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몸'의 기호학적 고찰

나뭇잎숨결 2020. 3. 25. 11:09

'몸'의 기호학적 고찰  


유가 전통에서 덕의 감상적 표현에 관하여
 
- 이승환(고려대)
 

 

 


 
 

1. 동양의 ‘언어 최소주의’ 전통과 ‘몸의 언어’

 

동양의 언어 전통이 지닌 한가지 주요한 특징은 ‘최소주의(minimalism)’에 있다. 모든 기호체계가 그렇듯이, 언어는 진실을 전달하기 위하여 사용되기도 하지만 거짓말을 위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언어는 축복이자 동시에 저주이다. 유.불.도로 대표되는 동양의 지적 전통에서 ‘최소한의 언어’를 사용해서 ‘최대한의 진실’을 전달하려는 ‘언어 최소주의’를 선호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공자는 ‘교묘한 말은 덕을 어지럽힌다’고 보고, ‘말은 뜻이 전달되면 그만이다’고 말한다. 즉, 공자는 ‘말의 정교함(辭巧)’보다는 ‘의미의 전달(辭達)’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가능한 한 최소한의 언어를 사용하여 의미를 진실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언어 최소주의’의 입장은 맹자에게서도 발견된다. 맹자는 ‘시(詩)를 읽을 때, 하나 하나의 글자로써 말을 그르쳐서는 안 되며, 한 구 한 구의 말로써 뜻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즉, 언어의 표피에 떠도는 자구(字句)에 집착하지 말고 발화자(작자)의 원래 의도를 파악해 내는 일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주역』에서는 공자의 말에 가탁하여, ‘글은 말을 다 표현해 주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 표현해 주지 못한다’고 적고 있다. 유가적 관점에서 볼 때, 문어(written language), 구어(verbal language), 그리고 의미(meaning)의 가치 서열은 뜻(意)> 말(言)> 글(書)의 순으로 정리될 수 있다.

 

조채(藻彩)한 수식(修飾)을 싫어하는 ‘언어 최소주의’적 입장은 도가(道家)에서도 발견된다. 노자(老子)는 ‘진정으로 위대한 웅변은 마치 더듬거리는 것과 같다(大辯若訥)’고 하여, ‘말을 통하지 않는 가르침(不言之敎)’을 숭상한다. 노자는 또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知者不言,言者不知)’, ‘믿을 만한 말은 아름답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말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信言不美,美言不信)’, ‘선한 자는 변론하지 아니하고, 변론하는 자는 선하지 못하다(善者不辯,辯者不善)’고 하여 언어에 대한 강렬한 불신감을 토로한다. 장자(莊子) 역시, ‘언어의 궁극 목적은 의미의 전달에 있다. 의미를 얻고 나면 언어를 버려야 한다’(1)고 말한다. 즉, 언어는 어디까지나 의미 전달에 필요한 ‘최소한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언어 최소주의’의 입장은 불교에서도 발견된다. 천태(天台).화엄(華嚴)과 더불어 동양 불교의 삼족(三足)을 이루는 선종(禪宗)에서는 언어나 문자를 통하지 않고 즉각적인 깨달음을 얻는 ‘불립문자(不立文字)’를 견성(見性)에 이르는 최선의 방법으로 채택한다.

 

언어에 대한 불신은 상대적으로 눈빛.낯빛.몸짓과 같은 ‘비언어적 기호체계’를 의사소통의 대안적 기제로 채택하게 만든다. ‘몸’은 ‘말’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실하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유가 전통에서 ‘몸’이 지니는 기호학적 의미를 고찰해 보려고 한다. ‘언어 최소주의’를 선호해 온 전통 동양의 기호체계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역』의 괘(卦)나 종교적 부적(符籍)과 같은 ‘문화적 상징’뿐 아니라, 눈빛.낯빛.몸짓과 같은 ‘동작 기호’에 관한 이해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특히 ‘몸’은 권력이 행사되는 현실적인 ‘작용점’이 된다는 점에서, ‘몸의 기호’에 관한 연구는 전통 동양사회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한결 풍부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2. 정신/육체의 통일로서의 ‘몸’

 

유가 전통에서는 ‘수신(修身)’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수신’은 ‘몸(身)’을 ‘닦는다(修)’는 뜻이다. 왜 유가에서는 수양을 말하면서 ‘마음’ 대신 ‘몸’의 수양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유가 전통에서 ‘몸’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몸’의 동양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동양 바깥의 지적 전통에서의 정신과 육체의 문제로부터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왜냐하면 나는 거울을 통해서만 나의 얼굴을 볼 수 있듯이, 동양적인 것은 동양적이 아닌 것에 비추어 볼 때 그 특징이 한층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근대 서양의 이원론적 전통에서는 ‘나(self)’를 정신과 육체로 나누어서 고찰한다. ‘나’를 정신과 육체로 나누어서 고찰하려는 태도는 존재의 세계를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범주 짓는 형이상학적 이분법과 뿌리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존재의 세계를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나누려는 형이상학적 이원론은 여기에 대응하는 인간의 지적 능력도 각기 이성과 감성으로 구분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 인간 자신까지도 ‘생각하는 것’으로서의 나와 ‘물질적인 것’으로서의 나로 구분한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 아래서 몸은 자연과학적 실험과 관찰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마음은 심리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고착되게 된다.

 

이원론적 전통에서 ‘몸’은 생겼다 없어지는 것, 우연적인 것, 저급한 것으로 여겨지고, 오직 ‘마음’ 혹은 ‘이성.영혼.정신’만이 영원한 것, 필연적인 것,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이러한 지적 전통에 따르면, 참다운 인식을 보장해 주는 것은 육체에서 독립한 순수 이성 뿐이고, 이성이 제거된 육체는 불확실하고 일시적이며 상대적인 감각자료를 수용하는 기관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원론적 전통에서의 육체는 아예 철학적 관심에서 제외되거나 무시되어 버리고, 아니면 암묵적으로 방치되고 만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으로서의 나와 ‘물질적인 것’으로서의 나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한 ‘나 = 생각하는 주체 = 이성’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나’와 ‘몸’ 사이에는 이어질 수 없는 정신분열증적 단절이 생기게 된다.

 

과연 몸과 마음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과연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마음만이 참된 나의 모습이며, 몸은 ‘기수를 태우고 다니는 말’이나 ‘선장을 태우고 다니는 배’ 혹은 ‘영혼이 갇혀있는 감옥’에 불과한 것일까? 과연 나의 몸은 다만 물리화학적 실험의 대상이 되는 ‘살덩어리(k rpe)’에 불과한 것일까? 동양의 지적 전통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아무런 답변도 해줄 수가 없다. 만약 동양철학에게서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한 대답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애당초 잘못 던져진 물음일 것이다.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신봉하지 않는 사람에게 ‘정신/물질’ 혹은 ‘마음/몸’ 사이의 관계를 묻는 일은, 마치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에게 영혼의 무게가 몇 그램이냐고 묻는 것과 같은 범주착오일 것이다.

 

맹자에게 있어서 마음(心)의 본질은 기(氣)이고, 장자에게도 정신(神)이란 정신적 속성을 띠는 ‘신기(神氣)’에서 드러난 '현상'이며, 범진(范縝)에 있어서도 정신(神)은 결코 육체(形)와 분리될 수 없는 한가지 것으로, 촛농이 다하면 불꽃도 사라지듯 육체(形)가 시들면 정신(神)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성리학자들에게 있어서도 마음(心)은 기(氣)의 작용에 수반된 현상이며, 귀(鬼)/신(神) 역시 혼(魂)/백(魄)과 마찬가지로 기의 작용에 수반된 ‘현상’에 불과하다. 동양의 지적 전통에 정신(神)/육체(形)의 현상론적 ‘속성 이원론’은 있을지언정 양자를 두 개의 실체로 간주하려는 ‘실체 이원론’은 찾아볼 수 없다.

 

동양적 사유는 일상적인 삶의 세계 혹은 직접적 체험의 세계를 대상으로 한다. 동양적 사유는 우리를 생활세계에서 이간시키려는 지나치게 추상적인 ‘선험적 사변’에 의한 ‘이념화’를 경계한다. 우리가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생활세계 안에서는 몸과 마음의 이분법,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동양적 관점에서 본다면 ‘신체 없는 의식’, ‘감성과 격절된 이성’, ‘신체로부터 유리된 자아’란 광기어린 이성주의자의 독백에 불과하다.

