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해석학에 대한 몇 가지 의문점

나뭇잎숨결 2022. 12. 18. 17:39
해석학에 대한 몇 가지 의문점



박치완(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주제분류】 해석학
【주요어】 해석(재해적)/ 해체/ 텍스트/ 해석-하기/ 해석-쓰기/ 딜타이

【요약문】 해석학 관련 논문들, 이론서들은 부지기수지만 대개가 ‘해석 가능성’이란 이상적 전제를 받아들인 상태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를 받아들이면 슐라이어마허에서처럼 ‘해석학의 보편성 요구’나 일반 해석학 등이 가능해야 할 것이다. 딜타이가 “자연과학에 비견할 만한 과학성”을 해석학의 기준으로 제시했던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였을 것이고, 하이데거의 해석학의 ‘존재론화’도 이와 같은 전제로 출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해석 가능성’내지 ‘보편적 해석’은 해석학의 이데올로기 내지 함정이지, 결코 해석학의 이론적․방법론적 맥락에서의 든든한 후원자가 될 수 없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i) 이는 무엇보다도 언어․문화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고, ii) 해석의 순간에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종의 당위적 요청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해석 과정에서 문제로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이와 같은 현실은 간과한 채, 해석학도들은 이론 일변도(즉, 이론 종속적인)의 글들만 양산하고 있으며, 정작 글쓴이(저자)가 지금 ‘무엇’을 ‘해석’을 하고 있는지 반성하거나, 그것이 해석 가능성을 전제로 한 작업인지 아니면 해석 불가능성을 해명하려는 작업인지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즉 자신의 주관적인, 고유한, 창의적이며 자유로운 해석 공간을 마련할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라면, 해석은 문자 그대로의 해석도, 주석도, 종국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I. 들어가는 말: 해석함으로써 철학함

