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에 있어서 시와 언어
- 박 유 정*
<한글요약>
나는 이 글에서 {예술작품의 근원}과 {휠더린과 시의 본질}을 통해서 언어의 본질이 아니라 본질의 언어를 말하고자 하였다.
하이데거는 1935년 그의 {예술작품의 근원}과 1936년의 {휠더린과 시의 본질}에서 시와 언어의 문제에 천착한다. {존재와 시간}에서만 해도 언어는 '인간의 언어'라는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작품들에 와서 비로소 '존재의 언어'를 이야기하기에 이른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시의 본질은 진리의 수립이다"고 하였고 {휠더린과 시의 본질}에서는 "시는 언어에 의한 존재의 건설이다"고 한다. 따라서 시는 언어의 본질이다. 그리고 "언어도 그 본질적 의미에서 시이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언어가 비은폐되는 것은 시작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의 본질은 언어의 본질이며 언어의 본질은 시의 본질이다.
따라서 언어가 인간에게 위험한 재보(Gut)이고 그것이 하나의 대화인 것은 바로 언어의 시작(Dichten)하는 본질로부터 파악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는 시인이 신들의 눈짓에 의해 들려주는 것이며 전설 속에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지니고 사는 언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이며 이해의 지평이며 따라서 신적인 것이다.
1. 서 론
시란 무엇인가? 시는 운문으로 쓰여진 것이고 일상어로 쓰여진 산문과 다른 것인가? 그러나 산문시도 있지 않은가? 시의 형식으로 시를 규정하는 것은 부족하다. 그러나 시가 독특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시의 이러한 점 때문에, 가령 하이네의 유명한 시구 "Du bist wie eine Blume"를 "You are like a flower"라고 번역하면 원래의 리듬과 색깔, 분위기, 상징, 뉘앙스가 사라져 버린다. 따라서 시는 시인이 쓴 언어 그 자체로 보이고 그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 같다. 이러한 점을 말라르메는 "시는 사상(思想)으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言語)로 쓰여진다"고 하였다.
시가 언어 그 자체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그때 언어는 무엇인가?
우리는 말을 한다. 늘 말하고 끊임없이 말한다. 심지어 말을 하지 않을 때에도 말하는 것 같다. 세계가 말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세계는 말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러면 다시 이 말, 언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언어 속에서 언어로 말하며 산다. 그러나 언어가 무엇인지 알고 있기는 한데 잘 잡히지 않는다. 마법 같다. 마법이 아니고서야 다른 것은 다 언어로 설명이 되면서 그렇게 설명을 잘하는 언어 자신은 무엇인지 설명을 못하니 말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에 대해 대답을 한다. 언어는 그 본질에 있어서 시라고 말이다. 그리고 시에서 언어의 근원적이고 순수한 형태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존재와 시간}에서 언어가 현존재인 실존에서 경험되는 실존론적 말하기(Reden)였다. 이때의 말하기(Reden)는 "세계-내-존재가 처해있는 이해성을 의미에 따라 분절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존재와 시간}에서 언어가 존재를 이해 연관으로 분절하는 것으로 파악되었기 때문에 언어가 존재와 다른 어떤 것, 즉 '인간의 언어'였다면, {철학에의 기여}나{예술작품의 근원}으로 오면서 점차로 존재의 집인 언어로 파악되면서 언어와 존재가 동일한 것의 다른 이름인 것으로, 즉 '존재의 언어'로 규정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그는 언어의 본질(Wesen der Sprache)을 탐구한다기보다는 근원적으로 본질의 언어(Sprache des Wesens)을 탐구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언어에 대한 언어학의 학문적 성과와 철학에서 언어를 바라보는 언어관은 언어를 대상언어(Object language)에 한정시키고 있다. 따라서 언어는 인간의 여타 도구들과 마찬가지의 수준에서 탐구되었고 그럼으로써 언어의 근원은 2500년 동안 가리워진 채 번잡한 분석 뒤에 실체를 상실하게 되는 것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이데거가 언어의 근원적 형태를 시에서 보고 인간 존재의 형식을 드러내 보이는 그의 시도는 우리에게 잊혀진 존재의 근원을 성찰하게끔 길어 열어 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깊다. 따라서 나는 이 글에서 하이데거의 언어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1935년의 {예술작품의 근원}과 1936년의 {휠더린과 시의 본질}을 중심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시
하이데거는 1935년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시는 언어의 본질이며 시는 언어에 의한 존재의 건설이라고 한다. 그리고 1년 뒤인 1936년 {휠더린과 시의 본질}에서 모든 경영(Geschäft)가운데 가장 무책임한 것이 시이고, 언어의 본질은 시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시는 산문과 형식적으로 구별되는 운문이라거나 또는 문학의 한 장르로서의 시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우리의 일상적인 시 이해와 편견을 괄호로 묶고 판단중지한 상태에서 보면 시는 근원적으로 언어의 본질이라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는 사물이 덮고 있는 친숙의 베일을 벗겨낸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세계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그 세계를 더 이상 경험하지 못한다. 사물을 친숙의 베일을 벗고 만나려면 그것을 새롭게 드러내 보여 주어야 한다. 시는 종교의 계시처럼 본래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여준다. 시는 의사전달의 충동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친숙의 베일에 가려져 있어 우리가 보지 못하는 실재(實在)를 시인이 발견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시는 시인의 주관적 산물이 아니라 시인 자신이 전체적 배경에 참여함으로써 얻어낸 주관과 객관이 융합된 산물이다.
