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적응과 자연선택(네이버에서)

나뭇잎숨결 2009. 5. 14. 18:33
새 밀레니엄이 열리던 2000년 벽두에 아프리카 콩고의 밀림에서 급성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영국으로 급송되었으나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신 윌리엄 해밀턴(William D. Hamilton, 1936~2000)은 흔히 다윈 이래 가장 위대한 다윈주의자라고 불린다. 그와 더불어 유전자 관점의 진화론을 정립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진화생물학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주저 없이 조지 윌리엄스(George C. Williams, 1926~)라고 답할 것이다. 그가 1966년에 출간한 책 ‘적응과 자연선택(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은 현대 진화론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린 명저이다.

 

 

윌리엄스 박사는 지금 몇 년째 알츠하이머 병을 앓고 있다. 진화학계는 조만간 또 하나의 거인을 잃을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학술진흥재단 동서양고전번역사업의 일환으로 지금 ‘적응과 자연선택’이 번역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듣고 있다. 현대 진화생물학의 문을 열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는 이 책이 왜 아직도 번역되지 않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제 곧 책이 번역되어 나와도 정작 윌리엄스 박사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할 것 생각하면 정말 안타깝다. 그는 또한 미시건 의대의 랜덜프 네스(Randolph Nesse) 교수와 함께 다윈 의학 또는 진화의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열기 위해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Why We Get Sick, 최재천 옮김)’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의 정신도 육체와 마찬가지로 진화의 산물임을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그런 그가 말년을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 묘한 아이러니를 불러일으킨다.

 

 

적응(adaptation)은 진화생물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진화생물학에서 말하는 적응은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흔히 얘기하는 적응, 즉 새로운 환경 조건에 서서히 익숙해지는 과정과는 다른 것이다. 진화적 적응은 그것을 지님으로써 생명체로 하여금 보다 잘 생존하고 번식할 수 있게 해주는 유전적 특징을 말한다. 1996년 윌리엄스는 “진화적 적응은 오로지 자연선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단언한다. 1859년 ‘종의 기원’ 제6장에서 다윈이 했던 다음과 말을 이어받은 것이다. “만일 수많은 점진적인 작은 변화들에 의하지 않고도 어떤 복잡한 기관이 존재할 수 있음이 밝혀진다면, 내 이론은 철저하게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다윈은 그의 이론에 대한 확신을 다음 문장에서 표현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예를 찾을 수가 없다.

 

윌리엄스는 진화적 적응은 자연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면 절대로 만들어지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사용되어서는 안 될 특별하고도 성가신 개념이며, 우연이 아니라 분명히 설계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니면 어떤 효과라도 기능이라고 일컬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바다에 사는 날치를 예로 들어 적응의 개념을 설명했다. 날치는 물을 박차고 날아올라 상당한 거리를 전진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중력의 영향에 의해 물로 떨어진다. 물로 돌아오는 것은 분명 날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다. 그렇지 않고 공중에 너무 오래 머물면 생명이 지장이 생긴다. 하지만 날치가 물로 돌아오는 행동은 적응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중력의 법칙에 의해 일어나는 물리적 결과일 뿐이다. 이 과정의 어느 순간에도 자연선택이 개입하여 날치로 하여금 중력의 법칙을 따르도록 압력을 가하지 않았다. 생명체에게 도움이 된다고 해서 모두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적 적응으로 간주할 수 없다.

 

 

대부분의 생물학 연구는 사실상 생물의 어떤 특징들이 적응적인가를 밝히려는 노력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맹목적으로 생명현상의 모든 것이 진화적 적응의 결과일 것이라고 전제하는 연구 자세 역시 옳은 것은 아니다. 생물학자는 자칫 이른바 ‘적응주의적 연구 프로그램’에 매몰되어 ‘그렇고 그런 이야기(just-so story)’를 쏟아내곤 한다는 비난을 들을 수 있다.

 


1979년 굴드와 르원틴(Richard Lewontin)은 ‘산 마르코의 스팬드럴(The spandrels of San Marco)’이라는 논문에서 적응주의 연구에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건물의 사각 구석에 둥근 아치형 구조를 표현하려면 필연적으로 두 개의 아치 사이에 삼각형 모양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유럽의 옛 성당 건물에는 이 같은 스팬드럴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스팬드럴은 아치형 구조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부산물일 뿐 그 자체가 어떤 특별한 기능을 갖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굴드와 르원틴은 생물학자들이 적응적 설명을 남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논문은 많은 생물학도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어떤 의미에서는 적응 연구를 지나칠 정도로 위축시킨 점도 없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에 철학자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은 좀더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스팬드럴도 나름대로 명확한 기능을 지니고 있다고 반박했다. 나는 최근 하버드 대학을 방문한 길에 에드워드 윌슨 교수와 대담을 가졌는데, 그는 “생물학뿐 아니라 모든 학문은 다 그렇고 그런 얘기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런 질문이 그렇고 그런 이야기에 머물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학자의 임무라고 그는 강조했다.