철학함(philosopher)은 곧 해석함(interpréter)이다. 이 정의를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철학사를 지탱해온 다양한 지식들(savoirs) 역시 ‘새로운’ 해석의 성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해, 과거의 철학적 텍스트들에 대한 (재)해석이 끝없이 감행되는 과정에서 문자 그대로, ‘새로운 철학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해석학을 조금 더 두둔하는 표현이 허용된다면, 해석 ․ 해석함은 곧 철학사의 씨줄이요 날줄이라고까지 주장할 수 있을 것이며, 해석이 곧 철학 행위 자체라고도 말해도 무리는 없으리라 본다. 만일 철학의 역사가 이와 같이 형성되어온 것이라면, 철학은 하늘로부터 어떤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선사된 그런 선물이 아닌 것이며, 철학의 역사도 결국 과거의 텍스트들에 대한 인간(해석자)의 끝없는 해석, 재해석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철학’에서 ‘새로운’이란 형용어는 이런 점에서 최소한 다음 두 가지를 함의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기존의 것’과 다른 무언가가 그 속에 추가되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텍스트에로의 회귀나 침잠(沈潛)보다는 해석자의 위상이 부각되고, 그의 자유․창의적 해석에 무게를 실어준다는 점이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것’이 기상천외한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과는 ‘다른 무엇’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텍스트 앞에 선 해석 주체가 그 텍스트에 종속적이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으며, 그가 그 텍스트에 새롭게 부여하는 의미에 있다. 그리고 그 방향이 이미 씌여진 과거의 텍스트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구상하는 고유한 철학일 때라야 비로소 새로운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철학사를 수놓고 있는 과거의 많은 텍스트들이 해석의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며, 한 번 활자화된 텍스트란 모름지기 재해석의 요구 앞에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철학에서 말하는 ‘진리’가, 근대 이후부터이긴 하지만, 시․공간을 초월한 자연계의 태양에 비유될 수 없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바꿔 말해, 철학함이 곧 해석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철학은 이제 ‘절대 진리’의 추구라는 고래의 환상을 버려야 한다. 철학의 무대에 절대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은 오히려 절대 진리를 의심하는 작업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데카르트와 같은 절대 의심 없이는 새로운 철학이 설 수 없다. 또한 철학은 문제를 끝없이 제기하는 학문이지 자연과학이나 수학에서처럼 대답(정답이나 해답) 찾기에 몰두하는 학문이 아니다. 메이에르(M. Meyer)는 이를 문제제기론이라 했고, 그의 문제제기론은 텍스트에서의 언어의 의미를 ‘주어진 바의 것’에서보다, 즉 텍스트 자체보다 그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의미를 궁구하는 해석자의 물음-대답 과정을 중시하고, 텍스트의 의미는 한 순간이 아닌 지속되는 시간 속에서 밝혀지고 드러나는 것이라 했다.
데카르트나 메이에르에 따를 때, 태양에 비유된 과거의 절대 진리에 대한 환상, 즉 신적 진리라는 믿음은 결과적으로 하나의 은유이거나 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말하듯 신을 만물의 제1원형 또는 제1모델로 생각하는 자들의 착각일 뿐, 결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철학의 진리관이랄 수 없다. 철학적 진리는 시간(역사)을 무시하고 배타적으로 ‘이미 주어진(déjà donné) 무엇’이 아니란 뜻이다. 철학적 진리는, 좁게는 철학자들이, 넓게는 사람들이 공들여 ‘만들어 가는’ 것이고, 바로 그것이 철학의 생명력이다.
철학의 진리를 만들고 세워가는 과정에 다양한 견해(심지어는 서로 상충하는 견해까지도)가 등장할 수 있다. 문제는 바로 이 견해들(opinions)이 서구의 철학자들에 의해 진리의 이름으로 포장되고, 진리인 냥 행세한 것이다. 그러나 철학사를 점철하고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닌 견해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겸허히 반성할 때가 되었다. 한마디로, 이 견해들이 ‘진리’라는 철갑옷을 뒤집어쓰고 그토록 오랫동안 가면극을 벌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견해들 간에 서열이 있을 수 있을까? ‘진리’도 ‘오류’도, ‘선’도 ‘악’도, ‘존재’도 ‘존재자’도, ‘인간’도 ‘신’도, ‘자아’도 ‘타자’도, ‘기호’도 ‘언어’도 모두,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존의 텍스트에 대(對)한 ‘새로운’ 해석의 결과물일 뿐, 서열은 없다. 그것들이 시․공간적 제약 속에서 부침(浮沈)하는 것임을 보지 못하고, 이러한 것들을 우리가 마치 눈먼 봉사처럼 절대시했던 데 문제가 있다. ‘절대’라는 우상 아래 자신을 감추고 스스로가 그 절대의 수호자 내지 파수꾼이라고 착각하며, 영역 표시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동일한 행태가 반복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이와 같이 근성의 기식자들로 인해 철학은 현재(현실)에 충실하지도, 앞으로 전진 하지도 못하며, 늘 현실과 ‘약간’ 동떨어진 곳에서 도깨비춤을 추고 있는 형국이다. 질서, 체계, 침묵, 전통 고수, 이것이 기식자들이 추구하는 철학적 이념이요, 이로 인해 철학은 과거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나 없이, 내 앞에, 나 다음에도 존재한다.” ‘나’는 중심들 중의 하나일 뿐 근본적으로 절대 중심일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철학자란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상식(connaissance ordinaire)은 철저히 무시되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세속적인, 비철학적인 것이라 일거에 비판의 화살을 들이댄다는 사실이다. 철학자란 사람들은 이렇듯 진리의 상대화․자기화,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리의 상실, 과거에 기대 전유하고 있었던 것들의 포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그럴수록 헤게모니 쟁탈을 위해 더욱 강력한 반대 견해들이 등장할 수밖에 없고, 그 반작용이 최근 널리 회자되고 있는 ‘해체’라는 개념의 봇물이 아닐까 싶다.
데리다의 해체도 일종의 해석이며, ‘의도된’ 해석에 가깝다. 과거의 텍스트들, 그것이 누구의 어떤 것이 되었건, 그것들로부터 해석의 자유를 담보 받고자 하는 것이 결국 그의 ‘해체’라는 전략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해체’는 철학의 전통 파괴나 철학의 치기적 수사화(또는 문학화)라는 단순 비판으로 그 기치가 사그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해체는 궁극적으로 ‘새로운 철학’의 구성을 위한 하나의 전략이자 방법이며, 이런 이유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에 버금가는 “해체적 전환(Deconstructive Turn)"이란 평가까지 받고 있는 것이리라. 해체를 통해 데리다는 결국 철학함에 있어 작동되고 있는 모든 권력, 장치, 관습을 비판하고 폭로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략으로 무장해 데리다는 결국 자신만의 해석의 자유를 누린 것이다. 이러한 철학의 해체-재구성의 노력 없이는 앞서 말한 ‘새로운 철학’이 가능할 수 없다는 점만을 이 자리에서 언급하기로 하자.
한 시대의 지층(知層) 역할을 하는 모든 텍스트들, 이것들은 예외 없이 이와 같은 용기 있는 세력의 자유 해석의 결과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는 어떠한가? 과연 과거의 텍스트들을 자유롭게 독서하며 해석하고 있는가, 아니면 과거의 텍스트들에 짓눌려 자신 없이 얼버무리거나 중얼대는데 그치고 있는가? 철학의 재구성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구성된 것들을 이해하는데 쩔쩔매고 있는가? 새로운 철학을 꿈꾸고 있는가, 아니면 과거의 철학 텍스트들을 경배하고 모시는데 여념이 없는가? 후자는 밥 먹듯 쉬운데 비해 전자는 맨 몸으로 대해(大海)를 건너는 것처럼 어렵다. 전자는 필사의 노력이 필요한데 반해, 후자는 자리보전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철학사는 엄연히 전자에 의해 씌어지고 후대에 남는다. 우리는 철학사에 빛나는 지식들이 이와 같은 해석 과정의 역사 속에서 생(生)하기도 하고 멸(滅)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II. 해석학, 무관심했던 것들, 해명해야 할 과제들

