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이영호, 시간의 방향에 관한 소고

나뭇잎숨결 2012. 9. 16. 09:15

 

 

 

 

 

 

時間의 方向에 관한 小考*

이 영 호**한양대

서 언

방향(方向)이란 일정한 기준이 정해지면서 생겨나는 일종의 공간적인 표상방식이다. 예컨대 앞(前方)은 뒤(後方)를 기준해서 앞이 되고, 뒤는 앞에 기준해서 뒤가 되는 바, 뒤는 우리가 돌아서게 되면 앞이 되고 돌아 서기 전의 앞은 오히려 뒤가 된다. 그래서 사물이 우리를 기준으로 해서 뒤로(後向) 나아 가는 것도 그 나아 가는 사물에서 기준을 잡으면, 사실은 앞으로(前向) 나아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의 진행은 심지어 그 역진(逆進)까지도 그 사물의 기준에서 보면, 사실은 앞으로 나아 가는 것(前進)이라고 봄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또한 예컨대 이쪽과 저쪽도 기준에 의해서 성립되는 바, 저쪽은 오직 이쪽의 기준에서 저쪽이 된 것이니 저쪽의 기준에서 보면 이쪽이 오히려 저쪽이 된다. 그래서 기준점을 저쪽에서 잡아 볼 때, 분명 이쪽으로 오는 과정도 이쪽에서 보아 저쪽으로 지나 가는 과정으로 잘못 보이게 되는 수도 있다. 우리가 달리는 기차 안에서 긴 여행을 할 때 분명 기차는 저쪽에서 이쪽으로 지나 왔건만 지나 온 그 긴 과정이 지나 간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것은 이쪽만을 기준 삼아 지나 온 과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차가 지나 올 때 주변의 전신주나 산천이 지나 가는 것처럼 보였던 바,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적으로 본다면 기차를 기준 삼아 볼 때 그것들이 지나 갔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이 때도 그것들은 그것들을 기준 삼아 보면 앞으로 나아 가는 것이다- 일상적인 세계에서는 그것은 착각으로서 지나 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우리의 기차만이 이쪽으로 지나 온 것일뿐이다. 우리 앞을 방금 지나 가는 자동차도 그 자동차를 기준 삼아 보면 그저 저쪽으로 지나 가는 것이 아니라, 있던 곳에서 있는 곳으로 (그래서 있는 곳에서 없는 곳으로), 곧 앞으로 나아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앞으로 나아 간다는 것은 그 차가 있는 곳을 기준 삼을 때 곧 이쪽으로 지나 오는 것이다. 따라서 사물이 지나 간다는 것은 사물 이외의 관점(觀點)에서 본 착각이며 모든 사물의 진행은 그 사물을 기준 삼아 보면 지나 가는 것이 아니라 이쪽으로 지나 오는 것이다. 그런데 지나 오는 것은 곧 앞으로 나아 가는 것이니 사물의 진행은 있던 곳에서 있는 곳으로 (그래서 없는 곳으로) 나아 가기 때문이다.


그러면 시간의 방향이란 대체 무엇인가?


사람들이 표상(表象)하는 시간의 방향에는 두 가지 조건이 전제되어 있다. 그 첫째 것은 시간이 흘러 가는 어떤 실재(實在)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둘째 것은 그 흐름의 방향을 표상할 때 미래(未來)나 현재(現在) 또는 과거(過去)라는 시위(時位)에다 기준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前提) 밑에서 비로소 사람들은 시간이 미래로부터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후향(後向)적으로 흐른다고 보거나 -이것이 일반적인 표상이다- 과거로부터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전향(前向)적으로 흐른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일반적인 표상방식 외에 일부 사상가들 가운데는 현재를 기점(起點)으로 시간 곧 과거와 미래가 의식 속에서 지향(志向)적으로 구성된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간의 흐름 자체가 미망(迷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만약 시간이 사물의 흐름과 독립된 실재가 아니고 사물의 흐름과 불가분리적인 어떤 것이거나 그 대명사(代名詞)적 표현에 불과하다면, 이른바 시간의 방향은 사물의 흐름의 방향에서 해명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관점에 서서 지난 날 제 사상가들의 견해들을 음미하면서 시간의 방향에 대한 정합적인 해명을 시도하기 위해서 준비되었다.

1. 시간의 개념규정(槪念規定)

오랜 세월동안 우리 인간이 믿어 온 가장 큰 미신 가운데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흐르는 시간이 실재한다>는 믿음이다. 모든 인류가 의식의 발달과 더불어 굳게 믿어 온 이 미신은 낮과 밤, 달과 해가 바뀌는 이른바 세월의 흐름 속에서 기다림이라든가 나이가 먹어간다고 하는 자명한 시간적 경험에서 생겨 난 것이기에 의심 받지 않고 매우 집요하게 믿어져 왔던 터이다. 그리하여 심지어 인류 가운데 가장 천재라고 불리우는 물리학자였던 뉴톤까지도 이러한 미신을 극대화하여 이른바 <절대시간>으로서 시간이 실재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명적인 일상적 믿음에도 불구하고 실재한다는 시간을 조금만 깊게 생각하려들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을 제쳐두고서라도 금방 엄청난 난문제(難問題)에 휘말리게 된다.


그 난문제란 대략 이런 것이다 : 미래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흐른다는 (또는 그와 역순(逆順)으로) 시간은 강물(江水)과 같은 연속체와는 아주 달라서 미래는 아직 없고 과거는 이미 없다는 사실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시간이 실재한다면 현재뿐일터인데, 그 현재는 어떻게 미래라는 무(無)에서 흘러 와서 과거라는 무로 흘러 간다는 말인가? 그래서 무로서의 미래나 과거 (곧 시간)를 어떻게 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이 실재한다면 오로지 현재로서만 있다고 볼 수밖에 없겠는데, 그 현재란 것도 엄격히 분석해 보면 순간(瞬間) 곧 찰나(刹那)로서 있을 뿐이며, 그 현순간의 이전과 이후는 미래와 과거로서 무(無)에 속한다. 그런데 찰나로서의 현순간은 어떠한 길이(延長)도 갖지 못한 기하학상의 점(點)과도 흡사하여 실로 없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있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 현순간은 있고도 없고, 없고도 있다는 엄청난 부조리(不條理) 곧 모순(矛盾) -동일률(同一律)적 원칙에서 보면- 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저 고대 그리스의 제논(Zenon)이나 인도(印度)의 중관사상가(中觀思想家) 나가르주나(Nagaruzuna)는 그와 같이 부조리한 시간이란 애당초 인간의 착각에서 비롯된 망상(妄想)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제논으로서는 운동하는 화살은 일정 순간 일정 지점에 있어야 하나 만약 그 순간 화살이 그 지점에 있다면, (정확하게는 있기만 하다면) 그 화살은 의당히 정지해 있을 터이어서 그렇다면 다음 순간 그 다음 순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므로, 필경 화살의 전 운동과정은 정지의 총화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실로 운동체가 일정 순간 일정 지점에 있기만 해선 운동은 결코 성립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운동이 가능하려면 그 순간 그 지점에 <있음과 동시에 없기도 해야만 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나 제논은 이러한 모순을 물론 인정치 않았다. 그래서 운동과 시간은 그에게는 가상(假像)이었던 것이다.


