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선·미 : 켄 윌버의 통합적 진리관에 대한 소고*
박 정 호(인제대학교 인문문화학부 교수)
【주제분류】역사철학, 사회철학
【주 요 어】온수준·온상한 접근법, 켄 윌버, 존재의 대둥지, 근대성, 진선미, 뉴에이지
【요 약 문】
현시대는 전근대와 근대와 탈근대가 뒤섞이면서 온갖 주의주장이 난무하는 가운데 정신적 혼돈과 비전 상실이 지배하고 있다. 켄 윌버의 통합 철학은 동서고금의 온갖 분야의 진리를 모아 진화적 홀라키(evolutionary holarchy)로 이루어진 체계적 지도로 통합하여 각각의 진리성과 부분성을 비판적으로 밝혀줌으로써 혼돈의 시대에 새로운 비전을 주고 있다. 본고는 전근대성과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통합이라는 맥락에서 윌버의 통합적 진리관과 통합적 비전을 검토하고자 한다.
윌버는 ‘온수준·온상한’ 접근법(all-level, all-quadrant approach)이라는 체계적 통합 모델을 사용하여 전근대성의 최상(존재의 대둥지)과 근대성의 최상(진·선·미의 삼대 가치의 분화), 그리고 탈근대성의 최상(진·선·미의 통합)을 존중하고 포함한다. 동시에 그것은 온수준(all-level)이지만 온상한(all-quadrant)은 아닌 전근대성과, 온상한이지만 온수준은 아니며 게다가 온상한을 평원적 세계로 붕괴시킨 근대성, 통합이 아닌 극단적 해체와 허무의 늪에 빠진 탈근대성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윌버의 통합적 진리관에서 귀결되는 통합적 비전에 따르면, 온우주(Kosmos)는 온수준·온상한에서 동시에 현현하며 우리는 자신과 인류의 진화를 촉진하기 위해 네 상한(삼대 가치) 모두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정 상한(象限)에 집착하여 나머지 상한을 무시하는 과학 지상주의, 시스템 이론, 문화 구성주의, 뉴에이지 등은 우리의 비전을 제약하게 된다. 새로운 세계로의 변형(transformation)은 내면과 외면, 의식과 제도 모두에서, 개인의 의식과 집단의 문화, 신체와 사회 제도 모두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윌버 모델의 실천적 함의다.
1. 들어가는 말
일찍이 베버는 근대 서양의 합리화의 주요 특징을 문화적 가치권의 분화로 파악한 바 있다. 과거에는 미분화 상태로 있던 과학(진), 도덕(선), 예술(미)이 독립적인 영역으로 분화하고 제도화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분화로 인해 각 영역은 다른 영역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고 각 영역을 다루는 세부적인 전문가 집단이 출현하였다. 하지만 분화가 진행되면서 각 전문가 집단은 오로지 자신의 세부 분야에만 정통할 뿐 서로 소통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총체적이고 통합적인 비전과 건전한 지혜를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전문가와 일반 대중 사이의 문화적 괴리와 일상적 삶의 파편화도 근대성이 초래한 재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과학이 진․선․미의 모든 영역을 잠식하는 가운데 감각적 경험으로 환원되지 않는 내면 세계를 모조리 거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험과학의 제국주의 앞에서 이제 내면적 가치나 의미의 세계는 실재하지 않거나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감각 경험으로 확인되지 않는 전통 종교의 초월적 영역은 근거없는 환상이나 위안거리 정도로만 취급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에 대한 전통적인 인문적 문화의 반발이라고 볼 수 있다. 극단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란 없고 진리에 대한 해석만 있으며 모든 해석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과학마저도 하나의 해석의 차원으로 끌어내려 버린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고 해체하며, 결국은 모든 심층적 가치와 의미를 부정하는 허무주의적 유희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전근대와 근대, 탈근대가 공존하고 있는 현시대의 우리에게는 한편으로 문화적 가치권의 독립과 분화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내면적 차원을 회복시키고 분열된 가치권을 통합할 수 있는 통합적 진리관과 비전이 필요하다. 미분화된 세계로의 회귀나 분화의 해체가 아니라 분화를 포함하고 초월하는 통합, ‘다양성 속의 통일’이 필요한 것이다.
켄 윌버(Ken Wilber)의 통합 철학(integral philosophy)은 진․선․미의 문화적 가치권의 분화라는 근대성의 성과를 포함하면서도 그 분열과 파편화를 극복하기 위한 통합을 모색하는 데서 상당히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윌버는 수직적으로는 감각적 세계로부터 합리적, 영적 세계까지를 아우르고 수평적으로는 진․선․미를 포괄하며 이들 사이의 긴밀한 상관관계를 포착할 수 있는 통합적 진리관과 통합적 비전, 만물의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전근대와 근대, 탈근대의 통합이라는 맥락에서 윌버의 통합적 진리관을 검토하고 이러한 진리관에서 어떤 통합적 비전과 실천적 함의가 나오는지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통합적 접근법
윌버 철학의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통합적 접근법’(integral approach)이란 무엇인가? 윌버 자신의 이야기와 잭 크리텐든(Jack Crittenden)의 명쾌한 해설을 좇아 켄 윌버의 통합적 접근법을 세단계로 나눠 보기로 하자.
