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무라카미 하루키
1
"완벽한 문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내가 대학생 때 우연히 알게 된 어떤 작가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내가 그 참뜻을 이해하게 된 것은 한참 지난 뒤였지만, 그전에도 최소한 그 말을 일종의 위안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었다. 완전한 문장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고.
그러나 그래도 역시 뭔가를 쓰려고 하면 언제나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히게 됐다. 내가 쓸 수 있는 영역은 너무나도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코끼리에 대해서는 무엇인가를 쓸 수 있다 하더라도, 코끼리 조련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뜻이다.
8년 동안 나는 계속 그런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8년 동안. 긴 세월이다.
물론 모든 것에서 무엇인가를 배우려는 자세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면 나이를 먹으며 늙어 간다는 게 그다지 큰 고통스런 일은 아니다. 그것은 일반론이다.
스무 살이 좀 지났을 때부터 나는 줄곧 그런 생활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여러 번 뼈아픈 타격을 받고, 기만당하고, 오해받고, 또 동시에 많은 이상한 체험도 했다.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나에게 얘기를 걸었고, 마치 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소리를 내며 내 위를 지나가고 나서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 동안 입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자세로 나는 20대 후반을 맞았다.
이제 나는 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물론 문제는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았으며, 얘기를 끝낸 시점에서도 어쩌면 사태는 똑같다고 말해야 할런지도 모른다. 결국 글을 쓴다는 건 자기 요양의 수단이 아니라 자기 요양에 대한 사소한 시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자신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정직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정확한 언어는 어둠 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버린다.
변명할 생각은 없다. 적어도 여기서 내가 말하려는 것은 현재의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덧붙일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도 생각하고 있다. 잘만 되면 먼 훗날에 몇 년이나 몇십 년 뒤에 구원을 받은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코끼리는 평원으로 돌아가고 나는 더 아름다운 말로 세계를 얘기하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글에 대한 많은 걸 데레크 하트필드에게서 배웠다. 거의 전부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트필드 자신은 모든 의미에서 '불모'의 작가였다. 그의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문장은 읽기 힘들고, 스토리는 엉망이고, 테마는 치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트필드는 문장을 무기로 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뛰어난 작가 중 하나였다. 헤밍웨이, 피츠제럴드와 같은 동시대의 작가 대열에 끼여도 하트필드의 그 전투적인 자세는 결코 뒤지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하트필드 자신은 마지막까지 자기가 싸우는 상대의 모습을 명확하게 포착하지 못했다. 결국 불모라는 건 그런 뜻이다.
8년과 2개월, 하트필드는 그런 불모의 싸움을 계속했고, 그리고 죽었다. 1938년 6월의 어느 맑게 갠 일요일 아침, 그는 오른손에는 히틀러의 초상화를 끌어나고 왼손에는 우산을 펴들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그가 살아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었다는 사실도 그다지 대단한 화제가 되지 못했다.
내가 우연히 절판된 하트필드의 책 한 권을 처음 손에 넣은 건 다리 사이에 심한 피부병을 앓던 중학교 3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나에게 그 책을 준 작은아버지는 3년 뒤에 장암을 앓아 온몸은 갈기갈기 찢기고, 몸의 입구와 출구에 플라스틱 파이프가 끼워진 채 끝까지 고통을 받다가 돌아가셨다. 내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작은아버지는 마치 교활한 원숭이처럼 심할 정도로 불그스름하게 쪼그라들어 있었다.
나에게는 세 분의 작은아버지가 있었는데, 한 분은 상하이의 교외에서 돌아가셨다. 전쟁이 끝난 이틀 뒤에 자기가 묻어 놓은 지뢰를 밟은 것이다. 단 한 분, 유일하게 살아 남은 셋째 작은 아버지는 마술사가 되어 전국의 온천지를 돌아다니고 계신다.
하트필드는 좋은 글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글을 쓰는 작업은, 단적으로 말해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사물과의 거리를 확인하는 일이다. 필요한 건 감성이 아니라 '잣대'다"(<기분이 좋아서 무엇이 나쁜가?>, 1936년).
