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자연화된 인식론과 인식론의 자율성

나뭇잎숨결 2022. 3. 4. 10:53

자연화된 인식론과 인식론의 자율성*

한 상 기(전북대학교 철학교수)

【주제분류】인식론, 분석철학
【주 요 어】자연화된 인식론, 전통적 인식론, 자율성, 선천성, 규범성, 정당화
【요 약 문】
이 논문의 주된 목적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는 자연화된 인식론들 사이에서 전통적 인식론에 대한 자연화된 인식론자들의 태도를 근거로 최소한의 공통 특징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전통적 인식론의 특징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 기본주장으로 간추릴 수 있다. 첫째, 인식론은 선천적 성격을 띤다. 둘째, 인식론은 규범적 성격을 띤다. 셋째, 인식론은 자율적 학문이다. 자연화된 인식론은 이 세 특징에 대한 태도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으며, 그래서 자연화된 인식론은 대략적으로 전통적 인식론의 이러한 특징들 중 적어도 하나 또는 그 이상을 거부하는 인식론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세 특징들 중 어떤 특징들을 거부하는가에 따라 자연화된 인식론자들은 저마다 다른 입장을 취한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궁극적으로 자연화된 인식론자들이 첫 번째 기본주장과 두 번째 기본주장에 대해서는 저마다 다른 태도를 취할 수 있지만, 세 번째의 인식론의 자율성 주장에 대해서만큼은 공통으로 반대 입장을 취한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1. 머리말
최근 인식론에서는 인식론을 “자연화”(naturalization)하려는 프로그램이 계속해서 인기를 끌어왔다. 인식론의 주제인 “지식”도 다른 자연 현상들처럼 자연의 일부이므로 인식론은 자연과학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하고, 그에 따라 인식론도 자연과학들처럼 경험적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기본 착상이다. 그러나 이 자연화 프로그램을 이행하는 단계에 이르면, 전통적 인식론을 전면적으로 폐기하자는 입장에서부터 부분적으로 수용하자는 입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른바 자연화된 인식론자들(naturalized epistemologists) 사이에서도 “인식론의 자연화”의 내용과 방법에 대해 일반적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며, 이로 인해 모든 자연화된 인식론자들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는 단일 특징을 찾는 일은 매우 어렵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실제로 자연화된 인식론자 자신들뿐만 아니라 자연화된 인식론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는 인식론자들 사이에서도 자연화된 인식론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이견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자연화된 인식론자들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는 단일 특징을 자연화된 인식론의 출발 배경에 대한 검토를 통해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자연화된 인식론이 전통적 인식론에 대한 거부 내지 대치, 혹은 보완 주장으로부터 비롯되었으므로 전통적 인식론과의 관계 속에서 그러한 특징을 찾으려 한다.
필자는 전통적 인식론이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 독특한 특징이나 측면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1) 인식론적 주장들이 선천적(a priori) 성격을 띤다는 주장, (2) 인식론이 규범적 성격을 갖는다는 주장, (3) 인식론이 자율적 학문이라는 주장. 자연화된 인식론은 이 세 특징에 대한 태도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으며, 그래서 자연화된 인식론은 대략적으로 전통적 인식론의 이러한 특징들 중 적어도 하나 또는 그 이상을 거부하는 인식론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세 특징들 중 어떤 특징들을 거부하는가에 따라 자연화된 인식론자들은 저마다 다른 입장을 취한다. 어떤 자연화된 인식론자들은 이 세 특징 모두를 거부하고, 또 어떤 자연화된 인식론자들은 두 특징을 거부하며, 또 어떤 자연화된 인식론자들은 세 특징 중 한 가지만을 거부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통적 인식론을 전면적으로 폐기하고 자연과학의 일부로서의 인식론을 할 것을 주장하는 콰인(W.V.O. Quine)식의 극단적인 입장에서부터 인식론을 자연화하기에 앞서 전통적 인식론의 선천적 방법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골드맨(A. Goldman)식의 온건한 입장도 있을 수 있게 된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궁극적으로 자연화된 인식론자들이 (1)과 (2)에 대해서는 저마다 다른 태도를 취할 수 있지만, (3)의 인식론의 자율성 주장에 대해서만큼은 반대 입장을 공통적으로 취한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우선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는 이른바 자연화된 인식론들 중 콰인의 극단적 입장과 골드맨의 온건한 입장을 자연화된 인식론의 대표적 입장으로 간주한 다음, 두 입장에 대한 검토를 통해 자연화된 인식론이 궁극적으로 인식론의 자율성 주장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공유하고 있음을 보일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필자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자연화된 인식론들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특징이 제공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나아가 자연화된 인식론의 성격과 내용에 대한 그 동안의 많은 논의들에 돌파구가 마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 전통적 인식론
전통적 인식론은 한 마디로 정당화 중심적 인식론이다. 이러한 상황은 대체로 플라톤이래 지식을 “정당화된 옳은 신념”으로 분석해온 전통에서 비롯된다. 지식을 이루는 세 요소, 즉 진리, 신념, 정당화 중 특별히 인식적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정당화 하나밖에 없다. 진리는 의미론적-형이상학적 개념이고, 신념은 심리학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당화 중심적 인식론은 우선적으로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 하나는 규범적 성격을 갖는 규범학문이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천적 방법론(a priori methodology)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정당화(정당성)는 본질적으로 규범적 혹은 평가적 개념이며, 이로 인해 지식 개념 역시 규범적 개념이 되고, 나아가 인식론 자체도 규범학문이 된다. 그래서 전통적 인식론은 과학들처럼 그저 세계가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기술하거나 설명하는 사실학문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에 관한 신념에 도달할 때 우리가 어떻게 도달해야만 하는가를 연구하는 규범학문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전통적 인식론이 세계에 관한 신념들을 어떻게 형성해야 하는가에 대한 규범을 제공하려 한다면, 그 규범은 경험적으로 확립될 수 없다. 세계에 관한 신념은 경험적 탐구 내용으로 이루어지는데, 경험적 탐구 내용을 지배하는 규범을 또 다시 경험적으로 확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적 인식론이 제공하는 정당화 규범은 선천적으로 알려질 수밖에 없으며, 그에 따라 인식론의 일반적 방법도 과학의 경험적 방법이 아닌 선천적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따라서 전통적 인식론은 다음과 같이 특징지을 수 있다. 전통적 인식론은 규범적 인식론이자 선천적 인식론이다. 선천적 인식론은 선천적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경험적 방법을 사용하는 과학의 영향을 받을 필요가 없다. 따라서 전통적 인식론은 생각하고 반성할 수 있는 조건만 주어지면 과학과 상관없이 추구할 수 있는 자율적 학문이다. 이는 인식론과 과학 사이에 선명한 경계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철학과 과학의 단절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전통적 인식론은 단순히 철학과 과학의 단절을 함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최고 대법관의 특권적 입장에서 모든 과학의 주장들이 정당화되는지 판결할 권한을 갖는다. 이때 정당화의 기준은 과학의 결과들과 무관하게, 혹은 그에 선행해서 제시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전통적 인식론은 제일철학(first philosophy)으로서의 위상을 갖는다.
이런 식의 전통적 인식론상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로크, 흄, 칸트, 논리 실증주의자들 등 철학사에 등장하는 유명 철학자들 대부분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는 자신의 인식론적 탐구를 위해 그저 그의 안락의자에 앉아 명상과 반성을 시작하였고, 가능한 가장 강한 의심에 살아남는 명제만을 확실한 지식으로 간주하였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실존한다”(cogito, ergo sum)는 명제는 선명성과 분명성(clarity and distinctness)을 지니고 있는 명제였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접근 방식은 사실에 관해서는 물론이고 인식적 가치에 관해 그가 이성주의적 요소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이 명제가 옳다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 경험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그저 안락의자에 앉아 사변을 통해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전통적 인식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본주장으로 압축될 수 있다.
(1)전통적 인식론은 기본적으로 선천적 인식론이다. 우리가 신념의 평가와 수정의 지침이 되는 인식적 원리들에 도달할 때 우리는 경험적 탐구를 통해 도달하지 않고 선천적 방법을 통해 도달한다.
(2)전통적 인식론은 본질적으로 규범적이다. 정당화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인식론은 우리의 신념들에 대한 평가의 표준이나 규범을 제공한다. 이렇게 해서 인식론은 경험적 연구와 다른 것으로 생각되는데, 경험적 연구들은 일차적으로 기술적(descriptive)이다. 경험적 연구들은 사실들이나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확인하고, 사실들 사이의 연관을 설명하는 이론을 제공하려 한다. 예컨대 인지심리학은 우리가 어떤 신념들에 어떻게 이르게 되는지를 말해줄 것이다. 하지만 전통적 인식론은 우리가 어떻게 믿게 되는가의 문제와는 관계가 없으며,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3)전통적 인식론은 자율적 학문이다. 즉 전통적 인식론은 독립적인 학문 분과이다. 인식론의 주제와 방법론은 둘 다 경험 과학들의 진보와 무관하다. 그래서 비록 데카르트가 당대의 과학에 관해 많이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그 과학과 무관하게 그의 사변을 전개했던 것이다. 만일 인식론이 과학들과 무관하다면, 의심불가능한 신념들만을 지식의 실례로 승인하라는 그의 명령은 경험과학의 발전들로 인해 위태롭게 되지 않는다.