우선 물리학에서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 신학, 종교 등에 이르기까지 어떤 임의의 분야든 간에 그 내부에 여러 접근법들이 갈등하고 있겠지만, 그것들 간에 서로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도덕성의 발달을 논하는 분야에서 모든 사람이 로렌스 콜버그(Lawrence Kohlberg)의 도덕성 발달 단계나 이를 수정한 캐럴 길리건(Carol Gilligan)의 이론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도덕성 발달은 크게 전관습적-관습적-탈관습적 단계를 거친다는 데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폭넓은 의견일치가 있다. 이렇게 의견일치를 보이는 내용을 윌버는 ‘정향적 일반화’(orienting generalization)라 부른다.
윌버의 통합적 방법의 첫 단계는 인간 지식의 온갖 분야에서 정향적 일반화의 수준에서 진리로 통용되는 결론들을 끌어모으되, 그것들을 일단 실제로 진리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크리텐든의 용어로 하자면 이 단계를 “모든 인간 지식의 현상학”이라 할 수 있겠다.
두 번째 단계는 이들 진리 또는 정향적 일반화를 한데 엮어서 체계적 지도를 만드는 것이다. 이 작업은 단순한 절충이 아니고 체계적 비전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때 제기되는 질문은 “어떤 정합적 체계가 사실상 이 진리들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를 포함할 것인가?”하는 것이다. 윌버가 보기에 각각의 이론이나 접근법은 전적으로 옳거나 전적으로 틀렸다고 보기는 힘들고 ‘각자의 한계 내에서는’ 옳다. “어떤 접근법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가를 묻는 대신 우리는 각 접근법이 참이지만 부분적이라고(true but partial) 가정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이 부분적 진리들을 어떻게 서로 짜 맞출 수 있는지를 그려본다.”
세 번째 단계는 이 전반적인 체계를 이용하여 새로운 유형의 ‘비판 이론’(critical theory)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때 윌버는 각 접근법의 기본적 진리를 수용하지만 그 부분성을 비판한다. 그것들의 진리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 성격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법으로 윌버는 서양과 동양, 전근대와 근대와 탈근대, 물리학과 같은 굳은 과학에서 영성과학과 같은 무른 과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진리들에 관한 통합적 지도를 제시하고 있다. 윌버의 통합 체계는 ‘모든 것의 이론’에 이를 만큼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는데, 본고에서는 윌버의 통합적 진리관을 전근대, 근대, 탈근대의 성과와 한계라는 맥락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3. 전근대성과 존재의 대둥지
3.1 존재의 대둥지
근대 이전에 동서의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이 가졌던 세계관, 또는 문명화된 인류의 대부분의 역사에서 지배적인 공식 철학은 무엇이었는가? 윌버는 이것을 ‘영원의 철학’(perennial philosophy)이라 부르는데, 문화나 시대의 차이를 뛰어넘어 유사한 특징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서 러브조이(Arthur Lovejoy)와 휴스턴 스미스(Huston Smith)에 따르면 동서의 위대한 전통적 지혜, 곧 ‘영원의 철학’의 핵심은 ‘존재의 대사슬’(Great Chain of Being)이다. ‘존재의 대사슬’이란 실재(reality)는 존재와 앎의 여러 수준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세계관이다. “실재는 일차원이 아니다. 즉 그것은 눈앞에 단조롭게 펼쳐지는 균일한 실체의 평원이 아니다. 실재는 여러 ‘상이하면서도 연속적인’ 차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즉 현시적 실재는 가장 낮고 가장 조밀하며 가장 덜 의식적인 것에서 가장 높고 가장 미묘하며 가장 의식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 등급이나 수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존재의 연속체’ 또는 ‘의식의 스펙트럼’의 가장 낮은 쪽에는 보통 서양에서 ‘물질’(무정, 무의식)이라 부르는 것이 있고 가장 높은 쪽에는 ‘영’(靈 spirit)이나 ‘신성’, ‘초의식’과 같은 것이 있다. 이 사이에 들어갈 등급이나 수준의 수는 여러 세계관에 따라 다양하다. 윌버는 보통 단순하게는 물질-마음-영 또는 물질(matter)-신체(body)-마음(mind)-혼(soul)-영(spirit)으로 구분하는데, 어떤 전통에서는 수십 개의 등급으로 나누기도 한다. 그렇지만 기본적인 구성 요소는 모든 위대한 전승 종교에 공통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윌버는 ‘존재의 대사슬’이란 용어가 적절치 않다고 보고 대신 ‘존재의 대둥지’(Great Nest of Being) 또는 ‘존재의 대홀라키’(Great Holarchy of Being)라는 용어를 쓴다. 그 이유는 “각각의 상위 수준이 하위 수준을 초월하면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위 수준은 하위 수준이 갖고 있는 요소들을 포함하지만 동시에 하위의 수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창발적인 요소를 추가시킨다. 따라서 이 수준들은 사슬이라기 보다는 동심원의 계열, ‘둥지 안의 둥지’, ‘존재의 대둥지’를 이룬다.