제논이 시간에 관해서 별도로 언급한 곳이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운동에 대한 그의 부정적 논리를 바탕으로 유추해 보면, 그가 흐르는 시간이 착각이라고 본 것은 말할 것 없고, 순간을 정지된 점(點)으로 보았음에 틀림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순간이 흐른다면, 그 흐르는 순간은 있음만으로는 실재할 수 없고, 있음과 동시에 없기도 해야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논은 이러한 모순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지된 순간이나 흐르는 순간이나 둘다 부조리(不條理)한 것으로서 필경 그에게는 가상이었음에 틀림없다 하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재가 미래와 과거라는 무(無)로서 단절되어 있다는 엄청난 부조리를 해소시키기 위해서 끝내는 시간을 의식(意識) 속으로 끌어 들여서 미래는 기대(期待)로서 과거는 기억(記憶)으로, 현재는 직관(直觀)으로서 엄연한 연속적 흐름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시간의 직관적 실재설(實在說)이 내포한 부조리를 해소코자 시간을 선험적 주관 속으로 끌어들인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을 칸트가 이어 받아 그의 <순수이성비판> 선험적 감성론 속에서 시간을 감성(感性)의 선천적 직관형식(直觀形式)이라고 간주하였다. 그 뒤를 이어서 후설과 하이데거가 선험적 의식의 구성(構成)이나 본질로서 파악하고 있다.
또한 시간이 만약 독립적 실재라면 엄격하게는 순간으로서만 존재할 수밖에 없을 터인 바, 그렇다면 그 찰나에서 우리는 어떤 생각도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시간의 난문제는 오로지 시간의 독립적 실재론에서 발생되는 것으로서, 그 해소책(解消策)은 당연히 시간의 독립실재설을 버리는 데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같은 시간의 독립적 실재설이 안고 있는 해결할 수 없는 난문제는 시간이라는 추상(抽象)적 흐름이 사물의 운동과 독립해서 존재론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운동과정 그 자체에 붙여진 이름에 불과하다고 볼 때 비로소 해결의 단서가 잡히게 될 것이다. 이 경우 시간의 문제는 사물의 운동 (앞으로는 흐름이라고 표현하겠다) 문제로 환원됨으로써 이른바 시간 그 자체에서 생겨 난 난문제는 그 의미가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관점은 이른바 시간 그 자체의 흐름이란 사물의 흐름에 근거해서 인간이 만든 표상으로서 실은 사물의 흐름 그 자체에 대응하는 가상(假像)이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화폐의 흐름이 상품의 흐름에 대응하는 가상인 것과 흡사하다고 하겠다. -화폐란 실로 자체적인 가치실재(價値實在)가 아니고, 상품가치를 표현하는 한갓 가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시간을 사물의 흐름에 환원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시간관념의 형성과 구조에 대한 해명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기서 다룰 문제가 아니다.

역대의 사상가들 가운데는 시간문제 전반에 걸친 충분한 언급을 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위와 같은 견해를 피력한 탁월한 몇몇 천재들이 있었다.
자연학(自然學) 분야에서도 천재성을 발휘했던 플라톤(Platon)도 그의 대화편 티마이오스(Timaeos)에서 시간에 대해서 위와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 조물주 데미우르고스(Demiurgos)가 영원한 신들의 초시간적 세계를 본떠서 그것과 유사한 모상(模像)을 만든 것이 항속적으로 운동하는 천체(天體)들인 바, 그 천체들의 수(數)에 따른 항속운동에 우리가 시간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그러나 조물주는 말하자면 움직이는 영원(부동자; 논자 주)의 모상을 만들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통일성 속에 거(居)하는 영원성 (여기서 영원성은 초시간적 영원이 아니라, 항속성을 의미한다; 논자 주)을 가진 하늘 (곧 천체들; 논자 주) 곧 수(數)에 따라서 움직이는 항속적 모상 -이것에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을 질서지웠던 것이다." 이와 같이 플라톤은 비록 그의 시간론에서 운동과 시간 (사실은 운동, 즉 시간이지만)을 초시간적 부동(不動)의 영원성에 기초시킨 엄청난 부조리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또한 과거와 미래에 대한 현재의 부조리한 파악에도 불구하고, 운동이 곧 시간으로서 시간이 운동과 독립해서 별개로 실재하지 않는다는 탁월한 통찰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그 이유를 또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 "왜냐하면 하늘 (곧 천체들; 논자 주)이 존재하기 전에는 낮(晝)들과 밤(夜)들 달(月)들과 해(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물주는 하늘이 구성됨과 동시에 그것들 (곧 시간으로서의 일,월,년; 논자 주)이 비로소 있게끔 계획했던 것이다."

플라톤은 시간이 천체운동 곧 사물의 과정 그 자체에 붙여진 이름에 불과하다는 사실의 통찰에도 불구하고 시간 형태들로서의 과거와 미래는 운동(motion) 즉 과정(Becoming)이며 현재만은 과정을 초월한 존재(Being)로서 영원에 속한 것으로 보았다. 그의 생각을 따라가자면, 질료(質料)적 사물은 유(有)와 무(無)의 합일체(合一體)로서 운동과정에 있으되 사물의 본성은 이데아(Idea)로서 영원적인 존재이기에 사물은 운동 (곧 과정) 속에 있으면서도 사물의 이데아는 과정을 초월한 현재로서 존재한다. 이것은 필경 플라톤이 무와 절연된, 그래서 과정을 초월한 초시간적 <존재>를 현재로서 간주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정이 과연 그와 같다면 부동자(不動者 또는 不變者)가 어떻게 동자(動者)의 과정 속에 있는가 라는 난문제와, 무와 단절된 부동적 존재(Being)로서의 현재가 무와 합일된 운동적인 과정(Becoming)으로서의 과거와 미래를 어떻게 매개(媒介)할 수 있는가 라고 하는 실로 난감한 문제가 여기서 발생한다.
이런 부조리를 해소하는 길은 결국 운동과 시간을 존재(Idea)의 양태(樣態)적 가상(假像)으로 전락시키는 이외 달리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에게는 실로 시간적 자연세계는 가상이었던 것이며, 진정한 실재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존재는 초시간적 이데아의 세계였으니, 그 이데아의 초시간성(超時間性)이야말로 영원 그것이며, 이 영원성이야말로 진정으로 있는 시간, 즉 과거와 미래를 갖지 않은 현재인 것이었다. 그래서 플라톤에 있어서는 그 존재의 영원성 곧 영원적인 존재가 사물의 운동 곧 가상의 과정 속에 진입하여 <현재>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시간을, 사물의 운동과 독립해서 실재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운동의 한 표현형식이라고 보았던 또 하나의 고대의 위대한 사상가는 바로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는 시간을 "이전과 이후의 선상에서 만나는 운동에 있어서 세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시간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기나긴 공백기를 지나 근세의 저 위대한 천재적 사상가였던 데카르트에 와서야 비로소 나타났다. 그는 시간을 사물의 지속(持續)과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사물의 형식이나 속성이 아니라, 운동하거나, 정지하고 있는 -사실은 이 정지도 운동의 한 양상이지만- 지속에 대응하는 인간의 사유물(思惟物)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 "사물에 속하는 속성들이 있으며 사유에 속하는 속성들이 있다는 것, ... 그래서 예컨대 일반적 의미에서 파악되었을 때의 지속과 구분되는, 그리고 운동의 수라고 말해지는 시간은 지속을 생각하는 하나의 어떤 방식에 불과한데, 그 이유인즉 움직이는 사물의 지속이 움직이지 않는 사물의 그것과 다르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만약 두 물체 중 하나는 빠르게 다른 하나는 느리게 한 시간 동안 움직인다고 할 때, 비록 그들 중 어느 한쪽의 경우가 시간이 더 길다고 계산치 않음과 같다. 그러나 같은 단위 하의 모든 사물들의 지속을 날(日)과 해(年)를 만들어 내는 규칙적 운동의 지속과 비교해서 사용할 때 그 지속을 시간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렇게 명명하고 있는 것은 사물들의 진정한 지속을 떠나서 실상 사유의 방식 이외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사물의 흐름 또는 그 흐름과 지속에 근거하여 시간을 인간이 만든 사유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상가로서는 현대에 와서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과 화이트헤드(Whitehead)가 있고, 또 다른 그리 유명치 않은 몇 몇 철학자들이 있다.
본 논문 <시간의 방향에 관한 소고>는 위와 같은 견해에 입각해서 논의될 것이다. 시간의 방향은 사물의 흐름의 방향에 근거해서 해명되어야 한다고 논자는 믿고 있기 때문이다.

