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로 북경에 파견된 조아심 부베의 모습. |
“일종의 보편언어나 문자는 지금까지의 모든 언어와 무한히 다를 것이다. 왜냐하면 보편언어에서는 기호나 단어가 이성을 지도하게 되며, 사실판단을 제외하면 모든 오류란 단순히 계산상의 착오일 뿐이다. 이러한 언어 혹은 기호를 발명하거나 구성하는 것은 매우 어렵겠지만, 어떤 사전도 없이 매우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독창적인 생각은 그 당시에는 학자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보편언어 프로젝트에 대하여 알고 있었던 북경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 부베(J. Bouvet) 신부는 1700년 주역의 64괘 그림을 라이프니츠에게 편지로 보내왔다. 주역의 괘를 보고 라이프니츠는 답신에서 그의 이진법 발상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과 ‘−’의 두 기호(爻)를 6개 조합하여 만든 주역의 64괘를 0에서 63까지 64개의 수와 대응시키는 것은, 돌이켜 보면, 어려운 작업은 아니다. ‘--’과 ‘−’을 6층 쌓아 올릴 경우 우리는 총 64개의 서로 다른 형태(卦)를 얻게 되므로, 이들을 0에서 63이든 100에서 163이든 64개의 서로 다른 수의 이름(고유명사)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숫자 표기의 문제일 뿐이다.
라이프니츠의 이진법 발상에서 중요한 점은 ‘--’과 ‘−’이든 ‘0’과 ‘1’이든, 혹은 ‘♀’과 ‘♂’이든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두 개의 기호를 체계적으로 반복할 경우, 지금까지 10진법으로만 표현되었던 모든 수를 완전히 표현할 수 있고, 또 기존의 더하기, 곱하기 등 연산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체계적 발상’에 있다. 우리는 이진법 연산이 현대의 컴퓨터 회로의 ‘off’와 ‘on’으로 물질화·기계화되어 어떤 문명사적 결과를 낳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 |


라이프니츠의 이진법은 분명히 구분되는 두 개의 기호(예를 들어 0과 1)를 체계적으로 반복할 경우 지금까지 10진법으로만 표현되었던 모든 수를 완전히 표현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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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진법의 계산적 측면보다 신에 의한 세계의 ‘예정조화설’을 제안한 기독교 사상가 라이프니츠가 중국의 주역과 그의 이진법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주역의 − 또는 1을 神으로, -- 또는 0을 無로 해석하여, 모든 수가 이 두 기호로 표현될 수 있다는 점을 ‘神이 無에서 세계의 모든 존재를 창조하였다’는 기독교의 창세기 설화로 해석하였다. 즉 수학적으로는 수의 표기법에 불과한 이진법이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는 절대적 존재인 神의 창조언어, 일종의 안무(choreography)로 간주되었다. 그에 의하면 이 세계를 이진법의 보편언어로 번역할 수 있을 때에만 가시적 현실세계 저편에 있는 창조의 영상, 즉 완벽한 지식과 아름다움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은 계산할 때 창조하였고, 창조할 때 계산하였다.
그렇다면 라이프니츠가 이진법의 철학적 해석에서 도입한 無란 무엇일까? 우리는 뉴턴이 그의 역학에 도입한, 어떤 물체도 존재하지 않는 無로서 ‘절대공간’을 라이프니츠가 부정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공간과 시간이란 “마치 가능자들(possibles)이 존재하는 것처럼 가정할 때의 이들 간의 질서”였다. 다른 한편 라이프니츠는 “신은 존재뿐 아니라 가능성의 원천이고…, 신은 당신에게 좋다고 생각되면 無를 채울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無란 이와는 반대로 구체적 존재를 지각하기 전의 상상에 불과하다”고 보았다([New Essay]). 즉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공간과 시간은 구체적 존재들간의 관계로부터 추상(abstract) 되어 가능성의 영역에 속할 뿐이며, 결코 현실의 영역에 속한 것은 아니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1905년 그의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부정한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을 라이프니츠는 이미 250년 전에 그의 철학적 사유를 통해 정당화 될 수 없음을 간파하였다. 다른 한편 현실성을 상실한 無란 우리의 상식적 사유방식에 반(反)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 |