 

동양적 전통에서 볼 때 ‘나’란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지 않은 ‘몸(身)’ 그 자체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전인 『이아爾雅』 「석고釋 」에서는 ‘몸(身)’은 곧 ‘나(我)’라고 풀이하고 있으며, 『대학』에서는 도덕적 수양을 말하면서 ‘마음 수양(修心)’ 대신 ‘몸 수양(修身)’을 이야기한다. 『삼국지』에서 장비는 눈을 부릅뜨고 “이 ‘몸(身)’은 장익덕이다! 이리 나와서 생사를 결판내자!”하고 외친다. 또 공자는 “진실로 제 ‘몸(身)’을 바르게 하면 정치를 행함에 어려울 것이 무엇이며, 제 ‘몸(身)’을 바르게 하지 못하면 백성을 어떻게 바르게 하리요?”라고 반문한다. 맹자도, “한 아름이나 되는 오동나무도 사람이 기르려고만 하면 기르는 방법을 알게 되는데, 자기 ‘몸(身)’에 이르러서는 그 기르는 방법을 알지 못하니 어찌 몸사랑(愛身)이 나무사랑보다 못하단 말인가!”하고 한탄한다. 순자도 “예는 ‘몸(身)’을 바르게 하는 소이이며 …… 스승은 ‘몸(身)’으로 의표를 삼는다”고 말한다. 동양의 전통에서 볼 때 ‘나’는 곧 ‘몸’이다.

 

3. 기호로서의 ‘몸’

 

‘나’는 존재하는가?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확인될 수 있는 것인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지만, 유학자들은 아마도 ‘나는 드러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을 것이다. 유가 전통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것은 몸과 유리된 순수 의식이 아니라, 나의 ‘몸’을 바라보는 공동체 안의 상호주관적 시선이다. 『대학大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인이 혼자 있을 때에 불선한 짓을 하되 이르지 못할 곳이 없이하다가, 군자를 보고나선 슬쩍 시침을 떼고, 그 불선을 가리고 선을 드러내 보이려고 하지만, 남이 자기를 알아봄이 마치 그 폐와 간을 뚫어 보듯 한 데서야 그 무슨 소용이랴? 이런 것을 일러 '성실하면 밖으로 나타난다'고 하나니, 이러한 때문에 군자는 반드시 그 안으로 깊숙한 곳을 조심한다. 증자가 말했으니, "열 눈이 보는 바이오, 열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 그 삼엄(森嚴)함이여!"

 

유가 전통에서 ‘나’의 존재는 나의 순수 의식에 의하여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나’를 주시하는 타인의 시선, 즉 ‘나’를 향한 타인의 관심에 의해 확인된다. 즉, ‘나는 생각한다’가 아니라 ‘나는 드러난다’이다.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군자가 본성으로 지니는 인 의 예 지는 마음에 뿌리박고 있어서, 그것이 빛으로 발하면 얼굴에 윤택하게 나타나고, 등에 넘쳐흐르고 사체에 뻗어나니, 사체는 말하지 않아도 그것을 알게 해준다.

 

유가 전통에서는 나 혼자만의 순수 의식이 진리를 담보해 주지 않는다. 행위나 표현을 통해 드러나지 않고 영혼 속에 깊이 감추어 둘 수 있는 순수한 ‘내면적 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덕, 나의 감정, 나의 의지는 반드시 행위와 몸짓을 통하여 공동체의 상호주관적 시선에 드러날 때 그 존재가 확인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나의 ‘몸’ 뿐 아니라 나의 ‘마음’ 역시 공동체의 상호주관적 시선에 공개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나의 ‘몸’은 공동체 구성원의 ‘독해(decoding)’를 기다리는 ‘기표’가 되며, 내면의 덕과 감정은 이에 상응하는 ‘기의’가 된다. 유가 전통에 의하면, 공동체의 문법에서 벗어난 혼자만의 사적 언어는 애당초 불가능할 뿐 아니라,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개인이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가 공동체의 문법에 의해 규정되듯이, 개인이 드러내는 몸짓의 의미 역시 공동체의 ‘약호 체계(code system)'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다시 말해서 나의 ‘마음’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정신과 육체를 따로 떼어서 생각하는 이원론적 전통에서 ‘나’는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나의 ‘살덩어리(k rpe)’ 만이 드러날 따름이다. 심리철학자들이 주제로 삼고 있는 “다른 사람의 마음은 존재하는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들은 물음의 밑바닥에 몸/마음의 이원론을 전제로 깔고 있다. 이러한 질문들은 “한 마음이 다른 마음을 알 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환원되어야 더욱 정확할 것이며, 이러한 질문은 유학자들에게 마치 괴기소설에 나오는 유령들의 대화처럼 기이하게 들릴 것이다.

 

정신과 육체의 통일체로서의 ‘몸’을 생각하는 유가 전통에서는, 몸은 의식의 드러남이다. 의식은 몸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증자가 말한 것처럼 “열 눈이 바라보고 열 손가락이 가리킬 때 소인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그의 ‘몸’이, 나아가서는 그 ‘자신’이 ‘기호화’ 되어 밖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육체와 분리될 수 있는 데카르트의 ‘나’는 투명인간으로 화하여 남의 시선에서 숨을 수도 있겠지만, 몸과 마음을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는 유가전통의 ‘나’는 남의 시선으로부터 숨을 수가 없다. 맹자는 말한다.

 

사람을 살피는 데는 눈동자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눈동자는 자기의 악을 엄폐하지 못한다. 마음속이 올바르면 눈동자가 맑고, 마음속이 올바르지 않으면 눈동자가 흐리다. 그가 하는 말을 듣고 그의 눈동자를 보면, 사람이 어찌 자기 마음속을 감출 수 있겠는가?

과연 『맹자』의 이 구절은 옛날 노인네의 통속심리학적 훈계에 불과한 것일까? 맹자의 마음/눈동자의 관계에 관한 진술은 이원론적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심각한 의문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과연 ‘마음의 올바름/올바르지 않음’이라는 심리적 사건(mental event)은 ‘눈동자의 맑음/흐림’이라는 물리적 사건(physical event)과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는가? 이원론자들은 결국 ‘정신’이라는 화폐와 ‘물질’이라는 화폐를 상호 교환해 주는 ‘송과선’이라는 화폐 교환소에서 그 해답을 구하던가, 아니면 하느님이라는 시계 수리공이 맞추어 놓은 ‘몸이라는 시계’와 ‘마음이라는 시계’의 예정된 조화에서 수수께끼의 답을 찾으려 할 것이다. 아니면 일원론자로 개종하여, 심리적 사건을 물리적 사건으로 환원시켜 설명하는 유물론에 귀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해결책은 우리의 생활세계적 체험에 비추어 볼 때 과연 얼마만큼의 현실 적합성을 지니고 있는가? 정말 나는 일초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째깍거리는 두 개의 시계인가? 아니면 그저 전기화학적 펄스를 통해 인풋과 아웃풋을 반복하는 살덩어리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가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생활세계로 돌아오면 이러한 난해한 의문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이 서로 다른 실체라고 이야기하는 데카르트마저도, 몸에 상처가 나면 고통을 느끼고 고통을 생각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몸과 마음의 상호 침투성을 고백한다. 또 뇌→ 중추신경 → 동공의 확대라는 생리적 사건으로 ‘눈빛’을 설명해 내려는 일원론자들도 사랑하는 연인의 애잔한 눈빛을 보고 자기를 향한 그녀의 뜨거운 감정을 감지해 낸다.

 

일원론자이거나 이원론자이건, ‘마음’을 탐구하는 근대 서양철학자들은 연구실 안에서의 ‘이성적 사고’와 연구실 밖에서의 ‘감성적 체험’을 철저하게 분리한다. 그리고 연구실 안에서의 이성적인 사고만이 진리이며, 일상생활에서의 감성적 체험은 속견이라고 단정짓는다. 근대 서양 철학자들에게는 기이하리만큼 이상한 편견이 있다. 그들은 생활세계 안에서의 일상적 체험에 대해서는 그것이 언제나 진실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도 항상 속견(doxa)으로 단정하고, 과학적 지식(인과적 설명)에 대해서는 그것이 다른 설명 모델에 의해 내일 당장 뒤바뀐다 할지라도 항상 진리(episteme)로 여기려는 습성이 있다.

 

맹자의 눈동자/마음에 관한 진술은 물론 심리철학 식의 인과적 설명에 의해서 증명도 반박도 될 수 없다. 여기서 맹자는 증명도 반박도 될 수 없는 눈동자/마음의 관계를 인과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상대방의 ‘몸’ - 그것이 눈빛이건 낯빛이건 아니면 몸짓이건 - 을 통해서만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이해’란 유비추리(analogical inference)와 같은 매개적이고 인과적인 사유 이전의 직접적이고 감성적인 체험을 가리킨다. 비록 존재론적으로는 한 사람의 내면성(감정과 의지)이 외면성(눈빛과 낯빛)에 우선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내면성에 대한 이해는 전적으로 밖으로 정시된 사상(事象), 즉 눈빛과 낯빛이라는 ‘원본적 소여’에서 출발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맹자는 ‘몸’을 통하지 않고서는 ‘나’를 드러낼 수 없으며, ‘몸’을 통하지 않고서는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마치 ‘기표’없는 ‘기의’를 생각할 수 없듯이, ‘몸’을 경유하지 않는 ‘마음’은 영원히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맹자에게서 볼 수 있듯이 유가전통에서의 ‘몸’은 자아와 세계와의 ‘교통방식(kommunikationsweise)’이다.(2)

 

4. ‘표현’으로서의 낯빛과 ‘행위’로서의 낯빛

 

우리의 감정과 의지가 ‘몸’을 통하여 밖으로 드러난다고 하면, 과연 이렇게 ‘드러난 것’은 생리적 증상이 신체를 통하여 드러난 것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으며, 또 속마음을 꾸며 가식적으로 드러낸 것과는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가? 즉, 맹자가 말하는 마음이 올바른 사람의 맑은 눈빛은 올바름/그름의 구분조차 없는 어린 아이의 맑은 눈빛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으며, 또 사악한 마녀가 꾸며낸 선한 눈빛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 것일까?

