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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로운 여자들 2 철저한 자본주의자 아버지 리처드와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어머니 몰리의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토미는 안나를 찾아와 해답을 요구한다. 도덕심이 결여된 아버지를 증오하지만 그의 사업 수완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고, 사회주의의 근본에는 동의하지만 그저 불만만 토로할뿐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무능력한 어머니와 안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차라리 어느 한쪽으로만 사상을 주입 받았다면 갈등이나 괴로움도 없었을 것을, 쌍방의 긍정과 부정을 모두 교육받고 체득한 토미는 그들이 화합하지 못하고 영원히 반목함으로 혼돈에 빠진다. 이도저도 못하고 고통만 깊어가는데 상황을 야기한 어른들은 그저 그 모든 것이 성장통일 따름이라고 무책임하게 대답한다. 토미는 안나에게 그러한 기만적인 행동을 유지할 수 있는 믿음이 무어냐고 질문하고 안나는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한 채 [미래를 향한 일말의 희망] 이라고 대답한다. 확신하지 못하는 희망보다는 절망을 선택한 토미는 결국 자살을 기도한다. 절묘하다 해야할까. 이 파트를 읽는 동안 지금 벌어지고 있는 대선 시국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도덕하지만 능력 있는] 아버지와 [정당하지만 무능력한] 어머니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나라 정치 현실이 아닌가. 그 사이에서 무엇이 옳은지,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 하는 토미의 모습은 또한 우리 국민의 모습 그대로다. 내 자신이 정치에 민감한 성향을 가진 탓도 있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작금의 상황은 누구에게나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감을 주는 것 같다. 좌향에 "어느 정도" 동조하는 내가 우울증을 호소할 지경인데, 사상을 신념으로 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믿어왔던 신념이 붕괴되어 가는 것을 어떻게 견뎌내고 있을지 걱정마저 해줘야 될 처지다. 그렇다고 오른편으로 방향을 정한 사람들이라고 환희에 넘치는 신념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저 무기력, 차선의 선택, 어쩔 수 없으니까, 일뿐. 그리하여 정치와 사상에 등을 돌리고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은 채 개인주의와 아나키즘으로 천착 해버린 이들은 토미처럼 자살을 결심한 것과 다름없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일견 무책임이지만, 한편으로는 동정심을 자극한다. 레싱은 이 사이에 [이러한 폐해는 그릇된 교육에서 비롯된다] 는 메시지를 삽입한다. 이미 서문에서 이른 바 있는, [얘야, 너는 지금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란다. 선행자들이 강요한 사유 양식에 자신들을 순응시켰던 이들이 너를 지금 가르치고 있어. 이것은 스스로를 영속시키는 체제이지] 라는 주장에 대해 하나의 사례를 들어 이야기 한 것이랄까. 그것은 즉, 우리가 혼돈과 무기력증에 빠져 모순된 선택을 하거나 아예 포기해버리는 것도 그릇된 교육의 폐해가 아닐까? 레싱의 충고를 뒷받침한다면, 이런 때야말로 스스로의 의견을 바로 세울 때가 아닌가? 검은 노트 안나의 소설 [전쟁의 변경 지대] 가 큰 성공을 거두자 여러 매체에서 이 소설에 관심을 보인다. 어느 방송사는 소설을 [연애 드라마] 로서 만들자고 제안하고, 어느 방송사는 좌익적인 요소를 전부 제외하고 만들자고 제안한다. 스스로도 회의하고 자책하는 소설을 세상이 자기네 입맛좋게 오독하고 해석하려는 작태에 안나는 혐오감을 감추지 못하지만, 또한 스스로도 다른 상황에 있어 얼마나 세상을 오독해오고 자기가치적으로 이용해왔나를 절감한다. 좌익 사상을 들먹이며 러시아 작가와 '공유' 하려고 했지만 그는 그 사회의 일원으로 경험을 통해 사상이 다져진 자였고 자신은 부르조아 국가라는 안전망 안에서 그럴듯하게 논리만 나불대었을 뿐이라는 것을. 결국 러시아 작가와 안나 사이에 진정한 소통, 공감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던거다. 그러니, 자신이 낸 소설이 제멋대로 읽힌다고 한들 경험과 비경험의 간극이 있을지언대 어찌 비난할 수 있으랴. 비난, 혐오, 경멸은 그저 소통의 포기를 위한 쓰기 좋은 변명일 따름이다. 왜 세상이 내 진의를 100펴센트 이해해주지 못하나. 애써서 표현하고 있는데도 왜 오해를 하나. 이것은 경험과 비경험의 차이다. 