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지적자살(Exit House)에 부쳐

나뭇잎숨결 2008. 12. 2. 07:53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  에밀 튀르겜

 

 

  나목의 계절이다. 나의 근원과 모든 존재의 근원을 생각케하는 시간이다. 가끔 오동나무 옆을 지나칠 때가 있다. 오동나무는 그 잎이 유난히 크다. 혹, 그대는 오동잎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보셨는가?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가 얼마가 큰지, 누군가의 영혼이 지금 떠나고 있다는 메시지거나, 우주에 금이 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물며, 누군가 서둘러 떠났다는 기사를 읽거나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은 한 잎의 오동잎이 떨어지는 소리에 비길 바가 아니다. 그런 소식에 접해 내가  먼저 확인하는 것은 그의 나이다. 서른살의 어느 가수의 자살, 서른살, 너무 아깝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지만 그 차가운 소식에 접해 순간 말문이 꽉 막힌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영면을 누리길 기도하면서도...슬퍼진다.  자살에 대한 어떤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재단이나, 사회학적 정의나 분석을 가하든  스스로 생을 처분한 누군가의 소식은 우리를 한없이 경악케 한다. 이 세상에 속한 우리를 마치 투명인간처럼 지나치며 '이젠 그만 다 놓고 싶다', 고 그가 던진 쓰디쓴 웃음, 그 파장이 그 어떤 낙엽이나, 찬바람보다 더 춥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서둘러 놓고 싶을만큼 그렇게 지쳤었는지,  쉬고 싶었는지, 외로웠는지 아무도 몰랐다는 이 철저한 무관심을 무엇으로 변명하랴 싶기 때문이다. 

 

 

 

  조로만의 <지적자살 (Exit House)>(최현역, 범우사, 1990)을 읽어 본다.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무렵에는 이미 나는 조용히 인생을 마치고 있을거예요, 소인에 나타난 그 날짜에, 이것은 여러분중에서 몇몇 사람들에게는 뜻밖의 일로 생각될지도 몰라요- 가족,친구,친지인 여러분- 특히 자살을 테마로 하여 내가 한 일에 대해 계속 알리는 것이 우리들의 관계를 둘러싼 여러 가지 사정에서 불가능했을 경우에는, 그래서 내가 아는 분들을 위해 내가 늘갖고 있던 생각을 말하려고 해요.

 

벌써 10여 년 전에 나는 자살은 반드시 병적인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나아가서는 이성적인 자살이면 인생의 막을 내리는 데 하나의 이상적인 방법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요. 이성적인 자살을 한다면 원하지도 않는 생존을 위해 주위를 침범하면서 날이 갈수록 더욱 증대되는 인생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그런 실리적인 회피보다 훨씬 주요한 것은, 자살로 말미암아 역설적으로 삶의 가치가 풍부해진다는 것입니다. 삶에 일정한 기한이 없는 데서 비롯되는 불안으로 말미암아 인생의 전망에 구름이 끼여 있었는데, 수정처럼 맑아져요. 그리고 에너지가 해방되어요.

 

1975년경, 나는 1992년 전후에 스스로 인생을 끝내기로 결정하고, 그 계획에 착수했어요. 그 해가 다가올 무렵에는 인생에서 물러갈 예정일을 정하는것도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나의 이러한 결심은 주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고, 외부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파문을 일으키게 되었어요.

 

나의 확신은 요지부동입니다. 세상의 의식을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들도 여기에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해요. 이것 역시 중요한 일이에요. 왜냐하면, 존중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 행위를 몰래 함으로써 자기의 품위에 상처를 주기가 싫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나의 결의가 지닌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여, 이 때문에 감정이 상하게 될지 모르는 분들에게, 충격을 주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몇 해 전부터 나는 훌륭한 비판 정신과 교양 있는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하려고 노력해왔어요.