 

플레쓰너(Helmuth Plessner)는 낯빛이나 몸짓과 같은 몸적 표현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구분한다. 1)홍조와 창백함 기침과 재채기 땀과 구역질 등과 같이 의식이 개입되지 않은 생리적 혹은 심신병리적(psychosomatic) 반응들. 2)말과 행위처럼 의식이 개입되어 있고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낯빛과 몸짓. 플레쓰너는 이러한 낯빛과 몸짓을 ‘행위(handlung)’라고 부른다. 3)웃음과 울음처럼 의식이 개입되어 있으면서도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낯빛과 몸짓. 플레쓰너는 이러한 종류의 낯빛과 몸짓을 ‘표현(ausdruck)’이라고 부른다.(3)

 

이러한 분류에 따른다면, 비만증으로 인한 동탁의 번지레한 낯빛, 악화된 금창(金瘡) 때문에 나타난 주유의 파리한 낯빛, 노년에 악화된 뇌병으로 시달리는 조조의 초췌한 낯빛은 모두 의식이 개입되지 않은 생리적 혹은 심신병리적 ‘증상’들이다. 이와 달리, 미인계로 여포를 유인하려는 초선의 수심에 찬 낯빛, 독이 스민 뼈를 긁어내도록 화타에게 팔을 맡긴 채 바둑에 몰두하는 관우의 태연한 낯빛, 장판교에서 단창필마로 조조의 십만대군과 대적하는 장비의 기세등등한 낯빛은 모두 의식이 개입된 자발적 ‘행위’들이다. 그러나, 삼고초려 끝에 공명을 얻은 유비의 환한 낯빛, 관우의 참수 소식을 전해들은 유비의 참담한 낯빛, 차 한잔이 식기도 전에 적장의 목을 베고 돌아오는 관우의 의기양양한 낯빛 등은 모두 의식이 개입되어 있으나 비자발적(involuntary)인 ‘표현’들이다.

 

맹자가 말하는 올바른 사람의 맑은 눈빛은 플레쓰너가 말하는 ‘표현(ausdruck)’처럼 내면의 감정과 의지가 자연스럽게 밖으로 표출된 것을 말한다. 이러한 눈빛은 지향성이 결여된 생리적 ‘증상’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의도적이고 자발적인 ‘행위’도 아니다. 이러한 눈빛은, 한 사람의 선을 향한 감정과 의지가 내부에서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을 때 내면세계를 감싸는 껍질을 뚫고 외부세계로 돌출하여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렇게, 단순히 지향적 의식작용으로만 머물러 있던 감정과 의지는 낯빛과 몸짓을 통하여 ‘외화(外化)’ 또는 ‘육화(肉化)’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게 되며, 따라서 지각가능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오르테가는 ‘몸’을 ‘표현의 장(field of expressiveness)’이라 하고, ‘눈’을 ‘영혼의 창’이라고 부른다.(4) 플레쓰너도 오르테가와 비슷하게 얼굴을 영혼의 창이라고 말한다.(5) 오르테가와 플레쓰너의 ‘표현’과 마찬가지로, 맹자가 말하는 맑은 눈동자는 생리적 증상과는 구별되면서, 의도적으로 드러내려 하지도 않아도 저절로 드러나는, 감정의 자연스런 ‘흘러 내비침(流露)’을 말한다. 『예기』에서는 이렇게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몸을 통하여 드러나는 덕성(감정 의지)의 자연스런 유로(流露)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효자의 제사는 (그 낯빛을 보고) 알 수 있다. 자기의 위치에 섬에 공경하는 낯으로 허리를 숙이고, 신주 앞에 나아감에 공경스럽고 기쁜 빛이 감돌며, 제물을 올림에 공경스러우면서 부모님의 혼백이 와서 드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같고, 자기 자리로 물러나서 제자리에 섬에 곧 부모의 명을 받들려 하는 것 같고, 제물을 철거하고 물러날 때까지도 공경하고 삼가는 빛이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으면 효자의 제사이다.

 

『예기』에서 말하는 효자의 낯빛은 생리적인 증상과는 분명히 다르면서, 그렇다고 해서 의도적으로 드러낸 것도 아닌, 내면 감정의 자연스런 ‘흘러 내비침(流露)’를 의미한다. 『예기』에서는 자발적으로 표출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몸을 통하여 드러나는 인간의 기본 감정으로 기쁨 노여움 슬픔 두려움 사랑 싫어함 욕망(喜 怒 哀 懼 愛 惡 欲) 등의 일곱 가지를 들고 있다. 『예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러한 일곱 가지 감정들은 그 자체에 이미 ‘느낌의 대상’과 ‘느낄 수 있는 상황’ 그리고 ‘사태’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무런 지향성(intentionality)도 지니지 못한 무드나 센티멘탈리티와 구별된다. 이러한 감정들은 나아가서 ‘판단’의 한 형태이다. 예를 들면, 노여움(怒)은 ‘비난받을 만함’에 대한 ‘판단’을 내포하고 있고, 사랑(愛)과 욕망(欲)은 가치의 높낮이에 관한 ‘평가’를 내포하고 있으며, 두려움(懼)은 예상되는 위험과 손상에 대한 ‘예측’을 내포하고 있다. ‘개념’과 ‘판단’이 ‘이성(Reason)’을 구성하듯이, ‘감정’에도 이미 이러한 이성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6)

 

『맹자』가 인간의 본성으로 제시하는 네 가지 도덕 감정(四端)은 『예기』의 일곱 가지 감정에 비해서, 한층 더 능동적이고 가치지향적인 성격을 갖는다. 맹자의 ‘측은하게 느끼는 마음(惻隱之心)’, ‘악을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는 마음(羞惡之心)’, ‘사양하고 양보하는 마음(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是非之心)’ 등은 가치의 높낮이를 구별하여 선호/배격할 수 있는 가치지향적 감정들이다. 이러한 감정들 안에는 이미 가치의 높낮이에 대한 개념과 판단이 깃들어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맹자의 ‘사단’은 비이성적인 느낌이 아니라 그 안에 이미 이성을 잉태하고 있는 ‘합리적 감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감정들은 눈빛과 낯빛을 통하여 ‘육화’ 되어 밖으로 드러남으로써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보여지게 되고 읽혀지게 된다.

 

5. 눈빛 낯빛 몸짓의 사회적 의미

 

눈빛.낯빛.몸짓은 한 사람의 내면적 상태(감정.의지)를 드러내 주는 ‘기호’일 뿐 아니라, 발화행위와 마찬가지로 ‘의사소통’의 매체가 된다. 로빈슨 크루소의 위엄 있는 낯빛은 그가 무인도에 혼자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다. 그의 위엄 있는 낯빛은 프라이데이라는 노예가 섬에 상륙하면서부터 의미를 가진다. 프라이데이는 주인의 위엄 있는 낯빛을 통해 더 많은 충성을 요구하는 주인의 의도를 읽어낸다. 이런 의미에서 ‘낯빛’은 ‘비언어적 의사소통(non-verbal communication)’의 중요한 수단이 된다. 『예기』의 다음 구절을 보자.

 

군자의 곁에 시좌했을 때, 군자가 하품을 하거나 기지개를 켠다면, 곧 그 지팡이와 신발을 손에 들 것이다. 또 군자가 해지는 것을 보고 있을 때는, (이미 떠날 생각이 있는 것이므로) 시자는 곧 자리에서 물러갈 것을 청한다.

 

군자의 하품과 기지개는 단순히 신체적 피로에서 연유한 생리적 ‘지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위 문맥에 묘사된 하품과 기지개는 단순한 신체적 징후가 아니라 “그만 이 자리를 떠나고 싶다”라는 의사표시로서의 ‘행위’이다. 드러내 놓고 작별을 고하기 어려운 상황, 말을 하면 도리어 어색해질 상황에서는 ‘언어’보다 ‘낯빛’이 더 유효할 수도 있다. 더욱이 말 많고 혀가 미끄러운 사람을 기피하는 유가의 ‘언어 최소주의’적 전통에서는 상황에 따라 ‘말’보다는 한차례의 ‘낯빛’이 오히려 적절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발화 행위’도 하나의 기호이지만, ‘침묵’도 하나의 기호이며, ‘낯빛’도 하나의 기호이다. 언어적 기호보다 비언어적 기호를 신뢰하려는 유가의 입장이 꼭 동양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헤그스트롬(Timothy Hegstrom)은 서양에서도 비언어적 기호들이 언어적 기호에 비해 보다 신뢰된다는 점을 잘 입증하고 있다. 즉, ‘찌푸린 낯빛’과 ‘좋다’는 말이 모순적으로 병행할 때, 우리는 ‘말’보다 ‘낯빛’을 더욱 신뢰하게 된다는 것이다.(7) 언어적 기호는 기호 표현과 기호 내용 사이의 관계가 자의적임에 비해, 낯빛과 같은 동작 기호는 한 사람의 내면이 몸을 통하여 드러난 ‘등가화된 기호’이기 때문에 더욱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위의 예문에 보이는 하품이나 기지개와 같이 의사소통을 목적으로 표출된 몸짓은 ‘언어’로 치환될 수 있는 상징적 몸짓(emblem)이다. 일상 생활에서의 ‘상징적 몸짓’은 의사소통의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나아가서 지위 지배 복종 등과 같은 역학 관계의 표지판이 되기도 한다.

