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의 {수학의 철학}에 있어서 수개념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
김 경 훈*
<한글요약>
이 논문은 후설의 첫 저술인 {수학의 철학}에 나타난 수 개념의 기원에 대한 심리학적인 분석을 고찰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후설 당시의 주된 수학계의 상황은 다양한 수개념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수의 개념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후설의 입장은 기수를 가장 기본적인 수로 간주하여 수학의 근본적인 개념의 존재를 기술한다.
후설은 수개념의 기원을 심리학적 작용에 두고 분석한다. 그는 총체로 결합된 모든 내용을 통일하는 심리적 작용을 반성함으로써 집합적 결합의 추상적 표상에 도달하고, 또 이 집합적 결합을 매개로 하여 다 개념을 전체의 개념으로 구성한다. 집합된 전체 내용에 대하여 구체적인 하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심리적 작용이 필요한데, 집합적 결합은 표상작용 속에 직관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의 "일차적인" 정신적인 작용에 대한 "이차적인" 반성 작용으로부터 발생한다.
사실 수학계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이러한 노력으로는 후설의 심리학적 기초정립 이외에 프레게를 비롯한 논리주의나 힐버트에 의한 형식주의, 브라우어의 직관주의 등이 있다.
Ⅰ. 서 론
수학자로서의 후설은 수개념을 주관적인 원천으로부터 이끌어내고자 시도한다. 그는 1887년에 {수의 개념에 관하여-심리학적 분석}이라는 교수자격논문과 1891년에 그의 첫 저술인 {수학의 철학-심리학적이며 논리학적인 연구}를 출간했다. 이들 작품은 그 당시의 심리학주의적 견해를 잘 대변해 주고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계기를 그 당시 수학계의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수학계의 주된 논쟁점은 기수(Anzahl), 서수(Ordnungszahl), 회수(Wiederholungszahl), 배수(Vervielfältigungszahl), 분수(Bruchzahl) 등등의 수개념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수의 개념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놓여 있었다. 이 논의에 관하여 베를린 대학의 수학과에 재직하고 있는 칼 빌헤름 테오도르 바이어쉬트라스(Karl Wilhelm Theodor Weierstrass, 1815-1897)와 레오폴트 크로네커(Leopold Kronecker, 1823-1891)가 대립된 견해를 취하면서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기본적인 수에 관한 논의는 서수와 기수에 맞혀졌다. 한편에서는 헤밀톤과 크로네커, 그리고 헤름홀쯔 등이 기본적인 수를 서수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기수보다 서수를 우위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기수는 서수의 특수한 사용에서 발생된다고 설명한다. 이에 반해 바이어쉬트라스와 데데킨트는 오히려 기수를 수학의 구성요소가 되는 기본적인 수라고 간주한다. 특히 바이어쉬트라스는 1878년 여름학기와 1880/81년 겨울학기의 강의에서 수개념의 분석이야말로 기수의 의미 내에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크로네커와 바이어쉬트라스의 강의를 들은 이후에 후설 역시 이 문제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게 된다. 후설은 이들 견해 중에서 바이어쉬트라스의 노선을 따른다. 후설은 여러 가지 수의 개념들이 기수에 종속적인 관계로 놓여있다는 점을 근거로 하여 기수를 기본적인 수라고 입증한다. 말하자면 한 종류 혹은 두 종류라고 하는 종류수의 경우에 하나의 종류 중에서 여러 가지 다른 기수가 다루어지며, 한 번 혹은 두 번이라고 하는 반복수에서는 반복의 기수가 다루어진다. 또한 배수와 분수의 경우에도 기수는 같은 부분으로 나누어진 전체의 부분에 대한 관계 혹은 전체에 대한 부분의 관계를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전체가 n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진다고 한다면, 전체는 각 부분의 배이고 각 부분은 전체에 대한 n의 한 부분이 된다. 이와 같이 해서 전체에 대한 부분의 기수를 제시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그 외 많은 유사한 수의 개념들도 기수개념에 대한 이차적인 성질이라고 간주한다. 이러한 견해를 토대로 후설은 수학의 선결조건으로서 기수개념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고자 시도한다.
그는 기술심리학의 방법을 사용하여 수학을 절대적인 학문으로 정초 하고자 한다. 이와 같이 그의 초기 입장은 심리학적 토대 위에서 수 개념이 발생하는 그 기원을 분석하고 기술하는데 있다. 여기에 그의 초기 심리학주의적 경향이 잘 나타난다. 논자는 후설의 심리학주의에 대한 비판을 연구하는 가운데 {수학의 철학} 속에 나타나는 심리학주의적 근원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에 수개념의 기원을 심리학적 작용에 두고 그 내용을 분석 고찰하는 과정에 대하여 연구하고자 착수하게 되었다.
