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시기는 우리에게 왜 필요한가?
사순 시기(四旬時期, 그리스어: Τεσσαρακοστή, 라틴어: Quadragesima, 영어: Lent)는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교회력 절기를 말한다. 초대교회부터 내려온 절기이다. 또한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부활절 일자를 확정하며 확인한 절기이다.
사순절의 이름은 성서 그리스어인 헬라어로 40을 의미하는 어원에서 나온 '테사라코스테'(그리스어: Τεσσαρακοστή)의 번역 단어이다. 이미 보편교회 시기에도 거행되었던 절기로, 재를 머리에 얹거나 이마에 바르며 죄를 통찰하는 재의 수요일로 시작되며, 파스카성삼일 전 40일(사순,四旬) 기간 동안 지킨다.
기독교에서 동방전통과 서방전통의 사순절의 차이가 있다. 동방 교회 전통 지역에서는 매주간 5일만을 기간으로 여기고, 주일을 40일 날짜에 포함하지 않는다. 부활절 이전 8주간이 사순절이 된다. 서방 교회 전통인 천주교에서는 재의 수요일 부터 성삼일 직전까지,그리고 개신교에서는 주일을 제외하고 토요일을 포함한 40일을 사순절로 지킨다. 즉 천주교는 전례개혁 후 원래 사순절의미를 복구시켰다. 개신교는 재의 수요일부터 성토요일까지, 주일을 제외시키고 날수를 세면 40일이 된다.[1] 이날에는 금식 등의 자기 절제와 회개를 한다. 부활절 이전에 예수의 십자가상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절기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성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은 후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 받았던 사건을 떠올리기도 한다. 부활절 바로 전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도 한다.
사순절의 '40'이라는 시간과 '광야'라는 공간적 의미는 무엇인가?
중대한 사건 준비하는 기간 니체아 공의회 이후 정해져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대축일 전 성토요일까지 40일간을 말한다. 사순절은 본래 제40일을 의미하는 라틴어 Quadragesima를 번역한 것으로 성서에서도 40일은 중대한 사건을 준비하는 기간 으로 상징된다.
노아의 홍수, 모세가 십계를 받기 전 단식, 호렙산에서 엘리아의 기도,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활 전 광야에서의 단식, 예수 부활 후 승천하기까지 등 모두 40이라는 숫자와 연관된다. 하지만 부활 축제 준비시간으로서 40일이 오늘날과 같이 처음부터 생겨난 것은 아니다.
초대교회 시대에서 3세기초까지는 기한을 정하지 않고 부활절 전 2~3일 동안 예수의 수난을 기억했다. 그런데 4세기부터 성삼일이 생겨났고,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무덤에 묻히심과 부활을 포함해 부활축제 준비를 해야겠다는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니체아공의회(325년) 이후 사순시기가 40일로 정해졌다. 처음에는 이 40일을 옛 성삼일부터 역산해 40일의 시작이 오늘날의 사순 첫주일이었다(7일×5주간+5일(목요일까지)=40일).
그러나 재를 지켜야겠다는 사상과 함께 40일의 계산법이 달라졌다. 옛 부활 성삼일 전까지 주일을 제외하고 34일간 재를 지켰다 (6일×5주간+4일(성목요일까지)=34일).
또 옛 성삼일 중 성금요일과 성토요일에는 사순절 이전부터 재를 지켜왔으므로 그 2일을 가산하면 36일간 재를 지킨 셈이다. 그러나 6세기 초에 이르러 실제적으로 40일간의 단식을 원했기 때문에 사순 첫주 이전 수요일부터 단식을 시작하고 사순절의 시작이 재의 수요일이 됐다.
성경에서는 ‘광야’라는 용어가 ‘사막’이라는 용어와 거의 같이 사용되고 있는데, 광야는 대개 건조하고 사람이 살기 힘든 불모의 땅을 가리킨다. 팔레스티나에서 광야라고 할 때는 다음의 몇 가지 형태의 지대를 염두에 두고 있다. 즉 바위나 모래로 이루어진 황무지뿐만 아니라 가시밭, 산악 지대, 숲 그리고 목축이 가능한 목초지나 대초원 등이다. 팔레스티나의 광야에는 아주 짧지만 비가 오는 시기도 있고(3월-5월 초) 그곳의 유목민들이나 반유목민들에게 물을 공급해 주는 샘과 오아시스도 있다.3) 팔레스티나에서 광야는 대부분 동쪽과 남쪽 지역에 있었는데 성경에도 광야의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즉 브에르 세바, 벳 아웬, 수르, 에탐, 다마스쿠스, 신, 친, 시나이, 파란, 에돔, 카데스, 모압, 크데못, 지프, 마온, 엔 게디, 유다, 기브온, 여루엘, 트코아 등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광야는 의미가 깊다. 그들은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광야에서 40년 간을 지냈다. 이 광야 체험에 대한 기억은 이스라엘 역사 전체에 걸쳐서 생생하게 살아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시험과 시련의 장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하느님과의 친교의 장소로서 그분의 보호와 은총을 체험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구약 성경에서 광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닌 경우가 많다. 광야는 귀신과 해로운 짐승이 출몰하고 스산한 울음소리가 들려오며 바람이 휘몰아치고 씨앗을 뿌릴 수 없으며 사람이 살지 않는 위험과 고난과 죽음의 영역 으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배고픔과 목마름과 상실이 있는 끝없고 무서운 나쁜 곳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렇다고 광야라는 이미지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긍정적인 이미지도 갖고 있다. 그곳은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했듯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해 주시는 곳이고 보호와 영적 쇄신의 장소가 되기도한다. 하가르와 모세와 엘리야는 광야에서 하느님을 만나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 다윗이 장래를 위해 필요한 훈련을 받은 곳도 광야였다.
