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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시기는 성 주간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성 주간은 성지주일부터 시작되는 사순 시기의 마지막 한 주간이다.
성주간 전례는 우리 신앙 생활의 중심이 되는 전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성 삼일과 부활 성야의 전례가 그 핵심이다.
성주간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생전에 그들에게 하셨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었는가를 새롭게 깨닫게 하는데 전례의 목적이 있다. 즉,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그 분의 행적을 다시 더듬게 되고, 생전에 하신 말씀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며 세상 사람들에게 증언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말씀과 행적들을 공동체 안에서 생활 속에 표현하고 생활화한 것이 바로 전례인 것이다.

(1) 주님의 수난 성지 주일. Passion (Palm) Sunday
① 성지 주일의 의미
성지 주일을 시작으로 하여 성 주간이 시작된다. 이 주간은 예수님이 위대한 구원 사업을 이룩하신 때요, 교회 전례의 장점을 이루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주의 수난 성지 주일은 죽음에 처할 그리스도께서 입성하시는 것을 기념하면서, 그 분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 극복될 것을 미리 깨닫고 있는 우리들이 새로운 예루살렘인 교회의 왕으로 오시는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② 성지 주일의 유래
예수께서 수난을 앞두고 예루살렘 성세 입성할 때에 군중들의 환호와 함께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데서 유래한다. 이 때 군중들이 환호한 내용을 보면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라고 소리를 쳤다. 이처럼 군중들이 환호한 것은 예수께서 그 동안 많은 기적을 베풀고 마침내 예루살렘으로부터 가까운 곳 베타니아에서 그의 친구 나자로를 죽음에서 살려내셨다(요한 11,38-44)는 소문을 들은 군중들이 몰려 와서 환호를 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구원을 가져다 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고 예수께서 바로 구원을 가져다 주실 분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겉 옷을 벗어 예수께서 오시는 길에 깔고 손에는 빨마 나무 가지를 들고 환호하여 그리스도를 맞아들였다는 것을 성서를 통해 알 수 있다.(마태 21,1-11; 마르 11,110; 루가 11,1-10; 요한 12,12-26 참조)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교회 안에서 그 사건을 기념하며 전례 안에서 행해져 온 것이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전례였다.
③ 성지 주일 전례의 변천
400년 경의 기록을 보면 당시의 성지주일 전례는 그 전 날 밤부터 예절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빠스카 6일 전에 예수께서 나자로의 집에서 만찬을 가지셨다는 근거(요한 12,1-2)에서 성지 주일 전 토요일에는 주교가 베타니아에 가서 저녁 때 만찬회를 기념하였다. 다음 날인 성지 주일 오후에는 올리브 동산에 세워진 성당에 주교와 모든 신자들이 모여 오랜 동안 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그리고 오후 늦게 산 정상에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주님의 사적을 복음으로 낭독한 뒤 신자들과 성직자들이 주교를 중앙에 모시고 시편과 찬미가를 부르면서 예루살렘 성 안으로 행렬을 하였다. 이 행렬을 할 때 어른이건 아이들이건 간에 모두가 손에 빨마 나무 가지나 올리브 가지를 들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하는 환성으로 응답을 하였다. 이 행렬을 부활 기념 성당에 이르러 기도하고 끝을 맺었다고 한다.
④ 성지 주일의 전례 구성
성지 주일의 전례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행렬이고, 다른 하나는 수난 복음 낭독이다.
(a) 행 렬
성지 주일의 입당 행렬은 다른 때 보다 더욱 성대하게 행해진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는 축성된 성지를 손에 들고 환호하며 맞는 것이다. 이 때 사제는 “우리는 믿음을 다하고 , 열성을 다하여 이 고마우신 입성을 기념하며 주님을 따름으로써, 은총을 통하여 십자가의 같은 운명을 닮고, 또한 주의 부활과 그 생명에도 한 몫 들도록 해야겠습니다.”는 권고의 말로 이 예절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대한 입당행렬이 미사의 입당 전례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축성된 성지는 가지고 가정에 돌아가 십자가에 걸어 놓는다. 이는 구세주로 오신 왕을 환영했던 것을 1년 동안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해 재의 수요일 전에 본당에 다시 가지고 가서 그것을 태워 재의 수요일에 사용한다.
(b) 수난 복음 낭독
성지 주일에는 긴 수난 복음이 입체 낭독이 된다. 예수께서 붙잡히시기 전 날 밤 제자들과 함께 하신 부분부터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는 부분까지의 복음을 대체로 사제를 포함한 세 사람이 입체적으로 읽게 된다.
● 성주간 월요일 : 요한12,1-11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예수께서 살리신 라자로의 누이 마리아가 매우 값진 향유를 가지고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이에 예수께서는 이는 내 장례일을 위하여 쓸것이라 말씀하신다.
● 성주간 화요일 : 요한13,21-33.36-38
예수께서는 오늘 제자들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김과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의 길은 같이 갈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 성주간 수요일 : 마태26,14-25
예수님께서 당신이 어떻게 죽으실지 예고 하신다. 유다의 행동은 그를 만드신 분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긴 하지만,우리 구원의 극적인 역사를 이루게 한다.

Last Supper-DUCCIO di Buoninsegna
1308-11. Tempera on wood, 50 x 53 cm. Museo dell’Opera del Duomo, Siena
(2) 성 목요일. Holy Thursday
성목요일 저녁에 거행하는 주님 만찬 미사로 교회는 파스카 삼일을 시작하며, 주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세상에 있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어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의 몸과 피를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시고, 사도들에게 영적인 양식으로 주시며 그들과 그들의 사제직을 잇는 후계자들에게 봉헌하라고 하신 최후의 만찬을 재현한다.
이 날은 원래 주교를 중심으로 미사 한대만 봉헌하고 이 미사에서 축성한 성체와 성유를 각 본당으로 모셔 가도록 분배했지만 지금은 두 가지, 성유 축성 미사와 주의 만찬 미사를 거행한다.
① 성 목요일 전례의 유례
성 목요일에는 저녁7시 경에 주의 만찬을 기념하는 미사성제를 지내면서 모든 이가 영성체를 했다. 그 후 집으로 돌아가 각자 식사를 한 다음 올리브 동산에 모여 노래와 독서, 기도를 하면서 예수님께서 다가올 수난의 근심 속에 피땀 흘리시며 기도한 것을 회상하며 묵상을 하였다. (이것이 오늘날의 성시간의 근원이 되었다.) 그 후 밤중이 지나면 주님께서 잡히셨던 장소에 가서 그에 관한 성서 대목을 낭독하고 모든 사람들이 슬피 울었다.
② 성 목요일 전례 구성
ⓐ 성유 축성 미사
예수님께서 당신 사제직을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에게 주셨음을 기념하는 미사이다. 성유 축성미사시 주교와 사제단이 함께 미사를 봉헌하며 성유를 축성하게 된다. 이때 성세 성유, 크르스마 성유, 병자 성유가 축성되는데 이 성유는 성세, 견진, 병자성사를 집행할 때 사용된다. 이 미사 중에 사제들은 서품때 했던 서약을 갱신하는 갱신식을 거행함으로써 사람과 봉사의 생활을 다짐하게 된다.
ⓑ 주님의 만찬 미사
예수님이 수난하시기 전날 제자들과 나누신 마지막 저녁식사로써 성체성사의 설정을 기념하는 미사이다.
⒜ 대영광송
주의 만찬 미사로부터 예수님의 수난이 절정에 달하게 되므로 이때부터 부활 성야 미사 때까지 성당에서 모든 악기와 종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영광송 이후로는 전례에 사용되는 모든 노래는 악기의 반주 없이 육성으로 하게 된다.
⒝ 세족례
요한 복음 13장에 근거하여 생긴 예식이다. 강론 후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었듯이 사제가 행하는 경우가 있다. (사목상 필요한 경우 세족례를 거행한다.) 예수께서 사도들의 발을 씻으면서 “새 계명을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고 하신 말씀을 본받아 행하는데 있어서 봉사자의 자세로, 섬기는 자의 자세로 임해야 참된 봉사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전례라고 할 수 있다.
⒞ 현양제대와 성체조배
미사 후에 감실을 비우고 다른 장소에 성체를 옮겨 두게 되는데 이것을 현양제대 흑 무덤제대라고 부른다. 대부분 사람들이 무덤제대라고 일컫고 있는데, 현양제대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게쎄마니(히브리어로 ‘기름짜기’의 뜻으로 올리브 동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에서 피땀 흘리시며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신 것을 묵상하며 성체조배를 행하는 것이다. 이때 성체조배는 성 금요일 수난 예절 전까지 하게 된다. 현양제대로 성체가 옮겨진 뒤 제대는 벗겨지고 성 금요일 십자가 경배 예절에서 십자가를 벗길 때까지 십자가는 자색 보로 가리워 둔다.
③ 성 목요일 전례의 의미
구약의 빠스카 잔치와 예수님의 최후 만찬은 구원사의 중요한 사건이다. 구세주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희생제사는 성체성사 안에서 드러나게 되고, 그것이 축성된 빵과 포도주로 우리에게 나누어지듯 구체적 우리 자신의 현실로 변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 미사성제를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의 종살이에서 해방될 때 야훼의 말씀대로 흠없는 새끼 양이나 염소를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 고기는 구워서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곁들어 먹고 과월절을 지냈던 것과 같이 빠스카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상에 죽으시기 전날 저녁 제자들과 만찬을 함께 하신 것을 기념하는 전례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 희생제물이 되지 않고는 불평과 불만의 종살이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ICON] Crucifixion - XV c., Andrej Rublev Museum, Moscow
(3) 성 금요일.Good Friday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길"을 따라 죽음의 산 골고다로 오르셨고, 하느님과 인류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위하여 십자가 상에서 희생 제물로서 죽으시고, 우리의 죽음을 물리치시기 위해 땅에 묻히신 날이다.
교회가 미사를 드리지 않는 유일한 날이며, 성사도 집행하지 않는데, 이것은 성사가 그리스도의 행위이기 때문에 무덤에 묻히신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기 위함이다.
이 날의 전례에 있어서 중심적인 전례는 십자가의 길과 수난 예식이 행해진다.
① 성 금요일의 유래
예수의 수난기에 관한 복음을 낭독하였고, 성 금요일 오전에는 예수의 십자가가 세워졌던 십자가 성당에 아마포로 덮은 상을 차려 놓고 십자가 보목을 거기에 안치시킨 뒤 경배를 하였다. 신자들은 각기 거기에 나와서 십자가 보목에 친구하였다. 그리고 12시부터 3시까지는 모든 백성이 같은 장소에 다시 모여 신,구약에서 그 사적에 맞는 부분들을 봉독하고 찬미가의 기도를 바치면서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수난 받고 운명하신 것을 기념하고 묵상하였다.
② 성 금요일의 의미
주님의 수난이라는 극적인 사건을 이 날의 전례를 통해 우리는 생생하게 상기하게 된다. 전례 안에서 보는 그분은 ‘사람들에게 배척하고’ 고뇌에 빠진 슬픔의 인간으로 우리 앞에 서신다. ‘얼굴을 외면하지 않고서는’ 차마 똑바로 쳐다 볼 수 없이 처참한 모습을 우리는 전례 안에서 느끼게 된다. 우리 범죄의 흉측한 몰골을 뒤집어 쓴 그분에게서 영광마저 자취를 감추고 있다.
“보라, 십자가의 나무를, 여기에 세상의 구원이 달렸도다.” 바로 이러한 처참한 지경에서 위대하신 그분의 지극한 사랑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려면 그분의 죽음에 동참해야 한다. 그분이 수난하고 죽었듯이 우리도 우리의 욕망과 이기심에서 죽어야지 비로소 그분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우리에게 강력히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③ 성 금요일의 전례 구성
교회가 미사를 드리지 않는 유일한 날이다. 미사뿐만 아니라 성사도 집행하지 않는데, 이것은 성사가 그리스도의 행위이기 때문에 무덤에 묻히신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기 위한 것이다.
ⓐ 십자가의 길
공동체가 한자리에 모여 예수님께서 걸으신 수난의 행적을 다시 함께 걸으며 묵상하게 된다.