본 논문은 당시 수학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시도한 수학의 기초 이론에 대한 후설의 심리학적 연구를 고찰하고 그 이론이 지닌 한계를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Ⅱ. 집합적 결합에 의한 다개념의 성립
후설은 "기수개념의 분석은 다개념의 분석을 전제한다."고 {수학의 철학} 제1장의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이 전제에서 알 수 있듯이 후설은 기수를 수학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때 기수라고 하지 않고 일반적인 표현으로 간단히 수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된다. 수학자들에 따르면 "수는 단위로부터 이루어진 다(Die Zahl ist eine Vielheit von Einheiten"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는 유크리트 이래로 반복되어 왔다. 후설에 의하면 다라고 하지 않고 총체, 총계, 총합, 집합 등등 그 이외의 여러 가지로 불려지고 있지만, 이것들은 같은 이름이며 또는 거의 같은 의미로 다만 약간의 미묘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러한 정의는 아직 완전한 정의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한다.
다란 무엇인가? 또 단위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 물음을 밝힐 필요가 있고 논의할 필요가 있다. 많은 수학자들이 다를 거의 기수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데, 이때는 기수라는 이름이 광의로 이해되는 경우이다. 그러나 협의의 의미에서는 기수라는 이름은 어떤 규정된 수 2, 3, 4 … 만을 가정한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다라는 이름보다 더 많은 사상을 포함하는 셈이다. 그런데 양쪽 개념은 밀접한 관계를 이룬다. 따라서 후설은 수의 개념과 관련하여 "규정된 수를 언급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다를 언급하게 되고, 다를 언급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규정된 수를 언급하게 된다." 그러나 후설이 다와 기수에 대한 동일한 외연을 가지는 것으로 파악함에 대하여 프레게는 반대한다. 프레게는 수학적 인식의 논리적 전제를 탐구하고 논리적 지평 위에 수학의 기초를 세우고자 수학적 명제의 논리적 연관관계의 문제와 논리적 구조를 연구하였다. 그러나 후설은 수학의 노에시스적인 전제와 동시에 논리학에, 특히 근원과 의미를 다루는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
후설은 우선 다와 수의 본래적인 개념에 대한 내용과 과정을 분석한다. 그는 다의 본래적인 개념과 수개념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추상의 심리학적 특성을 실마리로 삼는다. 다의 개념은 대상의 어떤 무리를 언급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그와 같은 양에 있어서 공통적인 것은 무엇이며, 다의 개념 속에서 추상화의 기초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후설의 의도는 바로 이 추상화의 과정을 밝히는 데 집중된다. 추상하는 작용이 관계를 갖는 것은 구체자(Konkreta)이며, 이것은 규정된 대상의 총체이다. 이 총체는 규정된 나무, 태양, 달, 지구, 혹은 화성 등등이나 감정, 천사 등등이라도 무방하다. 말하자면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떠한 대상이라도 다를 형성하기 위하여 관계지어질 수 있다. 우리는 이들에 관해서 총체라든가, 다라든가, 규정된 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내용의 성질에 대해서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후설은 "추상은 집합된 내용의 성질과는 무관하다."는 견해를 취한다.
보편개념인 다와 규정된 수는 구체자로부터 추상된다. 그러나 전자와 후자의 관계가 물리적 성질과 물리적 사물에 대한 관계가 아니라면, 그 관계는 어떻게 파악되어야 하는가? 후설에 의하면 추상의 토대가 되는 것은 "개별내용이 아니라, 그것들을 자신 속에 총괄적으로 발견하는 전체로서의 구체적인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총체는 단순히 개별내용으로부터 성립한다. 그러면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부분이 완전히 다른 성질을 지니고 있을 경우, 어떻게 전체의 공통적인 표식이 나올 수 있을까? 후설에 따르면 총체가 다만 개별적인 내용에서 나온다고 보는 견해는 잘못이다. 거기에는 개별내용을 넘어서는 어떤 무엇이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가 총체나 다에 관해 말하는 모든 경우에 있어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개별적 요소의 전체에 대한 결합이다. 그것에 관련된 내용이 아주 다른 경우에도 그것을 결부시키는 관계라는 점에서 같은 종류의 관계가 성립한다. 그리고 그것은 감각적인 내용에서도 그리고 심리적인 작용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한다. 이리하여 두 개의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할지라도, 두 개의 전체는 그 자체 같은 종류라는 것이 가능한 셈이다. 그래서 후설은 "다에 관해 말해지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같은 종류의 결합은 다의 보편개념을 구성하기 위한 토대"라는 견해를 이끌어 낸다.
예를 들면 우리가 많은 점들이 결합해서 이루어진 하나의 선(Linie)이나 순간이 결합해서 이루어진 시간지속(Zeitdauer), 미세한 차이를 지닌 색(Farbennuance)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연속적인 색계열(Farbenreihe)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우리는 연속적인 결합의 개념에 도달하고 또 그것에 의해 연속체(Kontiuum)의 개념에 도달한다. 이러한 개념은 구체적으로 주어져있는 연속체의 표상 속에 포함되어 있고, 점, 순간, 미세한 차이를 지닌 색 등은 부분내용이다. 우리가 구체적인 경우로 인정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점 내지는 연장을 가진 부분이고, 다른 편으로는 고유한 결합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내용의 결합을 반성할 때, 연속체의 개념을 얻게 된다. 연속체는 그 부분을 연속적인 결합의 방법으로 통일하는 하나의 전체인 것이다.