이렇게 보면 시에서 말하는 사람은 단지 시인인 것이 아니다. 시는 시인의 음성이 아니면서 시인의 입을 통해 울려나오는 음성이 있다. 이것이 시대와 장소, 취미와 능력이 다른 독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어떤 시나 구절에 찬사를 보내는 이유이다. 이러한 시들은 바하의 주제나 베토벤의 선율만큼이나 언제 발견되었는가를 따져볼 필요도 없이 영원히 어딘가에 존재해온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키츠의 시에서 "들리는 선율은 아름답지만, 들리지 않는 선율은 더 아름답다(Heard melodies are sweet but those unheard/Are sweeter)"에서 이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그러면 이 음성은 누구의 음성인가? 시에서 나타나는 빈도는 가장 적지만 가장 멀리까지 울려 퍼지며,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잘 들릴 수 있고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이 음성은 누구의 음성인가? 융의 말처럼 이것은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무의식의 목소리 혹은 인류의 목소리일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언어의 기교를 가진 숙련된 시인이라 해도 이 기교를 초월한 것을 말하려고 할 때 이 음성을 기다리게 된다. 결국 시인이 시에서 배열하게 되는 말은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다. 단어는 도구가 아니라 가장 숭고한 의미에서 내적인 실재가 외부로 나타나는 증거이다. 이 침묵하는 바다와 같은 무의식의 음성이 인간의 한계와 결합해서 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시인이 추구하는 것은 주관적인 내부 우주이다. 유형의 객관적 우주는 과학자의 탐구 영역이다. 과학자는 한 인간으로서 감정계와 경험계를 시인과 공유하지만, 적어도 과학을 연구하는 동안만은 감정과 경험의 세계를 떠나서 객관적 우주 안에서만 살아야 한다. 과학자는 감정을 제거해야 한다. 그는 현상계가 의식에 비치기 이전의, 다시 말해서 외부 우주가 감각과 정서의 세계에 의해 변형되기 이전의, 또는 풍경이 굴절에 의해 변형되기 이전의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예술작품인 시도 또한 하나의 인식 방법이다. 그러나 시는 과학과는 다른 인식 방법이다. 시는 과학과는 다른 세계, 즉 완전히 객관적인 우주와는 반대되는 내부의 경험의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
과학의 진술은 풍문,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로부터 들려오는 소문이다. 시인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알고 있었으나 지금은 잊고 있는 어떤 것이다. 시인이 가르쳐 주는 지식은 우리의 세계, 즉 우리가 들어가 살도록 운명지어진 세계 그리고 우리가 들어가 살 특권을 가진 세계에 관한 지식이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에 관한 지식이며, 인간의 조건과 인간의 상황에 관한 지식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의미에서 언어의 본질인 시를 이야기한다. 시는 언어의 형태, 즉 특별한 언어 형태를 가지고 있다. 시가 특별한 언어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이데거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바로 유희와 같은 언어로 쓰여진 시가 존재를 건설하는 언어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시는 시이고 언어는 언어인 것이 아니라, 시야말로 언어적인 존재의 건설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예술작품의 근원}과 {휠더린과 시의 본질}에서의 시에 대한 하이데거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논해 보고자 한다. 즉 1) 시는 모든 경영(Geschäft) 가운데 가장 무책임한 것이다. 2) 시의 본질은 언어의 본질이다. 3) 시는 언어에 의한 존재의 건설이다.
1) 시는 모든 경영 가운데 가장 무책임한 것이다
(Dichten: Diss unschuldigste aller Geschäfte)
하이데거는 {휠더린과 시의 본질}에서 1799년 휠더린이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면서 시작(詩作, das Dichten)은 "모든 경영(Geschäft) 가운데 가장 무책임한 것"이라고 명명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시작(詩作)은 절도있는 '유희(Spiel)'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아무 것에도 구애됨이 없이 자기의 형상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상상의 영역에 탐닉한다. 이 유희는 언제나 어떠어떠하게 책임을 지우는 결단의 엄숙성과는 달리 완전히 무책임하고 단순한 이야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동시에 아무 작용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또 직접 현실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그 현실을 변화시키는 행동과도 무관하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시는 꿈과 같은 것이긴 할지언정 현실은 아니며, 언어 가운데에서의 유희이긴 하나 엄숙한 행위는 아니다. 시는 무책임하고 무력하다"고 말한다.
단순한 언어보다 더 무책임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그가 시를 "모든 경영(Geschäft) 가운데 가장 무책임한 것"이라고 함으로써 시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것으로써 시의 본질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하는 지침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시는 이러한 언어의 영역에서 언어를 소재로 한 창작이 되는 것이다.