 

눈빛 낯빛 몸짓은 한편으로는 개인의 내면 깊숙이 감추어진 은밀한 감정을 드러내 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역학관계 안에서의 ‘미시적 권력구조’를 드러내 주기도 한다. 특히 지배와 복종의 역학관계 안에서, 복종하는 사람은 몸을 굽히거나 자세를 낮추는 것과 같은 거시적 동작을 통해서 상대방에 대한 종속을 표시하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눈빛 낯빛과 같은 미시적 표현을 통해서 종속을 표시하기도 한다. 숙종 때, 당시의 거유(巨儒) 송시열이 임금을 알현하면서 임금의 용안을 한번 쳐다 볼 수 있도록 특별 탄원을 올린 일은 ‘눈빛’과 같은 미시적 표현이 역학관계에서 지녔던 중요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또한 동양의 고대 형법에서 임금의 가마에 손가락질하는 일을 모반(謀叛)과 더불어 십악(十惡) 중의 하나로 취급하고 있는 일 역시 몸짓이라는 ‘기호’가 역학관계 안에서 지녔던 중요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지배/복종의 역학관계에서는 종속 당하는 자와 마찬가지로,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그 지위에 어울리는 복장이나 몸짓 그리고 낯빛을 통하여 권위와 위엄을 내보인다. 이런 점에서 눈빛과 낯빛뿐 아니라, 의복과 말투까지 모두가 역학관계를 드러내 주는 미시적 ‘약호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약호(code)’는 일정한 규칙에 지배되는 ‘의미작용의 체계(signifying codes)’로서, 그 규칙은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암묵적 또는 명시적 동의를 바탕으로 공유된다. ‘약호’는 또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행위를 규정하는 법조문이나 윤리준칙 그리고 나아가서는 매너와 에티켓과 같은 ‘행동규칙의 체계(codes of behavior)’를 뜻하기도 한다.

 

사회적 약호가 갖는 주요 기능은 수평관계 안에서의 ‘교감적 기능(phatic function)’과 수직관계 안에서의 ‘사회통제 기능’에 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본다든지, 임금의 가마에 손가락질을 하는 일은 지배권력에 대한 ‘반항’으로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정면으로 응시하거나 손가락질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닌다. 인간관계의 맥락을 규정짓는 사회 구조에는 그것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미시적 권력구조’가 존재하고, 이러한 ‘미시적 권력구조’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간과하고 지나쳐 버리는 일상생활 속의 사소한 경험 속에 은폐되어 있다. ‘미시적 권력구조’가 가장 구체적으로 깃들어 있는 장소는 바로 우리의 ‘몸’이다. 『예기』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군자가) 군대를 통솔하여 전쟁에 임할 때 표정은 용감하고 과단성이 있어야 하며, 그 호령은 엄정해야 하고, 그 안색은 엄숙해야 하고, 그 시선은 맑고 날카로워야 한다.

 

여기서는 군대를 통솔하는 지휘관으로서 부하들 앞에서 갖추어야 할 낯빛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지위 표시로서의 낯빛에 관한 언급은 거슬러 올라가면 『상서(尙書)』에서도 발견된다. 『상서』에서는 백성을 다스리는 군왕이 갖추어야 할 조건 다섯 가지를 들면서 그 중 첫 번째로 ‘용모’를 들고 있다.(8) 선조 때 사헌부 장령 정인홍은 추상같이 위엄 있는 ‘낯빛’을 지녔기 때문에 하급관리는 물론이고 심지어 시골에 있는 수령들까지도 그를 두려워했다고 율곡(栗谷)은 일기에 적고 있다.(9)

 

권력은 명령과 같은 명시적 언어행위를 통해서만 행사되는 것은 아니며, 복종 역시 명시적인 순종의 언어를 통해서만 수행되는 것은 아니다. 눈빛과 낯빛을 통한 비강제적이고 비명시적인 형태의 지배/복종 관계가 오히려 강제적이고 명시적인 지배/복종 관계보다 더 일상적이고 빈번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가 전통에서 지배자의 낯빛과 복종자의 낯빛을 이야기할 때, 단순히 ‘물리적 권력’을 염두에 둔 형식적 혹은 가식적 낯빛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지배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은 위엄 있는 낯빛을 내보이기 전에 그 지위에 합당한 ‘덕(德)’을 미리 내면에 갖추어야 하며, 내면에 ‘덕’이 충만할 때 저절로 ‘낯빛’을 통하여 밖으로 내비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종속의 지위에 있는 사람도 무조건 아첨 떠는 낯빛을 꾸며내서는 안되며, 진정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내면에 갖추어질 때 존경심은 낯빛을 통하여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에서는 “마음이 바르게 된 연후에 몸이 닦이게 된다”고 하고, 공자는 "아양떠는 말과 꾸민 낯빛에는 진정한 인(仁)이 드물다”고 한 것이다. 『예기』에서는 군자의 내면에 쌓인 덕이 낯빛을 통하여 밖으로 드러날 때 백성들은 이를 보고 훈화되어 저절로 승복하게 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악은 마음속에서 발동하는 것이고, 예는 밖에서 발동하는 것이다. 음악의 궁극은 화(和)고, 예의 궁극은 순(順)이다. 군자가 마음속으로 화락하고 밖으로 드러난 외모가 공순하면, 백성들은 그 낯빛(顔色)을 보고 훈화되어 서로 다투지 않으며, 그 용모를 보고 훈화되어 태만하거나 방탕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덕의 빛이 (군자의) 마음속에서 움직이면 백성은 복종하지 않음이 없으며, (군자가 행위를 통하여) 도리를 밖으로 펼친다면 백성은 승복하여 따른다. 그러므로 “예악의 도를 체득하여 천하에 실시한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일이 조금도 어렵지 않다”고 한 것이다.

 

따라서 군자에게는 거시적 행위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사소한 눈빛 낯빛 몸짓, 나아가서는 심지어 의복과 말투까지도 모두 ‘수신(修身)’의 대상이 되며, 또 이러한 몸적 표현은 다른 사람을 감화시키는 수단이 된다. 『예기』의 다음 구절을 보자.

 

성인이 행위의 규범을 제정함에 있어서 …… 예로써 절제하고, 신의로써 사귀고, 낯빛으로 드러내고, 의복으로 훈화하고, 친구로써 서로 격려하여 극에 이르게 한다 …… 이런 까닭에 군자가 그 (지위에 맞는) ‘옷’을 입었을 때는 ‘낯빛’으로 가다듬어 아름답게 하고, 이미 그 ‘낯빛’이 갖추어지면 군자의 ‘언사’로써 가다듬어 더욱 아름답게 하고, 이미 그 언사를 이룩하였다면 군자의 ‘덕’으로써 충실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 ‘옷’을 입고서 거기에 어울리는 ‘낯빛’이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 ‘낯빛’이 의젓함에 거기에 어울리는 ‘언사’가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 ‘언사’가 있음에 거기에 어울리는 ‘덕’이 없음을 부끄러워하고, 그 ‘덕’이 있음에 거기에 어울리는 ‘행위’가 없음을 부끄러워한다.

 

『예기』에 따르면, 눈빛과 낯빛뿐 아니라 심지어 의복 역시 한 사람의 정신성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 즉 유가적 관점에서 본다면 의복은 단순히 몸의 보호나 보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 주는 기호이며, 나아가서는 자신의 정신성(즉, 감정과 의지)까지 나타내 주는 ‘의미작용’이다. 『예기』에서는 정신성이 결여된 가식적 꾸밈으로서의 의복을 경계한다. 그 옷을 입었을 때는 반드시 거기에 합당한 덕을 내면에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외면’과 ‘내면’의 일치를 공자는 “표현과 바탕의 일치(文質彬彬)”라는 말로 표현한다.

 

유가에서 이야기하는 눈빛.낯빛.몸짓.의복 등은 ‘사회적 약호 체계’이다. 사회적 약호는 ‘신체 언어(body language)’를 비롯한 여러 가지 양상의 ‘비언어적 기호(nonverbal sign)’들로 구성된다. 이들 비언어적 약호는 한 개인의 신분이나 지위를 나타내 주는 약호로부터 시작해서 예의범절의 규칙, 신분과 위치에 알맞은 행동거지, 의상의 착용 등 개인이 다른 사람과 갖는 관계에서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인간관계의 규칙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의식이나 축제와 같이 개인이 속해 있는 집단에로의 소속감과 유대감을 복돋아주는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수단 등을 포함한다.