또한 후설은 총체도 하나의 전체를 구성한다고 본다. 주어진 대상에 대한 총체의 표상은 하나의 통일을 이루며, 이 통일 중에서 개별적 대상의 표상은 부분표상으로서 포함된다. 따라서 다의 개념에 대한 분석은 내용을 통일하는 방법을 반성함으로써 가능하다.
Ⅲ. 집합적 결합의 심리학적 특성
후설은 총체를 특징 지우는 결합을 제시하기 위해 집합적 결합의 개념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는 다의 개념을 추상하는 토대인 "현상의 심리학적 특성"을 밝히려고 한다. 총체는 어떻게 성립하는가? 총체의 성립요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개개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물리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 혹은 감각적 소여나 상상적 소여라도 상관없다. 그것은 단지 표상내용의 자격만 갖추면 된다. 하나의 총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요소가 서로 집합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그리고 총체는 심리학적인 특성을 지닌 집합적 결합에 의해서 발생한다. 이 집합적 결합은 표상내용을 하나의 전체로 결합하는 자발적인 행위(spontane Tätigkeiten)를 의미한다.
집합적 결합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 즉 우리가 집합적 결합이라고 부른 관계는 원초적인 관계(Primäre Relation)인가? 혹은 심리적인 관계(Psy- chische Relation)의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후설은 수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전제로서 관계의 개념을 물리적 현상세계에서 나타나는 원초적인 관계와 심리적인 관계로 양분한다. 전자는 브렌타노에 의해서 정의된 관계이다. 이것은 물리적인 현상들과 연결되어 관계의 내용과 함께 주어져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직관적으로 표상내용 속에 통일이 인지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어떤 관계도 요소에 의존하고 있지만 그 요소를 지향적으로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말하자면 심리적 현상(인지작용이나 의욕작용)이 그 내용(인지된 것이나 의욕된 것)을 포함하고 있는 방식으로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예컨대 책상 위의 한 권의 책과 연필 두 자루 등을 우리가 직접 보거나 표상할 때 이들 양자 간에는 아무런 심리적인 반성을 필요로 하지 않고도 직접적인 관계가 성립한다. 유사성나 동등성, 비교, 연속적 결합(연속체에 있는 부분의 결합), 형이상학적 결합(색과 공간상의 넓이와 같은 속성의 결합), 논리적 포함(색이 빨강 속에 포함되어 있음)은 원초적인 관계에 속한다. 이와 반대로 제2의 부류의 관계, 즉 심리적인 관계는 심리적인 현상의 관계이다. 이 관계는 내용과 함께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작용에 대한 반성에 의해 정립된다는 것이 특징이며 모든 관계항들은 지향적으로 내포된다. 어떤 표상작용, 판단작용, 감정작용이나 의지작용도 심리적인 관계의 예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장미를 표상전체로 다룰 경우, 우리는 장미의 분석을 통해 잎이나 줄기, 혹은 그 이외의 물리적인 부분과 색, 색의 강도, 향기 등등의 속성들을 얻게 된다. 우리의 분석은 그 자체 관찰된 전체에 대한 부분의 총체를 이끌어 낸다. 거기에는 직관적인 전체 속에서의 부분의 통일을 고려해서 규정된 관계내용으로서의 결합관계가 나타난다. 따라서 결합의 관계는 부분을 지니고 있는 단순한 총체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다.
"집합적 결합은 심리적 작용의 반성에 의해 파악되고, 총체는 이 작용에 의해 성립한다." 집합된 내용의 어떤 하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심리적 작용이 필요하다. 따라서 그것들 내용을 총괄하는데는 하나의 새로운 심리적 작용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 작용은 부분을 정리하는 작용을 자신 속에 포함하고, 제2차적인 정돈의 심리적 작용을 형성한다. 다가 하위부류(Untergruppe)를 매개로 하여 표상 될 때, 예를 들면 6개의 대상으로 이루어진 다를 3+3이나 2+2+2의 형식으로 표상 될 때, 각각의 하위부류을 형성하는데 제2차적인 정돈의 심리적 작용에 의해서 도달한다. 따라서 그것을 포괄하는 모든 집합적 내용은 제3차적인 정돈의 심리적 작용에 의해서 산출된다.