ⓑ 수난 예식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오후3시경에 행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목상의 이유로 더 늦은 시간에 거행해도 된다. 수난 예식 때 사제는 홍색제의를 입고 입장하여 얼굴을 바닥에 대고 엎드린다. (무릎을 꿇을 수도 있다.) 수난 예식의 구성은 말씀의 전례와 십자가 경배, 영성체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말씀의 전례 때 수난에 대한 독서와 복음이 낭독되는데 이때 또다시 수난 복음의 입체 낭독이 있게 된다.(요한 복음의 수난기를 성지 주일과 같은 방식으로 낭독한다.) 이어서 십자가 경배 예식이 비탄과 경건함 속에서 이루어진다.

Resurrection of Christ and Women at the Tomb-ANGELICO, Fra
1440-41, Fresco, 189 x 164 cm. Convento di San Marco, Florence
(4) 성 토요일.Holy Saturday
이날은 교회가 주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날이다.
제대도 벗겨진채 그대로 있고 미사도 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밤이 깊어 오면서 우리는 부활의 희망이 부푼다.
성 토요일은 예로부터 전례 행사가 없고 고요한 날로 지냈다. 다시 말해서 부활 축제가 시작되는 밤중까지 예수부활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조용히 지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날은 예수부활을 기다리는 대망일(大望日)로써 “모든 大望의 어머니”라고 불렀다.(참조: 중고등부 교사 연합회 사순 부활호 홍승권 신부님 강좌,가톨릭홈에서)

성주간과 성삼일
* 성주간 부활전 한 주간을 성주간이라 하며 예수 수난주일(성지주일)부터 부활 축일까지의 한 주간은 오로지 예수 수난과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는 일년 중 가장 뜻깊은 거룩한 주간이다.
* 주님의 성지주일 예수님께서 빠스카 신비를 완성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승리의 상징인 종려(빨마)나무 가지, 혹은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가지를 예수께서 가시는 길바닥에 깔았던 일에서 연유한다. 성지축성, 성지 행렬(호산나! 구원하소서) 후 수난 미사가 시작된다 수난복음이 봉독되며 촛대, 향 인사 성서에 십자표도 생략되고 복음 봉독 후 성서에 입맞춤도 없다. 이날의 제의는 붉은 색이다.
* 성삼일 성주간에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을 빠스카 3일 또는 성3일이라 한다. 성3일은 교회 전례주년에서 절정에 속하고 부활주일에 가서 그 정점에 도달하게 된다.
1. 성목요일 이날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랑의 계명을’ 주시면서 유언을 남기셨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성체 성사’와 함께 사제직을 설정하심으로서 당신의 구원성업을 세세에 전하여 모든 이가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을 받게 하셨고, 올리브 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셨으며, 마침내 사랑하시던 제자 ‘유다 이스가리옷’ 의 배반으로 이교도(유다인)들의 손에 붙잡혀 넘겨지신 날이다.
발 씻김 예식: 이날은 주의 만찬 미사가 거행되며 미사중에는 사목상 필요하면 세족례가 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수건으로 닦아 주셨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쏟은 사랑과 섬김과 겸손을 상기하며 실천하고자 하는 가르침의 예식이다.
2. 성금요일 이날의 주제는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재현하고 기념하며, 그 원인이 된 인류의죄를 아파하고 뉘우친다.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길’을 따라 골고타(해골산)로 오르시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땅에 묻히신 날이다.
이날의 예식은 말씀의 전례, 십자가 경배, 영성체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며 이날은 미사도 다른 성사도 집행하지 않는다. 이는 무덤에 묻히신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기 위함이다. 교회는 이날 신자들에게 단식재와 금육재를 지킬 것을 명하고 있다. 이날의 제의는 순교를 뜻하는 붉은 색이다
3. 성토요일 성삼일 중 마지막 날로 이날은 주님께서 무덤에 계시는 것처럼 주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날이다. 제대도 벗겨진 채 그대로 있고, 미사도 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밤이 깊어 오면서 우리는 부활의 희망에 부풀어있다. 재생의 사상이 주가 된 이날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다는 의미로 빛의 예식, 말씀의 전례, 성찬예식을 거행한다. 이날의 제의는 백색이다.
* 부활성야(復活聖夜) 이 밤은 하느님께서 인류를 위해 섭리하신 가장 아름다운 밤이다.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셨음(빠스카)을 기억하는 밤이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죄의 속박에서 자유로, 죄의 어두움에서 빛으로, 죄의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부활)으로 건너감을 체험하는 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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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8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성주간
‘성주간’이란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주간으로,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성토요일까지의 한 주간을 말하며 교회 전례주년의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이 기간 동안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룩하신 하느님의 구원 신비를 특별한 방식으로 기념하고 경축한다.
성주간 월요일에는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고(요한 12,1-11), 화요일에는 제자들의 배반을 예언하며(요한 13,21-33.36-38), 수요일에는 유다의 배반과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를 지내신 사건을 기념한다(마태 26,14-25). 성주간 목요일부터 성토요일까지는 성주간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날들로서 ‘파스카 삼일’이라고 부른다.
성목요일은 사순 시기의 끝 날이며, 예수님께서 성품성사와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을 기념한다. 이날 오전에는 각 교구별로 성유 축성 미사를 봉헌한다. 이 미사에서 한 해 동안 사용할 예비신자 성유와 축성 성유, 그리고 병자 성유가 축성된다. 또한 사제들은 예수님의 권한을 위임받은 주교에 대한 순명 서약을 갱신한다. 성목요일 저녁에는 주님 만찬 미사가 거행되는데, 사목의 이유로 필요하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을 본받아 사제가 신자들의 발을 씻기는 ‘발 씻김 예식’이 이루어진다.
성금요일에는 미사가 봉헌되지 않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을 기억하는 ‘주님 수난 예식’이 거행된다.
이렇게 한 주간 동안 이어지는 주님 수난에 대한 묵상은 성토요일을 거쳐 부활 성야 예식 전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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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간의 첫째 날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로, 임금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예루살렘 입성을 전례 안에서 성대하게 기념하지만 동시에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장엄하게 예고하는 날이다. 교회는 이날 성지(聖枝) 축복과 성지 행렬의 전례를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영광스럽게 기념하고, 수난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장엄하게 선포한다. 이러한 전례는 4세기경부터 시작되어 10세기 이후 서방 교회에 널리 확산되었다.
☆☆☆
그들은 외쳤다.
“그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루카 22,14 ─ 23,56)
They continued their shouting,
“Crucify him!
Crucify him!”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우리를 일깨워 주신다. 귀를 열어 주시어 당신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그러니 거역해서는 안 된다. 뒤로 물러서도 안 된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은 반드시 지켜 주신다.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신다. 고난 속에서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당신을 낮추셨고,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다. 십자가의 죽음 또한 아버지의 뜻을 따르신 행동이셨다. 믿는 이들은 누구나 예수님의 겸손과 순명을 묵상해야 한다(제2독서).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수난 복음이다. 그분께서는 아무런 변명 없이 십자가의 길을 가신다. 죽음까지도 순명으로 받아들이신다.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을 따르시는 행동이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우리는 길고 엄숙한 수난 복음을 읽었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시고, 심문받고, 사형수 ‘바라빠’와 비교되는 장면들입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이 복음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는지요? 유다인들은 새로운 임금이 출현하면 나뭇가지를 흔들며 환영했습니다. 오늘의 우리 역시 그런 의미로 성지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말합니다. 우리가 환영하는 예수님은 임금으로 오신 분이 아니라, 수난하시고 죽임을 당하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복음 내용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예수님’을 알리려는 데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아무 저항 없이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를 믿는 이들도 그렇게 ‘삶의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자신의 뜻을 꺾지 않으면 십자가는 무거워집니다. 성질대로 하면 점점 귀찮아집니다. 자신을 죽이려 할 때 은총은 ‘그 사람 안에서’ 힘을 발휘합니다. 전혀 예기치 않던 곳에서 하늘의 힘을 얻게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억울함을 체험합니다. 실패를 만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수난 복음의 주인공이 예수님이시라면, 우리 역시 당당한 ‘조연’입니다. 그러니 인생의 ‘아픔’을 의미 없는 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일생에도 사순 시기에 해당되는 시련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의 체험’ 역시 반드시 주어집니다. 오늘은 이 신비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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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군중 안에 파묻혀 있을 때 자신의 생각이나 가치관보다는 집단이나 현재의 상황에 더 초점을 맞추어 행동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군중 심리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줄여 보겠다는 생각이 숨어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의 생활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특히 먹이 사슬의 맨 아래에 있는 초식 동물들일수록 거의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데, 이는 자신의 존재를 집단 안에서 희석시킴으로써 포식자에게 잡아먹힐 수 있는 확률을 최소화하려는 본능 때문입니다.
사람도 동물처럼 군중 안에서 자신의 익명성에 대한 보장을 통하여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줄이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오늘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갑자기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성난 군중으로 돌변한 모습에서 우리는 자신의 책임을 익명성 안에서 희석시키려는 비겁한 인간의 본성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군중의 태도에 분노가 아닌 연민의 감정을 느끼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직 본능적인 감정에만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한 연민과 탄식의 표현일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과 책임을 세상에 용기 있게 드러내는 신앙인만이 예수님의 이러한 아픈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참된 제자들일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나는 구원의 모습"
-홍승모신부-
어느 화창한 날 오후에 두 아이가 사과와 배로 인해 말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과가 최고야. 사과가 제일 맛있어." "아니야, 배가 더 맛있어."
나중에는 주먹질까지 하며 싸우게 됐습니다. 마침내 아이 부모들이 달려와 똑같이 두 아이를 나무랐습니다. 그러나 내용을 알고 나자 상대 아이를 야단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어른들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한 사람은 사과 과수원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배밭 주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싸운다는 소문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달려 나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사과밭 주인도 있고, 배밭 주인도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두 패로 나뉘어 똑같이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싸움에 지친 마을 사람들은 존경하는 한 현자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현자는 그 사과와 배를 받아들고는 말했습니다.
"복숭아를 가지고 왔구나." "아닙니다. 이것은 사과이고, 이것은 배입니다."
현자는 사과와 배를 맛있게 먹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시 복숭아가 맛이 있구나."
우리는 자기만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봅니다. 시기와 다툼은 이 눈을 통해 모든 것을 바라보는 자신이 제일 옳다고 생각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눈을 통해 보이는 것이 늘 옳은 것은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저 지평을 바라볼 줄 아는 넓은 내면의 시야가 필요합니다. 눈에 비치는 십자가를 그저 바라볼 때, 그것은 하나의 상징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내면의 눈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면 거기에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든 삶의 근거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수난 여정에서 주님이 뜻하는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세상 이치와 달리, 주님의 용서는 증오하고 시기하며 단죄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을 당신의 사랑으로 승화시켜 새롭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이것이 주님의 사랑과 용서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영광을 찾고,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에 서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기에 우리 삶은 대부분 경우에 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루카 23,39).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고 비아냥거리며, 다른 것에서 그것을 찾으려는 태도는 유혹의 중심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남김없이 모든 것을 주시는 주님은 우리를 결코 저버리는 일이 없습니다. 삶이 행복하지 않고, 심지어 빠져나갈 길이 없어 보이는 삶 가운데 슬픔과 근심과 두려움과 고뇌에 빠져들 때도, 주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잊었다고 느끼고 그렇게 생각할 뿐입니다.
자신의 역량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혀도,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루카 22,40)는 주님의 음성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다시 사랑의 불꽃이 일도록 말입니다. 우리가 내면에서 이런 주님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주님 십자가와 함께 여정을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이 사랑하고 함께 하시는 방식은 세상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모든 사람들은 죽음으로 결말이 난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주님의 영광스런 빛이 드러납니다. 죽음의 어두운 순간에 주님의 빛이 비로소 발합니다. 우리 삶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놀랍게도 주님 영광이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2-43).
주님은 인간 실존의 모든 고통과 상처를 사랑으로 품에 안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살아온 삶과는 아주 다른 삶의 방식으로 우리를 품에 안으십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런 사랑에서 피어오르는 영의 불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드러나는 구원의 모습입니다. 십자가에는 주님 뿐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이 달려있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삶의 방향이 결정되고 열리게 됩니다.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당신은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손용환신부-
창
예수님의 죽음을 그린 페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창>은 뼛속까지 사무치는 슬픔을 느끼게 합니다. 이 성화는 루카복음 23장 33~46절과 요한복음 19장 16~37절이 그 배경입니다.
그림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윗부분에는 십자가에 처형된 세 사람이 보이고, 아랫부분에는 처형된 죄수들의 주변인물들이 보입니다. 그림의 위와 아래를 연결해 주는 것이 바로 창입니다. 그래서 이 성화의 제목이 창입니다.
