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시적인 것들의 분광(分光), 코스모스에서 카오스까지

나뭇잎숨결 2021. 8. 31. 03:44
시적인 것들의 분광(分光), 코스모스에서 카오스까지




신형철






혁명은 옛사랑이요 희망은 백일몽이라, 이 상투적인 삶을 어떻게들 견디시는가. 나의 사랑에는 풋내가 나고 당신의 사랑에는 쉰내가 나니, 이 상투적인 삶을 어찌하면 좋을까. 오늘이 어제 같고, 우리가 당신 같은 이 상투적인 세계는 따분한 모범생과 유치한 문제아들로 오늘도 만원사례다. 이 두 존재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세계의 상투성을 보호하고 육성한다. 세계의 상투성은 사유의 상투성이고 그것은 곧 언어의 상투성이다. 거꾸로 말하면, 상투적인 언어들이 상투적인 사유를 낳고 상투적인 사유가 상투적인 세계를 만든다.




시란 무엇인가? 상투형과의 전면전이다. 시는 후기자본주의, 한미FTA, 양극화 등과 싸우지 못한다. 그것들을 말하고 생각하는 상투적인 방식과 싸운다. 우선 상투적인 언어들을 전복할 것, 이것이 시인 카타콤의 조직 강령이다. 서사를 장착할 필요는 없다. 교훈도 옵션이다. 언어 그 자체를 직접 타격한다. 이것이 시인 카타콤의 행동 강령이다. 상투형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상투형과 타협한 시인들을 우리는 시인이라고 부를 수 없다. 상투적인 것은 시의 극우(極右)이고, 상투형의 전복은 시의 제1윤리다.




저 카타콤 조직은 그래서 불가불 정치학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구난방과 좌충우돌의 유희가 아니라 파천황의 변이를 도모해야 한다. 우연마저도 전략이어야 하고, 무의식마저도 전술이어야 한다. 그들이 상투형과 싸워서 만들어내는 저 변형과 이형은 물론 단일하지 않다. 스펙트럼을 통과하는 빛들이 제각각의 길을 찾아나가듯, 시적인 것들은 분광한다. 분광된 그것들을 ‘혼돈’의 정도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한쪽 끝에, 혼돈이 정돈되어 유기체를 형성한 코스모스(cosmos)의 세계가 있다. 유토피아의 순간적 현현을 도모하는 서정의 세계다. 다른 쪽 끝에, 생산적인 혼돈으로 충만한 카오스(chaos)의 세계가 있다. ‘부정의 변증법’을 도모하는 전위의 세계다. 물론 코스모스에도 부정성은 있고, 카오스에도 질서는 있다. 이 두 개념은 다만 시적인 것들의 파장을 구획해보기 위해 설정한 가상의 극단이다. 지난 계절에 출간된 시집들 중 가장 뛰어난 것들에 속하는 여섯 권의 시집을 저 두 극한 개념 사이에 배열해보려 한다. 현단계 한국시의 지형도가 얼마간 드러나길 바란다.






1. 코스모스, “매화는 매화대로 나는 나대로” ―도종환과 손택수


도종환의 새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 2006)을 읽었다. 그는 세간의 틈바구니에서 많이 아팠나보다. ‘자율신경실조증’이라고 들었다. 상처 입은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그는 충청북도 보은군 내북면 법주리로 들어가 엎드렸고, 스스로를 “빈 밭처럼 내버려”두었다. 거기서 소로(Thoreau)를 읽고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을 읽으면서 그들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시집의 인세는 ‘베트남 평화학교 짓기’ 사업에 전액 기증하기로 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의 이 이상한 ‘정착’이야말로 ‘유목’이다. 오늘날 ‘유목주의’는 해석의 오물을 뒤집어쓴 오욕의 개념이 되었다. 그것은 디지털 장비로 무장한 채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라이프스타일도 아니고, 국경을 넘나드는 투기자본의 ‘침략주의’도 아니다. 예컨대 시장을 떠나 시장을 교란하는 이 시인의 아름다운 일탈이야말로 유목의 본의에 부합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선택을 존중하고 또 경외한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시인과 시를 혼동하고, 정치적 올바름과 시적 올바름을 혼동한다. 그래도 되는 것일까? 표제작을 읽는다.