또 존재의 대둥지는 ‘전체성과 통합 역량’의 차이에 따른 홀론들의 위계(hierarchy)라는 점에서 ‘존재의 대홀라키’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원자는 소립자에 대해서는 전체지만 분자에 대해서는 부분이며 분자는 원자에 대해서는 전체지만 세포에 대해서는 부분이고 세포 역시 분자에 대해서는 전체지만 유기체에 대해서는 부분이다. 또 글자는 전체 단어의 일부이고 단어는 전체 문단의 일부이며 문단은 전체 절의 일부이다. 각 요소는 전체만도 부분만도 아니고 언제나 전체/부분이다. 상위의 수준은 하위의 수준을 ‘초월하며 내포’한다. <그림 1>은 이러한 홀라키를 나타낸다.
<그림 1> 대홀라키
근대 이후 경험 과학과 산업의 발달로 감각 경험적 실재만을 인정하려는 세계관이 지배하면서, 존재의 대홀라키의 전스펙트럼(full-spectrum)이 인정되지 않고 있다. 특히 19세기에 득세한 유물론적 환원주의(과학적 유물론, 행동주의, 실증주의 등)는 존재의 홀라키를 가장 낮은 수준인 물질로 환원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오면 점차 존재의 대둥지, 존재의 대홀라키는 부활하고 있다. 윌버에 따르면 물리학에서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 등등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상의 통일적 패러다임은 ‘진화적 홀라키’ (evolutionary holarchy)다. 그렇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학파는 물질과 신체, 기껏해야 마음 차원의 존재만을 인정하고 혼과 영의 차원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제 남은 의제(agenda)는 혼과 영을 재도입하여 대둥지의 모든 수준과 차원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각 수준에 상응하는 앎의 양태를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즉 감각 세계를 다루는 육안, 이지적이고 합리적인 영역을 다루는 심안, 초이성적·영적 영역을 다루는 영안을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앞으로의 의제는 혼과 영을 드러내는 정관의 눈(영안)을 재도입하여 고대의 지혜를 현대의 지식과 통일하는 것이 될 것이다.
3.2 형이상학적 영성에서 탈형이상학적 영성으로
전통적인 ‘존재의 대사슬’ 또는 ‘영원의 철학’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윌버에 따르면 실재의 여러 평면이나 수준이 그것들을 인식하는 의식에서 근본적으로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근대 철학, 특히 칸트의 비판 철학 이후 우리는 더 이상 실재의 수준들을 주체나 의식과 무관하게 미리 존재하는, 미리 주어진 존재론적 구조로 여길 수 없다. 물론 그것들이 존재론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그것들은 의식에, 그것들을 공동 창조하는 의식에 공동 의존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대둥지의 각 수준은 실재(존재)의 수준이자 의식(자아, 앎)의 수준이다. “앎의 기본 구조(의식/자아의 수준)와 존재의 기본 구조(실재의 평면/영역)는 긴밀히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나아가서 근대와 탈근대 철학은 문화적 배경이나 사회 구조가 모든 영역에서 주체를 주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되면 실재의 수준들은 플라톤의 형상처럼 ‘선험적으로’ 형이상학적 사변에 의해 알려지는 독립적인 수준이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알려지는’ 의식의 수준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깊은’ 과학에 의해 계속 비판받을 수 있고 정련될 수 있다.
전근대 철학이 ‘형이상학적’이었다면 근대 철학은 사유 주체의 구조를 탐구하며 사유 대상의 존재론적 지위를 의문시한다는 점에서 ‘비판적’이다. 따라서 윌버의 통합적 진리관이 근대 이후 무시된 영적 수준을 재도입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형이상학적 영성에서 탈형이상학적·비판적 영성으로의 전환”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의 철학의 또 다른 결함으로 윌버가 지적하는 것은 근대적인 ‘진화’의 관념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물론 영원의 철학은 개인의 내면 의식의 성장 과정을 대단히 정확하고 세밀하게 밝히기도 했지만 대체로 집합적이고 우주적인 차원의 발달이나 진화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역사를 근원(절대령)으로의 점진적 귀환으로 보는 시각은 차축 시대까지는 나타나지 않았고 이때도 대체로 그 방향이 거꾸로였다. 에덴을 향한 진화가 아니라 “에덴으로부터의 ‘역사적’ 타락”이라는 관념이 주로 유행했다.
