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8월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Assumpt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
Assunzione della Beata Vergine Maria
Assumptio B. Mariae
하느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겸손을 굽어보시고 특별한 은총을 내리시어 그 몸에서 독생 성자를 태어나게 하시고, 오늘 찬란한 영광의 화관을 씌워 주셨으니, 그 기도를 들으시고 십자가의 신비로 저희를 구원하시어, 영광스런 하늘나라에 들게 하소서!(전야미사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티없이 깨끗하신 동정녀이시며 성자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하늘로 부르시어, 그 육신과 영혼이 천상 영광을 누리게 하셨으니, 저희도 언제나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그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소서!(낮미사 본기도)
오늘은 구세주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하느님에게서 받으신 영광을 찬미하는 날입니다. 동정녀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그리스도의 부활에 함께하시어,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셨습니다.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어머니이십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은 성모 마리아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은총을 받으신 것을 경축하는 대축일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4대 의무축일 중 하나에 해당하는 축일인 만큼 중요하고 의미가 깊은 축일이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 축일이 가지는 중요한 의의를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정도로 되새겨 보면서 축일을 지낸다면 더욱 뜻깊은 시간이 되리라 믿습니다.
첫째로 이 대축일에 우리는 ’마리아의 복되심과 완전하심’을 기억합니다.
승천한다는 의미는 우리 가톨릭 교회 안에서는 예수님과 같이 육신과 영혼이 함께 하늘로 오른다는 뜻입니다. 흔히 생각하듯이 우리 영혼만이 하늘로 오르는 것이 아니지요. 이런 의미로 볼 때 인류 역사 안에서 영육의 승천을 이루신 분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뿐입니다.
바로 이 특전이 바로 성모 마리아의 복되심을 명확히 밝혀주며, 이 복된 은총으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되어 하늘나라로 승천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시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마리아의 동정의 몸과 흠 없는 영혼이 누리는 영광’을 기념합니다.
우리는 이 성모승천교의가 믿을 교리로 선포되기 전 세기인 1854년에 이미 ’원죄 없이 잉태되심’의 교의선포와 이미 초 세기부터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교회와 신자들의 깊은 믿음이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죄 물듦 없이 세상에 태어나셨고 동정녀로서 아기 예수님을 자신의 태중에 모셨으며, 이를 세상에 낳으신 후에도 변함없는 동정을 지니신 성모님의 티 없이 깨끗한 성심은 당연히 큰 사랑과 공경을 받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공경은 성모 승천 교의를 통해 명백하고 합당한 것으로 증명된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성모님이 ’그리스도를 완전히 닮으심’을 기념합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나의 어머니요, 형제요, 자매라고
역설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너무도 합당한 분이 바로 성모님이셨고,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실 때 이미 한 몸을 이루었으며 그리스도 수난의 고통과 십자가를 누구보다 진솔하게 함께 나누신 분이 마리아였습니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는 모든 점에서 그리스도를 완벽하게 닮으셨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닮음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당연한 결과임을 이 성모 승천 교의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넷째로 이 대축일은 ’우리도 성모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상기하게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며 하늘나라의 잔치에 자리하길 바랍니다. 이런 희망을 이룬 인간은 유일하게 마리아뿐입니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이 길을 처음으로 닦으셨고, 이 닦여진 길로 처음 걸어가신 순수한 인간 피조물은 성모 마리아이시기에
그분과 같은 유한한 인성만을 지닌 우리 보통 사람들도 성모님처럼 승천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함으로 떨고 우리 인류에게 얼마나 기쁜 희망의 등대역할을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상에서 간략하게 성모승천 대축일이 지니는 의의들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이 의미를 묵상하면서,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우리도 당신 곁으로 올 수 있도록 전구하시는 성모 마리아의 깊은 사랑과 놀라운 중재력을 믿고 열심히 성모님께 우리 자신과 가족, 그리고 온 인류를 봉헌하도록 합시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홈에서www.ofmconv.or.kr)
-------------------------------성모님 승천 성화에 대한
동정녀의 죽음 이콘은 정교회의 신앙을 위한 두개의 구별을-그러나 분리시킬 수 없는 요소들인-안고 있다.그것은 마리아의 죽음과 장례,그녀의 부활과 승천이다. 신비스럽게 사방으로부터 그녀의 주위로 불리운 열두 사도들의 중앙에 그녀의 임종의 자리가 보인다.그 많은 사람들 안에 눈에 띄는 주교들도 또한 나타난다.
중앙에는 형태는 항상 자신의 양팔에 그의 어머니의 영혼을 받아들고 있는 부활한 그리스도가 있다.즉 케루빔과 세라핌에 둘러 싸인 그리스도가 당신 어머니의 영혼(하얀 수의에 싸인듯한 자그마한)을 안고 하늘로 오르고 계시다.그리고 그 상부에는 천상영광을 누리고 계시는 성모가 그려져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성모님이 임종하실 때 세상 여러 곳에서 선교하시던 사도들을 천사들이 구름에 태워 모시고 왔다는 전설을 묘사한 것이다.
여기에서 요점은 마리아가 참으로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셨으며 단지 인간 예수의 어머니(크리스토토코스)만이 아니시라는 에페소공의회(AD431)에서채택된 논의를 보여준다.
토마스 머튼에 의하면
"마리아는 그 자체로 투명체이다.그녀는 어떠한 이기심도 지니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는 빛을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매우 깨끗한 창문의 유리처럼 투명하였다.
빛 안에서 즐거울 때 우리는 창문의 깨끗함에 조건없는 찬사를 보낸다.
게다가 하느님의 아들은 비할데 없는 권능을 지닌 자기 자신을 버리고 어린아이가 되셨으며
인간이신 어머니의 사랑 깊은 돌보심에 전적으로 의탁하여
자기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어떤 의미로 또다시 우리의 시선을 그녀에게 향하도록 한다.
그 빛(하느님의 아들)은 우리가 그 창문을 생각하기를 원하셨다.
그 이유는 그가 그녀에게 감사를 하였고 그녀에 대해
무한히 부드럽고 인간적인 사랑을 간직하고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바로 이러한 사랑을 나누어 갖기를 요청하신다."
『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별이 열두 개 달린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나타났습니다.』
(요한 묵시록 12,1)
화면의 중앙에 그림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성모 마리아가 기도하듯 양손을 모으고 초생달 위에 앉아 있다.일찍이 천사의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듣고서『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며 손을 모았던 마리아는 대관식이 이루어지는 그 영광스러운 현장에서도 변함없이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며 손을 모으고 있다.
주님!당신을 이 세상에 오실 수 있게 하신 분은당신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이셨습니다.
당신이 나신 날 밤목자들이 당신을 찾아 뵈었을 때바로 거기에 당신 어머니 마리아가 계셨습니다.
당신이 자라실 때마리아는 성요셉과 더불어 모든 것을 보살펴주셨습니다.마리아는 당신 곁에 계시면서모든 어려움을 같이 겪으셨고당신의 순종과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주님의 첫 기적은어머니 마리아의 간청을 들어주신 것이었습니다."
Assumption and Annunciation - LIPPI, Filippino. 1489-91.Fresco.S. Maria sopra Minerva, Rome
천지 창조 때에 주역을 맡은 하느님의 영(창세 1,2)께서
마리아의 처녀 잉태시에도 새 세상의 창조를 시작하시는 것이다.