3. 콰인의 자연화된 인식론과 인식론의 자율성
3.1. 자연화된 인식론을 주창하는 콰인의 논증
인식론자들 사이에서 20세기 후반 자연주의적 인식론의 전기를 마련한 논문으로는 ①1969년 콰인의 “자연화된 인식론”(Epistemology Naturalized)과 ②1967년 골드맨의 “앎에 대한 인과이론”(A Causal Theory of Knowing)이 꼽히는 게 보통이다. 이 중 콰인의 논문은 전통적 인식론에 대한 전면적 거부를 표방하고 나섰지만, 골드맨은 이 논문 및 후속 논문들을 통해 전통적 인식론과의 상보적 협동을 제안하고 있다. 먼저 이 장에서는 콰인의 자연화된 인식론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콰인은 앞에 언급한 논문에서 전통적 인식론을 실패한 프로그램으로 규정하고, 인식론에서 인식적 정당화 및 그에 따른 선천적 방법론의 역할을 전면적으로 거부하였다. 콰인에 따르면, 전통적 인식론의 주요 관심사는 정당화이며, 전통적 인식론은 데카르트식 확실성 형태로 정당화를 추구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가망 없는 일이며, 그래서 전통적 인식론자들의 노력을 다른 노력으로 대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콰인의 논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전통적 인식론은 다음 두 가지 목표를 지향해왔다(데카르트적 기초론).
①감각경험에 관한 오류불가능한 전제들로부터 연역을 통해 물리적 세계에 관한 신념을 정당화하는 일(이론적 기획).
②물리적 대상에 관한 문장을 감각경험에 관한 문장들로 번역하는 일(개념적 기획).
2. 이 두 임무 모두 달성될 수 없다.
3. 만일 전통적 인식론이 ①과 ②를 지향하고, ①②모두 달성될 수 없는 것이라면, 전통적 인식론은 폐기되어야 한다.그러므로
4. 전통적 인식론은 폐기되어야 한다.
5. 만일 전통적 인식론이 폐기되어야 한다면, 인식론자들은 대신 심리학을 연구해야 한다.그러므로
6. 인식론자들은 대신 심리학을 연구해야 한다.