비록 ‘영을 향한 진화’, ‘영으로의 귀환으로서의 진화’라는 관념이 영원의 철학에 잠재되어 있긴 했지만 그것이 적절한 형태로 나타난 것은 불과 수백 년 전이다. 다시 말해서 영원한 일자(一者), 궁극적 실재, 절대령 그 자체는 영원의 철학에 포함되어 있지만, 근대에 와서 비로소 “퇴화 (또는 신으로부터의 추락)로서의 역사라는 관념이 서서히 진화 (또는 신을 향한 성장)로서의 역사 관념으로 대체되었다.” “에덴 동산은 어제가 아니라 미래에 있다”는 생각은 근대에 와서 비로소 지배적이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발달론적·진화론적 사상은 셸링(1775-1854), 헤겔(1770-1831), 테이야르 드 샤르댕(1881-1955), 오로빈도(1872-1950) 등에서 나타났다. 윌버는 1983년의 논문에서, 오랜 지혜의 정수를 담고 있으면서도 근대 이후의 탈형이상학적·비판적 영성과 진화적 홀라키를 가미하고 있는 이런 철학을 “신영원의 철학”(neoperennial philosophy)으로 부를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영적 영역을 부정한 근대에 맞서 의식의 전스펙트럼(full spectrum)을 옹호해야겠지만, 동시에 근대 이후의 새로운 통찰과 진리를 통해 이를 보완해야 한다.
4. 근대성과 네 상한
4.1 네 상한과 삼대 가치의 분화
전근대의 전통적 지혜의 핵심이 ‘존재의 대사슬’이라면 근대성이란 무엇인가? 윌버는 막스 베버와 하버마스를 따라 근대성의 핵심을 “문화적 가치권의 분화”로 보고 있다. 문화적 가치권은 근본적으로 예술(미), 도덕(선), 과학(진)의 3대 영역으로 나뉜다. 전근대 문화는 예술, 도덕, 과학을 대규모로 뚜렷이 분화시키는 데 실패한 반면 근대성은 이들 권역을 분화하여 각 영역이 다른 영역의 간섭없이 그 나름의 진리를 추구하도록 하였다.
과학·도덕·예술의 3대 가치 영역은 다양한 형식으로 분류될 수 있다. 플라톤의 진·선·미, 포퍼의 객관세계·문화세계·주관세계, 하버마스의 객관적 진리·상호주관적 정당성·주관적 성실성,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판단력비판 등이 상관된 분류이다.
윌버는 이 3대 권역을 다음과 같이 나(I), 우리(we), 그것(it)의 영역이라 부른다. “예술은 미적·표현적 영역, 주관적 영역을 가리키며 일인칭 언어 또는 ‘나’ 언어로 묘사된다. 도덕은 윤리적·규범적 영역, 상호 주관적 영역을 가리키며 2인칭 언어 또는 ‘우리’ 언어로 묘사된다. 그리고 과학은 외적·경험적 영역, 객관적 영역을 가리키며 3인칭 언어 또는 ‘그것’ 언어로 묘사된다.(이것은 사실상 개별적 ‘그것’과 집합적 ‘그것들’의 두 영역으로 나뉠 수 있다).”
나아가서 윌버는 ‘나’, ‘우리’, ‘그것’, ‘그것들’이라는 이 네 개의 ‘영역’(realm) 또는 ‘차원’(dimension)을 ‘네 상한’(four quadrants)이라 부르고 <그림 2>처럼 배치한다.
<그림 2> 네 상한
여기서 위의 두 상한(象限)은 단수·개체의 영역이고 아래 두 상한은 복수·집합의 영역이다. 왼쪽의 두 상한은 내면적·주관적 영역인 반면 오른쪽의 두 상한은 외면적·객관적 영역이다. 그래서 좌상 상한은 개체의 내면(의지적 측면), 우상 상한은 개체의 외면(행동적 측면), 좌하 상한은 집합의 내면(문화적 측면), 우하 상한은 집합의 외면(사회적 측면)을 나타낸다. 의지, 행동, 문화, 사회의 네 측면은 서로 엮여 있고 서로가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된다. 이들 측면은 어느 것도 제거되거나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
윌버에 따르면 모든 현상(홀론)은 내면과 외면, 개체와 집합의 네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윌버의 예에 따라 내가 ‘식품점에 간다’는 생각을 한다고 하자. 우선 내가 이 생각을 할 때 나는 내면적인 어떤 관념을 직접 경험하고 있다(좌상 상한). 또 뇌에서는 호르몬이라든가 신경 전달 물질, 뇌파 등에서 경험적으로 관찰 가능한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우상 상한). 그리고 ‘식품점에 간다’는 생각은 일정한 언어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일정한 문화적 배경 안에서만 일어난다. 이를테면 원시 부족 사회에서라면 ‘곰 사냥을 간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좌하 상한). 나아가서 문화 역시 물질적 상관물을 갖고 있다. 즉 기술, 생산력, 사회 제도, 법률, 지정학적 위치 등 관찰 가능한 차원의 뒷받침을 받는다(우하 상한). 얼핏 보기에 단순히 개인의 생각인 듯이 보이는 것이 사실은 최소한 네 측면을 지닌 현상인 것이다.
모든 현실(홀론)이 이렇게 네 측면 또는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그에 대한 앎도 네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동서고금의 온갖 학파와 학자를 그들이 주로 다룬 측면에 따라 네 진영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윌버는 네 진영에 <그림 3>처럼 주요한 학파들을 배치한다.
