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벗은 반복과 옷 입은 반복,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들뢰즈의 저서들은 가속력이 붙지 않는다. 앞문장과 뒷문장의 연결이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것 뿐 아니라, 그가 주목한 흄, 스피노자, 칸트, 니체, 베르그송 등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지뻗기를 많이 해야 하는 들뢰즈 읽기, 들뢰즈의 저서는 철학의 한 사유, 체 혹은 틀 뿐 아니라, 21세기 문화 - 문학연구를 바라보는 틀, 자본주의를 관통하는 시선으로 정착했다.
들뢰즈의 리좀 시리즈 가운데 『차이와 반복』, 『안티오이디푸스』,『천의 고원』 등을 몇 년째 읽고 있다. 텍스트 밖으로 나갔다 안으로 들어오기를 반복하면서... 들레즈의 저서를 읽어내는 길은 철학이나 인문학 하면 언뜻 떠올리기 쉬운 방법론(methodology)이나 이데올로기(ideology) 비판 또는 어떤 이론을 구축하는 것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모든 사유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사유하는 방법에 대한 사유(noology)를 겨냥하고 있다. 즉 방법을 정교하게 구축하는 대신 그러한 방법론이 어떤 근거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질문하며, 이념의 논리(즉 ideo-logy)를 찾거나 그럼 이념들이 어떤 뿌리에 근거하여 번성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구정 연후 동안 일본의 들뢰즈 연구자 우노 구니이치가 쓴 『들뢰즈, 유동의 철학』을 조금 읽을 수 있었다. 완독한 것이 아니라 소회를 피력하기 이르지만, 정착과 안일을 넘어 끊임없는 유목적 사유에의 초대로 읽힐 수 있겠다.
들뢰즈 여러 저서들 가운데『차이와 반복』은 나에게 책에는 길이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책이기도 하다. 니체의 영겁회귀 사상과 접목시켜 읽노라면 자유의 지평이 한없이 넓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여기서 일반적인 상식을 넘는 <차이> 에 대한 개념정립이 관건이다. <차이>는 <반복>을 낳게 하는 원인으로, <차이>는 자기 갱신의 내적 에너지를 일컫는다. 그 역도 물론 성립한다.
상승의 에너지에 의한 차이 안에서의 반복은 대자적 영겁회귀를 가능케하는 옷 입는 반복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그 역의 반복은 소아병적인 헐벗은 반복, 생의 비루함과 치졸함과 배고픔을 확대 재생산하는 좀비적 '리좀'에 해당한다. 마치 연쇄범죄처럼 어둠의 블랙홀로 함께 빨려들어가는 탕진의 매커니즘이 될 것이다.
차이와 반복에서 또 하나의 관건은 두 개의 매커니즘이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히틀러나 간디는 21세기에 다른 모습으로 여전히 사회 속에 우리 내부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과 밖, 혹은 어둠과 빛으로 미끄러지면서 상승하거나 경계에 서거나 하면서 영겁회귀를 반복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니체의 <짜라투스는 이렇게 말했다>와 <비극의 탄생>에 나타나는 영겁회귀가 아주 다른 방향에서 제기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우상숭배의 파기가 가능한 것이다. 어떤 책도, 어떤 스승도 정착의 도그마가 될 수 없다. 이것은 한때 유행처럼 번졌던 <노마드> 논쟁 조차 통과한 유목적 사유가 필요한 이유기도 하다. 그것은 마치 중력을 거스리는 법칙처럼 인류역사에 던진 명암의 매커니즘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란 두 상태의 정태적인 비교에서 도출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차라리 두 상태가 만나고 섞임으로써 생성되는 것이다. 헛바퀴를 도는 공전, 도덕적 습관, 흉내내기와 반복의 외피와 내피를 통찰해 보는 일, 동일성의 원리가 반복을 가능케 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반복을 가능캐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차이의 에네르기를 긍정해야 한다. 차이의 긍정이다.