구약 성경에서는 광야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을 표현하기도 했다.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도시와 나라를 사막으로 만드실 것이다.19) 하지만 성령이 쏟아져 내려오는 구원의 때에 사막은 꽃과 나무가 무성한 낙원으로 바뀌어 정의의 터전이 되고 그곳에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광야는 고행이나 수련, 정화, 기도의 장소로 묘사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극기의 생활을 하면서 회개와 세례를 선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공적인 직무를 시작하기 전에 단식하시고 기도하시며 광야에서 40일을 보내셨다. 예수님께서 공적인 직무를 수행하시는 동안 그분께 광야는 기도의 장소로서 아버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셨던 곳이었다.
사순시기, 은총을 준비하는 축복의 시간으로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 회개하고 기도하는 사순 시기이다. 지난 호 ‘재의 수요일’ 전례 의미에 이어 사순 시기에 관해 정리했다.
▨ 사순 시기
사순 시기는 주님의 수난과 희생을 기념하는 시기이다. 주님의 수난은 단순히 주님께서 당하신 고통 자체로서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부활과 직접 연결돼 있다. 교회는 이 시기를 “파스카 신비의 경축을 준비하게 하는 때”(「전례 헌장」 109항)라고 한다.
사순 시기는 ‘재의 수요일’부터 파스카 성삼일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 전까지 기간을 말한다. 이 기간에 ‘사순 제1주일’부터 ‘주님 수난 성지 주일’까지 모두 6번의 주일을 지내는데 주일은 사순 시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또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성주간’이 시작되며, ‘주님 만찬 성목요일’ㆍ‘주님 수난 성금요일’ㆍ성토요일ㆍ파스카 성야의 3일간을 ‘파스카 성삼일’이라 해서 사순 시기와 구분한다.
재의 수요일부터 주님 만찬 성목요일까지 통상 40일이라고 해서 ‘사순’(四旬)이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38일간이다.
▨ 40의 성경적 의미
사순 시기는 본래 40일을 의미하는 라틴말 ‘Quadragesima’(콰드라제시마)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성경에서 ‘40’은 하느님을 만나기 전 거치는 정화와 준비의 기간을 뜻한다.
하느님께서 홍수로 새 세상을 준비하실 때 40일간 비가 내렸다.(창세 7,6-24) 또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전 시나이 산에서 단식하며 40일간 지냈다.(탈출 24,12-18; 34,28) 이후 모세는 우상숭배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십계명 판을 부순 후 다시 40일간 밤낮으로 기도한 후 십계명 판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다.(신명 9,15-29) 아울러 엘리야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40일간을 걸어서 호렙 산으로 갔다.(1열왕 19,8)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복음을 선포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간 단식을 하며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다.(루카 4,1-13; 마태 4,1-11; 마르 1,12-13)
이처럼 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과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참회와 속죄로 자신을 정화하고 준비할 때 40일이라는 기간을 정해 놓고 행했다. 이 성경의 전통을 교회가 고스란히 받아들여 40일간 기도와 절제, 희생을 통해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고 있다.
▨ 사순 시기 전례
사순 시기는 하느님의 구원 신비를 총체적으로 드러내는 주님의 파스카를 준비하는 때다. 그래서 교회는 사순 시기 동안 대축일을 제외한 모든 미사 중에 부활의 기쁨을 노래하는 대표적인 환호인 ‘대영광송’과 ‘알렐루야’를 노래하지 않는다. 사제 제의 색도 통회와 보속을 상징하는 ‘자색’(보라)으로 바뀐다. 제단 꽃장식도 할 수 없다.
사순 시기 주일은 주님의 축일과 대축일에 우선 한다. 사순 주일과 겹치는 대축일은 토요일에 미리 거행된다. 특히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파스카 성야 미사까지의 성주간은 전례주년의 1순위라 할 만큼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사순 시기 전례는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볼 수 있다. 하느님 자녀로 태어난 세례에 대한 회상과 준비, 그리고 참회와 보속이다. 사순 제1ㆍ2ㆍ6주일 미사 독서 주제는 해마다 모두 같다. 사순 시기 각 해의 고유한 주제를 보려면 사순 제3ㆍ4ㆍ 5주일의 독서들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된다. 2020년(가해)에는 사순 제3ㆍ4ㆍ5주일의 주제가 각각 생명의 물, 빛, 부활에 초점을 맞추며 요한복음에서 본문을 선택하고 있다.
