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곧 여든두 살이 됩니다. 키는 예전보다 6센티미터 줄었고, 몸무게는 겨우 45킬로그램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내 몸을 꼭 안아줄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6쪽)
"당신 역시 부모가 헤어졌고,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은 차례로 떠났으며 전쟁이 끝나기 전 몇 년간은 태비라는 고양이를 데리고 배급받은 식량을 나눠 먹으며 혼자 산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다른 세상을 탐험하려고 조국을 탈출했지요. 무일푼의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인 나의 어떤 구석이 당신의 관심을 끌 수 있었을까요?"(11쪽)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나는 '다른 곳에', 내게 낯선 곳에 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내 부족함을 메워주는 타자성(他者性)의 차원으로 나를 이끌어주었습니다. 정체성이라는 것을 늘 거부하면서도 결국 내 것이 아닌 정체성들만 하나하나 덧붙이며 살아온 나를 말입니다."(14쪽)
"의학적 기술과학이 당신의 몸과 당신 사이의 관계를 마음대로 휘두르게 하는 대신, 자기 생명에 대해 스스로 권한을 갖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병 때문에 우리는 생태주의와 기술비판이라는 영역으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81쪽)
"당신은 나의 진정한 첫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내가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할 수 없다면, 나는 결코 세상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겁니다."(30쪽)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나는 내 앞에 있는 당신에게 온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그걸 당신이 느끼게 해주고 싶습니다. 당신은 내게 당신의 삶 전부와 당신의 전부를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 동안 나도 당신에게 내 전부를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89쪽)
"밤이 되면 가끔 텅 빈 길에서, 황량한 풍경 속에서, 관을 따라 걷고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봅니다. 내가 그 남자입니다. 관 속에 누워 떠나는 것은 당신입니다. 당신을 화장하는 곳에 나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재가 든 납골함을 받아들지 않을 겁니다. 캐슬린 페리어의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
그러다 나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당신의 숨소리를 살피고, 손으로 당신을 쓰다듬어봅니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하자고."(89~90쪽)
- 앙드레 고르의『D에게 보낸 편지- 어느 사랑의 역사』中에서
01.
2007년 9월 24일 전 세계 언론은 한 철학자와 그 아내의 죽음을 긴급히 타전했다.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 앙드레 고르(84세)가 불치병으로 고통 받아온 아내 도린(83세)과 함께 파리 교외의 자택에서 나란히 누운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동반자살이었다. 현관문에는 "경찰에 알리시오"라는 쪽지가 붙어 있었고 두 사람이 누운 침대 곁 탁자 위에는 지인들에게 쓴 편지가 여러 통 놓여 있었다. 화장한 재를 그들이 함께 가꾼 마당에 뿌려달라는 유언과 함께.
사르트르의 절친한 친구이자, 장 다니엘과 지금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주간지가 된 <누벨 옵세르바퇴르>를 공동 창간한 언론인으로 전후 유럽 지성계의 한복판을 통과해온 고르는 아내가 척추수술 시 투여한 조영제 후유증으로 불치병에 걸리자 1983년 이래 모든 지적 활동을 접고 아내를 간병해왔다. <르 몽드> <옵저버> <리베라시옹> <더 타임즈> <디 차이트> 등 유럽의 유력 신문들은 "유럽 좌파의 거물급 지성"(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추모 성명 중에서)의 사랑과 비극적인 죽음을 기리며 다투어 특집 기사를 쏟아냈다. 그리고 이런 폭발적인 추모 열기의 한가운데, 자살 1년 전인 작년 가을 고르가 펴낸 작은 책 『D에게 보낸 편지-어느 사랑의 역사』가 세계 출판계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02.
『D에게 보낸 편지-어느 사랑의 역사』는 앙드레 고르가 죽음을 기다리는 아내에게 바친 아름다운 연서(戀書)다. 선택한 죽음을 맞기 1년 전 고르는 아내와의 첫 만남부터 최근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한 통의 긴 편지를 썼고 이를 본 지인들의 권유로 그 편지글을 책으로 냈다. 여든세 살의 철학자가 여든두 살의 아내에게 바친 연서는 출간 즉시 크게 상찬을 받았으며 지난 달 고르 부부의 동반 자살 이후 단번에 프랑스와 독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영어판은 고르의 아내 도린이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출간하는 것을 만류해 출간되지 않았다.) 헌신과 감사로 가득 찬 고르의 글, 죽음으로 봉인한 이 사랑편지가 수많은 독자들과 공명한 것이다. 언론들 또한 "오랫동안 읽어보지 못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사랑에 관한 올해 최고의 책" 등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고르의 편지는 80을 넘긴 노부부의 것이라고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애정 표현으로 시작한다. 이어 자신이 그동안 써온 글에 아내의 이야기가 별로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을 깨달았다며 그는 자신이 ' 살아온 시간들'과 아내와 '함께 살아온 시절들을 이해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쓴다고 적고 있다.