2) 시의 본질은 언어의 본질이다(Das Wesen der Dichtung muß daher aus dem Wesen der Sprache begriffen werden)
우리의 길잡이로서 시가 "모든 경영 가운데 가장 무책임한 것"이라고 함으로써 언어에 도달하였다. 시의 활동영역은 언어이다. 따라서 시의 본질은 언어의 본질에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언어의 본질인 시는 모든 예술의 본질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진리는 시작(詩作)되면서 존재자의 밝힘과 은폐로 생성된다. 모든 예술이 존재자 그 자체의 원리를 도래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본질에 있어서 시작(Dichtung)이다".
이러한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언어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언어는 일차적으로 전달되어야 하는 것의 음성적, 문자적 표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열려진 것과 은폐된 것을 실재와 대응되게 사유된 것으로서 단어화하고 문장화할 뿐 아니라, 어떤 존재자를 그 존재자로서 처음으로 열려진 곳 가운데로 가져온다.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곳, 즉 돌이나 식물이나 동물의 존재 가운데에는 존재자의 개시성은 없으며 따라서 비존재나 공허의 개시성도 없다. 언어가 존재자를 명명할 때 그 명명 작용이 존재자를 비로소 언어화하고 현상화한다. 그러므로 "본래적 의미에서 언어 자체가 시이다."
3) 시는 언어에 의한 존재의 건설이다(Dichtung ist worthafte Stiftung des Seins)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예술의 본질뿐만 아니라 언어의 본질도 또한 시라고 한다. 그는 언어를 인간에게 존재자가 존재자로서 스스로를 개시해 오는 사건으로 보기 때문에, 언어는 자신을 질료로 하는 포에지, 즉 좁은 의미에서의 시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시이다. 그리고 예술작품 가운데에서 진리가 자신을 수립하는 것 또한 시이다. 그럼 시는 무엇인가? "시의 본질, 즉 시작의 본질은 진리의 수립이다(Das Wesen der Dichtung ist die Stiftung der Wahrheit)". "시는 언어에 의한 존재의 건설이다."
그러면 무엇을 건설하는가? 상주하는 것(das Bleibende)을 건설한다고 한다. 그러나 상주하는 것은 언제나 이미 내 앞에 있는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건설하느냐고 묻는다. 하이데거는 상주하는 것이 부스러지기 쉬운 것이지만 분열되지 않도록 머물러 있게 되어야 하고 혼란으로부터 쟁취되어야 하며, 무한으로부터 비호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휠더린의 시를 인용하여 "그렇게도 빨리 모든 신적인 것은 사라지기 쉽다. 비록 무의미하지는 않을지라도"라고 한다. 그러나 이 신적인 것이 머물러 있다는 것은 "시인의 배려와 봉사에 맡겨져 있다"고 한다.
시가 상주하는 것을 언어에 의해서 건설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의 본질이 언어에 의한 존재의 건설이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시인이 시에서 언어로 말하는 것은 단지 명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자가 그 본질로서 알려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언어에 의한 존재의 건설이다. 존재는 결코 존재자가 아니며 사물의 존재와 본질은 절대로 계량될 수 없으며, 현전하는 것에서부터 이끌어 내어질 수도 없기 때문에 이것들을 자유롭게 창조하고(schaffen) 정립하고(setzen) 증여하지(schenken)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자유로운 증여(Schenkung)가 건설(Stiftung)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시가 존재에 의한 언어의 건설이라는 것은 시인의 말인 시가 자유로운 증여라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현존재가 그의 근거 위에 확고하게 정초하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사물이 사물 그것으로서 신들이 근원적으로 명명되고 말로 불리어지고 그렇게 됨으로서 해서 인간의 현존재는 확고하게 되어서 근거 위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시는 사물 그 자체를 언어에 의해서 그것으로서 있게 하고 그 근거를 갖게 하는 존재의 건설이다.
3. 언 어
언어란 무엇인가?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또는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을 외부로 표현하는 수단이다. 언어가 인간의 유용한 수단이라는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오래된 것이다. 19세기 이래로 언어에 대한 철학적 탐구가 대두되면서 훔볼트는 언어는 인간의 내부 형식을 외부 형식으로 나타내는 인간의 내적인 요구이며 내적인 능력의 발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에 의해 연구된 구조주의 언어학은 랑그(langue)와 파롤(Parole)을 구분하면서 언어의 동시성과 공시성, 제 1원리로서 기호의 자의성(The Arbitrary Nature of the Sign)을 이야기하였다. 이러한 19세기의 언어철학적 탐구의 전통은 20세기 현대 영미의 경험주의 전통에서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에 이르게 하였고 현대 철학의 공통적인 주제들 중의 하나로서 언어의 문제를 대두시키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언어는 사전의 상호 합의이며, 마르틴 부버의 말을 빌리자면 언어는 '나-너(Ich-Du)'의 관계를 표현하는 하나의 형식이다. 오직 '나-그것(Ich-Es)'의 관계만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언어가 필요없고 또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언어는 이간시키고 분열을 조장하지만, 침묵은 마지막까지 가장 고귀한 것이다. 언어는 수많은 소자아들로 이루어진 대자아(Self)의 구성 성분들 사이에 공존하는 공통성의 상징이다. 그렇다면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의사소통은 서로 연관된 소자아들의 복합체를 통하여 울려나오는 독백이다. 따라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는 언어 형식인 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의사소통과는 다르다.