책의 도입부에 들뢰즈는 반복과 차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모네의 수련 연작을 언급한다. 모네의 <수련> 연작은 빛과 수련이 만나 만들어진 차이들이 만날 때마다 다르게 반복되어 그려진 것이다. 빛 안에서의 차이, 혹은 빛으로 인해 야기되는 수련의 차이를 포착할 수 있는 한, 수련은 항상 다른 수련으로 반복되어 그려진다고 보았다. 더 이상 차이를 만들지 못하면 모네는 수련을 더 그릴 수 없게 된다. 모네의 수련 연작은 모네가 지닌 영겁회귀에 대한 대자적 갈망이기도 하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내 인생의 필독서 가운데 하나로 꼽는 이유 역시 나의 영겁회귀에 대한 대자적 갈망이 『차이와 반복』에서 빛과 수련처럼 조응되기 때문이다. 밖의 보편자(빛 혹은 신)에서 내 안의 보편자(완성된 인성)가 차이와 반복을 거듭하며 영겁의스펙트럼을 만들듯...
절대적으로 똑같은 개념을 지니고 있는 어떤 동일한 요소들 앞에 있을 때 우리는 반복에 대해 말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이 이산적 요소들, 이 반복되는 대상들과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것들을 통해 스스로 자신을 반복하는 비밀스런 주체, 반복의 진정한 주체이다. 우리는 반복을 대명사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반복의 자기(自己)를 발견해야 하며, 스스로 반복하는 독특성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반복자 없이는 반복이란 없기 때문이며, 반복하는 영혼 없이는 반복되는 것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것과 반복하는 것, 대상과 주체의 구별보다는 오히려 반복의 두 가지 형식을 구별해야 한다. 어떤 경우든 반복은 개념없는 차이다. 그러나 첫 번째 경우 차이는 단지 개념에 외부적인 것으로 설정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똑같은 개념 아래 재현된 대상들 사이의 차이로서, 무차별성을 띤 시간과 공간으로 추락한다. 두 번째 경우 차이는 이념의 내부에 있다. 이 차이는 이념에 상응하는 역동적인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는 어떤 순수한 운동으로 펼쳐진다.
첫 번째 반복은 같음의 반복이고 개념이나 재현의 동일성에 의해 설명된다. 두 번째 반복은 자신 안에 차이를 포괄하며 스스로 이념의 타자성 안에, 어떤 '간접적 현시'의 다질성 안에 포괄된다. 첫 번째 반복은 개념의 결핍에서 성립하는 부정적 반복이며, 두 번째 반복은 이념의 과잉에서 성립하는 긍정적 반복이다. 첫 번째 반복은 가언적이고, 두 번째 반복은 정언적이다. 첫 번째 반복은 정태적이고,
두 번째 반복은 동태적이다. 첫 번째 반복은 결과에서 일어나고 두 번째 반복은 원인 안에서 일어난다. 첫 번째 반복은 외연 안에서 일어나지만, 두 번째 반복은 강도적이다. 첫 번째 반복은 평범하고, 두 번째 반복은 특이하고 독특하다. 첫 번째 반복은 수평적이며, 두 번째 반복은 수직적이다. 첫 번째 반복은 개봉되고 설명되지만, 두 번째 반복은 봉인되어 있고 해석되어야 한다.
첫 번째 반복은 공전의 성격을 띠고 있고, 두 번째 반복은 진화의 성격을 띠고 있다. 첫 번째 반복이 동등성, 통약 가증성, 대치성을 띠고 있다면, 두 번째 반복은 비동등성, 통약 불가능성, 비대칭성 위에 기초하고 있다. 첫 번째 반복은 믈질적이며, 두 번째 반복은 자연과 대지 안에서조차 정신적이다. 첫 번째 반복은 생기가 없으나 두 번째 반복은 우리의 죽음과 삶들, 우리의 속박과 해방들, 악마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첫 번째 반복은 '헐벗은' 반복이지만, 두 번째 반복은 옷 입은 반복으로서, 스스로 복장을 하면서, 가면을 쓰면서, 스스로 위장하면서 자신을 형성해 간다. 첫 번 째 반복은 정확성을 특징으로 하지만 두 번째 반복의 기준은 진정성에 있다.