'땡전 한 푼 없는'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고르와 극단 배우였던 미모의 영국 처녀 도린과의 만남과 인연의 바탕에는 두 사람 모두 고달팠던 어린 시절을 보냈고 고국을 떠난 이방인이라는 점이 공통분모로 작용하고 있었다.
늘 자신의 존재를 거부하며 '인생을 직접 산 게 아니라, 멀리서 관찰만 해온' 그를 자기 긍정의 세계로 이끌어준 아내에 대한 감사, 1954년 『배반자』를 펴내며 프랑스 지성계에 데뷔한 이래 아내와 나눈 지적 협력(그녀는 '직관과 감동이 없다면 지성도 없고 의미도 없음을 인지과학을 공부하지 않고도 알았던' 날카로운 조언자였다)의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그리고 사르트르, 망데스 프랑스 등 도린을 아낀 유명인사들과의 추억, 20년 전 발병한 아내를 치료하기 위해 애쓰다 이반 일리치의 '기술의학 비판'에 관심을 갖게 된 이야기들이 잔잔히 수놓아져 있다.
1927년 게르하르트 히르쉬로 태어났지만 1930년 아버지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호르스트로 성을 바꿨고, 16살 때인 1940년 스위스 로잔의 학교에 입학하면서 제라르 호르스트로, 1949년 프랑스로 이주하면서는 앙드레 고르로 이름을 바꿨다. 또 기자로 글을 쓸 때는 미셸 보스케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많은 이름을 거치며 그는 오직 한 여자를 사랑했다.
어느 인터뷰에서 고르는 "우리가 아이를 가졌다면 나는 틀림없이 도린을 질투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독차지하는 것이 좋았다"라고 말했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계약결혼'이라는 이름으로 부부의 연을 맺고서도 각자 다른 남녀에게 눈 돌리기 바빴던 것과는 정반대로, 고르 부부는 항상 서로에게 충실했고, 정신적?육체적으로 변함없는 믿음을 지녔다. 그들은 "몸과 마음으로 공명하는" 존재와 존재의 결합을 소망했던 것이다.
03.
고르는 '때때로 눈물을 흘리며' 써내려간 구절마다 58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그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고 또 사랑하고 있으며("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요즘 들어 나는 당신과 또다시 사랑에 빠졌습니다."), 늘 이방인처럼 자신의 삶을 관찰만 해오던 그를 존재의 긍정으로 이끈 아내에게 얼마나 감사하는지("당신은 내게 삶의 풍부함을 알게 해주었고, 나는 당신을 통해 삶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를 눈물겹게 표현하고 있다. 책의 마지막 대목은 아내와의 죽음이 일찌감치 준비된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D에게 보낸 편지』는 고르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고르는 많은 저작을 남겼지만 그 가운데 어떤 것도 우리에게 '오래 지속되는 사랑'의 꿈을 일깨워주는 『D에게 보낸 편지』의 이 마지막 몇 줄만큼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앙드레 고르 Andre Gorz,(1923~2007)는 유럽을 대표하는 정치철학자이자 언론인으로 1923년 오스트리아에서 참전용사로 목재상을 하던 유대인 아버지와 가톨릭을 믿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독일군 징집을 피하기 위해 어머니의 뜻에 따라 스위스 로잔의 가톨릭계 학교를 다녔다. 이때부터 1953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 무국적 상태였다. 1945년 로잔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고 이듬해 스위스에서 사르트르를 만나 친해지면서 실존주의와 현상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49년 9월 도린과 결혼한 후 사르트르 등 유럽 사상계의 중심세력과 교류하기 위해 파리로 이사했다. '세계시민운동'(Mouvement des Citoyens du Monde) 사무국에서 일했으며 주불 인도대사관 무관의 개인비서도 지냈다. 기자생활은 <파리 프레스>에서 시작했으며 이때 '미셸 보스케'라는 필명을 썼다. 1955년에는 <렉스프레스>에서 경제담당 기자로 활동했으며 1964년 <렉스프레스>를 떠나 시사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를 공동 창간해 1983년까지 참여했다. 1961년에 <레탕모데른>의 편집위원, 69년에 편집장이 되었으며 74년 사임할 때까지 경제 분야를 맡았다.
사르트르와 친했고 '소외'와 '해방' 문제를 천착하는 등 사상 경향도 사르트르식 실존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 가까웠다. 첫 저서인 『배반자』(1958년, 사르트르가 서문을 썼다)와 『역사의 도덕』( 1959년), 『도덕을 위한 기초』(1977년ㆍ쓰고 난 뒤 15년 뒤 출간, 이 책에서 앙드레 고르라는 이름을 썼다)가 이런 주제를 다루고 있다.
