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帛書)

나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시편116,12)/장익주교님을 기리며

나뭇잎숨결 2020. 8. 9. 09:36

 

 

 

장익 주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당시 그의 한국어 교사 역할을 했던 장익 주교가 5일 선종했다. 향년 87세.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반세기 이상을 부당한 사제로 살도록 허락하신 과분한 은총을 입은 주님의 종, 죄인 장익 십자가의 요한 나는 그저 더없이 고맙고 송구한 마음뿐입니다.”(장익 주교 유언 중에서)

장익 주교는 마지막까지 스스로를 ‘죄인’이라며 한없이 낮췄다. 9개국 언어에 능통할 뿐 아니라, 우리 고전과 동서양 철학과 유교 사상 등 다방면에 풍부한 학식을 겸비했지만, 누구라도 그런 장 주교의 모습을 높이면 극구 손사래를 치던 겸손한 주교였다.

장 주교는 이날 발표된 마지막 유언에서 “나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내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를. 구원의 잔을 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네”(시편 116,12-13)라며 그저 목자로 살아온 자신의 삶 전체를 크나큰 주님의 은총으로 여겼음을 전했다.

장 주교는 ‘하나 되게 하소서’(요한 17,11)라는 그의 주교 수품 성구대로 춘천교구와 남북, 보편교회가 하나 되도록 평생 헌신한 목자였다.

 

 

장익 주교

(서울=연합뉴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당시 그의 한국어 교사 역할을 했던 장익 주교가 5일 선종했다. 향년 87세. [천주교 인천교구 제공.]

“과분한 은총에 고맙고 송구합니다” 유언

제6대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 5일 선종, 눈물과 기도로 ‘양냄새 났던 목자’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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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익 주교의 장례 미사가 8일 춘천 죽림동주교좌성당에서 춘천교구장 김운회 주교와 한국 주교단 공동 집전으로 봉헌됐다. 백영민 기자




제6대 춘천교구장 장익(십자가의 요한) 주교가 5일 오후 6시 9분 선종했다. 향년 87세.

춘천교구는 8일 오전 춘천 죽림동주교좌성당에서 교구장 김운회 주교 주례로 교구민들의 애도 속에 고인의 장례 미사를 봉헌하고, 장 주교의 천상영복을 기원했다.

장례 미사에는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를 비롯한 주교 30여 명과 사제, 수도자, 신자 등 500여 명이 성당 안팎을 가득 메워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1963년 사제품을 받은 장익 주교는 1994년 주교품을 받고, 춘천교구의 첫 한국인 주교로 착좌해 16년간 교구장직을 수행하며 교구의 기틀을 탄탄히 다졌다. 이날 교구 사제단과 신자들은 9개국 언어를 구사하며 풍부한 학식으로 교구 체제 정립과 평신도 교육, 북한 동포 돕기 등 보편교회와 교구를 위해 헌신한 고인을 추모하며 눈물과 기도로 애도했다.

춘천교구장 김운회 주교는 강론을 통해 “죽음을 앞두신 상황에서 장 주교님께서는 ‘춘천교구의 주교로 살 수 있어서 참으로 행복했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 모두가 장익 주교님이 우리의 주교님이셨다는 것이 참으로 행복했고, 고마울 뿐이었다”며 “주교님이 보여주셨던 많은 사랑과 열정, 그리고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기고 춘천교구 사제단과 신자들은 주님을 향한 여정을 더 행복하게 걸어가겠다”고 추모했다.

미사 후에는 사제수품 동기인 최창무(전 광주대교구장) 주교 주례로 고별 예식이 거행됐으며, 이어 고인의 약력 소개, 프란치스코 교황의 조전과 주교단 고별사로 고인의 넋을 기렸다.

교황청 국무원장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은 메시지를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장익 주교님의 선종 소식을 접하고 깊은 슬픔을 느끼며, 춘천교구 사제단과 교구민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전하셨다”며 “장 주교님이 하신 한국 교회를 위한 헌신적인 사목활동과 주교 직무, 로마 가톨릭교회를 위한 고귀한 직무 수행을 회상하시면서 장엄한 장례 미사에 마음으로 함께하겠다 하셨다”고 전했다.