요한은 마리아의 어머니로서의 사명이 갈바리아에서 완성되었다고 가르친다
(요한19,25-27).
요한이 그 장면에서 묘사하는 정경은 세부에 이르기까지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즉 예수께서는 십자가 밑에 서 계시는 마리아에게 하느님 왕국의 주권을 가진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여인"이라 는 엄숙한 표현을 다시 사용한다.그리고 거기에 서 있는 제자들을 가리켜 "이 사람은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하심으로써 마리아가 그후 하느님의 백성 안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하게 될 새로운 지위를 공포하신 것이다.
루가는 마리아가 열 두 제자와 함께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면서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마리아의 사명을 은연중에 시사하려고 하였다(사도 1,14).마리아가 이렇게 인류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마리아 안에서 시온의 딸인 하느님의 백성이 구체화되었다고 보는 루가의 견해와도 일치된다 (루가 1,26)
루가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을 때 어떠한 믿음을 보였는가에 대하여 주의 깊게 기록하고 있다.즉 그녀는 놀라 어리둥절하기도 했고(루가 1,29),이의(異議)를 제기하기도 했으며(루가 1,34),시메온의 예언을 듣고 몹시 놀라기도 했고(루가 2,33),성전에서 예수님의 말을 못 알아듣기도 했다(루가 2,50).스스로 이해하지 못할 신비에 부딪치게 되면,그 내용을 거듭 되뇌며 명상했고(루가 1,29; 2,33),자기가 관여된 사건의 추억을 고이 간직하여마음속으로 그 의미를 묵상하면서(루가 2,19. 51) 상기하곤 했다.하느님의 말씀에 대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마리아는 비록 그것이 자기의 장래 계획과 상치되거나 장부 요셉을 불안에 떨게 하는일일지라도 (마태 1,19-20) 그것을 수락한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서 그녀가 행한 엘리사벳 방문과 성전에서의 예수 봉헌은 어머니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 자신이 행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왜냐하면 예수님은 마리아가 엘리사벳 을 방문할 때에 선구자 요한을 성별(聖別)하였고, 성전에서의 봉헌시에는 자신을 당신 성부께 봉헌하고 계셨기 때문이다.당신 아드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신 뒤에 마리아는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침묵 속에 하느님께 성실하였다.(천주교 교리교사 자료나눔터에서)
[ICON]The Dormition. Late 12th century.
155 x 128. From the Dormition Church of the Desyatinny Monastery near Novgorod.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1854년 교황 비오9세에 의해 원죄없는 잉태 교리가 반포되었으며,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는 성모승천 교리를 정식으로 정의하고 선포하였다
"원죄 없으신 천주의 모친 평생 동정 마리아께서 지상생활을 마치신 후에
영혼과 육신을 갖고서 천상 영광에로 올림을 받으셨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교리임을 선언하고 선포하며 정의 하는 바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도
"예수의 모친은 천상에서 이미 영혼과 육신으로 영광을 누리고 계심으로써,
후세에 완성될 교회의 모상이며 시작이 되신다"(교회헌장 68항)
고 하면서 마리아께서 받으신 특권과 각별한 은총을 재확인 하였다.
성모 승천은 인간 구원에 대한 보편적 확인이며 보증입니다.성모 승천은 구원과 부활, 그리고 미래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케 하는 하나의 표지인 것입니다.성모마리아는 구원과 영광의 표지입니다.하느님의 경이에 대해 깊이 관조했던 성모 마리아처럼 기도와 묵상 안에서주님의 지혜와 진리에 마음을 활짝 여십시요.
The Coronation of the Virgin - ANGELICO, Fra.1430-35.Tempera on wood, 112 x 114 cm.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교회의 달력을 살펴보면 성모께 대한 축일이 여러 번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감명 깊고 기쁜 인상을 주는 축일은 성모 승천 대축일일 것이다.
이 축일을 지내는 뜻은 두 가지가 있다.
즉 정결하신 성모님의 복된 임종과 천국에서의 비할 데 없는 영광을 누리는 그것이다.
성모께서 성령 강림 날 사도들과 더불어 성령을 받으셨다는 것은 사도 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후의 성모님의 동정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그 후의 성모님의 생활은 사생활로서 인류구원에 직접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게서는 성령 강림 얼마 후 소아시아에 있는 에페소라는 곳에 가셨다.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 유언대로 사도 성 요한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시며 덕을 닦고
천국에서 당신 아들을 다시 만날 기쁨의 날만을 기다리시며 여생을 보내신 것이다.
그의 임종의 장소와 일시가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 전래된 바 없으니 이는 매수 섭섭한 일이다.
성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사람의 죽음은 곧 죄의 벌이다"했다.
그러나 성모께서는 본죄는 물론 원죄의 물듦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모께서는 결코 보통 사람 모양으로 돌아가시지는 않으셨다.
다만 인류를 구하고 사람의 영혼을 천국에 인도하기 위해 예수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돌아가신 것이다.
보통 사람은 원죄의 벌로 인하여 질병과 노쇠 같은 원인으로써 죽은 것 인데,
죽을 때엔 심각한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성모께서는 이런 것이 전혀 없었으며 성 베르나르도의 말씀과 같이
성모의 죽음은 천국에 대한 갈망이 치열함으로 인하여
그 거룩한 영혼이 정결한 육신을 떠난 것뿐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셨음 같이 성모 마리아도 죽으신 후 곧 부활하여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국에 올림을 받으셨다는 것은 우리 교회가 초대로부터 지금까지 믿어 내려온 것이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성모님의 모태를 비시기 위하여 그녀에게 원죄의 물듦이 없는 특별 안배를 내리셨다면
그녀의 사후에도 그 육신이 죄의 증거인 부패함을 면하도록 하셨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성모님의 육신이 영혼과 같이 승천하신 것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없으신 잉태
(성모 무염 시태)와 마찬가지로 성모의 특전으로,
1950년 11월 1일 모든 성인의 날에 교황 비오 12세가
전 세계에서 모인 주교와 신부며 다수의 신자들 앞에서 신앙 조항으로서 공포했다.
Assumption of the Virgin - ANDREA DEL SARTO1529.Panel, 239 x 209 cm.Galleria Palatina (Palazzo Pitti), Florence
교회에서는 일찍이 성모의 이 대 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성모 승천을 대축일로 정하고
이에 대한 전례도 마련햇다.
교회의 많은 예술가들은 이에 대하여 시와 문자와 그림, 조각 등 걸작을 많이 남겨 놓았고
일반 신자들은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 아리따운 전설을 남겨 놓았다.
다음 이야기는 그 중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니체포로 카리스티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즉,
동 로마 황제 마르시아노의 황후 프루케리아는 전부터 성모님을 위한 성당을 건축하고 그 성당에다 성모님의 유해를 안치할 생각으로 칼케돈 공의회에 온 예루살렘의 주교 유베날리스를 만났다. 그 주교에게 성모님의 유해의 소재지를 탐문하자 주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성모님의 서거하심에 대해서는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옛부터 내려오는 믿을만한 전설에 의하면 성모님이 임종하시자 사도들은 그들의 포교지인 사방에서 모이게 되어 성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모님의 임종하시자 사도들은 기도와 성가로써 그녀의 덕을 찬양하며 그녀의 시체를 동굴에 정성스럽게 매장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토마스 사도가 맨 나중의 얼굴이라도 한 번 뵙고 싶어서 그 무덤을 열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시체는 없어지고 그 염포는 한쪽에 잘 개어져 있고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사방에 풍겼던 것입니다. 이 현상을 목격한 사도들은 ’주 예수께서 당신 어머니를 부활시켜 그 정결한 육신을 데리고 가셨다’하며 기뻐햇다 합니다. 그러므로 성모님의 유해는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같이 천국에 가셨지만 주님의 경우는 승천이라고 하고 성모의 경우는 ’피승천’ 즉 ’몽소 승천’이라고 한다. 이는 예수께서는 하느님이시므로, 자력으로 승천하셨고, 성모님은 역시 사람이므로 자력으로 못하시고 주님의 힘으로 승천하셨음을 밝히기 위함이다.
