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a Signorelli, The Elect (detail), 1499-1502, Fresco, Chapel of San Brizio, Duomo, Orvieto.
이탈리아 오르비에토 주교좌성당 성 브리치오 경당
[1]육신의 부활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손희송 서울대교구총대리 주교 [2]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조욱현 신부 [3]육신의 부활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김웅태신부 [4]“육신의 부활을 믿으며”에 대한 교의신학적 성찰/심상태신부 [5]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 요셉라씽어, 장익주교역, 분도출판사, 1974, pp.276~286 |
[1]육신의 부활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손희송 주교《서울대교구총대리 주교》
*신비를 만나는 사람들* 중에서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 세상 마지막 날에 육신이 부활할 것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육신의 부활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 즉 지금의 우리 육신 그대로 부활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늙어서 죽은 사람은 허리가 구부러지고 주름살투성이인 얼굴을 지닌 몸으로 부활한다는 말이된다. 이런식으로 생각하면 장애인들에게는 육신의 부활이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부담과 짐이 될 수밖에 없다. 불편한 몸으로 한세상 산 것도 힘겨웠는데 그 몸으로 영원히 살다니 그럴 바에야 아예 육신의 부활이 없는것이 낫겠다* 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의 부활을 지금의 육신 그대로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큰 오해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1서에서 육신의 부활에 대해서 언급한다. 우리의 현재의 몸이 씨앗처럼 묻히고 이것이 썩어서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는 씨앗에서 나오는 것이긴 하지만 씨앗과는 다른 그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한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천한 몸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1고린 15,42~44)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따르면 육신의 부활이란 지금의 몸 그대로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현재의 육신이 달라지고 완성된 모습으로 살아난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하고 나중에야 알아보았다는 사실이 이런점을 뒷받침해 준다.
세상 마지막 날에 부활할 우리 육신이 어떤 모습일지, 지금 나의 육신과 어떤 관계에 있게 될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하지만 세상 이치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다
씨앗은 땅에 묻혀서 썩지만 거기서 싹이 트고 자라나 큰 나무가 된다. 또한 과실수의 경우 꽃이 지면서 작은 열매가 맺히고 그것이 자라나 탐스러운 과일이 된다. 그리고 애벌레는 죽은듯이 고치에 갇혀 있다가 때가되면 아름다운 나비로 변한다. 씨앗과 큰 나무, 꽃과 열매, 애벌레와 나비는 하나이면서도 서로 다르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의 썩을 육신과 마지막 날에 부활할 육신은 하나이면서도 서로 다를 것이다. 부활한 육신은 변화되고 완성된 육신으로서,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어 아름답고 좋은 모습을 지닐 것이다. 왜냐하면 태초에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하신 하느님이 세상의 마지막도 좋고 아름답게 꾸미실 것이기 때문이다.?
[2]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조욱현 신부
인간의 완성이 각 개인의 일생 전체를, 죽음의 순간까지 포함하여 이루어진다고 하였고, 심판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자기가 가장 정확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상태라고 하였다. 그러면 심판을 받는다고 할 때, 육신은 분명히 땅에서 썩어갈 것이다. 그렇게 썩어진 육신이 어떻게 심판을 받을 수가 있겠는가? 여기에서 육신부활(肉身復活) 문제가 대두하게 된다. 왜냐하면 죽음을 통해서 심판을 받을 때에도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 때의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은 “영혼과 육신의 결합체”라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는 이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기에 심판 받는 나는 영혼과 육신이 완전히 결합된 나이지 영혼만으로 된 나도 아니며, 육신만 있는 나도 아니다. 영혼만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귀신일 것이며, 육신만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시체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하느님 앞에 심판을 받을 때에도 육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분명히 죽은 다음에 썩어 가는 육신은 죽음을 통해서 갖게 될 육신은 아니다.
만일에 썩은 육신이 다시 혼합되어 새로운 육신으로 입게 된다면 그 육신은 다시 죽어야 할 것이다. 새로이 가지게 될 육신은, 마치 하나의 씨앗이 땅 속에서 완전히 죽어, 썩어져 없어지는 가운데 거기에서 그와 똑같은 요소를 지니고 있는 새로운 이삭이 생겨 나오듯이, 우리의 육신 안에도 나의 부활할 육신의 씨앗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썩어 없어지는데 그 안에 들어있던 어떤 생명체가 매개가 되어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만들어 낼 수 있는 이 힘은 씨앗 속에 들어 있는 어떠한 생명체이며 새로운 삶이다.