장 주교는 교구 방침에 따라 화장을 거쳐 춘천 죽림동주교좌성당 뒤뜰 성직자 묘역으로 옮겨져 교구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안치 예식을 마지막으로 영원한 천상 안식에 들어갔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장익(십자가의 요한) 주교 약력

1933년 11월 20일 서울 출생

1956년 6월 미국 메리놀대학 인문학과 졸업

1959년 7월 벨기에 루벵대학 철학석사ㆍ박사과정 수료

1963년 3월 사제 수품(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1967년 4월 서울대교구 대방동본당 보좌

1967년 8월 서울대교구 교구장 비서

1970년 1월 서울대교구 정릉본당 주임

1973년 8월~1993년 9월 서강대학교 강사 겸 부교수

1974~1975년 국립대만대학 중문계 연구소 수학(대학원)

1976년 서울대교구 공보ㆍ비서실장

1982년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 대학원 철학박사 과정 수료

1986~1990년 서울대교구 사목연구실 실장

1990~1994년 서울대교구 세종로본당 주임

1994년 11월 11일 춘천교구장 주교 임명

1994년 12월 14일 주교 수품

1995~2002년 주교회의 문화위원회 위원장

1996~2002년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

2002~2008년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 위원장

2005~2010년 주교회의 민족화해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2005년 함흥교구장 서리 임명

2006~2008년 주교회의 의장

2010년 1월 28일 춘천교구장, 함흥교구장 서리 사임, 은퇴

2020년 8월 5일 선종

종교를 넘어 언어와 예술까지… 깊은 영성과 넓은 식견 겸비한 목자

장익 주교의 삶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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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에 누운 장익 주교 손에 때때로 힘이 잔뜩 들어갔다. 자그마한 나무 십자가를 쥔 손이었다. 암세포는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다. 극심한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그는 십자가를 움켜쥐었다. 주치의에겐 평소 진통제도 필요 없다고 해뒀다.

7월 말경 장 주교를 병문안하고 온 이들은 한결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주교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에 함께하고 있는 듯하다”고. 평소 장 주교 곁을 지킨 춘천교구 사회사목국장 김학배 신부는 “진통제도 마다하신 주교님께선 고통을 기쁘게 받아들이셨다”고 말했다. 마지막엔 눈을 뜰 힘조차 없던 장 주교는 자신을 찾아온 이들의 인사에 말없이 눈물로 대답을 대신했다. 8월 5일 오후 6시 9분. 예수님께선 그의 고통을 거둬 가셨고, 장 주교는 비로소 세상의 십자가를 내려놓았다.

초대 주미대사이자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 박사의 삼남, 김수환 추기경의 비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한국어 교사라는 굵직한 이력은 장 주교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다.

2010년 16년간의 춘천교구장직을 내려놓고 은퇴한 그가 마지막까지 심혈을 기울였던 사업 중 하나는 아버지 장면(요한, 1899~1966) 박사의 삶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는 운석장면기념사업회 이사로서 아버지의 정치적, 외교적 삶과 신앙의 발자취가 재조명되기를 바랐다. 어느 자리에 있건, 어떤 역할을 맡건 언제나 반듯하고 정확했던 그의 성격은 장면 박사와도 닮아있다. 집안끼리 친분이 있어 어린 시절부터 장 주교를 알고 지내온 권경수(헬레나) 전 이화여대 교수는 “자기 자신에겐 엄격하고, 교회에 헌신했던 주교님의 삶은 아버지 장면 박사의 가르침과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한국어 선생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식과 103위 성인 시성식을 위해 한국을 찾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어로 미사를 주례해 한국 신자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교황의 한국어 실력은 오롯이 장 주교의 공이었다. 바티칸에 한국 대사관이 없던 시절 교황청립 그레고리안대학교에서 유학 중이던 장 주교는 한국 교회와 교황청 다리 역할을 하며 교황의 한국어 교사가 됐다. 김수환 추기경 역시 장 주교가 영어는 물론 여러 유럽 언어에 능통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믿고 맡겼다. 장 주교의 언어 구사 능력엔 누구나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어쩌다 보니 여러 나라에서 공부하게 됐고, 공부하려면 그 나라 말을 먼저 알아야 하니 책 보고 배워서 조금 말할 줄 알게 된 것”이라고 했다.