논자는 일찍이 시간이란 사물의 흐름 또는 지속의 대명사(代名詞)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시간의 독립적 실재라는 묵은 미신(迷信)에서 혼자 깨어난 줄 믿었다. 그러나 의식 내의 시간개념의 형성과 구조에 대한 연구와 함께 이러한 견해를 토대로 시간론을 펴 낼 생각으로 고전(古典)을 찾던 중 위와 같은 천재들의 견해와 만나게 되었던 것인데, 역시 그 옛날에도 천재들은 적어도 시간에 관한 한 이미 미신에서 깨어나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마지 않았다.

2. 시간의 방향에 대한 여러 사상가들의 견해

시간의 방향에 관한 사람들의 표상방식은 대체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시간이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미래에서 현재로 와서 그 현재가 과거로 흐른다는 것이다. (전자는 시간의 흐름을 과거에다 그 기점(起點)을 두고 거기에다 비중을 싣고 있으므로 과거지향(過去志向)적이라 할 수 있는 반면 후자는 미래에다 그 기점을 두고 있기로 미래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상가들 가운데는 미래나 과거가 현재 우리의 의식 안에서 구성된다고 보거나, 흐르는 사물이나 시간이 미망(迷妄)이므로 그 방향이란 애당초 무의미하다고 보는 견해도 없지 않다. 논자는 이제부터 역대의 사상가들이 갖고 있었던 각종의 견해들을 일단 먼저 비판적으로 음미해 두고자 한다.

1)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이 미래에서 현재로 와서 과거로 향해 흘러 간다는 표상을 하였다. 그는 그같은 생각을 그의 <고백>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 미래에서 현재로 오는 경우 어느 그윽한 곳에서 오고, 현재에서 과거로 갈 경우 어느 그윽한 데로 흘러 ... " "미래인 어디로부터 현재인 어디로 해서 과거인 어디로 흐르며 ... 현재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를 통하여 지나가는가" "결국 아직 없는 데서 있지 아니한 데로 옮아가는 것이다."
만약 현재 또는 시간이 실재하는 어떤 것이라면 어떻게 없는 데 (미래 곧 무)서 흘러 올 수가 있으랴. 그 실재하는 시간은 흘러 올 수 없을 뿐 아니라 없는 데 (과거 곧 무)로 흘러 갈 수도 없을 것이다. 무는 없는 것으로 곧 단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현재는 무에 단절되어 그냥 거기에 있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미래가 아직 없는 것이고 과거가 이미 없는 무라면 현재가 거기서 흘러 오고 흘러 간다는 것은 심히도 불합리한 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 곧 미래와 현재와 과거를 실재현상이 아니라 한갓 마음의 현상으로 돌리고 말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 그 자체의 독립적 실재를 믿고 그것이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간다고 보는 것도 불합리하지만, 그 시간이 미래에서 흘러 온다는 표상은 더 더구나 사리(事理)에 어긋나 보인다. 왜냐하면 사물의 흐름이란 그 사물이 있었던 곳 또는 지금껏 있어 온 데서 있지 아니한 곳으로 나아 가는 것이지 아직 있지 아니한 곳에서 올 수는 결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리(事理)라면 그리고 우리가 시간의 흐름을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흐름은 모름지기 현재가 있어 온 데 (곧 과거)를 거쳐와서 아직 있지 아니한 데 (곧 미래)로 나아 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성경(聖經)의 창세기에는 사물세계의 창조와 더불어 시간이 시작하고, 그것에 대응해서 진행되어가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독교 철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 그도 시간이 사물의 운동과 연관된 것으로서 -그러나 그는 사물이 마음에 생겨나게 하는 지각인상(知覺印象)의 계기들이 시간의식을 형성한다고 믿었다- 간주하였다. 그렇다면 시간이 그와 같이 사물의 운동에 대응하는 흐름이라면 -그것이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아무튼 그 방향은 의당히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나아 가야 마땅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러한 사리에 역행하면서 시간이 미래에서 <흘러 온다>고 부조리하게 표상한 데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다.
첫째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을 세계의 운동 곧 사물의 흐름과 동시에 생겨 난 것으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그 사물의 흐름과 독립된 별개의 현상으로서 간주하였다는 데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사물의 흐름 (곧 경과) 그 자체를 곧 시간으로 볼 수만 있었더라면 결코 시간의 방향을 그렇게 불합리하게 잡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기독교 사상의 온상이었던 이스라엘의 하층계급들은 과거나 현재는 오직 고난과 고통밖에 아무것도 없어서 미래 (그것에 대한 기대)만이 의미가 있었다는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두 번째의 이유야말로 첫 번째 이유의 근거가 되는 본질적인 것일 것이다. 모름지기 과거와 현재에서 영화를 누리고 있는 자들의 시간사상(時間思想)은 미래가 오히려 불안(不安)이고 현재와 과거가 좋은 법 그래서 그들은 과거지향적이고 보수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과거와 현재가 고난과 고통밖에 아무것도 없는 자들로서는 남은 것 -기대할 것이라곤 미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그 미래가 천년왕국(千年王國)이나 태평성대의 지상천국으로서 어서 다가 와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같은 소외(疎外)된 삶과 의식 속에서 마침내 좋은 세월이 미래로부터 그저 도래한다는 매우 부조리한 환상(幻想)이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미래 우위적인 종교적 시간사상은 탈현재(脫現在)적이며 진보적인 측면이 없지는 않으나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측면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참된 미래는 -그래서 참된 진보는 과거를 지양(止揚)적으로 보존한 현재의 실천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꿈이 현재를 이끌어가는 측면이 있으나, 미래는 지난 현재가 만들어 온 과거와 그것을 끊임없이 지양하는 지금의 현재만이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같은 현재없이는 미래가 없는 것이다.