내 적외 적
개
인
적 ․해설적
․해석적
․의 식 ․독백적
․경험적, 실증적
․형 태프로이트Sigmund Freud
융C.G. Jung
피아제Jean Piaget
오로빈도Sri Aurobindo
플로티노스Plotinos
석가모니 부처Guatama Buddha스키너B.F. Skinner
왓슨John Watson
로크John Locke
경험주의
행동주의
물리학, 생물학, 신경학 등등집
합
적쿤Thomas Kuhn
딜타이Wilhelm Dithey
겝서Jean Gebser
베버Marx Weber
가다머Hans-Georg Gadamer시스템이론
파슨스Talcott Parsons
콩트Auguste Comte
마르크스Karl Marx
렌스키Gerhard Lenski
<그림 3> 넓은 의미의 과학의 네 상한
지식 추구에 네 개의 거대 진영이 계속 있어왔다는 사실은 인간 존재(온우주)의 네 측면이 아주 실재적이고 지속적이며 심원하다는 것, 어느 것도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한다고 볼 수 있다. 윌버의 통합적 접근법은 바로 이 네 영역을 존중하고 통합하는 것이다.
네 상한은 각각의 특수한 접근법에 따라 특수한 진리 유형 또는 ‘타당성 주장’(validity claim) 유형, 즉 자료와 증거를 축적하고 타당하게 하는 방식을 갖고 있다. 윌버에 따르면 타당성 주장은 우리가 실재와 일치하고 있는지 여부를 알려주는 법칙이고 온우주에 적절하게 조율되어 있는지를 알려주는 방법이다. 각 상한이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듯이 각각의 진리 유형도 제거되거나 환원될 수 없다. 각 상한의 진리 유형이 <그림 4>에 제시되어 있다.
<그림 4> 진리의 네 상한
먼저 우상 상한의 타당성 주장은 명제적·표상적 진리다. 여기서는 명제가 사실과 일치 혹은 부합하는지, 지도가 영토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지가 관건이 된다. ‘창밖에 비가 온다’는 명제는 실제로 창밖에 비가 올 때 진리가 된다. 반면에 좌상 상한의 경우 ‘창밖에 비가 온다’고 말할 때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가 문제가 된다. 객관적 진리와는 다른 주관적 진실성의 문제다. 좌하 상한의 경우 타당성 주장은 문화적 적응, 곧 공통의 의미와 적절성과 정당성이다. 여기서의 목표는 상호 이해로서 의견일치 여부 이전에 의사소통이 이뤄질 수 있는 문화적 배경을 말하는 것이다. 우하 상한의 경우 타당성 주장은 기능적 적합성이다. 우상 상한이 개체들의 외적 세계를 다룬다면 우하 상한은 시스템들의 외적 세계를 다룬다. 좌하 상한 역시 시스템을 다루지만 어디까지나 내면으로부터 다룬다.
인디언 호피족의 기우제 춤을 예로 들어보자. 좌하 상한적 접근은 ‘참여적 관찰자’가 되어 공동체 내부로부터 그 의미를 이해하고자 한다. 그래서 기우제 춤은 자연에 대한 신성한 의식의 일부라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 반면 우하 상한 접근법은 원주민들이 부여하는 의미에는 상관없이 “사회 체계의 전반적 행동 안에서 그 춤이 어떠한 기능을 하고 있는지”에 관심이 있다. 그래서 그 춤이 사회 통합을 제공한다고 결론지을 것이다. 물론 윌버의 통합적 시각에서는 둘 다 각자의 한계 내에서는 옳다. 한쪽은 그 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고 다른 쪽은 그 춤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를 묻는다. 다만 어느 한쪽이 전체를 참칭할 때는 오류가 되는 것이다.
이제 근대성의 핵심인 문화적 가치권의 분화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윌버는 베버나 하버마스의 입장을 따라 3대 가치(사상한)의 분화를 ‘근대성의 존엄’이라 부른다. “‘나’와 ‘우리’와 ‘그것’의 영역들은 다른 영역들로부터의 폭력적인 침범이나 혹은 처벌 같은 것 따위가 없이 그들 특유의 지식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3대 가치권의 분화는 전근대에 비해 여러 이점을 낳았는데, 윌버가 든 예를 몇가지만 들어보자.
* 자기(‘나’)와 문화(‘우리’)의 분화는 개인이 교회나 국가의 규제를 받지 않고 각자의 권리를 행사하게 함으로써 민주주의의 발전에 공헌했다.
* 마음(‘나’)과 자연(‘그것’)의 분화는 생물학적 조건(생물권)과 인격적 권리(정신권)의 분화를 가져와서 여성과 노예의 해방운동을 가능케 했다.
* 문화(‘우리’)와 자연(‘그것’)의 분화로 과학은 국가나 교회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었다.