우리의 이 현실적인 육신은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육신을 배출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항상 같은 나인데 내가 볼 수 없는 어떠한 변화가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변할 수 있는 육신이다. 몸의 형체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그러나 항상 “나”라는 주체는 같다. 나는 항상 남아있고, 인간의 이 현실적인 육신은 썩어버리지만 죽은 다음에는 죽지도 않고 썩을 수도 없는 결정적 육신을 갖게 될 것이다.
이 결정적인 육신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게 될 것이다: 1. 다시는 썩지 않는, 변하지도 않는 그리고 고통도 없는 육신이며; 2. 공간적인 제한도 받지 않는 현재의 육체와는 다른 육신상태일 것이며; 3. 시간적인 제약도 받지 않는 육신일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친히 보여주신 것으로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육신의 현상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만이 우리에게 부활한 육신을 보여주셨으며, 그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이는, 일생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닮은 모든 이는 그리스도와 같이 빛나고,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영광된 육신을 지니게 될 것이다.
성서에도 육신의 부활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가르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죽은 이들이 모두 그의 음성을 듣고 무덤에서 나올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오면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고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단죄를 받게될 것이다”(마태 5,28-29).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필립 3,21).
그리하여 “죽음이 다시는 그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며”(로마 6,9-11 참조), 이제는“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묵시 21,3-4). 부활한 육신은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마태 13,43 참조). 그리스도인은 이제 죽음이 장차 올 육신의 부활로써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새 생명, 참 생명을 얻는 일련의 단계 중 마지막 단계임을 알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 죽음을 잘 맞이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교부들도 육신의 부활에 대하여 비슷하게 가르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성인들의 부활한 몸은 예수 그리스도의 찬란히 변모된 그분의 “모습”과 같을 것이다. 지상의 몸과 특성은 하늘 나라에 맞갖는 영적인 것으로 될 것이다. 그러기에 영혼은 “더욱 순수한 하늘 천상의 나라에 맞는 더 훌륭한 옷(육신)이 필요할 것이다”라고 오리게네스(+ 254)는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한 영혼이 하느님과 일치되어 그분과 하나의 영으로 될 때에 그 몸 자체도 그 본성이 그의 조건에 맞는 자격을 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한 영적인 것으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모든 육체에는 그 육신을 부활시킬 수 있는 씨앗이 있다고 하는 “씨앗의 근거”(λόγος σπερματικός)가 있다고 하였다.
오리게네스가 부활한 육신의 영적인 “형상”(모습)을 이야기하는데 반해 올림포의 메토디오(+ 311)는 “육체적인 형상”(forma corporea)을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는 믿지 않던 사도 토마에게 나타나 보여주셨던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 몸으로(요한 20,24-29 참조)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부활한 자들의 몸은 확실히 탁월한 몸이라고 결론짓는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이 죄를 범하기 전에 누렸던 고통도 없는 영광에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질적으로는 지상의 우리 몸과 같은 몸이라고 한다. 우리가 가졌던 육신으로 다시 부활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예로니모(+ 419)도 메토디오와 같은 견해이다. 예루살렘의 치릴로(+ 387)는 본래의 육신이 부활하지만 그 이전의 육신과 같지 않고 영적인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으로 육신의 부활을 이해하였다. 여기에 덧붙여 디디모(+ 398)는 천상적인 육신이라 하였다. 아우구스티노(+ 430)는 성도들의 부활한 몸은 모든 기관이 전체로 완전할 것이라고 하면서, 다만 미관상 보기 싫은 모습은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하였고, 어린아이들은 성인(成人)들의 성숙한 몸을 가질 것이라고 하였다. 즉 교부들은 부활한 육신이 영(靈)에 속해 있을 영적인 육체일 것이라고 한다.