철학함이 곧 해석함이라는 것은, 철학의 역사가 곧 해석의 역사라는 말과 같다. 그리고 철학의 역사가 해석이 역사라는 것은 동시에 철학의 역사가 진리라는 가면을 쓴 하나의 의견이 시대를 초월해 지배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역사가 아니라 다양한 이견(異見)들이 시간 속에서 등장했다 사라지는 변환의 무대란 말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철학의 역사가 이견들의 역사라는 것은 세계, 텍스트, 사물 등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을 철학이 용인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이는 철학이 이견들을 용인하는 것이 아니고, 이견들의 집합이 결과적으로 철학사의 뼈와 살을 구성하고 있다는 증거다. 해석, 재해석이 끝없이 요청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진리가 아닌 바로 이 이견들에 대(對)한 또 다른 의견 제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본고에서 필자가 철학함을 해석함이라고 감히 주장하고 있는 소이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해석’이란 개념을 어떻게, 어느 수준에서 이해하고 있는가 살펴보자. 여기서 우리는 ‘해석’에 대한 우리 국어사전에서의 풀이를 잠시 점검할까 한다. 그 이유는 철학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과 달리 대중이 이 개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만일 양자 간에 심한 이해차가 있다면, 최소한 전자의 책임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1. ‘이해’한 것을 ‘설명’함?

해석(解釋): “문장이나 사물의 뜻을 그 사람의 논리에 따라 이해함, 또는 이해한 것을 설명함. 또, 그 내용(『민중 엣센스 국어사전』).”

사전적 정의로서 일반 대중이 볼 때는 충분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용어 풀이는 철학이나 해석학 전공자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도 애매하고,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는 것들이 뒤섞인 아주 모호한 정의이다. 그렇다면 ‘해석’에 대한 위의 사전적 정의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간단하게 몇 가지만을 지적해보기로 한다.
i) 일단 눈에 띄는 것은 ‘그 사람’이 저자인지 독자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만일 저자라면 본고의 입론과 상충하고, 독자, 즉 해석자라면 우리의 주장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전자에 해당하는 것이 분명해보이며, 그리고 이 경우라면 해석자의 자유 해석이, 본고에서의 논고(論告)가 무색할 정도로, 거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ii) 그런가 하면 해석학 전공자들은 ‘이해(정신과학)’와 ‘설명(자연과학)’을 애써 구분해 사용하고 있는데 반해, 이 사전 풀이에서는 이 둘을 전혀 구분하지 않고 쓰고 있다.
iii) 마지막으로(문맥 밖의 요구일 수도 있지만), 만일 어떤 자가 X라는 저자의 O라는 텍스트를 읽고서 그것을 P라는 텍스트에서 설명했는데, 그 속에 원텍스트 O에 대한 심각한 오해(오류)가 있을 경우, 즉 X가 O에서 말한 본래의 뜻과 무관한, 또는 그것을 악의적으로 해석하고 있을 경우, 우리는 P를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빈번히 접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훗설의 데카르트 해석이 그렇고, 바슐라르나 하이데거의 베르그송의 시간(지속)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우리 해석학계는 해석학과 관련한 논의는 철학자 별로 또는 주제별로 다양하고 심도 있게 펼치고 있음에도 정작 이런 현실적인 사안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이견이라고는 없이 손을 맞잡고, ‘해석 가능성’에 취해, ‘보편적인 이해’라는 이념에 경도돼 무리지어 길을 가면서도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도중에 어떤 것들을 놓치고 있는지,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해석학계의 무반성적 일방통행을 발목 잡는 아킬레스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길을 가다보면 여러 갈래 길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상식이다. 앞쪽, 옆쪽은 물론 내 머리 뒤 쪽, 그쪽에도 길이 있게 마련이다. 만일 뒤쪽에 우리가 가야할 길이 있다면 가던 길을 과감히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차근차근 학문의 계단을 쌓기 위해서다. 이것이 서구의 이론서에 묻혀 우리의 현실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아래에서 우리가 다루어보려고 하는 ‘해석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침묵’도 해석학의 또 다른 아킬레스건이 아닌가 싶다.