네 상한 또는 삼대 가치와 관련하여 전근대 세계관의 한계를 다시 보자면, 결국 존재의 대사슬은 네 상한을 분명히 분화하는 데 실패했다. 그래서 내적 의식의 여러 수준은 다른 상한들에서 그 상관물을 갖고 있다는 것, 인간은 상이한 수준들을 가질 뿐 아니라 각 수준은 의지적·행동적·문화적·사회적 측면을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했다. 의식의 상태는 뇌의 상태와 상관성을 지니고 있으며 모든 좌측 상한 사건들은 우측 상한에 상관물을 갖고 있다는 발견은 대사슬과 형이상학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전통적인 대사슬에서 물질은 맨 아래 층에만 해당하고 의식은 물질에서 벗어나 선험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전통적인 대둥지는 의식이 문화적 배경과 사회 구조에 지대하게 영향을 받는 방식을 알지 못했다. 나아가 각 상한의 진화, 즉 개인의 의식, 문화적 세계관, 생산 양식 등의 진화에 대한 구체적 이해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4.2 평원의 세계
윌버에 따르면 3대 가치의 분화(differentiation)가 근대성의 존엄이라면 그 분화가 분열(dissociation)과 식민화(colonialization)로 치달은 것은 근대성의 재앙이었다. 지난 300여 년간 서양에서는 근대 과학이 산업의 발달에 힘입어 온우주를 ‘그것들’의 다발로 환원하려고 지속적으로 시도해왔다. ‘나’와 ‘우리’ 영역은 ‘그것’ 영역에 의해 거의 전적으로 식민지화되었다. 과학적 유물론, 실증주의, 행동주의, 경험주의, 시스템 이론, 생명의 그물망 이론 등이 이러한 공격에 가담했다.
‘신패러다임’ 신봉자들은 흔히 낡은 뉴턴주의적 과학은 기계론적·원자론적이어서 근대 세계의 파편화를 야기했으므로 이제 양자 물리학이나 시스템 이론과 같은 전일론적(全一論的) 과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윌버는 전일론(holism) 역시 원자론과 마찬가지로 독백적 자연의 경험적 세계를 유일한 실재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똑같이 ‘그것주의’(it-ism)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윌버가 보기에 모든 복합적 실재를 물질 원자로 환원시키는 원자론이 ‘거친 환원주의’라면, 전일론적 과학은 좌상한의 모든 사건을 우상한의 상응하는 측면으로 환원시키는 ‘미묘한 환원주의’다. 모든 ‘나’들과 ‘우리’들은 상응하는 경험적 상관물, ‘그것’들로 환원된다. 마음은 뇌로, 실천은 기술로, 내면은 디지털 그것들로, 질의 수준은 양의 수준으로, 대화적 해석은 독백적 응시로, 다차원의 우주는 일차원적 평원으로, 전일적이고 역동적으로 상호 엮어진 ‘그것’들로 환원된다. 카오스 이론, 복잡성 이론, 사이버네틱스적 피드백 메커니즘, 소산 구조, 지구적 네트워크, 시스템 상호작용 등등은 모두 과정적 ‘그것’ 언어로 묘사된다. 여기에는 미, 선, 윤리, 상호 이해, 정의, 초월적 직관 등이 없다.
우리가 네 상한에서 보았듯이 모든 내부 사건은 실제로 외면적 상관물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과학적 접근법은 굉장히 그럴듯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런 접근법에서 우주는 모든 의미, 가치, 도덕, 의식, 깊이를 박탈당하게 된다. 깊이도 내면도 없는 평원적 세계, 영도 마음도 없는 독백적 자연이 모든 것이다.
물론 윌버의 통합적 진리관에서 볼 때 이런 접근법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러 현상의 외적 측면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준다. 그러나 진리를 독점하고 경험적 ‘그것’만이 유일한 존재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것, 독백적 ‘그것’ 영역의 공격적 제국주의가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근대가 제기하는 과제는 내면의 세계를 살려내고 삼대 가치의 분화를 존중하되 그것이 분열로 치닫지 않도록 다시 통합하는 것, 그리고 잃어버린 전스펙트럼을 되살리는 것이다.
5. 포스트모던 대혁명
5.1 미리 주어진 것은 없다
근대성이 내면 세계를 외면 세계의 식민지화한 데 반발하여 내면과 해석의 차원을 회복하고자 한 운동이 포스트모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던 패러다임이 일반적으로 낡은 근대 계몽주의 패러다임이라고 해서 공격하는 것은 ‘표상 패러다임’ ‘반영 패러다임’ 또는 ‘자연의 거울’ 패러다임이다. 표상 패러다임이란 “하나의 단일한 경험적 세계 혹은 경험적 자연만이 있다는 관념, 그리고 지식은 오로지 이 하나뿐인 진실한 세계를 거울같이 비치거나 반영하거나 지도로 모사하는 데 있다는 관념”이다. 즉 한편으로 주체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험적이거나 감각적인 세계가 있어서 타당한 모든 지식은 ‘미리 주어진’ 경험 세계의 지도를 제작함으로써 성립한다는 생각이다. 이때 지도가 경험 세계를 올바르게 표상하거나 그 세계와 일치한다면 진리가 된다.
표상 패러다임의 핵심 문제는 지도 작성자를 제외시키는 것이다. 주체는 그 자신의 역사와 맥락을 지니고 있어서 그가 작성하는 세계에 대한 그림 역시 이러한 역사에 의존한다. 윌버가 보기에 포스트모던 사상의 위대함은, 주체와 객체, ‘자아’와 세계가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역사와 발달을 지니고 있는 맥락과 배경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 데에 있다. 단 하나의 미리 주어진 세계가 있고 주체가 발달하면서 그것을 다르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온우주’가 그 스스로에 대해 더욱 충실히 알게 되면서 이에 따라 ‘상이한 세계’가 새롭게 출현한다.”