먼저 윗부분을 봅시다. 그분의 오른쪽에는 나쁜 강도 한 사람이 예수님께 절규합니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루카 23,39) 그의 절규에는 믿음이 없습니다. 단지 죽음에 대한 분노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만 있습니다.
그분의 왼쪽에는 선한 강도 한 사람이 다른 죄수를 꾸짖으며 예수님께 애원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2) 그의 애원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그의 마지막 희망을 반영하듯 하늘을 향해 있습니다.
중앙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습니다. 명패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이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로 적혀 있고, 예수님의 다섯 상처에서는 선혈이 흘러내립니다. 그분은 죽어 있지만 그분의 근육은 풀리지 않고 힘이 있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마지막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선한 강도에게 이르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그분은 마지막 순간에도 오늘 우리에게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낮 열두 시쯤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뒤에는 먹구름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이 애처로워 태양마저 빛을 잃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라고 외치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얼굴에는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가득합니다.
이제 아래쪽을 봅시다. 세 부류의 인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숨지신 것을 확인하고 그분의 옆구리에 창을 찌르는 군인과 처형자들이 한 부류이고, 그분의 죽음을 보고 깊은 슬픔에 잠겨 애도하는 어머니와 제자와 추종자들이 다른 한 부류이며, 그분의 죽음을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구경꾼들이 마지막 한 부류입니다.
구경꾼들은 빈정거리며 말합니다.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루카 23,35)
군인들도 그분을 조롱하며 말합니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루카 23,37) 그러나 그분께서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러자 그분의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다른 군사 하나는 이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또 다른 군사 하나는 강도의 다리를 부러뜨리기 위해 못을 빼어 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슬픔이 가득합니다. 어머니는 죽음의 색인 검은색 옷을 입고 시선을 아들에게로 두지도 못한 채 넋을 잃었습니다. 그분의 충혈 된 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예수님의 사랑받던 제자 요한도 사랑하는 스승의 죽음이 너무나도 슬퍼 눈을 가리며 어머니께 기댑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분의 발에 흐르는 선혈을 보고 두 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다른 여자 중 한 사람도 그분의 죽음을 슬퍼하며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어떤 눈으로 바라봅니까? 처형자입니까? 추종자입니까? 아니면 구경꾼입니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신희준신부-
우리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신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우리 인간들이 사는 지상으로 파견하셨습니다. 아드님이 부여받은 사명은 인간들의 죄를 모두 사해주고 구원하기 위해 그들을 대신해서 파스카 축제 때 바쳐지는 어린양처럼 자신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때’가 다가오자 아드님께서는 긴 여정(루카 9,51~19,27 참조)을 마치고 제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혁명을 일으켜 강력한 새 이스라엘을 세우시리라는 제자들의 장밋빛 희망과는 달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내쫓으시고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우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든 제자들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유다처럼 적극적으로 처신하기로 마음먹은 제자는 예수님을 제거할 방법을 찾던 예루살렘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예
수님을 넘겨줄 것을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제거할 기회를 노리는 이들의 증오에 찬 시선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면서도 자신들의 기대에 예수님께서 과연 부응해주실 수 있을까 하는 제자들의 불안에 찬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또박또박 자기 길, 곧 ‘수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오로께서 말씀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8).
예수님의 확신에 찬 모습과 제자들의 흔들리는 불신의 모습은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사실 수난의 길을 예수님이라고 마냥 기쁘게 걸어가지는 않으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바친 예수님의 기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와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진 예수님의 땀은 예수님의 고뇌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잘 대변해 줍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까지 흔들림 없이 충실하게 자신의 수난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교황 요한 23세께서 남기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십자가는 위대한 책입니다. 그 책에서 저는 정성과 사랑을 다하여 최상의 지혜를 담고 있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얻고자 노력합니다. 저는 이 위대한 책을 척도로 삼아 세상의 일들과 지식들을 판단하는 습관을 가져야만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보통 희망하는 유쾌하고 유복한 생활과 정반대의 삶을 상징합니다. 돈이 많고 높은 지위와 명예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이 십자가를 자기 삶의 척도로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돈과 지위와 명예를 포기하기를 십자가는 요구할 테니까요. 그래서 가능하다면 십자가를 피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우리 심정일 겁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유일한 문입니다. 동시에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을 맞이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주간 동안 십자가의 길을 예수님을 따라 걷지 않으시
겠습니까?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임숙희-
시작 기도
하느님 ‘아빠, 아버지’, 이 수난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고통을 겪을 때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사랑을 떠올릴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이끌어 주십시오.
독서
생애 마지막에 예수님은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 겪는 온갖 고통 중에 가장 잔인한 고통의 시험을 한꺼번에 체험합니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은 절대적 마음의 고독을 안고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당신 수난을 짊어집니다. 기도의 복음사가인 루카는 예수님의 수난을 하느님이 받아들이신 ‘기도’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분 삶의 논리를 벗겨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살았고, 기도하시면서 죽습니다.
죽음을 앞둔 이별의 날, 예수님은 사도들과 최후 만찬을 드시면서 빵과 잔을 들고 “감사를 드리시고”?(22,?17.?19) 당신을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고 사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시편에서 감사기도는 하느님이 심각한 위험에서 구출하거나 자유롭게 해준 것 때문에 하느님께 바치는데, 이제 예수님은 반대로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해 대신 죽음의 제물로 그분의 몸을 봉헌하는 감사기도를 바치며 십자가로 향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이 담긴 긴 담화를 하신 후(22,?24???38) “늘 하시던 대로”?(22,?39) 평생 사랑했던 기도처, 올리브 산에 “혼자 가시어 무릎을 꿇고”?(22,?41) 고뇌에 싸여 간절하게 ‘아빠, 아버지’께 탄원기도를 바칩니다.(히브 5,?7???10) 생애의 극단적인 순간에 예수님은, “공포와 번민에 휩싸여”?(마르 14,?33) 기도하시면서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는 마음으로 차츰 변형되어 갑니다. 그리고 기도 후에 용기에 찬 마음을 가지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루카 24,?46) 십자가로 향합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은 루카복음에서 예수님 생애의 축을 형성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단순하게 말하면 하느님께 대한 표현인데, 하느님이 스스로 행동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이 행하시는 대로 그대로 따르기로 한 예수님의 기도는 하느님이 개입하시어 살려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동반합니다. 아버지는 지금 예수님이 기도 안에서 그분께 맡기는 이 삶을 다시 부활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시편 16,?10; 사도 2,?27: 13,?35) 나중에 십자가 밑에 있던 백인대장이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23,?47)라고 고백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는데, 십자가에 달린 죄인인 예수님이 의인이 되는 조건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온전히 열려 있던 그분의 마음이라는 것이 이 겟세마니 기도에서 암시하고 있습니다.
백성에 둘러싸여 십자가 사건은 진행됩니다. 처음에 백성은 ‘해골’이라고 불리는 곳까지 예수님을 따라오지만, 중간에 와서는 침묵을 지키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멀찍이 떨어져 예수님이 죽어가는 광경을 바라볼 뿐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은 이 절대적 고통의 순간에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께 중재기도를 바칩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23,?34) 중재기도는 일반적으로 “의인의 기도”?(야고 5,?16; 1베드 3,?12)로 알려져 있었는데, 예수님이 하신 이 기도는 죄인으로 선고받은 분이 실은 의로운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동시에 이 기도로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하느님 ‘아빠, 아버지’?한테서 멀어진 사람들을 아버지한테로 데려가기 위해 바친 당신의 공생활을 요약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기 전에, 생애 마지막으로 평생 그분의 입술과 마음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던 ‘아빠,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는 깊은 신뢰의 기도를 바칩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23,?46; 시편 31 참조) 루카는 예수님이 하신 첫 말씀을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2,?49)로 기록하는데, 예수님이 죽기 전에 하신 마지막 말씀도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23,?46)라는 기도였다고 함으로써, 아버지의 뜻과 계획에 대한 ‘하느님 아들’?의 순종이 루카가 전하는 예수님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루카는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였던 분의 사명을 완성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소개합니다.(24,?19) 이렇게 메시아, ‘사랑하는 아들’이 인간 사회에서 거부당하고, 배반당하고, 십자가형에 처해 죽은 것을 통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계획이 절정에 이릅니다. 수난 이야기는 우리에게 가장 훌륭한 ‘신학적 장소’입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 아들의 얼굴과 아버지 얼굴이 같이 계시되고, 죽음 후에 우리 마음 안에 보내주실 생명을 주는 힘이신 성령이 그 안에 이미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찰
예수님의 고통은 우리의 모든 고통을 없애지는 않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하느님의 딸과 아들’?이 된 우리에게 생애의 고통스런 시간을 어떻게 통과해야 하는지 본보기가 됩니다. 그분이 죽음 후에 보내시는 “그리스도의 영”?(필리 1,?9)인 성령은 우리 마음 안에 머물면서, ‘하느님, 아빠 아버지의 뜻’에 맞는 자세가 우리 마음 안에 자라나도록 우리를 위해 기도하며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로마 8,?26???30)
기도
주님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생각하시어 저를 이끌고 인도하소서.(시편 31,?4)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성당의 '천지창조'를 완성하였을 때 흡족한 마음으로 서명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명까지 마치고 성당 밖을 나서면서 찬란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눈부신 햇살과 푸른 자연으로,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웠지요. 세상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또 어떤 화가도 그려낼 수 없는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이었습니다. 순간 그는 자신의 교만스러운 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도 서명을 남기지 않으셨는데, 나는 기껏 작은 벽화를 하나 그려놓고 이름을 남기려고 했다니…….'
미켈란젤로는 성당으로 되돌아가 자기의 서명을 지웠습니다. 그리고 그 후부터는 더 이상 그림에 서명을 남기지 않았답니다.
미켈란젤로의 이 이야기를 보면서 저의 교만 역시 깨닫게 됩니다. 솔직히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할 수 있는 것들이 바로 나의 재주와 능력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지요. 나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얻은 재주와 능력이었는데 그 사실을 까마귀 고기를 먹은 것처럼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감사하지 못했고, 그래서 주님의 뜻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평범한 일상의 삶에서 감사할 수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제가 신학생 때 반복된 생활에 지루함과 답답함을 느꼈던 적이 있었습니다. 기도-공부-운동이 계속해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이었지요. 그래서 특별한 일이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한 일이 생겼습니다. 글쎄 운동을 하다가 제가 친구를 다치게 한 것입니다. 친구는 곧바로 병원에 실려 갔고, 저는 걱정과 불안으로 무척 초조했습니다. 한 4~5시간 동안 그 친구에 대한 걱정 때문에 기도도 되지 않고 공부도 되지 않았습니다. 저녁 늦게 그 친구가 치료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지요. 아무 일도 없는 평범한 일상의 삶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를 말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그 환영의 목소리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는 저주의 목소리로 바뀝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감사의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기들의 필요에 맞는 예수님을 원했고, 그 필요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람들은 반대자가 되었던 것이지요.
일상의 삶에서부터 특별한 삶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반대자가 아닌 주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의 모습으로 변화될 수가 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 거룩한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이 성주간을 보내면서 더욱 더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래서 감사할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용기
-오민환-
성지 주일 복음은 길지만 마치 드라마를 보듯 역동적입니다. 특히
루카 복음은 등장하는 인물의 세밀한 감정까지 읽게 합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가셔야 할 길과 앞으로 펼쳐질 일을
다 알고 계신 듯합니다. “때”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의 배신도 읽으시고,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를
올리시고 잠시 유혹에 빠지십니다. 그러나 곧 “아버지의 뜻”에 맡기십니다.
유다가 끌고 온 무리들에 의해 끌려가 신문을 받고 돌아가시기까지 당신에게
“정해진” 길을 걸어가십니다. 너무나 의연하기에 주님의 모습이 오히려 더
처절합니다. 그 수난의 길에서 주님과 함께 죽음도 불사하겠노라는 베드로의
배반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만찬 때에 이미 베드로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기도할 것이라면서, 그가 ‘돌아올’ 가능성을 남겨두셨습니다(루카 22,31-34
참조).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그 참혹한 밤이 지나면서 닭이
울었습니다. 그 어스름 새벽에 몸을 돌려 당신의 가여운 제자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길을 그려봅니다. 베드로가 슬피 울었던 그날처럼 눈물이 나는
새벽입니다.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악의 무리 앞에 있는 우리는 언제나
주님과 멀찍이 떨어져 그분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언제나
그러하시듯이 몸을 돌려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호산나의 주님
-김찬선신부-
오늘은 두 가지를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심을 기념하고
주님께서 이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심을 기념합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하실 때 주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입성하실 때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그때 사람들은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호산나’하며 환영을 하였습니다.