때문에 같은 이야기를 해도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오로지 동일한 경험만이 사고의 합일, 의견일치, 교감을 이루어낸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동일한 경험을 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세상의 정체를 가져올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 각기 다른 경험이 세상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험과 비경험의 간극은 영원히 메꿀 수 없는 것일까? 완전한 합일은 영영 찾아오지 않는 것일까? 변증법적 유물론의 회의는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그 무기력하고도 타성적인 반복 서클을 어떻게 하면 깨고 나올 수 있을까. 무조건적인 타인 존중? 무조건적인 자기 비판? 적절합 타협? 참된 화합의 의지란 대체 무엇일까. 내가 무언가를 A로 보고 타인이 그 같은 무언가를 B로 봤을 때, 그 물체가 완전한 모습을 취하려면 A와 B를 모두 수용해야만 할텐데, 그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빨간 노트 53년 스탈린의 사망에 이어 역사적인 [20차 전당대회] 에서의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 이 제의되자 소련 내부는 물론 유럽 사회주의파들에게까지 강력한 사상 폭풍이 휘몰아쳤다. 스탈린 이데올로기의 모순점과 유럽 사회주의자들에 의해서 변질되는 수정주의 논쟁으로 조직은 불신과 냉소가 들어차며 세포 분열되었다. 스스로의 모순을 인정하지 않고 형체없는 사상만을 뒤쫓으며 아닌 것을 아니다고 말하지 못하는 가식적이고도 속물스런 주변 지성인들과 자기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낀 안나는 당을 탈퇴할 것을 결심한다. 이타적인 척 하면서 무능력했던 아프리카 시절의 친구들도, 책이 훌륭하다고 극찬을 하면서 본질은 파악하지 못하는 미디어 관계자들도, 부르조아를 경멸한다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제멋대로 바꿔놓는 영국의 공산당들도 모두 자기 멋대로 세상을 바라보며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자기 멋대로 필요한 부분만을 가져다 쓸 뿐이었다. 근본은 사실, 모두가 동등하고, 모두가 서로를 이해하며, 배려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분열은 계속된다. 각기 경험이 달라서 하나의 사물을 보는 시각도 다르고, 각자가 필요로 하는 쓰임새도 다르며, 오로지 스스로의 안위만을 위해 그것을 선택한다. 상대의 방식을 이해할 수 없어 대립, 반목, 분노, 증오가 일어나면 영원히 등을 돌리거나 어느 한쪽을 제거할 수 밖에 없다. 그 처참한 전쟁 이후 진정한 본질, 사상의 본질은 어디로 가는가. 우리가 믿어야만 했던 사상은 사실 '자기 희생' 이 아니었던가. 노란 노트 다시 안나의 연애 소설, 엘라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폴과 헤어진 엘라는 일에 복귀하려고 하지만 깊은 상처로 모든 생활이 붕괴되어감을 느낀다. 애정없는 커플들을 경멸하며 차라리 싱글인 것을 다행으로 여기려 하지만 폴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은 진정한 독립된 주체로서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자책한다. 자괴감에 빠져들며 폴을 잊기 위해 우연히 만난 미국인과 충동적으로 잠자리를 같이 하지만, 그를 극복하기 이전엔 어떤 것도 불가능할 것이란 절망만이 찾아온다. 사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페미니즘 문학] 이라는 겉면의 소개 문구가 마음에 걸렸더랬다. 어째서 페미니즘, "여성주의" 라고 테두리를 둘러버리고 경계 짓는걸까 하는 의구심과 불만 때문이었다. 심지어 작가가 직접 서문에 "페미니즘 문학으로 오독된다" 고 말한 바 조차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류 지어버려야할만한 "작품의 여성성" 이 강렬했던걸까? 물론 여성에 의한, 여성의 관점에 의해 쓰여진 여성문학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이 책이 오로지 여성의 정체성만을 이야기했다고 볼 수가 없다. "페미니즘" 이라는 말 자체가 여성만의, 즉 남성이라는 대척점이 있어야만 의미를 갖는 단어가 되는데, 이 작품이 그저 남성 사회만을 의식하며 썼다고 하기에는 서술하는 주제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부착함으로 장르의 한계를 설정하고 독자에게 미리 선입견이나 편견을 줄 수도 있을뿐더러, 그 용어가 남성을 향해서는 물론, 가령 동성애자나 다른 문화권의 여성들에게 일종의 박탈감을 줄 수도 있는 배척의 단어로서 쓰일 수도 있다. 적어도 레싱의 이 작품은 배척을 얘기하고자함이 아니라고 본다. 단지, 안나를 비롯한 등장 여성들이 남성들에 의해 억압받고 갈등하는 모습을 주로 묘사한 것은 레싱 스스로가 여성이기 때문에 자신과 반대되는 이질적인 것, 즉 남성을 반대편에 세우고 대립과 그것의 원인, 분석, 그리고 화해의 과정을 그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사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두드러지는 파트가 바로 [노란노트] 다. 