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비트겐슈타인의 대상 개념

나뭇잎숨결 2024. 5. 26. 12:16

비트겐슈타인의 대상 개념


박 병 철 부산외대 교수



목차

1. 들어가는 말 4. 대상에 대한 실재론적 해석 II
2. 대상에 대한 반실재론적 해석 5.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논고?의
3. 대상에 대한 실재론적 해석 I 대상
6. 맺는 말




1. 들어가는 말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주제중의 하나가 대상(object) 개념이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은 대상에 대해서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대상에 대한 어렴풋한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이를테면 대상은 단순하며(2.02), 세계의 실체를 형성할뿐 아니라(2.021), 대상들의 배열을 통해서 사태가 형성되는 것이다(2.0272). 대략 대상은 세계를 구성하는 실체로서의 단순자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상은 그냥 단순 대상이 아니라 논리적 단순자이다. 그 이유는 비트겐슈타인이 이른바 그림이론을 전개하면서 언어와 세계와의 관계를 밝히려는데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를 이루는 단순자가 대상이라면, 마땅히 세계와 대응하는 언어에 있어서의 단순자가 있어야 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서의 단순자를 이름(name)이라 하였으며, 이름은 대상을 의미한다(bedeuten)고 한다(3.203). 또한 대상들의 배열이 사태를 구성하듯이, 이름의 연쇄는 요소명제를 이룬다(4.22). 그리고 명제에서 이름은 대상을 대표한다(3.22). 이처럼 ?논고?에서 대상은 이름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고, 사실(fact)은 명제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다. 이러한 관계를 큰 그림으로 볼때 언어의 구조는 세계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상이 논리적 단순자가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대상이 결합하여 사실을 구성하는데에 일종의 논리적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적 구조에 입각하여 이해된 세계는 곧 언어에 있어서의 의미(meaning)와 관계되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요소명제는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들이 명제에서 이름들이 배열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을떄 참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라고 한다. 바꾸어 말해 명제가 사실과 일치하면 참이요, 일치하지 않으면 거짓이라는 것이다(2.222, 4.2).
매우 간결하게 설명하기는 했지만, 이처럼 세계와 언어와의 관계에 주목한 대상과 이름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는 별 어려움이 없는 듯 하다. 문제는 과연 비트겐슈타인이 대상을 통해서 무엇을 의미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 스스로가 대상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대상의 예를 들지도 않았다. 따라서 대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어왔고, 그러한 이견들을 비판적으로 조명하여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 이 논문의 목표이다.
?논고?에 나타난 대상 개념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지만, 이 논문에서는 크게 실재론적 해석과 반실재론적 해석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반실재론적 해석을 살펴보고, 이어서 실재론적 해석을 검토해 보도록 하자.


2. 대상에 대한 반실재론적 해석

대상에 대한 반실재론적 해석은 ?논고?의 대상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입장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의미론은 프레게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대표하는 철학자로서 이시구로(Hide Ishiguro)를 들 수 있다. 이시구로는 ?논고?의 대상은 어떠한 평범한 의미에서도 개별적 실재(particular entity)가 아니며, 단지 의미론적 필요성에 의해 도입된 것이라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대상은 명제적 문맥안에서의 그것들의 역할에 의해서만 동일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명제만이 뜻을 가지며, 오직 명제 연관 속에서만 이름은 의미를 가진다(3.3)는 비트겐슈타인의 언급에 기초한 것인데, 이시구로는 이를 프레게의 영향으로 돌리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이름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지시한다는 견해는 전면적으로 부정된다. 이름의 의미는 그것이 언어에서 가지는 역할일뿐이라는 것이다.
프레게는 ?산술의 기초?에서 어떤 단어가 지시하는 대상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그 단어 자체만으로는 불가능하고, 그 단어가 속해있는 명제의 의미를 먼저 이해해야만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곧 명제의 진리조건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이시구로는 바로 이점을 비트겐슈타인이 프레게로부터 받아들이는 바라고 한다. 결국 이러한 입장에서 이름은 명제속에서 나타날 때 지시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지지하는 근거로서 이시구로는 ?논고?의 3.263에서 언급되고 있는 ‘해명’(elucidation)을 들고 있다.