지난 몇십 년 화엄의 마당에서 나무들과 함께/숲을 이루며 한 세월 벅차고 즐거웠으나/심신에 병이 들어 쫓기듯 해인을 찾아간다/애초에 해인에서 출발하였으니/돌아가는 길이 낯설지는 않다/해인에서 거두어주시어 풍랑이 가라앉고/경계에 걸리지 않아 무장무애하게 되면/다시 화엄의 숲으로 올 것이다/그땐 화엄과 해인이 지척일 것이다/아니 본래 화엄으로 휘몰아치기 직전이 해인이다/가라앉고 가라앉아 거기 미래의 나까지/바닷물에 다 비친 다음에야 화엄이다
―「해인으로 가는 길」중에서






서정의 원리를 정갈하게 구현하고 있는 서시 「산경」을 지나면 독자는 위의 시와 만나게 된다. 그가 「산경」의 세계를 도모하게 된 경황을 설명하고 있는 시이기 때문에 서시 뒤에 놓였을 것이다. 화엄이란 무엇인가? 잡화엄식(雜華嚴飾)의 줄임말이다. 부처의 진리가 꽃처럼 장엄하게 핀 대동 세상을 뜻한다. 해인이란 무엇인가? 해인삼매(海印三昧)의 줄임말이다. 만물을 되비추는 일렁임 없는 바다처럼 번뇌가 사라진 마음 상태를 뜻한다. 시인의 현황을 배경 삼아 위 시를 읽어보니, 이 시인은 화엄을 사회적 참여의 층위에서, 해인을 개인적 수신(修身)의 층위에서 이해하고 있는 듯 보인다. “애초에 해인에서 출발하였으”나 “몇십 년 화엄의 마당”에서 보람을 누렸고, 이제 “심신에 병이 들어” 다시 해인으로 돌아가지만 이는 더 넓은 “화엄의 숲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말하자면 시인의 출세간은 향후의 입세간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출세간과 입세간의 변증은 “화엄과 해인이 지척일” 어떤 경지를 예비하고 있으니, “해인으로 가는 길은”은 말 그대로 고행일 것이다.




그러나 냉정히 말하자. 위 시는 ‘해인’과 ‘화엄’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이곳은 완벽한 추상의 세계다. 우리는 ‘해인’과 ‘화엄’이 시어로서의 자격을 갖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실 해인과 화엄이란 나쁘게 말하면 그 자체 이미 죽은 은유이며, 좋게 말하면 그 단어가 이미 숭고한 배경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가외의 성스러움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단어다. 화엄과 해인의 세계를 노래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은 화엄과 해인을 직접 말하지 않는 것이고, 가장 나쁜 선택은 화엄과 해인을 직접 말하는 것이다.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 ‘세계’를 개시(開示)해야 한다. 위의 시는 개시하지 않는다. 스스로 믿고 있을 뿐이다.




“그땐 화엄과 해인이 지척일 것이다”라는 미래완료형을 음미해보라. 그리고 시인의 산문에 인용되어 있는 시 「축복」이 그와 이웃하고 있는 산문 문장과 거의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풀어져 있다는 점을 확인해보라. 우리는 이 깨달음의 미래완료형이 갖고 있는 위험을 지적해야만 하고, 독자를 긴장하게 하기보다는 드러눕게 하는 언술의 위험을 인식해야만 한다. 바로 거기에 소로와 니어링의 (삶이 아니라) ‘책’과 도종환의 (삶이 아니라) ‘시’가 함께 나눠갖고 있는 아쉬움이 있다. 저 미래완료의 깨달음과 부드러운 언술은 세속도시의 갑남을녀들이 현실을 ‘견디게’ 하는 강장제가 될 수 있다. 귤이 회수를 건너 탱자가 되듯, 유목이 깨달음의 언술을 건너 웰빙이 된다. 그의 시가 법주리의 유정물들 ‘옆에’ 서서 ‘옆의 시학’ (이문재)을 실천할 때 그의 시는 「산경」이나 「산가」와 같은 따뜻한 구체의 세계와 연대하지만(“매화는 매화대로 나는 나대로”의 그 역설적 연대!), 그가 해인과 화엄의 경지를 서정적으로 설법할 때 그의 시는 추상의 세계에 머물고 만다(일일이 거론할 수 없지만, 이 두 경향은 시집 전체에 골고루 흩어져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는 시와 시인을 혼동하지 않는다. 시인의 선택 앞에서 우리는 옷깃을 여민다. 그러나 그의 시 앞에서 우리는 ‘해인으로 가는 길’에 왜 시가 필요한 것인지, 과연 시가 필요하기나 한 것인지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손택수의 시집 『목련 전차』(창비, 2006)를 읽었다. 손택수의 서정시를 좋은 의미에서 모범답안이라 부를 수 있다. 근래 읽은 가장 인상적인 자서를 인용한다. “아버지가 그랬다. 시란 쓸모없는 짓이라고. 어느 날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기왕이면 시작했으니 최선을 다해보라고. 쓸모없는 짓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게 나의 슬픔이고 나를 버티게 한 힘이다.” ‘쓸모없는 짓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시인의 직업윤리인 줄은 잘 알겠다. 그런데 그것이 ‘슬픔’이고 ‘힘’이라니. 문득 우리의 날숨이 가지런해진다. ‘슬픔’과 ‘힘’이 저렇게 협력하여 서정의 성채 하나를 이렇게 이룩하였다. 시집의 문패인 ‘목련 전차’부터가 아슴아슴하다. 송찬호의 ‘동백 열차’ (「동백 열차」)가 “길길이 날뛰던 무쇠 덩어리”를 식물성으로 단장했다면, 손택수의 ‘목련 전차’는 거꾸로 식물성의 목련을 “사라지지 않는/생명의 레일을 따라/바퀴를 굴리는 힘”으로 발전(發電)시킨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의외로운 결말의 자연스러운 따뜻함도 있다. “한 량 두 량 목련이 떠나간다/꽃들이 전차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든다/저 꽃전차를 따라가면, 어머니 아버지/신혼 첫밤을 보내신 동래온천이 나온다”(「목련 전차」). 이 결말에 이르기까지 이 시에는 인위적으로 기운 자국이 없다. 마음을 선뜩하게 하는「추석달」같은 시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날도 손님이 있겠어 누나 간판불 끄고 탕수육이나 시켜먹자, 그렇게 재차 졸라대고만 있었는데