안나가 쓰는 엘라의 이야기는 통속적인 연애 소설, 그것과 다름없지만 그것이 왜 "통속적" 인가에 주목하려 한다. 어째서 여성은 사랑에 빠지는가. 어째서 여성은 남성을 갈구하는가. 어째서 남성은 여성과 다른 사랑의 수단을 택하는가. 사실 이 작품에서 묘사되는 남성들은 하나같이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으며 지나치게 마초성이 강조되어 있다. 레싱의 남성혐오라고 보기에는 캐릭터가 한정적이고 극단적이라 남성을 대변한다기보다 '자유' 를 갈구하는 사람들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메타포라고 봐야 옳을 것 같다. (그러나 이 부근이 닫히면 그저 '페미니즘' 적인 소설로만 읽히는게 아닌지?) 분명 남성주의적 사회에 대한 반발, 원망의 이야기도 있다. 레싱은 안나와 엘라를 통해 여성의 자기변명도 가감없이 적어내린다. 그러나 그것은 반성과 이해의 과정이다. 여성인 안나의 '나는 행복해야만 해' 라는 집착의 명제는 혼자있음으로 불완전 해지는 자신을 깨닫고, 남성과, 세상과, 모든 부조리와의 화해를 통해 이룰 수 있다는, 그것을 체득해나가는 모습을 천천히, 끈질기게 쓰고, 모으고, 정리한 것이 바로 이 [황금노트북] 의 골자 아닐까. 여성이 남성을 극복해야만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반대되는 것을 극복해야만 진정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파란 노트 안나는 당을 탈퇴할 결심을 굳히고 마이클이 떠난다는 것을 확신한 1954년 9월 15일에 있었던 모든 일들과 생각들을 빠짐없이 기록해보기로 한다. 아침에 일어나 마이클과 섹스를 하고, 아이를 깨우고, 학교를 보내고, 장을 보고, 생리를 시작한 이야기까지 시시콜콜 적으면서 그 순간 순간 느꼈던 모든 생각들을 최대한 적어내려 하지만 그렇게 있는 그대로 적은 "진실"의 이야기는 분량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안나의 비참함만 증폭시킨다. 노트의 말미에는 9월 15일의 이야기를 단 몇줄로 요약해 다시 적어놓지만 거기에는 그 어떤 감정도, 고뇌도 묻어있지않다. 아마도 먼 미래에 "긴 9월 15일"의 이야기를 읽으면 생생히 되살아나는 기억으로 그 과거를 거부하고 증오하겠지만, "짧은 9월 15일" 의 이야기를 읽으면 자신이 그것을 "극복" 했다고 타협하며 조금은 너그러워질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진실" 을 적는 것은 그저 남루할 따름이다? 안나는 노트의 기록을 통해 자신이 직시해야할 것을 찾는다. 지나온 삶의 단계들을 미워해선 안된다는 것을. 거쳐왔던, 소속했던, 함께 했던 그 모든 것들을 고통 속에서 떠나 보낸다 해도 그 과정 자체를 받아 들여야 된다는 것을. 1권의 감상문에서 적어 놓은 바가 있지만, 몇번의 "우수글" 로의 선정 이후 나는 글을 쓸 의욕을 잃었다. 도서 커뮤니티를 탈퇴하고 피드백의 공간을 차단하고 행여 또 눈에 뜰라치면 그 하루의 바람이 얼른 지나가길 숨죽여 기다렸다. 높은 방문자수를 애써 외면하려 하거나 아예 가려둬버리기도 했지만 그 너머에 "진정한 공감" 을 컨택트 해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더 쓰라린 일이었다. 내가 보는 이에게 주는 거리감을 계산하고 보는 이가 내 글을 맘 편하게, 타성적으로 읽는 데에 있어선 피드백의 공간이 없는 편이 상호 부담을 덜 수 있겠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그것은 곧 스스로 "소통 단절" 을 택한 것이나 다름 없어서 "소통을 위해 글을 쓴다" 는 자기 오류의 구덩이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뭣하러 "누군가" 볼 수 있는 곳에 글을 굳이 계속 쓰려 하는가? 무엇에 미련이 있기에? 무엇에 희망이 있기에? 오로지 나만의 노트에만 적는다면 이런 오류의 고뇌 따위, 세상과 나 자신에 대한 기만 따위 없을 것 아닌가? 그래서 정말로 나만의 노트를 장만했다. (이 책을 읽기 전의 일이다) 그러나 막상 써야할 것이 막막했다. 이미 내 머릿속에 있으므로 그것을 다시 끌어내 눈으로 재확인 한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어거지로라도 쓰고자 하는 욕망, 혹은 의무 때문에 "하루" 의 충실한 기록이라도 하자고 마음 먹었다. 몇시에 일어나 식사로 무엇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다 잤는지. 몇달 동안 부지런히 기록해오다 어떤 특정 일을 떠올리기 위해서 무심코 앞장을 넘겨 보았다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을 알아채고 충격을 받았다. 그 기록에는 정말 "하루의 기록" 밖에 없었다. OO일은 몇시에 일어났고, OO일은 몇시에 운동했으며, OO일은 몇시에 잤다는 식의. 분명 몇달 동안 고뇌하고, 괴로워하고, 힘들어 해왔었건만, 그 기록에는 그런 감정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하루" 를 적는다면서 나는 "하루" 를 적어내지 못하고 있었던거다. 그 노트를 장만하기 이전에, 공개 블로그에, 그러나 극소수에게만 주소를 알려준 공간에 일기를 적었다. 일기라고 해도 그쪽은 하루의 기록이라기보다 그날 느꼈던 감정의 토로를 주로 썼다. 