無의 이중적 성격과 함께 우리의 직관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라이프니츠가 수학사에 남긴 또 다른 업적인 미적분(calculus)에 도입한 무한소(infinitesimal) 개념이다. 여기서 라이프니츠가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뉴턴의 미적분을 훔쳤다는 주장에 대한 역사적 논쟁을 돌아볼 필요는 없다. 수학사를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은 이미 라이프니츠에게 씌어졌던 표절의 누명을 벗겨주었다. | |
물론이다. 그러나 Δx가 무한히 작을 때, 우리가 배운 도함수 f'(x)=2x를 구하기 위해서는 (2x+Δx)에서 Δx를 잘라내기 위해 Δx=0이라고 계산해야 한다.
바로 ‘0이 아니고 0이기도 한 변량 Δx’를 라이프니츠는 그의 미적분에서 무한소 개념을 통해 도입했다. 그러나 이런 괴이한 개념을 앞에 두고 철학자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논리적 모순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다름없다. 특히 철학자의 윤리가 정당성의 확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모순의 수용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영국의 철학자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는 이 무한소 개념을 사용한 수학자들을 ‘신앙심 없는 수학자(infidel mathematician)’라고 그의 책 [분석자(Analyst)]에서 통렬히 비판하였다.
다른 한편 라이프니츠와 뉴턴의 발명 이후 무한소를 이용한 미적분은 수학을 사용하는 모든 과학과 공학에서 널리 사용되어 왔으며, 그 이유는 현실에 상응하는 정확한 값을 미적분이 계산해 주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미적분은 많은 학문의 연장이 되었으며, 이공계나 경제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미적분을 모른다면 그것은 망치나 톱과 같은 기본 연장 없이 목수일을 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무한소 개념에 내적 모순이 있든 없든, 필요하다면 인간은 반드시 사용한다. 그것은 집합론에 모순이 있음이 러셀(B. Russell)에 의하여 발견되었지만, 수학자 힐버트(D. Hilbert)는 “어느 누구도 수학자를 집합이라는 파라다이스로부터 추방할 수는 없다”고 말한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 |

이런 현실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수학에는 반드시 탄탄한 기초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수학자와 철학자에게 무한소 문제는 일종의 ‘마음의 빚’을 의미하였다. 수학사에서는 ‘무한소-미적분’이 야기한 이 마음의 빚을 19세기 독일의 수학자 바이어슈트라스(K. Weierstrass)가 ‘(ε, δ)-극한값 정의’를 통해서 갚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바이어슈트라스의 정의에서도 무한소의 개념이 갖고 있던 내적 모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훨씬 더 교묘한 방식으로 은폐되어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다른 한편 ‘무한소’, ‘연속’, ‘경계’와 같은 친족개념들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일종의 내적 모순을 이 글의 앞에서 언급한 우리의 만능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어떻게 해결하려고 시도하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라이프니츠 주제에 의한 다빈치 변주곡’처럼 흥미롭다. (먼저 태어난 다빈치가 이런 무례를 용납하지는 않겠지만!)
두 물체 사이에 놓인 어떤 물체는 그들의 접촉을 방해하지만 물과 공기는 어떠한 매개도 없이 서로 접촉하기 때문에 공기도 물도 아닌, 그러나 실체가 없는 공통된 경계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노트북』)
참고로, 르네상스 시대 그림기법 중의 하나인 ‘스푸마토(sfumato)’를 다빈치는 “마치 연기에 덮인 듯 혹은 초점이 흐려진 듯 선이나 경계가 없이”라고 기술하였다. 그의 [모나리자]가, 특히 눈의 음영이 기법을 사용한 대표적 사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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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나 경계가 없이 흐려진 듯한 표현기법인 '스푸마토'를 이용한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눈의 음영. | |
- 효와 괘
효(爻)는 주역의 64괘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효를 셋 쌓으면 소성괘(小成卦)인 8괘를 얻을 수 있다. 이 중의 4개가 태극기에 사용된다.(☰, ☷, ☵, ☲) 소성괘를 위 아래로 중첩시키면 대성괘(大成卦) 64괘를 얻을 수 있다.

- 추상(abstraction)
철학에서 추상이라 함은 일련의 개별자의 여러 특징들 중에서 공통적인 속성만을 추출하는 (나머지는 제거하는) 행위를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한국인에 대하여 언급할 때, 男, 女, 老, 小, 職業 등은 모두 버리고 오로지 한국인이라는 공통적인 속성만을 취하여 새로운 추상적 존재를 만든다. 따라서 추상화는 일상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가장 대표적인 추상이 집합추상(class abstraction)이며 집합은 이런 의미에서 추상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K={x|x는 한국인이다.} 이때 집합 K는 구체적인 한국인들로부터 한국인이라는 점 이외의 모든 속성을 버리고 얻은 추상적 존재이다.
- 글 홍성기 / 아주대 기초교육대학 교수
- 서울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대학교 철학과 석사, 자르란트대학교 철학과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현 아주대학교 기초교육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용수의 논리], [불교와 분석철학], [시간과 경계], [고전 논리학과 대화 논리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