3.263 원초적 기호들의 의미(Bedeutung)는 해명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해명은 원초적 기호들을 포함하는 명제이다. 그래서 이들 명제는 원초적 기호들의 의미가 이미 알려져 있을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 스스로가 명료하게 설명하지 않은 ‘해명’이라는 단어에 대해 이시구로는 우리가 이름을 포함하고 있는 명제들을 주장할 때 해명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주장된 바를 잡아내고 이해할 때 우리는 그 명제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를 파악한 것이며 그 명제에 포함된 이름에 의해서 지시된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그녀는 원초적 기호들의 지시대상을 알아내는 것과 해명을 이해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인식론적 단계가 아니라고 한다. 이름들의 지시대상을 알아내는 것과 해명의 의미는 논리적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상이 현재(present)하건 아니건 이름들의 지시대상을 알아내는 것과는 관계가 없게 된다. 결국 이시구로의 대상에 대한 이해는 러셀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녀에 의하면, ?논고?의 대상은 지각적 대상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반면 러셀의 경우 우리가 어떤 단어의 의미를 아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의 단어는 기술(description)에 의해 이해되거나 직접 경험(acquaintance)에 의해 이해된다. 직접 경험에 의해 이해하는 경우는 사실상 논리적 고유명(logically proper name)으로 국한되는데, 이때 논리적 고유명의 지시대상은 반드시 현재해야 한다. 이시구로는 비트겐슈타인이 이러한 러셀의 입장을 따랐다고 볼 이유가 없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이름이 명제와 독립적으로 지시대상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상을 알기 위해서 대상에 대한 감각 경험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논고?의 대상은 외연적으로 개체화될 수 있는 경험 세계의 사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대상에 대한 반실재론적 해석은 맥기네스(Brian McGuinness)에 의해서도 지지되었다. 부분적인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맥기네스도 비트겐슈타인이 프레게의 노선을 따랐다는 이시구로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즉 명제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이름이 의미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 방도가 없으며, 따라서 ?논고?의 대상은 러셀류의 한정기술구에 의해 설명되거나 손가락 제스쳐에 의해 지적되어 동일시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름이나 단순기호가 의미하는 바인 대상은 그저 특정한 명제에서의 진리값의 가능성으로, 이름의 의미론적 역할은 다른 이름들과 결합하여 진리값을 가지는 명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대상에 대한 반실재론적 해석은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러셀의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며, 반복해서 지적했듯이 프레게의 ?산술의 기초?에 제시된 입장의 영향을 크게 강조하는 것이다. 이시구로나 맥기네스 모두 ?논고?의 전체적인 이해에 잘 들어맞도록 대상 개념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반실재론적 해석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과연 비트겐슈타인의 대상 개념이 프레게로부터 직접적이고도 전적인 영향을 받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증거라고는 단어의 의미는 명제 속에서 규정될 수 있다는 프레게의 언급을 연상시키는 ?논고? 3.3과 해명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3.263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반실재론적 해석은 비트겐슈타인이 러셀의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 있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에 대해서도 설명해야만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비록 러셀과 동일한 입장을 취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러셀의 강의를 1년여 동안 들었으며 학문적인 교유관계를 상당기간 유지했기 때문에 서로간의 철학에 있어서 유사성을 따져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몇몇 연구가들이 비트겐슈타인과 러셀과의 관계에 주목하여 ?논고?에서 프레게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러셀의 영향 또한 지대하다는 것을 밝혀내기에 이른다. 이들의 입장은 대상에 대한 실재론적 해석으로 요약될 수 있다.