 

유가 전통에서의 눈빛 낯빛 몸짓은 권력관계뿐 아니라 도덕관계를 나타내 주는 복합적 기호체계이다. 『예기』에서는 공동체 안에서 전개되는 다양한 도덕적 상황에서 개인들은 어떻게 각 상황에 적합한 눈빛 낯빛 몸짓으로 처신해야 하는지 예시하고 있다. 한 개인이 다양한 도덕적 상황에 직면하여 각 상황에 적합한 눈빛 낯빛 몸짓을 자연스럽게 표출해 내기 위해서는, 고도로 세련된 표현감각과 독해감각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감각과 독해감각을 익히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 어떤 낯빛이 적합한지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직관 능력이 요구된다. 공자는 그의 일상생활에서 각 상황에 적합한 눈빛 낯빛 몸짓을 어떻게 표출해 냈는지 『논어』를 통해 살펴본다면:

 

군주가 불러 빈객의 접대를 명하시면 얼굴빛을 긴장하며 걸음은 조심스러웠다. 함께 선 빈객과 더불어 읍함에 손은 좌우로 옮기나 옷의 앞뒤 자락은 가지런히 하셨다. 걸어 나아감에 날개편 듯하며, 빈객이 물러난 뒤에는 반드시 복명하여 "빈객은 만족하여 돌아보지 않고 가더이다"라고 하였다. 잠자리에 들면 시체처럼 눕지 않으며, 집에 한가롭게 거함에 위엄 있는 낯빛을 하지 않으며, 상복 입은 사람을 보면 비록 친하다 해도 반드시 얼굴빛을 달리하였으며, 벼슬한 자와 장님을 보면 공식 만남이 아니라도 반드시 용모를 갖추며, 상복 입은 자에게는 수레 위에서도 절하며, 상주에게도 몸을 굽히셨다. 음식이 성대하면 반드시 낯빛을 바꾸어 일어나 후의를 표하며, 우뢰와 폭풍이 심할 땐 반드시 낯빛을 바로 잡았다.

 

『논어』에 묘사된 공자의 낯빛과 몸짓, 그리고 『예기』에 기록된 수많은 낯빛과 몸짓에 관한 언급들은, 낯빛과 몸짓들이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약호 체계’를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 ‘예(禮)’는 크게는 국가의 체제와 조직을 규정하는 관습법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작게는 일상생활에서 각 상황에 적합한 행위와 몸짓 그리고 낯빛까지 일일이 예시해주는 일상생활 지침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레게(James Legge)는 ‘예(禮)’를 ‘상황 적합성’의 의미와 ‘예의범절’의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는 ‘propriety’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각 상황에 적합한 ‘동작 기호’를 ‘몸’에 익숙하게 체현하여 드러낼 때, 그 낯빛은 더 이상 의도적인 ‘행위(handlung)’가 아니라 저절로 드러난 ‘표현(ausdruck)’처럼 자연스럽게 된다. 즉, 인공기호(artificial signs)가 자연기호(natural signs)처럼 체화(體化)되고 관습화되는 일을 말한다. 이렇게 각 상황에 적합한 감정을 내면적으로 ‘느끼는 일’과 외면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하나가 될 때, 그리고 자발적인 ‘행위’가 비자발적인 ‘표현’처럼 자연스럽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자연 기호화된 인공 기호’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공자가 인생의 최후 경지로 말한 ‘예술적 경지에서 노닌다(游於藝)’라는 말은 이러한 경지를 말한 것일 것이다. 유가 윤리의 궁극 경지는 행위를 ‘규칙’에 맞게 재단해내는 일이 아니라, ‘몸’을 통하여 타인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전범’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경지이다. 기호의 관습화에 의해 문화는 생겨난다. 관습화와 체화가 잘 되어 있을수록 기호의 사용은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이런 의미에서 군자의 ‘몸’은 타인에게 도덕적 전범이 된다.

 

감정(의지)의 표출이 더 이상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라 저절로 내비치는 ‘표현’처럼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수양을 통한 감정의 체현이 요청된다. 따라서, 내면의 정심(正心)과 성의(誠意)는 물론이고, 일상 생활에서의 눈빛과 낯빛, 걸음걸이나 손의 모양, 심지어 숨쉬는 모양까지 모두가 유가적 ‘수신(修身)’의 대상이 된다.

 

군자의 낯빛은 여유 있고 침착하게 하여야 한다. 존경하는 이를 뵐 때는 삼가고 공손하게 해야 한다. 군자의 걷는 모양은 묵직하게, 손의 모양은 공손하게, 눈의 시선은 단정하게, 입의 모양은 함부로 말하지 않으려는 듯하게, 말소리는 나직하게, 머리 모양은 곧게, 숨은 들리지 않는 듯하게, 선 모양은 덕이 충만한 듯하게, 낯빛은 엄숙하게 하고, 앉을 때는 시(尸)처럼 바로 앉는다.(10)

 

『예기』에 나오는 이러한 아홉 가지 몸적 표현은 ‘구용(九容)’이라고 불리며, 유가 전통에서 두고두고 ‘수신(修身)’의 지침이 되어 왔다.(11) 현대인들이 스킨 케어나 바디 빌딩과 같은 ‘살덩어리 가꾸기’에 치중한다면, 유학자들은 정신(감정, 의지)과 육체의 통합체로서의 ‘몸 가꾸기’에 치중해 온 것이다.

 

6. 도가의 유가적 ‘낯빛’ 비판

 

도가는 유가적 눈빛 낯빛 몸짓에 대하여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낸다. 도가의 관점에서 본다면, 유가의 ‘수신(修身)’을 통하여 다듬어진 ‘예(禮)’에 맞는 눈빛 낯빛 몸짓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함께 공유하는 자연스런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문화적 무대 위에서의 연출로 보이기 때문이다.

 

장자의 관점에서 볼 때, 유가적 낯빛은 문화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 약호체계’로서, 이러한 낯빛을 자연스럽고 자명하게 여기는 일은 ‘위장된 자연성’이나 ‘위장된 자명성’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장자의 관점에서 유가의 ‘낯빛’이 문제시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의 이데올로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로서 이해되기를 거부한 채 마치 자연적이고 자명한 진리인양 스스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장자의 유가적 낯빛 비판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신화 비판’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바르트의 문제의식은 부르주아 의식이 교묘하게 은폐되는 방식이 지닌 ‘가짜 자명성’ 혹은 ‘조작된 자연’의 기만성을 폭로하는 데 있다.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장자의 문제의식은 일상화된 ‘속견(doxa)’과 ‘스테레오 타입’에 대해 예리한 반성을 가하는 ‘비판의 기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는 ‘덕’이라는 이름으로 ‘과잉 코드화(overcoding)’된 유가적 낯빛의 허구성을 마치 연극배우의 표정을 분석하듯 미시적으로 분석.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장자의 기호학은 ‘유가적 관점’에 대한 대항담론으서 의미를 지니며, ‘상투화된 코드’와 ‘위장된 코드’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기호학이다. 장자가 전개하는 ‘비판의 기호학’의 가치는 항상 깨어있는 의식으로 일상적 의미에 대해 성찰하고 비판하도록 우리를 일깨워 주는 데 있다.

 

도가는 상황에 적합하게 절제된 예절바른 낯빛보다는 ‘웃음’과 ‘울음’처럼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기본감정의 자연스런 유로(流露)에 더 큰 진실성을 부여한다. 위(魏)나라 때 노자 장자를 숭상했던 완적(阮籍: 210∼263)의 이야기가 이를 잘 드러내 준다. 완적은 바둑을 두다가 모친이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완적은 바둑을 다 마친 후 두 말의 술을 마시고 호곡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몇 되나 되는 피를 토하고 혼절하였다. 깨어나서 다시 삶은 돼지 한 마리를 먹고 술 두말을 마신 후에 다시 호곡하기 시작하여 몇 되나 되는 피를 토했다. 혜강의 형인 혜희(稽喜)가 ‘예(禮)’를 갖추어 조문을 하자 백안(白眼: 못마땅한 눈빛 낯빛)으로 대접하고, 혜강(稽康)이 술과 거문고로 문상하자 청안(靑眼: 반가운 눈빛 낯빛)으로 맞이했다고 한다.

 

따라서 도가에서는 유가에서처럼 감정의 절제와 중화(中和)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도가에서는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초월하려고 한다. 장자 자신의 이야기는 이러한 도가적 관점을 잘 설명해준다. 장자는 아내가 죽었을 때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서 술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친구 혜시는 이 광경을 보고 장자에게 너무하지 않느냐고 힐문하자, 장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렇지 않다. 아내가 막 세상을 떠났을 때 나라고 어찌 슬퍼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태초를 살펴보니 본래 생명이 없었다. 생명이 없었을 뿐 아니라, 형체조차 없었다. 형체가 없었을 뿐 아니라 기(氣)도 없었다. 황홀하게 뒤섞여 변화하는 도중 문득 기가 생겨나고, 기가 생긴 다음 형체가 생겨나고, 형체가 변하여 생명이 생겨나고, 이제 또 차례로 변하여 죽어 간다. 이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와 더불어 흘러가는 것이다. 내 아내는 우주를 큰 집으로 삼아 편안하게 자고 있는데, 내가 큰소리로 엉엉 운다면 내 스스로 운명에 통달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울음을 그친 것이다.