오랜 오류의 역사, 그것은 곧 재현의 역사, 모상들의 역사이다. 사실 같은 것, 동일자는 어떤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차이나는 것의 영원회귀가 그것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영원회귀는 그 회귀 가운데 스스로 어떤 특정한 가상을 불러일으키고, 그 가상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본다. 또 영원회귀는 그 가상을 향유하고, 그 가상을 이용하여 차이나는 것에 대한 자신의 긍정을 이중화한다. 즉 영원회귀는 이제 마치 차이나는 것의 목적인 양 어떤 동일성의 이미지를 생산한다. 영원회귀는 '계속되는 불일치'의 외면적 효과에 해당하는 어떤 유사성의 이미지를 생산한다.(......)오히려 존재자들은 모든 형식들에 의해 열려있는 일의적 존재의 공간 안에서 할당된다. 개방성은 일의성에 본질적으로 속한다. 유비의 정착적 분배들에는 유목적 분배들이 대립한다. 또는 일의적인 것 안의, 왕관 쓴 무정부주의자들이 대립한다. "모든 것은 평등하다!"와 "모든 것은 되돌아 온다!"가 메아리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여기뿐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평등하다와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는 차이의 극단에 도달했을 때만 언명될 수 있는 말이다. 천 갈래로 길이 나 있는 모든 다양체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 같은 목소리가 있다. 모든 물방울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바다가 있고, 모든 존재자들에 대해 존재의 단일한 아우성이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먼저 각각의 존재자와 각각의 물방을은 각각의 길에서 과잉의 상태를 도달했어야 했고, 다시 말해서 자신의 변동하는 정점 위를 맴돌면서 자신을 전치, 위장, 복귀시키는 바로 그 차이에 도달했어야 했다.
- 질 들뢰즈, 위의 책, pp. 626~ 633.
<차이와 반복>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와 더불어 들뢰즈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책이다. 앞의 것이 주논문, 뒤의 것이 부논문이다. 앞의 것이 동일성의 사유 아래 억압당해온 ‘차이의 철학’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든 결정적인 책이었다면, 뒤의 것은 그 동안 외면당해 온 사상가 스피노자를 본격적으로 조명하게 만든 결정적인 책이었다.
예전에 푸코는 <차이와 반복>과 그 이듬해에 출판된 <의미의 논리>를 묶어서 ‘철학극장’이라는 제목의 서평을 쓴 적이 있는데, 그 서평은 첫 문장에 적어놓은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같은 예언으로 인해 더 유명해진 바 있다: “언젠가 20세기는 들뢰즈의 세기로 기억될 것이다.” 20세기가 들뢰즈만의 세기가 될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들뢰즈 없이는 생각하기 힘든 세기가 되리라는 것은 지금 들뢰즈의 이름이 유령처럼 온 세상을 떠도는 것을 보면 이미 어느 정도는 입증된 것처럼 보인다.
들뢰즈가 이 책뿐만 아니라 이후의 책들에서 일관되게 ‘차이의 철학’을, 그리고 ‘차이의 정치학’을 하고자 했다는 것은 이젠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자유주의자들마저 ‘차이’에 대해, ‘차이의 정치학’에 대해 말하는 지금, 과연 ‘차이’를 말하는 게 무슨 별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이로써 오히려 분명해진 건, ‘차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차이를 말하는가가 문제라는 사실이다.
사실 철학자가 차이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같다’는 것이 ‘다르다’는 것의 짝인 이상, 차이를 말하지 않고 동일성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들뢰즈가 겨냥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도, 헤겔도 동일성만큼이나 차이에 대해 말한다. 문제는 거기서 차이가 동일성에 복속되어 있고 그것에 포섭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생물학에서 지금도 사용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차’ 개념은 가령 호랑이라는 ‘종’이 다른 종과 다른 차이에 대해 말하지만, 그 차이는 고양이과라는 동일한 ‘유’ 개념 안에서의 차이에 불과하다.