후설은 원초적인 관계와 심리적인 관계 중에서 후자의 심리적인 관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심리적 관계를 집합적인 관계로 규정한다. 내적 경험조차도 집합적인 통일성이 표상의 내용 속에서 직관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다만 통일시키는 방식으로 내용을 포함하는 심리적인 작용에서만 그 존재를 가진다고 본다. 집합적 결합은 속성을 지시하는 추상명사이며 물리적인 대상의 구체적인 무리가 지닌 속성이다. 그것은 심리적인 관계를 통하여 집합적 결합이 이루어지며 심리적인 작용의 반성을 통하여 보편개념인 다 내지 총체의 개념을 얻는다. 다시 말하면 다 내지 총체의 개념의 경우 추상화의 토대는 반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Ⅳ. 기수개념의 근원과 내용에 대한 분석
후설은 수학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개념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은 개념들을 직관에 있어서 하나하나 대조해 봄으로써 애매함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기원의 분석을 통한 내용의 해명으로 이루어진다. 내용이나 의미에 대한 분석은 논리적인 분석이다. 그러나 사실 문제가 되는 것은 내용의 분석이 아니라 개념의 추상화가 이루어지는 현상을 기술함에 의한 내용의 해명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후설은 바이어쉬트라스의 이론으로부터 기수개념을 수학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1) 다의 개념 분석과 어떤 무엇(Etwas)의 개념
집합적 결합에 대한 심리학적인 분석을 확립한 이후에, 후설은 다의 개념과 기수 개념의 근원과 내용에 대한 분석을 자신의 과제로 삼는다. 다의 개념의 성립을 이해하기 위해 후설은 {수학의 철학} 제1장에서 그 기초를 마련하였다. 후설은 총체로 결합된 모든 내용을 통일하는 심리적 작용을 반성함으로써 집합적 결합의 추상적인 표상에 도달하고, 또 이 집합적 결합을 매개로 하여 다의 개념을 전체의 개념으로 구성한다. 이 전체는 이들 부분을 단순히 집합적인 방법으로 결합한 것이다. 어떤 표상이 모든 내용을 집합적인 방식으로 결합시킨다면, 그 표상은 다의 개념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의 개념과 집합적 결합의 개념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다에 관해 말하는 모든 경우에 다의 개념은 집합적 결합과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두 개념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개념을 이름의 근본에 존재하는 추상체로 이해한다면, 그 때 양자의 개념은 동일하다. 그런데 후설에 의하면 이것은 하나의 의미에 대한 상호간의 이름이라는 것을 입증하지는 못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개념을 이름에 상응하는 상관자로 이해한다면, 이러한 상관자는 여기에서는 사실 서로 다르고 또 용어도 구별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는 경우에 집합적 결합이 그러한 관심의 대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집합적 전체가 관심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 집합적 결합은 다라는 보편적 개념 혹은 집합적 전체라는 보편적 개념의 근본에 놓여있는 추상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논리학의 의미에서 다라는 이름의 "의미"(Bedeutung)를 나타낸다. 그러나 이때 이 의미가 이름의 전논리적 내용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이름에 상응하는 전체적 개념은 "집합적 결합의 이 추상적 계기를 차지하고 있는 어떤 무엇(Etwas)"이다. 그러므로 집합적 결합의 개념은 다의 개념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성립부분을 형성하는 것이긴 하지만 이 양자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후설은 다의 개념을 생성시키는 고유한 추상과정을 분석한다. 어떠한 개념도 구체적인 직관의 기초 없이는 생각될 수 없다. 후설에 의하면 우리가 다의 보편적인 개념을 표상 할 때에는 항상 어떤 구체적인 다의 직관을 의식 속에 지니고 이 직관에 의해서 우리는 보편 개념을 추출한다. 그렇다면 추상은 어떤 방법으로 진행되는가? 그것은 집합된 개별내용으로부터 완전히 추출되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들 내용의 결합은 유지되어야 한다. 어떤 것을 무시하거나 추출하는 것은 단순히 이것에 특히 주의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적 특수성을 전적으로 추출한다고 해서 내용이나 이 내용과 함께 그 결합이 우리의 의식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용과 그 결합을 파악하는 것은 추상의 예비조건이다. 그러나 이 추상과정에서의 관심은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용의 사상적 연결에 놓여 있다. 반면에 내용 그 자체는 단지 어떤 내용으로 고찰되며, 각각의 내용은 그 어떤 무엇(irgend etwas), 어떤 하나(irgend eins)로 간주된다. 이에 후설은 어떤 무엇과 어떤 하나의 개념을 이용하여 다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다의 표현은 어떤 무엇과 어떤 무엇과 어떤 무엇 등등에 지나지 않는다. 혹은 어떤 하나와 어떤 하나와 어떤 하나 등등에 다름 아니다. 혹은 더욱 간단히 표현하면 하나와 하나와 하나 등등이다.
후설은 우리의 특수한 집합적 결합의 구성요소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으로부터 추상 작용에 의하여 단순한 어떤 무엇과 어떤 무엇과 어떤 무엇의 개념에 도달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하나와 하나와 하나에 대한 개념이며, 말하자면 3이라는 수의 개념이다.
다의 개념은 집합적 결합의 개념과 함께 또 이 개념 속에 어떤 무엇의 개념을 포함한다. 따라서 다의 개념은 집합적 결합이라는 심리적 추상 작용에 의해 발생하며, 수의 개념은 1을 일정하게 결합함으로써 무규정적인 다를 규정하는 심리적 작용에 의하여 발생한다.