 

장자가 아내의 죽음을 놓고 처음에 큰소리로 운 것은 슬픔이라는 감정이 저절로 몸을 통하여 흘러 내비친 것(流露), 즉 ‘표현(ausdruck)’이다. 그러나 장자가 곧 울음을 그친 것은 ‘태어남 = 기쁨’ 그리고 ‘죽음 = 슬픔’이라는 인간중심적 개념의 틀에서 벗어나 생멸하는 우주의 변화에 모든 것을 내맡기려는 달관의 경지에 도달하였기 때문이다. 장자는 인간 중심적인 개념의 틀을 통하여 사고하기를 거부한다. 장자에 의하면 인간은 우주 내의 타 존재에 비하여 하등의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인간은 다른 사물과 평등하며, 인간의 잣대로 다른 존재를 재단하려는 태도는 타 존재에 대한 월권이고 대자연에 대한 항명이다. 따라서 장자는 철저하게 인간중심적 사고의 틀 - 아름다움과 추함, 옳음과 그름, 위대함과 하찮음 등의 이항대립적 구분을 깨부술 것을 주장한다. 장자는 인간중심적 개념의 틀에서 뛰쳐나와 현상계에 명멸하는 온갖 ‘차이’와 ‘무질서’를 있는 그대로 포용하려는 것이다. 장자는 특히 ‘만물평등(齊物)’의 관점에서, 수신을 통해 다듬어진 유가적 낯빛은 권력 구도 안에서의 권위적 가면에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다음 우화에서 장자는, 사성기(士成綺)라는 유가적 인물과 노자(老子)라는 도가적 인물의 가상적 대화를 설정하여 유가적 낯빛을 비웃는다.

 

사성기가 노자에게 공손하게 가르침을 청했다. "저는 어떻게 몸을 닦으면(修身) 좋겠습니까?" 노자가 말하기를 "당신의 낯빛은 단정하며 위압적이고, 눈빛은 곧바르며, 이마는 번듯하게 솟았고, 입은 유창하게 생겼고, 당신의 풍채는 위엄이 있어서 마치 달아나려는 말을 매어 놓은 상이오. 행동으로 옮기면 민첩하고, 마음이 발동하면 기민하며, 눈으로 살피면 너무 자세하며, 지혜와 기교가 오만하게 드러나 보이는구려. 무릇 이런 것들은 모두 믿을 만한 것이 못되오.

 

한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나며 살아가는 주위환경을 넓은 의미에서 공동체라고 한다면, 장자가 인정하는 유일한 공동체는 온갖 동물과 식물 그리고 사물들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자연’뿐이다. 장자는 이러한 ‘자연’ 이외에 아무런 공동체도 인정하지 않는다. 공동체는 공동체에서 목표로 삼는 공동선을 성취하기 위하여 구성원들에게 때로는 ‘헌신’을 요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의무’와 ‘금지’를 통하여 구성원들의 자유를 제한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연’이라는 공동체가 장자라는 개인에게 요구할 수 있는 의무는 무엇이고 금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타존재에 대한 불간섭’ 그리고 여기서 얻어지는 ‘다양한 목소리들의 평화로운 공존’ 그 것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장자의 사상은 ‘범우주적 자유주의’이다. 장자는 인간세계의 속박에서 벗어나 인간 외적인 존재를 남김없이 포괄하는 범존재계의 자유와 평등을 설파한다.

장자는 유가의 ‘수신(修身)’을 통하여 도달한 근엄하고 문채(文彩)나는 몸 대신, 수많은 꼽추 불구자 추남들을 동원하여 ‘비틀림 속의 곧음’, ‘추함 속에 깃든 아름다움’, ‘고통 속에 깃든 자유’를 낱낱이 들춰 보인다. 장자가 자유로운 사람으로 묘사하는 우사(右師)는 한 쪽 발이 잘린 쩔뚝발이이고, 장자가 자연생명을 다 누린 사람으로 예찬하는 지리소(支離疏)는 꼽추이며, 장자가 세속을 초월한 사람으로 칭찬하는 애태타(哀 )는 지독히 못생긴 추남이고, 장자가 인간세의 질곡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극찬하는 자여(子輿)는 몸뚱이가 뒤틀려 턱이 배꼽 밑에 처박히고 어깨는 머리 위로 솟은 불구자이다.

 

장자가 볼 때 정상적인 몸과 비정상적인 몸, 사회화된 몸과 자연적인 몸, 유가적인 몸과 도가적인 몸 등의 의미는 그저 ‘차이의 체계’(system of difference)일 뿐, 여기에 어떤 고정된 의미가 담겨있는 것은 아니다. 장자에 있어서 ‘몸’은 내면의 ‘덕’과 일정한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몸’은 다만 사회적 약호체계에 따라 관습적으로 코드화되고 독해될 뿐, ‘몸’이 진실로 한 사람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반영해주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장자에 의하면, 유가의 ‘덕’이란 지배자의 위장술이고, 유가의 ‘낯빛’이란 권위의 가면이라는 것이 장자의 생각인 것 같다. 장자는 ‘안으로 성실하면 밖으로 드러난다’는 유가적 신념과 정반대로 ‘덕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德不形)’고 주장한다.

 

"덕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대답하기를 '평평함'(平)이란 물이 흐르지 않고 멈추어 있는 극치이다. (지극히 평평하기 때문에) 표준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안으로 간직하되 밖으로 출렁이지 않는 상태이다. 덕이란 '화'(和)를 이루는 수양이다. 그러므로 덕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만물은 (그에게서) 떠나지 못한다.

 

장자에 의하면 진실한 덕은 내면에 있는 것이지 밖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다. 마치 고요한 물 속에 지극한 평평함이 담겨 있듯, 꾸미지 않은 담담한 낯빛에 진정한 덕(德)이 숨겨져 있다고 보는 것이다. 노자도 장자와 마찬가지로 꾸미지 않은 낯빛을 예찬한다.

 

훌륭한 장사꾼은 물건을 깊숙이 감추어 언뜻 보면 점포가 텅빈 것 같고, 진정한 군자는 성대한 덕을 지니고 있으나 외모는 마치 모자라는 것처럼 보인다.

 

장자의 철학은 자유의 철학이다. 장자는 인위적인 문화의 틀에서 벗어나 나비처럼 자유롭게 대자연을 훨훨 날고 싶어한다. 장자는 인간 세상에서 철저하게 ‘이화(異化)’하여 ‘자아(self)’를 자연 속에 용해시키려고 한다. 장자가 궁극의 목표로 삼고 있는 ‘얽매임에서 풀려남(縣解)’이란 바로 이러한 ‘무자아(no-self)’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장자의 ‘자유의 철학’과 대조적으로 유학은 ‘공동체의 철학’이다. 인간세를 떠나 대자연으로 비상하려는 장자의 ‘이화(異化)’의 날갯짓과 달리, 유가는 문화세계 안으로의 ‘동화(同化)’를 지향한다. 유가적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상황에 적합한 감정을 몸으로 체현하여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 앞에서 예절바른 낯빛과 몸짓으로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예(禮)’라는 공동체의 질서에 동화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감정과 욕망에 대한 끝없는 절제와 극기가 요구된다. 장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자유에 대한 억압이며 자연에 대한 왜곡이다. 장자는 유가의 ‘소속된 삶’ 대신 ‘자유’를, 공동체로의 ‘동화’ 대신 공동체로부터의 ‘이화’를, 그리고 인문세계의 ‘척전(拓展)’ 대신 ‘자연적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과연 우리는 장자의 말처럼 ‘무관점의 관점’에서 인간이기를 거부한 채 자연계의 다른 사물과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사실 현실세계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타인과 구별하려는 ‘이화’를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어디엔가 귀속되고자 하는 ‘동화’를 추구한다. 그러나 과연 장자의 말처럼 인문세계에서 철저하게 유리된 ‘이화’의 삶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장자가 제시하는 ‘이화’의 길과 유가가 제시하는 ‘동화’의 길은 서로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듯하면서도 우리의 삶 속에 기묘한 모습으로 공존하고 있다. 동화될 수 없는 삶은 고단하고, 이화될 수 없는 삶은 부자유할 것이다. 이화와 동화는 이처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다. 인간이 이렇게 ‘이화’를 추구하면서도 ‘동화’에 뿌리를 둘 수밖에 없는 모순적 존재라면, 남은 문제는 ‘이화인가?, 동화인가?’의 양자택일의 문제라기보다, 얼마나 진실한 ‘이화’의 몸짓으로 ‘동화’에 내재된 기만과 허위를 들추어내고, 얼마나 진실한 ‘동화’의 몸짓으로 왜곡되고 방종한 ‘이화’를 바로잡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사실 유가에서는 장자가 비판하는 것처럼 ‘가식적 낯빛’과 ‘기만적 동화’를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아첨하는 낯빛과 꾸며낸 낯빛에는 인(仁)이 드물다”고 한 공자의 말처럼, 유가는 가식적 낯빛과 기만적 동화에 대해 장자 못지않게 비판적이었다. 유가에서는 겉으로 꾸며낸 가식적 낯빛 대신 내면의 충실을 먼저 내세운다. 『중용』에서는 ‘밖으로 드러남’의 전제조건으로 ‘안으로 성실함’을 이야기하고, 『대학』에서는 제가.치국.평천하의 전제조건으로 정심.성의.치지.격물을 내세우고 있다. 이렇게 ‘안’과 ‘밖’을 이어주는 매개 고리가 바로 ‘몸(身)’인 셈이다. 유가에서는 "내면(質)과 외면(文)이 고루 빛나는 상태”(文質彬彬)에 이르는 공부를 ‘수신’으로 여겼으며, 가식적 낯빛과 기만적 동화에 대해서는 장자 못지않게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기만적 낯빛에 대한 장자의 지적은 말류(末流) 유자(儒者)에 대한 비판은 될지언정 유가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가식적 낯빛과 기만적 동화를 비판하는 점에 있어서는 유가는 오히려 장자와 같은 입장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7. 눈빛 낯빛 몸짓과 ‘지인(知人)’

