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명랑성에 담긴 치유와 용서, 벗어남의 자기정화능력

나뭇잎숨결 2009. 2. 25. 23:40

 

 

수많은 자유 속에서 웃을 자유와 웃지 않을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하루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웃음도 습관이다. 웃을만해서 웃게되는 하루도 있지만 웃으니 웃을만한 하루가 되기도 한다. 또 웃어도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 왜 웃어야 하나? 강박적으로 웃을 수는 없다, 웃음 다이어트, 웃음치료...등등...웃음은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강조된다. 때론 눈물이 웃음을 능가하는 치료효과를 줄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왜 웃어야 하나? 단적으로 눈물은 상황을 받아들임이라면, 웃음은 상황을 초월하고 벗어남이다. 상황의 변화와 무관하게. 깃털처럼 가벼워져 우주를 비행하는 것이다. 지구를 들어올리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 물구나무서기와 웃음이다. 죽음 앞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았던 지인들이 계셨다.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창세기의 첫 장은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신의 긍정(웃음)으로 문을 연다. 내가 생각하는 부처나 예수는 잘 웃으시는 분이셨다. 부처의 웃음, 예수의 웃음, 노자와 장자 역시 마찬가지다. 웃음이 아니라면 그들은 현실에서 가장 비참한 삶을 살다간 빈자의 미학일 것이다. 김수환추기경님을 좋아하는 이유는 나이가 들수록 그분은 점점 더 천진한 웃음을 웃으셨던 데 있다. 그분이라고 늘 상황이 웃을만 하셨겠나. 한국문학의 전통 역시 풍자와 해학으로 부터 시작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웃음은 모순과 부조리의 상황에서 그 상황을 벗어난 자의 자기정화능력의 외적 표현이다. 웃음은 단지 근육의 운동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인식과 받아들임, 그리고 훨훨 벗어났다는 대 긍정에서 시작된다. 모짜르트 고흐, 그들의 명랑성, 웃음을 생각해 보면 그렇다. 고금소총. 1

 

꼭 웃어야 하는가? 왜 웃는가? 웃음은 전통적으로 생리 철학 심리 미학적 측면에서 주로 다뤄져 왔다. 이에 대한 연구는 10세기 이슬람 철학자인 아부 하이얀 알-타우히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후 지금까지 학문적으로 규명한 웃음의 본질은 대략 70여 가지에 이른다.
판소리의 정서와 미학
타우히티는 웃음을 인간의 사유능력과 동물성 사이의 중간영역에 뿌리를 둔 ‘어떤 힘’으로 규정했다. 어떤 힘이 사유능력 쪽으로 치닫게 되면 영적 힘을 발휘하고 동물성 쪽으로 향하면 영적 힘을 표출시킨다는 것이다. 이 영적 힘은 다시 기쁨 혹은 쾌감 그리고 분노로 나누어진다. 이 힘이 내부로 스며들면 기쁨이나 쾌감이,외부로 발산하면 분노로 터져 나오게 된다는 주장이다. 내부로 스며든 힘은 마약성분보다 훨씬 강한 도파민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바로 기쁨이나 쾌감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 타우히티의 견해다.


웃음의 미학
임마누엘 칸트는 ‘웃음은 고조된 기대가 갑자기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변화되는 데서 생기는 강렬한 감정’으로 정의했다. 기대했던 것에 대한 돌연한 소실의 결과로 해석한 것이다. 또 쇼펜하우어는 ‘웃음이란 돌발적 사건이 유발되면서 나타나는 우스운 심리상태’로 봤고 마르세르 파뇰은 ‘돌연한 긴장으로부터 해방’으로 정리했다.
웃음의 미학
그런가 하면 ‘타인의 불행’(데카르트),‘큰 사건은 아니지만 타인이 권위를 상실했을 때’(알랙산더 페인),‘기계적인 것과 살아 있는 것 사이의 모순’(베르그송) 등으로 규정해 웃음의 본질은 보는 시각에 따라 혹은 시대 흐름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웃음에 대한 다양한 본질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첫번째가 우월론이다. 나와 남을 비교하면서 ‘너는 역시 나보다 못났구나’라는 순간적인 우월감에 젖어 웃음이 일어난다는 학설이다. 개그맨이 바보연기를 하면 관객은 박장대소하는데 이는 자신이 웃음의 대상보다 역시 잘났구나라고 생각한 데서 비롯된다는 견해다. 우월론 입장에서 보면 내가 남을 보고 웃어야 속이 시원하다는 견해지만 자신이 남의 웃음거리가 되면 불쾌하기 짝이 없게 된다. 이 학설은 훗날 사디즘(Sadism)적 행위와 연결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측면에서 이론의 한계가 있다고 여겨진다.