2. 해석할 수 없는 것들?

해석학은 해석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과연 어떤 언급을 하고 있을까? 급하게 말하면, 해석학은 해석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고 있지 않다. 뒤집어 말해, 모든 해석(내지 번역) 작업은 ‘해석 가능성’을 전제하고 출발한다. 이는 해석학이 오직 해석할 수 있는 것들만을 해석한다는 말이며, 그것을 해석학도는 일반적으로 해석 작업이라고 자임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에겐 해석이나 번역이 쉽지 않은, 근본적으로 해석이 불가능한 책들이 해석이 가능한 책들만큼이나 많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이 해석-하기를 꺼리는, 대표적으로 『성경』과 같은 종교 교리서들도 있다. 결과적으로 해석학(의 연구영역)은 해석이 어렵거나 불가능한, 해석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책들에 대해서 침묵했고,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뒤집어 말해,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해석․번역 가능성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학문으로서 존립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나 의심이 들 정도다.
다시 정리하건대, 해석학은 근본적으로 모든 텍스트를 해석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며, 실제 모든 텍스트를 해석할 수도 없다. 팔머 같은 이는 용기백배하여, 해석학은 이제 더 이상 신학이나 문학 혹은 법학에 속하는 특수한 분야가 아니라 “언어로 표현된 모든 것들을 이해하는 기술로 전환”되었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을 자 몇이나 될까. 언어 표현에 있어서도 보고서와 문학 작품이 다르고, 역사학과 사회․통계학에서의 기술 방식이 다르지 않는가? 해석학이 “언어로 표현된 모든 것들을 이해”한다는 팔머의 주장은 따라서 실제 해석의 현장에서 직면할 난관, 부딪힐 장벽에 대한 고려를 전혀 하지 못한고 있다고 판단된다.
팔머의 정의만으로도 우리는 해석학의 범주와 영역이 얼마나 ‘두루 뭉실한’ 것인지 알 수 있고, 그 폭은 넓게 잡혀있으나, 그럴수록 구체성을 획득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여, 다시 묻는다: 우리가 과연 “언어로 표현된 모든 것들”을 해석학의 대상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이처럼 반복된 물음에 만일 “그렇다”며 손을 들고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A. 랭보의 <모음들>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그에게 묻고 싶다. 의도적으로 문법을 파괴해가며 독자의 접근을 아예 거부하는 무수한 시들을 썼던 시적 표현들에서 그 해석학도라면 과연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런지? 그뿐인가. 한국의 괴짜 시인 이상(李箱) 같은 시인은 <환자의 용태에 관한 문제>라는 시에서 보면 랑그로서의 언어체계를 철저히 거부하고 자신만의 사적 언어인 수와 점으로 시를 쓰고 있다. 다시 말해, 이상은 이 시에서 언어의 고유한 자리, 즉 소통으로서의 언어의 역할을 수-기호로 대체시키고 있다. 이상의 눈에 전혀 환자라고는 볼 수 없는 자기 자신, 그럼에도(어떤 일이 그에게 실제 있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현실적으로 병원치료를 받았거나 그렇게 주위 사람들로부터 환자 취급당했던 본인의 모습, 이를 이상은 시라는 무기를 통해 항변하며 또 보상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상은 한 편의 기학학적 시를 통해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문법, 정상성(normalité)만을 강요하는 냉엄한 사회의 요구에 도전했던 것이리라.
랭보의 <모음들>과 이상의 <환자의 용태에 관한 문제> 그리고 많은 초현실주의 시인들, 다다이스트들의 작품의 경우, 물론 이는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해석학이 전혀 적극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증거한다. 결과적으로, 해석학은 “언어로 표현된 모든 것들을 이해”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고, 팔머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석학은 그 범위를 ‘모든 것’에서 정확히 어디까지로 좁혀야 할까? 재삼 강조하지만, 언어로 표현된 것들 중 “해석 가능한 것”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재정의에 따르면 해석학은 “해석자가 해석 가능한 것을 해석한다”는 말이 되고 만다. 그러나 “해석 가능한 것을 굳이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역으로 말해, 해석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침묵하는 것이 해석학이고, 그 침묵의 대가가 얼마나 큰지, 해석 가능한 것들만으로 차려진 화려한 잔칫상이 얼마나 먹을 것이 없는지, 최소한 해석학도라면 반성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3. 原텍스트(texte original)?

