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 9월 5일 복녀 마더 데레사 / 성 라우렌시오 유스티니아니 주교/성 빅토리노 주교 순교자
축일:9월5일 복녀 마더 데레사 Mother Teresa of Calcutta
마더 데레사는 1910년 8월 26일 유고슬라비아의 스코프예에서 아니스 곤히아 브약스히야 Agnes Gonx-ha Bojaxhiu라는 이름으로 알바니아 집안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서 비교적 안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단순한 수도자가 되는 게 아니라 선교활동을 하겠다는 열정, <밖으로 나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이 열정을 보면 마더 데레사의 첫 번째 부르심에 대해 알 수 있는데 그 선교생활은 복음을 전하겠다는 강한 믿음의 표현이다. 거룩함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의무입니다. 친밀감 있고, 실용적이면서도 통찰력 있고, 상처 입기 쉬우면서도 강하고, 현실적이면서도 관상적일 수도 있다. (사랑의 선교회홈에서)
데레사 수녀 연보 세속명은 아녜스 곤히아 브약스히야.
빈자들의 어머니 데레사 수녀...출생에서 선종까지 데레사는 건축업자이자 시의원인 아버지, 그리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어머니 밑에서 언니 아게, 오빠 라자르와 어울리며 비교적 안락한 低?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곤히아가 7살이던 1917년, 아버지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 와중에서 동업자가 재산을 빼돌리는 바람에 길거리에 나앉은 가정은 순식간에 몰락했다. 어머니는 옷과 수예품을 파는 일로 3남매를 키우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어머니는 처음에 "수녀가 되기에는 너무 어리다"며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6년 뒤 데레사가 수녀가 되고 싶다는 뜻을 재차 밝히자 그녀의 어머니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그때 어머니는 "너의 손을 예수의 손에 얹고 예수만 따라 가라"고 당부했는데 데레사 수녀는 어머니의 이 당부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곳에 들어간 이유는 인도 벵골에 수녀원을 두고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 수녀회에서 평소 생각했던 봉사의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데레사는 아일랜드에서 영어를 배운 다음 1929년 1월 6일 인도 캘커타로 건너갔다. 캘커타 로레토 수녀원에서의 첫 소임은 수녀회가 운영하는 성마리아 고등학교의 교사, 데레사 수녀는 1931년 5월 24일 그곳에서 첫서원을 했는데 그때 '예수의 작은꽃'으로 알려진 프랑스 리지외의 데레사를 수도명으로 정했다. 데레사 수녀는 성마리아 학교에서 지리와 교리를 가르치는 한편 힌두어와 벵골어를 공부했다. 1944년에는 교장직을 맡았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처리하느라 가뜩이나 몸이 허약했던 데레사 수녀는 결핵에 걸려 히말라야산 기슭의 지질링에 가서 요양을 했다. 지질링으로 가던 중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라"는 계시를 받은 것이다. 데레사 수녀는 훗날 당시의 결심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 빈민가로 갔습니다. 가장 미소한 사람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데레사 수녀가 빈민가로 들어갈 때 몸에 지닌 총재산은 단돈 5루피(약 1백20원). 로레토회 수녀복을 벗고 인도 고유의 부인복 '사리'에 푸른테를 두른 옷으로 갈아입은 데레사 수녀. 수녀원 바로 평의 빈민굴 모트지힐에서 쓰러져 가는 가건물을 빌려 학교를 열고 칠판도 없이 붉은 땅바닥에 나무막대기로 알파벳을 써가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또 학교 수업을 마치고 오후에는 빈민구호소를 차려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데려다 돌봤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빈민구호소는 연일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거지와 병자, 사경을 헤매는 노인들로 가득 찼다. 하지만 이 소문은 또 성마리아 학교 재직시절에 인연을 맺었던 제자들을 한 두명씩 자원 봉사자로 불러모은 신비로운 힘을 발휘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태평양의 물 한 방울 정도라는 것을 잘 알아요. 그러나 이 물 한 방울이 태평양에 있지 않다면 태평양의 물은 어떻든 한방울이라고 줄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어린이 집'과 '영생의 집'을 갖지 않았다면 우리가 데려온 이 어린 창조물들은 길가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데레사 수녀는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산파들이 데려오는 유아, 쓰레기통에서 건져오는 죽음 직전의 핏덩이, 그리고 거리에서 쥐와 개미에 몸을 파먹힌 채 죽어 가는 나환자 등 보호가 필요한 곳이면 언제 어디서든 사랑의 손길을 뻗쳤다. 