콰인의 논증을 이런 식으로 정리하고 나면,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첫 번째 문제는 4가 옳다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5를 인정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김재권은 왜 콰인이 자연화에 대한 그의 천거와 규범적 인식론의 거부를 결부시키는지 의아해한다. 그는 “만일 규범 인식론이 가능한 탐구가 아니라면, 어째서 이른바 인식론자가 심리학이 아니라 이를테면 유체역학이나 조류학으로 전환하면 안 되는가?”라고 묻는다. 요컨대 설령 전통적 인식론이 폐기되어야 한다는 콰인의 진단이 옳다고 하더라도, 인식론이 심리학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전제 1에 의해 제기된다. 콰인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전통적 인식론 내에서도 전통적 인식론에 대한 콰인의 규정보다 훨씬 넓은 범위의 탐구들이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반발은 데카르트식 기초론에 대한 콰인의 진단에 도전하자는 것이 아니다. 데카르트식 인식론에 관한 한 콰인에 불일치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데카르트식 기초론자의 기획이 전통적 인식론에 존재하는 요소 전부라는 콰인의 가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올스튼(W. Alston)의 최소 기초론도 있고, 정합론과 신빙론도 있다. 이런 이론들 모두 정당화에 대해 데카르트식 기초론의 모델을 채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콰인의 전통적 인식론상은 지나치게 제한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3.2. 제일철학에 대한 견해
앞 절에서 전통적 인식론에 대한 콰인의 규정이 지나치게 제한적임을 지적하였다. 그렇지만 콰인의 규정이 올바른가 여부는 제쳐두고, 그의 생각을 따라 자연화된 인식론을 제창하면서 그가 전통적 인식론의 성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제일철학을 기초로 하여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이런 생각이야말로 그가 자연화된 인식론을 제창한 직접적 배경 내지 동기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콰인이 전통적 인식론을 이해한 바에 따르면, 전통적 인식론은 그가 제일철학이라 부르는 것에 종사한다. 과학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전통적 인식론자는 우리가 세계에 관한 우리의 신념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원리들을 확인하고 옹호하려 한다. 전통적 인식론자는 먼저 우리로 하여금 세계에 관한 우리의 신념들을 진정한 지식의 실례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로 분류할 수 있게끔 해주는 규범이나 원리들을 확인하려 한다. 그 다음에 전통적 인식론자는 이러한 원리들을 지식과 정당화의 합법적 원리들로 옹호하려 한다. 콰인은 이 두 가지 상호 관련된 임무를 제일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전통적 인식론자는 세계에 관한 다른 경험적 신념들에 의존할 수 없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아직 어떤 경험적 신념들이 신뢰할 만한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 인식론은 일상적이고 과학적인 탐구들에 의해 제공되는 지식에 개념적으로 선행하기 때문에 제일철학이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경험적 신념들 중에 어떤 신념을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원리나 방법들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예컨대 데카르트가 그의 인식론적 성찰들을 과학을 견고하고 지속적인 토대에 두기 위하여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인식론은 어떤 신념들이 진정으로 정당화되는 신념들이고 어떤 신념들이 정당화되지 않는 신념들인지를 알려주는 원리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 임무는 원리들 자체가 합법화되거나 옹호될 때에야 비로소 완성된다. 이 옹호는 또한 세계에 관한 우리의 신념들과 독립적으로, 그리고 과학의 경험적 방법들에 대해 전혀 의존하지 않고 완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통적 인식론자의 방법들은 선천적이다. 전통적 인식론의 임무는 우리가 자연계에 우리의 주의를 돌리기 전에 완성되어야 한다. 인식론은 과학에 선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인식론은 과학에 우선해야 한다.
그러나 콰인은 바로 이 제일철학 개념, 즉 인식론이 과학에 선행해야 한다는 개념을 거부한다. 그는 인식론이 논리적으로나 개념적으로 과학에 선행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거부한다고 할 때 그는 우리가 정당화나 지식의 원리를 확인하고 옹호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원리들이 과학 밖에, 그리고 과학에 선행한다는 전통적 인식론자의 견해를 거부한다.
콰인에 따르면, 전통적 인식론은 유감스럽게도 이겨낼 수 없는 짐을 싣고 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전통적 인식론은 강한 형태의 기초론 틀 내에서 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한다. 따라서 전통적 인식론은 먼저 오류불가능한 기초신념들을 확인하고, 그 다음에 세계에 관한 좀더 복잡한 신념들을 이 기초신념들로부터 오류불가능한 방식으로 도출해내려 한다. 전형적인 기초신념들 집합은 우리 자신의 감각경험에 관한 우리의 오류불가능한 신념들이다. 감각경험에 관한 이러한 신념들로부터 우리는 세계에 관한 좀더 흥미로운 신념들을 연역해야 한다. 이를테면 “나는 붉고 둥근 조각에 대한 인상을 갖는다”로부터 우리는 “내 앞에 사과가 있다”를 연역해야 한다. 하지만 콰인은 전통적 인식론이 이 일을 달성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전통적 인식론자들은 세계에 관한 우리의 신념들이 우리의 감각경험에 관한 신념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통적 인식론은 이 안에서(in here), 즉 우리 정신 속으로부터 저기 바깥(out there), 즉 자연계에 도달하는 방식을 증명하지 못한다. 콰인은 우리의 정신 상태의 내용들을 기초로 하여 세계에 관한 우리의 신념들을 정당화하는 과정을 합리적 재구성(rational reconstruction)이라고 말한다. 그는 합리적 재구성을 시도하는 전통적 인식론 대신 심리학으로 대치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째서 모두 이런 식의 창조적 재구성, 이런 식의 가공의 것에 천착하는가? 감각 기관들의 자극은 누구라도 궁극적으로 그의 세계상에 도달하는 경우에 거쳐야 할 증거 전부이다. 어째서 이 구성이 실제로 진행되는 방식 바로 그것을 보면 안 되는가? 어째서 심리학을 받아들이면 안 되는가?

이렇게 해서 인식론을 심리학으로 대치해야 한다고 주장한 다음, 콰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식론, 혹은 “인식론 비슷한 어떤 것”이 여전히 계속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전통적 인식론과 새롭게 심리학화된 “인식론”의 연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대목에서 비록 새로운 배경과 명료화된 격위에서이긴 하지만 인식론이 여전히 진행된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식론, 혹은 그 비슷한 어떤 것은 그저 심리학의 한 장에 속하며, 그래서 자연과학의 일부가 된다. 인식론은 자연 현상, 즉 물리적인 인간 주체를 연구한다. 이 인간 주체는 실험적으로 제어된 어떤 입력―예컨대 다양한 빈도로 나타나는 어떤 유형의 발광―을 받으며, 때가 되면 그 주체는 3차원적 외부 세계 및 그 역사에 대한 기술을 출력으로 내놓는다. 미약한 입력과 맹렬한 출력 사이의 관계는 약간은 언제나 인식론을 자극했던 것과 똑같은 이유들 때문에, 즉 증거가 이론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론이 이용할 수 있는 어떠한 증거도 초월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가 연구하도록 자극을 받는 관계이다....그러나 이전의 인식론과 이 새로운 심리학적 배경의 인식론적 기획 사이의 두드러진 차이는 우리가 이제 경험적 심리학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인식 주체들은 바로 다른 어떤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 현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동물계의 나머지를 연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구할 수 있다. 우리의 생물학적 속성이나 물리적 속성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신념이나 표상을 연구하는 학문은 심리학이다. 콰인은 더 나아가 이전의 인식론과 새로운 인식론이 대단히 비슷한 이유들―이론이 증거와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에 의해 자극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전통적 인식론과 자연화된 인식론은 둘 다 세계에 관한 우리의 신념들의 기초를 이해하려는 욕구가 동기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연화된 인식론은 전통적 인식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 인식론자들은 우리의 세계상을 정당화하려고 하거나, 또는 흄의 경우에 그런 정당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전통적 인식론자들은 우리가 이 세계상에 대한 훌륭한 이유를 가지며, 우리가 그 세계상을 믿는 일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콰인의 자연화된 인식론에서는 정당화나 합리성 문제를 제기하는 규범적 물음들이 더 이상 제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콰인의 관심사는 감각 자극으로부터 물리적 세계에 관한 우리의 신념들에 이르는 인과의 고리를 발견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통적 인식론자들의 관심사가 규범적인 반면에 콰인의 인식론은 비규범적 즉 기술적인 것처럼 보인다. 더 나아가 정당화를 설명하는 전통적 인식론자들의 주요 방법이 선천적인 것이었던 데 비해 콰인의 인식론에서는 과학의 경험적 방법을 사용한다. 따라서 콰인의 제안을 따라 인식론을 자연화한다면, 인식론은 그 규범성과 선천적 방법론을 모두 상실한 채 경험과학이 되기 때문에 사실상 제거될 것이다.