▨ 사순 시기 생활
사순 시기는 주님 부활을 준비하는 기간으로서 고행 자체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제대로 맞기 위한 준비, 즉 정화와 성화(聖化)의 시기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이 기간에 주님 부활을 준비하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극기와 희생을 통해 기쁨 중에 주님의 수난에 참여해야 한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부활 대축일을 잘 준비하기 위해 사순 시기 동안 회개와 보속, 기도의 삶을 살도록 권고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의미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자주 바치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단식과 금육, 기도와 희생을 실천한다.
하지만 교회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가르친다. 진정한 회개와 보속의 삶은 개인적이고 내적인 절제와 희생뿐 아니라 외적인 실천이 동반되어야 한다. 절제와 절약을 통해 모은 결실을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자선이 뒤따라야 한다. “사순 시기의 보속이 단지 내적이고 개인적이어서는 안 되고 동시에 외적이고 사회적이어야 한다.”(「전례 헌장」 110항)
프란치스코 교황도 사순 시기 동안 “서로 용서하고 기도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쉴 곳을 찾아 주는 등 자비를 실천하자”고 강조하면서 “회개하기 매우 좋은 이 사순 시기를 헛되이 보내지 말자”고 당부한 바 있다.
사순 시기에는 판공성사를 통해 마음을 깨끗이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고해성사를 통해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청해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고, 부활 축제의 기쁨을 누릴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함이다.
▨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음료 ‘맥주’
유럽, 특히 독일에서는 사순 시기 동안 특별히 마시는 맥주가 있다. 바로 ‘bock bier’(복비어)이다. 맥아와 홉의 함량이 16%가 넘는 맑은 맥주와 흑맥주를 가리켜 복비어라 한다. 복비어는 다른 맥주보다 당과 단백질, 미네랄, 비타민 등이 많아 든든한 한 끼 식사가 됐다.
중세 때에는 사순 기간 내내 금식이 이어졌다. 그래서 중세 수도원에서는 춘궁기와 때를 같이하는 사순 시기 동안 농부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복비어를 무료로 나눠 주었다. 일반적으로 음식이 부실했던 수도자들과 농민들에게 맥주는 단순히 술이 아니라 일종의 ‘영양식’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중세 독일인들은 수도원에서 아침마다 나눠주는 복비어로 배고픔을 이겨내고 연명할 수 있었다. 또 중세 수도자들은 가난한 농민들뿐 아니라 병자들에게도 맥주를 규칙적으로 일정량 치료제로 공급했다. 당시 유일하게 살균 과정을 거친 위생적인 음료가 맥주였기 때문이다.
이에 당시 독일 사람들은 맥주를 ‘살바토르’(구세주)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음료는 금식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liqui da non fragunt ieuneum)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도 독일에서 맥주를 가장 많이 소비하고 있는 바이에른 주에서는 맥주를 ‘흐르는 빵’이라고 하고, ‘살바토르’라는 상표를 붙여 생산 판매하고 있다.
복비어는 도수가 높고 단맛과 짙은 색깔로 ‘살찌는 음료’라는 인식이 있지만, 일반 우유보다 열량이 적다. 살아있는 효모는 피부 미용에도 좋다.
'광야'에 있지만 이미 '가나안'에 있는 사람으로
창세기 26장은 이삭에 대한 내용만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장입니다.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두는 12장을 넘게 차지하고 있는 반면 이삭에 대한 기록은 아주 적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삭은 4대 족장 중에서 가장 장수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175세를 살았고(창25:7), 야곱은 147세를 살았고(47:28), 요셉은 110세를 살았으나(50:26) 이삭은 180세를 살았습니다(35:28). 이삭이 제일 장수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삭에 대한 기록이 가장 적다는 것은 그의 인생이 가장 평범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성경은 믿음의 명예의 전당인 히브리서 11장에 등록을 해 놓고 축복을 받은 사람임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입성한 믿음의 사람들의 삶을 11:13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땅에서는 길 손과 나그네 신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이들이 동경하며 살았던 곳을 하늘의 고향이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나그네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은 그저 지나가는 곳으로 목적지를 향하고, 그곳을 준비하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대표적으로 이삭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지금 창세기의 말씀을 듣고, 읽고 있는 독자들은 출애굽을 한 백성으로 광야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광야에서 살아갈 일시적인 생활방법이 아니라 가나안에서 살아갈 방식입니다. 우리는 지금 광야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필요한 것들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모두 가나안의 삶에 필요한 것들이어야 합니다. 가나안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신명기 30:15-20절 말씀입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16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또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17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20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그리고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가 오랫동안 살 수 있게 해 주실 분이시다.”