정말 그때 그때 솔직한 감정을 썼음에도, 며칠도 지나지 않아, 어떤 때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 기록들을 후회했다. 괴로운 심정이 좀 나아지고 난 뒤 며칠전의 괴로운 기록들을 보면 스스로 쓴 글임에도 비난하고 싶어졌다. 고작 해야 하루에 네다섯명, 아예 나 말고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날도 있었던 공간이었음에도 나는 그것을 "공개" 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도대체 이런 감정의 토로를 여기에 왜 적었던걸까. 누군가에게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던걸까. 누가 도와주길 바랬던걸까. 친절한 한마디를 듣길 원했던걸까. 그렇게 "의존" 해야만 나는 "극복" 할 수 있는 것인가? 누군가 "공감" 해줘야만 나 자신이 바로 설 수 있는 것인가? 설령 나 혼자만 보는 "일기"에 모든 감정과 하루의 기록을 전부, 빠짐없이 적었다해도, 나는 그것을 기꺼이 타인이 보도록 허락했을까? 그렇다는 것은, "보이고자" 하는 것은 오로지 인정받거나 동의받고자 하는 글이고 나머지 "실패"의 글은 "없던" 것 마냥 자신과 세상을 향해 기만하는 것은 아닌지. "과정" 을 인정하지 못하는 게 과연 "진실" 일까? 보이는 곳에 글을 써도 보이지 않은 곳에 글을 써도 벗어날 수 없는 딜레마가 있었다. 다수의 피드백과 격하게 충돌하며 쓰는 글, 피드백을 거부하며 그저 보이기만 위해 쓰는 글, 피드백도 드러내보임도 없이 자기 자신만을 독자로 하는 글. 그 어디에서 "진실" 을 쓸 수 있으며 온전히 보전할 수 있을까. 결국, "진실" 을 쓰는 행위, "진실" 을 받아 들이는 자세, "진실" 을 감당하고 극복하고 필요성을 깨달으며, 세상에 설파하여 또 다시 그 "진실" 이라 믿었던 것을 깨부수는 행위를 거쳐야 하는 것이 궁극적인 글쓰기의 목적이 아니련가. 세상이 내 자신의 글을 오해하고 진정한 소통을 하려들지 않는다고 원망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부터 "진실" 을 제대로 적고 제대로 받아 들이며 제대로 그것을 세상에 내던져 재구성 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자기 오류 인정에 대한 용기가 있는가? 자유로운 여자들 3 자살을 시도했던 토미는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 대신 시력을 잃었다. 냉소적이고 반항적이었던 토미는 의외로 덤덤히 그 사실을 받아 들이고 갑자기 "말 잘 듣는 순한" 아들로 돌변해버렸는데, 그것이 오히려 엄마인 몰리의 죄책감을 히스테릭하게 자극하는 요소가 된다. 이미 토미는 한번의 자살 시도로 세상을 아무 비판없이 받아 들이기로 자포자기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마음을 닫아버리고 만 것이다. 토미의 자살 미수를 철저하게 몰리와 안나의 탓으로 돌린 리처드는 덕분에 자신의 부도덕을 합리화하며 두번째 아내인 매리언과 이혼할 결심을 하고, 안나는 매리언이 붕괴될 것을 우려하며 과연 남녀가, 부모 자식간이 "종속" 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고뇌한다. 자신이 정상적인 생활 패턴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이유는 딸인 자넷 때문이지만, 세상 남자들에게 불필요할 정도의 위협감을 느끼고 방어적인 태도가 되는 것은 남편이 없는 싱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진정 이 "종속" 을 벗어난 자유가 가능한가를 스스로 자문한다. 그 와중에 남편인 리처드에게 버림받은 매리언은 "독립" 하기 위해서 정치적 활동을 하기로 선언하고 안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에 자신의 과거 행적을 발견하고 당혹스러워 한다. 사람이든 사상이든 어딘가에 "종속" 되어야만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다는 혼란에 빠져드는 안나는 사유 재산, 물질에 집착하고 종반에는 그 소유욕과 소유 물건에 대한(자신의 자식을 포함한) 보호 심리가 타인에 대한 배격심으로 변질되며 함께 생활하던 이를 내쫓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관계의 종말로 상처를 거듭하다보면 어느 순간 방어심의 내성을 키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에 실패하면 더이상 사랑을 하고 싶지 않게 되고, 우정에 실패하면 더이상 친구를 사귀고 싶지 않게된다. 믿었던 것에 배신을 당하면 더이상 믿고 싶지 않게 되고, 기대고 있던 것이 무너지면 더이상 기대지 않으려고 애쓰게 된다. 그리하여 휘청휘청 홀로 서서, 비틀비틀 홀로 걸으려 한다. 그렇게 가는 길에 무엇에라도 부딪히면 넘어질 것이 자명하므로, 무엇을 보든 무엇을 접하든 위협적이고 적대적이고 공포스러운 것이 된다. 오로지 안심스럽다고 착각 되어지는 것은 "물질" 이다. 배부를 곳이 있으면 된다, 따뜻할 곳이 있으면 된다, 눈과 귀에 아름다울 것이 있으면 된다, 그것을 이룰 "돈" 만 있으면 된다하며 악착같이 물질에 자신을 기댄다. "즐거울" "안심할" 무엇만 있다면 더이상 배신 따위, 상처 따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그리하여 또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힌다. 