3.3 콰인의 자연화된 인식론과 인식론의 선천성, 규범성, 자율성
이제 전통적 인식론의 세 가지 특징과 관련해서 콰인의 새로운 인식론이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 알아보자.
첫째, 인식론은 기본적으로 선천적 인식론이라는 주장.
이 주장에 대하여 콰인은 명백히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전통적 인식론에 의하면, 인식론은 우리의 경험적 신념들 중에 어떤 신념들이 정당화되는지를 알려주는 원리들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이 원리들 자체는 세계에 관한 우리의 경험적 신념들과 독립적으로, 그리고 그에 선행해서 알려져야 한다. 따라서 전통적 인식론은 경험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선천적 방법론을 채택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선천적 인식론이다. 그러나 콰인에 의하면 정당화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런 식의 전통적 인식론은 과학적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심리학 같은 학문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콰인이 주창하는 심리학화된 새로운 인식론에서는 전통적 인식론의 선천적 방법론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콰인의 새로운 인식론에서는 유일한 관심사가 감각자극으로부터 물리적 세계에 관한 신념들에 이르는 인과적 과정을 발견하는 것이 전부인데, 이러한 일은 과학의 경험적 방법을 통해서 달성된다. 따라서 전통적 인식론에서처럼 인식론이 과학에 선행한다거나 우선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의 후천적 방법과 무관하게 진행되는 인식론은 콰인의 경우에 사실상 없는 셈이다.
둘째, 인식론은 본질적으로 규범적이라는 주장.
이 주장과 관련해서는 약간 애매한 점이 있다. 얼핏 보기에 콰인의 새로운 인식론에서는 정당화나 합리성 문제를 제기하는 규범적 물음들이 더 이상 제기되지 않으며, 그래서 규범적 인식론은 콰인이 주창하는 심리학화된 인식론에서 설 자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을 때 콰인을 비판하는 철학자들은 규범적이지 않은 인식론을 과연 인식론이라고 불러야 하는가를 문제삼는다. 이들에 의하면 본질적으로 규범성을 상실한 인식론은 인식론이라는 이름을 가질 권리가 없다. 따라서 콰인의 자연화된 인식론은 규범적 차원을 보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식론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콰인의 입장에서 이러한 반론에 대해 어떻게 응수할 수 있을까? 콰인의 입장에서는 심리학과 같은 과학이 순전히 기술적이라는 주장이 전혀 옳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다. 과학 역시 합법적 주장과 불법적 주장을 구별하기 위한 원리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콰인 자신의 견해에 따르면, 자연화된 인식론은 다른 어떤 과학 분과와 마찬가지로 진리와 이해를 목표로 하는 한에 있어서 규범적 성격을 보유한다. 콰인의 말로 규범적인 것은 “진리 추구 공학”이다. 예컨대 심리학은 물리적 세계에 관한 우리의 신념을 산출하는 인과적 메커니즘을 확인하려 한다. 이 일은 순전히 기술적 기획인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콰인은 우리가 신념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도 관심을 갖는다. 좀더 정확히 말해 그의 관심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에 더 가까이 가게 만드는 신념들에 있으며, 진리에 더 근접해가고 있다는 증거는 예측가능성의 증가이다. 따라서 정상적인 지각 과정에 의해 야기된 신념들은 그것들이 우리의 전체적인 과학적 세계상에 기여하는 정도만큼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나 점성술에 의해 야기된 신념들보다 낫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각의 결과로서 형성된 신념들을 승인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과학이 지각적 신념들이 자연적 질서의 일부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자연화된 인식론의 규범적 성격은 과학 자체의 규범적 성격으로부터 도출된다. 따라서 콰인의 자연화된 인식론 역시 전통적 인식론에서처럼 규범적 성격을 갖는다고 콰인은 주장하는 셈이다. 단지 신념 평가를 위한 규범이나 원리가 과학과 무관하게, 혹은 과학에 선행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승인하는 규범이나 원리들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인식론의 규범적 성격에 대한 콰인의 이러한 응수는 미봉책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우리가 전통적 인식론을 규범적 인식론이라고 할 때, 이 규범적이라는 말이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기 때문에 그렇다. 전통적 인식론은 정당화의 규범이나 원리들을 확인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바로 그 규범이나 원리들을 합법화하려고 한다. 전통적 인식론자의 중요한 역할은 신념 평가의 원리들을 옹호하는 것이다. 특히 전통적 인식론자는 다양한 회의적 의심들에 답해야 한다. 그런데 회의주의자는 어떤 신념-형성 절차들이 신빙성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 회의주의자는 심지어 우리가 우리의 신념-형성 절차들에 의해 어떻게 신념을 얻게 되었는지에 대해 과학적 설명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회의주의자는 그러한 절차들이 애초에 신빙성이 있다거나 합법적이라는 것을 우리가 왜 믿어야 하는지 묻는다. 적당한 신념-형성 절차들을 확인하는 규범을 찾기 위해 콰인이 과학으로 눈을 돌린 일은 여전히 그러한 규범들을 승인하는 일에 대해 어떤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지 의아해하게 만든다. 예컨대 우리는 지금 우리의 지각적 신념들의 형성에 대해 꽤 자세하게 인과적 설명을 할 수 있다. 다양한 과학들은 우리의 지각적 신념들에 대해 인과적 설명을 제공한다. 그러한 과학적 배경을 감안하거나 가정하면, 과학은 우리가 우리의 지각적 신념들을 신뢰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비록 과학으로부터 물려받은 이 규범들을 통해 콰인이 인식론이 왜 규범적 학문인지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해도, 그는 이 규범들이 왜 그 자체로 정당화되거나 승인할 만한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콰인은 자신의 자연화된 인식론이 규범적 성격을 갖는다고 주장하지만, 이때의 규범적 성격은 전통적 인식론을 규범적 인식론이라고 할 때와는 다른 의미를 띤다고 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콰인식의 규범성이 진정한 규범성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인식론이 자율적 학문이라는 주장.
콰인의 자연화된 인식론은 인식론이 주제와 방법 모두에서 경험과학들과 무관하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따라서 콰인은 인식론이 과학과 상관없이 추구할 수 있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학문이라는 전통적 인식론의 주장을 거부한다. 콰인이 이렇게 인식론의 자율성을 거부하는 데에는 그의 자연주의적 신조가 동기로 작용하고 있다.
자연주의는 두 가지 핵심 신조를 지니고 있는데, 하나는 존재론적 신조이고 하나는 인식론적 신조이다. 무엇이 실존하는가에 관한 신조인 존재론적 신조는 실존하는 모든 것이 자연적이라고 주장한다. 존재론적 신조에 의하면, 사물과 그 속성들은 그것들이 정확히 자연적 대상이나 자연적 속성인 정도만큼 실재적이다. 그러나 이 말은 아직 어떤 대상이나 속성들이 자연적인 대상이나 속성들인지를 말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인식론적 신조는 자연적인 것이 자연과학들에 의해 제시되는 설명이나 이론들에서 묘사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콰인도 자연주의가 “실재가 확인되고 기술되는 것은 과학 자체 내부에서이지 어떤 선행 철학에서가 아니라는 인식”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자연과학의 방법들을 통해 자연적인 것을 파악하고 발견하며 확인하는데, 이 방법들에는 관찰, 가설과 예측, 실험이 포함된다. 이 방법들의 독특한 특징이랄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경험적 방법이라는 것, 혹은 우리의 경험에 의존적인 후천적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콰인의 자연화된 인식론은 선천적 추론에 의해 인식론적 원리들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전통적 인식론의 생각과 양립불가능하다. 콰인의 자연화된 인식론에서 중요한 것은 자연과학이 그 방법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이다. 자연적 대상과 속성들은 이런 식으로 해서 과학적 방법에 의한 연구나 탐구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어떤 대상이나 속성이 과학적 방법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그래서 자연적 대상이나 속성으로 간주될 수 있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어떤 대상이나 속성은 명료한 자연적 대상이나 속성으로 환원가능하거나, 혹은 그 대상이나 속성이 명료한 자연적 대상이나 속성들에 수반될 수 있다. 환원가능성과 수반은 대상과 속성들 집단 사이의 서로 다른 두 관계이다. 환원은 어떤 속성이나 대상을 자연적 속성이나 대상의 기초가 되는 다른 속성이나 대상과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매우 강한 관계이다. 어떤 속성이나 대상은, 만일 그것이 다른 어떤 속성이나 대상들과 동일시될 수 있다면, 환원가능하다. 예컨대 물은 단지 H2O에 지나지 않는다. 수소와 산소는 전형적인 자연적 대상들이기 때문에 물이 그러한 자연적 대상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물 역시 자연적 대상들이다. 좀 느슨하게 말하면, 환원가능성은 한 집단의 대상이나 속성들과 다른 집단의 대상이나 속성들이 정확하게 대응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대응은 보통 이른바 “교량법칙”(bridge laws), 즉 서로 다른 영역이나 집단 사이의 연관을 기술하는 법칙들로 표현된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한 영역을 다른 영역으로 환원될 수 있게 만드는 기준을 발견하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며, 실제로는 매우 복잡한 과정일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자연화된 인식론자들은 인식적 속성들이 다른 자연적 속성들에로 환원가능하기 때문에가 아니라 자연적 속성들에 수반하기 때문에 자연적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수반 관계는 환원 관계보다는 약한 관계이다. 수반은 한 영역과 다른 영역을 연관시키는 법칙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식적 정당성이 수반적 속성이라고 해보자. 그러면 정당성과 연관되는 다른 어떤 기초적 속성들이 있을 것이다. 이제 이러한 기초적 속성들을 가진 모든 것은 또한 정당성이라는 속성을 갖는다. 게다가 만일 정당성이라는 속성이 상실되거나 변한다면, 그것은 기초적 속성들에서의 어떤 변화이다. 그렇다면 대략적으로 말해 수반이란 인식적 속성들이 어떤 자연적 속성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그 속성들과 동일시되지는 않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중 콰인의 자연화된 인식론은 콰인 자신이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환원가능성에 좀더 무게를 두는 것으로 보인다. 콰인은 인식적 속성들이 경험과학들에 의해 기술되는 속성들과 동일시될 수 있는 바로 그 정도만큼만 승인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콰인식의 자연화된 인식론은 전통적 인식론과 명백한 차이가 있으며, 전통적 인식론에 대한 그의 단호한 거부에서 이러한 점이 잘 드러난다. 콰인의 자연화된 인식론은 인식론이 과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콰인은 인식론이 먼저 우리가 지식이나 정당성을 발견할 수 있는 지점을 표시하고 과학이 얻을 수 있는 성과를 수확함으로써 그 뒤를 따른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대신 콰인은 과학이 먼저 우리를 지식으로 이끌며, 인식론은 단지 자의식이 강하게 된 과학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콰인에 따르면, 인식론은 과학이 왜 그렇게 성공적인지 설명하려고 함으로써 과학 뒤를 따른다. 만일 전통적 견해가 인식론이 과학 밖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즉 만일 인식론이 지식이나 정당성의 본성에 관한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과학과 무관하게 시작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콰인은 이에 대해 단호하게 거부하는 태도를 보일 것이다. 따라서 인식적 속성들이 규범적 속성들이고, 이 규범적 속성들이 순수한 기술적 속성들과 다르다는 전통적 인식론의 견해는 콰인의 자연화된 인식론에서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결과적으로, 콰인은 규범적 속성들의 기술적 속성에로의 환원가능성을 기초로 하여 인식적 속성들의 존재론적 독립성을 부정하고, 나아가 방법론 및 주제의 독립성까지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콰인은 전통적 인식론의 세 측면 중 인식론이 선천적 인식론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반대하고 있고, 인식론이 규범적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규범성을 인정하지만 전통적 인식론자들이 주장하는 의미의 규범성이 아니라 과학 내부에서 발생하는 규범성을 주장하며, 인식론이 자율적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환원가능성에 기초하여 명백히 반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통적 인식론의 특징들에 대한 콰인의 이러한 반응들 중 다른 자연화된 인식론자들, 특히 골드맨의 자연화된 인식론과 유일하게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반응이랄 수 있는 것은 세 번째 주장에 대한 반응밖에 없다. 이제 좀더 온건한 형태의 자연화된 인식론이랄 수 있는 골드맨의 입장에 대해 알아보자.

