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결여'가 없는(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이 주제를 풀어가기 위해서 강의 도중 울기 잘하시는 신형철 선생의 비평문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은 '정확하게 사랑하기 위한' 사랑에 대한 사유, 언어적 몸부림이다. 우리가 끝끝내 '정확한 사랑'을 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더 정확하게 사랑하기 위해' 끝끝내 걸어가야 하는 이유는 '사랑' 만이 우리 순례의 '마중물priming water'이기 때문이다. 전생이 '곡비哭婢'인 사람들이 자신의 '결여'를 안고 '결여' 조차도 바라보지 못하는 세상의 '결여'를 향해 왜 대신 울게 되는지,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해 울라" 던 J의 언명을 떠올리며, 이 여름 신형철 선생의 비평집을 필독서로 권한다. 그래서 공허한 웃음 대신 맑은 눈물을 많이 흘리기를 바란다. 그 다음에 웃어도 늦지않고, 그런 후에 웃어야 염화미소 할 수 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한겨레출판사, 2018), 정확한 사랑의 실험(2014, 마음산책), 느낌의 공동체(문학동네. 2011), 몰락의 에티카(문학동네, 2008)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결여를 깨달을 때의 그 절박함으로 누군가를 부른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말, '나도 너를 사랑해’라는 말의 속뜻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결여다.’
여타의 관계와는 다른, 사랑 고유의 교환 구조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나는 그것이 ‘결여의 교환’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결여를 갖고 있다. 부끄러워서 대개는 감춘다. 타인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그의 결여를 발견하는 때가 있다. 그리고 그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의 결여가 못나 보여서 등을 돌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결여 때문에 그를 달리 보게 되는 일. 그 발견과 더불어, 나의 결여가, 사라졌으면 싶은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결여와 나누어야 할 어떤 것이 된다. 내가 아니면 그의 결여를 이해할 사람이 없다 여겨지고, 그야말로 내 결여를 이해해 줄 사람으로 다가온다. 결여의 교환 구조가 성립되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떤 문장도 삶의 진실을 완전히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어떤 사람도 상대방을 완전히 정확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뛴다.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세상 사람들이 ‘외도를 하다 자살한 여자’라고 요약할 어떤 이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2000쪽이 넘는 소설을 썼다. 그것이 『안나 카레니나』다. 이런 작업을 ‘문학적 판단’이라 명명하면서 나는 이런 문장을 썼다. “어떤 조건하에서 80명이 오른쪽을 선택할 때, 문학은 왼쪽을 선택한 20명의 내면으로 들어가려 할 것이다. 그 20명에게서 어떤 경향성을 찾아내려고? 아니다. 20명이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왼쪽을 선택했음을 20개의 이야기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어떤 사람도 정확히 동일한 상황에 처할 수는 없을 그런 상황을 창조하고, 오로지 그 상황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선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시도, 이것이 문학이다.”
‘비가 오고 우리는 춥다, 생의 등대를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노래의 끝에서 홍상수는 유준상의 입을 빌려 안느의 이름을 세 번 부른다. 아니, 세 안느의 이름을 한 번씩 부른다. 라이트하우스가 없는 세계에서 각자가 자신의 라이프가드가 되어야만 하는 우리 모두의 이름은 이 세 안느의 이름 중 하나와 같다.