바로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이 순종입니다. 축복과 순종은 같은 뜻입니다. 축복을 위하여 순종했다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받았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삭에게 축복을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이삭이 하느님에게 순종하고 말을 잘들어서 축복이 임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5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순종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말씀을 잘 지킨 덕분에 이삭이 축복의 약속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가 하느님에게 순종하면 내 자녀들이 복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오늘 하느님에게 순종하면 그 덕택에 내 자녀들이 이 땅에서 복을 누리고 살아간다는 약속은 무슨 재산 상속처럼 오늘 봉사나 헌금을 많이 하면 내 자녀들에게 보험을 물려주는 것과 같이 축복이 대물림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하느님에게 순종한 그 순종의 축복을 이삭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살아라는 것입니다. 곧 순종하는 것이 복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그 신앙이 자손들에게 이어지는 것이 사실은 축복입니다. 하느님과 하나되는 가정, 하느님과 하나되는 삶이 축복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께 속한 것으로, 그분으로부터만 우리의 필요를 공급받는다는 것입니다.
26장에 등장하는 이삭의 모습은 도저히 복을 받을만한 자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삭이 살고 있는 땅에 가뭄이 왔습니다. 가뭄이란 목숨을 위협하는 최대의 사건입니다. 가뭄을 피하여 애굽으로 내려가려는 이삭을 하느님이 가지 말라고 붙잡습니다. 그리고 축복의 약속을 합니다. 이 약속을 받은 이삭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아비의 실수를 반복합니다. 오히려 아비멜렉이 더 높은 신앙의 수준을 보이며 이삭을 꾸짖습니다. 신앙적인 수준이나 성숙함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12절이하에 또다시 엄청난 축복을 허락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변함없는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삭에게 주어진 엄청난 재물은 세상적인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일 뿐입니다. 그 자체가 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에 이삭에게 내린 재물이 복이라면 세상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믿으라는 말이 넌센스가 됩니다. 자기 아내를 내어 줄 만큼의 양심을 가진 사람이 받은 복을 무엇이라고 설명을 하겠습니까?
성경은 재물, 건강, 성공과 같은 환경적인 것들을 복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아주 분명하게 나와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내린 축복의 상황을 보시면 가뭄, 사람들의 질투와 다툼이 끊이지 않습니다. 환경과 조건의 축복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즉 사람에게 복을 내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지, 그들의 삶의 조건을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관심은 바로 사람에게 있습니다.
12절 이후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재산이 늘었지만 삶의 환경은 더 열악해 집니다. 친했던 사람들이 욕을 하고 시기합니다. 결국 그 땅을 떠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랄이라는 곳에 다시 정착을 합니다. 유명한 우물사건이 일어난 곳입니다. 우물의 이름들이 에섹, 다툼, 싯나, 반대,에서 볼 수 있듯이 환경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르호봇, 넓은 곳이라는 우물을 파면서 사건이 종결이 됩니다. 이 우물은 삶의 현장의 치열함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이 치열한 현장이 환경의 변화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은 한 사람으로 인하여 해결이 됩니다. 즉 하느님의 약속으로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24절에 하느님이 다시 나타나 약속을 합니다. 이삭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가 갖고 있는 것, 살고 있는 땅이 아니라 이삭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내가 어떠한 사람인가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하느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라면 내가 갖고 있는 것, 살아가는 땅,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축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내 집, 사업, 돈, 명예의 축복을 원하지 내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삭의 순종은 복의 결과입니다. 즉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이었기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순종했기 때문에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이 그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의 말씀을 받은 이삭의 처음의 모습은 아슬아슬할 정도로 불안합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복을 받은 존재이기에 성숙한 과정을 거치면서 르호봇의 사람, 즉 내 삶의 지경을 넓혀서 결국 더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고, 하느님에게 순종하는 자리까지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복 있는 한 사람으로 문제의 해결이 되고 있습니다. 신앙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찰스 콜슨이 쓴 <러빙 갓>에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호텔 중개인 오르브 크리거는 워싱턴 주 스포케인에 매물로 나온 한 부동산에 관한 전화를 받았을 때 흥분했다. 그 매물은 공항에서 몇 분 거리에 있으며 스포케인 시를 내려다보는 전나무 숲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홀리데이 인 호텔이었다. 오르브는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매물로 내놓는 대신 자기가 뛰어들어 매입했다. 문제는 한 가지였다. 홀리데이 인의 술을 파는 바는 한 달 평균 1만 달러의 수입을 올리고 있었으나 그리스도인이었던 오르브는 이 바를 운영하고 싶지 않았다. 호텔 지배인은 그렇게 되면 손님들이 곧장 다른 경쟁업소로 가 버릴 것이라고 주장하며 호텔의 수지를 맞출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통계자료를 제시했다. 오르브는 정중하게 그 의견을 들었지만 결국 바의 문을 닫았다.
오르브는 자기 계획을 계속 밀고 나갔다. 호텔 로비를 개조하고 바 대신 푸른 식물로 둘러싸인 안락한 커피숍을 경영했다. 이 호텔업을 시작한 지 5년 만에 음식 매상고는 20퍼센트가, 객실 매상고는 30퍼센트가 증가되었다. 만약 바를 열었다면 이 호텔은 정말 돈을 찍어 내는 기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르브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신앙이란 그 신앙대로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거룩함은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이익에 배치될 때에도 순종하는 것이다.” 신앙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능력이 되고, 실력이 되는 것입니다.