모든 텍스트에는 좌-우, 위-아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역사적’ 텍스트를 해석해야 하는 어떤 해석자도 좌-우, 위-아래에 소속되어 있기 마련이다. 이것이 해석이 감행되는 상황에 주어진 환경이며, 하나의 해석은 바로 이러한 환경, 내․외적으로 주어진 역동적 상황의 강을 건너 이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런바 얼마나 많은 변수들이 한 권의 텍스트를 해석하는 데 작용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잘된 해석과 잘못된 해석을 구분할 수 있는 어떤 객관적 기준을 가질 수 있겠는가? 대체 누가, 아니 무엇이 궁극적으로 어느 한 해석의 정당성을 확보해주는 것인가? 해당분야의 전문가인가, 아니면 공중(집단)인가?
우회적으로 대답해, 이런 이유 때문에 텍스트에 대한 해석은 다시 재해석될 가능성이 높고, 변화된 환경에서 늘 새로운 이견들이 제시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재해석이 요구되는 경우는 어떤 텍스트(texte original)에 대한 1차 해석(주석, 번역)이 잘못되어 있는 경우는 두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현대처럼 우리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처럼 사물(자연, 세계)과 더불어(속에서) 사유하지 않고 오직 타자에 의해 씌여진 문자(텍스트)의 감옥에 갇혀 사유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고 본다.
그러나 문자로 된 텍스트는 어디까지나 세계의 그림일 뿐이다. 그 그림은 Y라는 해석자보다 앞서 존재했던 어떤 X라는 자의 작품이다. 그런데 X는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좌-우, 위-아래에 속해 있는 자이다. 따라서 그의 세계-그림은 세계에 대한 하나의 의견일 뿐 세계에 대한 절대 진리나 모델일 수는 없다.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와 같은 해석 작업에 있어 중요한 것은 그래서 텍스트가 갖는 현재적 의미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그 어떤 텍스트도 Z라는 절대 의미를 부여받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텍스트가 해석자 U, V, W의 고민, 노력의 성과물이다. 그런데 어찌 요즘 철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텍스트 밖’이 없는가? 과거의 텍스트가 자신보다 상위에 거하며, 전부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자신은 익명인 것인가? 텍스트의 독자가 아닌 X라는 1차 해석자의 신하로 살고자 하는가?
텍스트 밖이 없는 것이 아니고 텍스트 밖에 없다고나 할까. 이런 결과 문제는 우리가 타자의 텍스트에 갇혀, 직접적으로 사유하지 못하고, 타인에 기대 간접적으로 사유한다는 점이다. 사물(자연, 세계)이 아닌 문자, 이미 누군가에 의해 씌여진 텍스트를 가지고, 이 텍스트가 갖고 있는 문제점, 편견, 세계에 대한 또 다른 그림에 대해서는 눈을 감은 채 말이다. 만일 이런 방식의 ‘해석’을 일러 우리가 해석이라고 한다면, 해석은 딜타이가 말한 “낯선 것”과 조우할 일이 없다. 바꿔 말해, 굳이 해석이 필요치 않다. 그러나 “낯선 것”이 있어 우리는 해석하고, 이를 통해 해석자는 자신 앞에 주어진 텍스트들을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시각으로 읽고자 희망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 우리가 ‘해석’이라고 말할 경우, 그것은 반드시 주어진 텍스트에 대한 해석자의 ‘새로운 시각’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여, 텍스트 해석은 다음과 같은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1(texte original) ↔ 해석자 ↔ 텍스트2(texte interprété)>.
해석은 이렇듯 <텍스트2>(또는 <텍스트3>, <텍스트4>...)를 생산하는데 의의가 있다. <텍스트2>는 <텍스트1>과 ‘다른’ 세계-그림이다. 그런데 만일 <텍스트2>에 <텍스트1>과‘다른’ 것이 없다면, 그것은 새로운 것도 창의적인 것도 아니다. 해석은 이렇듯 텍스트의 해석으로 그 범위를 최대한 축소시켜 볼 경우에도, 기존의 것과 ‘다른’ 텍스트들을 생산해내야할 의무가 있다. 딜타이의 말대로, 해석(재해석)이 요구되는 곳이면 어디서건 해석 행위는 정당성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주장은 해석, 재해석의 필요성을 강조하려는데 있다. 해석, 재해석의 필요성은 해석이 ‘유일-독점’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공생’의 화두와 관련이 깊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 이 ‘다름-공생’ 때문에 해석은, 심지어는, 원텍스트까지도 무시하면서 문자 그대로 ‘자유로운’ 해석, 데리다식의 해체 작업이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어쨌건 해석이 가능하자면, 해석자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면 ‘다름-공생’이 ‘유일-독점’보다 중시되어야 하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과거가 현재를 지배할 수 없는 것처럼 과거의 원텍스트는 새롭게 요구된 해석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침해할 수 없다. 자유 해석은 새로운 해석의 가능 근거며, 이런 까닭에 어떤 텍스트에 ‘정통하고 있다’는 것이 자유 해석의 발목을 잡으려 해서는 곤란하다. 보편적 기준이 없어 자유로운 해석이 난무하는 것도 아니고, 자유로운 해석이 넘쳐 보편적 기준이 필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4. “해석은 삶의 체험과 함께 심화된다”는 딜타이의 말?