4. 골드맨의 자연화된 인식론과 인식론의 자율성
4.1. 수반 신조 및 신빙론
콰인의 자연화 전략은 어떤 의미에서 소극적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전통적 인식론의 기획이 가망 없는 일이었다는 진단을 근거로 해서 인식론을 자연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적극적으로 왜 자연화가 필요한지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이에 비해 골드맨식의 자연화된 인식론자들은 형이상학적 신조로서의 인식론적 자연주의를 명시적인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세계의 존재론적 구조에 관한 형이상학적 신조를 출발점으로 해서 자신들의 자연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골드맨은 인식적 정당성이라는 규범적 속성이 비규범적인 자연적 사실들에 수반된다(supervene)는 사실을 명백한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이때 규범적 속성이 비규범적인 자연적 속성들에 수반된다는 말은 대략적으로 어떤 대상이 어떤 규범적 속성을 갖는지 아닌지가 그 대상의 비규범적인 자연적 속성에 의존한다거나 혹은 그 자연적 속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이다. 또는 달리 표현해서 그 대상들이 자신들의 비규범적인 자연적 속성들에 의해서 그런 규범적 속성들을 갖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비규범적인 자연적 속성들에서 차이가 없다면, 규범적 속성들에서도 차이가 없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수반 신조는 인식론의 임무에 대해서도 중요한 사실을 함축한다. 만일 인식적 정당화가 비규범적인 자연적 사실들에 수반되는 것이라면, 인식론의 임무는 어떤 자연적 속성들을 지닌 신념이 필연적으로 정당화된 신념이 되는 그런 자연적 속성들이 어떤 것인가를 확인하는 일이다. 이렇게 되면 다음 두 개의 자연주의를 나눌 수 있다.