『롤리타』라는 소설을 읽지 않아도 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롤리타콤플렉스’라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은 한 인간을 이해하는 말이 아니라 오해하는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사내를 이해하는 길은 오로지 그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방법밖에 없다.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우리는 ‘롤리타콤플렉스’라는 말을 집어던질 수 있게 될 것이고, 무죄추정...의 원칙을 새삼 되새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그 은유를 이렇게 정리하려고 한다. ‘성장은 살인이다.’ 우리는 성인이 되기까지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을 먹어치우고, 그것으로 내 안의 타자를 일깨운 다음,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그들을 (실제적으로건 심리적으로건) 떠난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의 몇몇 고비들을 특정한 어떤 사람을 상징적으로 살해하면서통과한다. (자신의 성장 과정을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회상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읽고 해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비평가일지도 모른다
신형철의『정확한 사랑의 실험』은 2012년 6월부터 2014년 4월까지 약 2년간 [씨네21]에 발표했던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연재 글 19편과, 2011년 웹진 ‘민연’에 발표했던 글 2편, 2013년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에 발표했던 글 1편을 묶어 27편 영화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총 22편의 글을 주제와 성격에 따라 4부로 나누고, 연재 외 발표 글을 5부 ‘부록’으로 엮었다. 4부로 묶은 글의 주제는 각각 ‘사랑의 논리’ ‘욕망의 병리’ ‘윤리와 사회’ ‘성장과 의미’다. 저자는 ‘책머리에’에서, “네 개의 주제로 나눠 묶고 보니 비평가로서의 내 관심사가 대개 이 넷으로 수렴된다는 것을 알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미 문학비평으로 두꺼운 팬층을 확보한 신형철이다. 문학평론가로서 영화평론을 쓴다는 일이 과연 쉬웠을까. 어두운 극장에서 메모를 하고 같은 영화를 대여섯 번 반복해서 보며 이 글을 쓴 신형철은 [씨네21] 연재 당시 이런 글을 덧붙이기도 했다. “영화라는 매체의 문법을 잘 모르는 내가 감히 영화평론을 쓸 수는 없다. 영화를 일종의 활동서사로 간주하고, 문학평론가로서 물을 수 있는 것만 겨우 물어보려 한다.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하고.” 그가 쓰는 영화평론은 결국 ‘좋은 이야기’에 대한 글이며 그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의 비밀에 대한 글이기도 하다. 눈이 깊은 저자는 그 비밀을 더 정확하게 말하기 위한 노력을 이 책 안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 책의 1부는 ‘사랑의 논리’라는 주제로, ‘정확한’이라는 형용사를 ‘사랑’ 앞에 세워두게 되면 어떠한 깊이에 도달하게 되는지 [러스트 앤 본] [로렌스 애니웨이/가장 따뜻한 색, 블루] [시라노; 연애조작단/러브픽션/건축학개론/내 아내의 모든 것] [케빈에 대하여] [아무르]를 통해 이야기한다.
2부는 ‘욕망의 병리’라는 주제로, 김기덕과 홍상수 영화에서 드러나는 욕망의 문제, 불안과 우울의 정서로 드러나는 종말의 서사를 [피에타] [다른나라에서] [뫼비우스] [우리 선희] [멜랑콜리아] [테이크 셸터]를 통해 이야기한다.
3부는 ‘윤리와 사회’라는 주제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둘러싼 논의들을 이야기하는데 대상 영화는 순서대로 [더 헌트] [시]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 [늑대소년] [설국열차]다.
4부는 ‘성장과 의미’라는 주제로, 살인과도 같은 성장의 의미와 희망 없이도 살아나가야 하는 삶의 의미를 [스토커] [머드] [라이프 오브 파이] [그래비티] [노예12년]을 통해 그리고 있다. 그리고 5부 ‘부록’에서는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2부]에서야 밝혀진 ‘스네이프’의 이...야기를 성경 속 배신자 유다의 서사와 겹쳐 읽고, 영화를 보며 “순수한 쾌감으로 행복해한” 관객으로서의 이야기를 영화 [사랑니]를 통해 풀어놓는다.
저자 신형철은 정확하게 쓰는 비평가가 되기를 원한다. 정확한 논리가 주는 쾌감이 그의 글을 읽게 만드는 힘이다. 정확한 인식을 담은 정확한 문장은 결국 아름다움을 획득하고야 만다. 정확한 글이 곧 미문인 것이다.
신형철 비평가의 최신 글 한 편을 더 읽어 보자--------------------------
어쩌다 작품 합평을 하게 되면 학생들에게 권장한다. ‘한 가지를 비판하고 싶으면 먼저 다섯 가지를 칭찬하라.’ 김연수 작가의 책에서 ‘인간은 긍정적 신호보다 부정적 신호를 다섯 배 강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다. 물론 기계적 균형을 맞추라는 뜻은 아니다. 동료의 잠재력을 찾아내 보려는 태도의 가치를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인위적으로 상처를 입혀야 누군가를 성장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낡은 생각일 수 있다. 성장은 자신을 알게 되는 체험인데, 그가 제 작품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자기도 잘 아는’ 단점이 아니라 ‘자기는 잘 모르는’ 장점이다. 예술가로 성장한다는 것은 단점을 하나씩 없애서 흠 없이 무난한 상태로 변하는 일이 아니라 누구와도 다른 또렷한 장점 하나 위에 자신을 세우는 일이라고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합평 대상 학생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만은 아니다. 합평 주체들의 흔한 경향성을 견제해보겠다는 취지가 더 중요하다. 때로 어떤 학생들은 평가란 곧 비판일 뿐이며, 비판은 가혹할수록 솔직하고 용기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비판을 수행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만족감을 느낀다. 물론 비판은 필요하다. 그러나 대상을 위해서지 주체를 위해서가 아니다. 비판은 대상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이어야지 주체가 무언가를 가져가버리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잉여 쾌락이라고 할 만한 부산물을 산출해내고 그것을 주체가 향유하는 비판, 그렇기 때문에 대상은 빈곤해지고 주체만 풍요로워지는 비판은 나쁜 비판이다. 강의실 바깥에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잉여 쾌락에는 몇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절약의 쾌락. 프로이트의 말대로라면 쾌락은 절약의 결과다. 어떤 대상(사람 혹은 사건)의 진실을 온전히 파악하려면 섬세해져야 하는데 거기엔 에너지가 투자될 수밖에 없다. 어떤 비판은 그 투자를 절약함으로써 홀가분한 잉여 쾌락을 가져간다. 근래 나는 어느 선배 문인으로부터 “풍문에 듣자 하니 네가 ‘조빠’라던데 부끄러운 줄 알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으며 그 비판에 전제돼 있는 관심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러나 좋은 비판을 받았다는 생각을 하긴 어려웠다. 나는 검찰의 수사가 비정상적이고 언론의 보도가 병리적이라고 판단한 수많은 시민들 중 하나로 어떤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긴 했으나,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신도’는 아니다. 나는 잘못 요약되었고 선배는 쾌락을 얻었다.