내가 한 손에 잣대를 들고 겁에 질려서 주위를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분명히 케네디 대통령이 죽은 해다. 그로부터 벌써 15년이나 지났다. 15년 동안 나는 참으로 많은 걸 내팽개쳐 왔다. 마치 엔진이 고장난 비행기가 중량을 줄이기 위해 짐을 내팽개치고, 마지막으로 불쌍한 스튜어디스를 내팽개치듯이, 15년 동안 나는 온갖 것을 다 내던지고 그 대신에 거처 아무것도 몸에 지니지 않았다.
그것이 과연 옳았었는지 나로서는 확신할 수가 없다. 편해진 건 확실하다고 해도 나이 들어 죽음을 맞이하려고 할 때, 도대체 나에게 무엇이 남아 있을까를 생각하면 두렵기 짝이 없다. 나를 화장한 뒤에는 뼈 하나 남지 않을 것이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어두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두운 꿈만 꾸지. 좀더 어두운 마음을 가진 사람을 꿈조차 꾸지 않는단다."
다시 한 번 글에 대해서 쓰겠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나에게 있어서 글을 쓰는 건 몹시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한 달 동안 한 줄도 쓰지 못할 때가 있는가 하면, 사흘 밤낮을 계속 썼는데 모두 엉뚱한 내용인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쓴다는 건 즐거운 작업이기도 하다. 삶이 힘든 것에 비하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너무나도 간단하기 때문이다.
10대 무렵이었을까, 나는 그런 사실을 깨닫고 1주일쯤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란 적이 있다. 조금만 약삭빠르게 굴면 세상은 내 뜻대로 되고, 모든 가치는 전환되고, 시간은 흐름을 바꾼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함정이라는 걸 깨달은 것은 불행하게도 훨씬 뒤였다.
나는 노트 한가운데에 줄을 하나 그은 다음 왼쪽에는 그 동안에 얻은 것 쓰고 오른쪽에는 잃은 걸 썼다. 잃은 것, 짓밟아 버린 것, 벌써 오래 전에 버린 것, 희생시킨 것, 배반한 것... 나는 그것들을 마지막까지 모조리 쓸 수가 없었다.
우리가 인식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실제로 인식하는 것과의 사이에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어떤 긴 잣대로도 그 깊이를 측정 할 수가 없다. 내가 여기에 기록할 수 있는 건 단지 리스트일 뿐이다. 소설도 아니고, 문학도 아니고, 예술도 아니다. 한가운데에 선이 하나 그어진 한 권의 노트다. 교훈이라면 아주 조금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당신이 예술이나 문학을 원한다면 그리스 인이 쓴 것 읽는 게 좋겠다. 참다운 예술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노예 제도가 필요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노예가 밭을 갈고 식사를 준비하고 배를 젓는 사이에 시민은 지중해의 태양 아래서 시작에 전념하고 수학과 씨름을 했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모두가 잠든 새벽 세 시에 모두가 잠든 부엌의 냉장고를 뒤지는 사람은 이 정도의 글밖에는 쓸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나다.
(중략)
40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데레크 하트필드에 대해서 얘기하겠다.
하트필드는 1909년에 오하이오 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과묵한 전기 기사였고, 어머니는 별점 보는 일과 쿠키 굽는 일이 장기인 약간 통통한 여자였다. 음울했던 소년 하트필드에게는 친구 따윈 한 명도 없어 시간만 나면 만화책이나 싸구려 잡지를 탐독했고, 어머니가 만든 쿠키를 먹으면서 고등 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 그는 그 마을의 우체국에 취직을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고, 그 무렵부터 그는 자신이 나아갈 길은 소설가밖에는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의 다섯 번째 단편인 <웨어드 테일스>는 1930년에 원고료 20달러에 팔렸다. 그 이듬해 1년 동안 그는 한 달에 7만 단어씩 써댔고, 그 다음해에는 10만 단어, 죽기 전 해에는 15만 단어를 써댔다. 레밍턴 타자기를 반년마다 새 걸로 갈았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하트필드의 소설은 거의가 모험 소설과 괴기물이며, 그 두 가지를 교묘하게 섞은 <모험가 월드>시리즈는 그의 최대 히트작이 되었는데 전부 마흔두 편이다. 그 속에서 월드는 세 번이나 죽고, 5,000명 가량의 적을 죽이고, 화성인 여자까지 포함해서 전부 375명의 여자와 관계를 가졌다. 그중 몇 편은 우리도 읽을 수가 있다.