그 말이 무슨 화근이라도 되었던가 그날따라 웬 손님이 그렇게나 많았는지, 상한 구두코에 광을 내는 동안 퉤, 퉤 신세 한탄을 하며 구두를 닦는 동안


누나는 술 취한 사내들을 혼자서 다 받아내었습니다 전표에 찍힌 스물셋 어디로도 귀향하지 못한 철새들을 하룻밤에 혼자서 다 받아주었습니다


날이 샜을 무렵엔 비틀비틀 분화장 범벅이 된 얼굴로 내 어깨에 기대어 흐느껴
울던 추석달


―「추석달」중에서






스무 살의 화자는 안마시술소에서 ‘현관보이’로 일한다. 추석날 ‘김양 누나’와 ‘나’만 가게를 지킨다. 손님이 올까 싶은 명절날이었건만 그날따라 손님이 밀려든다. “누나는 술 취한 사내들을 혼자서 다 받아내었습니다”라고 화자가 회상할 때 이 불편하면서 아픈 정서는 실로 ‘사실 그대로’가 촉발하는 답답한 안타까움이다. 이어 “날이 샜을 무렵엔 비틀비틀 분화장 범벅이 된 얼굴로 내 어깨에 기대어 흐느껴 울던 추석달”에 이르기까지 이 시에도 역시 기운 자국이라고는 없다. ‘김양 누나’의 얼굴이 ‘추석달’로 비약하는 저 순간은 불가피하고, 화자의 진정(眞情) 또한 의심하기가 어렵다. 손택수의 좋은 시들은 이렇게 무위의 기교로 지상의 한순간을 스크랩한다. 깨달음의 발설 이전에 실감이 있고, 실감의 감염 이전에 사실이 있다. 사실이 저절로 실감을 낳고, 실감이 저절로 깨달음을 낳는 이 순간이야말로 ‘서정적으로 올바른’ 순간이다.


그러나 손택수의 시도 아주 드물게 서정의 함정에 빠질 때가 있다. 예컨대 절집 처마 아래에서 말라가는 메주를 노래한 시 「메주佛」이 있다. 소재가 주어졌으니, 서정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자극’이 있어야 하고, ‘반응’이 있어야 하며, ‘판단’이 뒤따라야 한다. 우선 서정적 자극. 염불을 들어야 메주가 잘 뜬다고, 그래야 곰팡이가 알맞게 피어오른다고, 보살님이 메주 아래에서 합장을 한다. 이 자극을 받아 시인의 서정적 반응이 이어진다. “겨울 햇살과 바람과 먼지와 눈 내리는 소리까지/눈 속의 먹이를 구하러 내려온 산짐승 울음까지//몸속에 두루 빨아들여 피워내는 메주 곰팡이”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서정적 판단에 도달하면서 시는 종결된다. “나무아미타불, 자연 발효시킨 부처님이시다”. 메주가 부처님으로 비약하는 이 서정적 판단의 순간은 왜 불편한가. 한 편 더 읽자. 「화엄 일박」이라는 시다. 시인은 구례 화엄사에 갔다. 절집 기둥과 처마마다 구멍이 뚫려 있다. 그 안을 들여다보던 시인은 다음과 같은 서정적 판단에 도달한다. “화엄은 피부호흡을 하는구나/들숨 날숨 온몸이 폐가 되어/환하게 뚫려 있구나”. 여기서도 우리는 다시 주춤하게 된다.


