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코베인과 해체 - 데리다의 '텍스트' 개념으로 본 커트 코베인의 음악
- 박영욱(영상원 )
1.들어가는 말
1990년대 미국의 록 그룹 너바나(Nirvana)의 리더였던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의 곡들에 나타난 가사를 보면, 그것들은 하나같이 명확한 문장이나 뚜렷한 서사구조를 갖기보다는 단어들이 산만하게 나열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 문장 속의 기표들은 의미가 모호하며, 때로는 모순적이다. 간혹 정신병자의 외침처럼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하다. 가령 <컴 애즈 유 아>(Come As You Are)의 한 부분에서는 '너를 사랑해, 너를 증오해.'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동일한 대상에 대해서 '친구'로 혹은 '적'으로 규정되기도 하다. 물론 반어적인 수사법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커트 코베인의 가사들은 너무 산만하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정신분열증 환자의 외침에 더 가깝다.
코베인의 가사를 하나의 텍스트로 보자면 그것은 일관된 체계를 담고 있는 담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의미 체계의 일관성을 거부하는 이질적인 텍스트이다. 좀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코베인의 가사들은 의미와 무의미를 넘나들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들을 넘나들고 있다는 것, 혹은 그 경계 자체가 어쩌면 그의 음악을 나타내는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가사에서뿐만 아니라 음악의 형식적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그의 음악은 전통적인 서양 음악적 가치기준에서 볼 때 협화음과 불협화음, 나아가 음과 소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장조와 단조의 체계를 넘나든다. 그렇다고 음과 소음의 가치기준이나 장단조의 체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음악은 서양 음악적 기준에서 의미에 속하는 것과 무의미한 것 자체를 넘나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경계 자체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로써의 텍스트는 바로 데리다가 주장하는 해체주의적 텍스트의 특성이기도 하다. 또한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정의하는 '아름다움'의 특성이기도 한 것이다. 이 글은 우선 '미'(아름다움)에 대한 데리다의 견해와 그의 '텍스트' 개념을 살피고, 그 개념이 커트 코베인의 음악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살피도록 할 것이다.
2. 파레르곤과 예술에서의 '미'
아름다움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가장 기본적인 미학적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데리다는 하나의 텍스트로써 예술작품이 어떤 미학적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 분석한다. 그는 예술작품 속에는 그것을 예술작품이도록 만드는 어떤 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전통적인 생각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자신의 논의를 시작한다.
전통적인 생각이란 어떤 것인지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림이 있다면 그 그림을 불멸의 명화로 남게 하는 어떤 요소가 있을 것이다. 그 본질적인 요소가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인지는 내용적으로 분명하게 규정할 수 없다고 하여도, 분명한 사실은 '모나리자'라는 그림이 예술적 텍스트로써 갖는 범위는 분명할 것이다. 가령 '모나리자' 그림을 금박 장식한 액자로 표구를 하던 혹은 갑싼 나무 액자로 표구를 하던 '모나리자'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액자가 아니라 액자 안에 있는 그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액자 안에 있는 예술작품의 본질을 에르곤(ergon)이라고 한다면 액자 혹은 액자틀은 그것의 주변적인 것에 불과한 파레르곤(parergon)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예술작품의 본질이 에르곤이라면 파레르곤은 그저 일종의 장식(l'ornement)일 뿐이다. 장식은 예술작품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효율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파레르곤은 예술작품의 안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바깥에 속하는 것이다. 가령 그림의 틀이나 조각품의 휘장, 건물의 기둥 등은 예술작품의 주변적인 장식에 불과한 것이지 본질적인 요소가 아닌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칸트를 포함한 전통적인 사상가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여기서 데리다가 주목하는 것은 예술작품의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는 대표적인 근대 사상가인 칸트의 경우 독특한 불일치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칸트는 파레르곤을 비본질적인 것, 즉 예술작품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취급하면서도 동시에 예술작품과 무관하지 않음을 은근히 인정하고 있다. 가령 그림의 틀은 그 자체로써는 예술작품과 무관하지만 어떤 그림에 어떤 액자로 표구되냐에 따라서 그림의 느낌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적절한 틀은 예술작품의 가치를 높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파레르곤이 완전히 작품과 무관한 것은 아닌 셈이다.