보편 교회와 한국 교회 두 수장 곁을 지킨 그에게도 때때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지만, 그는 항상 두세 걸음 물러나 있었다. 한홍순(토마스)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는 “1960년대 말 로마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김수환 추기경님 비서로 동행했던 장 주교님을 뵌 적이 있는데 추기경님을 빈틈없이 수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른을 모시는 데는 정말 최고라는 생각을 했다”고 회고했다.



춘천교구 첫 한국인 교구장 주교


장 주교는 서울 세종로본당 주임을 맡던 중 1994년 춘천교구장 주교로 임명됐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는 한없이 서툴렀던 그는 자신의 주교 임명 사실조차 본당 신자에게 제때 알리지 못했다. 신자들은 주임 신부가 주교가 됐다는 소식을 방송을 통해 전해 들었다. 게다가 장 주교는 자신을 챙기고 무언가 소유하는 데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듯이 살았다. 자신에게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이 생기면 주변 사람에게 모조리 나눠줬다. 겨울 외투 한두 벌로 십수 년을 지낸 그는 “혼자 사는 노인이 무슨 옷이 필요하냐”며 웃을 뿐이었다. 자신이 지내는 공소 사제관으로 찾아온 이들에겐 손수 만든 파스타를 대접하곤 했다. 그와 함께했던 이들이 “그렇게 겸손하고 검소하실 수가 없다”고 입을 맞춘 듯 이야기하는 이유이다.



예술적 조예로 가톨릭미술가회 지도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장 주교는 오랫동안 가톨릭미술가회를 지도하며 교회 미술 발전에 애써왔다. 미술가들이 있는 곳에는 장 주교가 있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는 사제시절 가톨릭미술가회 회원들을 주일마다 만나 전례와 교회 역사를 직접 가르쳤고, 성당 건축에 미술가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춘천교구장 시절에는 교구에 작은 공소 하나를 지어도 꼭 미술가들과 상의하도록 했다. 장 주교의 묵상 글에 그림을 그리며 10년간 춘천교구 달력을 만들어 온 김형주(이멜다) 화백은 “주교님께서는 작품에 담긴 작가의 숨은 뜻도 알아채실 정도로 작품을 보는 깊이가 남다르셨다”고 말했다. 그의 미적 감각은 집안 내력에서 기인했을 터다. 서울대 미대 초대 학장을 지낸 장발(루도비코, 1901~2001) 화백이 그의 작은 아버지였다. 그는 교회 미술의 중요성과 예술 작품이 지닌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춘천교구가 생긴 이래 55년 만에 탄생한 첫 한국인 교구장 주교였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외국인 사제들이 닦아 놓은 터에 장 주교는 기틀을 세웠다. 그가 춘천교구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교구 본당은 38개에서 58개로 늘었다. 교구 사제는 58명에서 97명으로 신자는 5만 2000명에서 7만 7000명으로 증가해 교구 성장을 이끌었다. 겉으로 보이는 성장만큼이나 사제와 신자들의 신앙은 한층 깊어졌다. 성서백주간을 한국 교회에 처음 도입했던 만큼 신자들이 말씀의 삶을 살기를 강조했다. 이와 함께 교구의 첫 한국인 주교로서 외국인 사제와 주교가 미처 보듬지 못한 교구민 정서와 교구 사정을 살뜰히 살폈다. 교구 사제들은 “주교님께서 당시 생각지도 못한 제도를 만들어 실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며 “교구 사제라면 누구든 주교님께 항상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통일 사목에 큰 관심, 나눔과 사랑 실천

신부시절부터 남북 화해와 일치를 위한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며 1987년 북한을 방문했던 장 주교는 북한 형제를 돕는 일이 신자들 일상에 스며들도록 노력했다. 한솥밥한식구 운동을 펼치며 교구 내에 한삶위원회를 설립, 인도적 대북 지원에 앞장섰다. 이 밖에도 함흥교구장 서리였던 그는 한국전쟁을 전후로 북한에서 순교한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와 덕원자치수도원구, 함흥교구 및 연길교구 사제들의 시복 예비심사도 기꺼이 도맡았다.

