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느 날 영문 모르고 태어나 먹고 자고 마시고, 때로 기뻐하거나 슬퍼하다 소멸을 맞는다. 이런 한 평생이 너무 허망하다고 느껴 자연히 이렇게 묻게 된다. 인생에 어떤 숨겨진 최상의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목적은 우리를 창조한 어떤 이로부터 부여 받은 것이 아닐까? 창조를 통해 자신의 목적을 우리에게 심어놓은 이는 그 목적이 실현될 수 있도록 세상 만물을 우리를 위해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문들과 더불어 삶의 배후에 보이지 않는 목적과 그 목적을 창조한 이에 대한 학문이 생겨난다. 그 학문은 때로는 신학으로, 때로는 형이상학으로 불리며 인류의 역사에 개입했다. 그런데 이때 우리의 진정한 삶은 오히려 소멸하는 것은 아닐까? 바로 지금의 삶은 최상의 목적보다 ‘열등한 형태’,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여겨지면서 ‘부정’되는 것은 아닐까? 스피노자는 바로 이러한 편견을 교정해서 삶 자체를 긍정하는 법을 알려준 사람이다. 스피노자 연구가 델보스가 말하듯, 삶은 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이 삶을 긍정하는 이성의 방식이 바로 스피노자의 철학이다. |
스피노자는 1632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이루어가고 있는 중인 신생 국가 네덜란드의 황금기에 유대인 사회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그는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을 『신학정치론』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암스테르담은 상당한 번영을 이루고 전 세계가 감탄할 정도의 자유의 성과를 누리고 있다. 이 번창하는 도시에 모든 인종과 종파의 사람들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분명 사상과 종교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네덜란드적 분위기의 산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네덜란드는 “국가의 목적은 자유이다”라는 스피노자의 말을 어떤 의미에선 배반하는 국가가 아니었는가? 대표적인 예가 드 비트 형제의 학살일 것이다. 군주제와 군국주의를 선호하는 칼뱅파에 맞서 평화주의를 내세우며 네덜란드 공화정의 절정을 가져온 재상 요한 드 비트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하자 칼뱅파는 쉽게 대중들을 부추겨 요한과 그의 형제 코르넬리스를 학살했다. "극악무도한 야만(Ultimi barbarorum)!"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국민들 스스로 공화정을 저버리고 예속을 위해 싸운 것이다. 예속이란 주어진 본성을 억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타고난 삶을 부정하는 것, 바로 자기 자신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일이다.
이렇게 네덜란드는 자유와 예속의 체험 모두를 통해 스피노자의 사유를 자극했다. 스피노자가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당한 파문을 감수한 것,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 초빙을 거절한 것 등은 모두 그의 삶 전체가 예속에 맞서 자유를 획득하고자 하는 노력이 이루어낸 하나의 작품임을 알려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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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속을 벗어난 자유의 철학을 주장한 스피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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