3. 대상에 대한 실재론적 해석 I

?논고?에 제시된 대상을 실재론적으로 보는 해석은 비트겐슈타인이 프레게 보다는 러셀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 여기는 해석인데, 그 영향의 정도에 따라 다시 두 갈레로 나뉜다. 이들 모두는 ?논고?에 나타난 주된 사상을 러셀에서 영감을 얻은 논리적 원자론이라는데는 동의하지만, 그 논리적 원자론의 성격이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의 일반화인가 아니면 러셀과는 다른 종류의 논리적 원자론인가를 놓고 의견이 갈린다. ?논고?에서 전개되고 있는 논리적 원자론이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의 일반화라고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물론 ?논고?의 대상이 러셀이 말하는 감각소여(sense-data)와 유사한 직접경험(immediate experience)의 대상이라고 주장하지만, 러셀과 다른 종류의 논리적 원자론을 ?논고?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대상을 감각소여와 동일시했다는 주장은 너무 지나친 일반화라고 주장한다.
원래 ?논고?를 실재론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 -- 특히 대상을 현상적으로 보는 해석 -- 은 이미 1930년대에 비엔나 써클의 일부 구성원들에 의해 제시되었으나 그러한 해석이 체계적으로 전개되지는 못했다. 결국 그러한 견해는 1950년대 이후 ?논고?에서는 프레게의 영향이 더 크다는 해석에 묻혀버렸다. 그러나 ?논고?에 대한 실재론적 해석은 1980년대에 들어가면서 재등장하게 되는데, 그점에 기여한 사람이 페어스(David Pears)이다. 그는 러셀의 유고를 검토한 결과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나름대로의 논리적 원자론을 전개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런 와중에 힌티카(Jaakko Hintikka)는 ?논고?의 대상을 러셀의 감각소여와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입장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여기서는 먼저 페어스의 입장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힌티카의 입장은 다음 절에서 다루도록 한다.
페어스는 비트겐슈타인이 러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이론이 러셀의 그것과 똑같은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고 한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이 러셀의 이론을 어디까지 받아들였고, 어떤 부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는지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페어스는 언어에 있어서 기초 어휘들은 대상을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단어들로 이루어진다는 점과 이러한 직접적 지시대상들은 단순하다는 점 등은 비트겐슈타인이 러셀로부터 받아들인 내용이라고 한다. 반면 그러한 단순자가 감각소여라는 점은 비트겐슈타인이 러셀로부터 받아들이지 않은 점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에서 우리가 지각하는 유일하게 가능한 직접경험의 대상이 감각소여일 것이라고 규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페어스는 러셀이 감각소여를 단순자로 규정한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단순자가 현상적인 것인지 아니면 물리적인 것인지를 명확히 하지 않음으로써 단순자의 문제를 규정하지 않고 남겨두었다고 한다. 페어스는 스승과 제자 관계였던 두 철학자가 그와 같은 입장 차이를 보이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먼저 러셀의 경우를 보자. 러셀이 주장하는 논리적 원자론의 요체는 사실 언어(factual language)의 분석에 있다. 그리고 그러한 분석에서 우리는 어떤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단어가 지시하는 대상을 설명이나 기술에 의해서가 아니라 직접 경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러셀은 그러한 단순 대상을 감각소여라고 하는 우리의 경험에서 찾았으며, 그것을 논리적 원자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은 다분히 경험주의에 입각한 이론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아이디어를 계승하면서도 조금 다르다는 것이다. 러셀의 아이디어에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논리적 원자론을 귀결시켰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차이로 페어스는 비트겐슈타인이 러셀 처럼 사실 언어의 분석에서 직접경험의 대상을 지시하는 논리적 단순자인 이름에 도달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와는 달리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사실의 명제가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내적 구조를 결여한 대상을 지칭하는 단어의 레벨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 사실을 다루는 명제들을 분석하다 보면 내적 구조를 결여한 대상을 지칭하는 단어들로 이루어진 명제인 이른바 요소명제(elementary proposition)에로의 분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요소명제가 표상하는 사실은 서로 대응하는 내적 구조를 가진다. 그러나 요소명제를 이루고 있는 이름이 지시하는 대상은 어떠한 내적 구조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상들은 내적 구조를 가지지 않기 때문에 대상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요소명제는 서로 독립적일 수밖에 없다. 한편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분석이 실재론적이라 할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언어가 우리 자신의 창조물이 아닌 대상의 본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인 것이다. 페어스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적 원자론은 이것만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그러한 단순자를 지칭하는 단어를 이름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비트겐슈타인이 실제로 우리가 그런 레벨에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으며, 설사 우리가 그 레벨에서 언어를 사용한다고 했을 때 그 단순성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이 단순성의 기준으로서 경험론적 기준을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언어의 분석이 궁극적으로 직접경험에 기초한다는 논의는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분석은 아 프리오리(a priori)한 분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의 근거로서 페어스는 먼저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대상이 무엇인지의 예를 들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노트북?(Notebooks)에서 대상이 물리적 점(material point)인지 감각소여인지를 결정하지 못했으며, 그러한 비결정 상태는 ?논고?에서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페어스는 만약 비트겐슈타인이 러셀처럼 로크나 버클리의 문제에 집착한 철학자였다면 그러한 선택의 보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직접경험에 기초한 인식과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주요 문제로 삼은 영국 경험주의의 전통에서는 경험의 대상을 다루는데 있어서 필연적으로 사밀성(privacy)의 문제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논고?에서는 사밀성과 연관된 문제가 전혀 제기되지 않고 있으며, 현상학적 언어(phenomenological language)가 언급되는 1929-1930년에도 문제의식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의 태도로 볼 때, 그가 ?논고?에서 펼치고 있는 논리적 원자론의 내용이 로크, 버클리, 러셀로 이어지는 경험주의의 전통을 따른다기 보다는 칸트나 쇼펜하우어의 전통에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중요한 이유라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중기 저작에서 말하는 현상학적 언어라는 것도 결국은 칸트적 의미에서의 현상(phenomena)에 관한 언어를 뜻하는 것이며, ?