이런 논의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파레르곤은 결코 예술작품의 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고 데리다는 믿는다. 가령 똑같은 영화라고 하더라도 좋은 음향시설과 조명장치가 있는 영화관에서 보는 것과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좋은 음향시설과 조명장치는 영화라는 텍스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지 몰라도 그것 때문에 영화의 의미가 완전히 다를 수 있다. 똑같은 음식도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맛 자체가 틀려지는 것도 한 예가 될 수 있겠다. 말하자면 파레르곤은 전통적인 기준에서 볼 때 분명히 텍스트 바깥에 있는 것이지만, 사실상 텍스트의 의미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요소가 될 수 있으므로 결코 외적인 것이 아니다. 파레르곤은 그림의 액자틀처럼 텍스트의 안과 밖의 경계를 가르는 '틀' le cadre이다. 그런데 '틀' 자체는 정작 텍스트의 안과 바깥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경계이다. 데리다의 말을 들어보자.
"파레르곤은 에르곤, 즉 완성된 작품에 반대되며, 옆에 있으며, 동시에 부착되어 있지만 어느 한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작품 구성에 관여하고 작품의 구성요소로 작용한다. 바깥도 아니고 안도 아닌 것, 경계의 변두리에서 맞대어 있을 때는 아주 유용한 나무로 된 장식품 같은 것. 이것은 무엇보다도 경계(l' -bord)이다."
말하자면 파레르곤은 예술작품의 내부에도 있지 않으며 외부에도 있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안과 바깥을 구분짓는 경계이다. 원이나 사각형을 이루고 있는 경계선이 그 도형의 내부에 속하는지 혹은 바깥에 있는 것인지 결정할 수 없듯이 경계로써 파레르곤 역시 그 성격을 결정지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모순적이고 애매한 파레르곤의 성격에 데리다가 굳이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데리다는 파레르곤이 예술작품의 안이나 바깥에 속하지 않는 경계 자체임에 주목함으로써 오히려 예술작품 자체가 하나의 파레르곤으로써 안과 바깥의 경계를 갖지 않은 모호한 성격을 지닌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신인상주의 화가 조르주 쇠라(George Seurat)는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서 그림의 틀 부분까지 색점을 찍음으로써 에르곤과 파레르곤(틀)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트리고 있다.
만약 예술작품의 의미가 텍스트 내에 있는 것도 아니고 텍스트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니라면 당연히 그것들이 얽혀지는 중간에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예술작품 자체는 텍스트의 안과 바깥의 구분 자체가 허물어진 경계 자체일 뿐이다. 이 경우 예술작품의 의미는 텍스트 속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얼마든지 가변적일 수 있다. 말하자면 텍스트를 구성하는 어떤 고정된 의미도 쉽사리 해체될 수 있는 것이다.
데리다가 파레르곤에 관한 논의는 예술작품의 의미가 어떻게 결정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너머서 미학의 본질에 관한 문제제기로 이어진다. 가령 파레르곤의 논의를 영화 이론에 적용한 Peter Brunette와 David Wells는 데리다의 논의는 "미학의 대상이란 예술 작품의 안과 바깥 사이의 경계 자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학의 문제를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압축하자면 파레르곤의 논의는 바로 그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데리다의 대답을 함축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칸트로 돌아가보자. 칸트는 미를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초감각적인 이념(Idee)을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하였다. 말하자면 미란 눈에 보이지 않는 초감각적인 이념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눈에 드러난 감각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아름다움이란 눈에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이란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칸트는 『판단력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에서 미의 규정을 네 가지의 계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칸트가 말하는 미의 네 가지 규정은 '무관심성'(Gleichg ltigkeit), 보편성(Allgemeinheit), 합목적성(Zweckm igkeit), 필연성(Notwendigkeit)이다. 이 규정들 중 데리다는 세 번째의 규정에 주목한다.