또 하나,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란 두 상태의 정태적인 비교에서 도출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차라리 두 상태가 만나고 섞임으로써 생성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양인 A가 인디언인 B에게 “나는 너와 달라”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양자를 비교해서 서로에게 없는 차이를 지적하는 것이다. 계몽주의자도 이런 의미의 차이는 안다. 그들은 그 차이에 앞선 것과 뒤처진 것의 자리를 할당하곤, 뒤처진 것을 앞선 것에 맞추고자 한다. 즉 차이는 부정되어야 할 무엇이다. 그것이 ‘문명화’고 ‘계몽’이다. 자유주의자라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자고 말한다. 쉽게 말하면 나도 네 인생에 참견하지 않을테니, 너도 내 일에 참견하지 말란 말이다. 이 경우 차이를 말하는 것은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동일하게 존속하겠다는 말이 된다. ‘관용(tolerance)’ 또한 여기서 멀리 나간 게 아니다. “나는 너와 다르지만, 네 차이를 존중하겠다”는 것은 그 차이를 인정하고 감수하겠다는 말일 뿐이다. 달라도, 혹은 싫어도 참고 견디는 것, 그것은 차이를 긍정하는 게 아니다. 진정 차이를 긍정하는 자라면, 자신과 다른 것과 만나서 그것을 통해 자신이 달라지겠고 생각한다. 그것이 차이를 진정 긍정하는 것이고 차이를 생성으로서 파악하는 것이다.
차이의 긍정, 혹은 생성으로서의 차이란 이런 점에서 ‘반복’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A가 B와 만나 A'이 되고, C와 만나 A''이 되었을 때, 여기서 A의 궤적 A-A'-A''-...은 A의 반복으로 나타난다. 가령 모네의 <수련> 연작은 빛과 수련이 만나 만들어진 차이들이 만날 때마다 다르게 반복되어 그려진 것이다. 빛 안에서의 차이, 혹은 빛으로 인해 야기되는 수련의 차이를 포착할 수 있는 한, 수련은 항상 다른 수련으로 반복되어 그려진다. 더 이상 차이를 만들지 못하면 그는 수련을 더 그릴 수 없게 된다. 똑같은 그림에 지나지 않는 것, 그것은 반복의 이유를 상실한 것이다. 이처럼 차이나는 것만이 반복되어 되돌아온다.
그러나 그런 반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차이를 제거하는 반복도 있다. 가령 실험실에서 동일한 약품을 섞을 때, 온도나 양 등의 차이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면, 온도를 동일하게 하고 실험해야 한다. 차이를 만드는 조건을 제거하여 원하는 요인이 동일한 결과를 반복하게 만들지 못하면 실험은 실패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실험은 차이 없는 반복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반복에는 두 가지가 있는 셈이다. 차이의 반복과 차이 없는 반복. 차이의 반복으로 인해 들뢰즈는 베르그송과 달리 반복을 긍정할 수 있었다. 베르그손에게 반복이란 습관처럼 차이 없이 되풀이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니체의 ‘영원회귀’를 “차이나는 것만이 되돌아온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들뢰즈는 이와 다른 종류의 반복을 본다. 그리고 그것을 긍정한다. 이 두 가지 반복은 동일성마저 차이로 정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동일성이란 차이나며 반복되는 것에서 차이를 제거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의 철학은 차이가 존재론적으로 일차적이고, 차이가 생성으로서 정의되는, 그리하여 차이를 긍정하는 철학이다. 그런데 여기서 차이의 철학은 차이의 철학이란 이유로 인해 근본적인 난점에 부딛친다. 차이의 철학은 차이를 일차적인 ‘원리’로 삼는 철학이다. 그러나 차이의 철학이 차이를 원리로 삼을 수 있을까? 그렇게 되는 순간 차이는 모든 것을 통합하고 통일하는 또 다른 동일자의 이름이 되지 않을까? 포기한다면 차이의 철학은 불가능한 기획이 된다.