논고?에서의 관심사도 ‘내가 발견한 것으로서의 세계’인 현상의 세계를 염두에 둔 것이므로 그의 실재론이 경험주의를 바탕으로 한 실재론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4. 대상에 대한 실재론적 해석 II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페어스는 비트겐슈타인이 경험주의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으며, 칸트주의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해석했다. 즉 칸트가 생각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한계에 관심이 있었던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생각에 대한 언어적 표현의 한계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현상의 본질이 무엇이겠는가의 문제에 대한 관심은 부수적인 것이 되고, 중요한 것은 그러한 현상의 세계는 주어지며 그것의 기초가 되는 단위로서의 대상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페어스의 해석은 비트겐슈타인을 러셀과 동일선상이 아니라 적절한 거리에 위치시키는 해석이다. 그러나 앞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힌티카는 그러한 해석에 만족하지 못하고 비트겐슈타인을 러셀과 동일선상에 위치시키는 해석을 내놓았다. ?논고?의 대상은 직접경험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대상이 러셀이 말하는 감각소여와 유사한 존재라는 것을 주장하는데 있어서 힌티카는 먼저 대상이 ‘말할 수 없는 것’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에서 시작함으로써 동시에 프레게의 영향도 인정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대상들이 있음을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 5.61에서 말하고 있듯이 어떤 특정한 대상이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거나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3.221에서 찾아질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대상들은 오로지 이름지워질 수 있을뿐이며, 기호들이 그들의 대표자라고 한다. 이때 우리는 대상들에 관해서 말할 수만 있을뿐이며, 대상들 자체를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무엇이 존재하는지는 말할 수 없고, 다만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만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힌티카는 개별적 대상의 존재 혹은 비존재를 말할 수 없다는 이러한 입장은 프레게의 입장과도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 프레게에게 있어서 존재라고 하는 것은 존재양화기호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 고계 술어(higher-level predicate)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힌티카는 이러한 대상의 존재의 특성은 그것을 러셀의 감각소여와 유사한 종류의 것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원래 1913년의 ?지식의 이론?에서 러셀은 우리가 하나의 명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명제에 등장하는 이름들이 지시하는 대상을 직접경험해야 할뿐만 아니라 그 명제의 논리형식(logical form)까지도 직접경험해야 한다고 보았다. 원자명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자명제의 논리형식을, 분자명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자명제의 논리형식도 역시 경험해야만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논리형식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분자명제의 논리형식은 원자명제의 논리형식으로 이해할 수 있고, 또 원자명제의 논리형식은 다시 대상의 논리형식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힌티카는 ?논고?에서 세계와 언어의 연결고리가 되고 있는 논리형식은 전부 대상의 논리형식으로부터 구성된다고 말한다. 각각의 명제에 각각의 논리형식이 따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해야 할 논리형식은 대상의 형식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대상들은 서로 결합하여 상상할 수 있는 어떠한 사실들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때 기초가 되는 동일한 대상들이 이러한 사실 또는 저러한 사실 모두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실을 나타내는 명제들은 다시 진리함수론에 의해 복합명제에로 구성이 가능해진다. 결국 이러한 구조에서는 모든 사실을 구성하는 밑바탕으로서의 대상이 제시된 것이기 때문에 이 또는 저 대상이 존재한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미리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상은 논리형식을 내재하고 있으며, 이때 대상이 포함한 논리형식은 대상들이 서로 결합하여 사실을 이루도록 하는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아 프리오리하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힌티카는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논리형식에 대한 입장이 러셀의 ?지식의 이론?에 나와있는 내용을 일부 수정하면서 발전한 것이기 때문에 그 대상의 성격을 러셀의 그것과 다른 종류의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넌센스가 될 것이라고 한다. 또한 힌티카는 대상의 논리형식이 모든 명제들의 논리형식을 규정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결국 명제의 구성요소들이 궁극적으로 명제의 의미를 결정한다는 프레게의 원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의 러셀로부터의 영향을 강하게 주장한다고 해서 프레게로부터의 영향이 과소평가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힌티카는 여러 문헌적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논고?가 충분한 설명과 논증으로 이루어진 저서가 아니라 아주 간결하게 씌어진 책이므로 그 안에서 어떤 증거를 찾으려는 노력 보다는 차라리 비트겐슈타인 스스로가 자신의 전기 사상을 비판하는 후기 저작들을 검토하는 것이 과연 ?논고?에서 그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적절히 판단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보고 있다. ?논고?의 대상에 관한 견해도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과거의 입장을 스스로 비판하는 것을 토대로 재구성해 볼 수 있다고 한다. 실로 비트겐슈타인은 ?탐구?의 한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자신이 ?논고?에서 말한 대상이 러셀의 개별자와 동일한 것이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름들이 실로 단순한 것을 지칭한다는 생각 뒤에 무엇이 놓여있는가? ?테아이테투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 . 그로부터 다른 모든 것들이 구성되는 원초적 요소들에 대한 정의(definition)는 없다. 왜냐하면 그 자체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름지워질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식으로 달리 규정할 수도 없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다른 어떤 규정 없이 이름지워질 수 있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어떠한 원초적 요소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원초적 요소들로 이루어진 것이 그 자체로 복합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 요소들의 이름들 역시 같이 결합함으로서 기술적 언어가 된다. 왜냐하면 말의 본질은 이름들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러셀의 ‘개별자’(individual)와 (?논리-철학 논고?에서의) 나의 ‘대상’(object)이 바로 그런 원초적 대상들이었다.

