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길
고 은 이상하다.
언제나 나의 산길에는 누가 조금 전에 간 자취가 있다. 그렇게도 익숙하건만…… 늙은 떡깔나무는 외면한 채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듯하고 길은 부유(腐乳) 냄새가 이제까지 모여 있다가 흩어지는구나.
이상하다. 나의 산길에는 누가 조금 전에 간 자취가 있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걸어가면 내 발등은 먼저 간 자취로 떨리는구나. 그래서 빠른 걸음으로 가면 외딴 곽새가 V자(字) 가지에서 날라 가 버릴 뿐이다.
어느날 일몰(日沒)이 늦었다. 나의 산길에는 그때까지 아침 이슬이 마르지 않고 있다. 자꾸 둘레를 돌아다보면서 이윽고 부락암호(部落暗號)로 불러 보았다. 저 앞에서 누가 반말로 대꾸한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줄 어떻게 알겠느냐.
이상하다.
언제나 나의 산길에는 누가 조금 전에 간 자취가 있다. 이 산길은 간조(干潮) 바다까지 보다 멀고 먼 예리고* 고개까지도 닿아 있다. 비록 다른 길이 있을지라도 나는 이 산길을 버릴 수 없구나. 왜냐하면, 여기서 누구인가
낯선 면모(面貌)를 만날테니까……
만인보(萬人譜) 서시
-고 은
너와 나 사이 태어나는
순간이여 거기에 가장 먼 별이 뜬다
부여땅 몇천 리
마한 쉰네 나라 마을마다
만남이여
그 이래 하나의 조국인 만남이여
이 오랜 땅에서
서로 헤어진다는 것은 확대이다
어느 누구도 저 혼자일 수 없는
끝없는 삶의 행렬이여 내일이여
오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다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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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는/ 강물 기슭의 맴도는 물인 듯이/ 먼 길 앞에서 주저하다가/ 얼떨결에/ 강물 한복판으로 나아가 흘렀습니다/ 그러는 동안/ 나의 시에는 마침표가 없어졌습니다/ (중략)/ 이 세상의 운행은/ 나의 시 이전에도/ 이미 단 하나의 마침표 따위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마침표 없는 나의 시야말로/ 어쩔 수 없이 운행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윤회임을 알았습니다’(나의 시 중에서)
정열의 화신이자 다작(多作)의 상징적인 시인. 군산이 낳은 고은(66)의 작품세계는 ‘마침표’가 없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주위의 다산(多産)이란 평가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시인이란 무릇 시를 통해 끊임없이 변모하는 세계를 노래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지론을 편다.
고은은 시작과 예술에만 전념하는 시인이다. 자연이 내포하고 있는 무의지의 율동에서 삶의 빛을 찾아내려는 노력과 의식의 객관화를 꾀하고 있으며, 발랄 청신 기발한 감성의 소유자로 평가받으면서 많은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다.
어느 때는 천진, 제멋대로인 소년이다가 어느 때는 선승의 도통으로 속세를 내려다보는 예술가, 민주화의 물결을 앞에서 끌며 감옥을 제집 드나들듯한 이상주의자인가 하면 어느 순간 무정하리만치 매서운 현실분석으로 돌변하는 정치사상가. 고은은 종잡을 수 없는 카오스 자체이며 마르지 않는 글샘이라고나 할까. 고은은 자신의 40여년 시력을 ‘늘 모자란 울음이었다’고 한다.
90년대 초반 쓴 책이 1백권을 넘어서 1년에 열권의 책을 쉽게 쏟아내던 그이.
미국내에서도 고은은 한국문학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작은 지진을 일으켰다. 지난 10월8일 하버드대 페인홀에서 있었던 ‘고은 시인의 밤’에서 시인은 특유의 질풍노도 같은 낭송솜씨를 보였던 것이다.
그는 연말까지(1999년) 하버드대에 머문 다음 2000년 첫날을 동서양 문화의 접점이자 인류문명의 발상지인 그리스 크레타섬에서 맞은 뒤 유럽을 돌아보고 내년 2월께 귀국할 예정이다. 고은은 1933년 옥구군 용둔부락(현 군산시 미룡동)에서 고근식씨와 최점례씨의 3남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본명은 고은태. 5세 무렵부터 옥구 근방에서 신동으로 뜨르르했던 그는 월반을 거쳐 47년 군산중학교에 수석 입학한다. 화가의 꿈을 키우다가 한하운의 시집을 읽고 문둥이 시인이 되겠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꿔먹었다.