메주가 자연발효된 부처님이라는 진술과 화엄은 피부호흡을 한다는 진술에서 우리를 버성기게 하는 것은 물론 ‘부처’와 ‘화엄’이다. 더 엄밀히 말하면 부처와 메주가 연결되는 그 ‘순간’, 화엄이 피부호흡과 연결되는 그 ‘순간’이다. 두 개체의 은유적 연결은 개체의 실체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을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연결의 순간은 실로 마술적 실체변환의 순간이고 거의 종교적 창조행위의 순간이다. 그런데 그 도약이 이렇게 경쾌해도 되는 것일까? 여기에서 부처와 화엄은 서정적으로 포섭되면서 제 실체를 새롭게 부여받기보다는 오히려 본래의 그것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은 어쩌면 사색과 고투의 산물이기보다는 서정의 메커니즘이 자가발전으로 움직일 때 나타나는 어떤 양상이 아닌가.


이런 대목들에서, 이 시인이 능란하게 구사하는 서정적 무위의 기교는 시를 ‘의식’하는 인위의 기교에 문득 자리를 내주고 만다. 무위의 기교는 독자와 나란히 간다. 그러나 인위의 기교는 독자를 추월하거나 독자에 뒤처진다. 예컨대 「오줌 뉘는 소리」에는 “쉬-, 쉬-, 하고 이어지는 할머니의 오줌 뉘는 소리”를 ‘시(詩)-, 시(詩)-,’로 번역하는 대목이 있다. 이미 준비된 결론이 과정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냈다는 느낌을 주거니와, 시가 독자를 앞서간 경우다. 한편 「아내의 이름은 천리향」은 “너 서럽고 갸륵한 천리향아”로 마무리된다. 참았어도 좋았을 영탄이거니와, 시인이 독자보다 늦게 목적지에 도착한 경우다. 그러니 그가  「자기라는 말에 종신보험을 들다」나 (「거꾸로 박힌 비늘 하나」와 같은 시에서 보여준 세계, 시인이 독자의 손을 잡고 함께 목적지에 도착하는 저 세계에 우리의 눈길은 자꾸 머무는 것이다.


덧붙여 말하거니와, 이 시집의 해설자는 공교롭게도 우리가 앞서 언급한 「메주佛」과 「화엄 일박」을 거론하면서, 손택수의 시가 “삼라만상의 우주적 존재원리를 체득하고 구현하는 화엄의 노래로 귀착되고 있”다고, 혹은 「오줌 뉘는 소리」를 거론하면서 “대지적 삶의 존재원리를 견성하는 경지에 도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홍용희, 「대지의 문법과 화엄의 견성」). 우리는 이 시인이 ‘삼라만상의 우주적 존재원리’를 체득하고 구현하는 가객이 아니라고, 그가 ‘대지적 삶의 존재원리를 견성하는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개별 시편이 특정한 경지를 열어젖히는 그 존재론적 사태를 ‘서정’이라는 메커니즘이 일으키는 착시효과와 분별해야 한다고 하고 싶은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화엄과 견성이라는 아득한 경지로 서정의 자리를 끌어올리기보다는, 이 시인이 정확히 지적한 대로, ‘쓸모없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일의 ‘슬픔’과 ‘힘’이 서정의 본령이자 위력이라는 쪽에 내기를 걸겠다. 서정이란 실패할 때만 아름다울 수 있는 희귀한 세계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도종환과 손택수의 서정시들은 삶을 ‘총체적’으로 ‘진단’하길 원한다. 우선 ‘총체적’일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세계가 근본적으로 ‘선형적’이기 때문이다. 서정이라는 메커니즘이 작동하면서 자극, 반응, 판단이 연쇄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은 직선이다. 앞엣것이 뒤엣것을 예비하고, 뒤엣것이 앞엣것을 되비춘다. 독자에게 현재가 디스토피아임을 간접적으로 설득하고, 도래해야 하는 유토피아를 순간적으로 도모한다. 한편 ‘진단’이 가능한 것은 이들의 세계가 어떤 ‘근원’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원이란 인간과 문명이 돌아가야 할 ‘오래된 미래’다. 그것의 이름은 해인이거나 화엄이며, 혹은 농경사회의 유기체적 질서다. 이와 같은 ‘총체적 진단’의 태도가 이들의 시를 견인한다. 카오스를 조율하고 코스모스를 구축하는 작업은 이들의 위력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한계의 원인이다.