장 주교는 생전 가까운 이들에게도 깍듯이 예의를 갖추며 살가운 곁을 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의 방식으로 찬찬히 사랑을 전해줬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그는 춘천교구장으로 부임하면서 “이곳에 뼈를 묻겠다”고 했고 그의 다짐대로 많은 이의 기도 속에 춘천 죽림동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cpbc.co.kr


춘천교구 발전에 헌신한 겸손한 사제, 하느님 품에 안기다

장익 주교 선종 - 장례 미사 이모저모

8일 춘천 죽림동주교좌성당에서 봉헌된 제6대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의 장례 미사는 오랫동안 고인과 함께했던 한국 교회 주교단과 사제, 신자들의 애도 속에 엄숙하고도 경건하게 거행됐다. 16년 동안 교구장 주교로서 춘천교구 발전을 위해 헌신한 기간까지, 57년이란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폭넓은 학식과 겸손을 겸비한 사제로 살아온 고인과의 이별에 모든 이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반세기 이상을 부당한 사제로 살도록 허락하신 과분한 은총을 입은 주님의 종, 죄인 장익 십자가의 요한 나는 그저 더없이 고맙고 송구한 마음뿐입니다.”(장익 주교 유언 중에서)

장익 주교는 마지막까지 스스로를 ‘죄인’이라며 한없이 낮췄다. 9개국 언어에 능통할 뿐 아니라, 우리 고전과 동서양 철학과 유교 사상 등 다방면에 풍부한 학식을 겸비했지만, 누구라도 그런 장 주교의 모습을 높이면 극구 손사래를 치던 겸손한 주교였다.

장 주교는 이날 발표된 마지막 유언에서 “나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내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를. 구원의 잔을 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네”(시편 116,12-13)라며 그저 목자로 살아온 자신의 삶 전체를 크나큰 주님의 은총으로 여겼음을 전했다.

장 주교는 ‘하나 되게 하소서’(요한 17,11)라는 그의 주교 수품 성구대로 춘천교구와 남북, 보편교회가 하나 되도록 평생 헌신한 목자였다.



○…연일 장맛비로 폭우가 예상됐지만, 장례 미사 당일인 8일 오전 춘천시 하늘은 햇볕이 내리쬐었다. 이날 장례 미사에는 주교단 30여 명과 함께 사제, 수도자, 신자 500여 명이 참석했다. 코로나19 여파로 성전에는 150여 명만 입장해 거리를 두고 앉았으며, 많은 이가 성당 마당 야외 좌석을 메웠다.

방역 수칙을 지켜야 하는 탓에 성가를 부르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 속에도 유가족을 비롯해 장 주교와 평소 가까이 지냈던 사제와 신자들은 이따금 슬픔을 참지 못하고 마스크 너머로 흐느꼈다. 이날 장례 미사에는 장 주교의 외조카 공요한(요한)씨를 비롯해 유가족 10여 명이 자리했다. 앞서 6~7일 이틀 동안에는 장맛비와 코로나19를 뚫고 장 주교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각계 인사와 교구민들의 조문행렬도 이어졌다. 장례 미사와 빈소 풍경은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됐다.



○…고별식에서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과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의 애도 메시지가 낭독됐다.

염 추기경은 “9개국 언어를 하신 장 주교님의 열 번째 언어는 당신의 말과 행동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랑의 언어’였다”며 “주교님의 해박한 지식과 깊은 영성은 신자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됐다”고 추모했다. 염 추기경은 특히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 국민들의 고통과 질곡의 삶 한가운데를 사시면서 모두의 고통과 상처 치유를 위해 노력하셨다”며 “한일 주교교류 모임을 통한 역사 바로알기, 함흥교구장 서리를 겸임하며 북한 신자들을 헤아리는 활동, 인도적 대북지원 및 북한 동포 돕기 사업 등은 모두 하나 되도록 하는 실천이었다”고 전했다.