둘째,기대상실론이다. 사람들이 우월감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기대가 상실됐을 때 웃음이 터진다는 주장이다. 머릿속에 생각했던 개념과 실제 일어난 일 사이의 부조화가 웃음을 자아낸다는 이론이다. 빗나간 상식이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사회론이다. 사회적 요구에 적응하지 못해 웃음거리의 원인이 된다는 견해다. 시대에 너무 뒤떨어진 이상한 옷차림,육체적 혹은 정신적인 장애,무학 무능 등이 웃음의 대상이 된다. 이런 웃음의 공통점은 뭔가 결함을 가지고 있으며 통상적인 수준이나 표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들이 웃음의 원인을 제공한다는 학설이다. 사회적 일탈현상이 웃음의 대상이다. 따라서 이 이론에 따르면 웃음은 일탈현상을 배척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이런 이론 외에도 안도감의 이론,인지반응 이론 등 웃음에 대한 학설은 다양하지만 이를 종합해 볼 때 웃음은 우월감과 빗나간 상식 그리고 언어적 유희 등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고흐의 그림에 나타나는 강렬한 노란색으로 표현되는 명랑성은 고흐의  달관이자, 의지다.

웃을만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니까 웃을만해 진 것이다.

 

 

Vincent van Gogh. Still Life with Open Bible. April 1885

 

 

 

 

Vincent van Gogh. Drawbridge with Carriage. March 1888

 

  

 

 Vincent van Gogh. Drawbridge with Lady with Parasol. May 1888.

 

  

 

 

 Vincent van Gogh. Farmhouse in Provence, Arles. 1888

 

 

 

 Vincent van Gogh. Harvest Landscape. June 1888

 

 

다음의 이웃블로거 김홍기님이 쓴 <하하미술관>을 읽어보자.

스웨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신기합니다. 실의 고리를 만들고, 이 고리에 실을 건 후 새 고리를 만드는 걸 계속해서 반복하지요. 14세기경 북유럽 항구 지역 여인들의 손에서 짜이기 시작한 이 니트는 원래 물고기를 잡는 어망의 형태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합니다. 방한용 니트 스웨터는 특히 추운 겨울의 칼바람을 막고 습한 기운에서 인체를 보호해주는 기능을 했기에, 많은 여성들이 고기잡이를 나간 남편이나 애인을 위해 부적을 그리듯 한 땀 한 땀 손으로 스웨터를 짰다고 합니다. 여인의 따스한 사랑이 담겨 있는 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스웨터를 짜기 위해 실 한 올 한 올의 고리를 서로 엮어야 하듯, 인간과 인간의 고리가 엮어져 촘촘한 관계의 망을 만드는 원리가 들어 있음을 배웁니다. 
                                                                                                           <인생은 잘 짜인 한 벌의 스웨터>에서(본문 26쪽)