/김웅태신부
[3]육신의 부활/김웅태신부
도 입육신의 부활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문으로 여러분이 이미 배우고 외우신 사도신경에도 나오고 있는 육신의 부활을 공부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믿든 안믿든 육신의 부활은 교회의 신앙에 속한 내용입니다. 교회는 초세기부터 육신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고백해 왔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세례를 받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육신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고백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육신의 부활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믿기 힘든 사실로만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수 있는가? 육신부활이란 인간의 잔해인 뼈와 근육 등이 역사의 종말에 가서 하느님으로부터 새로 활력을 받아 다시 살아나게 되고 무덤이 열리고 새로운 육신이 생겨나 이미 천국에 존재하고 있는 영혼에 첨부됨을 뜻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은 우리 현대인들에 있어 얼마나 유치한 이야기인가? 우리는 이미 우리의 지상 생애에서도, 몇 년 후에는 지금 우리가 지닌 육신의 단 하나의 원자도 우리 안에 그대로 남아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무덤 속에서 완전히 부패된 인간유골의 소생에 대한 확신이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이러한 의문들이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들은 우리가 육체의 부활이라고 할 때 그 '육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서에서 말하는 육체를 올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이런 식의 오해를 하는 것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희랍 철학식의 이원론적인 인간관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를 보면 그 당시에도 이러한 오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지니고 있는 의문들은 여러분만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당시에도 이런 의문은 있었으며 복음서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질문한 내용 중에도 바로 이점에 나오고 있습니다. 성서를 한 번 읽어 봅시다. (복음을 읽는다. 마르코 12,18 - 27) 여기서 예수님의 답변은 육신이 부활하고 나면 어떠할 것이라는 것보다 지금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답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도 한번 보도록 합시다 (성서를 읽는다. 고린 전 15,35 - 49). 바오로는 여기서 이 세상의 몸과 하느님의 새로운 천지 창조력에 의해서 부활한 몸과의 관계를 씨앗과 그 씨앗에서 성장한 식물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즉 이 세상의 생활은 말하자면 씨앗라는 것입니다. 그 씨앗이 없으면 식물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식물은 그 씨앗과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씨앗은 씨앗으로서 멈추지 않고 본래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새로운 모습으로 성장해 갑니다. 그와 같이 우리의 몸도 하느님의 창조의 역사에 의해서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변형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의 생활은 부활할 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생활에 의해서 쌓아올린 것은 하느님의 창조력에 의해서 변형되고, 고양되어 영원한 생명으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신의 부활이라고 바오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를 읽어 봄으로써 여러분은 이제 어느 정도 육신의 부활이 어떠한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아시게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아직 설명이 충분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육체'라는 말이 지니는 의미입니다. 사실 성서에서 나오는 부활에 대한 어리석은 질문들이 바로 이 육체라고 하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롯된 것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질문들이 '육체'라는 말을 좁은 의미에서 알아들은 것에서 비롯된 것처럼 우리들 역시 흔히 육체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를 우리의 정신, 영혼과는 따로 떨어진 것으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입니다. 이것은 그리스인들의 이원론적인 인간관, 즉 인간의 구성을 육체와 정신으로 나누어서 생각하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 개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렇게 문제가 되고 있는 육신의 부활에 대해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 먼저 '육체'라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그리스도교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여러가지 인간관을 살펴보면서 알아보기로 합시다.
1. 그리스인들의 인간관
그리스인들은 인간이 죽으면 육체는 가고 영혼만 남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영혼에 비해 육체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영혼은 기원으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영원불변한 신적인 것에 가까운 것으로 보았고, 따라서 죽음은 영혼이 이 육신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라고 희랍인들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플라톤은 '진실된 철인은 죽음에 앞서서 이미 육체에서 영혼을 해방시키는 자이다'라고 까지 말할 정도였습니다. 희랍철학의 이러한 이원론은 후세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육체적인 것을 넘어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참된 삶이라는 견해가 전통적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2. 히브리인들의 인간관 (성서적 인간관)그리스인들의 사고가 분석적이고 합리적임에 비해 히브리인들의 사고는 우리 동양인들의 사고 방식과 비슷하게 포괄적이고 직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인간을 보는데 있어서도 희랍인들과는 큰 차이를 보여줍니다. 히브리인들은 인간을 파악함에 있어서 희랍인들처럼 영혼과 육체를 따로 구분해서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들은 항상 전체로서 인간을 바라봅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靈과 肉의 합성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육체인 것입니다. 히브리적인 인간관(이것이 원 그리스도교적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다)에서는 인간을 가리켜 'nefesh'라고 합니다. 이것은 목구멍, 욕심, 입김 등의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글자 그대로 그 한 부분만을 의미하기보다 인간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 쓰입니다. 