축복을 받은 삶이란 문제나 어려움이 없는 삶이 아니라 어떠한 순간에도 하느님께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이 있었지만 어려움과 고난이 오는 이삭의 삶이 그 증거입니다. 터널을 지나는 동안에는 결코 기차 칸을 옮겨 다니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순종이란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인내할 줄 아는 힘이고 지혜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확하게 구별하여 하느님에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순종하는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요?
첫째로 행복보다 성화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닮아가려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순종의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순종은 거룩함의 길입니다. 순종 자체는 거룩함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행하고자 할 때, 하느님은 자신과 자신의 거룩하심을 전달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그분이 자신과 자신의 복된 본성을 거룩하신 자로서 충만하게 계시하시고 전달하시기 위해 인도하시는 대로 그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순종은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행하려고 마음먹은 것도 아닙니다. 순종은 오직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관심은 성과나 project에 있지 않고 오직 당신의 백성에게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것이라고 부르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당신의 백성으로 만들어서 그 백성을 당신의 것이라고 부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행복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것을 원합니다.
토우저는 영적인 사람을 가르켜, 그들은 ‘행복해지는 것보다 거룩해지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또한 ‘대부분 좀 더 편안하고 행복해지기를 바라지만 이러한 바램은 그 사람의 관심이 세상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Oswald Chambers는 우리에게 ‘인간이 가장 궁극적으로 달성해야 하는 것은 행복이나 육신의 건강이 아니고 그것은 거룩함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변치 않는 뜻은 언제나 거룩한 사람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영원한 복을 쏟아내는 기계가 아닙니다.
둘째, 안주하는 삶이 아니라 변화와 성장에 애쓰는 삶입니다.
믿음은 소원을 이루는 방편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전인격적인 신뢰입니다. 이 신뢰에는 지,정,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성, 감성, 의지가 포함되지 않는 믿음은 단순한 결단으로 끝나게 됩니다. 믿음은 각오나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쌓아가는 과정의 땀흘림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복습입니다. 훈련하고 반복하는 과정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하루저녁 부흥회에 가서 울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사신 것과 같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라는 요한1서 2:6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는 과속을 즐기는 운전자였기 때문에 이 구절을 ‘하느님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사신 것과 같이 마땅히 그렇게 운전해야 합니다’라고 고쳐서 이것을 카드에 써서 계기판에 붙여 놓고 운전할 때마다 그대로 적용하기 시작했합니다. 그는 이처럼 성경을 모든 삶에 적용하기 시작하면서 변화하였습니다 우리 자신을 하느님 말씀의 영향력 아래 둔다는 것은 단지 성경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의 해악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배우는 진리에 순종하겠다는 진지한 의도 없이 매주 하느님의 말씀을 배우거나 개인 기도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단지 머리에 성경 지식을 축적한다고 해서 성경에 기초한 확신이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확신이 자라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실제 상황에 적용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우리 모든 삶은 하느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법을 배우는 무대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승리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물사건은 삶의 치열한 현장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이러한 삶의 현장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얻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느님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물을 소유한 사람이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공유한 사람이 승리한 삶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타고 계신 배에도 풍랑이 일고, 배가 흔들립니다. 그러나 배는 흔들려도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현장은 요동치는 배와 같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배를 만들려고 하지 말고 예수를 붙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승리의 삶입니다. 우물을 소유한 것이 복이 아니라 그 우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고 항복하는 사람이 승리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미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사업이, 가정이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축복은 내가 살고 있는 집이나 사업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순종이 복입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러한 축복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은 성경이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각자는 축복을 받은 인생임을 기억하며 하느님과 하나되는 순종의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그리고 바울에게 임했던 풍성한 축복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간구합니다.
교황
재의 수요일 강론 “사순 시기는 ‘희생의 잔꽃송이들을 모으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 되돌아감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은 2월 17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한 ‘재의 수요일’ 미사에서 파스카로 이끄는 겸손의 여정을 시작하며 우리 자신이 작아져야 한다고 권고했다. 교황은 “구원은 영광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자신을 낮추는 것”이라고 말했다.