고된 희생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사랑의 선교 수녀회가 현재 1백 19개국에서 운영하는 사랑의 집은 5백57개. 데레사 수녀는 기적같은 사랑의 열매를 맺었지만 정작 자신의 몸은 몇 년 전부터 급격히 허약해지기 시작했다. 지난 96년 여름 말라리아와 고열, 고질적인 심장병과 폐질환 등으로 사경을 헤매던 당시 치료를 담당했던 센 박사는 "구부린 자세로 병약자를 돌봐온 오랜 봉사활동이 어려 질환의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당시 병상에 누워있던 데레사 수녀를 위해 인도의 힌두교와 회교도는 말할 것도 없고 전세계인들이 쾌유를 빌어 세간에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우리를 더욱 더 감동시켰던 것은 그때 병원에서 인공 호흡기를 떼자마자 "병원비가 꽤 많이 나왔을 텐데..."라며 병원비 걱정부터 한 것이다. 더욱이 그해 11월에 또 다시 심장마비로 입원 했을 때는 "가난한 사람들처럼 그냥 죽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해 의료진들이 어쩔 줄을 몰라했다. 세상은 '가난한 이의 어머니' 데레사수녀에게 화려한 영예를 안겨 주었다. 그렇지만 데레사 수녀는 79년 노벨평화상 수상 때 "수상 축하연을 열지 않는 대신 그 비용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쓴다"는 조건을 내걸고 수상식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정도로 세속의 영광조차도 가난한 이들의 '양식'으로 돌렸다. 데레사 수녀는 그 작은 체구로 50년 넘게 빈민가를 지키며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위대한 사랑을 가르쳐 주고 4일 밤 하느님 곁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늘 괴로운 것은 사실 가난 때문에 생겨난 '버림의 상태'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자신들의 존엄성이 존중 받는다고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하느님을 봅니다. 내가 나환자의 상처를 씻어줄 때 나는 하느님 바로 그 분을 돌보아드리는 듯한 느낌을 갖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경험입니까." (1974년 인터뷰에서)
그들은 강한 사람이여 음식없이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저주하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동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배울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1977년 인터뷰)
그러나 성베드로께서는 '지상으로 돌아가거라. 이곳에는 빈민굴이 없느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996년 연설)
(유엔 연설에서)
(일일묵상집 '사랑은 철따라...'에서)
(1979년 노벨평화상을 받으며)
(1989년 캘커타에서 사랑의 선교회 원장 사임 의사를 밝히며)
(1991년 조지 부시와 사담 후세인에게 보낸 서한)
('사랑의 등불 마더 데레사'에서)
(1982년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싸우는 베이루트 전장에서)
그럼으로써 오히려 풍요로웠던 삶. 생전 '빈자들의 어머니'로 불렸던 데레사 수녀의 삶은 이렇게 요약된다. 데레사 수녀가 한국을 찾은 것은 81년과 82년, 85년 등 모두 3차례,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에서 비롯된 사랑, 복음적 사랑의 참뜻을 전해주었던 데레사 수녀의 방한 행적을 다시 떠올려본다.
데레사 수녀가 대한항공 618기편 트랩을 내렸다. 전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첫 방한이었다. 마디진 손에는 성서와 묵주, 잿빛의 작은 헝겊가방이 전부였다. 그러나 인도 고유 의상 사리에 감춰진 작은 몸매와 깊은 주름이 팬 얼굴에서는 어머니만이 줄 수 있는 자애로움과 따뜻한 미소, 평화가 흘렀다. 이미 구면이었던 김수환 추기경과 손을 맞잡고 따스한 눈인사를 나누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교황대사였던 루치아노 안젤로니 대주교, 프란 즈페 주한 인도대사, 수도장상연합회장 황우경 수녀 등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 5백 여명의 환영 속에 도착한 데레사 수녀, 그녀의 첫 마디는 "가난하고 병들어 외롭게 죽어가는 이들을 돌보며 사랑하는 일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잇따르는 기자회견과 서강대 및 효성여대 강연, 사회복지시설 희망원 방문, 병인박해 순교성인 28위의 순교신심이 살아 숨쉬는 절두산 순교성지 방문 등 빽빽한 일정 속에서도 데레사 수녀는 시종 따스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서강대 교수회관에서 마련된 기자회견의 한토막. "가난을 구제할 수 있는가?" 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데레사 수녀는 "여러분과 내가 가난을 나눌 때 벌써 가능하다"고 답변했다. 그러면서도 데레사 수녀는 "가난을 나눈다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지적하고 "한국의 이 도시에서 만이라도 아무도 고독하고 버림받은 상태에서 죽어가는 일이 없도록 사랑을 실천한다면 세상의 가난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해 평생 '가난'과 함께 해온 수도자의 진면모를 보여주었다.