3.카오스 “부르주아에 대한 고전적인 적의” ― 이장욱과 이근화


이장욱의 시집『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 2006)을 읽었다. 이장욱의 시는 21세기의 모더니즘이다. 거대서사의 몰락이 가져온 허망도 이미 통과했고, 386세대의 회한도 이미 털어버렸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인공낙원이 제공한 실없는 쾌락에도 이미 싫증이 나버린 시대의 모더니즘, 이 모든 것을 다 살아내느라 너무 늙어서 다시 아이가 되어버린 모더니스트의 모더니즘이다. 21세기에도 모더니즘은 가능한가? (1) 사물화된 세계 속에서 영혼이 평평해진 이들이(“나는 펭귄처럼 무심해졌다”), (2) 파편화된 세계 속에서 서로 엇갈리기만 하는 장면들을(“너에게 나는 소문이다”), (3) 기의를 잃고 관절만 남아 삐걱거리는 언어들로 그려낼 때에도(“쿠바는 쿠바, 아바나는 아바나”),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는가? 있다. 그의 시가 이를 실증한다. 그의 시는 비선형적인 방식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고, 프랙탈(fractal)의 형식으로 서로 닮아 있으며, 우연의 형식으로 무연히 씌어진다. 괜찮다면, 이 모든 특질을 통틀어 카오스의 미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예컨대 이런 시가 있다.






너에게 나는 소문이다/나는 사라지지 않지./나는 종로 상공을 떠가는/비닐봉지처럼 유연해./자동차들이 착지점을 통과한다./나는 자꾸/몸무게가 제로에 가까워져/밤새 고개를 들고 열심히/너를 떠올렸다./속도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야./사물과 사물 사이의 거리가 있을 뿐./나는 아무 때나 정지할 수 있다./완벽하게 복고적인 정신으로 충만하고 싶어./가령 부르주아에 대한 고전적인 적의 같은 것./나를 지배하는/기압골의 이동 경로, 혹은/저녁 여덟시 홈드라마의 웃음./나는 명랑해질 것이다./교보문고 상공에/순간 정지한 비닐봉지./비닐의 몸을 통화하는 무한한 확률들./우리는 유려해지지 말자./널 사랑해.


「근하신년―코끼리군의 엽서」전문






이장욱 시의 한 전형이다. 새해를 맞아 코끼리군이 ‘나’에게 엽서를 보내왔다. ‘코끼리군’은 「좀비 산책」의 ‘좀비’를 떠오르게도 하고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엘리펀트맨>을 생각나게도 한다. 그는 정신적으로 죽어 있거나 사회적으로 배제된 자처럼 보인다. 혹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사물화된 사회 속에서 영혼이 평평해진’ (1) 인간, 21세기 모더니즘의 페르소나가 될 자격이 있다.




좀비이자 엘리펀트맨이고 혹은 코끼리군인 그가 자신의 유령적 특질을 고백한다. 그는 ‘소문’과 같은 존재여서 사라지지 않고 떠돈다. 비닐봉지처럼 유연하다. 무게는 제로에 가까워지고 있어서 아무 때나 정지할 수 있다. 반면에 자동차들은 무겁다. 정지선을 지키지 못하고 이내 착지점을 통과하기 일쑤다. 관성의 법칙 때문이다. 자동차들은 또한 빠르다. 그러나 ‘속도’(=거리/시간)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우리들 사이를 가르는 이 ‘거리’는 여전히 걸 말이다. 혹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제아무리 빠른 자동차를 타고 다닌들 우리가 ‘파편화된 세계 속에서 서로 엇갈리는’ (2) 존재들인 건 변함없으니 말이다. 비닐봉지에 비견되는 ‘코끼리군’과 자동차로 상징되는 ‘현실’은 이렇게 대립하면서 불화한다.