어떤 무엇(Etwas)의 개념은 어떤 생각할 수 있는 내용에 통용되는 명칭이다. 어떤 내실적인 혹은 생각할 수 있는 사물(Gedankending)이 바로 어떤 무엇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판단, 어떤 의지작용, 어떤 개념, 어떤 불가능성, 어떤 모순 등등을 어떤 무엇이라고 부른다. 어떤 무엇의 개념은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종류의 모든 대상들을 비교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무엇은 어떤 추상된 부분내용(Teilinhalt)이 아니다.
현실적인 대상과 가능적인 대상, 실재적인 대상과 비실재적인 대상, 물리적인 대상과 심리적인 대상들은 표상내용이라는 점에서 일치하며, 또 표상내용을 통해서 의식 속에 존재한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어떤 무엇의 개념은 표상의 심리적 작용을 통해 발생하고 그 각각의 규정된 대상은 이 표상의 내용으로서 주어진다. 따라서 어떤 무엇은 어떤 상대적인 속성과 부정적인 속성처럼 어떤 구체적인 대상의 내용에 속한다. 사실 어떤 무엇 그 자체는 어떤 상대적 규정으로서 나타난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어떤 무엇의 개념 혹은 하나(Eins)의 개념이 다 개념의 발생에 중요하게 작용한다.
2) 기수의 개념과 다의 개념과의 관계
하나와 하나와 하나 등등의 표현은 다의 개념에 대한 내용을 의미한다. 이때 "등등"은 그 어떤 무규정(Unbestimmtheit)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다의 개념을 나타내는데 하나의 집합(die Kollektion der Einsen)으로 끝이 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의 형식은 어떤 규정을 받은 총체에서 출발하여 추상의 절차를 거친다고 해서 완결된 것은 아니다.
후설은 "다의 개념은 곧 규정을 받아 날카롭게 상호간에 나누어진 많은 개념, 즉 수로 분해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하나와 하나, 하나와 하나와 하나, 하나와 하나와 하나와 하나 등등의 모든 개념들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개념들은 가장 근원적인 성격을 가지며 적어도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이미 인간의 정신발전의 저층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후설은 설명한다. 따라서 둘, 셋, 넷, 그 이외의 명칭은 모든 언어들 가운데서 가장 빨리 만들어진 것이다.
수개념을 얻는데 보편적인 또 무규정적인 다의 개념을 매개로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사실 우리는 구체적인 다로부터 출발하여 직접 개개의 수 개념에 도달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다 가운데서 어떤 하나를 취하면 이 개념의 어떤 하나도 완전히 규정된 하나에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주어진 구체적인 다에서 규정된 수가 발생하는 추상과정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후설에 의하면 어떤 하나의 내용은 하나의 어떤 무엇 혹은 하나로 고찰될 수 있다. 우리는 다에 속하는 보편적인 다 형식을 획득한다. 그리고 그 형식은 하나와 하나와 하나 등등이며, 우리는 이것에 어떤 규정된 수사(Zahlname)를 연상시킬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생긴 모든 개념은 서로 유사하다. 이때 유사하다는 것은 이 개념들을 완성하고 있는 부분표상(하나 혹은 단위)이 동등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표상들의 결합과 요소로서의 심리적 작용이 유사하다. 후설에 의하면 기수는 2, 3, 4 등등의 모든 개념에 대한 공통적인 이름이다. 다시 말해 기수는 "몇 개의 1로부터 성립하는 하나의 총체(ein Inbegriff von Einsen)"를 의미한다.
어떻게 기수의 개념과 다의 개념이 서로 관계되어 있는가? 후설에 의하면 이 두 개념은 본질적인 내용에 있어서 일치한다. 그러나 양자의 구별은 단지 "기수개념은 이미 추상된 다의 형식에 대한 구별을 서로 전제하는 반면에, 다의 개념은 그것에 전제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후설은 기수의 개념과 다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구별한다.
전자는 서로 미리 구별되고 규정된 다의 형식 혹은 수의 비교에서 종류개념으로서 발생하는 유개념으로 파악된다. 이에 반해 다의 개념은 구체적인 총체의 비교를 통해 직접적으로 생겨난다.
물론 추상의 절차는 각각 다른 총체에 따라서 항상 동일한 다의 형식으로 이끌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후설은 다의 개념이 속하는 추상단계에 있어서는 잡다한 다의 형식의 구별이 항상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구체적인 다로부터 이것과 관련된 개념에 이르기까지 심리적 작용에 대한 반성이 요구된다. 이때 다의 개념은 막연한 무규정을 자체 내에 지니게 되는데, 이 다의 개념에 결여된 것은 "수의 성격을 처음으로 완성하고, 또 그것을 확실히 나타내는 부분이다. 즉 예리하게 규정된 얼마(Wieviel)라는 것이 결여되어 있다." 사실 무규정적인 다 개념은 개념구성에 중대하고 심오한 단계를 제시한다.