그때 6·25가 터졌고 한마을 사람들이 좌와 우로 나뉘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것을 보았다. 마을 청년들의 지시로 생매장했던 시체들을 짊어지게 되면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느 날에는 바닷물에 몸을 던졌다가 살아 돌아왔고, 엿장수나 거지가 되어 살기도 했다. 중학 4년 중퇴 신분으로 군산 북중학교 교사에 특채되어 아이들에게 국어와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학교 부근의 동국사에서 혜초스님을 만나면서 그에게는 또다른 변화가 예고된다. 보다 깊은 불법의 심연에 빠지고자 한쪽 귀에 청산가리를 들어부었던 시도는 왼쪽 귀의 고막이 녹아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귀 수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합병증을 가져왔고 한쪽 귀마저 70년대말 고문에 의해서 망가져 인조고막을 달아야 했다.
50년대 전쟁으로 깨어진 영혼을 일깨워준 은사, 효봉은 고은에게 젊은 날의 우상이었다. 그 당시 폐결핵을 앓고 있던 친구를 위해 폐결핵이라는 시를 한 수 만들어주니, 이 친구가 시인도 모르게 한국시인협회에 투고하여 조지훈의 천거로 고은은 문단에 데뷔한다. 군산 토요동인회와 연을 놓지 않고 당대 시인들과 교류가 잦았던 고은이었으나 형식은 그의 것이 아니었던 터였다.
이 뒤에도 그의 행적은 기이하다. 자살계획을 세워 목포발 제주도행 배를 탔지만 뜻대로 되지 않음으로써 공동묘지에서 나날을 보낸 4년의 제주도 시절, 그 이후 파괴주의와 허무주의로 광란의 나날을 보냈던 청진동 시절. 기습적인 키스공세, 광란의 원맨쇼, 시도 때도 없는 자살소동, 무자비한 취중 구타, 발가벗고 춤추기 등. 일찌기 한국문학사에서 사례를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독창적인 광란 추태이면서도 ‘세노야’ 등 한번 썼다 하면 남들의 기를 팍팍 죽이는 그야말로 흐르는 강물도 멈춰 세우는 언어의 마력을 지녔다.
5·18 광주항쟁에 연루돼 구속된다. 연작시 만인보는 1980년 여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제7호 특별감방의 구상에서 나왔다. 만일 살아서 나간다면 지나간 삶의 구비에서 마주친 이들을 시로써 되살리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은 그로부터 6년뒤에야 실현된다. 그 사이 시인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뒤 82년 8·15특사로 사면, 석방되며 83년 결혼과 함께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대림동산 장미골 집에 들어앉았다.
고문과 투옥으로 명줄만 겨우 챙겨나갔던 이 당시 고씨의 수많은 시편들은 새로운 날을 열려는 투쟁의 노래가 되었다. 절대 격리의 신분으로 죽어가다가 나와 필사적인 한 시인으로 일어섰건만 여전히 철저한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시절, 시인은 숨막히는 어둠 속에서 삶과 일체되는 시를 탄생시키고자 했다. 84년 ‘화엄경’ ‘선’ ‘뭐냐’ 등 소설과 선시집으로 오묘하며 허허로운 도의 세계를 빚어냈다.
시인이 걸어왔던 길에서 만났던 사람 1만명을 통해 한국 최근세사를 훑어보겠다는 의도로 86년 시작한 만인보를 89년 제9권까지 내고 오랜 동면에 들어갔다가 함석헌 전태일을 필두로 70년대를 망라한 10∼12권을 96년에 펴냈다. 그는 98년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3차 방북팀의 일원으로 7월 14박15일 북한에 다녀왔다. 예순여섯해 생애에 처음으로 발 디딘 그곳에서의 15일을 ‘산하여 나의 산하여’로 펴냈다.
98년엔 또 만해사상실천선양회가 제정한 만해상 시문학부문의 첫 수상자가 됐다. 승려생활에 오가는 사람없이 폐허가 되다시피한 백담사를 홀로 지키며 정진했던 것, 한용운평전(75년)을 펴낸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게다. 88년 창작과 비평사의 만해문학상 수상에 이어 두번째. 고은은 일체의 인위적인 틀을 거부하고 인간본성의 자연·자유로 돌아가고자 한다.
-1999년, 전북일보
1945년 8월 15일 중앙청에 36년간 걸렸던 일장기가 내려지는 순간을 지켜보는 눈, 눈,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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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책과 램프 사이에서
글쓴이 : 이나逍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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