The Coronation of the Virgin - LORENZO Monaco1414,Tempera on wood, 450 x 350 cm.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교황 비오 12세의 교황령 [지극히 인자하신 하느님]에서
(AAS 42 [1950], 760-762. 767-769)
당신의 육신은 거룩하고 영광스럽도다
교부들과 위대한 교회 학자들이 천주의 모친 승천 축일을 맞아 그리스도교 백성들에게 행한 강론에서는
성모 승천을 모든 그리스도교 세계가 이미 알고 또 인정한 교리로 보고있다.
강론에서 그들은 이 교리를 좀더 길게 설명하고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의미를 더 깊이 밝혀 낸다.
그들은 특히 이 축일이 기념하는 것은 복되신 동정마리아의 육신이 부패를 벗어났다는 것만이 아니라 성모님이
당신 외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죽음을 이기시고 천상 영광을 얻으셨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이 전승의 해설자로서 탁월한 위치를 지니는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은 천주의 모친 마리아의 승천 교리를
성모님께서 받으신 다른 고귀한 은혜 및 특권과 비교하면서 웅변적인 말로 이렇게 갈파한다.
"아들을 낳으실 때 아무 흠 없이 동정성을 간직하신 그 분께서
사후 당신의 육신을 아무 부패 없이 간직하셔야 마땅했다.
태중에 창조주를 모셨던 그분은 하느님의 집에 거처하셔야 마땅했다.
성부의 정배가 되신 성모님께서는 하늘의 신방에 거처하셔야 마땅했다.
십자가에 달리신 당신 아드님을 바라보시며 아드님을 낳으실 때 피하신
그 고통의 칼로 당신의 심장이 찔리우신 그분은
아드님께서 영광 중에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 것을 바라 보셔야 마땅했다.
천주의 모친께서 아드님이 지니신 특권들을 누리시고 천주의 모친과 여종으로서
모든 피조물로부터 공경을 받으셔야 마땅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제르마누스는
천주의 모친이 되시고 동정 육신의 거룩함을 지니신 성모 마리아께서 그 육신이 부패되지 않으시고
또 승천하신 것은 마땅한 일 이라고 생각하였다. 성 제르마누스는 말하고 있다.
"다윗이 기록한 대로 당신은 ’아름답게 나타나시고’ 동정인 당신의 육신은
온전히 거룩하시며 온전히 정결하시고 온전히 하느님의 거처가 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육신은 무덤의 부패를 모르고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시면서
불사 불멸의 빛 속에서 변모되어 새롭고도 영광스러운 생명을 얻어
온전한 해방과 온전한 생명을 마땅히 누리셔야 했습니다."
또 다른 옛 저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해 주고 있다.
"우리의 구세주이시고 하느님이시며 생명과 불사 불멸을 베푸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스러운 모친께 생명을 되돌려 주시고 모친으로 하여금
당신 육신을 불사 불멸에 참여케 하시며,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시고,
당신께로 취하여 승천하게 하셨다.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는 그리스도만이 알고 계시다."
교부들의 이 모든 논증과 말씀은 궁극적으로 성서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사실 성서가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천주의 모친 마리아는
하느님이신 아드님과 결합되어
언제나 당신 아드님과 결합되어
언제나 당신 아드님의 위치에 참여한 분으로 나타나신다.
기억해야 할 점이 또 하나 있다. 2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부들은
동정 마리아를 새 아담과 밀접히 연관되고 그에게 종속된 새 하와로 제시해 주면서
모친과 아드님께서는 지옥의 원수와 투쟁하는 데 언제나 함께하시고, 또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이 투쟁에서 사도 바울로가 언제나 연관시키는
"죄와 죽음"을 함께 누르시고 함께 완전한 승리에 도달하게 되시리라는 것을 보여 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활은 이 마지막 승리의 본질적 부분이고 상급이었던 것처럼
복되신 동정녀께서 아드님과 함께한 그 투쟁도
성모님의 동정 육신이 영광을 받음으로써 끝맺어야 했다.
"이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될 때에는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라는
성서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사도 바울로는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원한 같은 예정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와 오묘히 결합되시고
원죄 없이 잉태되시며 천주의 모친 되심에도 동정을 보존하시고
죄와 그 결과 곧 죽음을 완전히 이기신 우리 구속자의 인자로운 동반자가 되신 위대한 천주의 모친께서는
마침내 당신의 모든 특권으로써 죽음의 부패를 피하시고,
당신 아드님처럼 죽음을 이기시어, 영혼과 육신을 지니신 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영광으로
이끌어 올리심을 받으셨다.
천주의 모친께서는 그 곳에서 세세 대대 불사 불멸의 왕이신 당신 아드님의 오른편에서
여왕으로 빛나고 계신다.
Assumption of the Virgin - TIZIANO Vecellio1516-18.Oil on canvas, 690 x 360 cm.Santa Maria Gloriosa dei Frari, Venice
아들의 운명에 함께하는 어머니
터키의 항구 도시 에페소에 가면 성모성당과 성모 마리아의 집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사도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부탁하셨고,
사도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성모님을 모시고 에페소로 옮겨와 살던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 오는데,
431년 에페소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은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이 성모성당과 성모 마리아의 집은 사시사철 순례객으로 붐빈다는 사실을 은혜롭게도
지난 2001년 성지순례를 갔다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도들도 성모님을 예언자로 존경하고 있으니,
교파를 초월하여 성모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영원히 사랑받는 전 인류의 어머니임을
감동 깊게 체험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모님께서 그 곳에서 여생을 보내시고 돌아가셨으며 부활·승천하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부활·승천 교리는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퍼져 있었고,
그 때부터 8월15일을 ‘성모 영면(永眠) 축일’로 지내고 있던 것을
1950년에 교황 비오 12세께서 정식으로 선포하였습니다.
무릇 모든 어머니의 삶은 아들의 운명과 함께합니다.
나에게는 오라버니가 세 분 계신데 그 중 큰 오라버니가 십여 년 전에 이민을 떠났습니다.
큰 오라버니는 지금도 어머니를 모셔가고 싶어 하지만 이곳에 다른 자녀들이 더 많아서
어머니를 보내 드릴 수가 없는 처지입니다.
성모님은 외아들 예수를 십자가의 처참한 죽음으로 먼저 보내고
요한 사도를 아들 삼아 고독과 슬픔을 달래며 사셨을 것입니다.
뛰어난 신앙의 여인이신 마리아는 거룩한 죽음으로 지상 생애를 마치고 마침내 아드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들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특별 은총으로 거룩하게 보호받으셨던 성모님이
아들의 영광을 입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죄에 물든 일이 없는 몸이셨기에 당신 아드님처럼 무덤에서 죽음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의 어머니시고 하느님 백성의 어머니께서 먼저 받으신 특권적 영광은
곧 후손인 우리들의 영광이기도 하기에,
장차 하느님 백성의 희망의 모델이신 성모님을 기쁨에 겨워 찬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 하늘나라에 들어올림 받으시니, 우리도 천국을 그리며 주 찬미하리다.”