‘호산나’는 ‘구원하여주소서’라는 뜻이니
이제 로마의 압제에서 자기들을 구하실 분이라고
그들은 주님에 대해 생각했던 것이겠지요.
주님은 이런 생각과 이런 환영에 대해 아마 담담하셨을 것입니다.
환영에 으쓱하지 않으심은 물론
구원이 좌절되어 그 열렬한 환영이 분노로 돌변할 것임을 아시면서도
그런 돌변에 대해 같이 분노하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분노라는 것은 생각이나 기대에 어긋날 때 솟는 것인데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렇게 돌변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라고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을 같은 민족으로 생각하였고
자기 민족을 다른 민족에서 구원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셨습니다.
하느님으로서 사람이 되신 것이지
이스라엘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때 사람을 택하여 오신 것이지
민족을 선택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나약함과 고통을 택하여 오신 것이지
한 민족의 임금이 되는 이 세상 영광을 택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지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호산나의 주님이신 것은 맞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로마의 종살이로부터 구원하시는 주님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죄의 종살이로부터 구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주님을 같은 족속으로 만들려 하였습니다.
우주의 주님이신 분을 족속의 한 사람으로 가두려고 하였으니
이 얼마나 큰 천박함입니까?
그런데 우리도 이런 천박함을 같은 실수로 범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내 민족의 하느님으로 가두고,
하느님을 내 이념의 하느님으로 가둡니다.
요즘 우리는 안 중근 의사의 순국 100주년을 기념합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한 의사로 높이 추앙합니다.
그러나 안 중근 의사를 독립투사로만 추앙하는 것은
안 중근 의사를 높이 추앙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더 높으신 뜻을 오히려 낮추는 것입니다.
안 중근 의사는 동양의 평화를 제창하신 분이시고
동양의 평화를 위해 돌아가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양의 평화를 해치는 일본과 그 일본의 이토를 척결한 것이지
대한민국의 적을 적으로서만 척결한 것이 아닙니다.
이토를 척결하기 전에 안 의사는 군대를 조직하여 일본군과 싸웠고
일본군을 포로로 잡은 적이 있습니다.
안 의사 군대의 병사들이 그 포로를 잔인하게 다루려 하였는데
독립군이 일본군에게 잡혀 고문당한 것에 대한 복수심 때문입니다.
그때 안 의사는 포로를 가혹하게 다루면
일본군과 똑같이 되는 것이라고 하며 만류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되셨고
이스라엘 사람이기를 포기함으로
당신은 희생되시고
인류는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오늘도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전삼용신부-
우리 심판은 내가 한 행위보다는 나의 ‘존재가 무엇이냐’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같은 공기에서 하이에나는 썩은 냄새만 맡고, 바다에서 피 냄새는 상어만큼 잘 맡는 물고기가 없습니다. 꿀벌은 꽃만 보지만 똥파리는 그 밑에 있는 썩은 것만 봅니다. 사람 안에도 좋은 면과 나쁜 면이 공존하는데 좋은 면보다는 나쁜 면을 먼저보고 판단하기 좋아한다면 그 사람의 본질은 하이에나, 상어, 똥파리가 됩니다.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한 말처럼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마태오 복음 25장엔 최후의 심판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지 않고 구원하러 오셨다고 합니다. 당신이 하는 심판은 공정하지만 누구도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심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사람이 양과 염소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양인지 알았는데 염소였다면 매우 놀랍고 안타까울 것입니다. 원숭이가 사람 흉내를 내도 사람 사는 곳에 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두 여인이 같이 맷돌질을 하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기고, 또 두 남자가 함께 밭을 갈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겨둘 것입니다. 즉, 그 하는 일이 같아도 그 사람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을 보고 오징어만 올라오고 나머지 고기들은 어둠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듯 우리 본질이 빛이라면 그리스도의 빛 아래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성 바오로는 매 순간 기도하고, 항상 감사하며, 언제나 기뻐하라고 합니다. 이는 본질상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항상’이란 말은 억지로 그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상 ‘항상’ 그런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본질이 타락하였습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나라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마귀들에 비해서는 덜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적어도 우리 안에 아직은 자신의 본질을 변화시킬 좋은 것들이 남아있습니다.
신생아실에서 한 아이가 울면 다른 아이들도 따라 웁니다. 그러나 자신의 우는 소리를 녹음해서 들려주면 자신의 우는 소리를 듣고는 절대 울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 안에 상대의 아픔을 공감하는 좋은 심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자아와 육체, 또 세상의 상황에 지배를 받습니다. 지하철 선로에 사람이 떨어지면 모두들 안타까워하면서도 좀체 뛰어 내려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도 내려가지 않기 때문에 나도 내려갈 필요가 없고, 더 큰 문제는 자신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깡패들이 누구를 괴롭히고 있다면 못 본 채 합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는 내가 다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마음 안에서 일지만 자신의 자아를 뚫고 나올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2001년 1월 26일 이수현이라고 하는 한국인 유학생이 일본 지하철역에서 사람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은 일이 있었습니다. 충분히 피할 시간도 있었지만 끝까지 사람을 끌어내려다가 목숨을 잃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리게 되었고 책으로도 출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부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선로에 떨어진 한 사람을 구해낸 사람들의 수가 매번 8명, 10명 등으로 늘어나는 것입니다. 누구나가 다 선로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책을 읽었거나 그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희생이 사람들 안에 잠재되어 있던 좋은 심성을 깨운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자라서 꽃이 되고 열매가 될 씨앗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자아와 육체가 딱딱하게 그것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의 따듯한 빛이 그 씨앗을 싹트고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계란 안에 있는 병아리가 어미 닭의 따듯함이 없이는 껍질을 깰 수 없는 것처럼 인간 안에 잠재되어 있는 좋은 심성도 누군가의 ‘사랑의 희생’으로만 깨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같은 예이지만, 2007년 12월 25일 세계 복싱 타이틀을 획득하고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최요삼 선수가 있습니다. 평소 어려운 이들을 돕고 싶다는 그의 뜻에 따라 가족의 결정으로 6명에게 장기를 기증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최요삼 효과’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장기기증이 쇄도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희생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희생들은 오랜 효과를 지속하지는 못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잊혀지게 됩니다. 우리에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따듯한 태양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당신이 직접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 희생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영원성과 보편성을 지닙니다. 그 분이 사람이시면서도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의 희생 하나로 2000년 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껍질을 깨고 본질을 변화시켜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고정원씨는 어느 날 자신의 집에 들어갔을 때 늙으신 노모가 처참하게 살해되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방에서는 아내가 역시 처참하게 살해되어 죽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4대 독자인 아들까지 살해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모든 것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 분은 계속 자살을 하려다가 그런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라도 알고 죽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유영철이 잡혔고 아무 이유 없이 세 명을 살해했다고 자백했습니다. 고정원씨는 그 사이에 이미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그를 용서하였습니다. 그러고는 한강 다리로 가서 뛰어내리려고 하는데 지금까지 죽고만 싶었던 심정이 사라졌습니다. 용서 했더니 다시 살고 싶어 진 것입니다.
그러나 살고 싶어 졌을 뿐이지 마음은 그 전보다 더 괴로웠습니다.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사람들 시선 때문이었습니다. 다들 그를 위선이라고 생각했고 같은 피해자 가족들은 미움의 시선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미리 결혼하였던 딸 둘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버지와 더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고정원씨는 용서란 이름으로 더 외로워졌고 더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용서란 한 순간에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딸을 잃은 어떤 사람이 십 몇 년이 지나서야 하루에 분노가 1분정도만 치솟아 오른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 전에 비해서는 매우 짧은 시간입니다. 그렇게 용서도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 해 주었고 고정원씨는 지금까지 그 용서의 먼 길을 가고 계십니다.
이는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신 그 모습을 보며 잠재되어 있는 선한 것을 깨우는 것입니다.
몸에 칼을 수십 차례나 맞은 마리아 고레띠 성녀는 죽어가면서 자신을 찌른 이와 함께 천국에 있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용서를 못하는 이유는 결국 내 자아가 너무나도 강하게 좋은 것들을 가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그 껍데기를 스스로 뚫고 나올 수 있도록 우리의 빛이 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구원자가 된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으면 양심에서 나를 죄인으로 판단하고 하느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그 보상심리로 다른 사람들에게 잘 평가받기를 원해서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오히려 부자유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모든 죄는 그런데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교만하여져서 유일한 심판자인 하느님의 자리까지 올라 사람을 심판하게 됩니다. 그래서 화가 나고 미워하기까지 하게 됩니다. 죄가 없다면 상처 받을 자아도 없고 사람을 판단도 하지 않아서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이 그런 분들입니다. 그 분들은 자신을 온전히 버리시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신 분들입니다. 자신을 버리니 그 안에는 오직 좋은 것들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리스도를 “랍뿌니!”, 즉 ‘스승님!’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그녀를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큰 죄인에서 가장 큰 성녀로 변하게 만든 비밀입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하신 말씀처럼 매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결과 자신의 본질이 그렇게 빠르게 변화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성체와 성혈만 영한다고 그 분과 한 몸이 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매 순간 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분이 내 안에서 살게 하셔야합니다. 그것이 나의 본질을 원숭이에서 사람이 되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요한 13, 13-15)
새벽을 열며
어제 밤, 강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피곤하다보니 강론 준비가 쉽지 않더군요. 사실 어제 역시 다른 성당에서의 특강 등 바쁜 하루를 보냈거든요. 그리고 어떤 모임 참석까지 하고 제 방에 들어온 시간이 밤 11시 30분. 그 시간에 강론을 준비하려고 책상에 앉으니 졸리기만 합니다. 결국 조금도 쓰지 못하고 그냥 잠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새벽, 다시 책상 위에 앉았습니다. 어제 밤과 마찬가지로, 무슨 말을 써야 할 지 머릿속이 하얗습니다. 그래서 천천히 오늘 복음인 수난 복음을 읽었습니다. 다 읽은 뒤, 저는 한 구절에서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구절은 바로 이것입니다.
“21. 주님의 수난기를 봉독한 다음에 강론을 짧게 한다.”
주님의 수난 복음에서가 아니라, 오늘 전례를 설명하는 글에서 힘을 얻을 수가 있었지요. 수난 복음이 워낙 길다보니, 강론을 짧게 해야 한다고 이렇게 규정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굳이 강론을 평소와 같이 길게 쓸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여기에 위안을 얻는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어떠한 순간에서도 힘을 주시는 분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네요. 즉, 본인이 찾고자 하면 주님의 섭리와 사랑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주님 체험을 잘 못한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내가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중심인 사람은 결코 다른 것을 보지 못합니다. 자기중심에 맞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다른 것들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는 것이지요. 2000년 전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의 주관심사는 로마로부터의 완전한 독립뿐이었기에 예수님을 그러한 정치적인 구원자로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었지요. 따라서 자기들의 관심사와 맞아 떨어지지 않는 예수님이 필요 없었고,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합니다. 더 근본적인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을 자신들의 관심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제거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그 행동은 결국은 후회를 가져옵니다.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지금 혹시 내 모습도 이러한 것은 아닐까요? 내 중심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다른 사람을 단죄하고 그럼으로 인해 예수님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가슴을 치며 후회할 행동은 2000년 전의 이스라엘 사람들로도 족합니다. 이제는 그러한 생각과 행동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고 칭찬할 사랑의 생각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들은 주님 안에서 참된 위로와 기쁨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성주간입니다. 깊은 참회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주님의 사랑을 더욱 더 깊이 체험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느껴봅시다.
빠다킹신부
우리가 원하는 메시아
-김유철 신부-
온 무리가 일어나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발합니다. 내용은 세금을 내지 못하게
막고 스스로 메시아, 곧 임금이라고 하면서 온 민족을 선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전능한 힘을 가지고 유다 민족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실 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일을 행하는 분이 바로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로마를 무찌르고 전세계를 열두 등분으로 나눠 각각의
지파가 왕으로 다스리는 이른바 선민사상을 꽃피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로 믿고 맞이했던 분은 이와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이해하고, 용서해야하며,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이들을 배불릴 수 있는 능력과 아픈 자를 낫게 하고,
죽은 자까지 살리는 영험함, 그리고 뛰어난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말씀들…. 모든 것이 완벽한 그리스도의 모습이지만
혼내주고 싶은 세리들, 로마를 포함한 주위의 원수들을 사랑으로 감싸야
한다는 주장은 걸림돌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중심으로 많은 무리들은 결심을 하게 됩니다. 우리 입맛에 맞는 메시아가
올 수 있도록 지금의 메시아를 치워버리자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메시아의 어떠한 모습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영어로는 ‘Passion Sunday’라고 합니다. Passion은 고통이란 뜻보다 ‘열정’이란 뜻이 더 우위입니다. 인간 사랑에 대한 열정이 수난이 된 것이니, 우리의 죄가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과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성금요일’은 슬픈 금요일이 아니라 ‘Good Friday’인 것이 마땅합니다.