Debora Donnini / 번역 김호열 신부
사순 시기는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여정이며,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길을 확인하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아버지와의 “근본적인 유대”를 다시 발견하는 시간이다. “오늘 있다가도 내일 사라지는 것들”의 먼지를 따르지 말고, 우리 삶의 항해자인 하느님을 향해야 한다. 이는 교황이 (전례 주년 중 ‘강한 시기’인)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날인 ‘재의 수요일’ 미사 강론에서 “(사순 시기는) ‘희생의 잔꽃송이들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 것인가를 식별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강조한 내용이다. 이어 그 여정이 “매혹적인 악의 올가미, 돈과 과시의 거짓된 안전, (우리 자신을)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피해의식”으로 방해받는 것이 위험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났을 때 일어난 것처럼 말이다. 교황은 “이집트 땅을 떠나는 것보다, 하느님 백성들이 마음속에 항상 품고 있던 이집트를 떠나는 것이 더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사순 시기는 “노예 생활에서 자유로의 탈출”이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의 힘으로 하느님과 화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러 먼저 오신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되돌아감은 “우리에게 자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아울러 교황은 우리 마음이 “주님도 조금, 세상도 조금” 사랑하면서 “춤을 추고 있는지”, 아니면 하느님 안에서 확고한지 자문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재를 받기 위해) 머리를 숙이는 표징아직도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코로나19 대유행의 영향 아래, ‘재의 축복과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과 함께 봉헌된 이날 아침미사에서 교황의 강론은 강하게 메아리쳤다. 사실, 이날 미사는 매년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로마 아벤티노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산타 사비나 대성당에서 거행되지 않고, 성 베드로 대성전의 ‘성 베드로 사도좌’ 제대에서 거행됐다. 보건위생지침 준수에 따라 이날 미사엔 매우 제한된 숫자의 신자들만 참례했다.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지난달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예식을 거행하며 지켜야 할 세부 지침을 공지한 바 있다.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고, (사제가 신자들의 머리에) 재를 얹으며 말하는 부분은 처음 한 번만 말한다는 내용이다. 교황은 ‘재의 축복 예식’을 마치고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고 말한 다음, 바티칸 시국 총대리 안젤로 코마스트리(Angelo Comastri) 추기경으로부터 재를 머리에 받은 후, 미사에 참례한 추기경들의 머리에 재를 얹어 주었다. 몇몇 사제들은 미사에 참례한 신자들의 머리에 재를 얹어 주었다.교황은 (하느님께) 되돌아옴의 의미를 가르쳐주고자 재를 받기 위해 머리를 숙이는 표징의 의미에 대해 설명했다. “사순 시기가 끝나면, 우리는 형제들의 발을 씻어주기 위해 우리를 더 낮출 것입니다.” “사순 시기는 우리의 내면과 타인을 향한 겸손한 내려감입니다. 구원이 영광을 향해 올라가는 게 아니라 사랑 때문에 자신을 낮추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순 시기는 우리를 작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여정 동안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머무릅시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침묵의 ‘사도좌’입니다. 매일 예수님의 상처를 바라봅시다. 하늘로 가지고 가셔서, 매일 당신의 전구 기도 안에서, 아버지께 보여주시는 그 상처를 바라봅시다. 매일 예수님의 상처를 바라봅시다. 그 상처 구멍에서 우리는 우리의 공허, 우리의 결점들, 죄로 인한 상처들, 우리에게 상처를 준 공격들을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손가락질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두 팔 벌려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황은 예수님의 상처에 입맞추라고 권고하며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삶의 가장 고통스러운 상처 구멍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자비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곳, 우리가 가장 취약하고, 우리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곳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께로 돌아가기교황의 강론은 “너희는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라고 말한 요엘 예언자의 말에서 시작됐다. 교황은 이 사순 시기 여정을 계속하기 위해 하느님 말씀(성경)이 전해주고 있는 돌아옴의 여정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곧,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아버지의 용서”이며, 돌아옴의 첫 걸음은 고해성사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돌아온 아들(탕자)의 여정에 관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교황은 고해 사제들에게 아버지와 같이 되라고 권고했다. “회초리가 아니라 포옹으로 (고해자들을) 대하십시오.” 그리고 깨끗하게 된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해 돌아온 것처럼 예수님께 돌아오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우리 모두는 영적 질병들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서 이 질병들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깊이 뿌리박힌 악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서 그것들을 근절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를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서 그것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린 나병 환자를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치유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상처와 죄를 예수님 앞에 두면서 그분 앞에 우리 자신을 둬야 한다. 교황은 머리 위에 받은 재는 우리가 먼지이고 우리는 먼지로 돌아갈 것임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라면서, 바로 “우리의 이 먼지 위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생명의 영을 불어 넣어 주셨다”고 말했다. “우리는 먼지를 쫓으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있다가도 내일 사라지고 없는 것들 말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인 성령께 돌아옵시다. 우리의 재를 다시 살아나게 하며, 사랑을 가르치시는 ‘불(성령)’로 돌아옵시다. 우리는 항상 먼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전례 찬미가가 말하는 것처럼, ‘사랑에 빠진 먼지’가 될 것입니다. 성령께 기도하기 위해 돌아옵시다. 그러면 탄식과 체념의 재를 태워버릴 찬양의 불을 발견할 것입니다.” 마음의 회심은 하느님 행동의 우선권에서 시작됩니다돌아오는 여정이다. 이 여정이 가능한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의 죽음과 죄로 내려오셨기 때문에, “오직 우리를 향한 그분의 여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교황은 덧붙였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찾으시려 집을 나서시는 분”이시다. 또한 “우리를 치유하시는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상처 입도록 자신을 내어 맡기신 분이시며,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의 먼지에 힘과 달콤함으로 숨을 불어 넣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해할 수 있도록 내어 맡겨야 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자신의 힘으로 하느님과 화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행동과 실천으로 표현하는 마음의 회심은 하느님의 행동의 우선권에서 시작돼야 가능합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은 우리가 과시하는 우리의 능력이나 공덕이 아니라,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그분의 은총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정의가 아니라, 아버지와의 진실한 관계’라고 복음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돌아오는 길은 “겸손의 길”이다. 사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은총이다. 구원은 “순수하게 무상으로 주어진 것”이다. |
광야에서 유혹 받으시는 예수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시기’(한재호 루카 신부)
사순 시기는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를 위하여 해마다 재의 수요일에 전통적인 신앙 실천 행위인 '기도, 자선, 단식'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려줍니다.