40년 지기요, 동료 주교로 각별했던 김희중 대주교는 내내 흐느끼는 목소리로 고별사를 읽어내려 갔다. 김 대주교는 “장 주교님은 로마 유학 중 가끔 저를 차에 태우고 다니셨는데, 주교님의 차는 폐차 직전이었고, 비 오는 날에는 녹이 슬어 구멍 난 밑바닥에서 구정물이 올라와 다리를 들어올려야 할 때면 껄껄껄 웃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며 검소했던 고인의 삶을 떠올렸다. 김 대주교는 “당신이 평소 보여주신 겸손, 검소, 소박함의 가치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우리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이끌어줄 것”이라며 영원한 안식을 기원했다.

“주교님, 사랑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미사 후 유가족과 주교단, 교구민은 장례 미사 후 운구 차량에 태워진 고인을 향해 일제히 깊이 고개를 숙였다. 장 주교의 유해는 교구 방침에 따라 화장을 거친 후 춘천 죽림동주교좌성당 뒤뜰 성직자 묘역에 안치됐다.



○…장익 주교의 검소함은 잘 알려져 있다. 성구와 제의는 주교품을 받을 때 마련했던 것만 줄곧 썼고, 누군가 옷을 선물하면 체구가 비슷한 후배 사제들에게 곧장 나눠줬다. 30년 넘은 가방, 한두 개뿐인 외투, 고장이 나도 몇 번이고 고쳐 쓴 컴퓨터와 전자제품 등이 그의 소박한 삶을 대변한다. 평소 도토리 임자탕과 두부를 좋아했던 장 주교는 가끔 유학 시절을 떠올리며 주변 사람들에게 파스타 요리를 직접 해주는 등 소탈한 모습을 유지했다.

8년간 실레마을 공소 주교관에서 장 주교의 식복사를 지낸 한요세피나씨는 “제가 편하게 말씀하시라고 해도 늘 존댓말로 이야기하셨고, 산책과 차 한잔 할 때에도 다양한 책과 학문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며 “자상하고 배려심 많은 주교님께서 해주신 파스타가 그립고, 지금이라도 오셔서 말씀을 건네실 것만 같다”고 했다.

춘천교구장 부임 이후 지금까지 아버지와 아들 같은 관계를 이어온 김학배(교구 사회사목국장) 신부는 “이스라엘 성지순례 때 만난 각국의 사제들이 한자리에서 식사하는 중에 장 주교님이 불어, 이탈리아어를 능수능란하게 하시며 그들의 대화를 통역했는데, 그들이 너무 소박한 모습의 주교님을 몰라보고 놀랐던 적도 있었다”며 “교구장 시절 여러 본당과 작은 공소를 일일이 방문하셨던 주교님은 6차례에 걸친 항암치료 후 수척해지신 상황에서도 특히 냉담 교우 회두를 걱정하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고 전했다.

같은 서울 혜화동본당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형제애를 지키며 지내온 정진석 추기경은 본지에 보내온 특별 애도 메시지를 통해 “장 주교님은 나와 성당 친구였고, 성직자로, 주교로서도 각별한 친구였다”며 “교회와 사회의 인재였던 주교님과 한 시대를 살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을 함께한 것은 참으로 은총이었다”고 회고했다.

장 주교와 미국 메리놀 소신학교 때부터 동기로, 북한 지원사업에도 함께했던 70년 지기 함제도(메리놀외방선교회) 신부도 “당시 미국에 막 오셔서도 주교님은 언어를 단숨에 터득해 신학교에서 성적도 1등을 했었다”며 “북한과는 늘 평화, 대화, 화해를 강조하셨다”고 전했다.

장익 주교와 동갑내기 육촌지간인 장명선(안드레아)옹은 “주교님은 5대에 이르는 우리 천주교 집안에서도 신앙의 표본이셨다”며 “선종 소식을 듣고 마리아, 요셉 성인께 ‘하느님의 종 주교님을 하느님의 나라로 인도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했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생활성서 9월호 특별기고] 장익 주교님을 추억하며

마지막 제자

장익 주교님께서 하느님 품으로 떠나셨다는 소식에, 황망히 춘천 죽림동 성당에 계신 마지막 모습을 뵙고 돌아오는 길은 먹먹한 가슴에 긴 한숨이 나왔습니다. 예의 그 모습으로 늘 기다려주실 줄 알았는데….