그래서 코끼리군은 거꾸로 가려고 한다. ‘완벽하게 복고적인 정신’으로 ‘부르주아에 대한 고전적인 적의’로 무장하면 어떨까 묻는다. 다름아닌 21세기의 모더니스트 히어로가, 다름아닌 ‘부르주아에 대한 고전적인 적의’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물음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날씨(‘기압골의 이동 경로’)나 텔레비전(‘저녁 여덟시 홈드라마’) 따위에 ‘지배’당하는 현대인에 불과하지만, 그래서 존재감이 희미한 ‘비닐봉지’ 같은 존재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존재 양상은 거꾸로 ‘무한한 확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는 명랑해져도 될 것이지만, 그러나 부르주아적인 유려함은 사양해야 할 것이다. 혹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기의를 잃고 관절만 남아 삐걱거리는 언어들’ (3)을 포기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유려해지지 말자. 너를 사랑해.” 이것이 코끼리군의 마지막 말이다.




이렇게 선형적으로 재배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시가 갖는 매력은 이 순간 사라져버린다. 그의 시는 비선형적인 방식으로 혹은 카오스적인 방식으로 모종의 질서를 구축하고, 그 ‘체제 아닌 체제’가 ‘질서 아닌 질서’를 형성하면서 미묘한 매혹을 산출한다. 예컨대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상투적인 연결을 일그러뜨리고(‘완전한 밤’ ‘19세기의 비’ ‘아프리카 식 인사법’ ‘10년 후의 야구장’ 등등의 제목을 보라). 한 편의 시 안에서 어미의 통일성을 의도적으로 깨며(위 시의 첫 세 문장의 종결어미는 각각 “~다” “~지” “~해” 등이며, 다른 시에서도 이 어비들은 교대로 출현한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논리적 접속관계를 꾸준하게 헝클어놓는 것(“너와 단절되고 싶어/네가 그리워”) 등이 그의 스타일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 스타일은 서정적인 코스모스의 세계가 흔히 빠지곤 하는 상투성의 함정을 요령껏 피해가면서, ‘유려한’ 부르주아의 미학을 냉소한다. 그의 시는 부르주아에 대한 ‘현대적인’ 적의의 산물이다.


 
 
상상력의 층위에서 어떤 근본적인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세대에게는 가장 자연적인 풍경이 어떤 세대에게는 가장 인공적인 풍경으로 지각된다. 어떤 세대에게는 가장 현실적인 풍경이 어떤 세대에게는 가장 환상적인 풍경으로 인지된다. 그 지각변동의 근저에는 농경사회의 기억을 소유하고 있는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의 차이가 있다. 손택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흙을 먹어본 기억”이 있는 세대와 없는 세대의 차이라고 해도 좋다. 서정이란 어떤 근원을 되돌아보는 행위이고, 흔히 ‘진정성’이라 불리는 존재의 어떤 중핵으로 육박해들어가려는 노력이며, 상실된 코스모스를 회복하려는 실천이다. 그리고 그것은 농경사회의 이미지들을 불가불 거느리곤 한다. 그러나 근원이 없는 세대, 근대적인 의미의 진정성을 불신하는 세대, 코스모스를 가져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카오스와 더불어 자라온 세대에게 그와 같은 농경적 서정이란 지극히 인위적인 인공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 코스모스의 자식들과 카오스의 아이들 사이의 차이는 엄연하다. ‘현실’을 지각하는 인식의 메커니즘과 ‘시적인 것’을 감지하는 감각의 메커니즘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이 지각변동은 그 무슨 당쟁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운 토론의 주제여야 한다. 우리가 읽은 여섯 권의 시집은 이 계절의 가장 밝은 분광일 뿐 아니라 향후 있을 토론의 가장 탁월한 참조물들이 될 것이다.



 

*<2006 문학동네 가을호>에서 옮겼습니다.
 

 

 

름의 인상에 대한 겨울의 메모/이장욱

  

 

  내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도시가 불타고

  인생은 끄덕끄덕 흘러갔다.

  정직한 날씨였다.

  가급적 멍하니 존재하기 위해

  자세를 낮추는 개가 있고

  뜨거운 잎새들 사이로는

  제설차가 지나갔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서로에게서 멀어졌다.

  두터운 외투를 입고 여름의 아지랑이 속으로 들어가면

  바그다드의 폐허를 걸어가는 펨므가 있고

  폭격기가 날아가고

  여름의 아이들이 있었다.

  수평선 너머에서 어제의 잠 속으로 파도가 밀려우자

  우리는 서로를 등진 채 힘껏 달렸다.

  정직한 날씨였다.

  우리는 겨울에 다시 만나

  지친 개처럼

  뜨거운 혀를 내밀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