칸트가 세 번째의 규정, 즉 합목적성을 미의 필수불가결한 계기로 간주한 이유는 이러하다. 만약 어떤 대상에 대해서 우리가 무엇인가 형식적인 조화나 균형이 없다면 그것에 대해서 미감을 느낄 리가 없을 것이다. 어떤 대상을 볼 때는 아름답다고 하면서 다른 대상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면 그 차이는 전자, 즉 아름다움을 느끼는 대상이 어떤 합목적적인 질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칸트가 합목적성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잠시 살펴보자.
"목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 선험적 규정에 따라 정의하자면, 목적이란 어떤 대상의 원인이 되는 개념이다. 즉 그 대상의 존재 이유이다. 그리고 이 개념이 대상과 갖는 인과적 관계가 바로 합목적성인 것이다."
한 마디로 어떤 대상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는 성질이 합목적성이다. 가령 비행기의 날개는 날기 위한 비행기의 목적으로 볼 때 합목적성을 지닌다. 책상에 붙은 네 개의 다리 역시 책상 상판을 지탱하기 위한 목적과 관련해 볼 때 합목적적인 것이다. 따라서 합목적성이란 항상 어떤 목적을 전제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칸트는 여기서 재미있는 지적을 한다. 미적 대상은 합목적성은 지니되 결코 현실적인 목적이 전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적 대상에서 현실적인 목적을 전제할 때 그것은 미적 규정의 첫 번째 계기인 '무관심성'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떤 화려한 요리를 보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치자. 그 느낌이 든 것은 요리가 인간의 미각을 위한 것이라는 현실적 목적(혹은 관심)때문이라면 결코 미감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빨리 먹어치우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이러한 감정은 미감과 무관하다. 미감은 오히려 요리의 현실적 목적을 무시할 때 생기는 것이다. 말하자면 대상에 대해서 사심 없는 관조를 할 때 미감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칸트는 미적 쾌감의 발생은 무관심으로부터 나온다는 근대 경험론 미학의 전제를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어째든 칸트는 미적 대상이란 합목적성은 있되 실제로 목적은 없어야 한다는 괴변을 늘어놓는다. 그래서 그는 미감을 발생시키는 미적 합목적성이란 '목적이 없는 합목적성'(Zweckm igkeit ohne Zweck)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만들어낸다. 또 그는 이런 합목적성은 실재적인 목적을 전제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다만 '주관적인 합목적성'(die subjektive Zweckm igkeit)에 불과한 것이라고도 정의한다. 하지만 과연 목적이 없이 어떻게 합목적성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합목적성이라는 개념의 정의 자체가 이미 목적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는 말 자체가 논리적인 모순일 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목적을 전제할 경우에 무관심성에 위배되므로 또 모순에 빠지고 만다. 결국 어느 쪽도 모순을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칸트는 이와 같은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는 모순적인 개념을 설정하고 그것을 정당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데리다가 보기에 칸트의 이러한 모순은 칸트 미학의 약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칸트 미학의 최대 장점일 것이다. 왜냐하면 미라는 것 자체가 모순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모순은 회피되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미 자체의 존재방식, 혹은 모든 텍스트의 존재방식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미의 본질은 바로 '목적 없는 합목적성'(le finalit sans le fin)이 아니라 '없는'(sans, ohne)이라는 전치사 자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미'라는 것은 실제로는 눈에 보이지 않고 결여된 것이나 눈에 보이는 것처럼 느끼는 어떤 유령적인 실체이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대상이 아름답다고 느껴질 때 그 아름다움의 기원이 어디일지 생각해 보라. 대상 자체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의적인 주관적인 환상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미라는 것은 바로 부재하면서도 현존하는 모순적인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의미이면서도 무의미인 것이다. 다시 데리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어떤 지각으로도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것을, 이 자체가 속해 있지 않는, 이 자체와 전체계도 아무 관련이 없는 것에 충만한 전체계를 표시하는데, 이러한 부재의 흔적이 바로 미의 기원이다. 바로 이런 특징에 근거해서만 아름다움이 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미는 체계 안에도 그리고 체계 밖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부재(없는,sans)는 보이지도, 지각되지도, 느껴지지도 않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의 어떤 부분 및 목적은 존재하고, 이것이 미이다. 이것이 미를 만든다."