이를 위해 들뢰즈는 차이를 하나의 ‘이념’으로 설정한다. 그런데 이 ‘이념’이란 말은 칸트에게서 빌린 것이지만 칸트나 플라톤과 달리 어떤 이상적 모델이나 ‘근거’가 아니라 차라리 ‘문제’다. 그것은 차이를 근거 삼아 모든 것을 추론하는 원리가 아니라 모든 것에서 차이가 작동하게 하는 문제설정이다. 그것은 원리나 법칙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미분소’ dx 같은 것이다(미분differential은 차이difference라는 말에서 나왔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내용도, 규정도 없지만, dy나 dt 같은 다른 미분소와 만나 규정가능한 것이 되는 것(가령 xdx+ydy=0). 무한소에 가까운 차이조차 포착하게 하지만, 동일한 것은 동일한 것으로 다룰 수 있는 것. 힘관계가 미분방정식(‘문제’!)으로 표시된다는 것을 안다면, 이러한 ‘이념’이 ‘문제’와 결부된 것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어 동일한 방정식(문제)으로 표시된 場은 동일한 관계를 갖는 것임을 안다면, 이 기이한 이념이 동일성 또한 다룰 수 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념’과 반대쪽에 있는 것은 개별적이고 개체적인 것이다. 이념이 추상적이라면, 개체는 구체적인 것이다. 구체적인 층위에서 차이적/미분적(differential) 관계가 개체화되는 것을 다루기 위해 들뢰즈는 ‘강도(intensity)'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강도란 힘의 차이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이다. 미분적인 관계는 강도적인 양을 통해서 개체적 차이로 구체화(분화)된다. 예컨대 유전자는 뉴클레오티드들의 이웃관계(미분적 관계)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는데, 이러한 관계는 수정란 표면에 새겨지는 힘의 강도들을 통해 상이한 기관들로 분화된다. 이처럼 유기체는 차이적 관계가 작동하여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 관계의 차이에 따라 다른 개체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감성적인 것’ 또한 ‘강도’(차이)로 설명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차이라는 말에서 흔히들 상상하는 ‘사소한 것에의 함몰’과 반대로, 이른바 ‘포스트모던’ 시대에 때 아닌 거대 존재론을 꿈꾸는 것처럼 보인다. 차이의 개념을 통해 존재자들의 양상들을 설명하려는 그런 존재론을. 그것은 일종의 메타피직스metaphysics다. 그러나 하나의 원리에 의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전통적 의미의 ‘형이상학metaphysics’이 아니라, 자연학(physics)에 의거하여 자연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란 의미에서 ‘메타-피직스’다. 이러한 차이의 존재론은 이후 >의미의 논리>에서 의미를 다루는 ‘사건의 철학’으로 전개되고,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의 고원>에서 자본주의와 대결하는 역사-정치학으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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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들뢰즈의 초기 철학사적 연구부터 후기 자본주의 비판과 이미지론에 이르기까지, 그의 전작에 걸쳐 있는 철학적 사유의 흐름을 그린 독창적인 입문서이다. 다른 들뢰즈 연구서와 달리 그의 사유의 궤적을 경쾌한 리듬으로 따라가면서 그 핵심을 드러내는 데 주력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철학과 사유방식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그리고 지은이 우노 구니이치(宇野邦一)는 들뢰즈에게 직접 배운 연구자로서 자신이 느꼈던 그의 인상을 기록하는 한편 그의 삶과 죽음에 얽힌 이야기를 그의 철학과 병치하여 서술함으로써 들뢰즈에 대해 피부에 닿는 듯한 느낌을 전해 준다. 아르토(Antonin Artaud)를 연구한 학자답게 그는 철학적 개념에 대한 세밀한 논리보다는 그 개념이 갖는 특이성을 문학적 예시와 표현으로 드러냄으로써 들뢰즈의 사유에 접근하는 새로운 길을 예시한다.