이미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통해 인식이 대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인식에 의존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렇지만 칸트는 여전히 주체와 무관한 ‘물자체’ 개념에 사로잡혔다. 헤겔에 와서 비로소 사고는 단지 실재의 반영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실재 자체의 활동이기도 하다는 점, “진리는 ‘실체’(Substanz)로서 뿐만이 아니라 이에 못지않게 ‘주체’(Subjekt)로서도 파악되고 표현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천명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자아와 세계는 함께 진화한다는 것이다.
5.2 극단적 구성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극단적 판본은 세계와 주체가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서 과학주의와 정반대로 어떤 객관적 진리도 부정하고 진리를 임의적인 문화적 구성물로 해체한다. 극단적인 문화 구성주의는 모든 상한을 좌하 상한으로 환원한다. 객관적 ‘진리’란 아예 없고 우리의 관념이나 사상은 여러 이해관심(interest), 즉 권력이나 주의(主義)나 이데올로기에 따라 그저 구성될 따름이다.
윌버에 따르면 극단적 문화 구성주의자들은 일종의 수행 모순(performative contradiction)을 범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참’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권력이나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다. 즉 그들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없다는 것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은 상호 주관적으로 구성되지만, 이 구성은 제멋대로가 아니고 주관, 객관, 상호객관적 실재의 네트워크, 그 구성을 ‘제약’하는 네트워크 속에 놓여 있다. 세계관들은 온우주 내의 조류들에 의해 현실적으로 제약된다. 이를테면 사과가 위로 떨어진다거나 남자가 애를 낳는다는 문화적 세계관은 없다. 또 ‘다이아몬드’, ‘자르다’, ‘유리’가 어떤 언어로 사용되든 다이아몬드가 유리를 자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물질권, 생물권은 아래쪽으로부터 세계관에 제약을 가하며 문화적 구성은 정신권 자체 내의 발달적 조류들에 의해 제약된다. 그리고 세계관들은 타당성 주장에 뿌리를 두고 있고, 이 주장들은 진화적 조류들이 실재적이기 때문에 먹혀드는 것이다.
윌버가 보기에 극단적 구성주의는 일종의 허무주의이고 또 이 허무주의의 핵심은 자기도취(narcissism)다. 객관적 진리는 외면당하고 이론가의 에고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세계와 세계관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발달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극단적 구성주의에 치우치지 않는 방법이 바로 발달론적·진화론적 접근방법이다. 윌버는 이런 노선에 있는 학자들로 헤겔,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 겝서(Gebser), 피아제, 벨라(Bellah), 푸코, 하버마스 등을 들고 있다. 이들은 진화 자체의 조류에 의해 제약을 받는 진화적·발달적 패턴으로서의 현실적 역사와 세계관들의 전개를 연구한다..
6. 통합적 비전
이상에서 우리는 전근대성과 근대성, 탈근대성의 성과와 한계에 대한 윌버의 평가를 살펴보았다. 전근대성은 온수준(all-level)이지만 온상한(all- quadrant)은 아니다. 반면 근대성은 온상한이지만 온수준은 아니다. 게다가 근대성은 온상한을 평원적 세계로 붕괴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근대성에 반발하고 나온 탈근대성은 극단적 해체와 허무의 늪에 빠져 들었다.
윌버의 통합적 진리관은 “전근대성의 진정한 최상(‘존재의 대둥지’), 근대성의 최상(‘삼대 가치’의 분화), 그리고 탈근대성의 최상(‘삼대 가치’의 통합)을 존중하고 포함”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온수준·온상한’ 접근법(all-level, all-quadrant approach)이다.
윌버는 <그림 5>처럼 대둥지와 네 상한을 통합하여 각 상한에 발달의 수준을 두게 된다. 대둥지의 각 수준은 주관적(의지적)·객관적(행동적)·상호주관적(문화적)·상호객관적(사회적) 차원을 갖는다. 거꾸로 각 상한 또는 삼대 가치는 전스펙트럼(온수준)을 갖는다. 예를 들면 예술·도덕·과학은 모두 감각적·물질적 수준, 이지적 마음의 수준, 초이성적·영적 수준에 걸쳐 있게 된다. 감각적 영역의 예술·도덕·과학이 있고 이지적 수준의 예술·도덕·과학이 있으며 영적 수준의 예술·도덕·과학이 있는 것이다.
<그림 5> 네 상한과 대둥지의 통합
이같은 윌버의 통합적 비전은 비즈니스, 교육, 정치, 의료, 건강 관리, 문화 등등 실로 인간 의식과 행동의 전 분야에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의료 행위는 물리적·신체적 치료(우상 상한) 뿐만 아니라 환자의 주관적 신념과 기대감(좌상 상한), 질병에 대한 문화적 태도(좌하 상한), 사회 제도와 경제적 요인(우하 상한)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또 동시에 의료 행위는 각 영역에서 몸-마음-영에 걸친 전스펙트럼도 고려해야 한다.