하이데거는 언어 철학을 표방하지 않고 언어의 문제에 접근하는 철학자이다. 그는 언어의 근원을 탐구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고 존재의 집으로서의 언어, 본질의 언어를 이야기한다. 언어에 관한 이러한 주장을 시인들의 시를 통해 외견상 매우 산만하게 이야기한다. 이것은 그가 언어를 대상언어로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언어는 존재자가 아니기 때문에 대상화할 수 없고 또한 언어는 인간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그 속에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언어가 말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언어의 본질이 아닌 본질의 언어를 만나게 되는 길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언어는 인간의 존재이고 세계이며 이것은 인간의 깊은 곳에 있는 그것이며 소위 전통이 물려준 생명력이다. 이런 점에서 언어는 인간에게 본질적인 대화이며 시간을 인식하게 하는 위험한 재보(Gut)이다. 언어야말로 하나의 본래적 대화이며 본래적 시간이며 존재의 존재자에로의 속화(俗化)를 수반하는 위험한 재보(Gut)이다. 따라서 언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다. 즉 1) 언어는 가장 위험한 재보이다. 2) 언어는 대화이다.
1)언어는 가장 위험한 재보이다(die Sprache ist das gefährlichste Gut)
인간은 오막살이에 살면서 부끄러워 옷으로 몸을 가리며 무녀가 성화를 지키듯이 정신을 지킨다. 신을 닮은 인간에게는 자유가 부여되었는데 이 자유에 의해서 그는 모든 재보 가운데 가장 위험한 재보인 언어를 얻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창조하고 파괴하고 몰락하면서 영원히 사는 여주인인 어머니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증시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의 휠더린의 시를 인용하면서 하이데거는 "모든 경영(Geschäft) 가운데 가장 무책임한 것"의 영역인 언어가 "모든 경영(Geschäft) 가운데 가장 위험한 것"이라고 한다. 이 둘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를 물으면서 그 이전에 다음과 같이 묻는다. 첫째, 언어는 누구의 재보인가? 둘째 어떠한 의미에서 그것은 가장 위험한 재보인가? 셋째, 도대체 그것은 어떠한 의미에서 재보인가?
하이데거는 우선 인간은 자기가 무엇인가를 증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라고 한다. 증시한다(Zeugen)는 것은 입증한다(Bekunden)는 것이고 입증은 입증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의 현존재를 확증한다고 하는 바로 그 점에 있어서 '존재하는 자'이다." 이 확증(Bekundung)은 인간 존재에 대한 부가적이고 부차적인 표현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 현존재를 함께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무엇을 확증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이 세상에 소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속성(Zugehörigkeit)이라는 것은 인간이 상속자이며 모든 사물을 습득한다고 하는데 있다. 그런데 사물은 투쟁가운데 있다. 이 사물을 투쟁 가운데 분열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그것을 통일시키는 것을 휠더린은 '친밀성(Innigkeit)'이라고 한다. 이 친밀성으로의 귀속(Zugehören zu dieser Innigkeit)이 세계의 창조와 발전을 통해서, 또 세계의 파괴와 몰락을 통해서 확증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존재의 확증 및 인간 존재의 본래적 실현에 대한 확증은 결단의 자유(die Freiheit der Entscheidung)로부터 일어나게 된다. 이 결단은 필연적인 것을 파악하고 자기를 최고 요구의 속박으로 내몬다. 이때 존재자 전체로의 귀속성을 증시하는 존재는 역사(Geschichte)로서 일어난다. 이 역사가 가능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언어가 주어졌다. 따라서 "언어는 인간의 재보이다"라고 하이데거는 설명한다.
그러면 둘째로 어떤 의미에서 언어는 "가장 위험한 재보"인가? 언어가 위험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인 이유는 그것이 위험의 가능성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위험은 존재자에 의한 존재의 위협이다." 인간은 언어에 의해 비로소 개명 가운데 노정되지만 그러나 또한 언어가 존재 상실의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것, 즉 위험(Gefahr)이라는 것이다. 언어가 가장 순수하고 가장 깊이 감추어진 것을 언표하고 그와 더불어 혼란되고 저속한 것까지 표현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 본질적인 언어가 만인의 공동 재산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속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있다. 하이데거는 휠더린의 시를 인용하여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열매가 보다 진부하고 보다 더 흔한 것으로 될 때, 비로소 그것은 인간의 것으로 되는 것이다". 순수한 것과 저속한 것은 다 말로 나타난다. 언어가 끊임없이 제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을 쓰고 나타나기 때문에 순수하게 언명한 자기의 가장 고유한 것을 위협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언어는 인간의 재보인가? 언어는 인간의 소유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그의 경험과 기분을 전달하고 자신을 이해시키는 데 유용한 도구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의 '재보'이다. 그렇지만 언어의 본질은 이해의 도구가 되는 것으로 다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언어의 본질과 만나지 못한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이것은 언어의 본질로부터 나온 하나의 귀결일 뿐이다. 언어는 인간이 다른 모든 것과 더불어 가지고 있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언어가 그 모든 존재자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언어가 있는 곳에만 세계가 있다." 언어가 있는 그 곳에 결단과 활동, 행동과 책임, 자의와 소란, 퇴락과 착란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일어나는 세계가 있다. "오직 세계가 있는 곳에 역사가 있다." 언어는 단지 언어가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재보이며 인간이 역사적인 것으로 존재할 수 있기 위한 보증이다. 언어는 인간이 자의로 처리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최고의 가능성을 좌우하는 생기(Ereignis)이다.