힌티카는 바로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대상’이 러셀의 ‘개별자’ 즉 감각소여와 유사한 것이었을뿐 아니라, 그러한 원초적 요소로서의 단순자는 있다 없다를 말할 수 없는 표현불가능한 것의 영역에 놓이게 됨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힌티카는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대상이 실로 ‘경험의 대상’이었음을 보이기 위해 ?논고?의 유아론을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논고? 5.6에서 “나의 언어의 한계가 나의 세계의 한계”라고 하고 있으며, 5.63에서는 “나는 나의 세계”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대상을 나의 경험의 대상이라고 이해하고, 그래서 나의 세계를 나의 경험의 대상들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세계로 이해할 때, 그 의미가 적절히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 결국 ?논고?의 대상은 이시구로의 해석과 같이 의미론적 필요성에 의해서 제시된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 또한 대상은 물리적 대상으로 이해될 수도 없다. 대상이 물리적 대상이라면, 그것은 ‘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나의 대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에 대한 보충적 지지근거로서 힌티카는 다시 ?철학적 언명?의 67절을 인용하고 있다. 거기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내가 너무도 기억력이 좋아서 나의 모든 감각인상들을 기억할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럴 경우 얼핏 보아서 어떤 것도 나로 하여금 그들 감각인상들을 기술하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이것은 전기(biography)가 될 것이다.” 내가 가지게 되는 모든 감각인상들을 기억해서 전부 기술한다면 그것은 곧 나의 전기가 될 것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언급은 나의 대상이 나의 세계를 이룬다는 ?논고?의 언급과 상충하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의 내용을 보충하여 우리로 하여금 각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결국 힌티카의 해석은 이시구로나 맥기네스의 대상에 대한 해석뿐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이 ?논고?를 쓸 당시 대상이 물리적 점인지 현상적 대상인지를 규정지을 수 없었다는 페어스의 입장도 받아들이지 않고, 대상을 현상적 실재인 감각소여와 같은 것으로 보는 해석이다. 힌티카는 위에 열거한 비트겐슈타인 스스로의 증언 외에도 그의 제자들의 강의노트로부터도 지지근거를 끄집어 내고 있는데, 이를테면 “감각소여는 우리의 개념의 원천이다”라든지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는 감각소여의 세계이다”와 같은 언급이 그 증거라고 한다. 이처럼 힌티카의 해석은 적어도 이시구로-맥기네스의 해석이나 페어스의 해석 보다는 문헌적 증거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특히 이시구로-맥기네스의 해석이 ?논고?의 한 두 명제에 근거한 해석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힌티카의 해석은 ?논고?의 핵심 사상중의 하나인 유아론의 문제와 씨름한 결과이며 또 그러한 해석과 더불어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큰 그림중의 하나인 ‘말할 수 없는 것’의 영역에 대한 설명과 연관시켜서 설명하면서 프레게의 입장을 또한 포섭하는 것이기 때문에 좀더 설득력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이러한 여러 해석들을 염두에 두고 비트겐슈타인이 남긴 문헌적 증거를 토대로 과연 ?논고?의 대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해 보도록 하자.