어떤 한 부분을 빌어 전체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방식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희랍인들은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함에 비해 히브리인들은 인간은 'nefesh'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영혼 쪽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포괄적인, 종합적인 개념인 것입니다. 우리 표현에서도 '목 메인다'. '숨 막힌다'할 때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의 용어로 어떤 영혼적인 상태까지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인들도 그러한 식의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ruah'라는 표현도 있는데 숨, 호흡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 말도 역시 인간의 전체적인 것을 가르키는 말로 알아야 합니다. 희랍식으로 영혼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를 의미하는 'basar'라는 말도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그 표현 방식은 항상 전체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셨음을 이야기할 때 성서는 말씀이 육(肉)이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점을 생각할 때 분명한 것은 육이 인간의 한 부분으로서의 신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성서에는 희랍적인 요소보다 구약성서의 히브리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구분한다든지 지성과 의지로 구별하는 등의 인간에 대한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이해는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인간 실존의 육체성을 강조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에 희랍적인 경향이 보이기는 하나 히브리적인 사상이 많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는 자주 靈과 肉을 대립시키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육체에 대해 평가절하시키는 면은 있지만 그렇다고 바오로가 희랍식의 철학적인 사고로 인간존재의 원리로서 영과 육을 대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의 연약함과 하느님의 강인함의 대립에 대한 표현인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인간 전체를 하나로 보며 결코 분리시킬 수 없는 육체성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고린 전 15,42). 인간의 정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감각을 통해야 합니다. 순수한 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3. 심리학적, 인간학적 연구에 의거한 인간관희랍인들의 인간 이해보다는 히브리인들의 인간 이해가 많은 면에서 더 타당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현대의 심리학적, 인간학적 연구가 이를 뒷바침하고 있습니다. 육체는 인간의 자아에 부가된 첨가물이 아닙니다. 인간의 주체성, 자아는 결코 신체와 대립된 것이 아닙니다. 신체가 어떤 상황에서 물리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의미에 대한 상황에 대한 주체성의 반응입니다. 물리적으로 바깥으로부터 아무런 자극이 없는데도 신체가 반응하는 경우 (호흡이 가빠짐. 얼굴이 빨개짐 등), 그것은 상황, 의미에 대한 주체성의 반응인 것입니다. 우리의 생은, 신체적 삶은 결코 대상화할 수 없는 나 자신인 것입니다. 영이 신체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성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삶으로서의 신체이지 물건으로서 거기에 있는 것으로서의 신체일 수 없습니다. 현기증을 보면 직접적인 물리적, 신체적 이유로 생기는 경우도 있으나 심인성에 의하여 생길 수도 있습니다. 얼굴이 빨개짐도 마찬가지입니다. 난로 옆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빨개지는 것은 외부의 물리적 영향 때문이지만 부끄러울 때 얼굴이 빨개지는 것은 우리의 내면적인 상태에 대한 육체적인 표현입니다. 미각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속상한 일이나 걱정스러운 일이 있을 때 평소에는 그렇게 맛이 있던 음식도 전혀 맛이 없게 느껴짐을 경험합니다. 이러한 예들은 몸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전체로 살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삶이 즉시 신체와 연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무용을 생각해 봅시다. 동물의 경우 운동은 생식에 필요한 것에 관해서만 움직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 무용과 같은 것은 전혀 생식과 관계 없는 운동입니다.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움직임이 아닙니다. 그것 자체가 목적인 것입니다. 희비애락을 신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신체가 삶과 직결되어 있음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예입니다.
결 론* 육신부활은 인간 삶의 전체적인 부활이제 우리는 '육체'라는 말을 단순히 좁은 의미에서의 육체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상의 삶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영위하는 삶, 그리고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친교, 그 모든 기쁨과 슬픔, 지금의 우리의 존재를 구속하고 있는 모든 것이 이 육체인 것입니다. '나'라는 인간은 육신으로만 이루어진 존재도 아니며 그렇다고 영혼으로만 이루어진 존재도 아닙니다. '나'는 영혼과 육신이 합체되어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영, 육이 함께 움직이고, 함께 희노애락을 겪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한 인격체에게서 영,육을 분리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란 영.육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도 영혼과 같이 생명에 관여함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부활 신앙에는 영혼만의 부활이 기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육신과 영혼이 하나로 합치된 새로운 모습의 삶을 의미합니다. 이제 육체의 부활이라는 말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못 생각했듯이 인간을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서의 신체, 썩어 없어질 유기물의 소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서 땅에 묻혀 있던 시체가 무덤을 열고 다시 살아나온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삶 전체가 부활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구원이 인간의 한 측면인 영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인간 전체의 문제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부활에 대한 교리는 인간이 누구인지 그리고 사람은 단순히 정신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全人間이, 즉 영혼에게서 활기를 받는 육체가 하느님이 맡기신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얼마만큼 중요한 일인가를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살도록 불린 것은 전인간이지 결코 육체와 분리된 영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전인간의 변형을 의미하는 육체의 부활은 그리스도 신자의 집단이 갖는 확실한 행복의 시작이며 또한 원천입니다.
