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이전 철학부터 들뢰즈의 현대미학까지 감각의 역사를 조망하는 미학자 진중권의 역작
“감각론의 역사는 철학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오랜 과거부터 인간은 자신의 살갗에 생생하게 와닿는 다채로운 감각에 관심을 기울였다. 아득한 고대의 사람들은 생물과 무생물의 구별 없이 세상 모든 것이 살아 있다고 느꼈고, 신이 인간의 입에 불어넣어주었다는 숨결을 공기라 믿었다. 이렇게 본 대로 지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근원적인 의미에서 참이었던 시대도 있었다. 감각이 곧 지각이자 사유였던 것이다.
하지만 인류가 진리의 근원을 이성에서 찾기 시작하면서 감각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다. 감각은 진리의 근원이 아니라 오류의 원천으로 여겨져 철학의 변방으로 밀려났다. 심지어 근대의 대표적인 합리론자인 데카르트는 “이성적 존재가 되려면 감각을 불신하라”고 가르쳤다. 그 결과 철학사의 서술에서도 고대와 중세의 감각론에 관한 기록은 아예 누락되기 일쑤였다. 이 책은 그 잃어버린 반쪽의 철학사를 복원하고, 새로운 감각학의 구축에 소용될 이론적 단초를 발견하려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예술과 미의 본질을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관념적 학문으로 협소해진 미학을 감각지각, 즉 아이스테시스(Aisthesis)에 대한 학문인 감각학(Aisthetik)으로 확장하자는 독일의 미학자 게르노트 뵈메의 제안을 수용한다. 나아가 뵈메 미학의 바탕을 이루는 현상학의 개념도구를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에게 낯설기만 한 고중세의 이론과 아랍의 광학, 콩디야크 같은 근대 비주류 철학자의 이론, 감각의 부활을 선언하는 들뢰즈의 급진적인 현대미학까지 인류가 지금껏 전개한 감성연구의 역사를 두루 살핀다.
감각의 측면에서 그동안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철학사의 전모를 밝히는 동시에 감각의 역동을 경험해온 인류 역사를 치밀하게 되짚는 이 책은 다변화하는 매체를 통해 새로운 지각을 경험하고, 이로써 도래하게 될 사회구조적 변화를 미리 내다보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더없이 폭넓은 시야를 제공할 것이다.
관념적 미학에서 삶을 위한 감각학으로!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의 철학을 말한다
진정으로 감각적인 것, 가령 피부로 느끼는 옆 사람의 온기나 몽롱한 아침을 깨우는 커피의 맛과 같은 감각적인 특질을 우리는 어떻게 해명하고, 그 본질에 더욱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까? 그동안 이성중심의 철학사에서 배제된 감각 연구는 주로 과학의 소관이었다. 체험으로서 감각은 철학적 언어로 해명되기 힘들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이 책은 감각에 대한 과학적 접근의 한계가 명확하다고 지적한다. 럭스(lx)로 표기될 때 체험으로서 빛은 사라지고, 헤르츠(Hz)로 표기될 때 체험으로서 소리는 사라지는 것처럼.
이 책의 중요한 미덕 중 하나는 다시금 인간의 몸과 감각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감각체험을 온전히 기술하려는 다양한 철학적 시도를 두루 소개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여러 철학자들의 이름을 호명하고, 그들의 ...논의를 풍부한 인용에 특유의 간결한 설명을 덧붙여 상세히 소개한다. 신체의 감각만으로 세계를 질서정연하게 파악할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해 ‘살아 있는 조각상’을 상상한 콩디야크의 사유실험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우리는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면서 이 근대철학자의 사유실험이 오늘날 인공지능 기계가 딥러닝을 통해 하나의 유사인격으로 진화해가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나아가 근대의 합리적 주체를 대신할 ‘신체로서의 인간’을 말하는 메를로퐁티의 신체현상학, 플레스너의 감성학과 슈미츠의 신현상학, 들뢰즈의 미학을 차례로 살펴봄으로써 그들이 어떻게 각자의 방식으로 몸과 감각의 체험을 해명하는지를 성실하고 꼼꼼하게 조명한다.