(박문희 고로나 수녀·성 바오로 딸 수도회.서울주보에서)
Assumption of the Virgin - GOZZOLI, Benozzo
1484.Transferred fresco.Biblioteca Comunale, Castelfiorentino
마리 스텔라(Mari Stella) 혹은 스텔라(Stella)는 바다의 별이신 성모님을 지칭한다.바다의 별이신 성모님을 마리 스텔라라고 하면서 망망대해에서 별처럼 항해하는 배들에게 등불이 되어주시는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이다.즉 고단한 인생길에서 희망이 되시고, 삶의 등불, 동반자가 되어주는 성모님을 주보로 모신다. 그래서 특히 하늘에 올라 우리의 전구자가 되어주신 성모님을 기념하여 성모승천대축일인 8월 15일에 축일을 지내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성모님의 축일 중 본인이 좋아하는 축일에 지내면 된다.
[오늘의 독서 및 복음 묵상테마] : 길동무
<독서 : 묵시 11,19ㄱ;12, 1-6ㄱ, 10ㄱㄴ / 독서 : 1코린 15,20-27ㄴ / 복음 : 루카 1,39-56>
사람이 살아가면서 감사드릴 일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친구와 함께 나누는 우정에 깊이 감사드리게 됩니다. 영어에 ‘companion(친구·길동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함께’라는 뜻을 지닌 ‘com’과 빵을 나눈다는 뜻의 ‘panion’이 합쳐진 말입니다. 친구란 우리가 인생이라는 길을 걸을 때 그 길을 함께 걸으며 같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 함께 밥을 먹으며 삶의 기쁨과 슬픔과 꿈과 희망을 나누고 그래서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는, 진실로 나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런 친구와 나누는 우정은 우리 각자가 가야 할 길을 더 힘차게 갈 수 있도록 합니다.
신앙인한테도 함께 우정을 나누는 일은 중요합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 속에서 때론 이해하기 벅찬 일을 경험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생활 속에서 충격적인 경험, 놀라운 일을 겪을 때 나는 누구와 함께 나눕니까?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성령으로 아이를 잉태하리라는 놀라운 소식을 듣고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늙은 나이에 아이를 갖게 되는 예사롭지 않은 일을 체험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맞으며 그에게 일어난 변화를 하느님이 허락하신 일로 알아보고 인사합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신앙의 눈으로 성찰함으로써 하느님의 일하심을 알아보고 서로를 격려하며 세대와 나이를 뛰어넘어 믿음으로 우정을 나눕니다. 서로를 축복하는 은혜로운 만남의 시간을 함께 보냅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로 알아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사는 신앙인으로서 누구와 어떤 우정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축복합니까? 오늘 우리는 누구를 방문했으며 누구의 방문을 받았습니까? 우리는 관계와 일 속에서 또는 체험하는 사건 안에서 신앙인으로 우정을 나누며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 삶 속에서 일하심을 믿을 때 우리는 정녕 복됩니다. 살아오는 동안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고 격려해 준 수많은 ‘엘리사벳’과 우리를 방문하여 믿음의 체험을 들려준 수많은 ‘마리아’에게 감사드립시다.....................◆
[말씀자료 : 남궁영미 수녀(성심수녀회)]
성모 승천 대축일 I 묵상기도방(사이버기도실)
시작기도 :
내 마음에서 우러나는 아리따운 노래를
글 잘 쓰는 선비의 붓끝으로 엮어
우리의 왕에게 바칩니다.
오빌의 황금으로 단장한 왕후는
당신 오른편에 서 있습니다.
내 딸아, 들어라,
잘 보고 귀를 기울여라.
네 겨레와 아비의 집은 잊어 버려라.
너의 낭군, 너의 임금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리라.
그는 너의 주님이시니 그 앞에 꿇어 절하여라.
나는 당신 이름을 세세대대에 찬양하리이다.
뭇 백성이 당신 은덕 길이길이 찬미하리이다.
-시편 45 -
오늘의 기도지향 : 실직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위로자이신 주님, 고난에 처할 때 당신을 더욱 생각하게 하시고, 더욱 당신을 찾게 하소서. 당신의 은총으로 힘을 주시어 세상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더 큰 일을 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오늘의 복음 : 성모 승천 대축일 루카 1,39-56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39-56)
영적독서 : 그분께 낯을 돌리고
우리는 자기가 진실로 바라는 바를 알아 내려면, 자기 내심의 가장 깊숙한 욕구를 감지해 내자면, 그에 앞서 하느님의 뜻을 알고 있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이란 변덕스러운 하느님이 우리에게 강요하고 그러기에 우리가 내심으로 좋아하는 것들 거의 전부와 상치되는 그런 비인격적인 삶의 청사진을 말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우리가 진실로 무엇을 바라며, 우리 자신은 과연 누구인지를 알아 내기 바라고 계신다. 그러므로 갈등은 하느님의 뜻에 거슬리는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분열된 자아와 투쟁하는 우리의 의지인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려는 의지와 충돌하는, 하느님의 자리에 대신 들어않으려는 의지이다.
성인은 자신의 가장 내밀한 욕구를 발견해 낸 사람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 일을 하지만> 그 일은 하느님의 일이기도 하다. 그들의 뜻은 하느님의 뜻과 조화를 이룬다. 따라서 그들의 삶은 지속적인 평화와 평온, 자유와 기쁨으로 점철되며, 이러한 특징은 위기와 고난이 닥칠 때도 - 어쩌면 위기와 고난 속에서 특히 - 본모습을 유지한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매력이 없으면 우리는 하느님을 열망할 수가 없다. 그런 만큼 하느님께로 향하는 여정의 첫걸음은 우선 그분께 낯을 돌리고 그분이 우리의 온갖 상상을 초월할 만큼 선하시며 <인간의 소망인 기쁨>이시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복음에서 그리스도의 최초의 메시지가 <<회개하고 이 복음(기쁜 소식)을 믿어라.>>로 되어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으로, 우리는 이 초대를 다음 장에서 고찰하기로 할 것이다..................
마침성가 : 받으소서 (봉헌성가)
[나해] 성모 승천 대축일(2009-08-15) I 복음묵상방
<요한과 함께하는 묵상> : † 나의 마니피캇
오늘 우리가 지내는 ‘성모승천 대축일’은 주님성탄, 주님부활, 성령강림 대축일과 더불어 교회의 4대 의무 대축일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성모승천 대축일이 이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도 다른 세 가지 대축일과는 달리 많은 신자들에게 조금은 멀리, 그리고 낯설게 여겨지고 있다는 생각이 앞선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두 가지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는 전자의 3대축일이 하느님 예수와 성령에 관한 대축일인 반면에 오늘의 대축일은 우리와 같은 인간 마리아에 관한 대축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모승천 대축일’을 정확히 표현하여 ‘성모몽소승천 대축일’이라고 한다.
‘성모몽소승천’이란 성모 마리아께서 지상에서의 삶을 마치신 후 그 육신과 영혼이 마리아의 자력으로써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하늘에 올려짐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주님성탄, 주님부활, 성령강림 대축일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스스로 세상에 펼치신 인류구원사건인데 비하여 성모승천 대축일은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인간 마리아에게 베푸신 최고의 은총을 기념하는 사건이다.