말하자면 아름다움은 어떤 실체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특정한 틀에 의해서 미리부터 규정지어질 수도 없다. 그렇다고 어떤 틀 자체를 완전히 결여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미란 부재하면서도 현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의미와 의미의 경계 자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예술작품이 텍스트의 안과 밖의 경계를 흐트러트리는 경계 자체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은 항상 의미와 무의미가 서로 자유롭게 넘나든다. 만약 그러한 자유로운 넘나듬, 즉 자유로운 유희가 통제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예술작품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감상자의 자유이지 대상이 구속력을 가지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가 부재와 현존의 모순이듯이 바로 예술작품은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 자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은 어떤 독해의 가능성도 열려진 데리다의 텍스트 개념에 가장 부합되는 개념이다.
3. 해체론적 텍스트로써 커트 코베인의 음악
커트 코베인의 음악이 데리다의 텍스트 혹은 '미'라는 경계로써의 성격을 어떻게 드러내는지 가사의 측면과 음악적 형식의 측면 모두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우선 문학적 텍스트인 가사의 측면에서 코베인의 곡들을 살펴보자.
그의 가사가 담고 있는 내용들은 모호하며 심지어 모순적이다. 말하자면 어떤 일관된 서사(narrative)같은 것은 아예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가사들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억지로 추스려 본다면 뭔가에 대한 불만이 가득 찬 사람이 자신의 통제력을 벗어난 상태에서 거침없이 내뱉는 무의미한 외침처럼 분노만을 의미하는 듯하다. 그는 가사에서 스스로 자신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 외치기도 한다. 가령 "온 어 플레인"(On a Plain)에서 "어느 곳에선가 예전에 이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 꿈속에서 내 기억들이 저장되어 있어. 염병할 지금 내가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것이야?"라는 그의 고백은 자신의 말들이 스스로 정리되지 않은 모호한 어떤 것임을 드러낸다.
코베인의 노래 가사 자체가 무의미와 의미의 경계를 흐리는 모호한 얘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간혹 그가 의미라는 것 자체에 대한 철학적인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에어로 제플린>(Aero Zeppelin)에서 코베인은 사랑에 대한 의미를 이렇게 규정한다. "네가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면 사랑을 하는 이유는 뭐야? 네가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면 사랑을 하는 이유는 뭐야? 사랑의 의미는, 만약 그런 것이 있기나 하다면, 범죄야." 여기서 사랑에 대한 코베인의 정의는 '범죄'로 규정되고 있다. 그러나 그 문장을 전체 맥락에서 이해하자면 그것은 사랑에 대한 어떤 일관된 사전적 규정이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의 뜻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어떤 의미도 그것과 정반대의 것으로 정의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의 의미가 결국 그 반대의 의미와도 통하여, 그렇게 본다면 결국 무의미한 것이다.
만약 언어가 하나의 완고한 뜻을 담지 못하고 그 정반대의 것을 동시에 표현하거나 혹은 오락가락 한다면 그것은 정신분열증 환자의 언어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정신분열증적 특성을 보이는 것이 커트 코베인의 가사이다. 가령 누군가가 당신을 너무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당신을 죽일 만큼 증오한다고 말한다고 치자. 우리는 그 사람에게 당연히 위협을 느낄 것이며, 그를 정신분열증 환자 혹은 편집증 환자로 취급할 것이다. 너바나의 대표곡 중 하나인 <컴 애즈 유 아>(Come As You Are) 속에 나타난 이 부분은 여지없이 그의 정신 상태를 잘 드러내고 있다. "내 모습 그대로 와, 친구로써 그리고 오래된 적으로써. 천천히 해, 서둘러." 또 마약환자의 환각 상태를 다루고 있는 <리듐>(Lithum)에서는 "난 널 좋아해. 난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 거야......널 사랑해. 난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 거야. 난 너를 죽여버릴 거야." 이 가사들을 보면 코베인은 의심의 여지없는 정신분열증 환자 내지 편집증 환자이다. 그리고 커트 코베인 자신이 <테리토리얼 피싱>(Territorial Pissing)에서는 편집증이란 용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그것에 대한 문제를 극히 편집증적인 스타일로 다루고 있기도 하다.