불과 18시간동안 이뤄졌다. 82년 4월 28일 오후 4시10분 김포공항을 통해 '혼자서' 한국에 들어온 데레사 수녀는 이튿날 오전 10시30분 마카오로 떠나기까지 만 하루도 못 되는 시간동안 당시 서울 용산에 임시로 마련돼 있었던 사랑의 선교 수녀회에 머물렀다. 방한 목적은 단순했다. 81년 7월 한국에 설립했던 사랑의 선교 수녀회 한국분원을 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한 가지가 "수행원도 없이 혼자 들어오셨느냐?"고 묻자 데레사 수녀는 "그리스도와 함께 왔다"고 대답했다. 스승 그리스도를 따라 사랑의 삶을 살고 있었던 사랑의 사도다운 대답이었던 것. 특히 데레사 수녀는 당시 사랑의 선교수녀회 지원자들과의 대화에서 "가난은 우리가 기쁘게 선택해야 하며 그것은 바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말하고 "작은 일에 충실하려 했던 소화 데레사 성녀를 따라 생활의 어떤 부분에서도 충실하라"면서 수녀회 지원자들에게 어머니다운 당부도 잊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체류기간이 가장 긴 방한이었다. 특히 중국 방문에 이어 이루어진 3차 방한에서 데레사 수녀는 판문점을 방문, 북녘 땅에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의 빛이 비추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등 북한 교회를 포함해 침묵이 땅에 버려진 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판문점 방문 길에서 데레사 수녀는 항상 지니고 다니면서 믿음과 사랑을 확인하는 '기적의 패' 5개를 북녘 땅 가까운 곳에 던져 북한을 방문케 해달하고 기원하기도 했다. 데레사 수녀는 또 27일 오후 사랑의 선교 수녀회가 운영하고 있는 '휴양의 집'을 방문한데 이어 29일 절두산 순교성지, 30일 사랑의 선교수녀회를 각각 방문해 버림받은 이들이 사랑 안에서 살아갈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난한 자의 존엄성을 일깨웠던 정신만은 세월의 무게를 딛고 천년을 이어가리라. 아, 데레사 수녀여!
▨ 마더 데레사 시복식, 30여만명 운집 특히 500여명의 사랑의 선교회 회원들이 흰색에 푸른 줄이 있는 고유의 사리식 수도복을 입고 참석했으며 맨 앞줄에는 3500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초청돼 자리를 잡았다. 시복식에는 또 동방교회 대표단과 알바니아의 2개 이슬람 공동체가 초청돼 참석했다.
캘커타 대교구장 루카스 시르카 대주교가 교황에게 캘커타의 데레사를 복자위에 올려 주기를 청한데 이어 마더 데레사의 간략한 이력이 소개됐다. 이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마더 데레사를 복자로 선포하자 침묵 가운데 이 모습을 지켜보던 수많은 순례자들은 뜨거운 환호를 올렸다.
이어 젊은 여성들이 마더 데레사의 유해를 제단 앞까지 옮기는 행렬이 이어졌다. 교황은 미사 강론에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마더 데레사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으로 모든 인간적인 논리를 거스르는 사랑과 봉사의 여정을 걸었다』고 치하했다. 교황은 9월 5일을 마더 데레사 축일로 선언했다.
(가톨릭신문에서)
가,난,한,사,람,안,에,계,신,예,수,님,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는데, 불행하게도 가난한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유행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인 가난뿐 아니라 정신적인 상처까지 모두 구원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바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미소 지을 시간조차 없는가 봅니다.
가난한 사람 중에 가장 가난한 이는 모두 예수님입니다.
나는 문명화되고 부유한 서구의 교회 활동이, 캘커타나 사우스 예멘처럼 가난한 지역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추위를 막을 옷 한 벌, 허기를 달랠 밥 한 그릇이면 족하지만 서구 사회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마더데레사 말씀집에서)
거,룩,함, 거룩함은 선택된 소수만의 사치품이 아닙니다.
"거룩함이란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영혼의 영웅적인 결단이요, 행위이다." 기꺼이 그리고 열정적으로 원하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일할 때 거룩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때때로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음은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에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마더데레사 말씀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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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 : 9월 5일 성 라우렌시오 유스티니아니 주교 San Lorenzo Giustiniani Vescovo ST. LAWRENCE GIUSTINIANI St. L.Justinianus St. Laurence Justinian 1381 at Venice -8 January 1455 of natural causes
베니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세속의 지위를 마다하고, 알가섬의 성 제오르지오 성당에서 일하였다. 그는 자주 어깨에 자루를 매고 다니며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교구의 재정 관리에 환멸을 느껴 그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양떼를 돌보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공적인 일에서는 매우 정열적인 성직자였으나, 개인적인 생활은 매우 엄격하고 겸손하였다고 한다. 그는 성직자들의 모범으로 인정받고 있다.