사람을 포기한 나는, 관계를 포기한 나는, 배척을 선택한 나는, 좋은 것만 보고자 하는 나는 이제 이 "물질" 이 없으면 안된다고. 이것이야말로 내 생애의 목표라고. 없으면 괴로워질거라고, 가난해지면 힘들어질거라고, 그러니까 내 눈가리고 아웅과 이기적인 선택과 안이한 판단은 세상을 바로 사는 정의가 될거라고. 천민 자본주의는 이것을 최대한 활용하며 합리화의 구실을 만들어준다. "모두 부자 되시라. 그리하여 행복해지시라" 고. 그리하여 내 이익으로 인해 저기 어딘가 반대편의, 비주류의 사람들이 고통 당하건 말건 나는 내 삶의 목적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남들을 제치고 '성공' 해야만 하고, 남들을 제치고 '1등' 해야만 하고 남들보다 더 '잘 살고' 더 '많이' 가져야 한다. '내 소유' 인 자식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러니 그럴 댓가로 외로움 같은 건, 평생의 결핍감 같은 건 얼마든지 내버려도 아쉬울 게 없지 않은가? 그런데 무슨 "자유" 까지 가지려 탐하는가? 여유로운 노년은 행복하고 궁색한 노년은 불행하다고 믿는 그 옹졸한 마음으로 무슨 "진리"까지 꿰차려 하는가? 검은 노트 우연히 목격한 사건으로 안나는 문득 (소설 [전쟁의 변경지대] 의 모티브가 되었던) 아프리카 마쇼피 호텔에서의 일화를 기억해낸다. 호텔 안주인의 부탁으로 안나와 그의 친구들은 먹거리 재료를 구하기 위해 비둘기 사냥에 나선다. 무정한 폴은 비둘기를 서슴없이 쏘아 죽이지만 비둘기 시체는 자신이 우습게 여기는 지미에게 수거토록 한다. 사냥길에 나서는 도중 수만마리의 메뚜기 교미 집단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도 폴은 자연을 거스르며 자신이 선택한 메뚜기 한쌍을 강제 교미시킨다. 폴의 영향을 적잖이 받은 지미 역시 개미 귀신과 개미의 사투를 흥미롭게 지켜보다 딱정벌레를 침투시킴으로 모두 죽여버린다. 이것을 남은 세사람은- 이성적이지만 오로지 책만 붙들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윌리, 순진한 연민주의자 메리로즈, 그리고 단순한 관찰자인 안나- 무기력하게 지켜만본다. 이 소설, [황금노트북] 의 주요 키포인트는 [파란 노트] 에서 가장 두드러지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장 인상 깊었던 챕터로 [검은 노트], 특히 이번 편을 손꼽고 싶다. 레싱은 폴과 지미의 야만적인 행동을 통해 영제국의 잔인하고도 무책임한 실체를 폭로한다. 비단 아프리카에서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까지 걸쳐 있는 과거 식민지 국가에서는 여전히 그들이 저질러놓은 만행의 흔적으로 고통 받는다. 오로지 "식료품" 을 조달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원주민을 포로 삼고, 그들의 땅을 점령하여 훼손한 뒤, "신사적" 으로 물러난답시고 이후 발생된 모든 내전에 책임지지 않는 제국의 모습은 곤충들과 비둘기를 아무런 가책없이 살해하는 폴과 지미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특히 폴은 자신이 저질렀음에도 지미의 손에 피를 묻힘으로 더더욱 책임에서 자유롭다. 폴은 자신의 행동의 정당성을 역설하는데, 놀랍게도 여기에 스탈린의 모습이 겹쳐진다. 레싱은 제국은 물론, 허상이었던 사회주의의 상징 또한 아울러 비판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비판에서 그는, 혹은 안나는, 과연 자유로웠을까? 이 책을 읽는 우리조차 자유로울 수 있을까? 피를 묻히지 않고 자본주의의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고, 지식의 허영에 들떠 서책 탐독과 자기가치적 토론에만 몰두하며, 연민이라는 로맨틱한 감정에 도취되어 봉사하는 자신을 미화하고, 이도 저도 다 문제 있다며 제3자적 위치에서 팔짱 끼고 그저 방관만 하고 있는 모습이 우리에게 정녕 없는가? 진실한 책이, 사실적 르포가, 지구 저너머의 모든 것을 알려오는 것을 '읽고' '들으' 면서도 그저 그것을 '분석' 만 하고 앉아 있는 것은 아닌가? 설령 '실천' 한다해도 한발자국 움직이고 만족하거나 두발 자국 움직이며 한계에 고통스러워 할 따름은 아닌가? 쓰레기를 버린 자만 비난해야 하는가? 자신만 쓰레기를 버리지 않으면 된다고 믿는 자는 옳은가? 아니면 이미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이가 옳은가? 도덕적 사상에만 매달려 담론만으로 다투는 '방관자' 들의 작태에 안나는 회의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러한 안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진실을 제대로 적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자책하지만, 설령 이렇게 [전쟁의 변경지대] 에 관한 진실, 혹은 참회록을 검은 노트에 계속 기록한다해도 이런 글이 세상에 공표 되었을 때 자기가 고백하고 통찰한 그대로 읽히기는 커녕 날것으로 드러난 의미조차 왜곡될 것이라 이제는 확신한다. 이미 세상에 드러난 [전쟁의 변경 지대] 부터가 시대에 따라 매번 다른 식으로 읽힌다. 