딜타이의 다음 주장을 살펴보면서 이제까지의 논의를 다시 정리해보자. 그는 『체험․표현․이해』에서, “삶의 표현들이 우리에게 낯선 것이라면 해석은 불가능할 것이다(①). 또 그것들 안에 낯선 것이 하나도 없다면 해석은 불필요할 것이다(②). 따라서 해석은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이 두 명제 사이에 존재한다(③). 해석은 이해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어떤 낯선 것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건 요구된다(④)”, 말한다.
주지하듯, 딜타이에 따르면, 해석은 삶의 체험과 함께 심화된다. 바꿔 말해, 한 사람의 체험량이 곧 그의 해석량에 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다시 뒤집어 말하면,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나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직접 체험되지 못한 것들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말이 되리라.
여기서 우리는 딜타이의 ‘체험’이 시간 연관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되며, 특히 과거, 현재, 미래 중 딜타이는 ‘현재’를 체험의 무대(場)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그에 따르면 결국 우리네 삶의 체험 내용은 <과거 → 현재 ← 미래>라는 시간의 항해 속에서 끝없이 형성되기도 하지만, 필경 재구성해야 할 경우도 발생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새로운, 미지의 것(그동안 그가 체험해보지 못한 것)일 경우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 말은 사실 상식에 해당하고, 실제 우리는 이런 과정 속에서 일반적으로 자신의 체험량을 늘려가거나 보충해간다. 딜타이가 “시간의 체험이 우리 삶의 내용을 규정한다”고 했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러한 선이해, 즉 해석이 시간 속에서의 구체적인 삶의 체험을 통해 보충될 수 있다는 딜타일이 생각을 바탕으로 우리는 그의 인용문을 꼼꼼히 뜯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위 인용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첫 번째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서로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딜타이는 ①에서는 “낯선 것”이 해석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④에서는 “낯선 것이 있는 곳”이면 해석이 “요구된다”며 자기모순을 범한다. 어떤 것이 해석학도에게 낯설어, 즉 그것을 그가 경험한 바 없어 해석(이해)이 어렵다(불가능하다)면, 이는 우리가 더 이상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에게 이미 해석이 불가능한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해석학도인 ‘나’에게 “낯선 것”은 여하한 경우도 해석될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접하는 것이 모두 해석 가능하지 않다. 다시 말해, 우리는 부득이하게 해석이 어려운 것들(많은 텍스트들), 불가능한 것들을 현실 속에서 접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비록 어떤 것이 해석이 어렵거나 불가능해도 이것들로부터 우리가 고개를 돌릴 수는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즉, 인간은 누구나 이렇게 늘 해석을 요구하는 것들 앞에 ‘처해있는’ 존재다. 이런 점에서 ①은 해석학의 직무유기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②에서 확인할 수 있듯, 만일 “낯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해석학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③에서 딜타이 스스로 정확히 언급하고 있듯, 해석학은 근본적으로 최소한 다음 두 명제, 즉 “낯선 것이 ‘있는’ 텍스트”와 “낯선 것이 ‘없는’ 텍스트” “사이에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해보이기 때문이다. 즉, 해석 가능한 것과 해석 불가능한 것 ‘사이’에 바로 해석학의 고유한 역할이 부여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결과적으로 “해석은 이해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어떤 낯선 것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건 요구된다”는 ④가 ①보다 해석학의 정확한 위치를 정하는데 있어 더 중요한 언급으로 생각된다. 어떤 낯선 것이 만일 해석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을 우리는 “이해했다”고 볼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게중심이 어디로 기우느냐에 따라 논의는 다소 달라지겠지만, 그래도 자신이 최소한 해석학도라면 “해석 가능한 것” 또는 “해석이 불필요한 것”보다는 “해석 불가능한 것(해석할 수 없는 것)”, “해석을 요구하는 것”에 더 많은 고민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해석의 도정에서 봉착하는 많은 문제점들도 바로 이 후자 때문이다. <모음들>이나 <환자의 용태에 관한 문제>를 앞서 예로 들었던 것도, 왜 해석학은 해석 가능한 것에만 매달리는 것인가에 반문을 던지기 위해서였다. 해석학이 해석할 수 있는 것을 해석하며 해석학의 영역을 스스로 제한시키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사실 이런 결과로 ‘현재’는 낯설지만 그것을 통해 새롭게 ‘나’의 경험․체험의 폭을 넓혀갈 수 있는 길을 해석학은 원천적으로 봉쇄시켜왔던 것이다. 산(生) 시간, 생(生) 체험을 거부하고 “순전한 이상성에 관한 교설”로, 다시 말해 이론으로서의 해석학을 일반화시키는 데만 정력을 낭비했던 것이다. 딜타이가 말한 삶의 ‘현재적’ 체험이 그래서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하게 다가오며, ‘해석’의 현실을 무시하고 추상화된 해석학이 구체화되고 재충전되기 위한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III. 결론에 대신하여: 해석-하기에서 해석-쓰기로