그의 가사를 하나의 텍스트로 간주한다면, 그 텍스트는 의미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운 텍스트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예 어떤 일관된 의미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일 지도 모른다. 바로 이런 성격 때문에 그 텍스트는 독특한 성격을 갖는다. 그것은 마치 광인의 말처럼 의미파악이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텍스트는 안과 밖, 의미와 무의미를 넘나드는 독특한 텍스트인 것이다.
물론 이런 입장에 대한 반박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말하자면 코베인의 이런 모순된 내용들 자체가 일종의 통일된 메시지를 띠고 있다는 식의 주장이다. 확실히 코베인의 가사들이 논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어떤 분명한 통일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식의 해석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많은 너바나의 팬들이나 언론들은 그의 가사들이 그 시대의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을 담고 있으며, 당시 X세대들의 불만을 대변하고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야말로 그의 가사가 갖는 텍스트적 의미를 정반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코베인 자신의 메모나 인터뷰 등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그는 결코 당시 새로운 세대를 대변하고자 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그렇게 몰아가고 있는 매스컴을 증오하였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것을 은근히 즐겼다. <날 강간해 봐>(Rape me)라는 노래 제목에서 강간의 주체를 그는 매스컴으로 암시하고 있다. 매스컴에 대해서 정면으로 나를 강간해 보라고 외치는 것은 그것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사실 코베인은 매스컴에 대해서 증오와 애착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는 매스컴이 없이는 자신의 음악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매스컴이 자신의 음악에 대해서 과도한 의미를 부과하는 것에 대해서 부담감과 동시에 거부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코베인의 음악에 대해서 가장 진실에 가깝게 얘기하자면 Duane R. Fish의 주장처럼 "코베인의 노래는 한 세대의 증오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개인적인 분노의 발산일 뿐"이라는 해석이 더욱 타당하다.
결과적으로 볼 때 문학적 텍스트로써 커트 코베인의 노래 가사들은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 자체를 넘나들며 그것들을 가로지른다. 말하자면 데리다가 말하는 파레르곤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코베인의 가사들은 의미의 부재이기도 하고 또 다르게 보자면 그런 부재가 어떤 다른 것에 의해서 잠정적으로 채워지고 있는 흔적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의 완전 결여가 아닌 이런 자유로운 전이야말로 데리다의 '차연'(差延, diff rance)의 개념을 가장 잘 드러내는 해체론적 텍스트인 것이다.
그런데 커트 코베인의 노래가사뿐만 아니라 그의 음악 형식적 특성들 또한 해체적론적 텍스트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너바나의 음악은 기존의 대중 음악, 좁게 보자면 너바나의 음악이 속한 록 음악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었던 독특한 너바나만의 음색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음산한 것 같으면서도 명쾌한 분위기, 단조적인 느낌이면서 결코 단조가 아닌 장조 음색, 사이키델릭하면서도 현실적인 느낌, 불협화음 같으면서도 어떤 조화로움을 느끼는 협화음 등 그 자체 모순적인 음색이다.