2) 언어는 대화이다(als Gespräch nur ist Sprache wesentlich)
언어가 있는 곳에만 세계가 있고 세계가 있는 곳에 역사가 있다. 언어는 이와 같이 인간의 최고의 가능성의 생기(Ereignis)이다. 그러면 이러한 언어는 어떻게 생기하는가? 하이데거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 인간 - 는 하나의 대화이다. 인간의 존재는 언어에 근거하고 있으나, 언어는 본래 '대화'에서 비로소 생기한다.
그러나 대화는 언어가 실현되는 단순한 방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는 대화로써만 본질적일 수 있다.
인간의 존재는 언어에 근거하고 있고, 언어는 본질적으로 대화이다. 그러면 대화란 무엇인가? 대화는 무엇에 관하여 서로서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의 대화인 것은 서로서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들을 수 있다는 것과 등근원적이다. 인간이 하나의 대화라는 것은 인간은 상호 교환적이라는 것이다.
또 인간은 하나의 대화이고 대화를 통해 하나가 된다. 이 대화라는 언어 위에서 인간은 자신과 일치한다. 즉 인간은 언어를 근거로 해서 하나이며, 따라서 본래적으로 인간 그 자신이다. 대화와 대화의 통일에 인간의 현존재가 걸려 있다.
그런데 휠더린은 "많은 신들의 이름이 불리어진 것은 우리가 하나의 대화이고 서로서로 들을 수 있게 된 이래의 일이다"고 한다. 그는 인간의 언어 능력이 현전해 있고 그것이 행사되는 곳에서 언어의 본질적인 생기인 대화가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하나의 대화인 이래 … "라고 한다. 그러면 언제부터 인간은 '하나'의 대화인가? 인간이 하나의 대화인 것은 '시간이 존재'하는 그때 이후부터이다. 시간이 성립한 이래 그때부터 인간은 역사적으로 '존재'한다. 하나의 대화적 존재라는 것과 역사적 존재라는 이 양자는 그 근원이 같고 서로 공속하는 동일자이다.
언어가 본래적으로 대화로서 생기한 이래 신들은 언어로 표현되고 세계가 나타난다. 그러나 신들이 표현되고 세계가 현상하는 것은 언어가 생기한 결과가 아니라 그것들은 언어와 함께 동시적으로 생기한다. 왜냐하면 신들이 명명되고 세계가 언어로 나타남으로써만 현존재 그 자신인 언어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들이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인간에게 말을 걸어서 인간이 그에 응답하도록 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이 응답은 운명을 책임지는 데서 일어난다. 신들이 인간을 대화로 데리고 온 이래, 시간이 있게 된 이래, 인간 현존재의 근거는 대화이다. 이것이 현존재의 최고의 생기가 언어가 되는 이유이다.
4. 시와 언어
하이데거는 1935년에 쓰여진{예술작품의 근원}에서 "모든 예술은 존재의 진리 자체가 도래하는 장소로서 본질적으로 시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예술이 개방(das Offenheit)을 야기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의 한 가운데에서 모든 것이 일상적인 것과는 다른 개방을 세우게 되는 것은 예술의 시작(詩作)하는 본질로부터이다. 이 개방이 일어나는 곳은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인간에게 보낸 것을 인간이 품고 이것으로부터 자신을 개방하고 던지는 곳에서이다. 예술은 분명히 하나의 개방의 가능성, 만남의 가능성이다.
하이데거는 그리스어 ՁՋՇաՉՁ를 사용하면서 "작품의 효과는 제작활동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작품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존재의 비은폐성의 변화에 있고 이것은 존재의 비은폐성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한다. 어떻게 존재가 전체로서 접근 가능하게 되는가는 비은폐성에 달려 있다. 시에서 드러나는 것은 사건의 발명이 아니라, 존재가 그의 모습을 드러내는 개방이다.