5.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논고?의 대상

이제 ?논고?의 대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논고?의 명제들을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1 세계는 일어나는 것의 총체이다.
2 일어나는 것, 즉 사실은 사태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2.01 이 사태는 대상들의 결합이다.
2.0124 만일 대상들이 주어지면, 동시에 모든 가능한 사태들도 또한 주어진다.

위에서 보듯이 대상들은 주어지는 것이며, 그것들이 주어짐과 동시에 세계가 어떤 식으로 구성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 또한 주어지게 된다. 결국 대상의 논리형식이 언어에서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를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게 될 것인지를 말할 수 있게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아니며, 세계를 이루는 대상들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도 다르다.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논리는 아 프리오리(a priori)한 영역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 프리오리한 논리의 영역에 대해서는 어떠한 경험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대상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는 경험적인 물음이며 아 프리오리한 방법으로는 대답이 불가능한 것이다. 필자는 비트겐슈타인이 대상의 성격에 대해서 침묵한 이유는 그가 대상이 무엇인지를 규정하지 못해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상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 ‘대상이 결합하여 세계를 이루는 것’은 엄청나게 다른 차원의 문제로서, 앞의 경우는 경험적인 차원이고 뒤의 것은 아 프리오리한 차원이기 때문이다. 아 프리오리한 차원은 우리가 경험하지 않고 알 수 있는 차원이다. 그러나 경험적인 차원은 경험을 통해서만 알려진다.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대상이 존재하는지 말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힌티카와 페어스 모두가 적절히 지적한 경험과 논리의 관계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언급이 여기서 매우 중요한 근거로 제시될 수 있다.

5.552 논리는 어떤 것이 어떠하다는 모든 경험에 선행한다. 논리는 “어떻게?”라는 질문에 선행하지만 “무엇?”이라는 질문에 선행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대상이 존재하는가의 물음에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은 대상이 원초적 요소라는 것을 밝히고 있으며, 그러한 대상은 이름에 의해 명명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결국 그러한 대상은 실제 경험에서 (손가락 제스쳐 등으로) 지적함으로써 보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예조차 들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이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을 지지해주는 구체적 사례를 비트겐슈타인의 중기 이후의 저작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930년대 초에 바이스만(Friedrich Waismann)은 “테제”(Theses)라는 글을 써서 ?논고?의 주된 원리들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계획했었다. 비트겐슈타인과 주기적으로 모임을 가졌던 비엔나 써클의 일원이었던 바이스만은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비엔나 써클에 알리는 공식전달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논리, 언어, 철학?(Logik, Sprach, Philosophie)라는 제목을 공표하면서 그것이 ?논고?의 입문서가 될 것임을 예고하였다. “테제”는 바로 그 책의 일부로 씌어진 것이었고, 따라서 “테제”의 내용은 ?논고?의 주내용을 해설하고 있어서 ?논고?에 펼쳐진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이해하는데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바이스만은 바로 “테제”에서 대상에 대한 이해를 돕는 언급을 하고 있다.

요소명제에 나타나는 기호들은 원초적 기호(요소적 기호)라고 불린다.
원초적 기호들은 정의에 의해 분석이 불가능하다.
원초적 기호들의 의미는 지적(pointing)에 의해서만 제시될 수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원초적 기호’라는 것은 ?논고?에서 대상을 지시하는 ‘이름’과 같은 것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비트겐슈타인이 ?논고? 3.26과 4.22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름은 원초적 기호로서 정의에 의해서 분할 또는 분해될 수 없으며, 직접적 결합을 통해 요소명제를 이룬다. 이처럼 바이스만의 언급이 ?논고?의 이해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할 때, 위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많은 사람들을 오도한 비트겐슈타인의 경구적 표현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위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3.26과 4.22에 덧붙여서 ‘이름’의 본성에 대한 확실한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즉 이름이 지시하는 바는 기술되거나 그 외의 어떤 방식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름들은 단순기호들이며, 이들 이름의 지시대상은 손가락 제스쳐에 의해서 지적함으로써 제시될 수 있을뿐이기 때문이다. ?논고? 자체에서는 명료하게 언급되지 않았던 러셀의 영향이 바이스만의 증언에 의하여 아주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러셀의 논리적 고유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논고?의 이름들이 나타내는 바는 대상을 지적함으로써 보여질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중요한 실마리가 우리로 하여금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이름과 대상간의 관계는 실로 러셀의 직접지의 이론으로부터의 직접적 영향을 반영하는 지적관계(pointing relation)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요소명제의 구성요소로서의 이름과 대상간의 이러한 관계는 이름과 명제에 의해 표상된 내용이 직접경험이라는 점에 의해 더욱 구체화된다. 바이스만은 “테제”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현상(경험)은 요소명제가 기술하는 바이다.