이렇게 들뢰즈의 철학 전체를 간명하게 독해하면서도 본질적인 면을 밝혀 주는 이 책은 일본의 들뢰즈 연구 상황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도 특색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도 들뢰즈(뿐만 아니라 가타리)에 관한 폭넓은 연구가 각종 일차문헌에 대한 번역과 함께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고, 천황제를 비롯한 일본 내 문제와 연결시키면서 논쟁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음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들뢰즈 이후의 철학 흐름을 계승하고 있는 '리좀 총서' 중에서 이와 같이 독특한 지위를 점하고 있는 이 책은 일본 들뢰즈 연구의 현주소와 그 깊이를 알고자 하는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들뢰즈 철학의 전체상을 그리고자 하는 입문자들에게도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이 책은 들뢰즈가 초기에 수행한 철학자들의 모노그래피를 그의 사상의 근원적 모티프에 연결시키고 있다. 즉 들뢰즈가 주목한 철학자들인 흄, 스피노자, 칸트, 니체, 베르그송 등에 대한 초기의 연구가 단순히 철학자 연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저인 『차이와 반복』, 『안티오이디푸스』, 『천의 고원』 등의 사유에 핵심적인 기초가 되고 있고, 계속해서 그의 사유를 추동하고 있음을 논증하고 있다. 예컨대 베르그송의 철학을 독해할 때 들뢰즈는 시간으로서의 차이, 즉 '차이 그 자체'(본성상의 차이)와 기억과 지속으로 설명되는 '반복'을 읽어 냄으로써 이후에 펼친 『차이와 반복』 속에서 기본적인 바탕으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국내에서는 잘 주목받지 못하는 흄에 대해서도 강조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흄은 들뢰즈에게 '관계'와 '정념'을 주목한 철학자로 두드러진다. 이성과 주체에 대해 극단까지 사유하여 그 절대성을 거부하고 경험의 과정으로 해체해 버리는 흄의 사유방식을 계승해 이성 외부를 사유할 수 있는 모티프로 활용한 것이다. 여기서 관계란 하나의 사실을 가지고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것("오늘 태양이 떴으니 내일도 뜰 것이다")과 같은 정신활동이며, 이는 자기본위적인 정념을 통해 바깥을 향해 열고 확장해 간다고 한다. 들뢰즈는 주체의 이성이 아닌 관계와 정념을 중시하는 것으로 흄을 독해함으로써 외부를 사고할 수 있는 철학적 바탕을 마련한 것이다.
이외에도 이 책은 '끊임없이 유동하고 촉발하(되)는 신체에 대한 사유'(스피노자), '힘의 다양한 질과 양에 의해 구성되는 세계에 관한 비전'(니체) 등을 발견한 들뢰즈의 철학사적 작업이 그의 사유 전체를 울리고 있었음을 밝힌다. 한마디로 그의 철학사적 작업은 나중에 씌어지는 대작들의 실험적 사유가 이미 눈부시게 전주되고 있는 한 편의 교향곡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차이와 반복, 이념과 강도라는 주제로 『차이와 반복』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철학사뿐만 아니라 물리학과 생물학, 논리학, 정신분석학, 미학 등 각종 분과학문에 대한 깊은 천착이 필요하면서도 철학사의 미로를 헤치고 들어가 그 전통과 단절하는 괴물적인 텍스트라고 규정하면서 그 논리의 독특성을 간단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들뢰즈는 "반복이란 차이를 반복하는 것이고, 차이란 반복되는 차이"라고 하면서 차이의 무한한 생성을 통해 세계가 규정됨을 철학적으로 입증한다. 차이의 생성을 강조하는 그의 이런 입장은 동일성을 통해 사물을 제한하고 구별하는 우리의 표상 관념을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일성과 표상의 관념이 없다면 세계의 법칙은 확립될 수 없고 오로지 무한한 차이의 분열증적 흐름과 사물의 끊임없는 생성만이 남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런 차이의 생성을 통해서라야만 어떠한 창조가 가능하고 생의 지속과 진화가 가능하다고 본다.
이렇게 이 책은 들뢰즈의 철학이 철학사에서 독특한 카오스 이론을 시도한 것으로 요약하고 있다. 서양 철학의 전통적인 주제였던 동일성, 주체, 표상, 이성, 이원론, 초월성 등을 근저에서부터 비판하고, 은폐되어 있던 차이에 관한 근원적 사유를 철학적으로 펼침으로써 현대의 사상적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다. 주체를 기초로 하는 우리 근대인은 세계의 차이들을 언어에 의해 규정된 습관에 따라 식별하고자 하지만, 들뢰즈는 그러한 차이의 깊은 곳까지 거슬러 올라가 주체와 객체에서 해방된 이론을 제시하였다고 이 책은 간명하게 정리하고 있다.