온 인류를 새로이 낳고 키우기 위해 하느님과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시는 사랑의 절정, 거룩한 주간의 시작입니다.
때는 축제인 무교절.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제거해야 할지 그 방법을 강구하려 혈안이고,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당신의 비장한 내면의 감정과 의지를 나타내십니다. “간절히 바랐다”, “다시는 먹지 않겠다”, “결코 마시지 않겠다”, “이는 내 몸이다”,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라는 말씀은 뭔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22,15) 이렇게 간절히 바라신 이유가 무엇인지 나름대로 생각해 봅니다. 우선 이 식탁자리는 예수님의 말귀를 못 알아듣는 제자들로서는 예년과 같은 파스카요 축제요 식사자리이겠지만 예수님으로서는 죽음을 앞둔 고별의 자리, 남겨주실 마지막 말씀을 꼭 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둘째,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밝혀주는 역사적 사건인 이집트 탈출과 시나이 계약으로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이 된 옛 계약을 새로운 의미로 완성하고자 하시기에 이 자리가 반드시 파스카 음식을 나누는 자리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주시며,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하시고, 또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이다.” 하셨습니다. 곧 구약의 파스카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음식인 누룩 없는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최후만찬 말씀과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몸을 주시는 생명의 양식이요, 피로써 맺는 새로운 계약의 음식이 됩니다. 이 계약으로 신약의 새 백성이 탄생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고난을 겪기 전에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라셨고, “파스카 축제가 하느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식탁자리는 친교를 이루는 가장 좋은 자리입니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중요한 일들, 생일·결혼·회갑·장례뿐 아니라 명절, 심지어 사업에도 빠질 수 없는 것이 식사입니다. 땅을 일구고 곡식을 추수하기까지 그리고 우리 식탁에 오르기까지는 수많은 사람의 땀과 노고와 정성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땅과 햇빛과 공기와 물과 바람 등을 주신 하느님의 섭리도 함께 배어 있기에 음식을 함께 먹는 식탁은 사랑과 생명을 나누는 자리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식탁자리에서 말씀하시고 친히 음식이 되시어 우리에게 사랑과 생명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우리의 먹이가 되실 그분은 ‘빵집’이란 뜻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고, 소들의 먹이통인 구유에 눕혀지셨습니다. 그리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초대하는 식탁자리에 앉아 함께 음식을 드셨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만찬자리에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17,23) 이제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지낼 수 없고 십자가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현존하시며 그것을 먹는 제자들과 일치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사랑의 현존으로 끊임없이 제자들을 양육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그래서 초대교회는 이 예식을 ‘주님의 식탁’, ‘주님의 만찬’이라 부르며 행했습니다.
“그러나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지금 나와 함께 이 식탁에 앉아 있다.”(22,21) 이 사랑의 식탁에는 예수님을 팔아넘길 배반자도 함께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가 박해당하던 시대에도 밀고자는 대부분 교우들이었습니다. 이 괴로움을 시편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원수가 저를 모욕한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제가 참았을 것입니다. 저를 미워하는 자가 제 위에서 거드름을 피운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제가 그를 피해 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 내 동배, 내 벗이며 내 동무인 너, 정답게 어울리던 우리 하느님의 집에서 떠들썩한 군중 속을 함께 거닐던 우리”(55,13*15)였다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은 이 식탁에서 그에게도 빵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도 피를 쏟아부어 주십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요한복음 주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능한 분과 식탁에 앉게 되거든 네 앞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라. 그리고 너도 그만한 식탁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라.’ 능하신 분의 식탁이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치신 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데가 아니겠습니까? ‘무엇이 있는지 살펴라.’는 말은 위대한 은총의 가치를 올바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너도 그만한 식탁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 생명을 바치셨듯이 우리도 또한 우리 형제들을 위해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십자가를 질 각오
- 정필종 신부-
오늘은 주님의 성지주일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2000하고도 한 번째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준비운동에 들어가시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신부가 예수님의 죽음을 두고 장난치신다고 꾸중하실런지는 몰라도 어쩌면 우리 자신들이 매 년 하는 행사의 하루를 지나고 있는 듯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게 장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순 제4주일 때에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강론을 이런 대화식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장면을 잠시 재현해 보겠습니다.
"얘들아!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지가 얼마나 되셨지?" "2000년요". "그런데 어제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이제 매달려 있으시기 힘드시다고 내려오고 싶으시데드라". 아이들 묵묵부답. "예수님이 십자가에 내려오시려면, 누가 대신 매달려야 하는데, 매달릴 사람?" 묵묵부답. "그럼 내가 매달릴까?" 아이들 전체가 큰 목소리로 대답하기를 "예!!!" 그 대답을 듣는 순간의 아연함이란 말입니다. 저 녀석들이 십자가에 매달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서도 그렇게 대답했을까 하는 생각과 솔직히는 일말의 서운함도 함께 들었습니다. 이 조그마한 사건을 계기로 저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그 분의 뒤를 따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닌 것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신자도 아닌 아가씨들의 악세사리의 일종으로 자리잡고 있는 십자가. 그 가녀린 목이나 귀에 달랑거리고 있는 십자가를 보면서 저 아가씨가 저 의미를 알면 십자가 목걸이, 귀걸이는 다시는 안할 것이라고 혼자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점점 커져가는 교회의 첨탑과 그 안을 장식한 화려하고 커다란 십자가를 볼 때도 과연 우리가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알면 저토록 크고 화려한 십자가로 계속해서 성전을 꾸미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통 우리는 공부 잘 못하고 말썽부리는 아이의 부모들이나, 술로 날을 지새우는 남편이나, 늘 잔소리 심한 시어머니와 시누이를 볼 때, '아이구 내 팔자야!'를 속으로 되뇌면서 그래도 이게 내 십자가라면 지어야지 라고 말하곤 합니다. 언제부터 팔자가 십자가가 되었는지 그 유래를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질 각오'라는 구호가 생긴 유래는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라고 외친 것은 예수님 당시, 힘으로써 로마의 압제로부터 유대민족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젤롯당'(열성당원)들의 슬로건이었습니다. 이는 로마 집권자들의 손에 정치범으로 죽는다는 뜻입니다. 그 까닭은 당시 로마정권이 반로마 항쟁가들만 십자가에 처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곁에서 함께 처형된 소위 '강도들'은 강도가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집권자들에 대한 항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집권자들은 언제나 안정을 희구하고 새 것을 싫어하며, 어떤 형태로나 질서를 문란케 하는 대상을 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 함'은 죽기를 각오로 하라는 지상명령에 진군나팔로도 읽혀집니다. 그것을 통해 새로운 세계, 새 가치관, 새 윤리관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됩니다.
이런데도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실 각오가 되어 있으십니까?
'착해빠져' 탈인 사람
- 양승국 신부-
자금 압박으로 인해 사면초가에 놓여 있던 친구의 절박한 상황을 차마 외면하지 못해 대출보증을 섰던 '착해빠진' 한 형제님을 알고 지냅니다. 오래 가지 않아 상황은 최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잘 풀릴 것 같았던 친구 사업은 회생 불가능한 상태로 곤두박질쳤고 그 와중에 친구는 종적을 감추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낯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고, 보기에도 끔찍한 통지서, 경고장, 출두명령서들이 연이어 날아오기 시작했습니다.
한두푼도 아니고 몇년간 뼈빠지게 모은 상당한 '거금'을 고스란히 날리게 된 형제님은 속상한 것은 둘째 치고, 가족들에게 면목이 없었습니다.
잠적해버린 친구 생각만 하면 울화가 치밀어올라 병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배신감을 겨우 달랜 형제님은 상황이라도 파악하기 위해 친구 집을 찾았습니다.
친구 집 상황은 더욱 심각했습니다. 금융회사에서 이미 다녀간 뒤였습니다. 곧 비워줘야 할 썰렁한 아파트 거실 한 구석에는 부인과 어린 자식들이 끼니조차 잇지 못한 채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즉시 분위기를 파악한 형제님은 말 한마디 제대로 붙여보지 못하고 돌아서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아파트 상가를 지나쳐가던 때였습니다. '착해빠진' 형제님의 발길이 자신도 모르게 친구네 집을 향해 되돌려졌습니다. 호주머니에 들어 있던 돈을 모두 털어 친구 부인에게 건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힘 내시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떻게 되겠죠. 우선 거처하실 만한 곳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이것 얼마 되지 않지만 우선 아이들하고 식사라도 하세요."
착하기만 한 형제님, 그 착한 심성을 죽었다 깨어나도 바꾸지 못해 아직도 고생하고 계십니다. 주변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나 불행을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 형제님 앞날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평생 기반 못 잡고 죽을 고생만 거듭하겠지요.
너무 '착해빠져' 탈인 형제님 모습에는 평생 남 좋은 일만 하다가 결국 목숨까지 내어놓으신 예수님 향기와 자취가 그대로 스며들어 있음을 봅니다.
이 세상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복음적 길을 걷고자 하면 할수록 더 많은 고통과 괴로움, 박해와 시련이 따릅니다. 결국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길은 이 세상에서 손해 보는 길, 이 세상에서 바보처럼 사는 길입니다.
주님 수난 성지주일인 오늘, 교회는 고뇌와 비장함으로 가득 찬 예수님 얼굴을 기억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가기 싫어하는 길, 그러나 그 누군가가 반드시 걸어가야 할 길,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외롭게 걸어가십니다.
그 길은 고통과 번민으로 가득 찬 가시밭길이었지만,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길이었기에 두말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그 길은 처절한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는 사형수 길이었지만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길이었기에 기꺼이 걸어가십니다.
길가에 줄지어선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환호성을 올리며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환호 뒤에 숨겨있는 비수같은 생각들을 이미 다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웃는 표정 뒤에 감춰진 사악하고 탐욕스런 마음들을 다 꿰뚫고 계셨습니다. 머지않아 저들의 환호는 돌팔매질로 바뀌고, 저들의 박수소리는 야유와 침 뱉음과 조롱으로 바뀔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향기로운 꽃길만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 길은 고난의 가시밭길, 조소와 야유로 가득 찬 슬픔의 길,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죽음의 길이기도 합니다. 진정 되돌아가고픈 길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걸어가십니다. 십자가 길 그 너머에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만을 바라보며 용기를 내어 걸어가십니다.
주님 수난 성지주일인 오늘은 우리 역시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 언덕길을 올라가는 날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의연하게 주님의 길을 따라가도록 합시다. 고통과 십자가 그 이면에 감추어진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을 깊이 묵상하면서 또 다시 길 떠나는 은총의 성주간이 되길 빕니다.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1 고린 1,18).
하느님의 베푸심과 용서와 사랑
1. 성서이야기
제1독서(이사 50,4-7)는 제2이사야의 중심 주제인 야훼의 종에 관한 내용입니다. 온갖 욕설과 모욕을 받으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는 야훼의 종은 오늘 복음인 수난사화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과 같습니다.