말하자면 노래 가사가 마치 광인의 중얼거림 같으면서도 어떤 의미가 느껴지는 모순적인 텍스트이듯이, 그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음악 역시 정상적인 소리를 벗어난 몽환적이고 정신분열증적인 뉘앙스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아름다운 선율을 함께 느끼게 만든다. 이런 면에서 너바나의 음악은 바로 그 가사와 너무나도 잘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음악적 특성을 나타내는 너바나 음악의 독특한 음악적 구조가 어떤 것인지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우선 너바나의 음악은 기존의 음악이 협화음을 지향하고 불협화음이나 소음을 배제하는 것과 달리 불협화음 혹은 소음 자체를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너바나의 음악은 다분히 펑크 록(punk rock)을 계승하고 있다. 1970년대의 펑크 음악은 의도적으로 소음을 사용함으로써 기존의 음악에 대항하려 하였다. 그것은 곧 기성의 질서에 대한 반항을 의미하는 것이며 음악적으로 사회에 대한 저항감을 표시하는 한 형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커트 코베인 역시 협화음에 집착하지 않고 불협화음이나 소음에 가까운 소리들을 즐겨 사용한다. 예를 들면 그는 기타를 일부러 반음이나 한 음을 낮게 조율하였다. 가령 <리듐>(Lithum)은 반음을 낮게, <드레인 유>(Drain you)는 한 음을 낮게 조율하였다. 그리고 <스멜즈 라이크 틴스프리트>(Smells Like Teenspirit)는 공연 앨범에서는 반음 낮게 조율하고, 정규 음반에서는 한 음 낮게 조율하였다.
이렇게 조율을 할 경우 다른 악기들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다. 말하자면 어떤 불협화음적 요소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의 통일된 사운드가 아닌 소음의 분위기를 창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관습과 배치되는 것이다. 하지만 커트 코베인이러한 관습적 탈피를 1970년대의 펑크 음악처럼 사회적 저항의 표현으로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음악은 다만 그의 내면적인 세계, 말하자면 거의 정신분열증에 가까운 의미와 무의미가 넘나드는 몽환적인 세계를 음울하게 표현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협화음을 음악적인 음으로 간주하고 이외의 것을 소음으로 간주하는 전통적 기준으로 보자면, 협화음도 아니고 소음도 아닌 동시에 화음이면서 소음인 그런 음악인 것이다.
둘째로 화음 진행의 측면에서 볼 때 그의 곡들은 간혹 기존의 관습적인 진행을 벗어난다. Alan Romax는 1600년경 이후부터 화성 중심의 다성 음악인 호모포니 Homophony 체계가 정착된 이후, 모든 곡이 자연스럽게 조화에서 긴장과 불안으로 그리고 다시 조화라는 화성 진행 형식을 따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것은 서양 음악의 가장 보편적인 마침꼴 형태인 'IV도(버금딸림조)-V도(딸림조)-I도(으뜸조)'의 형태를 낳은 것이다. 그런데 너바나 곡들의 일부는 서양 음악의 이런 전통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예를 들면 <어바웃 어 걸>(About a Girl)은 사장조(G Major)의 곡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E5-Em11-G 화음 진행이 반복된다. 또 <컴 에즈 유 아>(Come As You Are)는 가장조(E Major)의 곡으로 F#m-E5도의 화음 진행이 반복된다.
이런 3도 진행의 화음 전개는 우리에게 어떤 갈등과 그것의 해결감을 주지 못함으로써 정상적인 마침의 느낌을 주지 않는다. 말하자면 어떤 갈등이 생겨나서 그것이 증폭되어 마침내는 해결되는 서사구조가 전혀 없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저 밋밋한 전개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이 두 곡은 기존의 관습적인 화음 진행과 달리 전혀 다른 유형의 긴장감이나 폭발적인 힘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다. 뭔가 조화롭지 않은 3도 화음의 계속적인 반복적 진행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긴장감이나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거기에다가 무의미와 의미를 넘나드는 모호한 가사의 메시지들, 기존의 음악적 목소리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코베인의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는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음악적 사운드를 구축한다. 확실히 이러한 진행은 기존의 서양 음악적 관습으로 보자면 그 틀(경계)을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틀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너바나의 음악은 여전히 관습적인 체계와 화성의 규칙 내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바나의 이런 독특한 음악 형식적 특성은 서양 음악의 관습적 틀 내부에 있다거나 혹은 외부에 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오히려 바로 그 경계 자체인 것이다.