종합 심화인간의 삶 속에서 의의와 완성 그리고 전체성을 지향하는 모든 것이 실제로 충만에 이르는 것이 바로 육체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이미 배웠듯이 당신의 아들을 부활시킴으로써 권능을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에 의해 비로소 증명됩니다. 그러면 이제 육신의 부활이 의미하는 바를 정리해 봅시다 : 1) 육신 부활이란 희랍철학에서처럼 인간이 자신의 불멸하는 영혼의 힘으로써 완성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그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행위를 통해서 충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2) 육신 부활이란 육신 없는 영혼이 하느님 안에서 최후의 고향을 찾기 위해 세상에서 이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출생하면서부터 세계와 사회 속에 편입되어 있으며 역사 속에서 자유롭게 삶을 영위하다가 마침내는 죽음에서 궁극적 존재가 되는 전인적인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현세에서 육체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이룩한 모든 것을 그의 죽음 속으로 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영원한 것으로 변형되는 것입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을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신의 부활이라는 교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전인적인 것이며, 그것은 또한 지금의 우리의 삶이 곧 부활의 준비가 된다는 뜻에서 모든 각개인이 처한 현실, 역사적 상황 안에서 각자의 소명을 충실히 수행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육신 부활의 교리를 대하고 그것에 희망을 품을 때 지금 현실의 삶을 보다 더 충실히 사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 교회의 가르침□ 인간의 구성 □육체와 영혼으로 단일체를 이루고 있는 인간은 그 육체적 성격으로도 이미 물질세계의 요소들을 한 몸에 집약하고 있으므로 물질세계는 인간을 통해서 그 정점(頂點)에 도달하고 인간을 통해서 그 자유로운 찬미를 창조주께 읊어드리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그 육체적 생명을 천시해서는 안될 뿐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 창조된 그 육체가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이므로 좋고 영예로운 것으로 알아야 하겠다. 그러나 죄로 상처 받은 인간은 육체의 반항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은 육체로도 하느님을 찬미하고 육체가 마음의 악한 경향을 따르는 일이 없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물질 이상의 존재임을 증명하는 동시에 자신은 자연의 한 조각이거나 인간사회의 한 무명요소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도 속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 내적 품위로써 일체의 물질세계를 초월(超越)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마음속으로 돌아갈 때 이 깊이에 도달하는 것이고 거기에 인간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이 기다리고 계시며 하느님이 보시는 그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 짓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 앞에서 영적(靈的) 불멸(不滅)의 혼(魂)을 긍정하게 될 때 인간은 단지 물리적 내지 사회적 조건의 소산인 덧없는 환각에 속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깊은 진리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사목헌장」, 14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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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상 태(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소장·신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1) 그리스도인들은 초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육신 부활’에 대한 고백으로 ‘사도신경’을 끝낸다. 최근에 일부 저작물들이 육신 부활에 관해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과 구별되는 듯한 견해를 개진하고 있다고 알려지면서 신자들 사이에 약간의 논쟁이 빚어지고 있다.2) 교회의 핵심 신앙을 둘러싸고 일고 있는 혼란이 진정되기를 바라는 취지에서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의 의미를 교의신학적으로 간략히 밝히고자 한다.3) 먼저 ‘육신 부활’의 기초이자 근거가 되는 예수 부활의 의미를 서술하고, 논란되고 있는 견해와 주장을 고려하면서 육신 부활에 관한 신경의 의미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육신 부활’의 기초로서의 ‘예수 부활’ 그리스도인들은 ‘육신 부활’ 고백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인간 모두 하느님의 구원 은총에 힘입어 전인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아울러 세계 전체도 완성에 이르리라고 희망한다. ‘육신 부활’의 의미는 그리스도 신앙의 