요소명제는 우리 경험의 내용을 기술한다. 다른 모든 명제는 그러한 내용의 확장일 뿐이다.

이처럼 바이스만의 “테제”는 요소명제가 직접경험에 주어진 바를 기술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름은 요소명제의 구성요소로서 논리형식을 내재하고 있는 대상을 지시한다. 또한 대상의 논리형식은 명제들이 가지는 전체 논리를 규정한다. 따라서 요소명제가 경험의 내용을 기술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름이 경험의 대상을 지시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까지 살펴 본 ?논고?에 간략하게 언급된 증거와 바이스만에 의한 간접적인 증거 외에도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실제로 ?논고?를 쓰던 당시에 이름과 대상간의 관계를 직접 경험하는 대상에 대해 논리적 고유명을 사용한 지적 관계로 보았음을 입증하는 예를 비트겐슈타인의 중기 저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언어게임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고 있는 ?갈색책?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실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현혹되기 쉬운 위험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이것’과 ‘저것’에 A와 B와 같은 이름을 부여하자고 제안할 때 가장 두드러지게 된다.” 여기서 언어게임의 도입과 함께 비트겐슈타인은 과거에 자신이 가졌던 원자론적 사고를 스스로 비판하고 있는 것인데, 그러한 비판 과정에서 은연중에 자신이 과거에 이름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를 취했었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즉 ‘이것’과 ‘저것’은 러셀의 직접지의 이론(theory of acquaintance)에서 논리적 고유명이라 불리운 것으로 바로 나의 직접 경험에 주어진 감각소여를 손가락 제스쳐와 더불어 지적하면서 이름할 때 사용하는 단어인데, 이제 비트겐슈타인은 과거에 그러한 논리적 고유명을 러셀식으로 사용하고 있었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셈이 된다. 언어게임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게 되면서 이름과 대상간의 지칭관계가 모든 의미를 규정한다는 생각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생각이 바로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위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6. 맺는 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체계는 간결한 문체와 생략된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으며, 또 자신이 주장하는 바에 대한 논증도 결여되어 있다. 특히 ?논고?의 경우 문체의 간결성은 그의 입장을 여러 갈레로 해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논고?에 제시된 대상의 성격이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를 가려내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논고?의 대상이 러셀이 말한 감각소여와 유사한 직접경험의 대상이라는 힌티카의 입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보고 가능한 근거를 제시해 보았다. 필자가 제시한 증거는 ?논고? 자체의 분석, 비트겐슈타인과 한때 교유했던 비엔나 써클의 구성원이 남긴 문헌,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중기 이후의 저작에서 스스로 자신의 전기 사상을 비판하면서 남긴 글들에 기초하고 있다. 물론 비트겐슈타인 스스로가 대상을 감각소여와 동일시하거나 직접경험의 대상과 동일시하고 있는 문헌 자료는 없다. 설사 그가 ?논고?를 쓸 당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그것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해줄만한 어떠한 문헌적 증거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필자가 제시한 증거들은 적어도 이시구로나 맥기네스 또는 페어스 등의 해석과 같이 대상의 본성을 다른 방식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보다는 상대적으로 훨씬 풍부한 문헌적 근거에 기초해 있다고 할 수 있다. 필자의 견해로 볼 때, 페어스의 해석이 이시구로나 맥기네스의 해석 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특히 페어스는 러셀의 유고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러셀이 1913년에 집필하고 있던 “지식의 이론”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이 두 사람의 서로 다른 논리적 원자론으로 귀결되고 있음을 매우 설득력있게 보인 바 있다. 그러나 페어스는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서의 관심을 영국 경험주의에서 영향받은 것 보다 칸트에서 영향받은 바가 더 큼을 강조하는 쪽으로 흐르고 말았다. 만일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이 로크, 버클리 보다는 칸트, 쇼펜하우어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면 페어스의 해석은 옳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수업이 전적으로 영국의 케임브리지에서 이루어졌다는데 주목하여 영국 경험주의의 뚜렷한 영향을 보이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대상 개념은 러셀의 직접지의 대상으로부터 유래한 일종의 감각소여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대상을 그렇게 해석할 때 ?논고?에 나온 얼핏보기에 신비감 마저 감도는 다음의 명제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6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5.61 논리는 세계에 스며들어 있다: 세계의 한계는 언어의 한계이기도 하다.
5.621 세계와 인생은 하나다.
5.63 나는 나의 세계이다.