끝으로 너바나 음악의 또 다른 형식적 특성은 그 음악이 장조와 단조의 엄격한 분할 체계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서양 음계의 체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너바나의 곡들은 대부분 단조도 아니고 장조도 아닌, 거꾸로 말하자면 장조이면서 동시에 단조인 그런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한 분위기를 내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구조적 이유는 다음과 같다. <리듐>(Lithum)이라는 곡의 첫 8마디를 예로 들어보자. 전주부분이 끝나고 가사가 시작되는 첫 8마디의 화음 진행은 다음과 같다. 즉, 화음은 E-G#5-C#5-A5-C5-D5-B-D로 진행된다. 이 곡은 관습에 따라 굳이 규정하자면 마장조(E Major)의 곡이다. 그런데 분명 앞의 네 화음 E-G#5-C#5-A5은 마장조의 진행이지만, 이후 C5-D5-B-D의 진행은 마단조(E Minor)의 진행이다. 말하자면 장조와 단조가 서로 넘나드는 것이다.
이렇게 장단조의 자유로운 넘나듬이 가능한 이유중의 하나는G#5, C#5, A5, C5, D5 등과 같은 피프쓰 코드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C5화음은 C화음과 구성음이 다르다. C화음이 도,미,솔로 구성된다면 C5화음은 두 번째 음이 생략된 도,솔로만 구성된다. 이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생략된 두 번째 음이 C장조 화음이냐 C단조 화음이냐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C(장조)화음은 도,미,솔로 구성되며 C단조 화음은 도,미 ,솔로 구성된다. 말하자면 미냐 미 이냐에 따라서 장조인가 단조인가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피프쓰 코드의 경우 그것을 결정하는 음이 생략되기 때문에 잠재적으로 장조와 단조의 가능성 모두를 지니는 것이다. 이런 코드의 사용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그것은 장조와 단조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장치가 되는 것이다.
물론 장단조의 자유로운 넘나듬이 너바나의 곡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자유롭게 장단조를 넘나듬으로써 조성의 결정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확실하게 너바나 음악의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서양 음악의 관습은 장조와 단조의 경계를 분명하게 구분 짓고 그러한 구분으로부터 음악의 의미를 확정하려 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커트 코베인의 음악은 그러한 의미를 발생시키는 장조와 단조의 경계를 넘어서고 그것에서 발생하는 의미들을 해체시키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음악이 의미의 전복을 위해서 혁명을 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음악은 단지 장조와 단조의 구분을 통한 음악적 의미를 발생시키는 그 경계 자체에 놓여있는 것이며, 그 경계 자체인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의 음악 형식적 특성을 볼 때 커트 코베인의 음악은 그 문학적 텍스트의 측면에서와 마찬가지로 의미와 무의미를 가로지르는 일종의 경계임이 드러난다. 말하자면 데리다가 말하는 '텍스트'인 것이며, 드러나면서 동시에 드러나지 않은 일종의 이율배반적인 '아름다움' 자체인 것이다.
4. 결론에 대신하여
철학자 들뢰즈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이야말로 자신의 철학을 보여주는 철학적인 회화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어떤 면에서 보자면 자신이 말로써 드러내고 싶지만 한계가 있는 것을 눈앞에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와 유사한 맥락으로 보자면 데리다의 '텍스트' 개념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아니 들려주고 있는 음악은 바로 커트 코베인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데리다는 커트 코베인의 음악을 언급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가 커트 코베인을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다. 커트 코베인의 음악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개념적 틀이 있다면 그것은 데리다의 텍스트 개념 혹은 미에 대한 개념 규정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거꾸로 뒤집으면 커트 코베인의 음악이야말로 난해난 데리다의 '텍스트' 개념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커트 코베인의 음악으로 데리다의 텍스트론 전체를 설명할 수도 없을 것이며, 데리다의 텍스트론만으로 커트 코베인의 음악 세계를 전부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학적 텍스트로써나 음악적 텍스트로써 커트 코베인의 음악을 분석할 경우 데리다의 텍스트 개념만큼 더 유용한 개념적 틀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확신은 그대로 유지된다. 이 글은 텍스트로써 커트 코베인의 음악과 가사를 분석하는데 제한되어 있음을 다시 한 번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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