대다수의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라우렌시오도 신심이 두터운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부친이 일찍이 사망하여 5명의 자녀를 양육할 중책이 연약한 모친에게 지워졌다. 그녀는 이런 중책을 다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힘이 너무나 부족함을 알고 오직 전능하신 하느님께 신뢰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부지헌히 일했다. 그로 인하여 하느님께서는 풍성한 은혜를 주셨고 자녀들은 건강하고 선량하게 자라났다. 이는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모친의 기쁨이었다.
그 중에서 라우렌시오는 뛰어난 아이였다. 그는 1381년에 태어났고, 재주가 비상하여 온화한 성격으로 누구에게나 친절과 존경심을 베풀었다. 그는 어릴때 부터 진실하여 무슨 큰 일을 이룰 것 처럼 보였다. 가끔 야심(野心)을 토하는 일이 있었으므로, 모친을 이를 경고하고, 그의 거만함을 막기 위해 "교만은 지옥에 떨어지는 길"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이젠 모친의 근심도 필요치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라우렌시오가 품고 있었던 야심이란 성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19세 때의 일이다. 나는 세상에서 평화를 찾으려 했으나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꿈에 태양과 같이 빛나는 분이 나타나 ’내 아들아! 너는 어디서 평화를 찾으려 돌아다니느냐? 네가 찾는 것은 곧 나다. 만일 네가 온전히 나에게 몸을 바치면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틀림없이 줄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물으니, 그의 대답은 ’하느님의 예지(叡智)’라는 것이었다. 나는 즉석에서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는 하나의 꿈에 불과했으나, 내 마음은 점점 더 감동되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했다.
그는 이러한 일을 친척인 사제에게 전부 말했다. 그리고 자기를 온전히 하느님께 바칠 생각도 그에게 밝혔다. 열심한 사제는 과연 라우렌시오가 수도 생활의 성소를 받았는가의 여부를 시험하기 위해, 우선 그에게 고신 극기의 생활을 하도록 명했다. 어머니 또한 같은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라우렌시오를 결혼시키기 위해 적당한 배우자를 고르는 중이었다. 그러나 라우렌시오는 어머니의 뜻에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고별의 인사를 하며 어느 사제회에 입회했다.
입회 후 그는 즉시 고행의 생활을 시작하여 회원 일동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엄동 설한과 혹서를 잘 참으며 병고를 인내하고 겸덕을 존중히 여겨 아무리 천한 일이라도 기쁜 마음으로 했다. 사람의 비방을 들어도 변명하는 일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사과했다. 공부에도 매우 열심했다. 그래서 규정된 연령에 달하자 성품을 받고 사제가 되었다.
그는 더욱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해 조용한 곳을 찾았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음인지 아직 젊은 몸으로 수도회의 원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순명 서원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 중책을 수락했고 현명하게 수도회를 잘 다스렸다. 그래서 그는 그 수도회의 창립자와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고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그 회를 인가해 주었다.
라우렌시오는 누구나 다 평등하게 사랑했으나 그들의 열심이 줄지 않게 하기 위해 끊임없는 훈계를 했다. 그는 폐가 약해 목소리가 작았던 관계로 대 웅변가는 되지 못했으나, 소수의 사람들 앞에서는 그의 깊은 신앙과 많은 학식으로 실로 출중한 강론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많은 서적을 저술하였다.
50세 때에 그는 교황으로부터 베네치아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러한 중책을 감당하지 못할 부족한 사람이라며 백방으로 사양하고 다른 적당한 사람을 지명하도록 교황께 간청했다. 교황은 이를 거절하며 순명 서원을 들어 엄명했으므로 하는 수 없이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그는 전과 같은 생활을 그치지 않고 여전히 고행의 생활을 하며 될 수 있는 데까지 청빈을 지켰다.
대주교로서의 그는 이상적으로 교구를 잘 다스리고 관대와 엄중을 잘 조절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기 소유물을 분배하며 교회의 권리 옹호를 위해 용감히 활약하고 아래 사제들에게 좋은 표양을 주었다.