60년대 이후 신좌파의 주요 이론가로 활동했다. 휴머니즘과 소외, 인류해방 등의 주제에 주로 관심을 보였으며 프랑크푸르트학파에도 영향을 받았으며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와도 절친한 사이였다. 주체와 주체성을 배제한다는 이유로 구성주의를 강하게 비판했으며 자신을 체제 변화를 통한 개혁을 추구하는 민주사회주의자로서 "혁명적 개혁주의자"로 자칭했다. '68혁명'에 큰 영향을 받았고 그때 그는 실존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확신하며 제도와 국가조직에 대한 학생들의 비판에 동참했다. 그 이후 이반 일리치의 교육과 의료, 임금노동 폐지에 대한 테제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리치의 글과 그에 대한 자신의 글들을 <레 탕 모데른> <누벨 옵세르바퇴르> 등에 게재했다.
<레 탕 모데른>에 참여하면서 정치적, 철학적 관점에도 상당한 진전이 생겼다. 「대학을 파괴하라」 등의 글이 논란을 불렀고, 1971년 이후로 마오주의에 대해서도 <레 탕 모데른>을 통해 지속적으로 비판했다. 74년에 이탈리아 자율주의 그룹의 로타 콘티누아와 불화로 <레 탕 모데른> 편집장을 사임했다.(로타 콘티누아는 이탈리아의 자생 마르크스주의 조직으로 사회갈등-주택, 식량, 공공요금 등을 둘러싼 갈등-을 지원하고, 또 그러한 갈등을 공장투쟁과 연결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마오주의나 스탈린주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기도 했다). 사르트르와 결별한 것도 이런 일들이 계기가 됐다.
이즈음에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경제 담당에서도 밀려났다. 그는 원자력산업 반대 운동을 벌였지만 프랑스 국영전력회사 EDF가 그것을 이유로 광고를 철회하는 바람에 덜 과격한 담당자로 교체된 것이다. 고르는 이때부터 생태주의 월간지 <야생(Le Sauvage)>에 글을 발표하며 중요한 정치생태주의 이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75년에 『정치생태학』을 냈는데 여기에 실린 「자유생태학」이라는 글은 생태문제에 관한 기본 텍스트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쾌락적 개인주의와 실용주의에 반대한 것은 물론이고, 유물론과 집단생산주의에도 반기를 들면서 인간적인 생태주의를 옹호했다. 고르의 생태주의는 "자본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생태적이며 사회적이고 또 문화적인 혁명"을 지향하는 것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고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르는 자신이 관계했던 다양한 운동이나 그룹과 또 불화하기 시작한다. 1980년 사르트르 사후 <레 탕 모데른>과의 협력 관계를 완전히 끊었다. 『유토피아로 가는 길(Les Chemins du paradis)』(1983년)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했고, 83년에 미국이 서독에 퍼싱Ⅱ 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에 반대하기를 거부하면서 평화운동과도 단절했다.
1990년대 이후로는 저널 <다중(Multitudes)> <생태혁명(EcoRev')> 등에 글을 발표했으며 자본주의가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인적 자산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분석하면서 노동과 무관한 최저임금을 주장했다. 일자리 나누기와 최저임금제의 필요성을 역설, 노동자주체운동에 앞장선 고르가 제기한 논제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주요 저서로 『배반자』『프롤레타리아여, 안녕』『자본주의, 사회주의, 생태주의』등이 있다. 사르트르는 그를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고 평가했다.
아내 도린을 만난 것은 1947년 스위스 로잔에서다. 도린은 그 후 60년을 고르와 함께하며 그의 저작 활동을 평생 지지했을뿐더러 '삶의 불안전성'에 맞서 싸우는 고르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르 몽드>는 고르 부부의 관계를 이렇게 묘사했다. '내성적이고 지적인 남편에 비해 도린은 사교적이고 활달한 여성이었으며 고르가 화가였다면 도린은 그에게 영감을 주는 모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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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이로운 사랑은 기다림이나 그리움 같은 결핍의 운명에 함몰되지 않는다. 이 사랑은 살아 있는 모든 순간마다 생명 속에 가득 차서 삶으로 발현되는 사랑이다. 그렇게 발현되는 사랑의 힘이 삶을 지탱해주고 삶을 전환시킨다. 사랑은 잠재태가 아니고, 사랑은 예비음모가 아니므로, 몸과 마음이 본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삼인칭의 타자로서 내 앞을 가로막는 '그'를 이인칭의 상대인 '너'로 전환시키고, 그 너에 다시 '나'를 포개서 내 안에 그와 너가 공존하면서 생활을 이끌어나가는 것이다.
아, 나는 언제 이런 사랑 한번 해보나.
-김훈(소설가, 자전거레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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