 

1975년에서 1978년까지 나는 여러분 중에서 내 힘이 미치는 분들에게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들을 토의하고자 끌어들었어요. 그러자 차츰 몇몇 분이 나의 견해를 자기 나름으로 인정하거나 공감을 갖게 되어, 생각을 정리하는 데 지혜와 힘을 빌려주기 시작했어요. 사색을 거듭할수록 확신이 깊어갔어요. 그리하여 여전히 전망이 아득하기만 했던 자살의 구상이 일정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공동으로 이런 작업을 하게 된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어요. 1978년 3월, 내게 암이 진행중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때까지 우리가 이성적인 자살을 존중하게 된 까닭으로 여러분 가운데 몇몇 분들에게 사실을 알릴 수 있었어요. 자살의 예정을 앞당겼을때, 그들은 이것을 이해했어요. 내게 남아 있는 시간과 정력이 병을 위해서만 소모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병의 증상을 덮어둘 필요가 있다는 데도 동의했어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친한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순간순간을 소중히 확보하면서 완성하고 싶은 일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었어요. 이처럼 중대한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게 된 것은 오직 인생의 종말을 나 자신에게 있어서 되도록이면 최고의 것으로서 창조적으로 완수하려는 나의 결의를 스스로 받아들여 지원하고, 옹호해주는 사람들이 나타났기 때문이에요.

 

나는 자기 자신이나 주위 사람들에게도, 끝내 암이 가져올 감정적인 억압이나 육체의 황폐를 드러내보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어요. 또한 가망이 희박한 치료법을 찾아보려고 하거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연장시키기 위해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인생을 소모하여, 삶의 귀중한 능력이나 자원을 낭비할 생각도 없었어요. 그 대신 나는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활동을 하려면,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남앗는지 계산해보기로 했어요.

 

그리하여 내 스스로 인생의 퇴장 날짜를 정하고, 그 준비를 하기로 했어요. 이 퇴장 날짜는 자기 인생의 화폭에 마지막 붓을 자기의 표현 기법으로 창조적으로 휘두를 수 있는 가능성을 위태롭게 할지도 모르는 큰 장애가 일어나기 전에 정하기로 했어요.

그리하여 정한 날짜가 잘 선택되어 다행히 그날을 기분좋게 맞았으면 해요. 그날을 다른사람들과 함께 즐기고 싶어요. 누구에게도 내 감정이나 육체의 상태에 대해 불필요한 걱정이나 번거로움을 끼치고 싶지 않았어요.

 

유감스럽게도 귀중한 10개월 동안 나는 화학요법을 받아 몸이 쇠약해졌어요. 나는 괜한 시간들을 빼앗겨버렸어요. 그것은 내가 치료팀을 설득시켜, 내가 불필요한 모험을 하지 않으면, 그리고 화학요법을 받지 않는다면, 스스로 택한 퇴장 날짜까지 아마도 연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기에 이른 길고 지루한 10개월이었어요. 그 동안에 그들은 나의 인생을 지배할 권리가 나보다도 자기들에게 있다고 믿고 싶어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예요. 그러나 드디어 그들도 내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내게 제공했기 때문에, 나는 생명의 지배권을 되찾게 되었어요. 그리하여 나는 특색 있는 근사한 몇 달을 보낼 수 있었어요.

 

이 사이에 친한 친구들이 한결같이 나의 죽음을 될 수 있는 대로 공공연히 조용한 가운데 의의 있게 창조해나가도록 도와주었어요. 그들은 내가 오랫동안 써서 모아둔 원고를 정리할 수 있도록 집필할 시간을 확보해주었어요. 그 책의 제목은 [죽음의 집]이에요. 내가 죽은 후에 출판되면 알려드릴 거예요. 나의 동료들은 다시 어느 주말에 모여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체험에 대한 토론 장면을 촬영 수록했어요. 그리하여 이것을 토대로, 언젠가 한 편의 교육 영화가 완성될지도 몰라요. 나의 견해 표명에 첨가하려는 것으로, 이 밖에 [인생의 조각]이 있어요.

 

동료와 나는, 자기들의 한탄을 부드럽게 애도하는 형태로 고뇌를 변용시켰어요. 나는 깊이 깨닫게 되었어요. 나의 퇴장으로 그들이 나를 훨씬 앞질러 가지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어요.

 

내 인생의 보물로서 가장 값진 것은--- 많이 있지만--- 죽음을 향해 가는 데서 얻게 된 인간적인 성장이에요. 종래의 관례대로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남의 의사의 강요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요.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이렇게 애정 어린 동지가 지켜보아준다는 것도.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즉 개개인이 자기 인생의 깊이에 대해--- 그 내용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책임 능력을 갖는다는 자의식에 의해, 이성적인 자살이 사회의 지지와 비호를 받아야 할 기본적인 인권으로서 확립될 날이 그다지 멀지 않았다고 봐요. 현재 흔히 볼 수 있는 생존의 연장이 테크놀로지에의해 강요되면 거기서 이런 의식이 높아지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지 않을까요.

