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불필, 영원에서 영원으로

나뭇잎숨결 2012. 9. 22. 23:16

 

 

 

 

 

영원에서 영원으로 가는 대자유인의 길을 이끌어주신 성철 큰스님.
나는 지중한 인연으로 큰스님의 딸로 태어났지만 단 한 번도 아버지라 불러보지 못했다. 그리고 열일곱 살에 안정사 천제굴에서 뵌 순간부터 큰스님은 내게 아버지가 아니라 스승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주변 분들은 나를 큰스님의 딸로서만 바라보는 듯하다.
나는 큰스님에게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리 있어야 하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큰스님 영결식과 연화대 다비식에도 참석하지 못했고, 다비식 날 늦은 오후에야 금강굴 위 다비장에서 사그라지는 불꽃을 바라보며 절을 올릴 수 있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다해 다시 만나 뵐 것을 약속하는 아홉 번의 절이었다. -「책을 펴내며 : 어디로 가고 있는가」 중에서

묘관음사 입구에 도착하니 어느덧 해질 무렵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산기슭을 따라 한참 올라갔더니 우둘두둘 무섭게 생긴 스님이 보였다. 상상 속에 그려왔던 아버지의 모습은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의 도반인 향곡스님이었다. …… 아버지 큰스님은 아마 우리가 올 것을 알고 어디론가 피해 계셨던 것 같다. 조금 있다가 향곡스님과 함께 다 떨어진 누더기를 걸친, 눈이 부리부리한 스님 한 분이 나타났다. 마음속으로 ‘저 분인가?’ 하는 순간, 그분이 소리를 크게 질렀다.
“가라, 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삼촌의 손을 꼭 잡고 돌아서버렸다.
“집에 가자, 삼촌!” -「아버지 성철스님을 처음 만나다」 중에서

한번은 큰스님이 계신 범어사 원효암으로 찾아갔더니 동화사 금당선원에 있다가 은혜사, 운부암을 거쳐 금강산으로 갔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큰스님이 금강산 마하연에서 정진했던 해가 1940년이었으니 출가한 지 4년쯤 지났을 때였다. 할머니가 천리 길을 물어물어 온갖 고생을 감내하면서 금강산 마하연까지 찾아갔는데 큰스님은 “이렇게 먼 길을 왜 오셨소!” 하고 고함부터 치며 냉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아니, 난 니를 보러 오지 않았다. 하도 금강산이 좋다고 해서 금강산 구경하러 왔제”라고 했다. 이 대답에 큰스님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셨다. 그 상황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요즘처럼 교통편이 좋은 때도 아닌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시절, 그 먼 길을 찾아온 어머니와 그분을 마주한 아들의 기막힌 심정은 당사자들만이 알 것이다. -「할머니의 성스러운 모정」 중에서

당시 성전암에는 행자 세 명이 큰스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었던 동업행자(천제스님)에게 들은 이야기다.
“인기척이 나서 밖으로 나가보니 웬 젊은 부인이 스님 뵙기를 청해요. ‘큰스님께선 지금 아무도 안 만나주시니 그냥 돌아가주십시오’라고 했는데도 스님을 만나야 한다는 말만 반복해요. 해질 무렵이 되자 그분이 어딜 갔는지 사라졌어요. 당연히 돌아갔나 보다 하고 저녁 공양을 마쳤죠. 공양이 끝나고 큰스님이 시자실로 오셔서 막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데, 우당탕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니 낮에 보았던 그분이 들이닥치는 거예요.”
“스님, 내가 할 말이 있어 왔소!”
…… 어머니가 쫓겨날 것을 뻔히 알면서 큰스님을 찾아간 것은 ‘그렇게 도가 좋으면 혼자 가면 되지 왜 하나밖에 없는 딸까지 데려가느냐? 딸만이라도 돌려주면 이 세상 누구 못지않게 훌륭한 사람을 만들어볼 것이요’ 하고 담판을 짓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말 한 마디 꺼내보지 못하고 쫓겨났고 말았으니, 빈 걸음으로 돌아오던 그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 -「가슴에 묻은 어머니의 꿈」 중에서

지금 읽어봐도 큰스님의 법문은 명철하면서도 현대적인 언어로 쓰여 있어 귀에 쏙쏙 들어온다. 1950년대, 그러니까 큰스님의 연세 40대 중반에 작성하신 것인데 어쩌면 그렇게 내용이 일목요연하고, 문장 또한 군더더기 하나 없이 논리정연한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

부처님께서 도를 깨치시고 처음으로 외치시되 “기이하고 기이하다. 모든 중생이 다, 항상 있어 없어지지 않는〔常住不滅〕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구나! 그것을 모르고 헛되이 헤매며 한없이 고생만 하니, 참으로 안타깝고 안타깝다”고 하셨다.
이 말씀이 허망한 우리 인간에게 영원불멸의 생명체가 있음을 선언한 첫 소식이다. 그리하여 암흑 속에 잠겼던 모든 생명이 영원한 구제의 길을 얻게 되었으니, 그 은혜를 무엇으로 갚을 수 있으랴. 억만 겁이 다하도록 예배드리며 공양 올리고 찬탄하자.
영원히 빛나는 이 생명체도, 도를 닦아 그 광명을 발하기 전에는 항상 어두움에 가리어서 전후가 캄캄하다. 그리하여 몸을 바꾸게 되면 전생(前生)일은 아주 잊어버리고 말아서, 참다운 생명이 연속하여 없어지지 않는 줄을 모른다. -「큰스님께서 써주신 수행자 교과서」 중에서

또한 큰스님은 남을 돕는 일에 대해 이렇게 발원하게 하셨다.

시방세계에 항상 계시옵는 모든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비옵나이다. / 아 거룩한 부처님이시여! / 나를 위하여 남을 해침은 불행의 근본이요 / 참다운 행복은 오직 나를 버리고 남을 돕는 데서 옴을 깨달았사오니 / 항상 내 몸을 돌보지 않고 오직 남을 위해 일하고 사는 사람이 되어 영원한 행복을 받는 길로 이끌어주시옵소서. / 모든 중생들을 친함과 원수의 차별이 없이 / 다 부모나 부처님과 같이 정성을 다하여 섬겨 / 중생들에게 이익 되는 일은 무엇이든지 힘을 다하여 돕겠나이다. / 아 부처님이시여! / 모든 중생들이 어리석어서 지은 바 / 많은 죄악은 전부 제가 가지고 참회하겠사오며, / 모든 중생들이 죄악의 결과로써 받는 말할 수 없이 / 지극한 쓰라린 고통을 전부 제가 대신하여 받겠사오니 / 그 불쌍한 중생들이 모든 고통을 벗어나 / 모두들 다 같이 함께 다시는 위없는 영원한 행복을 얻게 하여 주옵심을 빌고 빌어 마지 아니 하옵나이다. / 나무 석가모니불 -「3천 배 수행으로 친구의 불치병을 치유하다」 중에서(처음 발표되는 성철스님 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