<웃는 얼굴―소년>이란 그림을 보면, 빨강색 조끼에 줄무늬 셔츠를 입은 꼬마의 가지런한 두 손이 유독 곱습니다. 환하게 웃을 때 황톳빛 대지에 퍼져가는 꽃 이파리도 예쁘지요. 특히 이 그림에선 노란색 배경이 눈에 선합니다. 괴테는 노란색을 가리켜 빛에 가까운 색이라 했고, 노란색을 갖고 싶은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빛의 밝음과 따뜻함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했지요. 작가는 노란색이 소년의 빛깔이라고 생각해서, 배경에 노란색을 자주 썼다고 합니다.
이 그림을 그리던 당시, 이전의 민화 작업을 정리하고 새로운 그림 형태를 모색하던 화가는 마음이 많이 심란했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아내에게 경제활동을 맡기고 전적으로 그림에만 전념하던 시절이라 미안한 마음에 웃는 얼굴을 더욱 잘 그리고 싶었다고 하네요. 함박웃음을 짓는 얼굴을 그리고 나면 세포 하나하나에 스마일 표시가 그려지는 것 같았다고 하니, 화가 자신에게도 그림이 치유 효과를 발휘했나 봅니다.
                                                                                                               <웃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에서(본문 45-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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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게 때문에,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여행이 어려운 분들을 위해, 제가 머리를 짜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여행했던 곳의 풍경 사진, 혹은 그곳에서 직접 찍은 사진들을 꺼내보세요. 이도 저도 없다면, 잡지나 신문을 꺼내어 여러분이 가고 싶은 장소를 선정한 후, 가위로 오려내어 도화지 위에 하나씩 붙여보세요. 어떤 사진들이 붙어 있나요? 광막한 푸른 산맥과 빙하, 수정처럼 맑은 호수, 다 좋습니다. 그때의 추억을 자그마한 글씨로 적어보세요. 편안함을 준 장소의 특징을 적으며 잠시나마 마음의 휴식을 취하세요. 산의 빛깔과 모래 위에 부딪치는 하얀 거품의 형태들, 함께했던 사람들의 추억이 떠오를 겁니다. 이렇게 다른 이들을 위한 여행 가이드를 만들어보는 겁니다. 이 여행 가이드 만들기는 미술치료에서 스트레스를 치료하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삶에 지친 당신, 여행을 떠나라>에서(본문 50쪽)


<개도 남자다>라는 작품을 보면, 인간 커플의 닭살 돋는 애정 행각에 질려 산책을 거부하는 개의 표정이 재미있습니다. 아마도 커플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아닐까 싶지만, 질투라고 부르기엔 유머가 가득 배어 있습니다.
흔히 유머와 위트를 구분할 때, 위트와 유머 공히 말로 사람을 웃기는 것이지만, 위트는 신랄한 비수를 숨기고 있는 반면에 유머는 대상에 대한 따스한 동정을 포함한다고 말하지요. 상처를 주는 말을 하지 않고 타인을 껴안는 것입니다. 주정아의 그림 속엔 이처럼 가슴 한구석을 후벼 파는 아련한 유머가 있습니다.
                                                                                                                                 <이 죽일 놈의 연애>에서(본문 102쪽)

이상선의 그림은 사랑 앞에 처연히 울어본 사람들을 위해 바치는 송가입니다. 또한 사랑 앞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행복한 경고장이지요. 실연은 숨긴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억압한다고 심연 속에 가라앉는 사건도 아닙니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하지만 결국 주체는 '나'라는 사실을 배우면서, 사랑의 연금술을 통해 성숙해지는 내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이 안 될 땐, 내 안의 어떤 문제가 나를 사랑 불능의 코드를 가진 존재로 만들었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내가 제대로 서지 않는 한 아무리 멋진 상대를 만나도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겠습니다.
                                                                                                                                <꽃을 그리는 시간>에서(본문 124쪽)

이인청의 작품 속 아줌마는 때로 짜증도 내고, 풀이 죽어 있기도 하고, 지나간 추억 속의 데이트 장소를 거닐기도 합니다. 왜 작가는 셀프카메라를 찍은 걸까요?
철 지난 원피스를 걸쳤을지언정, '잇백'을 가지고 있진 않을지언정, 손등 위로 떨어지는 무료한 오후의 햇살을 행복하게 맞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음을, 자연과 함께 나를 찍음으로써 부재에서 긍정의 존재로 건너가는 다리 위에 '내가 서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 것은 아닐까요? 스스로 설정한 인형극의 무대에서,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관객의 입장이 되어 넉넉하게 생을 바라보자는 뜻을 담았으리라 생각해봅니다. 
                                                                                                                <주부 우울증에 걸린 당신에게>에서(본문 168쪽) 
 

 

 

동반자살을 꿈꾸던 1930년대의 이상과 김유정, 그들은 어떻게 웃음의 문학을 낳을 수 있었을까? 김유정의 <동백꽃>(1936)의 한 부분을 읽어본다.