둘째, 소속의 쾌락. 나쁜 비판은 진실의 복잡성을 훼손하는 데서 나아가 세상을 양분(兩分)한다. 하나의 범주에 ‘그들’을 쓸어 담으면 여집합으로 ‘우리’가 생겨난다. 문제는 이런 나쁜 비판들 주변에도 사람이 모인다는 것이다. 그 비판에 동참하는 일이 뿌듯한 소속감을 제공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비판한다, 고로 소속된다.’ 안타깝게도 소속감에 대한 이런 갈망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진영 논리를 비판하며 자유자재한 지식인임을 과시하는 칼럼니스트도 제 글에 달린 ‘좋아요’의 개수를 확인하며 자신이 혼자가 아님에 전율할 수 있다. 우리의 이 한심한 본성을, 거스르긴 어려워도 부추겨선 곤란하다고 의식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셋째, 쌤통(샤덴프로이데)의 쾌락. 정파적인 언론들이 반대 진영 인사를 공격하는 기사를 분별없이 쏟아낼 때 ‘비판’이라는 것은 언론의 사명이 아니라 변명처럼 보인다. 검찰이 선별적으로 흘리는 피의사실을 보도하고, 확인된 사실 자체가 아니라 ‘의혹이 제기됐다는 사실’을 중계하고, 가족을 뒤쫓고 주거지를 포위하여 나온 기사들의 행간에는 타인의 불행을 즐기자는 권유가 섞여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공인의 잘못을 나무랄 때도 우리들의 비판은 쉽게 조롱과 혐오로 번져 나간다. ‘응보적 정의’를 넘어서는 ‘회복적 정의’를 사유하는 일각의 흐름이 무색하게도, 누군가를 회복 불가능의 상태로까지 절멸시켜야만 종결될 것처럼 보이는 일부 나쁜 비판의 목소리들은 이미 그들 자신의 쾌락을 위한 것이지 대의나 약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 글도 비판이다. 비판에 대한 비판. 그러므로 위에서 늘어놓은 말들은 고스란히 내게 되돌아온다. 이 글은 대상에게 무언가를 선물하는가 아니면 그로부터 무언가를 탈취하는가. 어떤 잉여 쾌락을 누리기 위해 쓰인 글인가. 고백하자면 나는 위의 다섯 단락을 씀으로써 지금 나를 향하는 저 질문들에 ‘지면관계상’ 답할 수 없게 되는 데 성공했다. 작가 제임스 볼드윈은 꼬집었다. “사람들이 그토록 집요하게 누군가를 증오하는 이유는 그 증오가 사라지면 자신의 고통을 상대해야만 한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 이 글의 문맥에 맞게 저 문장을 함부로 바꾸면 이렇다. “사람들이 그토록 집요하게 누군가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 비판을 그만두면 자기 자신을 비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사유(思惟)'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과 결혼에 대하여/칼린지브란 (0) | 2020.09.16 |
---|---|
아도르노의 비판이론과 미학 (0) | 2020.08.25 |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지 말라/Richard Carlson (0) | 2020.08.04 |
존재의 근거, 낯선 타자의 맨얼굴를 만져보는 것 (0) | 2020.08.04 |
윤리적 실재론 논쟁의 구조와 외적 실재론의 가능성 (0) | 2020.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