만약 시에서 시작(詩作)되는 것이 개방이라면, 그리고 시가 예술의 본질이라면, 모든 다른 예술들은 좁은 의미에서 시라는 시적인 예술로 환원될 것이라고 이해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하이데거가{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시를 아주 넓은 의미에서 이야기하고 있고 시는 언어 예술을 포함하여 모든 예술의 기본적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언어 예술에 특히 흥미를 가지고 있으며 언어예술을 예술 전체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부여한다. 이러한 생각은 언어를 '의사소통'으로 생각하는 통상적 개념을 극복했을 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언어는 단지 그리고 주로 의사 소통되는 음성적이고 문자화된 표현이 아니다". "언어는 우선 그리고 대부분 존재를 개방으로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 존재를 지칭함(Nennen)으로써 그것이 나타나게 한다. 지칭이 없는 곳에는 개방도 없다.
지칭함을 통해서 존재자는 우선 존재자로서 접근 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존재자가 규정된 존재자로서 인식되고 사용되기 위해서 필연적인 조건이다.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접근 가능하게 하는 이것, 존재자의 존재됨의 이 탈은폐, 이것이 비은폐성이다. 이것은 마치 존재자가 앞에 현존하는 비은폐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은폐는 존재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비은폐를 통해서 인간을 위한 존재가 있다. 이것이 발생하는 방식에 따라서 한 국가의 역사가 생겨나고 그 본질이 물질화된다.
언어로 돌아가자. "언어 자체는 그 본질적 의미에서 시이다. 왜냐하면 언어는 존재가 존재로서 최초로 인간에게 개방되는 사건, 즉 시가 그 본질적인 의미에서 시가 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언어와 시의 관계를 설명해야 한다. 시가 가능하기 위해서 인간은 언어의 영역으로 옮겨가야 하고 언어의 매개를 통해서 그 자신의 존재에 개방되어야 한다. 이 영역 내에서 시는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시는 분명히 존재를 비은폐시키고 언어 속에서 세워진 것을 완성하고 언어가 목표로 하는 것을 완성한다. "예술은 존재의 드러남 속에서의 특별한 시작(詩作)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깨닫지 못하지만 이미 언어 속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예술의 본질은 시이다. 그리고 시의 본질이 진리를 세우는 것, 즉 그 속에서 존재가 나타나는 구체화된 드러남이다. 그리고 예술 작품 속에서 발생하는 것은 진리가 존재하는 뛰어난 방식, 즉 진리가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다. 역사적인 것으로서 예술은 "작품 속에서 진리의 보존을 창조하는 것"이다.
작품 속의 진리를 보존하고 창조하는 것으로서의 예술은 본질적으로 시이다. 이러한 시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1936년, 즉 {예술작품의 근원}을 쓰고 대략 1년 후에 하이데거는 {휠더린과 시의 본질}이라는 강의에서 논하고 있다. 하이데거에게 휠더린은 뛰어난 시인이다. 왜냐하면 그는 시의 본질을 시작(詩作)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휠더린으로부터 5가지를 말하고 그것을 설명하면서 시의 본질과 시인의 본질을 제시한다.
1. 시작은 "모든 경영(Geschäft) 가운데 가장 무책임한 것"(Ⅲ, 377)
2. "그러므로 모든 재보 가운데 가장 위험한 재보인 언어가 인간에게 주어졌다 … 인간이 자기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증시하기 위해서 …"(Ⅳ, 246)
3. "인간은 많이 경험하였다. 많은 신들의 이름이 불리어진 것은 우리가 하나의 대화이고, 서로 서로 들을 수 있게 된 이래의 일이다."(Ⅳ, 63)
4. "상주하는 것은, 그러나 시인이 건설한다."(Ⅳ, 63)
5. "공업(功業)은 많다. 그러나 인간은 시인으로서 이 세상에 산다."(Ⅳ, 25)
2에 대한 하이데거의 설명에서 "역사가 가능하기 위해서, 언어가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진술이 발견된다. 이것은 {예술작품의 근원}에서의 설명과 일치한다. 언어 속에서 인간은 그가 누구인가를 확인할 것이고 언어 속에서 하나의 세계를 구성한다. 하이데거는 언어와 개방의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인간을 존재로서 그의 현존재 속에 포위하고 자극하며 비-존재로서 인간을 속이고 실망시키는 개방에 인간이 노출되는 것은 단지 언어에 의해서이다"라고 말한다. 언어가 없으면 어떠한 존재의 경험도 없을 것이다. 그 속에서 인간의 행위와 경험이 발생하는 개방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언어가 위험한 재보인 이유를 "위험은 존재자에 의한 존재의 위협이다"이라고 말한다. 언어가 위험이 되는 것은 언어가 자유롭고 동시에 고상한 것과 저속한 것이 혼재하며 본질적인 것이 비본질적인 것으로 될 때 모든 사람의 언어로 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예술작품의 근원}의 중심적인 주장과 같다.
언어는 인간이 많은 다른 것들에 덧붙여서 소유하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그 반대로 인간이 존재의 개방성 속에 서 있는 바로 그 가능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단지 언어에 의해서이다. 언어가 있는 곳에서만 세계가 있다. 즉 결정과 작업, 행동과 책임, 뿐만 아니라 자의성과 소음, 퇴폐와 혼동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이 존재한다. 세계가 지배하는 곳에만 역사가 있다. … 언어는 인간의 처리 하에 있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 존재의 최고의 가능성을 처리하는 사건이다.