기도는 나와 하느님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것이며, 자선은 나와 이웃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단식은 나와 나 자신의 관계를 쇄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통하여 나와 하느님, 나와 이웃, 나와 나 자신의 관계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재조정하려면 필요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다른 이에게 드러내려고 기도, 자선, 단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여 이 세 가지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요엘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류시화 시인은 자신의 책 『지구별 여행자』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선한 행위를 한 것을 남에게 말하지 말라.
한 번 말할 때마다 그 공덕이 절반씩 줄어들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는 공덕이 전부 사라지고 만다.
그 대신 당신이 나쁘게 행한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라.
그것이 진정으로 참회하는 길이다.”외유내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릇 진정한 군자라면 다른 이에게는 관대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해야 하는 법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지키기 위하여, 이웃과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외유내강의 길을 사순 시기 동안 닦읍시다.
다른 이에게 보여 주려고 애쓰는 사순 시기가 아니라, 진정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40일을 보냅시다.
재의 수요일 아침에 : 삶의 태도에 따라 결과도 달라지는 법 (이철희 신부)
오늘부터 시작하는 올해 사순절의 기간도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실천하는 특별한 기간이 되기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의 시작하며 : 세상을 대하는 자세(이철희 신부)
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렇게 다양한 자세에 따라 사람은 삶에서 일어나는 일에 찬성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하며, 그 결과로 일이 만들어지고,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들은 우리의 삶을 찾아옵니다. 사람은 삶에서 늘 선택하는 일에 놓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이쪽 방향이냐 저쪽 방향이냐 하는 선택을 해야 하고, 오른쪽으로 가지 않고 왼쪽으로 가도 괜찮은지를 선택하곤 합니다.
오늘은 사순 제1주일입니다.
이렇게 셈하기 시작한 사순시기는 6주간동안 계속될 것입니다. 전례에서 특별한 시기로 말하는 이 사순시기를 우리가 어떤 자세로 지내야, 결실을 잘 만들겠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는 사순절을 처음으로 맞이할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한두 번이나 혹은 그 수량을 넘는 사순절시기를 지냈을 것입니다. 언제 신앙생활을 시작했느냐에 따라 자세가 다르겠지만, 오늘 들은 말씀은 똑같습니다. 삶에 도전해오는 유혹은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요르단강의 세례를 받은 후 성령은 예수님을 다시 광야로 이끕니다. 예수님에게 다가온 유혹에 관한 내용을 들으면, 사람이 서글퍼지기 딱 좋은 내용이 나옵니다. 유혹자가 다가와 나를 넘어뜨리려고 40일간이나 유혹이 이어진다면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사람으로 본 악마는 유혹하는 소리로 도전했지만, 하느님의 본성으로 예수님의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십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그림자만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러한 유혹을 이겨낼 특별한 지혜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유혹은 ‘①남을 꾀어서 그릇된 마음을 품게 하거나 그릇된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유혹이 우리의 삶에 다가올 때 드러나는 모습은 그저 나쁜 일만 하자고만 꾀는 모습으로만 오지는 않습니다. 내가 눈만 한번 살짝 감는다면, ①내 삶에 생기는 이익과 영예가 아주 크다는 소리로 오고, ②다른 사람이 나를 우러러보는 것이 하늘의 끝에 닿을 만큼 된다는 소리로 유혹은 내게 다가온다는 것이 참으로 큰 문제입니다. 사람은 이 현상까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 삶에 바라는 일이 일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유혹에 한발을 살짝 들이밉니다. 곧바로 빼면 아무런 탈도 생기지 않을 거야 하는 자신감으로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다가오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이겨낼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①배가 고픈데 빵이나 밥을 먹으라는 것이 유혹이 될까요? ②고개를 숙이고 한번 절만 하면 세상의 모든 재물이 내 것이 된다는데 그것을 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③이래저래 내가 큰 힘을 갖고 있다면 성전꼭대기에서 한번쯤 뛰어내려 내가 가진 힘을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유혹이니까 멀리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렇게 말하는 것은 유혹이라고 해도 심각한 결과를 맺는 것은 아닐 테니, 우리가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타협하는 것이 ‘내 곁에 하느님이 계신지, 계시지 않는지를 시험하는 일’이 되면, 그 간단하고도 쉬운 일은 우리의 삶을 파괴시키는 치명적인 유혹으로 돌변합니다.