하나(Eins)는 개념적으로 어떤 하나(irgendeines), 어떤 하나의 것(irgendein Ding), 혹은 하나(ein)라는 부정관사를 지닌 하나의 것(ein Ding)과 근본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 모든 명칭들은 어떤 무엇(Etwas)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수를 셀 때,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물건을 어떤 무엇의 개념 하에서 파악한다. 전체로서의 다와 이들 전체의 부분을 이루는 각각의 대상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성립한다. 그리고 추상적인 다와 어떤 무엇의 개념을 매개로 하여 다의 요소단위에 있어서도 상관관계가 성립한다.
'하나'라는 이름은 수를 세는 작용에 이용되는데, 하나와 하나의 것 그리고 어떤 무엇 사이에는 그 의미의 차이가 있다. 그 차이란 "하나는 다에 상관적으로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하나라는 개념은 '세어진 것' 혹은 많은 물건에 대하여 '하나의 물건'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데 '하나'를 중시하지 않는 '어떤 무엇'은 다 개념의 이러한 관계와는 상관없이 사용되어 왔다. 수개념을 성격 지우는데 있어서 후설은 '우리들이 어떤 내용을 어떤 무엇의 개념 하에서 가진다.'거나 '우리는 하나의 내용을 하나의 개념 하에서 가진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어떤 무엇의 개념 이전에 하나의 개념이 나타나며 다의 개념과의 상관관계는 수를 추상함에 있어서 고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의 어떤 대상이 하나의 어떤 무엇으로 간주될 경우에도, 그 어떤 무엇은 이것에 의해 이 다와의 상관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어떤 무엇과 하나, 다와 기수의 개념, 모든 개념 속에 가장 보편적이고 또 가장 내용이 공허한 모든 개념들은 형식개념 혹은 범주로서 특징 지워진다.
Ⅴ. 증가와 감소의 관계에 나타난 심리학적 근원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기수는 무규정적인 개념, 즉 끝없이 나아가는 개념들의 연속으로 제시되었다. 그리고 하나와 하나(Eins und Eins)는 하나와 하나와 하나로 세밀하게 구별될 수 있고, 나아가 이 하나와 하나와 하나는 다시 하나와 하나와 하나와 하나로 예리하게 구별된다. 그런데 이러한 구별도 우리가 수계열 속에서 계속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한층 더 쉽지만은 않다. 19와 20을 구별하는 것은 9와 10을 구별하는 것보다 쉽지 않고, 9와 10을 구별하는 것은 3과 4를 구별하는 것보다 쉽지는 않다. 우리가 수를 규정하기도 하고 또 수를 구별하기도 하는데 우리의 인식영역 내에서 예리하게 고찰하는 데는 약간의 보조수단이 필요하다. 이러한 보조수단은 기계적인 작용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고유한 기본은 기초적인 수관계 속에 존재한다. 후설은 증가(Mehr)와 감소(Weniger)로부터 이들 관계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한다.
후설은 구체적인 현상을 예로 든다. 우리는 어떤 주어진 집합, 예를 들면 약간의 구(球)에 하나 또는 많은 구(球)를 더해 보자. 그렇게 하면 우리는 주어진 집합에 더해진 구의 수만큼 많은 새로운 수를 얻게 된다. 그런데 구를 약간씩 배제하면 우리는 이 수만큼 이번에는 감소했다고 말한다. 이 경우에 있어서는 물리적 대상과 이것들에 작용하는 하나의 물리적 행위가 중요하다. 실제로 외부의 내용을 집합적으로 합쳐서 생각하지 않을 경우에도 더하거나 빼는 작용이 일어난다. 근원적인 작용은 새로운 내용을 받아들여 확대한다. 그러나 또한 반대의 경우도 생길 수 있다.
후설은 다음과 같이 증가와 감소의 관계를 설명한다. 본래의 표상된 총체보다도 확장된 총체에 새롭게 더해진 요소의 수만큼 많이 포함하고 있는 경우를 '증가'했다고 말하며, 반대로 본래 표상된 총체보다도 제외된 요소의 수만큼 적게 포함된 총체를 '감소'했다고 한다. 나아가 후설은 다음과 같은 단정을 내리고 있다.
증가와 감소는 상관적인 개념이고, 증대된 총체로부터 본래의 총체에로 나아가는데 감소를 요하고, 또 감소된 총체에서 근원적인 총체로 되돌아가는데 증가를 요구한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내부경험의 새로운 사실을 전제해야 한다. 어떤 관계도 기본이 되는 공존(Zusammensein)을 하나의 의식작용 속에서 요구하듯이 증가와 감소의 관계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 관계가 완성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근원적인 총체와 확장된 총체가 동시에 또 하나의 작용 속에서 우리에게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확장된 총체는 두 개의 총체의 "총합"(Summe)로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최초의 총체는 근원적인 총체와 같은 것으로 인정되고, 다른 총체는 새로이 더해져온 내용의 총체를 나타낸다. 예를 들면 우리가 (A, B, C)인 총체를 (A, B, C, D, E)인 총체로 확장하면, 따라서 '제2의 총체가 D와 E만큼 많다'는 판단은 (A, B, C)에 대해서 (A, B, C, D, E)와 (A, B, C; D, E)와의 동시적인 표상을 완전히 하나의 작용 속에서 제시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보다 많은 총체를 합쳐서 그것들의 총체에 그 특수한 통일을 잃어버리지도 않고 하나의 총체에 통일시켜서 표상하는 능력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의 요소가 총체의 총체를 표상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총체의 총체의 총체도 생각될 수 있고, 우리는 계속 더 나아갈 수도 있다.