주교님의 전화 첫 마디가 생생합니다.

“장익이에요.”

앞뒤 수식어 없이 존함만을 말씀하시는 어법에 처음엔 놀랐지만, 어느새 저도 주교님을 따라하고 있었습니다.

주교님의 이 자기소개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반세기 이상 부당한 사제로 살도록 허락하신 과분한 은총을 입은 주님의 종, 죄인 장익 … 더없이 고맙고 송구한 마음”이라는 주교님의 유언 문구와도 맥이 통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아시는 모습이지요.

춘천교구청 집무실에서, 사진출처:생활성서 1998년 1월호

 

주교님의 박학함과 언어의 특출함은 널리 알려진 바였으나, 제가 직접 경험하고 놀라워했던 첫 사건은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방한하셨을 때였습니다. 몇 개 국어를 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로 통역하시는 모습에 그만 멍해졌지요.

1994년 뒤늦게 가톨릭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했는데, 그 유명한 분이 그곳 학부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신학의 주요 과목을 거의 다 가르칠 수 있는 박학다식한 분이 왜 영어를 가르치실까? 의아했지만, 여하튼 ‘언어 천재’의 언어 강의를 들을 호기였습니다.

 

첫 강의에서 의문은 풀렸습니다. ‘이 지구촌 시대에 사제들도 외국어를 좀 해야 하는데, 대부분 잘 못하는 게 안타까워’ 강의를 맡았다고 출강 동기를 말씀하시는 거였습니다. 무표정하고 투박했지만, 그 말씀에는 후배 사제들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습니다.

평이하고 단조로운 듯한 강의에는 잊히지 않는 특별함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어느 나라의 이민자 정책에 대한 자기 생각을 담은 영어 에세이를 써오라는 과제를 내주셨습니다. 당시 다른 나라의 이민자 정책에까지는 관심이 없던 터라 당황했지만, 과제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나라에 대한 폭넓은 공부와 동시에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정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인류에게 땅을 주시어 더불어 살게 하신 하느님의 뜻까지도 헤아려 보게 되었고요. 단순한 ‘영어’ 과제가 아닌 ‘통섭’ 과제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과제물을 돌려주셨는데, 한 번 더 어리둥절해졌습니다. 채점이 됐거나 잘못된 문장이 바로잡아졌을 줄 알았는데, 아무 설명 없이 그저 빨간 줄만 살짝살짝 그어져 있었습니다. 혼자서 다시 문제를 해결해보라는 의미였습니다.

유명세에 비해 아주 소박했던 그 강의를 부담 없이 즐기던 무렵 장익 신부님은 주교로 서품되시어, 결국 저는 주교님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습니다. 주교님의 특출함은 감히 넘볼 수 없지만, 하느님 앞에서 ‘과분한 은총을 입은 죄인’임을 늘 의식하신 겸허함만은 닮아갈 욕심을 내봅니다.

“주님의 겸허하신 모습을 몸소 보여주신 장익 주교님, 참 고맙습니다!”

글 송향숙(생활성서사 단행본 편집국장)

[출처] [생활성서 9월호]장익 주교님을 추억하며|작성자 생활성서사

 

 

“과분한 은총에 고맙고 송구합니다” 유언

▲ 장익 주교의 장례 미사가 8일 춘천 죽림동주교좌성당에서 춘천교구장 김운회 주교와 한국 주교단 공동 집전으로 봉헌됐다. 백영민 기자 제6대 춘천교구장 장익(십자가의 요한) 주교가 5일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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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넘어 언어와 예술까지… 깊은 영성과 넓은 식견 겸비한 목자

병상에 누운 장익 주교 손에 때때로 힘이 잔뜩 들어갔다. 자그마한 나무 십자가를 쥔 손이었다. 암세포는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다. 극심한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그는 십자가를 움켜쥐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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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발전에 헌신한 겸손한 사제, 하느님 품에 안기다

8일 춘천 죽림동주교좌성당에서 봉헌된 제6대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의 장례 미사는 오랫동안 고인과 함께했던 한국 교회 주교단과 사제, 신자들의 애도 속에 엄숙하고도 경건하게 거행됐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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