이런 방식으로 하이데거는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의 언어에 대한 상식적인 이해를 제거하고 언어를 인간 존재의 기본적인 사건으로 만들기를 원한다.
3에서 언어는 그 속에서 신들이 들음을 갖고 세계가 나타나는 대화로서 생각된다. 신들의 명명과 세계의 현현이 언어와 동시적인 것처럼 말할 수 있다는 것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등근원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들의 명명은 그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때에만 가능하다. 이 대화는 시인에 의해 매개된다.
4를 논하면서 하이데거는 "시는 언어에 의한 그리고 언어 속에서의 정립이다"고 한다. 이 생각은 "모든 것을 지지하고 지배하는 것은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존재는 그것이 드러나기 위해서 비은폐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발전한다. 개방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히 '존재'로 불린다. 하이데거는 존재는 인간에게 위임되어 있는 방식으로 있다고 하고 동일한 방식으로 휠더린에게서 천상의 모든 것은 시인이 돌보아야 할 문제로 위임되어 있으며 시인이 본질적인 말을 할 때, 존재는 이 명명에 의해서 그것이 있는 그것으로서 된다고 한다. 즉 시는 언어에 의한 존재의 건설이다.
시는 그것이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 언어를 필요로 한다. 개방을 가능하게 하는 시는 동시에 언어를 가능하게 한다. 언어의 본질은 시의 본질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시를 언어의 뿌리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시는 단지 좁은 의미의 시가 아니라 특별한 의미에서 비은폐의 드러남으로서 이해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언어의 본질은 시의 본질로부터 이해된다는 주장이 나온다. "현존재의 근거는 언어가 참으로 발생하는 대화 속에서이다. 언어의 뿌리는 존재의 건설로서의 시이다."
시가 언어의 뿌리라고 이해되면, 하이데거는 신과 인간의 중재자로서 시인을 휠더린이라고 본다. 시인의 건설은 독립적인 행동이지만 동시에 가장 높은 필연성의 행동이다. 신들의 명명은 신들이 시인들에 의해서 국가에 매개된 기호를 통해서 알려지는 것을 허용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시인은 또한 역사적인 신들이 보존되어 있는 국가의 신화에 묶여 있다. 이러한 신화를 설명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다. 시인의 본질에 대한 휠더린의 정의 속에서 하이데거는 진리가 드러나는 것으로서의 시에 대한 그의 해석의 증거를 본다.
이상에서 시와 언어의 관계를 설명해 보았다. 시는 언어를 필요로 하고 언어는 본질적으로 시이다. 이러한 시로서의 언어를 창조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인간이다. 인간 중에서도 시인이다. 그러면 시인은 시를 통해 무엇을 창조하며 그는 누구인가? 따라서 본질적으로 시인 언어를 창조하는 시인이 창조하는 것이 무엇이며 또 그러한 시인은 누구인지 논해 보겠다. 1) 상주하는 것은 시인이 건설한다. 2) 인간은 시인으로서 이 세상에 산다.
1) 상주하는 것은 시인이 건설한다(Was bleibet, stiften die Dichter)
위험한 재보인 언어를 대화로서 생기하게 하는 자는 누구인가? 시간 속에서 상주하는 것을 포착해서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자는 누구인가?
하이데거는 휠더린을 인용하여 "상주하는 것은, 그러나 시인이 건설한다"고 한다. 시인은 본질적으로 시(詩)인 언어를 통해 존재를 건설하는 사람이다. 존재는 단지 건설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계량될 수도 없고 현존하는 것으로부터 끌어내어 파생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존재의 언어적 건설을 통해 사물이 나타나고 세계가 현상하며 역사가 도래한다. 이런 일이 일어남으로써 인간은 확고한 근거 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언어는 시이고 시는 언어이다. 표현이나 의사소통으로서의 언어와 같은 것은 시(詩)로서의 언어의 전경을 형성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언어를 통해 존재를 건설하고 상주하는 것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시인을 통해서이다. 이 시인은 비단 좁은 의미의 문필가만을 뜻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존재로서의 언어를 구축하려는 이는 모두 시인이며 인간은 본질적으로 시인이다.
2) 인간은 시인으로서 이 세상에 산다
(Dichterisch wohnet der Mensch auf dieser Erde)
하이데거는 인간의 현존재는 근본에 있어서는 '시인적'이라고 한다. 시는 신들과 사물의 본질을 건설하고 명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신들 가운데에 있고 사물의 본질 가까이 관련된다는 것이다.