시대에 따라 책이 다르게 투영되는 것이 당연하다면, 대체 "단정적인" 서평은 뭐하러 존재하는가? 레싱은 2년 간격으로 평이 달라지는 [전쟁의 변경지대] 에 관한 서평을 나열하고 한 미국작가가 자신에게 악평을 했던 서평가에게 환심을 사서 다시 호평을 이끌어 내었다는 이야기를 통해 격렬히 서평 행태를 조롱하고 비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판사는 작품 자체보다 서평을 더 요구하더라는, 그런 시대가 되버렸다는 씁쓸한 후기를 곁들여서. 앞서 적었듯이, 나는 비록 서평란에 글을 올린다해도 이 글에 결단코 "서평" 이란 이름을 붙히고 싶지 않다. 전형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이미 그 분류의 권한이 내게 없기도 하겠지만, 설령 누군가 너그러이 붙혀준다해도 되도록 사양하고 싶다. 솔직한 말로, 서평이 작품을 주객전도하는 작금의 출판 현실에 레싱만큼이나 통렬히 분개하고 한탄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아무리 출판계의 사정이 안좋아서라지만 책의 무료 배급을 통해 리서치 하듯 서평을 수집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책이 책으로 읽히지 않고 오로지 판매 목적을 위한 자금의 흐름으로만 읽히고 만다. 서책의 경중을 따지지는 않지만, 인터넷 서점에 수치화 되어있는 어느 책의 대단히 높은 서평수와 읽힐 가치가 충분히 읽는 책의 쓸쓸한 평란을 보고 있노라면 위화감에 들다못해 나라도 그 책을 읽어 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마저 사로잡힌다. 레싱은 인용 역시 나쁜 방식이라며 지양할 것을 권하고 있지만 답답한 마음을 부족한 어휘를 핑계삼아 그의 서문을 다시 인용하자면 이 부분이다. 의무감에서 혹은 유행이나 일반적인 동향에 속한다고 해서 절대, 절대로 읽지 마십시오. 출판된 책이 출판되지 않았거나 쓰여지지 않은 책만큼이나 많음을 기억하세요. 당신은 공감을 느끼는 책에서 다른 책으로 옮겨가며 당신의 방식대로 읽도록 교육받았어야 했어요. 서평은 오로지 개인의 의견 발현, 소통의 창구로 이용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자본의 유통을 위해 목적되어지면 책의 가치마저 매도된다. 서평은 또한 결코 단정적일 수 없다. 시대에 따라, 개인의 경험에 따라 다르게 읽히고 그 경험의 차이만으로 결코 작가의 의중과 100% 일치할 수가 없다. 오히려 일치하지 않고 상충된 의견으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야 그것이 비로소 문학의 역할이라고 레싱은 역설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필독서나 추천도서의 선정으로 서책을 구분 짓는 것에 반대한다. 대체로 불특정 몇몇에 의한 선정일뿐더러, 설령 절대 다수에 의한 선정이더라도 그 역시 맹목에 빠질 우려가 있다.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 이하 어린 세대들에게 추천도서나 수상작을 주입하는 것은 독서와 사고의 자주성을 해치는 길이다. 그럼에도 "창의력" 을 기른답시고 "추천도서" 를 강요하다니,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어째서 스스로 책을 고르게 하기보다 이미 골라진 책으로 마음의 감옥을 만들게 하는가. 정녕 "추천도서" 를 선정하려거든 "누구에게나 좋은, 친절한, 감동적인 책" 보다 격렬한 논의와 다양한 사고를 유발시킬 수 있는 책이어야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 하나, 나 역시 내 방식대로 책을 읽고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지만, 가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단정적인 서평을 볼때 마음이 아프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고 자기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가치가 없는 마냥] 내팽겨치고마는 서평을 읽으면 그렇게 쓴 이 또한 어딘가에서 어느 한 행동으로 배격당할 것이 뻔하다는 생각을 하고 마는 것이다. 어렵다, 재미없다, 수준이하다, 그 모든 부정적 말이 설령 당장의 가장 솔직한, 스스로의 자율적 판단이라 하더라도 그 말이 결국은 자신의 한계를 결정짓고 만다. [지금 내가 이것을 부정하고 있으니, 10년후에도 이것을 부정할 것이다] 라고 미래의 자신에게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변하지 않고 성장하지 않는 미래의 자신을 결국 스스로 제어하는 횡포나 오만이 아닌가. 책의 저자에게 친절하고 친절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에게 불친절한 것이다. 소통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음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이다. 지금 당장 느끼는 부정적 평가를 에둘러 말하라는 것이 아닌, 자기 주장을 갖되 보다 열린 마음을 가지면 안될까 하는 안타까움의 마음이다. 