이 책은 『안티오이디푸스』와 『천의 고원』을 욕망과 미립자의 철학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와 국가 시스템이 들뢰즈·가타리에게 매우 본질적인 문제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 두 책을 들뢰즈가 가타리를 만난 이후 자신의 철학을 사회적인 문맥으로 확장시키는 과정으로 파악함과 동시에, 지금의 현실을 움직이게 하는 법칙과 시스템에 관해 근본적인 비판을 시도한 것으로 그린 것이다.
『안티오이디푸스』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 자본주의를 만나면서 어떻게 제한되고 왜곡되는지 밝히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는 자본·화폐·상품·노동 등의 관계에 따라 자연스럽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의 정치적·문화적인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굴절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이 요동치면서 관계를 맺고 있다. 여기서 화폐는 사회의 구성요소 근저에 있는 욕망을 양으로서 환원시키고 재화를 교환하게 만드는 기적적인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기자신의 다양한 필요와 욕망을 채우기 위해 화폐를 수단으로 사용하지만, 거꾸로 더 많은 화폐를 얻기 위해 욕망의 실현을 지연시키고 노동을 한다. 물론 노동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노동은 인간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거나 다른 필요를 위한 수단이지 욕망의 대상 그 자체는 아니다. 이렇듯 자본주의는 욕망에 의해 작동되고 인간의 욕망을 다양하게 자극하고 있지만, 실은 인간의 욕망을 왜곡하고 그 실현을 연기하는 폭력적인 시스템이다.
이 책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본적인 경향을 인간의 자연스런 욕망을 왜곡시키는 '분열증'으로 표현하고, 이에 대비하여 국가장치를 비판적으로 살펴 또다른 도착적인 형태로서 '편집증'이라고 부른다. 국가는 여러 하부집합을 통합하는 초월적인 상급의 통일체로서 법률과 관료제 등의 형식을 통해 신민들을 제어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마땅히 지켜야 할 인간의 도덕과도 같이 모든 흐름을 장악하고 조직하는 장치인 것이다.
그리고 들뢰즈·가타리는 국가의 출현에 관하여 시간의 진전에 따른 인과율의 관점을 버리고 "국가는 언제라도 도처에서 신출귀몰하게 출현한다"고 주장한다. 즉 일정 수준의 생산력과 경제적 축적이 이뤄진 사회가 국가로 발전한다는 관점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국가가 전제되었을 때 경제적 축적이 비약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와 국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무한한 자기증식을 국가가 떠받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이 책은 『안티오이디푸스』와 『천의 고원』의 다양한 주제와 개념들을 펼쳐 보는 과정에서 들뢰즈·가타리가 겨냥하고 있는 현실의 비판적 문맥을 독해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들뢰즈 철학의 매력 중 하나는 과학과 문학·예술, 정치와 관련된 색다른 사유를 펼치면서, 자신의 철학을 가로지르는 중요한 논거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철학의 경계에 서서 관습적인 형식과 구성을 넘어서는 사유를 전개할 때조차 그는 철학 자체에 관한 문제의식을 버리지 않았다. 예컨대 『시네마』(1, 2권)라는 영화론을 쓸 때에도 이미지론과 시간론을 바탕으로 수많은 영화들을 독해해 자신만의 독특한 내재성의 철학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들뢰즈의 대답에 주목한다. 그 대답이 들뢰즈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완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철학은 개념을 다루는 것입니다. 개념을 만들고 창조하는 것입니다"(218쪽)라고 말하여 철학이 개념의 창조와 관련되어 있음을 밝힌다. 이런 개념은 다른 여러 개념들과 관계되어 있고, 복수의 개념들끼리는 서로 겹치는 부분, 식별 불가능한 경계, 한 요소에서 다른 요소로 이행·생성하는 중간이 있다. 그러나 개념은 종(種)과 유(類)로 환원할 수 있는 것도, 사물에 대한 표상도 아니며, 진리를 구성하는 명제도 아니다. 오히려 종과 유 이전에 현전하는 것이며, 특이성을 밝히는 중심으로서 성립하는 것이다. 들뢰즈 철학론의 독특한 점은 이렇듯 개념이 철저하게 내재적인 차원에서 창조되는 것으로 정의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성과 절대자 등 근대적인 초월성을 거부하고 전(前)-철학적인 개념의 카오스를 펼쳐 보임으로써 자신이 세운 개념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열어 놓았다는 점이다.