제2독서(필립 2,6-11)에서 사도 바울로는 필립비 교우들이 서로 다투지 말고 일치할 것을 촉구하면서 당시 교회에서 즐겨 부르던 그리스도 의 겸허한 찬가를 전해 줍니다. 교우들이 서로 일치하기 위해서는 겸허한 그리스도를 본받아 모두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22,14-23.56)은 예수님의 최후만찬에서 시작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일련의 사건을 기록한 예수 수난사입니다. 예수 수난사는 네 복음서 모두에 들어 있는데 마르코 복음서가 원형이고 마태오와 루가는 마르코의 수난사를 참작하여 나름대로 편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기 30년 4월6일 저녁 때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어느 이층방에서 마지막 식사를 드신 후 올리브 산기슭에 있는 게쎄마니로 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어떤 일이든 하실 수 있사오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 살고 싶지만 죽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 뜻을 따르겠다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이스가리옷 유다의 배반으로 체포되어 최고의회에 끌려가 밤새도록 심문을 받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독성죄인으로 처형하기로 의결하고 사형언도와 집행권을 가진 빌라도 총독에게 고발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정치와 아무 상관이 없는 분임을 알았지만 군중들의 힘에 의해 할 수 없이 십자가형 언도를 내립니다. 예수님은 30년 4월7일 정오쯤에 골고타로 가서 1시쯤에 처형되고 3시쯤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시편 22장2절의 기도를 바치면서 운명하셨습니다. 4월7일 금요일, 해가 지면서 안식일 겸 과월절 이중축제가 시작되므로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총독의 허락을 받아 서둘러 예수님의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2. 우리의 이해
예수님은 표면적으로는 유다교 종교 지도자들이 지녔던 위기 의식과 제도권 교회의 붕괴 위기 때문에 죽음에 이르렀지만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라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운명하시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휘장이 내려져 있어서 오직 대제관만이 일년에 하루, 속죄의 날에 지성소에 들어가 숫송아지와 숫염소의 피를 받아 뿌렸던 것입니다. 따라서 휘장은 하느님과 인간, 성스러움과 속됨, 영원과 시간을 가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고 유한한 인간이 영원하신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백인 대장의 “이사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고백으로 이방인의 입을 통해서 만백성에게 당신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바야흐로 구원의 보편성이 열리는 순간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의 베푸심과 용서와 사랑의 극치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이룩하신 예수님의 사랑이야말로 인간 구원의 원동력이라 하겠습니다. 교회는 이 한 주간을 성주간으로 지킵니다. 우리 모두 성주간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하느님의 베푸심과 용서와 사랑의 결정체인 십자가를 묵상하고 부활을 맞이하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2001년 4월 8일
나의 분신 나의 십자가
-이기양 신부-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부활 대축일이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한 주간은 부활 대축일을 향해서 나아가는 성주간으로 그 중에서도 절정인 성삼일은 유다의 배반과 최후의 만찬,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극적인 부활로 이어집니다. 십자가 처형이 있기 이전에 예수님 수난이 시작되는데 오늘이 그 시작인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부활이 있기 전에 참혹한 시련인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차에 걸쳐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16,24).
예수님 말씀대로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십자가를 집니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 그 자체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그런 고통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교만한 마음이 고통을 자초했고 성경은 이를 '원죄'라고 부릅니다. 하느님과의 인격적 일치를 잃어버린 이 원죄 상태에서 우리는 분열과 고독, 죄책감 등 불완전한 감각을 얻고 불행에 떨어지고 말았지요. 원죄를 극복하고 원죄 이전의 에덴동산으로, 즉 부활의 영광으로 다시 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만 크고 무거운 십자가가 주어지고 남들의 십자가는 모두 대수롭지 않은 가벼운 것이라고 불평을 합니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십자가는 너무나 무겁고, 다른 사람들의 십자가는 작다고 하느님께 투덜거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 어떻게 저에게만 이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지게 하십니까?"
그 말을 들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네 십자가를 바꾸어 주마."
그러고는 그에게 맘에 드는 다른 십자가를 고르라고 하시며 십자가가 가득한 창고로 데리고 갔습니다. 좀 가벼워 보여 들어보면 그것도 무겁고, 작다 싶어 지어 봐도 그것 역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르고 고르다가 그는 번쩍번쩍 금으로 된 십자가 하나를 골랐습니다. 가운데에 아름다운 보석이 박힌 눈부시게 아름다운 십자가였습니다.
"하느님, 골랐습니다. 이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는 기뻐하며 자기가 고른 보석 십자가를 냉큼 짊어졌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그 십자가는 너무나도 무거웠습니다. 몇 발자국 가지 못해서 어깨 살갗이 벗겨지고 다리가 저려왔습니다.
"아이고, 주님, 너무 무거워서 안 되겠습니다. 다른 것으로 바꾸어 주십시오."
"그래? 바꾸어 주마."
그는 심사숙고하여 십자가를 골랐지요. 이번에는 아주 가볍고 향기로운 장미화관 같은 십자가를 골랐습니다. 자신만만하게 십자가를 지던 그는 곧 소리를 지르고 말았습니다.
"아얏! 따가워."
이번 십자가는 향기도 좋고 가벼웠지만 가시들이 사정없이 찔러대었던 것입니다.
"아이고, 주님, 이것도 안 되겠습니다. 다른 것으로 바꾸어 주세요."
그는 들어보고 내려놓고, 들어보고 내려놓고 하며 이거다 싶은 십자가를 하나 골랐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으로 들고 갔습니다.
"하느님, 드디어 골랐습니다. 가벼운 십자가로 바꿀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웃으며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세히 보아라. 그 십자가는 처음에 네가 졌던 바로 그 십자가란다."
그렇습니다. 내 십자가는 무거워 보이고 남의 것은 다 가벼워 보이는 것이 연약한 우리 마음의 속성입니다.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거부하고 외면하면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는 스승인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외면하고 돈의 유혹에 빠져서 다른 길을 찾아가다가 멸망의 길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나의 십자가는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나의 분신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다시 부활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성주간을 통해 부활의 기쁨을 만끽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곡을 울리며
- 백남용 신부-
예수님의 일생이 정점을 향해 갑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사람들이 지은 죄의 벌을 대신 뒤집어쓰고 죽으실 시간이 다가옵니다. 구세주의 역할이 가장 잘 드러나는 사건인 죽음과 부활이 마치도 한 편의 드라마처럼 긴박하게 펼쳐지려고 합니다. 이 드라마의 서곡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고, 본론은 십자가형을 당하여 죽으시고 묻히심이며, 결론은 부활입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는 성주간의 첫날인 오늘 교회는 장엄하게 서곡을 울리니, 이제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시는데 사람들은 멋도 모르고 환영하던 사건을 기념합니다. 철없는 아이들과 단순한 군중은 예수님을 왕처럼 맞이합니다. 며칠 뒤에는 자신들이 돌변하여 죽이라고 외치고 결국 “유다인들의 왕,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죄목으로 사형집행을 할 것도 모른 채 말입니다. 우리도 오늘 손에 푸른 나뭇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합니다.
하지만 오늘 전례의 복음이 두 개나 된다는 점을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입성 기념 예식을 하면서는 이 대목의 복음(루카 19,28-40)을 읽고, 미사를 진행하면서는 예수님께서 잡혀서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형에 처해지고 숨지고 묻히시는 대목의 수난 복음(루카 22,14-23,56)을 읽습니다. 이를 통하여 이미 서론에서 수난이라는 본론을 예시하는 것입니다. 서곡이란 본래 이렇게 본론의 내용을 담고 있는 법입니다. 며칠 후 목요일에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던 제자들과 이별하게 될 것을 아시고 마지막으로 저녁식사를 같이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영원한 기념 선물을 주셨는데, 바로 당신의 살과 피로 축성한 빵과 포도주의 성사였습니다. 이 식사 후에 올리브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중에 유대인들의 손에 잡히셔서 밤새 고문으로 시달리시고, 금요일 아침에 로마 총독에게 넘겨지셨습니다. 온갖 모함이 난무하는 재판 끝에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가셨으며, 12시경에 못 박혀 달리셨다가 오후 3시경에 숨지셨습니다. 친지들은 그분을 형장 근처의 돌무덤에 안장하고 로마 총독은 무덤 입구를 봉인합니다. 이렇게 한 사람의 실패한 인생 이야기가 끝나는 것일까요?
아니, 우리는 이 사건의 결론을 알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역전극이 부활로써 끝맺어진다는 것을…. 이 역전 때문에 우리는 오늘 전례에서 이 드라마의 서곡을 기쁘게 울립니다. 그분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서곡만 울리고 마시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본론을 함께 꾸며 가야 결론도 함께 꾸밀 수 있습니다. 이 주간에 진행되는 성목요일의 주님 만찬 미사에 참여하여 주님의 살과 피의 성사를 함께 나눕시다. 성금요일의 주님 수난 예식에 참여하여 주님의 수난과 죽으심을 함께 아파합시다. 단식재와 금육재를 지키며 주님의 초상을 치릅시다. 마침내 역전의 기쁨이 용솟음치는 부활을 맞이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자, 이제 서곡을 울립시다!
십자가
-송 봉모 신부-
어떤 사람이 십자가를 지고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주위를 보니 다른 사람들도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예수님의 모습도 보였다.
각 사람이 지고 가는 십자가가 다들 커서 그런지 모두가 땀을 뻘뻘 흘리며 지고 가고 있었다. 이 사람도 자기의 십자가를 열심히 지고 가려 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무거워져 도저히 감당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 이 십자가가 저에게는 너무나 벅차고 무거우니 조금만 잘라주십시오". 예수께서는 기꺼이 그 사람의 십자가를 잘라주었다. "그래, 이만하면 되겠느냐?" 하시면서, 그 사람은 머리를 조아려 예수께 감사하다고 하고 훨씬 가벼워진 십자가를 지고 걸어갔다.
그런데 얼마 후, 그는 다시 예수께 십자가를 조금만 잘라 달라고 하였다.
언제나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예수께서는 기꺼이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이제 그의 십자가는 땅에 끌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가뿐하고 작아졌다. 그리하여 그는 발걸음도 가볍게 지고 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다시 무거워졌다.
그는 다시 예수께 가서 마지막 부탁이니 아주 짧게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했다. 예수께서는 그의 부탁대로 십자가를 잘라주었는데, 이제는 하도 작아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뱅글뱅글 돌릴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고 휘파람을 불면서 십자가를 가지고 갔다. 그러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들을 보며 미련 하다고 생각하였다. "나처럼 주님께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할 것이지. 자기들이 뭐 성인이라고" 하고 중얼거렸다. 한참을 걸어가니 깊은 골짜기가 나타났는데 그 골짜기에는 다리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자 지고 온 십자가를 다리 삼아 놓고 건너갔다.
그런데 이 사람의 십자가는 너무 작아서 걸쳐볼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염치없지만 그는 앞서가는 예수님을 소리쳐 불렀다.
하지만 예수님과 다른 일행은 너무나 멀리 가 그의 절망적인 소리는 가 닿지도 못하고 메아리만 되돌아 올 뿐이었다.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
- 조욱현 신부-
오늘은 ‘성지주일’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축제 기분에 들뜬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성대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기념하고 있다. 이 예수님의 성대한 예루살렘 입성은 수난의 짓누르는 고통을 먼저 거쳐야만 하는 ‘야훼의 종’의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예언적 전조와도 같은 것이다.
제1독서: 이사 50,4-7: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제1독서는 ‘야훼의 고통 받는 종의 셋째 노래’를 전하고 있다. 이 ‘종’은 주님의 사자로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당해야할 고통에 대해 예고하고 있다.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다. 나는 욕설과 침 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는다”(6절). 즉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표현의 일부가 여기서 이미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 종은 주님께 대한 충실성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다. “주 야훼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어 차돌처럼 내 얼굴빛 변치 않는다”(7절).
복음: 루카 22,14-23,56 - 주님의 수난
루가복음에서는 수난에 관계되어 있는 모든 사건들에 대해 그리스도의 절대적 ‘지배력’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휩쓸어버리려는 그 파괴적인 공격을 맞이할 채비를 하고 계시다. 루가 복음에서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당신의 생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심”(9,51-19,27)과 일치시키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예루살렘에서의 사명과, 당신의 마지막 공적 가르침(금화의 비유), 그리고 이후 직접적으로 계속되는 사건들, 즉 최후의 만찬, 겟세마니, 재판, 십자가, 부활과 그후의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들을 일치시키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빠스카를 거행하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이 과월절 음식을 함께 나누려고 얼마나 별러왔는지 모른다”(22,15절). 이 빠스카는 확실히 죽음을 통한 봉헌의 표지로서 식탁에 놓여졌던 최후의 만찬의 빵과 포도주로 상징되는 그분의 생명을 통한 희생적 봉헌의 예표이며 동시에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22,19-20절).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도 당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걱정을 하신다. 그래서 슬픔에 잠겨 십자가를 따라오는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의 여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하여 울어라...생나무가 이런 일을 당하거든 마른나무야 오죽하겠느냐?”(23,28.31절). 그러나 애석하게 생각하고 울어야 하는 사람은 패배당한 것같이 보이고 천시당한 예수님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죽음에 처한 사람들이다. 실제로 이 여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하는지를 모르면서 우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마지막 순간에 있어서도, 다른 공관복음의 절망적 외침인,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시편 21,2)가 아니라, 아버지께 평온히 의탁하는 태도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23,46절; 시편 30,6). 그러므로 아버지 ‘하느님’이 ‘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다.
