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김연수의 <산책하는 사람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나뭇잎숨결 2009. 1. 22. 18:15

 

 

 "아, 그대 어두운 자들이여. 그대 밤과 같은 자들이여. 밤이 왔다. 이제 비로소 사랑하는 자들의 모든 노래가 깨어난다. 나의 영혼 또한 사랑하는 자의 노래다."

                                                                                                                                                                            - 니체

 

  건축사가 탄 택시가 멀어지자마자, 한쪽 골목에서 코끼리가 나타나더니 그의 심장 위에 슬며시 한쪽 발을 올려놓았다. 코끼리는 고민하는 것 같았다. 힘을 줄까, 말까. 그는 그 코끼리를 초등학교 시절 가을운동회에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굴리던 종이 지구 정도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오랜만에 나타난 코끼리는 여느 때보다 훨씬 더 힘이 셌다. 코끼리는 슬며시 발에 힘을 줬다가 뺐다가를 반복했다. 언제 코끼리가 세게 힘을 줄지 예상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서 있었지만, 코끼리는 그대로였다. 조금 기다려보다가 그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딛어봤다. 코끼리의 발은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았다. 조심스럽게 한 걸음 더 내딛어봤다. 역시 변화는 없었다. 그러다가 일곱 발자국 정도 갔을 때, 갑자기 코끼리가 발에 힘을 줬고, 그는 오른손으로 가슴을 만지며 멈춰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코끼리는 슬며시 발에서 조금 힘을 뺐다. 심장이 없어도 걸어갈 수 있는, 차라리 지네나 베짱이나 수컷 사마귀 같은 것이었다면. 고통, 아아, 그 고통……. 그로서는 거의 엎드려서 빌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코끼리는 어쩌면 타키온 같은 것, 있다고 생각하지만 증명할 수는 없는,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빛보다 빠른 입자 같은 것이어서 어디를 향해 빌어야만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건 있지만 없는 것이어서 예측이 불가능했다. 그건 자기 안에서 생겨나는 고름 같은 것이었다. 거기에는 이해의 껍질 같은 건 없었다. 결국 그는 그녀처럼 죽게 될 것이었다. 자기 안에서. 혼자서.

 

                                                                                                      - 김연수, '산책하는 사람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중에서

 

 

 
        ...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데미안>과 <파우스트>와 <설국>을 읽었고 절에서 밤새 1,080배를 했으며 매일 해질 무렵이면 열바퀴식 운동장을 돌았고 매순간 의미있게 살지 않는다면 그 즉시 자살한다는 내용의 '조건부자살동의서'를 작성해 책가방 속에 넣고 다녔다. 시를 쓰는 여학생을 맹목적으로 좋아 했고 초컬릿 맛이 나는 '장미'를 피웠으며 새벽 2시 비둘기호를 타고 부산으로 도망치는 친구를 배웅하느라 '나플레옹'을 마셨고 가출에서 돌아온 또 다른 친구가 들려준, 너무나 이쁜 강릉역 앞 창녀촌의 여자를 혼자 상상했다.

          그러나 무엇에도 나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런 밤이면 고향집 2층 지붕 위에 올라가 누워 있곤 했다. 처음에는 내가 아래에 있고 별들이 위에 있지만, 이윽고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위치가 바뀌어 내가 위에 있고 별들이 아래에 있게 된다. 그리고 나는 서서히 그 별들의 바다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별들만이 가득한 바다. 또 나는 또 어디서 와서 또 어디로 가는지. 그게 너무 궁금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내 마음 한가운데는 텅 비어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그 텅 빈 부분을 채우기 위해 살아 왔다. 사랑할 만한 것이라면 무엇에든 빠져들었고 아파야만 한다면 기꺼이 아파했으며 이 생에서 다 배우지 못하면 다음 생에서 배우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그 텅 빈 부분은 채워지지 않았다. 아무리 해도 해도. 그건 슬픈 말이다. 그리고 서른 살이 되면서 나는 내가 도넛과 같은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빵집 아들로서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깨달음이었다. 나는 도넛으로 태어났다. 그 가운데가 채워지면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책머리 글 중에서

 

 

 

  때로는 한 사람이 세상 모두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고, 이 세상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 한 사람만을 생각할 때도 있다. 모든 사람은 단 한 사람이라고 말한 사람이 보르헤스라고 했던가. 확실하진 않지만 나는 보르헤스가 그런 말을 했다면 그게 옳은 말이라고 전해주고 싶다. (....) 모두에게는 각자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역시 운명과 사랑과 배신과 복수와 좌절과 슬픔과 기쁨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멀리, 아주 멀리 가면 풍경은 달라지지만, 역시 이야기가 말하는 바는 비슷하다.
작가로서 진심으로 바라는 일은 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이 정말 많은 얘기를 들려주기를. 그리고 그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이 다시 내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주기를."

 

- 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연재를 시작하며(계간 『문학동네』 2005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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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초겨울, 배낭 하나만 메고 혼자서 이베리아 반도를 여행한 일이 있습니다. (…) 외로움의 끝에 우리의 모든 삶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허무가 있는 게 아니라 순수한, 어쩌면 따뜻하다고 할 수도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게 이번 여행의 성과였습니다. 순수한 뭔가. 제게는 그게 누군가 끝내 읽어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늘 거기에 존재하는 언어였습니다. 그리하여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저는 예전보다 더 외로움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뜻밖에도 수상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무도 제 글을 읽어주지 않는 세계에서 귀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탓에 그 소식을 들으니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두 세계 모두가 제게는 매력적입니다. 제 모국어가 순수한 언어로만 남는 세계, 그리고 같은 모국어로 된 제 글을 누군가 읽어주는 세계. 그 두 세계 사이에 오랫동안 머물고 싶습니다. - 김연수

 

 

 

 

 

  김연수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본원적인 고통의 의미를 '코끼리'라는 상징을 통하여 텍스트 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조명하고 있다. 또한 고도의 서사 기법과 해체 전략을 이야기의 공간 안에서 하나의 소설적 미학으로 승화시킨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것은 인간의 삶에 내재하는 '고통'의 문제이다. 이 고통은 바깥으로부터 올 수도 있고 자기 내부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그것은 육체적인 것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다. 또 이 작품에서처럼 암이라는 치명적인 질병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고, 불면증이라는 정신적 현상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은 이러한 인간의 고통을 둔중한 ' 코끼리의 발'의 무게라는 특이한 감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소설적 주제를 구체화시킨다.

 

 

 

 

 


상징계가 깡그리 사라져 상상계와 현실계만 달랑 남은 오늘의 글쓰기 판에서 제일 정직한 글쓰기라 규정할 만하다.

 

                                                                                                                               -김윤식(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접근 방식을 달리하여 본질에 다가가는 몸짓이 구절마다 새롭고 웅숭깊었다.

 

                                                                                                                                                             - 윤후명(소설가)

소설의 이야기가 작가에 의해 창조되는 하나의 미적 공간이라는 신념이 김연수 씨가 추구하고 있는 작가 의식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 권영민(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실존철학적인 사유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특히나 사유의 여지를 남겨놓고 부드럽게 자극하는 문체의 힘이 돋보인다.

 

                                                                                                                                                             - 조성기(소설가)

서사적으로는 가벼운 듯하지만 이 작품은 고통이라는 매우 상존적인 주제에 대해 생각하는, 하나의 상큼한 방식을 제안한다.

 

                                                                                                                                              - 최윤(소설가, 서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