인식적 가치에 관한 자연주의(형이상학적 신조)
개개의 모든 신념의 인식적 격위는 그 신념의 비규범적인 자연적 속성들에 수반된다.

분석적 자연주의(인식론의 목표에 관한 신조)
인식론의 임무는 인식적 정당성이 어떤 비규범적 속성들에 수반되는가를 비규범적인 자연적 용어들로 밝히는 일이다.

이처럼 수반 신조 및 그에 따른 분석의 성격을 설정한 후에 골드맨은 인식적 정당화에 대한 분석에 착수한다. 그런데 이 분석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될 수 있다. 첫째는 정당화됨이라는 속성이 수반되는 비규범적 속성이 오직 하나만 있다고 주장하는 분석이 있을 수 있고, 둘째는 그런 속성들이 여러 개 있다고 주장하는 분석이 있을 수 있다. 전자를 “일원론적 분석”(monistic analysis)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다원론적 분석”(pluralistic analysis)이라 부를 수 있다.
골드맨은 일원론적 분석을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정당화된 신념을 정당화되게 만드는 하나의 유일한 비규범적 속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골드맨이 초기에 그러한 비규범적 속성으로 제시한 것은 우리의 신념과 진리 사이에 적절한 인과적 연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p라는 S의 신념은 p라는 신념과 사실을 연결시키는 인과적 연관이 있을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정당화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골드맨의 이러한 초기 분석은 지각에 의한 지식의 경우에는 그럴 듯했지만, 일반적인 것에 대한 지식, 수학적 지식 등의 경우에는 그럴 듯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중에 골드맨은 이 인과적 이론을 한층 더 세련된 형태로 발전시켜 신빙론(reliabilism)을 제시한다. 그의 신빙론에 따르면, 유일한 하나의 비규범적 속성이란 신빙성 있는 인지 과정(reliable cognitive process)에 의해 산출됨이라는 속성이다.

S가 p라고 믿는 일이 정당화된다 iff
p라는 S의 신념이 신빙성 있는 인지 과정에 의해 산출된다.

여기서 “신빙성”(reliability)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골드맨은 먼저 혼란된 추론, 소망적 사고, 감정적 집착에의 의존, 단순한 직감이나 추측, 성급한 일반화 등의 과정과 지각적 과정, 기억, 훌륭한 추론, 내성 등의 과정을 비교한다. 두 과정은 첫 번째 과정들의 집합이 대부분 그른 신념들을 산출하는 반면에 두 번째 과정들의 집합은 대부분 옳은 신념들을 산출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래서 두 번째 과정들은 신빙성이 있는 반면에 첫 번째 과정들은 그렇지 않다. 요컨대 신빙성 있는 과정이란 그른 신념이 아니라 옳은 신념들을 산출하는 경향이 있는 과정들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골드맨은 인식적 정당성이 수반되는 비규범적 속성을 “신빙성 있는 인지 과정”이라고 밝힘으로써 수반 신조 및 그에 따른 인식론의 목표를 충족시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4.2. 골드맨의 온건한 자연화된 인식론
이렇게 보면 골드맨은 전통적 인식론에 대해 콰인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콰인이 환원가능성 신조를 바탕으로 인식론의 선천성과 자율성을 부정하고, 나아가 전통적 의미의 규범성까지 부정했다고 한다면, 골드맨은 수반 신조를 바탕으로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하지만 골드맨은 전통적 인식론의 세 특징과 관련하여 콰인과는 확연히 다른 주장을 편다. 이제 이런 주장을 펴게 되는 골드맨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정당화 이론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골드맨은 1979년 “정당화된 신념이란 무엇인가?”라는 논문을 발표했다가 그 후 신빙론에 대한 보완책을 내놓으면서 자신의 정당화 이론을 다음과 같이 세 단계로 나누었다.