 

자기를 죽인다는 것과, 자기 인생에 책임을 지고 좋은 결말을 가져오는 것과의 차이는, 병적인 자살과 이성적인 자살의 차이예요. 실로 이성적인 자살이란, 인간이 스스로 포기하는 육체를 세계의 자원 속에 환원시키는 합리적이고 나아가서는 창조성에 이르는 길이에요. 나는 부디 여러분이 저마다 자기 생애의 종말을, 자기의 삶에 존엄성을 부여하도록, 기한과 형태를 정할 것을 되도록 빨리---이미 때가 늦은 사람도 상당히 있을지 몰라요--- 깊이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여러분은 나보다 오래 사실 것이므로, 생각해보면 개중에는 이 마지막 다사다난한 몇 달 동안에 참가하지 못하으로써 일종의 소외감을 느끼는 분이 계실지도 몰라요. 만일 그렇다면, 나도 가능하면 자리를 같이하고 싶었다는 것을 말씀드려 양해를 구하려고 해요.

여러분은 나에게 할 말이 있을지도 몰라요. 혹은 내가 여기서 한말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싶어할지도 몰라요. 아마도 여러분은 예의 바른 전통적인 최후를 맺지 못한 데 대해 불만을 느낄 거예요. 장례는 치르지 않아요. 조화도 보내지 말아주세요. 이것은 결코 여러분을 난처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녜요. 이해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심정은 알고도 남으며, 따라서 존중되어야 할 거예요.

 

끝으로 내가 바라는 것은, 나와 여러분의 인생이 서로 접하게 된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아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접촉이 하나로 융합되어, 내 인생을 꿈에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충실하고 멋진 것으로 만들어주었어요. 여러분이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살고, 그 삶을 존엄하게 하는 훌륭한 최후를 창조하도록 힘쓰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아늑하고 잔잔한 파도가 밀려오기를!

 

 - 조로만, 지적자살 (Exit House)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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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 이은주, 최진실....스스로 생의 시간을 서둘러 결정하고 떠난 수많은 이들을 생각하며.....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라고 사회구조의 모순이 가져온 병리학으로 바라본  에밀 튀르겜의 <자살론>(김충선역, 청아출판사, 1998)을 생각해 본다.

 

뒤르겜은 자살의 원인에 대한 다양한 원인 즉, 종교, 결혼, 가족, 이혼, 원시적 관행, 사회적, 경제적 위기 등을 자살과 관련시켜 분석한다. 그는 개인적 자아의 사회적 자아에 대한 우월성과 철저한 내적 신념에의 도취, 그리고 사회 자체를 부정하는 고립된 가치관에 의한 자살을 ‘이기적 자살’로 정의하고 있다. 이기적 자살은 개인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여 발생하는 자살이다. 또 ‘이타적 자살’은 종교적, 정치적 집단과 보다 높은 차원의 목적을 위해 개인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희생하는 형태의 자살로, 종교에 대한 맹목적 신앙과 군대의 군율, 사회적 명예 따위에 의거하여 자신을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아노미성 자살’은 개인에 대한 사회의 규제가 약화될 때 일어나는 것이다. 개인의 욕구와 충족은 집단 의식을 통하여 사회가 규제를 하는데 이러한 규제가 제거될 때 개인의 욕구는 한없이 증가하여 그 결과로 아노미성 자살이 생긴다는 것이다. 산업 사회의 도래와 함께 불거져 나온 무규율성과 자아 상실에 따른 자살을 ‘아노미성 자살’로 정의한다.

 

‘숙명적 자살’은 아노미성 자살에 포함되는 부분적인 영역으로 해석하고 있다. 뒤르켐은 한 개인의 자살은 그 자신의 몫이 아니므로 단순히 그 죽음이 살인을 불러올 수 있거나 인간의 존엄성을 손상시키는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이유만으로는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뒤르켐의 자살에 대한 연구는 어떠한 사회든지 일정한 자살의 경험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 집단적 경향을 갖고 있음을 입증하였다. 또한 그러한 집단적 경향은 개인적 경향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사회적 사실임도 입증하였다.

 

따라서 뒤르켐은 개인의 자살경향은 집단경향과 관련해서만 분석될 수 있고 집단경향은 개인들이 그 안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사회 구조의 반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자살은 비도덕성의 증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뒤르겜은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란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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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 혹은 천명을 누리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자신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과음, 과식, 과욕의 행위들은 결국 지연된 혹은 유예된 자살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