예수님을 얕잡아보고 아주 간단하게 도전했던 악마는 예수님을 이기지 못하게 되자,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떠나갔다고 루카복음사가는 기록합니다. 또 찾아오겠다는 얘기일 테니, 그 사정을 아는 우리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를 유혹하는 힘을 대수롭지 않게 본다고 해도, 유혹은 사람의 힘만으로 이겨낼 수 없는 또 다른 힘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일들 가운데 내가 함부로 해도 좋은 만만한 일은 없는데, 사람들은 각자의 삶에 다가오는 일들을 아주 쉽게 바라보면서 적당히 타협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현실을 바라본다면, 그 삶에 생길 힘겨운 일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신앙인이란 내 삶을 하느님의 앞에 내어놓고 그분에게서 힘을 얻어 세상을 이기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신명기에서 모세가 알려준 것처럼, 사람들이 자기의 현실을 바르게 대해야 할 일이고, 로마인들의 교회공동체를 향하여 편지를 쓴 바오로사도의 말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처럼 ‘믿어서 올바른 사람이 되고, 그것을 드러내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삶’으로 가야 합니다.
세상을 대하는 사람들이 드러내는 자세는 여러 가지입니다. 한두 가지만 얘기하고, 한두 가지만 실천하면 쉽게 완성할 수 있는 아주 편안한 삶은 세상의 어디에도 없습니다. 지난 주간 수요일, 우리의 이마에 재를 바르고 사람이 세상에서 드러내야할 일의 의미를 생각한 때부터 시작한 사순절시기를 지내면서 세상이 무섭다고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는 힘을 주시라고 하느님께 은총을 청할 시간입니다.
재의 수요일 아침에
- 이해인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십시오." 이마에 재를 얹어 주는 사제의 목소리도 잿빛으로 가라앉은 재의 수요일 아침, 꽃 한송이 없는 제단 앞에서 눈을 감으면 삶은 하나의 시장기임이 문득 새롭습니다. 죽어가는 이들을 가까이 지켜보면서도 자기의 죽음은 너무 멀리 있다고만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 속에 나도 숨어 있습니다. 아름다움의 발견에 차츰 무디어 가는 내 마음을 위해서도 오늘은 맑게 울어야겠습니다. 먼지 낀 마음의 유리창을 오랜만에 닦아 내며 하늘을 바라보는 겸허한 아침, 땅도 사람도 가까워질 수 있음을 새롭게 배웁니다. 사랑이 없으면 더욱 짐이 되는 일상의 무게와 나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조차 담담히 받아들이는 일, 이 또한 기도의 시작임을 깨닫는 재의 수요일 아침입니다
사랑과 침묵과 기도의 사순절에
- 이해인
주님, 제가 좀 더 사랑하지 못하였기에 십자가 앞에서 사랑을 새롭히는 사순절이 되면 닦아야 할 유리창이 많은 듯 제 마음도 조금씩 바빠집니다. 제 삶의 일과표엔 언제나 당신을 첫자리에 두고서도 실제로는 당신을 첫자리에 모시지 못했음을 용서하소서. "올해에도 우선 작은 일부터 사랑으로" 이렇게 적혀 있는 마음의 수첩에 당신의 승인을 받고 싶습니다, 주님. 성당 입구에서 성수를 찍거나 문을 열고 닫거나 화분에 물을 주는 것과 같은 저의 조그만 행위를 통해서도 당신은 끊임없이 찬미 받으소서. 식사하거나 이야기하거나 그릇을 닦기나 걸레를 빠는 것과 같은 일상의 행위를 통해서도 당신을 변함없이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 제가 좀 더 침묵하지 못하였기에 십자가 앞에서 침묵을 배우는 사순절이 되면 많은 말로 저지른 저의 잘못이 산처럼 큰 부끄러움으로 앞을 가립니다. 매일 잠깐씩이라도 성체 앞에 꿇어앉아 말이 있기 전의 침묵을 묵상하게 하소서 제가 다는 헤아리지 못하는 당신의 고통과 수난 죽음보다 강한 그 극진한 사랑법을 침묵하는 성체 앞에서 침묵으로 알아듣게 하소서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익히는 사순절이 되면 잔뜩 숙제가 밀려 있는 어린이처럼 제 마음도 조금씩 바빠집니다. 성서와 성인 전을 머리맡에 두고 거룩함에 대한 열망을 새롭히는 계절 제가 기도하겠다고 약속했던 가까운 이웃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세상 곳곳에서 기도를 필요로 하는 수많은 이웃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한 번도 제대로 기도를 못 한 것 같은 절망적인 느낌 속에서도 주님, 기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믿음과 인내를 주소서 제 안에 사제로 살아 계신 당신이 저와 함께 기도해 주심을 믿겠습니다. 그리하여 주님, 제가 먼 광야로 떠나지 않고서도 매일의 삶 속에 당신과 하나 되는 즐거운 사순절이 되게 하소서
-《사계절의 기도》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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