첫 번째 단계는 신념이 정당화된다는 것과 그 신념이 올바른 정당화 규칙(J-rules) 체계에 일치한다는 것 사이의 관계를 지적하는 일이다. 두 번째 단계는 어떤 J-규칙들 체계의 올바름에 대한 기준을 밝히는 일이다. 정당화 이론의 세 번째 단계는 올바른 J-규칙 체계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세세하게 밝히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의 인지 목록에 어떤 과정들이 있으며, 그것들을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높은 진리 비율에 이를 수 있는 과정들이 어떤 과정들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인지과학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정당화 이론에서 바로 이 세 번째 단계일 뿐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첫 번째 단계에서 골드맨은 다음 동치명제를 정식화한다. 즉 만일 신념 B가 올바른 J-규칙들 체계에 의해 허용된다면,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B는 정당화된다. 그러나 이 동치명제는 전건이 규범적 개념(올바른 J-규칙들 체계)을 포함하기 때문에 별로 제 구실을 못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 이 개념은 신빙성에 의거하여 비규범적 분석이 주어진다. 따라서 이 단계까지는 정당화된 신념이 어떤 비규범적 속성들에 수반되는가를 선천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세 번째 단계에서 중요한 차이가 발생한다. 골드맨에 따를 때 정당화 이론으로서의 그의 신빙론은 두 가지 전혀 다른 기획을 포함한다. 첫째는 인식적 정당화의 근거들을 수반하는 비규범적인 것에 대한 선천적 분석이고, 둘째는 어떤 신빙성 있는 신념-산출 과정들이 인간에게 유효한지에 대한 경험적 탐구이다. 후자의 탐구는 선천적인 방법으로 달성할 수 없으므로 심리학이나 인지과학과 같은 과학과의 협동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골드맨의 자연화된 인식론은 콰인과 달리 전통적 인식론에 대해 어느 정도 타협적인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있다. 그의 기획의 처음 두 단계까지는 전통적 인식론의 선천적 방법론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반면에, 선천적 방법을 버리고 경험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세 번째 단계일 뿐이다. 그리고 이 단계에 가서야 과학으로부터 사람들이 신념을 형성할 때 어떤 과정들을 사용하는가를 배우게 된다.
자연주의적 성격을 띠는 골드맨의 이러한 신빙론은 치섬의 분석과 비교할 때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치섬과 골드맨의 분석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치섬
만일 어떤 신념이 내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그 신념은 정당화된다.
만일 어떤 신념이 지각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그 신념은 정당화된다.
만일 어떤 신념이 기억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그 신념은 정당화된다.

골드맨
S가 p라고 믿는 일이 정당화된다 iff
p라는 S의 신념이 신빙성있는 인지 과정에 의해 산출된다.

위 분석에서 치섬과 골드맨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골드맨에 따르면, 하나의 유일한 비규범적 속성이 있는 반면에(일원론적 분석), 치섬에 따르면 적어도 세 가지가 있다(다원론적 분석). 게다가 동치명제로 표현된 골드맨의 분석은 정당화의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모두 말하는 반면에, 조건명제로 표현된 치섬의 분석은 충분조건은 말하지만 필요조건은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치섬과 골드맨의 불일치는 다원론적 분석과 일원론적 분석의 차이일 뿐 근본적 차원에서 인식론의 목표, 즉 비규범적 용어들에 의거하여 정당화된 신념을 분석하는 일에 관한 불일치가 아니다. 두 사람 모두 형이상학적 신조로서의 수반 신조, 그리고 그에 따라 비규범적 용어들로 인식적 정당화를 분석해야 한다는 인식론의 목표를 받아들인다는 점과 관련해서는 차이를 찾아볼 수 없다. 이 점이 바로 골드맨을 자연주의자로 볼 때, 형이상학적인 수반 신조와 분석적 자연주의에 대한 신조 두 가지만 가지고 그를 규정할 수 없는 이유이다. 두 신조만 가지고 자연주의자를 규정할 경우에 비자연주의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치섬 또한 인식론적 자연주의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골드맨과 치섬의 중요한 차이를 보려면 골드맨의 신빙론에 두 가지 전혀 다른 기획이 포함되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어떤 비규범적 속성들이 인식적 정당화라는 규범적 속성들을 수반하는가에 대한 선천적 분석이고, 둘째는 어떤 신빙성있는 신념-산출 과정들이 인간에게 쓸모가 있는지에 대한 경험적 탐구이다. 첫 번째 기획은 골드맨이 치섬, 반주어 같은 비자연주의자들과 공유하고 있는 특성이다. 반면에 두 번째 기획에서 비로소 골드맨의 자연주의적 접근 방식의 특징이 나타난다. 두 번째 기획은 선천적인 안락의자 방법으로 달성할 수 없으므로 심리학이나 인지과학과의 협동이 요구된다. 이런 점에서 골드맨의 자연주의적 인식론 개념은 어느 정도 타협적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첫 번째 기획에서는 전통적 인식론의 선천적 방법론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반면에, 선천적 방법론을 버리고 경험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것은 두 번째 기획에서일 뿐이다.