이렇게 루가복음은 예수님의 수난사를 과장되게 표현하지는 않지만, 인간으로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께서 가지셨던 ‘고뇌’에 대해서 아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마음의 고통과 싸우면서도 굽히지 않고 더욱 열렬하게 기도하셨다. 그러는 동안 핏방울 같은 땀이 뚝뚝 흘러 땅에 떨어졌다”(22,44). 이 표현은 예수께서 ‘수난’을 능히 극복하고 지배하실 수 있지만, 죽음 앞에서의 인간적 한계와 번민에서 그를 제외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 위대하신 것이다. 이 때에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의탁함으로써만 절망의 공포와 유혹을 물리칠 수 있으셨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22,42). 그러므로 예수님의 인성(人性)은 지극히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처지에 처하게 되는 바로 그 때 참으로 신성(神性)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이 수난기가 하나의 역사적 사건만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신비가 드러나는, 즉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들과 군인들의 태도와는 달리 적개심보다는 호기심과 놀라움에 가득차 있었다. 그들 마음에는 후회의 감정이 있었다. “구경을 하러 나왔던 군중도 이 모든 광경을 보고는 가슴을 치며 집으로 돌아갔다”(23,48). “이 모든 광경을 보고있던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 사람이야말로 죄없는 사람이었구나!’하고 말하였다”(23,47). 이는 마르 15,39에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로 더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백인대장의 이 고백은 그 고백자체보다도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영광’을 직관할 수 있는 그 능력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의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을 변화시켜 ‘구원’되도록 한다. 오른 쪽 강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함께 못 박힌 다른 강도의 예수께 대한 조롱에 “‘너도 저분과 같은 사형선고를 받은 주제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이야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하고 꾸짖고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하고 대답하셨다(23,40-43).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음은 그 강도에게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은 인간의 모든 비열한 행위와 배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의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에게만 보장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것을 모르고 잘못하고 있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23,34). 이렇게 우리를 위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제2독서: 필립 2,6-11: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높이 올리셨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십자가상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시는(6-8절) 그리스도의 낮추심에 대한 훌륭한 묵상이며 찬가라고 하겠다. 그분은 십자가에 돌아가시지만 그것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9-11절). 이렇게 빠스카의 빛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순간 온 땅을 뒤덮었던 그 무서운 어두움을 이미 벗겨내고 있다(루가 23,44).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하느님을 생각하십니다
-서공석 신부-
오늘 들은 루가복음서의 수난사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사람들이 하는 일이 대조적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면서 사람들을 살리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부인하고 죽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이별하는 최후만찬에서 유언을 남기십니다.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또 포도주 잔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 잔은 그대들을 위해 쏟는 내 피로써 맺는 새 계약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당신을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식탁에서 서로 다툽니다. 그들 중에 누가 제일 높으냐는 문제로 다툽니다. 인류가 집단을 이루어 살면서부터 줄곧 다투는 문제입니다. 인간은 남을 지배하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우러러보고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그런 강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나는 그대들 가운데 시중드는 사람처럼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하느님 자녀의 처신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곳에는 폭력과 좌절과 죽음이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섬기는 곳에는 사랑과 희망과 생명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지배하지 않고 섬겨서 생명이 자라게 합니다. 효도, 부부애, 우정, 이런 것이 우리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모두 섬겨서 생명을 보살피는 인간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유다는 돈 몇 푼을 받기로 하고 스승을 잡아 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체포되자 신변의 불안을 느낀 나머지 스승을 모른다고 공언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쉽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돈 몇 푼이 소중하여 이웃을 배신하고 버립니다. 정치한다는 사람들은 국민을 위해 일한다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찾는 것은 자기 자신과 자기 패거리의 영달입니다. 우리는 그런 말이 지닌 이중성을 신물 나게 보아왔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배신하고 속이고 버리는 일을 예사로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동족인 예수님을 그들이 미워하던 이교도 지배자인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고발합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식민지에서는 로마총독만이 사람을 사형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반란 선동죄로 총독에게 고발합니다. ‘우리고 보니 이자가 우리 민족을 이간하여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게 하고 자칭 그리스도 왕이라 하였습니다.’ 유다를 식민지로 지배하는 로마제국을 거슬려 선동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이런 고발로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은 정치범이 되었습니다. 점령하고 통치하는 로마 총독이 철저하게 다스려야 하는 정치적 반동분자입니다. 식민지 유다의 지도자들은 오늘 점령국의 총독 빌라도 앞에서 로마제국의 충실한 신민(臣民)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미워하는 그 생명을 없애 버리기 위해 그들이 평소에 가졌던 민족적 자존심마저 버립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가르치고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죄인이라 판단하고 버린 사람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비와 용서에서 아무도 제외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거짓 예언자로 보았습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하느님은 죄인을 미워하고 벌주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은 사랑하고 자비하신 분이었습니다. 유대교 기득권자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권위에 감히 도전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그들의 권위와 그들을 높은 지위에 올려 준 제도였습니다.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다반사로 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맞서는 자들을 미워하고 짓밟고 죽입니다. 미움은 남을 먼저 죽이고, 자기 자신도 영원히 죽는 악마적 힘입니다.
루가복음서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헤로데에게 보낸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조롱한 다음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냅니다. 이어서 복음서는 말합니다. ‘전에는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 날 서로 친구가 되었다.’ 헤로데는 젊었을 때 로마에 유학하였습니다. 그는 로마 황제 주변 인물들과 친분을 유지하였습니다. 따라서 총독인 빌라도는 그를 불편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날 예수님을 결박하여 서로 주고받으면서 친구가 되었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제삼자를 함께 미워하고 짓밟으면서 쉽게 동료 의식을 갖습니다. 흔히 제삼자에 대한 우리의 입방아는 우리끼리 동료 의식을 갖게 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유대교 지도자들과 군중은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바라빠를 택합니다. 바라빠는 폭동과 살인죄로 체포된 인물이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권위에 도전한 예수님은 폭동과 살인을 범한 자보다 더 괘씸한 죄인입니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권좌에 앉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자기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분노를 느낍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이 사람을 미워하고 벌하고 죽이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이 용서하고 살리시면, 그들 안에 소용돌이치는, 미워하고 죽이는 힘을 정당화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용서하고 살리시는 분이라고 확신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당신도 용서하고 살리는 실천을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 하느님도 과연 용서하고 살리시는 분인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하고 살리는 노력을 하고 있다면, 우리도 용서하고 살리는 하느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하느님을 생각하십니다. 예수님에게 죽음을 넘어서 미래는 하느님이십니다. 루가복음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라고 기도하고 숨을 거두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고 믿으셨습니다. 하느님이 살리시는 분이라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살리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여 살리셨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재물과 권위는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소중히 지키는 수단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무자비와 미움의 힘을 동원합니다. 섬김과 용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기념하여 행하는 성찬은 이 섬김과 용서를 인류역사 안에 살아 흐르게 합니다. 그 성찬에 참여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 섬김과 용서를 몸짓으로 역사 안에 현실로 살아있게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도 공범자이다.
-유영봉 신부-
묵상길잡이 : 무죄한 예수님을 죽음에로 내 모는데는 빌라도와 유대지도자들과 제자들과 유다스와 군중들이 각자 자신들의 몫을 하였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의 비겁함과 죄악이 예수님을 죽음에로 내몰았다. 그러한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1. 죽음을 향한 예루살렘 입성.
오늘은 사순절(빠스카 준비시기)이 막바지에 이르고, 죽음을 통해 생명에로 건너가는 빠스카 신비가 그 절정을 이루는 성주간이 시작되는 주의 수난 성지(聖枝)주일이다. 나뭇가지를 흔들고 옷을 벗어 길에 깔며 환호하던 군중들은 현세적 부귀영화가 아니라, 십자가의 희생을 요구하는 메시아를 향해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하며 외치고 있다.
2. 무죄한 예수님의 죽음에 공모한 사람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시에 성혈을 축성하시면서 "너희와 많은 사람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흘릴 피"라고 하셨다. 이는 당신이 십자가에서 한 마리의 속죄 양으로 많은 사람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피를 흘리고 죽을 것임을 선언하신 말씀이다. 교회는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한마디로 예수님의 죽음을 설명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제물로 내놓으셨음을 말하는 것이다. 수난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을 둘러싼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함께 예수의 죽음에 일조(一助)를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예수님의 죽음은 옛날의 1회 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동참으로 역사 안에서 지금도 계속되는 사건임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마태26,15): 예수님의 처형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고 공모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마태26,3-4)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기득권(旣得權)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는 예측할 수 없는 존재였다. 「선전 정화」(마태21,12-17)에서 보듯이 성전 세와 장사꾼들에게서 받는 수입원(收入源)을 깡그리 없앨 수 있는 위험인물이었다. 어둠은 빛을 거부한다. 예수는 그들에게 '눈의 가시'였다.
스승님 안녕하십니까?(마태26,49):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마태26,15) 유다는 스승을 당시 노예 하나 값인 은돈 서른 닢에 팔아 넘겼다. 돈에 대한 욕심은 인간을 눈멀게 한다. 황금만능 풍조에 찌들은 많은 이들에게는 '돈이 바로 하느님이기에'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밀고와 배신과 청부살인은 인간이 사는 곳이면 항상 있는 지 모른다.
그때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마태26,56): 현세적인 출세를 꿈꾸며 예수를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스승이 체포되자, 자신들에게 닥칠 위험을 예견하고 하나같이 도망쳤다. 신앙 때문에 어떤 불이익이라도 생긴다면 언제나 도망칠 수 있는 신자들은 지금도 많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26,74)하며 세 번이나 배반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무기력한 우리의 모습이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마태27,23):"군중을 움직이는데는 복잡하고 깊은 철학보다 한 두 마디 선동적인 구호가 더 효과적이다."는 말이 있다. 매스컴의 암시에 따라 덩달아 춤을 추는 여론재판과 관제데모, 어용 NGO 등은 요즘도 흔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때로는 진상(眞相)을 잘 모르면서도 선입견이나 남의 말을 듣고 '죽일 놈', '몹쓸 사람'으로 단죄하기도 한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마태27,24)
예수의 죄 없음을 알고있던 빌라도 총독은 "폭동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마태27,14) 예수의 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면서 "너희가 알아서 처리하여라."하며 예수를 넘겨주고 만다. 유다 지도자들은 "그 사람을 풀어주면 총독께서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오. 누구든지 자기가 임금이라고 자처하는 자는 황제에게 대항하는 것이오," (요한19,12)하며 예수님을 카이사르의 정적(政敵)으로 부각시킨다.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한 사람으로 「동향보고」라도 올라간다면 출세는 끝장이 아닌가? 예수님은 갑자기 정치범이 되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자신의 정치생명을 위해서는 무죄한 줄 알지만 몇 명 아니 몇 천명쯤 죽이는 것은 정치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3. 우리도 예수의 죽음에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기득권 수호와, 돈 욕심과, 비겁함과, 정치적 출세를 위해 공모한 합작 품이었다. 예수 사건(Christ-event)은 2천년 전에 끝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또 다른 예수 사건이 우리 주변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의문사 '진상규명'활동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도 그런 일에 때때로 동참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죄악과 하느님의 사랑이 극적으로 만난 사건이었다.
이 성주간에 작은 결점이라도 고치며 회개로 죄에 대하여 죽고 새로 사는 길을 찾자. 아무도 "나는 예수의 죽음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다.
바라빠!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봅니까?
-천정철 신부-
“그자는 없애고 바라빠를 풀어 주시오.”(루카 23,18) 바라빠는 바르(Bar: 아들) 압바(abbas: 아빠)의 합성어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바라보는 저에게 이 이름은 한분 아버지의 자녀들인 우리 모두를 지칭하는 것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바라빠를 풀려나게 하고 십자가형을 당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자녀(바라빠)인 우리 모두를 죽음에서 풀어주십니다.