시의 활동 영역은 언어이다. 시의 본질은 언어에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시는 사물의 존재와 본질을 건설하는 것이어서 시를 통해 일상언어 속에서 이야기되는 바 전체가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시는 언어를 현존하는 하나의 창작소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시 자신이 언어를 비로소 가능케 하는 것이다. 거꾸로 언어의 본질은 역사와 시간을 가능케 하는 시의 본질에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 현존재의 근거는 언어의 본래적인 생기로서의 대화이다. 그리고 존재의 건설로서의 시는 근원이다. 그런데 언어는 "모든 재보 가운데 가장 위험한 재보" 이며 동시에 "모든 영위(Geschäft) 가운데 가장 무책임한 것"이다. 이 두 개의 규정을 하나로 통일하여 생각할 때 비로소 시의 완전한 본질을 파악하는 데 이르게 된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신들에게서 위임받은 늙은 탄탈로스, 신의 폭풍우 속에 맨머리로 서서 아버지의 불빛을 제 손으로 잡아서 하늘의 증여를 노래로 싸서 민족에게 전하는 사람이 시인이다. 시인은 휠더린이 말하듯이 과도한 빛에 의해 암흑으로 몰아넣어진 사람이며 아폴로에 의해 때려 눕혀진 사람이다. 하이데거는 이보다 더 위험한 것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휠더린의 시 {엠페도클레스}를 인용하면서 이러한 시인의 가장 위험한 재보를 탄생시키는 그의 운명에 대해 "정영을 이야기한 사람은/일찍이 지상을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시는 "모든 영위 가운데 가장 무책임한 것"이라고 말한다. 골짜기가 산에 속하듯이 이러한 악의 없는 외양을 쓰지 않고 어떻게 시인이 그렇게 위험한 일을 수행할 수 있겠느냐고 한다. 시는 외견상 유희처럼 보이고 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시를 통해 유희에 탐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시 가운데에서 정적에 이르게 되고 이것은 일체의 힘과 관계가 약동하는 무한한 정적이다. 그리고 이 꿈과 같은 비현실적인 외양과는 반대로 시인이 말하고 감내하는 것, 그것이 현실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그러므로 시는 본질적으로 건설이며 확고한 기초 확립이다.
존재의 건설로서의 시가 이러한 이중의 제약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이 가장 내적인 법칙을 통찰함으로써 시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이르게 된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시인은 시작을 통해 신들을 근원적으로 명명한다. 이 명명은 눈짓을 포착해서 자기 민족에게 눈짓으로 전하는 것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존재의 건설은 신들의 눈짓에 얽매여 있고 동시에 시인의 말은 "민족의 소리"의 해석이다. 그리하여 시의 본질은 신들의 눈짓과 민족의 소리라는 서로 배척하면서도 서로 견제하고 있는 두 법칙 가운데 끼여 있다. 시인은 신들의 법칙과 민족사이에 끼여 있다. 시인은 밖으로 내던져진 존재, 즉 신들과 인간들 사이의 중간에 내던져져 있다. 그러나 이 중간에서만 그리고 이 곳으로부터 비로소 인간이 누구이며 어디에 현존재가 근거하는가를 결정하게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인간은 시인으로서 이 세상에 산다"
5. 결 론
하이데거에 있어서 시와 언어의 관계를 {예술작품의 근원}과 {휠더린과 시의 본질}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시와 언어에 대한 하이데거의 주장은 한마디로 시의 본질은 언어의 본질이고 언어의 본질은 시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순환론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논리적 모순을 야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근원적 형태를 형용한 것이다. 언뜻 보기에 모순을 담고 있는 듯한 명제 뒤에 놓여진 근원을 보이기 위한 하이데거의 어법이다.
언어는 그 본질에 있어서 시이다. 언어는 단순한 표현이거나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이것들은 언어의 전경(前景)을 이루는 것들에 불과하다. 언어는 보다 근원적인 어떤 것이다. 예술작품이 그저 사물이 아니라 작품인 것은 예술에 의해 진리가 그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예술이 작품이 무엇이고 사물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며 예술작품 속에서 세계와 대지의 투쟁의 절묘한 긴장 가운데에서 진리가 자신을 수립한다. 이 진리의 자기 수립은 시이다. 나아가 언어는 그 본래적 의미에서 시이다.
그런데 이 언어는 인간의 재보 가운데 가장 위험한 재보이며 또한 가장 무책임한 재보이다. 신들의 명령을 듣고 과도한 빛에 의해 암흑에 처하게 된 인간, 곧 시인이 그 위험한 것을 꿈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시이다. 그리고 그 재보가 속화될 때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는 다른 방식의 위험도 안고 있다. 이것은 존재자에 의한 존재의 위험이라고 말해야겠다. 이와 같은 이중의 구조를 가진 것이 본래적 의미의 언어의 모습이고 이것이 바로 시(시작)이다.
하이데거는 휠더린을 인용하여 이러한 신들의 목소리를 담은 시인의 시는 민족의 소리이고 이는 전설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 여기서 신은 초월적이거나 유명(幽冥)의 신이 아니라 사물에 내재하는 질서와 인간의 가슴속에 있는 이해와 공감의 신이다. 모든 민족언어에는 이 창조의 신이 있다. 우리가 타 언어에 공감하는 것도 이 신 때문이며 번역이 가능한 것도 이 신 때문이다. 이처럼 언어는 시와 논리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인간이 말을 한다고 하는 것은 언어에 응답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시는 언어에 의한 존재의 건설이며 시간이 도래한 이래의 것이며 인간이 역사적인 것으로 존재하는 보증이며 언어야말로 인간 존재의 최고의 가능성을 좌우하는 생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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