이러한 복잡한 구성은 심리학적인 작용에 기초해 있다. 여기에서 고차적 심리학적 작용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이 작용을 매개로 하여 많은 총체를 표상한다면, 어떤 각각의 총체를 구성하는데 있어서도 심리적 작용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들 총체에 있는 어떤 총체도 그 통일 속에서 의식으로서 유지되고, 제1차적인 심리적 작용 위에 제2차적인 심리적 작용이 행해진다. 또 총체의 총체의 총체라고 한다면, 우리는 제3차적인 심리적 작용을 통해 도달한다.
Ⅵ. 후설의 심리학적 분석의 한계와 논리학에로의 전환
이상 후설이 수학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도입한 몇 개의 개념들을 살펴보았다. 후설은 지향적 작용(심리학적인 사건)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수의 개념(논리적 형성체)을 획득한다고 말한다. 이점은 바로 그의 심리학주의적 경향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논리적인 노에마적 형식과 이것을 발생시키는 심리학적인 노에시스적 작용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범주적인 대상에 관한 연구와 심리적인 과정에 관한 연구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논리적인 것을 심리적인 것으로 환원한다. 따라서 그는 논리적인 범주를 경험적인 탐구에 의해 규정되고 설명되는 심리적인 사실로 간주하여 논리적인 범주를 주관적인 심리적인 현상에로 환원시킴으로써 논리적인 범주의 객관성을 파괴시켰다.
우리가 앞서 논의한 후설의 수개념에 대한 분석 가운데 비판의 여지를 지닌다. 후설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 더하기 하나 더하기 하나는 셋, 즉 1+1+1=3이 도출된다. 좌변의 1+1+1은 추상작용에 의한 개념인 어떤 무엇과 어떤 무엇과 어떤 무엇으로 간주된다. 하나와 하나와 하나는 어떤 것과 어떤 것과 어떤 것에 관한 추상적인 관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두 개념은 전혀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그로스만의 주장에 의하면 1이라는 수의 개념은 어떤 것의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전자는 수의 개념이지만, 어떤 것(Etwas)은 수는 아니다. 1이라는 수가 하나의 어떤 대상 즉 사탕 하나, 연필 하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1이라는 수가 어느 누구라도 하나의 사탕이다라고 결론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홀렌슈타인도 {수학의 철학}에서 취한 후설의 입장과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집합은 모아진 사실들의 내용 속에 근거한 어떠한 사실적 통일성이 아니라는 인식에 인도되고, 동시에 심리적인 것에는 물리적인 것만이 대립할 수 있고, 관념적인 실체들은 허구들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브렌타노의 이론에 잘못 인도되어서, 후설은 {수학의 철학}에서 집합의 개념들은 모으는 작용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고, 다시 말해 어떠한 관념적 객관성들도 집합 개념에 상응하지 않는다는 이론을 옹호하고 나선다.
또한 이러한 후설의 분석에 대하여 프레게는 심리학주의적 경향이라고 비판한다. 첫째, 후설은 감각적 대상들이 모여 두 개의 단위를 이루는 이들 단위의 상이성과 동일성을 설명함에 있어 심리적 작용을 통한 내용의 결과로 파악한다. 이것은 프레게가 보기에는 심리학주의적인 설명이다. 또한 그는 집합적 결합을 설명함에 있어 그것은 표상 내용에서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하나로 만드는 어떤 심리적 작용에서 주어진다고 간주한다. 프레게에 의하면 후설은 다와 수의 개념에 대하여 논리적인 관계를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로 후설이 0과 1이라는 수를 설명하는데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점이다. 후설은 0과 1에 있어서는 집합개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수에서 제외시킨다. 그러나 프레게는 1이라는 수를 0과 같다는 개념에 속하는 기수로서, 그리고 0은 자기자신과 같지 않다는 개념에 속하는 기수로 간주한다. 셋째로 후설이 본래적인 표상과 상징적인 표상을 구분하고 나서 큰 수를 설명함에 있어 심리학주의적 색체를 지니게 된다. 말하자면 프레게의 측면에서는 후설이 상징적인 표상과 본래적인 표상을 논리적인 등가관계에 있는 것으로 간주함에 따라 개념과 표상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설은 심리학주의에 대한 프레게의 비판적 견해를 받아들여 {논리연구Ⅰ}에서 논리학을 둘러싼 논의를 재검토하고 그의 기초를 확고히 하고자 한다.