2) 베르그송의 견해
주지하다시피 베르그송에 있어서 진정한 시간은 사물 (그에게는 살아 있는 정신이다)의 지속 그 자체이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계시간은 자연의 운동을 측정하기 위해서 사람이 고안한 추상적 방편이다. 베르그송에 있어서는 지속하는 의식 곧 살아있는 정신의 지속이야말로 시간으로서, 시간은 약동하는 창조걱 정신의 지속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서 정신은 생명으로서 물질적 세계 속에서 그를 초월하여 자유롭게 영원히 비약적 창조적으로 지속해 가는 바 이 창조적 정신의 비약적인 순수지속이야말로 곧 시간이라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순수지속 즉 시간이라는 개념을 자연적 사물에서 분리하여 창조적 생명 -이는 곧 정신으로서 과거지각(過去知覺) 즉 기억과 순수지각 즉 현재지각으로서의 의식이다- 의 본질로서 신비화(神秘化)하고 있기는 하나, 시간이 지속 -또는 운동- 그 자체로서 그것과 분리된 독립적 현상이 아니라고 본 것은 탁월한 통찰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시간을 사물의 지속 그 자체로 보는 견해에서는 시간의 진행은 당연히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방향을 취할 수밖에 없다. 사물의 운동은 의당 있어 온 과정에서 아직 있지 않는 과정 속으로 밟아 나아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르그송 그도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 "지속은 전진(前進)하면서 팽창하고, 미래를 파먹는 과거의 연속적 진보다."라고.
여기서 우리가 시간의 진행에 관한 베르그송의 견해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베르그송이 시간의 진행을 과거에서 잡았다고 해서 과거를 마치 흘러 오는 긴 강물처럼 연장적으로 표상화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베르그송에 있어서 과거는 살아있는 정신의 현재적 팽창운동이 만들어가는 것이나, 그렇다고 그 현재적 운동을 벗어나 그 뒤로 연장적으로 길게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베르그송에 있어서는 과거야말로 현재를 있게 하지만, 현재를 현재이게 하는 그 과거는 또한 현재가 만들어오는 가운데 과거는 현재적 정신, 정신의 현재가 지나 온 자신의 과정으로서 자신 속에 지양(止揚)하여 내장하고 있는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현재적 정신의 기억으로서 현재 속에 존속할 뿐이다.
위와 같이 베르그송에 의하면 과거는 순간적 단위들로서 현재와 분리된 불연속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현재적 정신 속에서 필경 그것과 하나로서 통일된 이이일자(異二一者)인 것이다.
위와 같은 시간의 성격에 대한 베르그송의 견해는 천재적 통찰이라 하겠는 바, 이러한 시간에 대한 그의 탁월한 통찰은 분명 그가 시간을 사물 (그에겐 정신이다)의 지속과 독립된 실재로서 보지 아니하고, 사물의 지속 그 자체로서 보았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논자는 위와 같은 시간의 성격을 그가 유독 정신 속에서만 발견하고 사물 일반 속에서는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심히 아쉬워한다.
과거는 베르그송에서처럼 단지 기억으로서 정신의 현재 속에서만 존속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는 모든 지속하는 사물의 본질로서 사물의 현재 속에 존속한다. 무릇 모든 사물이 진행하는 가운데 사물이 진행하는 그때 그때의 현재가 과거를 만들어 오면서 그 진행 곧 과거가 사물의 본질을 형성한다. 그래서 그 진행 곧 과거는 사물 속에 본질로서 지양되어 내장되는 것이다.

3) 화이트헤드의 견해
현대에 와서는 화이트헤드가 사람들에 의해서 독립실재라고 믿어져 온 시간이 우리의 추상관념(抽象觀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통찰하였다. 그는 말한다 : "시공(時空)은 실제로는 자주적 실체라고 생각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것은 하나의 추상관념이며 ... 시공은 여러 사건과 그것들의 상호 순서관계의 일정한 일반적 성격을 특수화한 것이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시간이란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의 합생(合生 곧 生成)과 객체화(客體化, Objectification, 곧 消滅)과정(Process)의 대명사(代名詞)에 지나지 않는다.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객체화란 절대적 무화(無化)로서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현실적 존재가 달성되자마자 그것은 곧 소멸하게 되는 바 소멸되면서 그 현실적 존재는 주체(主體)로서의 존립을 끝내고, 새로운 현실적 존재의 합생(생성) 속에 객체(客體) 즉 술어(述語 또는 客語)적 본질로서 참여하게 된다. 이 과정이 바로 객체화이다.