4.3. 골드맨의 온건한 자연화된 인식론과 인식론의 선천성,규범성, 자율성
이제 전통적 인식론의 세 가지 특징과 관련해서 골드맨의 온건한 자연화된 인식론이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 알아보자.
첫째, 인식론은 기본적으로 선천적 인식론이라는 주장.
이 주장과 관련해서 골드맨은 콰인과 달리 전통적 인식론의 선천적 방법론이 어느 정도 필요함을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골드맨에 따르면, 지식이란 그저 신빙성 있는 과정, 즉 옳은 신념들을 산출하는 경향이 있는 과정에 의해 산출된 옳은 신념일 뿐이다. 여기에서 어떤 과정이 옳은 신념을 산출하는 경향이 있는가를 묻는 전문적 물음이 제기된다. 이런 물음은 분명히 과학이 답해야 할 물음이다. 그래서 여기까지는 인식론의 자연과학화를 주장하는 콰인과 골드맨이 별로 차이점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식 자체에 대한 설명도 있다. 골드맨에 따르면, 지식이 신빙성 있게 산출된 옳은 신념이라는 견해 자체는 과학적 탐구와 무관하게, 그리고그에 선행해서 도달한 견해이다. 요컨대 그것은 과학의 경험적 방법이 아닌 개념적 분석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 개념적 분석은 선천적 방법의 전형이랄 수 있다.
둘째, 인식론은 본질적으로 규범적이라는 주장.
이 주장과 관련해서는 수반에 대한 골드맨의 견해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식론의 규범적 성격은 얼핏 보기에 인식론의 자연화에 대해 주춤거리게 만드는 장애물을 제시한다. 자연주의자는 과학을 실제 대상과 속성들을 확인하기 위해 살핀다. 우리 주변의 세계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은 바로 과학자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학은 우리에게 사실을 드러낸다. 과학은 기술하고 설명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학은 우리에게 “사실적인 기술적 속성들”을 제시할 뿐이다. 하지만 인식론의 규범적 성격은 골드맨의 자연화된 인식론에서 어떻게 되는가? 골드맨은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즉 규범적 혹은 평가적 속성들을 거부하거나, 아니면 자연적 사실이나 속성들에 의거하여 그것들을 설명하거나 둘 중 하나다. 골드맨은 두 번째 선택지를 선택하였다. 즉 정당성 같은 규범적 속성들을 자연적 사실이나 속성들에 의거하여 설명하는 쪽을 택하였다.
이 대목에서 골드맨이 규범적 속성과 사실적 속성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끌어들인 신조는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수반 신조이다. 따라서 수반은 골드맨으로 하여금 자연주의에 대해 언질을 주도록 하면서도 진정으로 규범적인 인식적 속성들이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이렇게 해서 골드맨식 자연화된 인식론자의 임무는 인식적 속성들을 수반하는 자연주의적 속성들을 확인하는 일이 된다. 따라서 골드맨은 콰인과 달리 인식론의 규범적 성격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인식론이 자율적 학문이라는 주장.
이 주장에 대한 골드맨의 견해 또한 그의 수반 신조와 연관이 있다. 전통적 인식론을 지지하는 철학자들은 대체로 인식적 속성들이 사실적인 자연주의적 속성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이들에 의하면 인식론의 규범적 속성들의 성격은 환원가능성에 의한 설명은 물론이고 수반에 의거한 설명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나 골드맨은 수반 개념을 통해 인식적 속성들의 규범적 성격이 자연주의적 속성들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자연주의적 속성들의 차이가 없이는 정당성 같은 인식적 속성들에서의 차이도 없다. 예컨대 밝은 대낮에 두 사람이 똑같이 정상적인 지각 과정을 통해 잔디밭을 달려가는 개를 보면서 “저기 개가 있다”고 믿는다면, 한 사람의 신념이 정당화되었다고 할 경우에 다른 사람의 신념 또한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골드맨의 인식론에서는 자율적 학문으로서의 전통적 인식론이 들어설 자리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골드맨은 수반 신조를 토대로 정당성이라는 규범적 속성이 비규범적인 자연적 속성들에 수반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규범적 속성이 비규범적인 자연적 속성들에 수반된다는 말은 어떤 신념이 정당화됨이라는 규범적 속성을 갖는지 아닌지가 그 신념의 비규범적인 자연적 속성에 의존하거나 그것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이었다. 골드맨의 이러한 수반 신조는 인식론의 임무에 대해서도 중요한 사실을 함축한다. 만일 인식적 정당성이 비규범적인 자연적 사실들에 수반되는 것이라면, 인식론의 임무는 어떤 자연적 속성들을 지닌 신념이 필연적으로 정당화된 신념이 되는 그런 자연적 속성들이 어떤 것인가를 확인하는 일이다. 이렇게 되면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학문으로서의 인식론상은 골드맨에게서 기대하기 힘들다. 골드맨의 자연화된 인식론에서는 경험과학들의 발전과 무관하게 진행되는 인식론상을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5. 맺음말
그 동안 자연화된 인식론자들이 많은 관심을 끌어왔다는 사실과는 별도로 정작 자연화된 인식론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답보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자연화된 인식론을 형이상학적 신조인 자연주의를 통해서 규정하거나, 인식론의 목표나 방법론과 관련된 분석적 신조를 통해 규정하거나, 혹은 인식론의 성격과 관련하여 비규범성을 가지고 규정하거나 하는 시도들이 있었으나, 이들 시도들은 모든 자연화된 인식론자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특징을 들추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필자는 이 논문을 통해 자연화된 인식론자들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특징을 전통적 인식론에 대한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전통적 인식론의 특징을 세 가지 기본주장으로 압축한 다음, 그 중 인식론의 자율성 주장과 관련된 측면에서 공통점을 찾아보려 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화된 인식론의 대표적인 두 입장, 즉 콰인과 골드맨의 견해를 검토함으로써 이들 두 견해 모두 다른 두 기본주장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인식론이 자율적 학문이라는 기본주장에 대해서만큼은 똑같이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인식론이 자율적 학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연화된 인식론자들의 견해는 인식론에서 정당성 같은 규범적 속성들이 궁극적으로 자연적 속성들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생각이 콰인의 경우에는 규범적 속성들의 자연적 속성들에로의 환원가능성을 함축하면서 인식론의 자율성을 거부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골드맨의 경우에는 수반 신조를 토대로 규범적 속성들이 자연적 속성들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인식론의 자율성을 거부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이 전통적 인식론에 대해 대하는 태도는 물론 상당히 다르다. 콰인은 정당화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인식론을 폐기하고 심리학화된 새로운 인식론으로 대치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상당히 극단적인 자연화를 추구하였고, 골드맨은 개념적 분석이라는 선천적 방법에 발단의 역할을 인정함으로써 전통적 인식론과의 협동을 취하면서 온건한 자연화를 추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자연화된 인식론은 인식론의 자율성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공통의 지반을 갖고 있으며, 바로 이 점이야말로 다양한 스펙트럼의 자연화된 인식론자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최소한의 공통점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식론의 자율성을 부정하는 자연화된 인식론자들의 주장은 한편으로 전통적 인식론자들의 견해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인식론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전통적 인식론자들은 자연적 속성과 인식적(규범적) 속성에 대해 자연화된 인식론자들과 달리 일종의 이원론을 채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통적 인식론자들은 세계에 적어도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속성, 즉 자연적 속성과 인식적 속성, 혹은 좀더 일반적으로 자연적 속성과 평가적 속성이 있다고 말하는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통적 인식론과 자연화된 인식론의 차이에 관한 문제는 결국 우리의 인식 활동들이 일반적으로 자연주의적 견지에서 이해될 수 있는지, 아니면 그것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로 귀착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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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Naturalized Epistemology and the Autonomy of Epistemology
Sangki Han
Perhaps unfortunately, naturalized epistemology has a number of variations. This paper aims to seek the common features of various views of naturalized epistemology. We can find three distinctive aspects or features of traditional epistemology: (1) the autonomy of epistemology, (2) the normative character of epistemology, and (3) the a priori character of epistemological claims. Naturalized epistemology might be characterized by its typical rejection of one or more of these features. This paper aims to show that naturalized epistemologists might take different attitudes toward (2) and (3), but enter into a closely alliance with the rejection of (1).

【Key words】 naturalized epistemology, traditional epistemology, the autonomy of epistemology, a priority, the normativity, justification.범한철학회논문집
?범한철학?제35집 2004년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