이 책 『유동의 철학』은 이렇게 들뢰즈 사유의 전반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개념을 일관하면서 그의 사유의 초상화를 그린 책이다. 들뢰즈에게는 과거의 사상에 깊이 있게 탐색하는 고전적인 자세와 이를 다시 미래를 향해 발산하는 사유의 벡터가 항상 공존하고 있었으며, 그의 철학은 하나의 단일한 체계로 정리되는 철학이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하며 생성하는 모습으로 드러나 있었다. 이 책은 이러한 들뢰즈 철학의 표정과 색채, 음조, 경향을 다양한 측면에서 비추어 냄으로써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새로운 길을 제시해 준다.(츨판사서평)
차이의 긍정, 혹은 생성으로서의 차이란 이런 점에서 ‘반복’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A가 B와 만나 A'이 되고, C와 만나 A''이 되었을 때, 여기서 A의 궤적 A-A'-A''-...은 A의 반복으로 나타난다. 가령 모네의 <수련> 연작은 빛과 수련이 만나 만들어진 차이들이 만날 때마다 다르게 반복되어 그려진 것이다. 빛 안에서의 차이, 혹은 빛으로 인해 야기되는 수련의 차이를 포착할 수 있는 한, 수련은 항상 다른 수련으로 반복되어 그려진다. 더 이상 차이를 만들지 못하면 그는 수련을 더 그릴 수 없게 된다. 똑같은 그림에 지나지 않는 것, 그것은 반복의 이유를 상실한 것이다. 이처럼 차이나는 것만이 반복되어 되돌아온다. 반복한다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며,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단독자 안에서 일어나는 반복의 반향이다.
"수면 여기저기 떠다니는, 딸기처럼 수줍고, 하얀 꽃잎들로 둘러싸인 한송이 백합의 주홍색 마음 같은..., 좀 과장된 표현 같지만 떠다니는 꽃 침대 위에 서로 꼭 끼게 누워있는 사람들 같은 모습은, 마치 팬지꽃들이 나비처럼 정원에서 날아올라 푸른 광택이 나는 날개를 파닥이며 연못 가장자리 투명한 그늘 위를 맴돌고 잇는 것 같았다. 이 하늘 빛 가장 자리......." 마르셀 프루스트 <백조의 길>(1913)
모네는 수련(Water Lilies)그림에 "Nympheas('넹페아'라고 읽음)"라는 제목을 달았는데 이것은 그가 지베르니에서 키운 변종 백수련을 일컫는 학명입니다.
1920연대 로 접어들면서 모네의 그림에는 일본풍 다리가 다시 등장하지만, 다리의 경쾌하고 엷은 색채는 주변 식물군과 늘어진 등나무들에 묻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1900년 말, 모네의 최근작 25점이 뒤랑 뤼엘 화랑에서 전시되었는데, 그 가운데 절반 가량은 수련 연못풍경이었습니다.
"수련 연작" 이것은 1909년 뒤랑 뤼엘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의 제목으로서 모네 자신이 직접 결정하였습니다. 1903년에서 1908년 사이에 그려진 48점의 작품을 선보인 이 전시회를 두고 그는 "일상을 탈피한 전시회"라고 말했습니다.(1909년 1월 28일).
1904년 이후로 모네의 그림에서는 연못 주변 풍경의 비중이 점점 줄어들어 캔버스 윗부분 좁은 공간으로 밀려나더니 마침내 완전히 자취를 감추면서 꽃들만으로 화면이 꽉 차게 되었습니다.
"제가 작업에 빠져있다는 걸 아실 겁니다. 물과 반사광이 어우러진 이 연못 풍경이 저를 사로잡습니다. 몸이 좀 나빠지긴 했지만....이제 또 힘을 내 시작할 것입니다." (1908년 8월 11일, 제프루아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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