이같이 그에 의하면 시간이란 사물이 생성 소멸하는 과정 그 자체이기에 그 흐름도 의당히 과거에서 미래를 향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그는 이렇게 표명하고 있다 : "현재는 과거로부터 파생한다. 그리고 그것(현재)은 미래를 조건짓고 있으며, 미래로 넘어가고 있다. 이것이 과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주에 들어 있는 냉혹한 하나의 사실이다."
여기서 논자가 특기해 두고 싶은 것이 있는 바, 그것은 바로 화이트헤드가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의 관계에 대해서 실로 탁월한 통찰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에 의하면 과거는 현실적 존재의 또 다른 새로운 합생에로의 진입을 위한 객체화과정 그 자체이기에, 따라서 과거는 현재(곧 새롭게 합생된 현실적 존재) 속에 객체화로서 (또는 본질로서) 현존하고 있다. 그리고 미래 또한 "현재가 그 자신의 본질 속에 그것이 미래에 대해서 가지게 될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현재 속에 내재(內在)한다." 나아 가 그 "미래는 현재사실의 본질에 속해 있으며, 현재사실의 현실성과 별개의 현실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미래는 현재가 갖는 지향적 가능성으로서 분명 현재 속에 (곧 그 현재 속에서만) 내재하지만 -그래서 "미래는 분명 무(無)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에서의 미래적 계기는 그것 나름대로의 절대적 완결성을 수반한 개체적 존재로서는 비존재(非存在)이다." 이와 같이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과거는 객체적 현실성 (또는 본질)으로서 현재 속으로 와서 보존되어 실재하고, 미래는 현재가 "그것(미래)에 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현재 속으로 선취(先取)되어 내재한다. 그런데 과거를 현실성에서 미래를 가능성에서 보유한 그 현재란 두말할 나위없이 정지된 순간이 아니라 현실적 존재의 전진(前進)적 과정의 중심 점일뿐이다. 그래서 현재는 자신을 부단히 넘어섬으로써 과거를 만들고, 그것을 자신 속에 지양 보존하면서 선행하는 세계 속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사물의 과정 (또는 전진성(前進性))을 떠나서 과거와 미래는 아무데도 없다.
위와 같은 시간에 대한 탁월한 화이트헤드의 통찰은 오직 그가 시간을 사물의 과정(Process)과 별개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4) 비트겐슈타인과 쯔발트의 견해
시간의 독립 실재성을 부인하고 시간을 사물의 경과 또는 과정의 대명사에 불과하다는 사실로서 본 사상가들 가운데는 또한 두뇌가 매우 명석한 비트겐슈타인과 별 유명하지 않은 철학도인 쯔발트를 들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시간론을 온전하게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존재와 인식에 관한 그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집약해 둔 저서에서 시간의 성격을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우리는 어떠한 과정도 <시간의 경과>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와 비교할 수 없고, 오로지 다른 과정 <아마도 천체 계측기의 진행과정과 같은> 과만 비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적 경과의 기술은 다른 과정에 의탁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진술을 근거로 그가 생각했음직한 시간의 방향 -그는 이것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을 유추해본다면, 그로서는 측정기 (예컨대 시계나 천체운동의 측정기)의 움직임 그 자체가 시간이므로, 시간은 현재가 과거를 만들면서 그 과거를 통과하여 미래로 나아간다고 생각했을 것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이 진술에 의하면 비트겐슈타인이 일정 사물의 운동측정 (예컨대 속도 같은) 은 근본적으로는 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간은 없으므로- 또 다른 사물의 규칙적 운동과의 비교에 의한다는 사실을 통찰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일정 사물의 운동속도가 거리(S)에 대한 시간(t)의 역비(逆比)로서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또 다른 사물의 운동과의 비교에서 산출된다는 사실의 표명으로서 운동과 시간의 관계에 대한 기존 물리학적 사고에 혁명적 비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쯔발트(Zwart)는 심오한 존재론과 인식론을 토대로 시간론을 전개한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사물의 흐름을 근거로 해서 만들어진 인간의 추상물이라는 사실을 한권의 저서로서 주장하고 있다. 시간의 방향에 대한 그의 견해를 다소 길지만 여기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사상(事像)이 잇따라 일어나는 순서 또는 같은 말이지만 자연계의 모든 과정이 진행하는 방향을 가정한다면 시간의 방향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사상의 계기(繼起)에는 일반적인 순서라고 하는 것은 없으며, 아무리 의미를 부여해 보아도 시간의 방향 그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만큼 기본적으로 또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비가역성(非可逆性)은 자연계에 존재치 않는다. 시간은 방향을 갖지 않는다고밖에 할 수 없다. 그것은 사상이나 상태의 계기 그 자체이다. 시간이 흐름인 이상 방향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의견은 잘못이며 그것은 말의 흐름이 방향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의견과 꼭 같다.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고 하는 표현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이외 아무 의미도 없다. 왜냐면 그것은 과거나 미래라고 하는 용어를 나타내고 있는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란 지금보다 <이전>을 의미하는 데 지나지 않고 미래란 지금보다 <이후>를 의미한다. 따라서 과거가 보다 이후가 된다든가 미래가 보다 이전이 된다든가 하는 것 즉 시간이 역방향(逆方向)으로 미래에서 과거로 흐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논리상 불가능하다."
이상의 시간에 대한 쯔발트의 진술은 논리적으로나 개념적 표현상으로 보아서 매우 엉성하긴 하지만 그가 시간 그 자체란 애당초 없는 것이며 있는 것은 사물의 진행뿐이고, 지금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가 성립한다는 것과 그 이전 이후가 과거와 미래로서 표상되는 것이라는 취지를 밝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시간의 방향을 이야기할 때 꼭 공간적 방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대로 사물의 진행이 이전에서 이후로 나아 간다면, 그리고 그 사물의 진행이 곧 시간의 표상으로 나타난다면 시간에도 방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니, 그가 명백히 말한대로 사물의 진행이 이전에서 이후를 향해 비가역적으로 나아 가고 있는 이상 시간의 흐름도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나아 간다고 표상함이 마땅하리라.