하트필드는 참으로 많은 걸 증오했다. 우체국, 고등 학교, 출판사, 당근, 여자, 개..., 헤아리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그러나 그가 좋아한 건 세 가지밖에 없다. 총과 고양이와 어머니가 만든 쿠키다. 그는 파라마운트 촬영소와 FBI연구소를 제외하면 틀림없이 아마 미국에서 가장 완벽에 가깝다고 할 만큼의 총기를 수집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곡사포와 대전차포 외에는 전부 갖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그가 자랑했던 총은 손잡이에 진주 장식이 붙은 38구경 리볼버로, 거기에 탄환은 한 발만 장전되어 있었는데, "나는 언젠가 이걸로 나 자신을 리볼버할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그러나 1938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하트필드는 뉴욕까지 가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려 개구리처럼 납작해져 죽었다.
그의 묘비에는 유언에 따라 니체의 다음과 같은 말이 인용되었다.
"한낮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랴."
하트필드, 또다시...(후기에 대신해서)
데레크 하트필드라는 작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소설 따위는 쓰지 않았을 거라고까지 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내가 나아간 길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길이었을 거라는 건 확실하다.
고등 학생 때, 고베의 고서점에서 외국 선원이 놓고 간 듯한 하트필드의 페이퍼백 몇 권 한꺼번에 산 적이 있다. 한 권에 50엔이었다. 만일 그 곳이 책방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책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낡은 물건이었다. 화려한 표지는 거의 떨어져 나갔고, 종이는 오렌지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아마도 화물선이나 구축함의 하급 선원의 침대 위에 얹혀진 채 태평양을 건너고 그리고 까마득히 먼 시간의 저편에서 내 책상 위로 왔을 것이다.
몇 년인가 뒤에 나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오로지 하트필드의 무덤을 방문하기 위한 짧은 여행이었다. 무덤이 있는 곳은 열렬한(그리고 유일한) 하트필드 연구가인 토머스 맥클루어 씨가 편지로 가르쳐 주었다. 그는 편지에 "하이힐의 뒤축만큼이나 조그만 무덤입니다. 못 보고 지나치지 않도록 하십시오"라고 썼다.
뉴욕에서 거대한 관 같은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오하이오 주의 그 작은 마을에 도착한 건 아침 일곱 시였다. 나말고 그 마을에서 내린 승객은 한 사람도 없었다. 묘지는 마을에서 떨어진 초원을 지난 곳에 있었다. 마을보다도 넓은 묘지였다. 내 머리위에서는 종달새 몇 마리가 빙글빙글 원을 그리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하트필드의 무덤을 찾는 데는 꼭 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주위의 초원에서 꺾은 먼지투성이의 들장미를 바치고 나서 무덤을 향해 합장하고 그 곳에 주저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5월의 부드러운 햇살 아래에서는 삶도 죽음과 마찬가지로 편안하게 느껴졌다. 나는 드러누워서 눈을 감고 몇 시간 동안 종달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었다.
이 소설은 그런 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디에 도달했는지 나도 모른다. "우주의 복잡함에 비하면 우리의 세계 따위는 지렁이의 뇌와 같은 것이다"라고 하트필드는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나도 바라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트필드의 기사에 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맥클루어 씨의 역자, <불임의 별들의 전설>(1968년)에서 몇 군데 인용했음을 밝힌다. 감사드린다.
- 1979년 5월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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