라우렌시오의 명성은 사방에 퍼져 교황은 그를 베네치아 최초의 총주교로 임명했다. 그는 겸손되이 그 직위를 수락했으나 그로부터 4년 후인 1455년 7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본래 허약한 체질이었는데 엄격한 극기 생활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무병한 편이었으며, 임종 때에도 부드러운 침상을 거절했으며 사후의 장례식도 극히 간소하게 할 것을 부탁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67일 만에 그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는데 그 동안 그의 시체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의 시성식은 1524년 교황 클레멘스 7세에 의해 거행되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저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라우렌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Laurentius Justinianus, 또는 라우렌시오 유스티니아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러나 신심 깊은 어머니는 자녀들이 훌륭한 교육을 받도록 노력했다. 그는 19세 때에 빛으로 둘러싸인 한 처녀로부터 영원한 지혜에 관한 환시를 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기본적인 욕망에 만족하기보다 자신과 함께 참된 행복을 찾아가자고 초대하였다. 그래서 성 라우렌티우스는 산 지오로지오(San Giorgio)의 아우구스티노회에 있는 그의 삼촌 마리노 퀘리노(Marino Qeurino)에게 자문을 구하였고, 삼촌은 그에게 수도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집에서부터 명예와 부 그리고 세속적 즐거움을 멀리하고 수도자적인 금욕생활을 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자 그의 건강을 염려한 그의 어머니는 결혼 계획을 통해 그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삼촌의 충고를 감추고 성 라우렌티우스는 어머니의 소망을 거부하고 대신 삼촌과 함께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매우 엄격한 금욕생활을 실천하고, 자주 어깨에 자루를 메고 다니며 자기 공동체를 위하여 음식을 구걸하러 다녔다고 한다. 사제품을 받은 후 그는 산 지오로지오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기도생활과 참회의 생활을 통해 내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 또한 미사 집전을 통해 모든 이들의 영혼을 돕고, 그들이 거듭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자각시켜 주었다.
1433년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Eugenius IV)는 그는 카스텔로(Castello)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구의 행정과 재정 관리 등에 환멸을 느껴 그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양떼를 돌보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1451년 교황 니콜라우스 5세(Nicolaus V)는 그를 베네치아 교구의 초대 총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성 라우렌티우스는 공적인 일에서는 매우 정열적인 성직자였으나, 개인적인 생활은 매우 엄격하고 겸손하였다고 한다. 성직자들의 모범으로 인정받고 있는 그는 1456년 1월 초 베네치아에서 세상을 떠났고, 1690년 교황 알렉산데르 8세(Alexander V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또한 라우렌티누스 유스티니아누스(Laurentinus Justinianus, 또는 라우렌시노 유스티니아노)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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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9월 5일 성 빅토리노 주교 순교자 San Vittorino di Amiterno Martire St.Victorinus Vittorino = vincitore, dal latino 로마, 2세기경.
San Vittorino di Amiterno Martire
Vittorino는 라틴어로 vincitore = winner.승리자라는 뜻이다. 문장은 Palma 종려가지이다.
이태리 코모의 주교였음. 예수님의 신성을 거부하는 아리안니즘의 이단과 싸움.
아리우스주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한 4세기경의 이단사상.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Arius, 250?~336)로부터 발단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신 안에 있는 세 개의 위격(位格)은 모든 면에서 대등하고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부(聖父)만이 그러하다. 성자(聖子)는 모든 피조물들과 같이 무에서 유로 창조되었을 뿐이며, 신으로 불려질 수는 있지만 그것은 단지 피조물과 신의 중계역할을 하고 세상을 구원하도록 신에 의해 선택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의 은총과 선택에 의해 하느님의 양자(養子)가 되었으며 그가 죄를 지을 수도 있었으나 짓지 않는 것을 보시자 신은 그의 덕을 예견하고 선택하였다. 즉 그는 신이 아니라 덕을 갖춘 뛰어난 반신(半神)이며 이점에서 성부와 닮았다.
이러한 반(反)삼위일체주의적 아리아니즘이 강생의 신비를 단지 수사학적인 문제로 돌림으로써 그리스도교의 근본교리가 해체될 위험에 처하자, 교회는 325년 니체아 공의회를 소집, 아리아니즘을 단죄하였다. 또한 니체아 신경(信經)을 발표, 삼위가 모두 성부로부터 났으며 각기 그 자체로서 완전한 신이라는 삼위일체설을 고백하였다. 381년의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다시금 고개를 든 아리아니즘을 단죄하고 니체아 신경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의 후계자들에 의해 북부 게르만 민족들에게 전파되었던 아리아니즘은 게르만족의 로마 진입과 더불어 로마제국 전역에 퍼졌다. 교회는 7세기에 이르러서야 아리아니즘을 몰아내고 정통 교리를 회복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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