5) 하이데거 및 후설의 견해
하이데거가 문제삼는 시간은 일상적 사람들이나 과학자들이 표상하는 세계시간이 아니라, 본질적 시간 곧 시간의 본질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세계란 것은 "그 본질상 존재론적으로 보았을 때 인간이 아닌 존재자의 규정이 아니라 현존재(Dasein) 그 자체의 한 성격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에 있어서 진정한 시간의 문제는 세계시간의 객관적 실재성의 실존론적 분석에서가 아니라 현존재의 분석에서 참답게 해명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던 것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의 존재성격은 기투(企投)에 있는 바, 주지하는 바와 같이 기투란 현존재가 단지 현재의 존재자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한 존재가능을 양해(諒解)하고 현재의 자기자신을 앞질러 나아 감 -곧 선구(先驅)- 을 의미하며, 현존재는 선구로서만 존재가능하다. -이것 (곧 선구)이야말로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의 자기시간화(sich-Zeitigen)로서 본래적 미래의 시간화(時間化)이다. 좀 더 부연하자면 현존재가 세계 속에서 존재자들의 곁에 있으면서 개시성(Entschlo enheit) 안에서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것 -이것이야말로 본래적 현재의 시간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도 그에 의하면 선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현재는 오직 그 미래를 향한 탈자태(脫自態)로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시간이 오직 본래적 미래의 시간화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미래 -선구에 의해서 시간화된- 야말로 현존재의 존재 곧 현재를 가능케 한다는 것을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자신의 존재가능에서 스스로를 양해하며, 실존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 존재자를 존재론적으로 가능케 하는 것은 미래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더 나아가 본래적 시간은 현재뿐 아니라 과거 (물론 본래적 차원에서의) 까지도 본래적 미래로부터 발현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본래적 과거는 지나 가버리는 것(Vergegangenheit)- 곧 세인들이 표상하는 비본래적인 과거가 아니라, 피투(被投)에 근거한 있어 왔음(Gewesen-sein)이며, 이 있어 왔음이야말로 본래적 과거의 시간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기이하게도 이 기재(旣在)가 미래 때문에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바, "현존재는 그가 미래적인 한에서만 본래적으로 있어 왔을 수 있다. 따라서 기재(Gewesenheit)는 분명 미래로부터 발현된다."고 말하고 있다.
사물의 경과를 시간으로 간주하면 미래는 있어 옴과 있음에서 발현된다고 보는 것이 사리에 합당하겠지만, 하이데거가 과거가 오히려 미래에서 발현된다고 본 것은 그가 선구 (미래의 시간화) 때문에 현존재가가 존재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인데, 현존재는 단순한 존재자가 아니라 실존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의 본래적 과거란 다만 시간의식을 뜻하는 가운데 죽음에로의 선구에 근거해서 있어 왔음에 대한 과거의식이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선구는 앞질러 나아 가는 것이지만 이것 (곧 나아 감)은 단지 현존재의 양해사항일뿐, 하이데거가 미래의 진행방향으로서 이해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미래는 <닥아 오고 있음>이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들이 미래 곧 죽음을 향한 존재가능에 닥아 간다고 보지 않고 오히려 그 미래가 닥아 오는 것으로 본 이유는 선구적 현존재가 죽음을 향한 존재가능을 선취(先取)한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같은 사정을 미루어 보면 하이데거가 이해한 세계시간도 미래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흘러 가는 방향을 취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세계시간은 하이데거에게는 비본래적인 세인(世人)들의 추상(抽象)으로서 진리로 간주될 수 없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하이데거의 본래적 시간이란 사물의 진행에 근거한 경험적인 추상이 아니라, 실존적 현존재의 선험적 자기시간화(自己時間化)로서 현존재의 존재양해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사물의 흐름과 무관하게 선험적으로나 선천적인 형식으로서 인간의식 속에 본유(本有)되어 있다는 것은 심히 의심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논자는 시간문제에 대해서 일가견을 편 현상학자 후설이 시간의 방향을 어떻게 생각하였는지를 음미코자 한다. 후설은 그의 저서 <내적 시간의식>에서 시간의 문제를 폭넓게 다루었으나 시간의 방향에 관해서만은 표제로서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시간론이 함축하고 있는 시간의 방향에 대한 그의 생각을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의 대상은 환원을 통해서 괄호 속에 넣어진 자연적 또는 형이상학적 존재가 아니라 선험적 의식과 그 속에 현상하는 순수존재로서의 사상(事像, Sache)이다. 그런데 사상들이 현상하는 선험적 의식은 후설에 의하면 흐름(流)의 성격을 갖는 내적 체험인 바 이것이 곧 시간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후설에 의하면 진정한 시간문제의 해명은 객관적 세계시간이나 자연과학적 시간에 대한 심리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 분석에서가 아니라, 내적 시간의식에 대한 현상학적 탐구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시간의 뿌리는 시간의 개념들이 근원적으로 구성되는 내적인 시간의식 속에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무릇 흐름(流)에는 반드시 방향이 있을 것이니, 의식류(意識流)에도 방향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가 이 의식류의 방향을 안다면 후설이 생각한 시간 -내적 시간이식- 의 방향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후설에 있어 시간의 흐름이란 의식류로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양상의 변화 (또는 흐름)는 의식에 주어지는 시간객체(時間客體) -이 시간객체란 것도 후설에 있어서는 선험적 의식 안에 들어 온 사물의 인상으로서 내재적인 것이다-을 지각하는 선험적 의식의 직관방식에 따라 구성된다. 의식류(意識流) 속에 주어진 시간객체에 대응해서 생겨나는 근원인상(根源印象) 곧 순간적 지각은 <지금>을 구성하고, 이 근원인상의 지각은 변양(變樣)을 거듭하면서 찰라 찰라적으로 뒤로 침퇴)浸退)한다는 바 이것이 <과거>를 구성하는 근거이다. 여기서 우리가 특히 유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후설은 분명히 인상 곧 지각의 흐름을 과거를 향해서 <지나 간다>고 보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분명히 그가 시간을 현순간에서 과거로 흘러 가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미 지나 간 지각을 지금의식이 지금에 있어서 붙잡고 있다는 그의 파지(把持, Retention) 개념 -이 파지는 후설에 의하면 지금의식이 가까운 과거를 자신에게 붙들어 매어 <현재> 시역(時域)을 구성하는 과거직관(過去直觀)이다- 도 위의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파지의 권역을 벗어나 버린 -즉 먼 과거로 흘러 가서 이미 잊혀진 지각이 가능케 하는 회상 -후설은 이를 이차(二次) 기억이라 한다.- 이란 개념도 위의 사실을 또한 입증하고 있다.
후설은 파지나 회상을 지각이 흘러 가기 -과거로-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견해이다. 사물의 흐름에 대응하는 지각의식의 흐름도 나아 가기 때문에 (또는 지나 오기 때문에) 나아 간 (또는 지나 온) 위치에서 뒤돌아 보면, 지나 온 과정이 마치 지나 간 것으로 보일뿐이기 때문이다. 무릇 흐름은 밖에서가 아니고 그 자체에서 본다면 나아 가는 것 곧 흘러 오는 것이고 결코 지나 가는 것 곧 흘러 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리(事理)을 간과함으로써 후설은 시간이 현재에서 과거로 흘러 간다는 잘못된 표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지금지각 -또는 근원인상이 생겨나자마자 과거로 후퇴한다면 미래는 어디로 흐르는가? 후설에 의하면 미래는 지금의식이 예지(豫持, Protention)로써 자신에게 선취(先取)하여 현재시역(現在時域)을 구성하는 바 예지에 의해서 현재시역으로 선취된 가까운 미래는 당연히 먼 미래를 전제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예지는 미래에 대한 기대직관(期待直觀)이며, 미래에 대한 기대는 미래가 나아 간다는 생각에서보다는 차라리 미래가 닥아 올 것이라는 기다리는 마음이다. 따라서 후설의 미래는 현재로 닥아 오는 시간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현재가 과거로 흐른다면 미래는 당연히 현재로 흘러 와야 한다는 사리 -그렇지 않다면 미래는 현재와 단절될 것이다.- 외에도 그가 "... 예지는 와야 할 것 자체를 공허하게 구성하고 붙잡아서 충실케 한다."고 말한 것으로서도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근원인상이 생겨나서 현순간에서 과거로 흘러 간다면 미래는 존재하지 않아도 될 것이로되 -왜냐하면 후설에 있어서는 근원인상은 미래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근원인상이 어떻게 미래에서 올 수 있겠는가?) 미래로 나아 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설은 위에서처럼 무의미한 미래를 현재에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6) 용수(龍樹, Nagarzuna)의 견해
용수는 사물의 거래(去來) 곧 간다거나 온다는 것 자체가 애당초 착각이라는 사실을 그의 중론송(中論頌)에서 논증해 둔 다음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나아간다는 시간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논증하였다.
"만약 현재와 미래가 과거를 인(因)으로해서 있게 된다면 현재와 미래는 과거 속에 있게 될 것이다." "또한 만약 현재와 미래가 과거 속에 없다면 현재와 미래가 어떻게 그것을 원인으로해서 있게 될 수 있겠는가?" "과거에 인(因)하지 않고서는 현재와 미래는 성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현재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용수는 시간이 만약 실재한다면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나아가는 방향으로 진행할 것으로 보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인과사상(因果思想)에서는 시간이 미래에서 현재 과거로의 방향으로는 결코 진행될 수가 없는 바 시간상 인(因)이 선행하고 과(果)는 뒤에 오며 과거가 선행하고 미래가 뒤에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용수는 인과관계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미망(迷妄)으로 간주하고 그의 특이한 불이론법(不二論法)으로서 논증하고 있는 바 요약하면 원인과 결과가 같은 것(同)이라면 인과란 성립할 수가 없고, 서로 다른 것(異)이라도 또한 인과관계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과는 서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아야 하므로 심히 부조리하며 인과가 성립할려면 인(因)과 과(果)가 같은 것(同)이면서도 동시에 다른 것(異) (곧 異而一)이라야 하겠으나, 용수에게는 이 또한 있을 수 없는 모순이었던 것이다.
무릇 불교사상은 유(有)와 무(無), 동(同) 곧 일(一)과 이(異) 곧 다(多) 등 모순의 양 항(項)을 함께 부정하고 모순의 통일을 부조리로서 결코 승인치 않는다.