우리의 선비들이 즐겨 쓰곤 했던 우안(愚案)이란 말이 있다. 유학자들이 글을 쓸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뜻으로 이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愚는 “어리석을 우”자로 ‘글쓴이’, 즉 자신을 겸손하게 표현하기 위한 것이며, 案(按)은 “생각․사고한다”는 뜻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그 글쓴이가 ‘무엇’에 대한 “이렇게(또는 저렇게)” 해석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해석”한 장본인은 물론 글쓴이 “나”다. 우안에서 우리는 글쓴이라는 주체가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체 없는 글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 앞에 해석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텍스트를 쓴 자도 주체요, 그것을 읽고 이해하는 자도 주체다. 두 주체 간에 우열은 물론 있을 수 없다. 있다면 해석의 현재성에 비추어 후자가 중심일 것이다. 물론 해석의 대상인 ‘무엇’은 텍스트일 수도, 세계일 수도, 사물일 수도,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안에서 중요한 것은 “해석의 권리”가 존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안이란 말 속에 글쓴이가 해석한 그것(말하거나 쓰고 있는 그것)이 결코 절대적인 것이라고 고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서양의 철학자들과 달리 우리의 성현들은 이렇게 남 앞에서 자신이 아는 것을 주장하거나 남과 겨루고 경쟁하기 위해 꾸며 사고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본 것, 느낀 것, 즉 깨달은 것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고백하듯 동학 또는 타인에게 전했다. 결국 이와 같은 글쓰기는 논리적 글쓰기가 아닌 마음의 글쓰기, 분석적 글쓰기가 아닌 현상학적 글쓰기, 기표적 수사로써의 글쓰기가 아닌 기의적 함축으로 충만한 글쓰기였을 것이다.
우리의 성현들의 글쓰기는 이렇듯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로 해석의 대상에 다가가, 그 속에서 자신을 깨치고, 그 결과를 글로 표현했다. 그것이 다름 아닌 ‘깨달음’의 글쓰기이다. ‘나의 깨달음’, ‘나를 깨우쳐감’으로서의 글쓰기.
때문에 그 깨침의 정도를 거짓 없이 동학에게 묻거나 또 스승에게 부끄럼 없이 자신의 현재 공부 상태를 알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말 속에는 언제나 대화 상대, 즉 독자가 예비되어 있으며, 이런 점에서 우안은 ‘대화적 글쓰기’의 단초이기도 한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우안은 철저히 듣는 자 또는 읽는 자를 배려한 글쓰기란 뜻이다.
여러 동양 고전에서 보면 저자가 없는 글쓰기도 상상할 수 없지만, 독자나 청자를 염두에 두지 않고 씌어진(설사 작자 자기 자신이 독자인 경우에도) 글쓰기도 흔치 않다. 동양에서는 글쓰기의 최종 목표를 이렇듯 서양에서처럼 개념을 통한 알음알이의 과시에 두지 않았다. 항상 우주와 내(我)가 하나가 되는 데 공부의 최종 목표를 두었던 것이 일반적이었고, 동양에서는 도(道)를 단지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그것을 본인 스스로가 이루는 것(自己完成)이 더 중요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도는 나의 현존재와 나의 것에 대한 소유욕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는 완성되었다고 볼 수 없다. 다시 말해 모든 집착을 놓아버린, 무명을 벗어버린 상태가 아니고서 도는 나의 마음자리 근처에 얼씬도 못한다. 한마디로, 우리의 성현들이 우안을 통해 우리의 후학들에게 남겨준 교훈은 ‘나의 깨달음’이 화두가 된 ‘대화’이다.
대화는 말일 때는 청자이고 글일 때는 독자가 전제된다. 말과 글을 통해 대중과 진정한 대화를 꿈꾼다면 우리는 이제 서양에서 그토록 중시하는 ‘대문자로 된 책’의 유령에 주눅들 이유가 하나도 없을 것 같다. 자유 해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이 대문자로 된 책의 유령을 퇴치해야 한다. 이유는, 그 책이 실제 존재하는 책이 아니라 전공자들만이 자신의 머리 속에서 그리고 있는 가상의 책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가상의 책이 우리가 ‘책들’에 접근하여 자유롭게 읽고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물론 해석 자체를 심리적으로건 실제적으로건 간섭한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전공자들은 자기 집단이 그리고 있는 대문자로 된 책의 이미지(像)에 걸맞지 않은 해석은 아예 이단시하기까지 하지 않는가.
어찌해야 하겠는가? 해석 주체, 해석자에게 주어진 ‘해석의 권리’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되찾을 것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대문자로 된 유령의 책은 참조해야 할 텍스트이지 해석자가 섬겨야할 텍스트가 아니라는 점이다. 섬겨야할 텍스트가 아니라 참조해야 할 텍스트이기에 자유-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해석은 기존의 텍스트를 창의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그 궁극 목표가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기존의 텍스트를 창의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있어 절대 잣대란 있을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있지도 않은 유령에 옥죄일 이유가 하등 없다. 그 유령을 시지프스처럼 스스로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 고통스러워할 필요가 없다. 해석자는 누구든 주어진 텍스트를 통해 자신의 ‘부처’를 창조해야 한다.
자신의 부처를 창조한 해석학도라면, 그는 이미 주석가나 수선공이 아니라 일종의 예술가일 것이다. 과거의 텍스트는 어디까지나 해석-하기의 재료이지 그곳으로 우리가 돌아가야만 하는 원형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해석이라면 이런 유습적 태도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해야 한다. 이러한 도전 과정을 통해서만 해석은 비로소 한 편의 ‘의미의 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해석이 의미 있는 시일 때, 우리는 그것을 비로소 진정한 해석, 창의적 재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고, 때문에 해석학이 바로 이를 목표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감히 주장해본다. 그렇지 않고는 해석학이 결코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불가(佛歌)에서 “부처를 보면 부처를 죽여라”는 말이 있다. 상(像)이나 문구에 얽매이지 말고 스스로 부처가 되라는 뜻이다. ‘자신만의 하늘’을 가지라는데, 그 하늘에 자유롭게 깨달음의 정도를 수놓으라는 데, 왜 주저하는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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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팔머,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이한우 옮김, 문예출판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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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G. Canguilhem, Le Normal et le Pathologique, P.U.F., 1966.
U. Eco, Interprétation et Surinterprétation, P.U.F., 1992.
M. Meyer, De la problématologie, Mardaga, 1986.