둘째는 오늘의 대축일이 3대 대축일과는 달리 성서상의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의 죽음이나 승천에 관한 기록은 성서(聖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거룩한 전통인 성전(聖傳)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마리아에 관한 축일은 동방교회에서부터 시작되는데, 4세기 중엽 ‘복되신 동정녀 기념일’을 제정하여 마리아의 죽음과 승천을 기념하였다. 이를 본받아 서방교회에서도 7세기초 로마의 황제 마우리씨오(582-602)가 ‘복되신 동정녀 기념일’을 8월 15일로 정하였다고 한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에 의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강림 후에 성모 마리아는 소아시아(현재의 터키)의 에페소 지방에서 요한 사도와 다른 몇몇 사도들과 함께 사시면서, 그곳의 신자들에게 당신 아들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나날이 덕행과 믿음에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셨다고 한다. 당시 마리아의 소망은 단 한가지로서, 천국에서 당신 아들 예수를 다시 뵙는 것이었다.
성모 마리아는 15년 동안 이곳에서 사시다가 6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마리아가 임종할 그 때에 공교롭게도 부활하신 예수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와 같이 토마 사도를 뺀 다른 모든 사도들이 모여 마리아의 임종을 지켜보았고, 돌아가신 후 무덤에 안치했다고 한다. 3일이 지난 후 마리아의 임종 소식을 들은 토마 사도가 급히 돌아와서, 성모 마리아께 마지막 인사라도 드려야한다면서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다른 사도들과 함께 무덤을 다시 열어 보았더니 마리아의 유해는 온데 간데 없었고 수의만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목격한 사도들은 마리아께서 돌아 가신지 3일 만에 부활하여 당신 아드님처럼 하늘에 오르셨다는 사실을 믿고, 이러한 영광을 마리아에게 베풀어주신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면서 이를 선포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성모몽소승천은 초대 교회 때부터 사도들과 교부들, 그리고 많은 신자들이 믿어 왔던 은혜로운 신앙 조목으로서, 여러 차례 성모님의 발현과, 레지오마리에의 창설과 더불어 성모께 대한 공경과 신심에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해온 것이다.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전승에 힘입어 ‘성모 무염시태 교리’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이는 천주의 어머니이시며 동정녀이신 마리아가 그의 양친 요아킴과 안나로부터 잉태되는 그 순간에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온 신자들이 믿어야할 교리로 선포한 것이다.
나아가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1939-1958)는 ‘가장 풍요로우신 하느님’이라는 사도헌장을 반포하여, 마리아가 죽은 후 하늘에 올림을 받았다는 교리를 믿어야할 신앙 교의로 선포하고 전통에 따라 8월 15일을 성모몽소승천 대축일로 정하였다. 이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께서 지상생활을 마치신 후 원죄의 결과가 가져다주는 죽음에 예속되지 아니하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셨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로써 전세계의 교회는 나자렛의 마리아가 하느님의 특은으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함께 나누고 있음을 경축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마리아 보다 앞서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권능과 업적, 그리고 공로로써 부활 승천하셨지만, 마리아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의하여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시는 은혜를 받으신 것이다. 따라서 마리아의 부활과 승천은 마리아의 개인적인 영광일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인간이 미구에 받게 될 부활과 승천의 원형이며 모델로서, 우리에게 약속된 영광이며 희망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오늘 우리가 기뻐하며 기념하는 대축일의 크나큰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오늘 성모승천 대축일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한낱 인간인 마리아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틀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영광이며,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최대의 영광과 은총은 마리아 편에서 볼 때 거저 주어진 것이지만, 하느님 편에서 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마리아의 굳건한 믿음과 겸손이다. 인간의 눈에는 불가능하게 보였던 동정녀의 잉태였을망정 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에 전적인 신뢰와 온전한 믿음을 걸었던 마리아의 태도가 구세주의 탄생을 가능케 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 구원 사업에 지대한 협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찬미를 받는다. 엘리사벳의 찬미에 이어서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를 노래하는 마리아의 ‘마니피캇’에서 우리는 그분의 지극한 겸손을 알 수 있다. 주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레어 기뻐했던 마리아의 겸손, 자기에게 주어진 온갖 영광과 은총을 다시금 주 하느님께 돌리면서 모든 것이 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이라고 말하시는 마리아의 겸손, 이는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할 덕행이 아니겠는가?
우리도 생활 속에서 나의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기뻐 설레어지는가? 우리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와 은총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다시금 돌려 드리면서, 내가 하는 모든 일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그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의 대답이 ‘그렇습니다’ 라면, 우리도 틀림없이 성모 마리아 곁에 성큼 다가서 있을 것이며, 마리아의 마니피캇이 바로 우리의 마니피캇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광복절을 함께 경축하면서.....................◆
[말씀자료 : 박상대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야곱과 함께하는 묵상> : † 마리아의 신앙관과 모범적 행동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승천 대축일’을 정확히 표현하여 ‘성모몽소승천 대축일’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난 5월 성모성월 기간 중에 성모 마리아가 가브리엘 대천사의 수태고지를 듣고 놀랜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친척 언니인 엘리사벳을 찾아보러 갔던 것을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지내는‘성모몽소승천’이란 성모 마리아께서 지상에서의 삶을 마치신 후 그 육신과 영혼이 마리아의 자력으로써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하늘에 올려짐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대축일은 주님성탄, 주님부활, 성령강림 대축일과 더불어 교회의 4대 의무 대축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성모승천 대축일은 각 그리스도 교회의 교리에 따라 다른 세 가지 대축일과는 비교하면 매우 배타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관련 3대축일은 하느님 예수와 성령에 관한 대축일인 반면에 성모의 대축일은 우리와 같은 인간 마리아에 관한 대축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대 대축일과는 달리 비교적 가볍게 대해지는 이유 중의 다른 하나는 성모승천이 성경상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성모 마리아의 죽음이나 승천에 관한 기록은 성서(聖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모승천 대축일은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인간 마리아에게 베푸신 최고의 은총을 기념하는 사건이라는 관점으로 생각하면 매우 가치있고, 의미있는 날이기도 할 것입니다.
오늘 성모승천 대축일의 복음은 루카복음 1,39-56입니다.
오늘복음에서 우리는 믿음의 사람, 마리와와 엘리사벳간의 대화 내용에서 성모 마리아의 이 땅에서의 인생관을 묵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믿음의 사람들간에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으며, 성령에 감동한 여인들의 대화 내용에서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앙관을 볼 수 있으며, 또 마리아 여인의 고백을 통해서 하느님에 대한 그녀의 신앙관 3가지 특성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그 유명한 마니피캇(성모찬가)에 대한 루카복음 1,39-56 부분을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I.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엘리사벳을 방문
1. 마리아가 엘레사벳을 방문하다.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루카 1,39-41)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메시지(수태고지)를 받은 후에 서둘러서 엘리사벳이 사는 산골 동네로 달려갔습니다. 여기서 "서둘러"라는 말(스푸데스)은 '빨리' '신속히' '부지런히, 그리고 '신실하게'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마리아는 천사를 통해서 엘리사벳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신속하게 엘리사벳을 찾아가서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함께 나누기를 원했습니다.