{수학의 철학}과 {논리연구}는 비슷한 목적을 지니면서 그들 각각의 학문인 수학과 논리학에 있어서 근원적인 개념들을 분석한다. 소콜로브스키에 의하면 이들 두 저서에는 중요한 차이를 지니고 있다. {논리연구}에서 논리학과 논리적 형성체가 지닌 독특한 지위에 대해 명시적으로 후설이 다루는 방식이다. {수학의 철학}에서 후설은 논리적 형성체와 심리학적인 사건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원천에 대한 탐구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발생적 심리학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논리연구Ⅰ}에서는 그러한 혼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는 프레게, 나톨프 등의 영향으로 논리학을 경험적인 심리학적 연구에 의해서 설명될 수 없다는 견해를 갖는다.
후설은 {수학의 철학}에서 심리학주의적 입장을 취했으나, 사유의 심리학적인 연관으로부터 사유내용의 논리적 통일성에로 이행하자마자 연속성과 명석성을 제시할 수가 없었다. 또한 수학과 모든 학 일반의 객관성이 논리적인 것의 심리학적인 정초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하는 원리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후설은 수학과 논리학과의 관계를 밝히려는 탐구영역에로 확대하게 된다. 이점은 또한 프레게의 반심리학주의적 입장의 영향이기도 하다. 프레게는 그의 {대수의 기본법칙}의 서문에서 논리학에 있어서의 심리학주의적 경향을 비판한다. 논리적인 진리는 심리학적인 가정의 토대 위에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프레게는 진인 그 자체와 우리가 진으로 간주함을 명확히 구별함이 절대로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진으로 간주함(Für-wahr-Halten)은 심리학의 일이며 진인 것 그 자체(Das Wahrsein an sich)는 순수한 논리적 대상이어야 한다.
프레게의 입장과 유사하게 후설 역시 그의 철학적 입장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온다.
후설은 수학의 기초를 전개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수학의 철학}에서 제기된 문제들이 다만 보다 넓은 철학적인 맥락 속에서만 해결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인식론의 기본적인 물음에 있어서 그리고 학으로서의 논리학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에 있어서 어떤 명료성에 도달하는데 성공할 때까지 그 동안 수행해오던 수학적인 탐구를 중단했다. 이러한 그의 새로운 관심이 낳은 결과가 {논리연구}이다.
{논리연구}에서 비로소 후설은 심리학주의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다. 이 비판은 일생동안 그의 사상에 내재된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을 확립하려는 열망과 함께 한다.
Ⅶ. 결 론
지금까지 언급한 바와 같이 수학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심리학적 방법을 통해 그 기초를 정립하려한 후설의 이론을 살펴보았다. 후설은 수개념을 구체적인 사물로부터의 경험에서 귀납적으로 추출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수학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또한 수학의 노에시스적 전제를 묻고 수개념의 근원을 탐구했다. 그는 기수의 개념의 분석은 다의 개념에 대한 분석을 전제로 하며, 추상은 집합적인 내용의 성질과는 무관함을 증명하고, 집합적 결합에 의한 반성을 토대로 다의 개념이 성립한다고 견해를 이끌어 내었다.
후설은 수개념의 기원을 심리학적 작용에 두고 분석한다. 그는 총체로 결합된 모든 내용을 통일하는 심리적 작용을 반성함으로써 집합적 결합의 추상적 표상에 도달하고, 또 이 집합적 결합을 매개로 하여 다 개념을 전체의 개념으로 구성한다. 집합적 결합은 심리적 작용의 반성에 의하여 파악되고, 총체는 이 작용에 의해 성립된다. 집합된 내용의 어떤 하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심리적 작용이 필요하다. 후설에 의하면 집합적 결합은 표상작용 속에 직관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내용들을 통일적으로 포함하는 어떤 심리적인 작용에서만 존립하고 있다. 집합적 결합은 집합이 발생되어 나오는 심리적인 작용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 수의 개념은 우리의 정신적인 작용에 대한 반성 작용으로부터 발생한다.
후설은 다 개념을 생성시킨 고유한 추상과정을 분석한다. 후설에 의하면 우리가 다의 보편적인 개념을 표상할 때에는 항상 어떤 구체적인 다의 직관을 의식 속에 지니고 이 직관에 의해서 우리는 보편 개념을 추출한다. 또한 개념의 분석하는 가운데 단위의 상이성과 동일성을 설명함에 있어서 심리적 작용을 통한 내용의 결과로 파악하였다. 이점은 프레게에 의해 심리학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사실 수학계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이러한 노력으로는 후설의 심리학적 기초정립 이외에 다음과 같은 경향들이 있다. 그 경향들은 프레게를 비롯한 논리주의나 힐버트에 의한 형식주의, 브라우어의 직관주의 등이다. 이 중에서 특히 논리주의는 후설의 이론에 직접적인 비판을 가했으며 후설의 {수학의 철학} 이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에 대하여 후설 역시 수학에 대한 이전의 탐구로부터 논리학에 있어서의 심리학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선회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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