위의 인용문중 일부는 이미 힌티카의 해석을 소개하면서 인용했던 명제들이다. 힌티카는 비트겐슈타인의 유아론을 분석하면서 그것이 내가 가지는 감각소여에 기초한 유아론임을 보임으로써 대상이 감각소여와 유사함 것임을 보이려 했다. 필자는 이 인용문의 분석을 통해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 칸트주의적 현상론으로 해석될 수 없음을 보이도록 하겠다. 이제 다시 위의 명제들을 좀더 자세히 분석해 보자. ?논고?의 대상을 직접경험의 대상으로 해석하지 않을 때, 위에 인용한 명제들은 그저 언어가 세계와 연결되어 있어서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반영하고 이해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대상이 감각소여와 같은 직접경험의 대상이라면, 위의 명제들은 매우 그럴듯하고 매끈하게 해석될 수있다. 대상들이 모여서 사실을, 사실들이 모여서 세계를 구성한다. 마찬가지로 대상을 지칭하는 이름들이 모여서 명제를, 명제들이 모여서 언어를 구성한다. 이름이 직접경험의 대상을 지칭한다면, 이름이 모여서 이루어진 언어는 곧 내가 경험한 대상들의 총체인 나의 경험 세계를 의미하게 된다. 그래서 나의 언어의 한계가 곧 나의 세계의 한계라는 5.6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5.621에서 말하듯이 세계와 인생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세계는 내가 경험한 사실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귀결로서 5.63이 나온다. 자아의 개념은 곧 경험의 총합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름이 언어라는 거대한 구조물을 구성하는 최소단위인 논리적 원자라고 할 때, 그에 대응하는 대상은 세계라는 구조물을 구성하는 최소단위로서의 벽돌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비트겐슈타인의 대상이 러셀이 말하는 감각소여의 일종이라고 할 때, 비트겐슈타인이 칸트적인 현상계(phenomena)와 본체계(noumena)의 이분법적 구도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위의 분석을 통해서 볼 때, 비트겐슈타인이 물자체와 그것의 현상적 드러남에 관심을 가졌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때로는 비트겐슈타인도 스스로 사용하고 있는 감각소여라는 용어가 러셀로부터 왔다는 것을 의심하기는 힘들다. 러셀의 감각소여는 알 수 없는 영역인 물자체의 세계를 제외한 현상계에만 국한된 것으로 해석될 수 없으며, 그 이유는 러셀 스스로 현상주의(phenomenalism)를 표방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하다. 러셀에게서 칸트식의 이분법은 별 의미가 없다.비트겐슈타인도 감각소여를 실재하는 무엇의 표상으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바가 진정한 실재(genuine reality)임을 언급한 바 있다. 이 말은 결국 비트겐슈타인의 대상 개념이 칸트의 영향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적절히 배제시켜 주며 대신 러셀과의 관련성을 지지해 주고 있다. 이처럼 비트겐슈타인의 대상 개념이 칸트 보다는 러셀의 영향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할 때, 비트겐슈타인을 현상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시도 역시 적절히 비판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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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f Wittgenstein's Objects


Byong-Chul Park

There have been many different interpretations of Wittgenstein's philosophy. The nature of Tractarian objects is one of the much diputed subjects in particular. One of the major reasons for the unsettled disputes is Wittgenstein's unique philosophical style, which contains hardly any arguments. The nature of Tractarian objects, too, is interepreted in many different ways. One influential reading is initiated by Hide Ishiguro who sees the objects of the Tractatus possess no independent existence. According to this reading, names that designate objects are mere dummy names introduced for the semantical purpose. Unlike this anti-realistic interpretation, David Pears and Jaakko Hintikka have claimed that Wittgenstein's objects are to be viewed as real entities. They both agree in that Wittgenstein puts forward a kind of logical atomism in the Tractatus. But while Pears thinks that Wittgenstein's logical atomism is different kind from Russell's, Hintikka sees that Wittgenstein develops his theory directly from Russell's logical atomism. In support of Hintikka's reading, I argue in this paper that Tractarian objects are variation of Russellian sense-data, i.e., the objects of immediate experi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