루카 사가는 마리아가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을 찾아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때에 엘리사벳은 유다 산골에 있는 한 동네의 사제의 거주지(아마 헤브론)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자렛에서 유다 산골 동네까지는 매우 먼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메시지를 듣고 나서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서둘러서 엘리사벳의 임신 사실도 확인하고, 자기가 들은 이야기도 함께 나누기 위해서 먼 거리의 여행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마리아의 행동을 보면서, 하느님의 비밀을 가진 신자들의 거룩한 교제는 매우 유익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여인의 만남은 성령 충만과 믿음을 확실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자들간의 교제를 소홀하거나 무시하면서 홀로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은 여러 가지 유혹과 시험에 빠질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복음에서 하느님은 신자들이 교제를 통해서 건전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으로 이웃간의 교제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특히 교회는 교제를 위한 가장 훌륭한 장소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집을 찾아 그 집에 들어가서 그녀에게 문안 인사를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엘리사벳은 신기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녀는 마리아의 인사를 받는 순간, 자기 뱃속에 든 아기가 뛰노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아이의 뛰어 노는 것이 너무가 강렬했기 때문에, 그녀는 그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체험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가진 아이가 모두 다 성령에 감동된 아이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성령 충만하여 태에서부터 자기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기뻐했습니다. 그 순간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 차" 마리아가 가진 아이에 대해 예언을 하였습니다. 성령은 엘리사벳에게 임하여 주님을 임신한 마리아를 특별한 태도로 영접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은 그녀들에게 참으로 놀랍고 흥분되는 일이었습니다.
2. 엘리사벳의 선포
"(엘리사벳은 성령이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엘리사벳은 성령에 의해 마리아와 그녀가 임신한 아이에 대해 찬미의 선포를 했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 외에 메시아의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녀가 가진 아이가 예수를 증거하기 위한 아이였던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경건한 엘리사벳의 입술을 통해서 예수를 높이게 하셨습니다.
엘리사벳은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고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임신한 마리아와 그녀의 태중에 있는 아이가 복이 있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사제의 아내였으며, 연장자로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가난한 시골 여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마리아와 그녀가 가진 아이를 축복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시기나 질투 대신 성령 안에서 진심으로 마리아와 그녀가 가진 아이를 축복해 주었습니다.
3. 엘리사벳의 고백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루카 1,43-44)
엘리사벳은 성령에 감동되어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고 외쳤습니다. 엘리사벳은 놀랍게도 마리아를 "(내) 주님의 어머니"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녀는 성령을 통해서 마리아가 임신한 아이가 "그녀와 태중에 있는 세레자 요한의 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할 때에 성령은 마리아가 가진 아이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이며, 거룩하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마리아를 "(내) 주님"의 어머니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을 통해서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이가 자기 태중에 있는 아이보다 더 위대한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일은 성령의 은혜를 입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주님의 어머니가 자신을 방문할 것을 보고 감격할 수 밖에 없은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인사할 때에 자기 태 중에 있는 아이가 "기뻐 뛰어 노는 것"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여기서 "기뻐 뛰논다"고 번역된 말은 "격렬한 씨름을 하듯이 뛰어 노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체험은 두 여인 모두에게 큰 격려와 신앙에 유익을 주었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말을 듣고 자기가 들은 메시지에 대해 확신할 수 있었으며, 또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통해서 성령 충만함을 입어 하느님의 놀라운 구원 소식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두 여인이 만나 서로 격려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4. 믿음으로 인한 복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고 찬미하였습니다. 엘리사벳은 자기 남편 즈가리아가 천사의 말을 듣고 믿지 않다가 벙어리가 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천사의 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마리아를 진심으로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하느님의 약속을 순수한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축복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이러한 사람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일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와 같이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킵니다.
우리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까? 아니면 그 말씀을 믿지 않고 거부하고 있습니까? 엘리사벳은 천사가 전해준 말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보다 먼저 아이를 갖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마리아에게 전해준 말씀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선포는 나약한 마리아에게 큰 확신을 주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경건한 사람을 통해서 신자들을 격려하고 그 믿음을 견고하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해 주신 신앙의 동반자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그들과 함께 서로 격려하며 위로를 받고 있습니까? 이 시간 우리에게도 신앙의 동행자를 주시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II. 마리아의 찬송(마니피캇)
오늘 우리가 성독한 복음에는 그 유명한 "마리아의 찬미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의 찬미와 매우 흡사합니다(1사무 2,1-10). 그러나 이 두 노래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한나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이 승리했음을 선포했으나, 마리아는 자신 뿐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즉 그녀는 자신을 통해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하느님께서 가난하고 나약한 자들을 풍족히 대접하시고, 교만한 자들과, 부요한 자들을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1. 마리아가 하느님을 찬송하다.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루카 1,46-50)
(1) 주님을 찬양(46)
마리아는 즈가리아의 집에 들어서서 엘리사벳에게 문안 인사를 했습니다. 그 순간 엘리사벳은 성령에 감동되어 메시아와 그 어머니에 대해서 선포하였으며, 마리아 역시 성령에 감동되어 찬양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선포를 통해서 자신이 만난 천사와 그가 전한 메시지가 환상이 아니라 실제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사벳과 뱃속에 있는 아기가 하느님 말씀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마리아에게 엘리사벳과 태중의 이가를 통해 당신께서 하신 약속을 다시 한 번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그 선포를 들은 마리아는 성령에 감동되어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고..."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찬송"(메갈루네이)이라는 말은 원래 "위대함을 선포하는 것"인데, 이 말은 습관적인 행동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지금 뿐 아니라 과거에도 하느님을 찬양해 왔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은총을 깨달은 신자들의 입에서는 영감 어린 찬양이 흘러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하느님께서 그녀의 주, 곧 그녀를 다스리는 왕이시며, 주인이시고, 자신은 그의 종임을 고백하는 겸손한 고백이었습니다.
(2) 겸손한 고백(47-48)
마리아는 "내 구세주" 곧 "하느님"을 높였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을 "내 구세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녀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실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녀를 통해 보내주실 아기는 바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보낸 "구세주"였습니다. 구원받은 신자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준비하신 일을 확인하는 순간 하느님을 찬양하며 높여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주님을 높인 것은 "주께서 그녀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또한 내 세울 것도 없는 비천한 시골 처녀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정직하게 설 때에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렇게 가난한 마음의 영에 은총을 선물을 가지고 찾아오십니다. 그녀는 하느님께서 비천한 자신을 메시아의 모친이 되게 하신 일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녀는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녀는 비천했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메시아의 어머니가 되는 축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3) 하느님의 속성들(49-50)
마리아는 1)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기에 처녀가 아이를 낳는 "위대한 성업"을 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기에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위대한 성업"들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녀는 2)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다른 것과 구별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세상 모든 것과 구별되는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느님이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분이며,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또한 그녀는 3)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고 노래했습니다. 하느님은 자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자비와 신실한 사랑으로 대해 주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비록 하느님에 대해 불신실하게 대하지만, 하느님은 언제나 당신 백성에게 변함없는 자비로 대해 주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자비는 과거에도, 지금에도, 그리고 앞으로도(대대로)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2. 마리아가 하느님께서 하신 위대한 일을 찬송하다.(51-55)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루카 1,51-55)
마리아는 성령에 감동되어 하느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을 노래하였습니다.
1) 첫째로 그녀는 하느님께서 "그의 팔로 힘을 보여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다"고 노래했습니다. 하느님은 "능력의 팔"로 교만한 자들을 흩어서 그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가까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는 항상 하느님의 심판의 팔에 의해 징계를 받게 될 것입니다.