 

전통 사회에서 "덕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알 것인가?"하는 ‘지인(知人)’의 문제는 단순한 도덕적 관심사가 아니라, 현실 정치 즉 관직임용과 인사행정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였다. 『상서』에서는 ‘사람을 잘 아는 자는 '밝다'(哲). 밝은 자 만이 능히 사람을 관직에 안배할 수 있다’고 하여 사람 파악하는 능력의 중요성을 적고 있다. 공자도 ‘지혜(智)’가 무엇인지 물어보는 번지(樊遲)에게 ‘사람을 잘 아는 능력’이라고 대답한다. 공자는 또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자기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라’고 말한다. 이러한 구절들은 ‘사람에 의한 통치(人治)’ 또는 ‘덕에 의한 통치(德治)’의 전통에서 ‘지인’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는지 시사해주는 단편적인 예들이다.

 

그러나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맹자의 말처럼 눈동자가 맑은 사람은 속마음도 바르다고 여겨야 하는가? 하지만, 속마음이 바르지만 눈빛이 흐린 사람은, 속마음이 바르지 않지만 눈빛은 맑은 사람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가? 과연 우리는 흐린 눈빛을 가진 사람은 속마음도 흐리다고 여기고, 맑은 눈빛을 가진 사람은 속마음도 맑다고 여겨야 하는가?

 

옛날 중국의 비취 상인들은 고객의 속마음을 살피기 위해 귀부인들의 눈동자를 유심히 관찰하곤 했다. 또한 거짓말 탐지기를 발명하기 이전의 범죄학에서는 피의자의 속마음을 탐지하기 위하여 ‘눈빛’을 관찰하기도 했다. 『주례』에서는 피의자를 심문하는 다섯 가지 방법으로, ‘하는 말을 들어보고(辭聽)’, ‘낯빛을 살피고(色聽)’, ‘숨쉬는 모양을 살피고(氣聽)’, ‘무슨 말을 귀담아 듣는지 관찰하고(耳聽)’, ‘눈빛을 살핀다(目聽)’라고 적고 있다. 명(明)의 혜제(惠帝)는 그가 아직 제위에 오르기 전에 태손(太孫)으로 있을 당시, 절도혐의로 잡혀 온 혐의자 여섯 명의 눈동자를 관찰하고, 그 중 한 명은 절도범이 아니라고 단언한 적이 있다. 심문결과, 과연 혜제의 지적처럼 그 사람은 절도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 일이 있다.

 

그러나 감성적 직관에 의한 타인의 감정 이해에는 분명히 한계가 뒤따른다. 인간은 자신의 순수한 감정을 은폐하거나 위장할 수도 있으며, 또 타인의 감정을 대하는 사람이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자도 한때는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 편견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다. 즉, 관상학적인 ‘상모(狀貌)’와 내면의 ‘표현’으로서의 ‘낯빛’을 혼동한 일이 바로 그것이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따르면, 공자는 자기를 스승으로 모시려는 담대멸명(澹臺滅明)의 얼굴이 추한 것을 보고 그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담대멸명이 공부를 마치면 물러나서 열심히 덕을 닦을 뿐 아니라 그의 행실이 모두 사리에 맞으며, 졸업 후에는 그를 사모하여 따르는 제자가 삼백 인이나 되고, 그의 덕망이 제후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자, 자신의 잘못된 인물평가에 대하여 후회하면서, ‘내가 용모를 보고 사람을 취했다가 자우(子羽: 담대멸명의 자字)에게서 실수를 했구나!’라고 고백한다.

 

공자의 이러한 고백은,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고정적인 ‘신체의 모습(狀貌)’를 보고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되며, ‘내면의 표현’으로서의 ‘낯빛’을 통해서 한 사람의 감정과 의지를 직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가의 ‘지인(知人)’은 관상술가의 ‘관상보기(相人)’와 명확하게 구별된다. 관상학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인간의 고정적인 형모(形貌)에서 그 사람의 부귀(富貴)와 현달(顯達)을 점치려 하지만, 유가에서는 살아 움직이는 눈빛과 낯빛, 즉 ‘몸적 표현’을 통하여 그 사람의 내면성(덕성 감정 의지)을 읽으려고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그의 낯빛을 은폐하거나 위장할 경우, 과연 우리는 어떻게 그의 속마음을 알아낼 수 있는 것일까? 공자는 겉으로 드러난 낯빛과 내면의 덕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낯빛이 엄하되 속마음은 물러터진 사람은 소인에 비할 수 있으니, 이러한 사람은 마치 개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는 사람과 같다.

따라서 한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는 일은 눈빛과 낯빛과 같은 미시적 ‘동작 기호’에 대한 일회적 직관만으로는 충전(充全)하지 않으며, 거시적 행위에 대한 지속적이고 반성적인 체험까지 병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을 관찰함에 있어) 그가 하는 행위를 보고, 그의 의도를 보며, 그의 욕망을 살핀다면, (그의 사람됨을) 어찌 숨길 수 있으리요? 어찌 숨길 수 있으리요?

 

여기서 공자가 말하는 행위 의도 욕망은 한 사람의 성격 형성에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한 사람의 행위와 의지의 일관성을 우리는 그 사람의 ‘성향(disposition)’이라고 부른다. 한 사람이 그의 행위나 의지에 있어서 들쭉날쭉하게 일관성이 없을 때 우리는 그의 ‘성향’을 가늠할 수 없게 되고, 나아가서는 그의 ‘자아정체성(self identity)’을 의심하게 된다. 한 두 번의 가식적 행위, 한두 번의 위선적인 낯빛은 우리를 속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사람의 성향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을 통하여 우리는 그 사람의 성격을 알아차리게 된다. 공자는 한두 번의 눈빛 낯빛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속적인 성향을 보고 그의 성격을 파악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음이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그의 낯빛과 행위로 한두 번 우리를 속일 수도 있겠지만, 평생동안 자기의 속마음을 감추면서 가식적으로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어찌 자기의 사람됨을 숨길 수 있으리요?’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유가 전통에서 ‘사람알기(知人)’의 조건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한 사람의 감정과 의지(혹은 덕성과 인격)가 타인에게 이해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의 감정과 의지가 ‘몸’을 통하여 밖으로 표현되어져야 한다. 2)표현하는 사람이나 그 표현을 읽는 사람 모두가 진실해야 한다. 3)성향에 대한 지속적이고 반성적인 체험이 요구되며, 자아정체성이 불안정한 사람 그리고 자신의 감정과 의지를 은폐하거나 가장하는 사람은 파악하기 어렵다. 4)감성적 직관능력(智.哲)이 탁월해야 타인의 감정과 의지를 잘 읽을 수 있다.

 

한 사람의 감정과 의지를 낯빛이나 몸짓으로 드러내는 일을 ‘약호엮기(encoding)’라고 한다면, 이러한 낯빛이나 몸짓을 보고 상대방의 의도나 감정을 읽어내는 일은 ‘약호풀기(decoding)’라고 할 수 있다. 유가의 ‘수신’이 ‘약호엮기’에 해당한다면, ‘지인’은 ‘약호풀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기호가 지닌 한 특징은 거짓말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 있다. 에코(Umberto Eco)에 의하면, “기호학은 원칙상 거짓말을 하기 위해 쓰이는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만약 어떤 것이 거짓말을 하는데 쓰일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실을 말하는 데도 쓰일 수 없으며, 말조차 할 수가 없는 것이다.”(12) 거짓말은 ‘약호엮기’나 ‘약호풀기’ 모든 과정에서 다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유가에서는 ‘약호 엮는 사람’과 ‘약호 푸는 사람’ 모두의 진실성과 직관능력을 ‘지인’의 전제조건으로 들고 있는 것이다.