 

 

지난 5월 4일 이화여자대학에서는 네이버의 후원을 얻어 교육과학기술부 WCU(World Class University) 사업의 일환으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와 에코과학연구소가 ‘피터 크레인 경과 최재천 석좌교수의 다윈 진화 탐구’라는 행사가 열렸다.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즈음이라 전반부에서는 진화퍼즐, 다윈을 살리자(Hang Darwin) 등 흥미로운 게임을 통해 다윈 진화론의 진수를 전달하려 노력했다. 나는 여기서 아이들이 깜짝 놀랄 정도의 다윈 분장을 하고 보다 생생하게 다윈의 이론을 전달하려 노력했다. 이어진 후반부에서는 크레인 경(Sir Peter Crane)이 식충식물에 관한 다윈의 연구를 소개했고 나도 ‘과학자 다윈, 사상가 다윈, 인간 다윈’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크레인 경은 식물 화석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식물의 진화를 연구하는 세계 최고 권위의 학자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영국 큐 식물원(Kew Garden)의 소장과 미국 시카고의 필드자연사박물관의 관장을 역임했고 현재 시카고대학 지물리학과 석좌교수이다. 이번 가을 학기부터는 예일대 산림과학대학 학장으로 자리를 옮겨 탁월한 연구와 행정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다윈과 식물계의 포식자들의 진화’라는 제목의 크레인 경의 강의는 대가 다운 면모와 지식, 흥미 모두를 고루 갖춘 참으로 멋진 강의였다. 다윈은 자신의 자연선택 이론의 토대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풀기 어렵지만 일단 풀어내면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할 수 있는 온갖 적응 현상들을 끊임없이 연구했다. 식충식물도 그런 연구의 하나였다. 하지만 연구 자체는 사뭇 우연한 계기로 시작되었다.

 

‘종의 기원’이 출간된 지 6개월 후 다윈은 온갖 논란을 뒤로 하고 그의 부인 엠마와 일곱 자식들을 데리고 영국 남부의 하트필드에 있는 엠마의 자매들이 살고 있던 ‘리지(The Ridge)’라는 이름의 대저택으로 비교적 긴 휴가를 떠났다. 이 지역은 그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상당 부분 자연생태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여기서 다윈은 우연히 커다란 끈끈이주걱(common sun-dew) 군락을 발견하고 그들의 신기한 형태와 생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860년 6월 29일 그의 절친한 친구인 식물학자 후커(Joseph Hooker)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다윈은 그 해 9월 다운하우스(Down House)로 돌아올 때 끈끈이주걱을 가져와 연구를 계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61년 봄 후커는 또 다윈에게 큐 식물원에 있던 비너스 파리지옥(Venus’s flytrap)을 보내 다윈의 식충식물 연구를 지원해주었다. 다윈은 이 연구를 오랫동안 계속하여 그의 말년인 1875년에 ‘곤충을 잡아먹는 식물들(Insectivorous Plants)’이라 제목의 책으로 출간했다.

 

 

다윈이 특별히 식충식물에 관심을 보인 까닭은 그들의 기이한 삶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적 적응 현상을 설명하는 데 매우 적합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다윈은 끈끈이주걱과 파리지옥을 가지고 참으로 많은 실험들을 수행한다. 이 식물들에게 곤충은 물론 고깃덩어리, 종이는 물론 심지어는 자신의 가래까지 뱉어 넣어보며 어떤 메커니즘으로 육식을 하는지를 연구했다. 양쪽으로 펼쳐져 있는 파리지옥의 잎몸(leaf lamina) 안쪽 표면에는 세 계의 가느다란 감각털(sensitive hair)이 나 있는데 이 중 두 개를 건드리면 두 잎몸이 순식간에 오므라드는 반응이 시작된다. 실험에 의하면 감각털 하나만 건드려서는 반응이 시작되지 않고, 반드시 두 번째 털에 접촉이 생겨야 오므라들기 시작한다. 이것 또한 아마 허구한 날 먹이도 아닌 것들이 공연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걸 막기 위한 적응일지 모른다.

 

 

지금까지 식충식물은 8과, 15속의 630종이 알려져 있다. 이는 35만 종의 현화식물 중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날로 감소하고 있다. 서식지 파괴와 생태계의 질소 풍부화가 가장 중요한 감소 원인으로 보인다. 하트필드 지역에는 지금도 다윈이 연구하던 끈끈이주걱이 군락을 이루고 있지만 그 규모가 많이 줄어 있고, 비너스 파리지옥의 유일한 자연서식지인 미국 노스태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생태계 파괴는 파리지옥을 멸종의 위기로 내몰고 있다. 얼마 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산불이 파리지옥의 서식지 중심부를 강타하여 근심을 더욱 깊게 하고 있다. 다행히 식충식물에 대한 많은 애호가들의 호기심 덕택에 완벽한 절멸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다윈 자신이 연구했던 진화적 적응의 진수가 그 비밀을 다 보여주지 못한 채 서서히 우리 곁을 떠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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