2) 둘째로 그녀는 하느님께서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겸손한(보잘 것 없는) 자를 높이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권세 있는 자를 그가 앉은 자리에서 끌어내리셨습니다. 그들은 힘과 권세를 가지고 나약한 자를 무시하고 그들을 학대하고 탈취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강제로 보좌에서 끌어내려 낮은 자리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낮은 곳에 있던 사람들은 높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고, 겸손한 자를 높여 주시는 분입니다.
3) 셋째로 그녀는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고 노래했습니다. 하느님은 가난하고 굶주린 자들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고, 부자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하여 하느님을 찾는 사람은 풍족하게 되지만, 세상을 사랑하며 교만한 자들은 허무한 최후를 맞게 될 것입니다.
4) 넷째로 그녀는 하느님께서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고 노래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부름 받은 '하느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에 의해 그 운명이 결정되고, 간악한 헤로데에 의해 유다 족속은 왕위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로마 정부를 통해 안전을 얻으려했고, 거짓 메시아를 좆았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느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를 구하고 기다렸습니다.
바로 그 때에 하느님은 도우셨습니다. 하느님은 어려운 중에 이스라엘을 돌아보시고,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 대해 약속하신 바를 이루셨습니다.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모세를 보내주셨듯이, 로마와 헤로데로 인해 신음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를 보내주셨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결코 잊지 않으셨으며, 그들을 자비로 대해 주셨습니다. 마리아는 이러한 하느님의 자비가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3. 믿음의 사람(신자)들간의 친교(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56)
마리아는 약 3달 동안 엘리사벳의 집에 머물면서 그녀와 함께 경건한 신앙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3달이란 기간이 여인이 임신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기간이라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임신 사실을 확인하기까지 영적으로 성숙한 엘리사벳과 함께 지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3달 동안 함께 지내면서 하느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에 대해 나누고, 서로 격려와 지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아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에 그녀는 확신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성도들이 어려운 기간에 서로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사람을 준비해 주십니다.
III. 맺음말(묵상마무리)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과 싸우다가 때로는 신념이 흔들리면서 넘어지고 쓰러질 때 누군가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하느님께서 나를 지켜주신다는 확신이 없다면, 쓰러졌을 때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쓰러지고 싶어도 쓰러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내가 어떤 실수를 하더라도 항상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다시 일어설 힘이 생길 것입니다. 그것은 그 어떤 세상의 도움과 비교할 수 없는 큰 힘이며 우리들의 존재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근원적인 에너지인 것입니다. 이러한 힘이 여러분들에게도 낫설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은 이런 힘을 주는 어머니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은 그런 힘을 또 성모님께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과도 같은 일이었던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여 곤란한 처지에 놓였지만 주님의 뜻을 이루고자 기꺼이 당신의 사명을 받아들이시고 또 자식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하는 고통 중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셨던 성모님, 당신 아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희생하셨듯이 우리 모두를 위해서도 늘 함께 하시기에 그분은 모든 이들의 어머니이시며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단순히 성모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낳으시고 기르셨기 때문에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찬미를 잊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대한 찬미는 힘없는 서민들, 보잘 것 없는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고 모든 위선적 제도와 구조적 사악함에 얽매이고 억눌려 살지 않겠다는 거부의 선언이며 저항의 몸짓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소박하고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여인이었던 성모님은 오늘날 우리 사회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모든 고뇌와 위선적 억압의 고통을 대변한다고 하겠습니다. 라자로 마을의 나환우들이 부족한 신학생과 사제들을 위해서 기도하듯이 성모님께서는 지금 우리 시대의 모든 이들이 겪는 고통과 함께하시고 그 고통을 이겨내고자 언제나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난 시대의 우리의 어머니들이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자식을 키워내고 가정을 꾸려나갔듯이 성모님께서도 지금 시대의 모든 아픔을 품고 계신 것입니다. 모든 고통을 이겨내고 자기 자신 보다는 타인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하는 삶, 이것이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신앙인으로서의 모범이며 우리 교회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오늘은 광복절입니다. 어두움 속에서 빛을 회복한 날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빛이 들어오지 못하는 어둠의 구석에서 병든 자, 힘없는 자, 삶에 지친 자들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과거 일제식민시대 때 우리 민족 모두가 힘을 합쳐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냈듯이, 지금 이 사회의 어두운 부분도 우리 모두 성모님의 모범을 본받아 고통받고 있는 이들과 함께하여 주님 부활의 기쁨을 모든 이들과 함께 나눠야겠습니다..........................◆
[말씀자료 : 두올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성모 마리아의 노래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이날은 예수님이 승천하셨듯이 성모님도 그 생애 종말에 하늘로 올림을 받았다는 믿음을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승천이라는 표현은 하늘과 땅과 지옥, 세 층으로 된 우주를 상상하던 시대에 통용되던 표현입니다. 오늘 우리의 우주관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모님은 그 생애 종말에 하느님에게로 가셨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믿음은 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얻은 4세기부터 교회 안에 전설로 전해져 왔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도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겪으셨다는 믿음입니다.
신약성서가 성모님에 대해 알려주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 역사적 사실 보도가 아닙니다. 예수를 주님이라 믿는 초기 교회 공동체가 예수님의 의미를 말하기 위해 만든 작품입니다. 마리아가 예수 탄생의 예고를 받은 즉시 길을 떠나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마리아를 영접하는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던 아기도 기뻐 뛰놀았습니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파견된 요한이라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탄생예고는 요한에게 제일 먼저 알려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여인이 만나는 분위기는 기쁨, 감탄, 축복, 찬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에게 이런 효과를 내는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는 예루살렘에 있던 교회 공동체가 집회에서 부르던 노래입니다. 그것은 구약성서의 표현들로 꾸며진 찬양의 노래입니다. 루가복음서를 집필한 사람이 그것을 채집하여 마리아의 노래로 만들었습니다.
그 내용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이 세상 사람들의 운명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는 권세 부리는 이와 부요한 이가 있고, 비천한 이와 굶주리는 이가 있지만, 자비하신 하느님 안에서는 사람들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이 만드는 모든 차별을 없앤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초기 교회의 믿음을 기록한 것이 복음서들입니다. 복음서가 성모님을 언급할 때는 예수님에 대한 교회의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말하려는 의도입니다. 성모님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 중 사실을 보도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예수가 정신 나갔다는 소문을 듣고 그 어머니와 집안 식구들이 놀라서 그를 찾아 나선 이야기입니다(마르 3,21-35 참조). 예수님은 그 어머니와 가족들을 놀라게 하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젊은 나이로 십자가에 처형되셨을 때, 그 어머니가 뼈를 깎는 아픔을 겪었으리라는 사실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외에 복음서가 전하는 마리아의 이야기들은 성모님에 대한 사실 보도가 아닙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십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일에 깊이 참여합니다. 이 사실 때문에 복음서들은 마리아를 신앙인의 모범으로 삼았습니다.
예수의 탄생 예고를 듣고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2,38)라고 말하는 마리아는 하느님을 영접하는 신앙인의 모범입니다. 가나 촌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에게 물을 술로 바꿀 것을 암시하는 마리아는 술이 떨어진 잔치 집과 같이 따분한 유대교를 보고, 예수님에게 희망을 두는 신앙인의 모범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곁에 선 당신의 모친 마리아를 당신 제자와 모자의 인연을 맺어주신 이야기(요한 19,25-27)는 예수님의 죽음 후 신앙인들은 그분의 제자들과 가지는 관계에서 예수님과의 유대를 유지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성모님에 대한 복음서 이야기들은 신앙인의 운명을 말합니다.