용수는 흐르는 시간이 혹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인식론적 차원에서 그것을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렇게 논증하고 있다 : "머물러 있지 않는 시간은 파악할 수가 없다. 머물러 있는 시간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파악할 수 없는 시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리오."
용수는 나아가 시간이 애당초 존재할 수 없음을 존재론적 차원에서 다음과 같이 결정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 "사물로 말미암아 만약 시간이 있다면 사물을 떠나서 시간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런데 어떠한 사물도 있다고 할 수 없으므로 어디에 시간이 있을 수 있겠는가?"
중관사상에 의하면 사물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있다>고도 할 수 없다는 것인데 그 까닭인즉 사물이 없음(無)과 통일되지 않은 채 있기만 하면 생겨나거나 없어질 수가 없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물은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니 이는 부조리하고, 생성 소멸하는 사물이 가능하려면 있기도 하고 동시에 없기도 해야 하나 이 또한 모순으로서 불가능하다. 이런 논거에서 용수는 "사물이 있다고 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용수가 <사물이 있다고 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해서 그가 사물이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중관사상에 의하면 인과관계가 성립될 수 없으므로 사물은 애당초 생겨날 수조차 없고, 생겨나지 않은 사물은 사물일 수 없으므로 없어질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는 필경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어지는 것도 없는 공(空) 그것인 것이다.

7) 승조법사(僧肇法師)의 견해
중관사상에 의하면, 사물의 존재가 부조리여서 사물 그 자체가 <있다>고 볼 수가 없기에 사물의 가고 옴도 한갓 미망(迷妄)일뿐, 실상이 아니다. 그래서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 간다거나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 간다는 것은 애당초 성립하지 못한다. 시간의 실재가 미망이기에 당연히 어떤 방향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주장에 대한 논증을 시도한 또 하나의 불교사상가 승조법사가 있다. 그는 그의 <조론(造論)>에서 방향을 따라 흐르는 시간이 미망이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 "과거의 사물이 현재로 흘러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재의 사물이 과거로 흘러 간다고들 한다. 과거의 사물이 현재로 오지 않는다면 현재의 사물인들 어디로 흘러 가겠는가?" 승조법사는 이 진술을 증명하기 위해서 또한 다음과 같이 논술하고 있다 : "왜냐하면 과거의 사물을 과거에서 구해 보았으나 과거에 일찍이 없지를 않았었고, 과거의 사물을 현재에서 따져 보니, 현재에선 아직 있지 않다. 과거의 사물이 현재에 있지 않기 때문에 이로써 과거의 사물이 현재로 오지 않았음이 분명하고, 현재의 사물이 일찍이 과거엔 없었기 때문에 현재의 사물이 과거로 흘러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이것을 뒤집어서 현재에서 찾아보니 현재도 과거로 가지 않았다. 이는 과거의 사물은 스스로 과거에 있었고, 현재로부터 과거에로 이르러 간 것은 아니며, 현재의 사물은 절로 현재에 있고,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르러 오지 않았음을 말한다."
이런 식의 논증은 중관론(中觀論)의 거래품(去來品)에서 나온 가고 옴이 없다는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승조법사도 그의 <물불천론(物不遷論)>편에서 거래품에 나오는 "갈 방향을 관찰하고 그가 간다는 것을 아나 가는 자는 끝내 그 방향에 이르지 못한다."는 구절을 서두에 내 세우고 있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잘못된 불교사상은 불교가 사물의 연속성 -진행 또는 지속 -을 부인하는 데서 기인하는 바, 과거는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라는 동일률(同一律)적 사리만을 고집하고, 현재가 과거를 만들고, 과거가 현재를 만들고 있는 과정 -과거라는 무(無)는 현재라는 유(有)의 것이니 현재라는 유가 과거라는 무를 낳는- 즉 현재라는 일자(一者)가 과거라는 타자(他者)를 낳고, 그 타자는 일자 속에 있다는 모순의 통일 (곧 변증법)을 인정치 않는 데서 기인한다.
실로 사물의 과정은 유와 무의 통일에서 -과정은 사물이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것이다 - 성립하는 바, 불교사상은 유무 양 쪽을 부정함으로써 그 통일과정을 부인하고 필경 사물의 과정과 과정으로서의 사물 자체마저 미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3. 사물의 흐름과 시간의 방향

시간이란 사물의 진행(흐름으로서도 표현될 수 있다)에 붙여진 이름에 불과한 것이라 본다면, 아니 그렇게 볼 때만 시간의 난문제들이 정합적으로 해명될 수 있다.

일찍부터 논자는 이같은 관점을 갖고서 시간문제 전반을 생각해 왔다. 그러나 시간의 방향에 한정된 본 논문의 성격상 이 관점에 대한 논증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유감이다. 논자는 이 부담을 지금 완성단계에 있는 <半有의 世界>라는 작품 속에서 말끔히 풀고자 작업하고 있다.
1) 시간이 사물의 진행에 대응하는 흐름이라면 현재는 경과하는 가운데 지속하는 사물 또는 사물의 존재이다. 그래서 사물은 언제나 현재에 있다. -과거에는 있었을 뿐이고 미래에는 있지 않다.

찰라(刹那)적 <지금>으로서의 <현순간>은 사물의 흐름에서 맨 앞의 극한점(極限點)이다. -무릇 순간은 연속적이면서도 불연속적인 경과 속에 있는 불연속적인 점(點)이다.
그러나 <현재>는 경과하는 사물의 지속 -곧 연속-에 근거한다. 그래서 현재는 일정한 시역(時域)을 갖는 것이다. -이 시역에 대한 논의는 의식과 관계를 또한 갖고 있는데 여기서는 유보하겠다.
이와 같이 현순간은 사물의 연속적이면서도 불연속적인 흐름에서 불연속적 측면을 표현하며, 현재는 연속적 측면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경과와 지속은 하나이고 현 순간은 그래서 현재와 통일되어 있다.

그러나 경과하고 있는 사물 -지속-은 무(無)와 합일(合一)되어 있음으로써 머물러 있지 못하고 유동적으로 경과하게 되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흐르면서 지속하는 사물은 흐름의 주체(主體)로서 자기동일성(自己同一性)을 갖는 유(有) -또는 일자(一者)- 의 측면을 갖고 있으나 무(無) -또는 타자(他者)- 와 통일되어 있음으로써 자기와의 부동성(不同性)에 있어 있음에만 머물지 못하고 경과한다. 따라서 경과와 지속은 서로 모순하나 통일되어 있다. 그러나 그 통일의 주체(主體)는 지속 -곧 사물- 쪽에 있다. 그래서 경과하지 않는 지속 -사물- 이 없지만, 지속 -유(有)- 없이는 어떠한 경과도 일어날 수가 없다.