진정한 탈근대를 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근대에 의해 무시된 영성을 재도입하는 것, 그리고 네 상한(삼대)을 동시에 동등하게 존중하는 것이다. 온우주(절대영)는 온수준·온상한에서 동시에 현현하며 진화는 네 영역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우리는 자신과 인류의 진화를 촉진하기 위해 네 상한 모두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세계는 네 상한 모두에서 현현하는 것이다.
앞서 우리는 네 상한 가운데 특정 상한에 집착하여 나머지 상한을 무시하는 몇몇 사조들의 문제를 살펴보았다. 과학 지상주의(우측 상한), 시스템 이론(우하 상한), 문화 구성주의(좌하 상한) 등이 그런 것들이다. 여기서는 결론을 대신하여, 최근 전근대 종교와 근대의 합리적-산업적 세계관을 동시에 비판하면서 인류의 영성이 회복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뉴에이지 운동에 대해 윌버의 통합적 미래 비전에 비추어 평가해보기로 하자.
뉴에이지 사상가들은 나름의 영적 직관과 체험을 바탕으로 제도화된 종교의 신화성과 억압성을 비판하고 근대에 상실된 영성을 재도입하려 한다. 그러나 어떤 영적 체험이든 해석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뉴에이지 사상은 온우주와 하나가 되는 체험이나 세계혼에 대한 직관 등을 좌상 상한에 입각하여 주로 주관적 자아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이들은 ‘영’(spirit)을 ‘상위의 자아’(higher Self)라는 관점에서만 해석해서 ‘우리’와 ‘그것’의 차원을 제외하거나 축소시키게 된다. 의지적인 것에 중심을 두고 행동적·문화적·사회적인 차원을 무시하는 것이다.
* “어느 개인에게 일어나는 만사는 자기 자신의 선택이다.”
* “당신이 당신 자신의 실재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대부분의 뉴에이지 문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구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대단히 주관주의에 치우친 세계관으로 행동적·문화적·사회적 상한을 무시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유폐하여 스스로의 영적 발달을 방해하고 자기 도취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많다.
각자가 영적 체험 속에서 절대령(절대 근원)과 하나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곧 각자가 자기 현실을 창조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서는 곤란하다. 각자가 자신의 실재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영적 자아(절대령)가 스스로 네 상한에서 현현하는 것이다. 또 뉴에이지 접근법에서는 상위의 자기에 접촉할수록 세상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위의 자기로 갈수록 진정한 ‘자아’의 구성요소로서의 세상을 염려하게 된다. 결국 ‘영’이나 ‘진아’(眞我)에 접촉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세계’에 관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은 ‘온우주의 사상한 모두로’ 언제나 동시에 현현한다. 그래서 “상위의 ‘자아’만을 ‘깨닫는’ 방법이 아니라 문화 속에 ‘포섭된’, 자연 속에 ‘구현된’, 사회제도 속에 ‘각인된’ 상위의 자아를 보는 방법”이 필요하다.
‘상위의 자아’를 접촉하는 일은 모든 문제의 끝이 아니고 오히려 모든 상한에서 수행되어야 할 ‘지난한 새로운 과업의 시작‘이다. 온우주와 인류는 네 상한의 영역에서 상위 수준으로 진화하는 과정 속에 있다. 뉴에이지 사상가들이 주장하는 새로운 세계로의 변형(transformation)은 내면과 외면, 의식과 제도 모두에서, 개인의 의식과 집단의 문화, 신체적 변화와 사회 제도적 변화 모두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윌버의 통합 모델이 주는 실천적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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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Good, the True, the Beautiful:A study of Ken Wilber's theory of integral truth
Jeongho Park
This paper aims to examine Ken Wilber's theory of integral truth and its practical implications. Wilber's "all-level, all-quadrant" approach attempts to honor and include the best of premodernity (the Great Nest of Being), the best of modernity (the differentiation of the Big Three: the Good, the True, the Beautiful), and the best of postmodernity (the integration of the Big Three). His integral approach also implies a type of critical theory. Premodernity was all-level but not all-quadrant. Mdernity was all-quadrant but not all-level (and that got worse when the quadrants collapsed into flatland). Postmodernity set out to integrate the quadrants, instead ended up more fragmented than ever.
Wilber's integral approach can help us become more conscious of the evolutionary currents. Since Spirit manifests as all four quadrants (or simply the Big Three), then some aspect of Spirit gets denied or distorted or overemphasized, which sabotages Spirit's full expression and derails the spiritual process in its broader unfolding. Spirit isn't just a higher Self (New Age), or just the web of life (systems theory reductionism), or just the sum total of all objective phenomena (scientism), or just cultural worldview (cultural constructivism). Rather, higher or deeper stages of consciousness development disclose deeper and wider patterns in self, in individual behavior, in culture, and in society―all four quadrants. The world transformation requires our full-quadrant participation.
Thus Wilber's integral vision offers us the oppornity to make valuable connections among disparate disciplines and to prepare us for a brave new world.
【Key words】 "all-level, all-quadrant approach", Ken Wilber, New Age,
The Great Nest of Being, modernity, "The Good, the True, the Beauti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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