오늘의 축일은 마리아가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듯이 신앙인의 모범이신 마리아도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하느님 안에 누리신다는 뜻입니다. 이 축일이 제정 공포된 것은 1950년 11월 1일입니다. 1945년에 세계 제2차 전쟁이 끝나고, 전쟁으로 인한 폐허 위에서 이 축일이 제정되었습니다.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생명이 대량으로 무참하게 죽었습니다. 도시들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죽이는 인간의 힘과 파괴력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모두 실감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삶의 터전을 초토로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선포되는 땅에서 서로 미워하고 죽이고 폐허를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독일인들이 600만이 넘는 유대인을 학살하였습니다. 이런 비극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말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웠습니다. 인류의 미래에는 희망이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재로 변해버린 폐허 위에서 유럽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말해야 했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미워하고 파괴하고 죽이는 이 세상의 현실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야 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미래는 하느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천명해야 했습니다. 마리아의 승천 축일은 우리 인간의 운명이 하느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자각하는 날입니다.
리는 오늘도 기억합니다.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많은 한국인들이 징병 혹은 징용으로 타향에 끌려가서 죽었습니다. 정신대의 비극도 있었습니다. 만주의 일본군 특수 부대에서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되어 죽어간 생명들도 있었습니다. 육이오 전쟁 중에도 수백만의 생명이 무참하게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수백만의 인구가 이산가족이 되었습니다.
군사 정권 시대에도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교통사고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과거사 청산, 불법 도청 테이프 등 구실과 기회만 있으면, 서로 죽이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자연은 심각하게 오염되어 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 데서 오는 비극입니다. 그래도 세상에는 생명이 태어나고 자랍니다. 생명을 자비롭게 영접하고 살리는 사람들, 하느님의 손길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들은 ‘마리아의 노래’는 자비의 노래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운명을 바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어떤 형태로든 살아 있을 때, 우리는 사람다워지고 생명을 살립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살아 있고, 우리의 삶이 끝나는 날, 그분 안에 충만히 살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면, 우리의 삶도 자비를 실천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살자는 오늘의 축일입니다........................◆
[말씀자료 : 서공석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미가와 함께하는 묵상> : †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노래, 마니피캇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2년 10월 16일 '묵주 기도의 해'를 선포하면서 발표한 교황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에서 "성모님께서 엘리사벳과 만나시는 장면도 환희의 신비이다. 성모님의 목소리와 그분의 태중에 계시던 그리스도의 존재는 요한을 '기뻐 뛰놀게' 했다.
하느님이신 구세주 아기의 탄생을 천사들이 노래하며 목자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알리는 베들레헴의 광경도 환희로 가득 차 있다."(제20항)라고 설명하고 있다.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마을, 어느 작은 집에 사는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기뻐하소서!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라며 주님의 탄생을 예고한다.
이 사건을 우리는 환희의 신비 1단에서 묵상한다. 그로부터 석 달째에 접어들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축일'을 맞게 되는데, 환희의 신비 2단의 묵상이다.
마리아가 사촌 언니 엘리사벳도 아기를 가졌다는 말을 듣고 언니를 찾아가 보기 위해 짐을 챙겨 유다 산골을 찾아간다. 즈가리야와 엘리사벳 부부가 살고 있는 집에 도착한 마리아가 언니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고, 바로 이 순간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요한이 성모님의 태중에 계신 아기 예수님을 반겨 기뻐서 뛰노는 장면은 루가 복음(1,39-56.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에 기록된 대로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큰 소리로 외쳐 말했다.
"당신은 여자들 가운데서 축복 받았으며 당신 태중의 아기 또한 축복 받았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내게로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이 인사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자 아기가 내 태내에서 신명이 나 뛰놀았습니다."라고 한 다음, "복되어라, 믿으신 분!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들이 이루어지리니." 하고 진심으로 축하해 준 것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네"라고 응답한 데에 따른 찬미인 것이다.
그러자 마리아도 감격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저 유명한 '마니피캇(Magnificat)', 즉 '마리아의 노래'이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노래, 마니피캇
그 중에서도 다음 구절은 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적절한 교훈으로 다가온다.
"그분이 당신 팔로 힘을 행사하시어 / 그 심사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도다. 권세 부리는 자들을 권좌에서 내치시고 / 비천한 이들을 들어올리셨으며 굶주린 이들은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고 / 부유한 자들은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도다."
이 세상은 권력과 무력과 금력으로 다스려지는 곳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돌보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이 '찬미의 노래'를 통해서 성모님은 우리에게 일러주고 계시는 것이다. 신앙의 새 옷으로 갈아입은 우리라고 한다면, 마땅히 세상의 권력에 휘둘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무력이나 폭력으로 남을 억압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나 전쟁은 가당치 않다.
불의로 재산을 축적하거나 남의 재물을 탐내는 일도, 하느님을 첫 자리에 모시는 사람들이 할 일이 아니다.
마니피캇, 이 노래를 일부에서는 '엘리사벳의 노래'로 간주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리아의 노래'로 보고 있다. 5월 31일을 엘리사벳 성녀의 축일로 기리는 경우도 있으나, 실제로는 11월 5일에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아버지 즈가리야의 축일을 지내고 있다.
성모께서 자신을 도구로 해서 이룬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과 인류 구원 역사에 감사하며 부른 마리아의 이 노래는, 라틴어 '찬미하다'의 뜻을 지닌 '마니피캇'으로 시작되는 까닭에 그냥 '마니피캇'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톨릭을 뛰쳐나간 마르틴 루터 같은 이도 <마니피캇 주석>에서 마리아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겸손과 하느님 경외심의 표본"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웃사랑의 진정한 모범
마리아는 석 달 동안 엘리사벳을 도와서 부엌일과 바느질, 집안 치우기 등 바쁘게 일을 하고, 함께 기도하며 장차 태어날 아기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엘리사벳에게 마리아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자, 마리아는 다시 지루하고 먼길을 걸어 나자렛 집으로 돌아온다.
바로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이웃사랑의 전범을 보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스승인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확언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성호를 긋고 '아멘'이라 응답하며 '알렐루야'를 부르고, 모두 세례를 받아 교회에 나가게 되고 대성당을 지었다 할지라도, 단지 사랑만이 하느님의 자녀와 사탄의 자녀를 구별 지어 준다.
다시 말해 사랑을 지닌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났으며, 사랑이 없는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모든 것을 다 지녔다 해도 단 한 가지, 이것이 부족하다면 가지고 있는 그 어느 것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다른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더라도 만일 이것을 가지고 있다면 할 일을 다 한 것이다."
누가 내 이웃인가? 스치고 지나가는 모든 이가 내 이웃이고, 함께 생활하거나 전화로, 인터넷으로 이야기하는 상대가 내 이웃이다. 멀리 이라크에서 목말라 신음하고 있는 이들도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다. 어떻게, 얼마만큼 이웃을 사랑할 것인가? 구체적으로, 목숨을 내어줄 만큼 사랑해야 한다.....◆
[말씀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Ave Maria (Instrumental) - Schubert - Violin and Piano
Ave Maria - G. Caccini / Brinums - Inessa Gala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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