그런데 그 작위적인 서평 수집과 몇개의 부정적 평가 나열로 책을 통해 서평 하는 이의 자기 반성, 소통으로의 일보 전진을 마비시키고 책의 가치와 작가의 진심이 외면 당하며 상호가 얻을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시키는 현실을 만들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빨간 노트 [검은 노트] 의 폴의 모습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지도자 모습이 겹쳐지듯이, 어차피 사상이란 자기 편의대로 이용하는 하나의 매개에 불과하며 그것을 이용해 사람을 부리려는 이들의 목적과 행동의 야만성은 같다. 이것을 깨달으면 믿었던 것이 삽시간에 붕괴되고 허탈감과 냉소주의에 빠져들게된다. [이런 것에 매달려봤자 배울 게 없다] 는 게 그나마의 배울 점이랄까. 그렇게 사상이 붕괴되고 그 자리에 또 새로운 사상이 대두된다. 몰리는 토미가 신 사회주의자 무리에 가담했다는 이야기를 안나에게 전하며 세상이 변하고 주제가 바뀌었어도 자신들의 "그 때" 모습과 전혀 다를 게 없다고 말한다. 순수한 "사상" 을 신세대가 지켜주는 건 반가운 일이지만 모쪼록 그들이 자신들보다 영리하고, 얻는 것이 있기를 바라며. 역사는 진부하게 반복된다. 이미 해답이 수천년전에 나와 있었음에도 인간은 미련하게 체득해야 비로소 그 말귀를 알아듣는다. 아마 우리의 후세대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반복의 과정으로 여기까지 왔다. 한심한 짓의 반복인데도 무엇인가가 변했다. 그렇다면 이 한심한 짓은 인간에게 정녕 가치 있는 일인가? 가치가 있다면 더이상 한심한 일이 아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어디까지 한심하고 어디부터 가치가 있는 일로 변하는걸까? 덧없는 사상에 매달려 오로지 그것만을 맹신하며 반대되는 것을 적대시 하는 것은 분명 한심한 일이지만, 그것의 허상을 깨닫고 허탈함에 빠져 더이상 아무것도 의존하지 않거나 도피하기만 하는 것 역시 한심한 일이겠지만, 그것의 실체를 바로 보고 비판의 날을 대어 깎아 나가려는, 설령 자신의 오류 인정이라는 뼈아픈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하더라도 거기부터는 가치 있는 일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사상" 을 보다 의미있게 만들고 그것에 기대어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아닐까? 노란 노트 엘라는 그동안 얹혀 살았던 줄리아 집을 나오면서 독립을 선언하고, 그로 인해 줄리아가 [여태껏 자신을 이용해왔다] 며 분개해하는 것을 보며 사람 사이의 관계를 고민하게 된다. 성적 욕구에 의해 만나게 되는 유부남들도 [아내는 필요하지만, 자유로운 애인도 필요하다] 는 주장을 펼치는 것을 보며 서로를 "이용" 한다는 것에 회의감을 갖는다. 어차피 서로가 필요에 의해 관계를 맺는다면, 어느 쪽이든 상대가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면 필요성이 상실되고 관계는 종말을 맞아야 하는가? 변화해가는 서로를 받아들일 여지는 전혀 없는가? 가령 그 유부남들은 아내가 정숙하길 바라다가 그 정숙함이 지겨워 바람을 피거나 떠났는데, 그 덕분에 그녀가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독립" 하게 되면 남자는 그 자율성에 이끌려 또 그녀를 애인으로 삼으려 하고, 관계가 발전되어 그녀가 다시 그의 아내가 되면 원래의 패턴으로 돌아온다는, 비단 남녀 관계에서뿐만이 아니라 어떤 관계에서든 엇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 악순환을 안나는 지긋지긋해 하며 이것을 타파할 궁리를 한다. 진부한 역사처럼 관계 역시 구태의연하다. 인간은 학습적인 동물이라지만 어떻게 된게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고작 한다는 것이 상처 받지 않기 위해 피하는 방법만을 체득할 따름이다. 그렇게 피하다가 고립감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관계를 맺으면 같은 실수를 또 범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하나다. "자기 필요" 에 의해서 관계를 맺으려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있음으로 자기 존재가 자각되길 바라는 마음에, 누군가 자신을 인정해주고, 힘들 때 위로해주고, 그에게 베풀면서 자기 가치를 드높이게 해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므로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그 존재가 자신에게 무심해지면, 자신을 비난하거나 비판하면,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 자신이 없어도 된다는 모습을 취하면 "배신" 했다고 여긴다. 그것으로 관계의 종말이 온다. 이것은 당연한 절차인가? 아니면 인간의 자기합리화인가? 변하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은 자기 가치의 몰락이므로 영원히 불가능한 것인가? 하지만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나 아닌 타인이 되어야만 상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어디에서 오류의 악순환이 반복되는가? 