기초이자 근거인 ‘예수 부활’의 실상을 통하여 올바로 드러날 수 있다.4)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 신앙이 한결같이 고수해 온 핵심 진리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단정할 수 있는 역사 내 사실(史實)이라고 교회가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분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십자가 죽음과는 달리 역사 내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삶으로부터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영원의 차원으로 초극한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서 어디에도 예수님 부활의 경위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사실 부활 사건 자체를 눈으로 목격한 증인은 아무도 없었고 어느 복음사가도 그것을 묘사하지 않았다. 누구도 부활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말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다른 생명으로 넘어간다고 하는 부활 사건의 핵심은 감각기관으로 지각할 수 없는 것이다.”5) 여기서는 다만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증인들의 놀라움이 강조되고 그분과의 반가운 해후가 묘사될 뿐이다(1고린 15,3-8; 마르 16,1-10; 마태 28,1-10; 루가 24,1-35; 요한 20,1-10 참조). 예수님의 부활 사화에는 죽었던 라자로나 회당장 야이로의 딸, 또는 어느 과부의 외아들의 소생 장면과는 달리 부활 경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요한 11,1-44; 마르 5,35-43; 루가 7,11-17 참조).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통하여 제자들이 체험한 바는 이전에 전혀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체험이면서 그들의 삶을 현실적으로 변화시킨 체험이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현세의 인간 조건을 벗어나 필설로는 결코 정확히 기술할 수 없는 새로운 생명의 형태로 일어난 일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죽기 전의 상태로 소생하셨다가 시간이 경과하고 나서 다시 죽어야 하는 유한한 삶으로 되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현세의 인간 조건을 벗어나 인간의 언어를 가지고 적절히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생명’의 형태로 살아나신 분으로 증언되고 있다. 바오로 사도의 진술은 이 실상을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1고린 15,42-43). 예수님의 생존 당시 유다 사회에는, 세상 종말에 죽은 사람들이 부활하리라는 묵시문학적 부활 신앙이 유포되어 있었다.6) 제자들이 스승의 부활을 묵시문학적 사자(死者) 부활 신앙의 지평 안에서 이해하였음을 바오로 사도의 진술이 확인해 준다.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1고린 15,16). 그들은 스승의 부활을 세상 종말에 발생하리라고 기대했던 사자 부활의 시작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1고린 15,20). 제자들은 십자가 위에서 처형된 스승을 자신들의 서술 능력을 초월하는 새로운 양식으로 만나 충격에 사로잡히고 그 체험을 익히 알고 있던 ‘사자 부활’이라는 묵시문학의 통찰로 이해한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면서 제자들은 급변하였고, 그리스도 교회가 인류 역사 안에 출현하게 되었다. 제자들이 스승이신 예수님의 발현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예수님을 주 하느님으로 선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1고린 15,14). 예수님의 부활이 그리스도 신앙을 현실적으로 생겨나게 한 역사적 사건으로 작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육신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처럼 하느님께서 인간의 인격적 정체성을 보존시키면서도 형언할 수 없이 새로운 존재양식 안으로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는 사건으로 이해될 것이다. ‘육신 부활’ 신앙은 인간 존재의 구성 요소인 육신을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무의미한 부분으로 배제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육신의 궁극적 존재 양식을 명시적으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교회는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1224-1274년) 이래 통합적 인간관을 교리 안으로 수용하여 비엔나 공의회(Concilium Viennense, 1311-1312년)를 통하여 인간을 물질적 육신과 정신적 영혼으로 구성된 합일체로 파악하고 있다.7) 이처럼 육신과 영혼이 인간 안에서 분리된 두 개의 존재자가 아니고 하나의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구별되는 두 개의 존재 원리이기 때문에 죽음은 육신만이 아니라 영혼마저 관통한다.8)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에서 드러내 보이셨듯이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결코 파멸시키지 않으신다는 신앙의 진술을 고수할 때, 죽음 속에서 육신이 전적으로 소멸되어 무화(無化)된다는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다. 