지속 -사물-은 경과 가운데서 경과를 저항하는 측면인 바, 이 측면이 사물의 자기동일적인 유(有)의 측면이다. 그러나 이 자기동일적인 유의 측면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無)의 측면을 또한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경과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속과 경과는 한 사태(事態)의 모순된 양 측면인 것이다. 즉 사물의 운동이 경과이고, 경과하는 사물이 지속이다. 데카르트는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2) 경과하고 있는 현재 사물 즉 사물의 현재 이전, 다시 말해서 현재까지 온 지속이 과거이며, 그 이후 앞으로의 가능적 지속이 바로 미래이다. 따라서 과거와 미래는 오직 경과하면서 지속하는 사물의 현재가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경과하는 사물은 시간 안에서 지나 가거나 지나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결과와 지속에서 시간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사물의 흐름 -또는 진행(進行)-은 그 사물에서 앞으로 나아 가게 됨으로써 이전의 있던 지점들 곧 지나 온 과정이 생겨나게 되는 바, 이것이 과거이다. 그래서 사물은 있어 오기 때문에 있어 갈 수가 있다. 이를 시간으로 표현한다면 사물의 현재가 과거를 만들면서 그 과거를 자신 속에 지양(止揚)하고 미래를 만들어 간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과거는 이미 사물이 있었던 시점들이지만 미래는 아직 사물이 있어 본적이 없다. 이 때문에 시간은 미래에서는 현재로 결코 올 수가 없고, 현재에서 과거로 흘러 갈 수가 없는 것이다. 현재가 과거로 흘러갔다는 표상은 지속을 간과하고 단지 경과의 측면만을 표상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사물은 그것이 아직 없는 지점에서 올 수가 결코 없으며, 오직 그것이 있는 지점에서 나아 갈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은 과거 -그때의 현재-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 -앞으로의 가능적 현재- 로 나아 갈 수 있을 뿐이다.

3) 위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시간이 미래 현재 과거로 흐른다는 생각은 사물의 경과과정과 역순하는 방향표상(方向表象)인바, 이런 표상은 미래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흘러 가는 시간이 따로 실재하며, 우리 (또는 사물)가 그 속에 머물러 있거나, 그 시간의 흐름을 흐르는 강물을 물고기가 거슬러 오르듯이 나아 가고 있다는 생각과 같다. 이런 표상은 우리가 시간 안에 있다고는 하면서도 흘러 가는 시간을 독립적인 실재로 보기에, 사실은 사람들이 의식치 못하는 사이에 시간이 우리 -곧 사물주체- 와 별도로 흘러 간다고 보는 태도이다. 그러나 사물과 우리는 시간과 별도로 있지 않을 뿐 아니라, 흐르는 시간과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니 우리와 사물이 그 시간을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리(事理)에도 불구하고 무(無)의 미래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무의 과거로 흘러 간다는 어리석은 표상은 대체 어떻게 생겨나는가?

(ㄱ) 미래가 현재로 온다는 표상방식은 사실은 현재가 미래로 나아 가지만, 현재에 기점(起點)을 두지 않고, 미래에다 기점을 두고 현재를 향해서 볼 때 생겨 난 현재의 착각이다. 이러한 착각은 예컨대 사실은 자연의 과정이 가을(秋)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우리가 가을이 오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가을은 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로 자연은 가을을 향해 나아 가고 있는 것이다. 지구(地球)가 태양을 돌아서 나아 감으로써 가을이 되기 때문이다.

(ㄴ) 미래가 현재로 온다는 생각은 현재가 과거로 흘러 간다는 생각과 필연적으로 맞물려 있는 표상방식이다. 미래가 현재로 오지 않는 한 현재는 그 미래와 단절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현재가 과거로 흘러 간다는 표상의 발생이유가 미래가 현재로 온다는 표상의 한 근거가 되겠으나 이 문제는 바로 뒤에 가서 다루기로 하고, 우선 미래가 현재로 온다는 표상의 심리적 근거를 찾아 보기로 하자. 무릇 사람들의 마음 속에 집요하게 생겨나는 표상에는 어떤 정서(情緖)가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장에서도 서술하였지만 심한 고난과 고통으로 무력해진 가운데 앞으로 나아 갈 힘을 상실해버린 수동(受動)적인 사람들에게는 남은 희망이라고는 앞으로 나아 가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가 만들어 주는 그 좋은 세상이 오는 것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미래가 와야한다는 수동적인 갈망이나, 또 그것이 반드시 온다는 믿음은 미래지향적이긴 하나, 저 천년왕국이나 지상천국 등의 종교적 표상에서처럼 비현실적 환상(幻想)에 지배당하기 쉽다. 미래는 먼 시점에서 현재로 흘러 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사물이 나아 가면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의 사물주체(事物主體)가 나아 가면서 만들어 가는 과정이야말로 곧 미래로서 그밖에 미래는 아무데도 없다. 이와 같이 미래는 현재 -곧 사물주체- 가 만들어 가는 것이므로 공허한 현재는 결코 알찬 미래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 때문에 공허한 인간들의 천년왕국이나 지상천국은 헛된 꿈일뿐 결코 실현되는 일이 없다. 상실된 현재는 미래를 상실케 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사물주체는 자신의 고유한 과정 -곧 시간-을 갖고 있다. -이것을 논자는 특수시간(特殊時間)이라고 부르겠다.
따라서 각 사물은 일정한 자신의 특수한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 사물의 과정이 끝나면 그때부터 그 사물의 미래도 없어지는 것이다.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 없다. 그러나 그 사물 외에 사물일반의 세계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으므로 그 세계가 일반시간(一般時間)을 만들어가고 있다.

(ㄷ) 시간이 현재에서 과거로 지나간다는 표상이 생겨나는 이유는 첫째로 우리가 현 시점에서 지나 온 경과를 뒤돌아 보면 지나 온 과정이 마치 지나 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기차를 타고 올 때 기찻길이 뒤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과 같다. 둘째로서는 세월이 유수(流水) 같이 지나 갔다는 표상 밑에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허무정서(虛無情緖)가 깔려 있다. 지나 온 삶을 공허하게 살아 온 사람에게는 세월은 덧없이 지나 가는 것이며, 고통받는 현재를 사는 사람은 그 현재가 어서 지나 가기를 절망(絶望)한다. 이같이 시간이 과거로 지나 간다는 표상에는 회한(悔恨)의 정서가 뒷받침되어 있어서 그 잘못된 표상은 피동(被動)적 상황에 놓인 인간들의 마음 속에 집요하게 유지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를 후회없이 살아 오고 현재를 알차게 사는 자에게는 세월은 덧없이 지나 가는 것이 아니라, 잘 지나 온 것이요, 현재는 어서 과거로 지나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향해 나아 가는 것이다.
과거는 오직 그때 그때의 사물의 현재가 만들어 자신 속으로 지양시켜 오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는 사물의 현재, 현재의 사물 속에 내속(內屬)되어 본질로서만 있을 뿐이다. 과거는 오직 사물의 지나 온 경과로서 사물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현재 뒤에서 강물같이 길게 흘러가는 연장적인 실재가 아니다. 실로 과거는 현재 바깥에는 아무데도 없다.

사물의 모든 과거는 경과된 측면을 제외하면 그 사물이 지나 온 모든 지속과정으로서 그 사물 속에 지양되어 그 사물의 본질로서 남아 있다. 이것이야말로 과거의 흔적이며, 사물의 기억이다. -사물은 자신의 모든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만약 무한한 예지(叡智)가 있다면 사물 속에 기억된 사물의 모든 과거를 반드시 추적해 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