파란 노트 지리멸렬한 관계의 반복 덕에 인간은 누구나 엇비슷한 관념을 학습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인간은 ○○하면 XX 해질 것이다] [인간은 ○○한 환경에 있으면 XX해진다] 는 식으로 패턴이 공식화 되는 것이다. 그것을 체계화시킨 학문이 심리학이다. 그래서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서 "치료" 를 받으면 심리학자들은 도식화된 문구들 사이에서 적절한 것을 골라 우리를 안심시켜준다. 꼭 심리학자의 임상적 소견이 아니더라도 남발하는 소위 "자기계발적" 아포리즘으로 얼마든지 고통과 어리석음을 망각하는 진통제를 맞을 수가 있다. 그러한 방법으로 정신의 파괴, 자기 붕괴를 제지한다. 안나는 이 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믿는다. 자기 붕괴를 감당해야만 그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안나는 자기 붕괴를 거듭 연습하며 그 안에서 스스로를 완전 소멸시키지 않기 위해 끝없이 자신을 객관화 하려고 한다. 그러나 또 다시 "관계" 가 시작되면 "감정" 이 움직이며 스스로 다짐했던 것들을 금세 망각하고 만다. 감정, 즉 사랑의 시작은 "자신을 인정해주는" 상대를 만날 때 시작하는 것이다. 상대가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고 자신을 비판할 때 관계에 금이 간다. 그럼 여기에서 "감정" 을 차단한 채로 관계를 시작하면 어떨까? 안나는 드 실바와의 관계에서의 예를 들며 감정 없는 관계란 인간에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선택은 두가지다. 관계하지 말든가, "자신을 인정해주길" 포기하든가.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세상을 향해 안나는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어한다. 부딪히고 부딪혀서, 무너지고 부서지고 다치는 동안 "배려" 의 싹이 조금이라도 트인다면, 그것이 "파괴-속의-기쁨" 이 아니겠는가 하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 그러나 그 어려운 진일보를 위해 자기 오류, 자기 붕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이타와 이기는 어떻게 공존해야 할 것인가. 안나는 힘겹게 자신을 수술대 위에 올려놓고 스스로를 파헤쳐간다. 내 관계의 실패는 [기브앤테이크] 의 집착에서 비롯되었다. 스스로 남들에게 "베푸는 것" 을 좋아한다고 착각한 나는 누군가를 만나면 물질적인 것이 되었든 감정 표식이 되었든 무언가를 주려하고 그에 대한 반응을 확인받으려 했다. 그것이 내 마음에 마땅찮으면 상대를 무정하고 무심하다 매도했다. 내 자신의 결핍에서 나온 행동이 세상에 요구를 했을 따름인데 그것을 희생으로 착각하고 [나는 사람을 잘 믿어서] [나는 누구한테나 잘해서] [나는 쉽게 이용당해서] 라는 식으로 자기연민에 적극적이었으니, 결과적으론 나의 가치를 만들기 위해 그 관계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상대가 베풀지 않는 무심의 이기심을 보였다면 나는 요구와 강탈의 이기심을 보였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비뚤어진 자기연민은 끝까지 관계를 협박했다. [그래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너한테 못할 짓만 했어] [나같은 사람은 불필요해] 라며 사과조차 공격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죄책감은 뼈저린 자기 오류의 인식과 자기 붕괴의 결심이야 되지 않은가? 그런데 달랑 [사과의 언어] 라는 편이한 수단으로 상대에게 모든 것을 전가하고 자기 보호를 택하지 않았던가? 나와 다른 사람이 있다면 나는 단지 존재만으로 그를 상처줄 수 있다. 그 상처를 피하는 방법이 도대체 뭘까. 그와 영원히 반목하고 관계하지 않는 것? 그를 어떻게든 찍어눌러 없애 버리는 것? 아니면 나 자신을 전면 부정하고 그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 그러나 '똑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자인 이상 남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이해' 해야 한다면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가공의 이타적 언어를 남발하는 것이 아닌, 진정 스스로를 아파하며 반성하고 오류를 인정하는 그 한마디부터 나와야하지 않겠는가. 또한 상대의 아픔 자체를 들여다보는, [내가 당신을 아프게 했나요] 라는 문구부터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안나가,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관계의 희망, 배려다. 이타와 이기에서 균형을 타는 유일한 단어인 것이다. ((3권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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