영혼이 죽음을 함께 겪는다는 말 역시 영혼이 무(無)로 소멸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지만 ‘육신 부활’이 땅에 묻혀 부패하여 소멸된 신체의 분자들로서 다시 재구성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가 현세적 인간과 부활한 인간의 동일성이나 지속성을 보존하려는 취지에서, 현세적 육신 안에서의 부활을 가르친 것은 사실이다. 제11차 톨레도 공의회(Concilium Toletanum, 675년)는 죽은 이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부활할 것이나, 다른 육신으로서가 아니고 현세적 육신을 입고 부활하리라고 가르치고 있다.9)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Concilium Lateranense IV, 1251년) 역시 모든 인간이 현세에서의 육신을 지니고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 바 있다.10) 그러나 오늘날 육신 부활을 인간의 잔해인 유골이 세상 종말에 하느님에게서 새롭게 활력을 받아 다시 소생하여 천국 또는 지옥에서 존재하는 영혼과 재결합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11) 현대인들은 자신의 지상 생애 중에 이미 몇 년 뒤에는 현재 자신이 지닌 육신의 단 하나의 원자도 그대로 남지 않고 다른 원자로 대치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죽은 이들의 육신 부활은 물질적 요소들로 구성된 시체가 무덤에서 되살아난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영혼-육신의 합일체인 인간이 죽음 속에서 하느님께 구원되어 전인으로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될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게 될 새로운 육신과 현세적 육신이 동일성과 함께 비동일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음에 유의할 것이다. 제자들이 처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나중에야 스승이심을 알게 되었던 데에서 드러나듯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실 적의 그분과 같은 분이면서도 아주 다른 차원의 존재로 체험되었던 것이다. 죽음과 부활은 시간적 선후가 아닌 상이한 본질의 차원 안에서 이해될 것이다. 생물학적 종말로서의 죽음은 유한한 인간에게 불가피하게 닥치는 자연적 사건이고, 새로운 생명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베풀어지는 초자연적 은총의 선물이다.12) 육신 부활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을 통하여 달성할 수 있는 실적의 결과가 결코 아니고 오로지 하느님께서 거저 베푸시는 구원의 선물이다. 인간이 유한한 피조물로서 겪어야 하는 생물학적 죽음 안에서 하느님의 영에 의해 결정적으로 거두어지면서 현세의 삶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 육신 부활인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십자가 위에서 인간적 무력과 하느님께 버림받은 상태에서 처형당한 예수님을 체험했던 사람들에게서 생겨났다.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으며 우리는 다 그 증인들입니다”(사도 2,32).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불의를 이기시는 하느님의 개선을 보여준다.13)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과 피조물 세계의 변화와 관련된 구원사건으로 이해되었다. 그분의 부활은 모든 인간의 부활의 근원이자 원천의 성격을 지닌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 …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모두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1고린 15,20-22). 육신 부활은 교회 안에서 예수님과 그의 형제자매들인 모든 인간과 피조물에게도 실현가능한 구원사건의 성격을 지닌다고 이해되었다. 육신 부활은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 인간의 육신적 삶과 현실세계의 구원과 상관한다.
인간 존재의 총체적 변형으로서의 이상향이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이 세상 안에서 실현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현세적 세계가 총체적으로 변형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인간의 영원한 생명에로의 변형 가능성을 보게 된다(필립 3,21 참조). 그리고 이렇게 실현되는 인간과 세계의 변형은 죽음 속에서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구원 은총의 선물로서만 가능한 것이다. 현실적인 소외 상황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인간 존재의 부활에 대한 희망이다. 이 부활은 인간들이 십자가의 죽음에 참여하는 정도로 부활 희망의 보편적 상징으로 변화될 수 있다. 인간의 죽음은 다소간에 십자가 죽음의 성격을 지니고 있고,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도 인간들은 구원과 완성이 실현된 미래의 이상향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 역사적 현실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씨앗이 그리스도를 뒤따름으로써 시작된다는 것을 믿는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이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2고린 5,17; 갈라 3,27 참조).