현대에 이르러 감각학으로서 미학의 기획이 등장한 배경에는 생각하는 인간만이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적 사유가 아니라, 직접 느끼고 체험하며 반응하는 인간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놓여 있다. 때로는 간결하고, 때로는 풍부하게 이 모든 과정의 이모저모를 종횡무진 설명하는 저자의 거침없는 문장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이 새로운 미학적 기획이 옆 사람의 온기를 느낄 줄 아는 인간, 커피의 맛을 느끼고 향유할 줄 아는 인간의 회복을 구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은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서 존재하는,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을 위한 철학적 입장들을 종합적으로 음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훌륭한 철학 교양서이자 입문서이다.
인공지능, 증강현실, 가상현실, 디지털 예술… 감각의 대변동을 준비하는 ‘진중권의 감각학 3부작’, 그 서막을 열다
이 책의 바탕에는 감각학의 관점이 앞으로 다가올 감각체험의 대변동을 준비하는 데 생산적인 기여를 하리라는 기대가 깔려 있다. 평소에 우리가 즐기는 게임을 떠올려보자. 스크린에 올린 두개의 엄지손가락이 그 게임의 촉각적 인터페이스에 얼마나 빠르게 반응하는지가 승리의 관건이 될 수 있다. 예술의 영역에서는 어떤가? 이제 예술작품은 액자틀과 좌대에서 벗어나 낯선 장소에 설치되기도 하고, 관람객의 반응에 좌우되는 인터랙티브 아트로 우리 앞에 문득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작품의 수용은 더이상 오브제의 ‘형태’를 보는 시각적 경험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분위기’에 잠기는 전방위적 감각체험으로 확장된다.
미학자 진중권은 기존의 관념적 미학으로는 이 모든 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진단한다. 새로운 기술과 매체가 제공하는 다종다양하고 낯선 감각체험들은 이제 하나의 객관적인 정의로 설명할 수도 없고, 완전히 주관적인 반응으로만 설명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레디메이드를 통해 사물이 예술작품이 되고, 디자인을 통해 예술이 사물 속에 구현되는 이 초미학적(trans-aesthetic) 상황 속에서 미학의 범위는 예술의 영역을 넘어 사회현상 전체로 거침없이 확장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학은 영원히 예술을 해명하고 그 가치를 정의하는 역할에만 머물 수는 없다.
저자는 이 책의 여는 글에서 앞으로 자신이 이어갈 두개의 후속 작업을 간단히 예고해놓았다. 첫번째는 ‘감각의 미학사’를 서술하는 작업이다. 감각의 관점에서 기존의 미술사를 새로이 조망하고, 나아가 관념적 미학이 해결할 수 없었던 새로운 미술의 경향을 밝히는 작업이다. 두번째는 ‘감각의 사회학’을 구축하는 작업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감각과 연관된 다양한 사회적·경제적·기술적 의제를 다루는 작업을 이어나갈 것이다. 감각의 변화에 따라 역동적으로 일어나는 사회구조적 변동에 대한 탐구는 새로이 펼쳐질 ‘감각의 사회학’의 주요 주제가 된다.
『감각의 역사』는 미학자 진중권이 실현해나갈 이 야심차고 고유한 기획의 가장 아래 놓인 굄돌이다. 오랜 세월 날카로운 통찰과 글쓰기로 미술사부터 철학, 미학 등 일반 독자들의 인문학적 지평을 넓혀온 진중권은 이제 막 미학과 철학의 고지를 넘어 감각학의 언덕에 올라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가 감각의 관점에서 탐구하게 될 미술사와 사회학이라는 새롭고 드넓은 지평이 보인다. 이 세계를 탐색하기 위한 예비 작업인 『감각의 역사』에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풀어낸 문장들은 한없이 엄밀하고, 인용한 고전들을 자유로이 가로지르는 해석은 오랫동안 한 우물을 판 인문학자의 원숙미를 드러낸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든 우리 시대의 미학자 진중권과 함께 ‘감각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에 가까이 다가가는 즐거운 지적 여정의 출발선에 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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