오늘도 또 우리 수탉이 막 쫓기었다. 내가 점심을 먹고 나무를 하러 갈 양으로 나올 때이었다. 산으로 올라서려니까 등뒤에서 푸드득 푸드득 하고 닭의 횃소리가 야단이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다르랴 두 놈이 또 얼리었다 . 점순네 수탉(대강이가 크고 똑 오소리같이 실팍하게 생긴 놈)이 덩저리 작은 우리 수탉을 함부로 해내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해내는 것이 아니라 푸드득하고 면두를 쪼고 물러섰다가 좀 사이를 두고 푸드득하고 모가지를 쪼았다. 이렇게 멋을 부려 가며 여지없이 닦아 놓는다. 동백꽃(범우문고 148)그러면 이 못생긴 것은 쪼일 적마다 주둥 이로 땅을 받으며 그 비명이 킥, 킥, 할 뿐이다. 물론 미처 아물지도 않은 면두를 또 쪼이며 붉은 선혈은 뚝뚝 떨어진다. 이걸 가만히 내려다보자니 내 대강이가 터져서 피가 흐르는 것같이 두 눈에서 불이 번쩍 난다. 대뜸 지게막대기를 메고 달려들어 점순네 닭을 후려칠까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헛매질로 떼어만 놓았다. 이번에도 점순이가 쌈을 붙여 놨을 것이다. 바짝바짝 내 기를 올리느라고 그랬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고 놈의 계집애가 요새로 들어서 왜 나를 못 먹겠다고 고렇게 아르릉거리는지 모른다. (중략)거지반 집에 다 내려와서 나는 호드기 소리를 듣고 발이 딱 멈추었다. 산기슭에 널려 있는 굵은 바돌 틈에 노란 동백꽃이 소보록하니 깔리었다. 그 틈에 끼어 앉아서 점순이가 청승맞게시리 호드기를 불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도 더 놀란 것은 고 앞에서 또 푸드득, 푸드득, 하고 들리는 닭의 횃소리다. 필연코 요년이 나의 약을 올리느라고 또 닭을 집어내다가 내가 내려올 길목에다 쌈을 시켜 놓고 저는 그 앞에 앉아서 천연 스레 호드기를 불고 있음에 틀림없으리라. 나는 약이 오를 대로 올라서 두 눈에서 불과 함께 눈물이 퍽 쏟아졌다. 나뭇지게도 벗어 놀 새 없이 그대로 내동댕이치고는 지게 막대기를 뻗치고 허둥허둥 달려들었다.가까이 와 보니 과연 나의 짐작대로 우리 수탉이 피를 흘리고 거의 빈사지경에 이르렀다. 닭도 닭이려니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짝 없이 고대로 앉아서 호드기만 부는 그 꼴에 더욱 치가 떨린다. 동네에서도 소문이 났거니와 나도 한때는 걱실걱실히 일 잘 하고 얼굴 예쁜 계집애인 줄 알았더니 시방 보니까 그 눈깔이 꼭 여우새끼 같다. 나는 대뜸 달려들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큰 수탉을 단매로 때려 엎었다. 닭은 푹 엎어진 채 다리 하나 꼼짝 못 하고 그대로 죽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멍하니 섰다가 점순이가 매섭게 눈을 홉뜨고 닥치는 바람에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이놈아! 너 왜 남의 닭을 때려죽이니?" "그럼 어때?" 하고 일어나다가, "뭐 이 자식아! 누 집 닭인데?" 하고 복장을 떼미는 바람에 다시 벌렁 자빠졌다. 그리고 나서 가만히 생각을 하니 분하기도 하고 무안도스럽고, 또 한편 일을 저질렀으니, 인젠 땅이 떨어지고 집도 내쫓기고 해야 될는지 모른다. 나는 비슬비슬 일어나며 소맷자락으로 눈을 가리고는, 얼김에 엉 하고 울음을 놓았다.
그러나 점순이가 앞으로 다가와서 "그럼 너 이담부텀 안 그럴 테냐?" 하고 물을 때에야 비로소 살길을 찾은 듯싶었다. 나는 눈물을 우선 씻고 뭘 안 그러는지 명색도 모르건만, "그래!" 하고 무턱대고 대답하였다. "요담부터 또 그래 봐라, 내 자꾸 못살게 굴 테니." "그래 그래 이젠 안 그럴 테야!" "닭 죽은 건 염려 마라, 내 안 이를 테니."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