【Abstract】

Some Questions for the Hermeneutics

PARK, Tchi-Wan


Today, the theses and the theoretical books, that are related to 'Hermeneutics', are innumerable. But most of those are proceeding their discussion by the assumption of ideal premise, the 'possibility of interpretation'. If we accept such a tendency, we can possibly admit the 'Demand of Hermeneutic universality' or the General Hermeneutics' as Schleiermacher said. Dilthey may propose the nature of science being comparable to natural science as a standard of Hermeneutics under such circumstances as these. And it is certain that Heidegger's ontologization of Hermeneutics is also started from same premise.
But I think the 'possibility of interpretation' or the 'general Hermeneutics' is either a ideology or a trap of Hermeneutics, and theoretically or methodologically it cannot be a supporter of Hermeneutics. It is because i) it doesn't consider the specific characteristic of language and culture, ii) disregard problems that can be arosen at the moment of interpreting. Nevertheless, scholars of Hermeneutics overlook this situation, moreover they produce only articles dependant on that theory. They do not think over what the author is interpreting now. They do not agonize whether that work starts at the base of the possibility of interpretation, or explains the impossibility of interpretation.
That is to say, they have no intention to produce their subjective, special, free space of interpretation. Such a kind of case the interpretation is not a literal interpretation, nor annotation. Finally it will be nothing.

【Key Words】Interpretation, Deconstruction, Text, Doing-Interpretation, Writing-Interpretation, W. Dilth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