 

동양의 지적 전통에서는 사람의 성격과 인품을 파악하기 위한 ‘기술’과 ‘범주’를 체계적으로 정립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지만, 유가는 이러한 측면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유가는 ‘성격학(characterlogy)’을 체계적으로 정립하려는 시도보다는, ‘어떻게 하면 진실한 성격의 소유자가 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 문제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의 밑바탕에는, 진실한 덕이 내면에 쌓이면 구태여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드러나게 되고, 구태여 남에게 알리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려지게 된다는 신념이 깔려 있다.

 

또한 이러한 신념의 저변에는 정신과 육체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한 가지 것이라는 생활세계적 체험이 바탕에 깔려 있다. 육체와 정신의 통합체로서의 ‘몸’이라는 대전제 아래 유가적 ‘수신(修身)’은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즉, 몸가짐을 정제 엄숙함으로써 마음(감정과 의지)도 전일하게 되고, 또 마음을 전일하게 유지함으로써 용모나 의표도 단정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조실록』의 「졸기(卒記)」에서는 죽은 명인들의 인물평을 기록하면서 빈번하게 그들의 ‘용모’와 ‘풍채’까지 더불어 묘사하고 있다. 즉 한 인물을 평가할 때, 그가 생전에 행했던 거시적 행위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낯빛과 몸짓까지 함께 살펴보아야 그의 인품과 자질 그리고 의지와 덕성에 대하여 더욱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처럼 ‘안으로 성실하면 밖으로 드러난다’는 유가적 신념은 전통사회의 선비들에게 수신에 관한 철칙으로 신봉되었으며, 나아가서 이러한 신념은 일상생활 속에서 하찮게 보이는 ‘낯빛’과 ‘몸짓’에까지 철저하게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8. 잃어버린 ‘눈빛.낯빛.몸짓’을 찾아서

 

위에서 우리는 눈빛 낯빛 몸짓과 같은 몸적 표현이 유가 전통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살펴보았다. 유가적 생활세계에서 육체와 분리될 수 있는 정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곧 정신과 육체의 통합체로서의 ‘몸(身)’이다. 공동체의 상호주관적 시선에 드러난 ‘몸’을 통하여 ‘나’는 밖으로 드러나고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읽혀지게 된다. 따라서 눈빛과 낯빛은 곧 한 사람의 정신성(기의)이 밖으로 드러난 것(기표)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가전통의 ‘몸’은 자아와 세계와의 ‘교통방식’이기도 하다. 유가전통에서 눈빛과 낯빛, 그리고 몸짓과 옷차림은 일상생활의 다양한 문맥 안에서 상황에 적합하게 절제된 모습으로 표현되어져야 한다. ‘수신’을 통하여 표현된 눈빛과 낯빛은 한 사람의 내면을 드러내주는 지표가 된다. 눈빛과 낯빛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의지를 드러내기도 하고, 또 상대방의 감정과 의지를 체험하기도 하면서, 더불어 ‘소속된 삶’을 일구어나간다. 이런 점에서 유가는 철저하게 ‘소속된 삶’을 지향하는 공동체의 철학이다.

 

전통사회에서 지향해 온 ‘소속된 삶’은 자유주의의 범람과 더불어 이제는 과거의 영욕을 뒤로한 채 박물관의 창고 속에 고색창연한 유물로 등록되었다. 몰락한 공동체를 뒤덮는 세속화되고 물신화된 자유의 물결 속에서 ‘낯빛’은 왜곡된 모습으로 뒤틀려 우리의 눈앞에 드러난다.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는 농도 짙은 몸짓, 절제되지 않고 거칠 것 없는 감정표현, 호전적이고 경계 어린 혹은 냉담하거나 무관심한 눈빛 - 이러한 눈빛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을 공동체 구성원의 상호주관적인 시선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낯선 침입자로 인식하는 ‘이화(異化)’의 눈빛이다. 유가에서 경계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왜곡된 ‘이화’는 아니었는지?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몸짓의 방종함과 무례함을 탓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인의 낯빛과 몸짓은 의무나 금지의 대상이 아니라 자유재량의 영역에 속하며, 이러한 영역에 관한 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침해이기 때문이다.

 

모든 가치가 일률적으로 화폐가치로 환산되는 자본주의의 문화에서 ‘낯빛’은 더 이상 한 사람의 진실한 내면의 표현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부를 드러내주는 지표가 된다. 미인대회에서의 조작된 낯빛(이미지 메이킹), 쥔 자와 가진 자의 늠름한 낯빛, 그리고 부를 과시하기 위한 치장과 의복 - 이러한 낯빛.몸짓.의복들은 장자가 공자와 더불어 지탄했던 진실성이 결여된 ‘가면’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낯빛의 기만성을 인식하면서도 그 진실성에 대해서 더 이상 캐묻지 않는다. 왜냐하면 더 많이 가진다는 것은 더 좋은 일이며, 가진 것의 표현은 윤리적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 사적인 취미판단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상업주의에 편승한 기술문명의 덕택으로 우리는 가족과 친구로부터 해방되었다. 아내와 남편은 직접 눈을 마주치는 대신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스타의 눈빛을 매개로 공감대를 유지해나가고, 아이들은 숙제를 끝마치기 무섭게 오락기 앞에서 팩맨이나 베이버와 같은 우주의 악인을 대상으로 전쟁을 치른다. 친구들은 더 이상 골치 아프게 얼굴을 맞대고 시(詩)와 인생을 논할 필요도 없이, 락 카페나 뮤직비디오 레스토랑에서 영상 속의 뉴키즈를 따라 춤추고 노래하기만 하면 된다. 소녀들은 더 이상 갈망하는 눈빛과 억제하는 몸짓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이, 상대방이 걸친 옷의 브랜드와 차종만 보고서 살덩어리를 내맡기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가족과 친구 그리고 연인에게서 실종된 눈빛과 낯빛을 갈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행위의 ‘규칙’만이 우리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길로 인도해 줄 수 있을 뿐, 눈빛.낯빛 혹은 ‘감정’과 ‘성품’에 관한 이야기는 옛 노인네들이 남긴 진부하고 통속적인 훈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파편화되고 표류하는 자아, 왜곡되고 뒤틀린 자유, 전도되고 식화된 이성, 그리고 날로 팽배하는 상업주의와 물신주의의 물결에서 잠시 벗어나, 진열장 너머로 먼지를 쓴 채 간직되어 있는 ‘소속된 삶’의 잔영들을 보고 있노라면, 낯설면서도 문득 반가운 기분이 든다. 왜 우리는 선험적이고 추상적 사변에 의한 거대 담론만이 진리라고 여기려 하는가? 왜 우리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생활세계에서의 체험들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하려 드는가? 이성과 감성, 그리고 합리와 비합리의 경계선은 그렇게도 명확하고 절대적인 것인가? 과연 보편적 행위의 규칙, 그리고 전략적 합리성만이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주는 것일까? 또한 철학과 비철학, 진리와 통속의 경계선은 과연 ‘누구에 의한’, ‘어떤 기준’에 의해 설정되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왜 이 땅의 철학자들은 이러한 경계선에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는 것일까?

 

 

 

(註)

1. 『莊子』 「外物」. “言者所以在意, 得意而忘言.”

2. 인간의 내재적 정신이 인간의 외재적 형체(특히 눈동자)를 통해 표현된다고 하는 맹자의 입장은 후세의 회화(繪畵)에 관한 미학이론에서 그대로 계승된다. 고개지(顧愷之)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요체는 눈동자에 있다”고 하여 인물화에서 눈동자의 중요성을 말하고(『魏晉勝流畵贊』), 소식(蘇軾) 역시 “전신사조의 요체는 아도(阿堵:눈동자)에 있다”고 하고 또 “그 다음은 광대뼈와 뺨에 있다”고 하여 인물화에 있어서 내면성 표현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蘇東坡全集』 「續集」 卷12, ‘傳神記’)

3. Helmuth Plessner, 『Laughing and Crying: A Study of the Limits of Human Behaviour』 (Evanston: Northwest University Press, 1970), 33쪽 참조.

4. Jose Ortega Y Gasset, Man and People, tr. by Willard R. Trask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1957), 93쪽.

5. Helmuth Plessner, 『Laughing and Crying』, 45쪽.

6. Robert Solomon, “Existentialism, Emotions, and the Cultural Limits of Rationality”, Philosophy East & West, Vol.42, No.4(1992), 610쪽 참조.

7. Timothy G. Hegstrom, “Message Impact: What Percentage is Nonverbal?”, Western Journal of Speech Communication, Vol. 43(1979), 134∼142.

8. 『尙書』 「周書」 「洪範」. “二: 五事, 一曰貌, 二曰言, 三曰視, 四曰聽, 五曰思.”

9. 李珥, 『石潭日記』(下), 尹絲淳 譯 (서울: 삼성미술문화재단, 1983), 433쪽.

10. 『禮記』 「玉藻」. "君子之容舒遲, 見所尊者齊속. 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 坐如尸."

11. 『朱子語類』 卷12 「守持」편 참조.

12. Umberto Eco, A Theory of Semiotics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76), 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