육신 부활은 현세 안에서 지금 행해지는 남을 위한 사랑의 삶을 통해 실현되기 시작하면서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을 지니고 성장하는 미래적 실재로 이해될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개인적으로 실현된 바 있는 종말론적 실존이 아가페 사랑의 삶 안에서 재현되는 가운데 세상의 변형이 진행되면서 마침내 더 이상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실현되리라는 희망이 가능하게 된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1-4).15) 육신 부활은 태초의 창조에서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에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 위업으로 생각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과 세계의 창조자이시면서 또한 완성자이시기도 하다는 것을 참으로 믿고 바랄 수 있다. 육신의 부활 신앙은 이처럼 만인과 온 세계의 구원을 희망하는 연대적 신앙의 성격을 지닌다. 한 인간이 죽고 난 뒤, 하느님에 의하여 부활하게 되는 것은 그가 현세에서 맺은 모든 관계이다. 부활을 통해서 그가 세계 안에서 맺었던 모든 관계가 소멸되지 않고 궁극적이 된다. 육신 부활을 통해서 죽음 속에서의 인격체와 그와 관계를 맺었던 세계 자체가 부분적으로 완성상태에 도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육신 부활은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세계가 상호 일치의 유대를 맺는 가운데 완성에 이르는 과정으로 이해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육신 부활을 통한 인류와 세상의 완성이란 ‘차안세계로부터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피안세계에로의 귀환’이 아니라 ‘인류와 세계가 질적으로 새로운 충만함에로 이르게 됨’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종말에 “모든 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육신과 똑같은 육신을 가지고 부활할 것”(제4차 라테란 공의회)이라는 믿음. 그리스도 교인은 사도신경에서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라고 고백한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한다. “하느님은 죽음을 창조하지 않았으나”(지혜 1:13) 인간이 범죄하여 하느님을 저버리게 되자 인간은 “먼지이므로 먼지로 돌아가게”(창세 3:19) 되었다. 죽음의 원인인 죄에서 인간을 구원하고자 그리스도는 죄없는 분이면서도 우리 죄를 대신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정죄받고(2고린 5:21) 죄의 벌인 죽음을 당하셨다. 그러나 부활함으로 죽음을 극복하였다(로마 6:9-). “죽음아, 네 가시가 어디 있느냐?”(1고린 15:55). 우리가 죽음의 가시를 없이 할 수 있다면 죽음은 명목에 불과하다. 그리스도는 죄많고 죽어야 할 인간을 당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으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가장 진지하고 의미있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2고린 5:14). 우리는 성세를 받을 때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 자신의 죽음으로 하였다.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가 그의 죽음과 연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로마 6:3). 그래서 우리가 살아 있을지라도 죽은 자로 헤아려지고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골로 3:3). 이는 신비로운 죽음 즉 죄와 육신과 세상에 대한 죽음을 의미한다. 세상과 육신은 악마의 권세에 이용되는 도구이다. 세상의 군주인 악마는 이미 심판을 받았으나 세상과 육신은 그리스도 안에 부활할 희망이 있다. 이들은 하느님의 창조하신 것이요 선한 것이다. 육신과 결합하여 세상에 태어난 영혼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함으로써 육신과 세상을 구원하여 본래의 선을 회복하게 할 수 있다. 이처럼 영혼을 살리는 신비로운 죽음을 체험한 그리스도교인도 다른 사람들처럼 죽음을 겪어야 한다. “우리는 육으로는 죽음에 내어준 바 되었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다”(1베드 3:18). 그러나 구원은 전인적(全人的) 구원 즉 영혼과 육신이 함께 구원되어 부활함을 의미한다. 인간은 육화된 영이요, 영성화된 육이다. 영육의 합일체이다. 육신부활을 성서는 명시하고 있다. “망자들은 살아 나리라”(이사 26:19). “땅의 먼지 속에 있는 많은 자들이 깨어나리니…”(다니 12:2). 마케베오 시대에는 육신부활에 대한 믿음이 더욱 명확해졌다(2마카 3:9). 그리스도 시대에는 육신부활을 믿지 않던 사두가이들이 이단자로 간주되었다(마태 22:29-32). “때가 올 터인데 그 때에는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다 그의 소리를 듣고 나올 것이며, 선한 일을 행한 사람들은 생명의 부활에 이르고 약한 일을 행한 사람은 심판의 부활에 이를 것이다”(요한 5:28). 부활한 육신은 영혼과 육신의 합일체가 되어 다시는 분리되지 않으며, 본래 세상에 태어났던 바로 그 육신이다. 그러면서도 부활한 육신은 고통, 질병, 죽음 등이 없고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켜 그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양이 되게 하실 것”이며(필립 3:20-21), “죽음이 결코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로마 6:9-11). “그래서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묵시 21:3-4). 부활한 육신의 또 다른 특성은 부활한 그리스도처럼 영적인 육신으로서 시간과 공간의 계약을 벗어나게 된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 때처럼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마태 13:43). 그리스도 교인은 이미 이루어진 영적인 죽음이 장차 올 육신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새생명을 얻는 일련의 단계 중 마지막 단계임을 알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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