죽음에서 풀려난 이 바라빠가 바로 나임을 당신은 봅니까? 예수님 덕분에 생명을 얻은 바라빠! 그 삶의 여정을 ‘오늘’(구원을 현재화하는 루카복음의 특성) 우리가 걸어갑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23,34) 예수님은 당신을 처형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볼 눈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늘 용서받는 삶을 살고 있음을 봅니다. 바라빠! 당신은, ‘내가 죽인’ 그분이 ‘나를 살리는’ 무한히 용서하시는 사랑임을 봅니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23,43) 뉘우치는 죄수에게 예수님은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죄로 인한 절망적인 죽음의 순간조차도 그분의 사랑으로 구원의 현재, 즉 영원한 ‘오늘’이 됨을 봅니다. 바라빠! 당신은 지난날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안에서 당신을 위한 ‘오늘’을 봅니까?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23,46) 죽음은 예수님에게 끔찍한 무엇이 아니라 기도 속에서 아버지의 자비로운 품으로 돌아가는 사랑의 완성입니다. 바라빠! 당신은, 기도 속에서 완전히 내어맡기는 죽음이 삶의 완성임을 봅니까?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백인대장”은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23,47)고 고백하며 십자가가 하느님 체험의 자리임을 봅니다.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은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23,48)갑니다. “의로운 분”의 죽음에서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그들은 변화된 상태로 돌아갑니다. 제자들조차 도망갔음에도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분을 함께 따라온 여자들”은 “그 모든 일을 지켜보았”(23,49)고 또한 “무덤을 보고 또 예수님의 시신을 어떻게 모시는지 지켜보고”(23,55) 나중에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됩니다.
바라빠!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봅니까?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양승국신부-
<그래도 가야할 길>
수난 복음을 묵상하는 제게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것은 십자가 상 예수님께서 우도에게 보여주신 자비입니다.
예수님의 오른편 십자가에 매달려 있던 우도가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이란 표현을 씁니다.
이 말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가장 극형인 십자가형을 받아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인간, 죄란 죄는 다 짓고 살아온 인간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구제불능의 인간, 십자가형에 처해져야 마땅한 인간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평생을 죄만 짓고 살아온 인간이었던 우도가 죽기 단 몇 시간 전 예수님과의 극적인 만남을 통해 천국을 보장받게 됩니다.
십자가 상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제자 요한에게도, 수제자 베드로에게도 건네지 않으셨던 말씀, “구원을 확증하는 말씀”을 던지십니다.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언제나 습관적이 죄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하는 우리, 똑같은 죄를 매번 반복함으로 인해서 죽고만 싶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그 말씀은 진정 희망과 위로를 건네는 말씀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임종하는 순간에도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말씀, 구원을 주는 말씀을 건네시는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에 마음이 다 짠해옵니다.
주님 수난 성지주일인 오늘, 교회는 고뇌와 비장함으로 가득 찬 예수님 얼굴을 기억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가기 싫어하는 길, 그러나 그 누군가가 반드시 걸어가야 할 길,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외롭게 걸어가십니다.
그 길은 고통과 번민으로 가득 찬 가시밭길이었지만,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길이었기에 두말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그 길은 처절한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는 사형수 길이었지만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길이었기에 기꺼이 걸어가십니다.
길가에 줄지어선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환호성을 올리며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환호 뒤에 숨겨있는 비수 같은 생각들을 이미 다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웃는 표정 뒤에 감춰진 사악하고 탐욕스런 마음들을 다 꿰뚫고 계셨습니다. 머지않아 저들의 환호는 돌팔매질로 바뀌고, 저들의 박수소리는 야유와 침 뱉음과 조롱으로 바뀔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향기로운 꽃길만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 길은 고난의 가시밭길, 조소와 야유로 가득 찬 슬픔의 길,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죽음의 길이기도 합니다. 진정 되돌아가고픈 길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걸어가십니다. 십자가 길 그 너머에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만을 바라보며 용기를 내어 걸어가십니다.
주님 수난 성지주일인 오늘은 우리 역시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 언덕길을 올라가는 날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의연하게 주님의 길을 따라가도록 합시다. 고통과 십자가 그 이면에 감추어진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을 깊이 묵상하면서 또 다시 길 떠나는 은총의 성주간이 되길 빕니다.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1 고린 1,18)".
-심흥보신부-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가르쳐주십니다. 최후의 만찬 때엔 마치 부모가 자식을 먹이기 위해 밖에서 갖은 고생을 다해 먹을 것을 마련해 주듯이 당신의 몸과 피를 다 쏟아 부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며 성체성사를 세워주시고, 또 자식에게 잔소리하는 어머니처럼, 겸손하고 믿음을 잃지 말라고 당부하시고 미리 일어날 일까지 언급하시면서 그 대비책까지도 알려주신다.
"그러나 나는 네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나에게 다시 돌아오거든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다오."(루가 22,32) 또 어둠에 앞서 준비시켜주시고, 기도하시면서도 주님의 목숨보다는 우리 인간들의 구원을 생각하여 수난의 잔을 받겠다고 하시며 아버지께 그 잔을 받을 힘을 달라고 청하신다. 그리고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의 귀를 고쳐주시고, 이리 저리 책임을 회피하려는 대사제들과 빌라도와 헤로데에게 겁 한번 주시지 않으시고, 자기를 위로하는 여인들을 거꾸로 걱정해주신다. 심지어는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23,34)
예수님은 진정 "사랑은 이렇게 하는 거야.", "이 정도는 되야 사랑이라고 할 수 있어." 하고 그 모범을 보여주시는 듯 합니다. 그래서 오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던지 희망을 가져도 될 만큼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사순절엔 악마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희망을 잃고 포기하도록, 사랑을 중단하도록 갖가지 나쁜 일들을 만들어 냅니다. 마치 우리가 얼마만큼 견딜 수 있나 시험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 악마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끝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다가서서 희망을 잃지 않고 사랑을 더해나가도록 합시다. 참으로 십자가의 예수님은 우리가 믿고 의지할만한 분이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오른쪽에 달려있는 죄수가 말합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루카 23,42) 이 사람은 죽어 가는 사람에게 무엇을 청하고 있습니까? 곧 죽으면 그만인데, 그 죽어 가는 사람에게 청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에게서 무엇을 발견했을까요? 그는 예수에게서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꽃을 발견했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을 생명의 양식인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박상대신부-
교회는 오늘 주님수난성지주일을 시작으로 1년 전례력 가운데 가장 거룩한 한 주간인 성주간(聖週間)을 맞이한다. 성주간은 예수께서 비천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시작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는 월요일, 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시는 화요일, 유다의 실제적인 배반과 최후의 만찬을 준비시켜 그 만찬에 임하시는 수요일,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을 통해 성체성사를 제정하시고, 친히 제자의 발을 씻겨 사랑의 본보기를 주시며, 게쎄마니 동산에서 피땀 섞인 마지막 기도를 아버지께 바치신 성목요일,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체포되어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결국에는 사형선고를 받고 갖은 수모와 조롱의 십자가를 지고 죽음에 이르는 성금요일, 살아 계실 적에 한 번도 누리지 못했던 안식의 무덤에 묻히시는 성토요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어찌 거룩한 주간이라 할 수 있는가? 온통 배신과 처절함으로 가득 찬 한 주간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주간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것은 이 모든 과정이 최고의 인류구원사건이라 불리는 부활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죽음으로 끝날 세상에 생명을 가져온 초유(初有)의 사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주간의 이러한 의미는 오늘 주님수난성지주일의 모든 전례 독서에 잘 담겨져 있다. 오늘 성지주일의 전례는 제1부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념식과 제2부 수난복음을 중심으로 한 미사로 구성된다. 특히 제2부 미사에서 봉독되는 야훼의 종의 셋째노래를 담은 제1독서(이사 50,4-7)와 바울로 사도가 펼치는 그리스도론의 핵심이라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강생신비와 찬가를 담은 제2독서(필립 2,6-11)는 성주간의 의미를 마음껏 표현하고 있다. 이어지는 수난복음(루가 22,14-23,56)에서는 성주간의 절정을 이루는 성삼일(聖三日) 전례의 만찬, 수난과 죽음, 묻히심의 사건을 미리 앞당겨 기념한다. 제1부에서는 성지(聖枝)를 축복한 후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복음(루가 19,28-40)을 듣고 손에 성지를 들고 행렬하는 예식을 갖는다. 축복한 성지를 손에 들고 행렬하는 예식은 당시 군중이 나뭇가지를 꺾어다 길에 깔았던 것(마태 21,8; 마르 11,8)과 손에 종려나무 가지들을 들고 예수님을 환영한 것(요한 12,13)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듣는 루가복음에는 나뭇가지 이야기가 빠져있다.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은 제자 둘을 시켜 새끼 나귀 한 마리를 구해 오도록 하신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정의와 평화의 왕이시기도 하다. 이미 예언자 즈가리야가 외쳤듯이 예수께서는 세상의 왕들이 타는 군마(軍馬)가 아닌 겸손을 상징하는 나귀를 타시는 것이다: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찾아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어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시리라."(즈가 9,9-10)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님을 향하여 군중들이 만세를 외치며 환호하고 그 가시는 길에 겉옷과 나뭇가지를 깔고서 열광하는 모습은 솔로몬의 즉위식(1열왕 1,38-40)과 예후의 즉위식(2열왕 9,12-13)을 연상시킨다. 군중들의 이러한 태도는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께서 솔로몬이나 예후와 똑같은 왕으로 군림하기를 기대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오늘 루가복음에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이여, 찬미 받으소서! 하늘에는 평화, 하느님께 영광!"(38절)하며 외쳐댔던 이들은 막연한 군중이 아니라 수많은 제자들(37절)이었다는 점, 군중 틈에 끼어있던 바리사이파들의 난데없는 간섭(39절)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40절)은 따로 시간을 내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오늘의 전례가 관중들의 믿음과 불신, 환호와 배신, 기쁨과 슬픔 등의 두 가지 서로 다른 감정의 측면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게 된다. 결국 오늘 전례는 사뭇 의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환호하고 박수를 치며 기뻐하는 군중들과 천진난만하게 기뻐하는 어린아이들 에 둘러 싸여 성대하고 웅장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우리들도 오늘 이 미사를 시작하면서 행렬을 통하여 그 기쁨에 동참한다. 그러나 곧바로 미사 중에 듣게 되는 수난 복음을 통하여 기쁨과 환호의 장면들이 일 순간에 사라지고 모든 것이 아픔과 죽음으로 향하는 비탄에 젖은 분위기를 느껴야 한다. 이런 까닭에 오늘 주일을 "성지주일"(환호와 열광), 또는 "수난주일"(아픔과 죽음)이라 하며, 이 둘을 합쳐서 "주님수난성지주일"이라 부르는 것이다. 사실상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활 중에 한번도 스스로 영광을 받으려 하시지 않았다. 병자들과 악령 들린 사람들을 치유하는 기적을 행하신 후에도 당신의 이름을 알리지 말기를 단단히 당부하셨으며,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 천명 이상의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푸신 후에 군중들의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 했지만 그분은 거절하시고 오히려 그 자리를 피하셨다.
그러나 오늘은 예수께서 지금껏 받지 못하셨던 영광을 허락하시고 환호와 열광을 한 몸에 받으신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하고 군중들이 외친다. 이는 곧 예수께서 당신이 왕이며 메시아임을 부르짖는 군중의 고백을 받아들이시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제 머지않아 몸소 수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또 부활하심으로써 친히 영원한 왕이시며, 메시아로서 드러나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왕이며 메시아라 부르고 환호하던 군중들은 백성의 대사제들과 원로들, 그리고 율법학자들의 선동에 빠져들어 마음이 변한다. 그들은 돌변하여 살인자 바라빠를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부추긴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차츰 빈자리가 생기기 시작하나. 군중들과 당신의 친 제자 유다스만이 당신을 배반하여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겁에 질려 예수를 버리고, 베드로까지도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였다. 결국 사형선고를 받으신 예수님! 머리 위에는 왕관이 아닌 가시관이 씌워지고 채찍질에 온몸이 헤어져 피범벅이 된 예수! 이제 그분은 몸소 매어 달리실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로 향하신다. 언젠가 그분은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매일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이다.
한때는 환호하고 열광하던 군중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옆에 따라 가면서 침을 뱉고 조롱하는 구경꾼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구경꾼인가? 동반자인가? 아니면 방관자인가?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행렬에 임하고 있는가? 또 어떤 마음으로 수난복음을 들었는가? 우리가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며 "호산나"를 외치는 것은 그분이 진정 메시아요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처절한 고통의 수난복음을 듣는 것은 우리도 그분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그 위에서 목숨을 내어놓기 위해서이다. 이제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이 되었고 그분의 십자가는 우리의 십자가가 되었다. "사랑하올 주 예수님,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당신을 낮추셨으니, 거만한 저희를 용서하소서. 그러나 하느님께서 모든 것 위에 당신을 높이셨으니, 나약한 저희를 받아주소서. 이제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고백하나이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시여!"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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