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제8장 -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나뭇잎숨결 2009. 1. 19. 19:53

제8장 -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상선약수. 수선이만물이부쟁, 처중인지소악.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고기어도. 거선지, 심선연, 여선인, 언선신,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정선치, 사선능. 동선시. 부유부쟁, 고무우.



최상의 선은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은 만물에게 이로움을 주지만 다투는 일이 없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물은 도에 거의 가까운 것이다. 사는 곳으로는 땅 위가 좋고, 마음은 못처럼 깊은 것이 좋고, 벗은 어진 사람이 좋고,


말은 믿음이 있어야 좋고, 정치나 법률은 세상이 잘 다스려지는 것이 좋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능숙한 것이 좋고, 행동은 적당한 시기를 아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다투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못됨이 없는 것이다. 물은 이에 제일 가깝다.


 

 아래 해석글은 뿌리깊은 나무 http://cafe.daum.net/suming56 의메뉴 한문학,명구에서 발췌

    최상의 선(善)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萬物)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그러므로 도(道)에 가깝다. 거하는 곳마다 거기가 곧 좋은 땅인 줄을 알며, 마음은 깊은 연못과도 같이 고요하고,
    줄 때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준다. 말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를 말하며, 최선의 다스림을 베풀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움직일 때는 최선의 때를 따라 움직인다. 대저 오직 다투지 않기에, 그러므로 허물이 없다.

    < 뜻풀이 >
    이 장(章)은 앞장을 이어받아, '不自生'을 통해 道와 하나가 되고, '무분별(無分別)의 현재(現在)'에 눈 뜬 사람과 삶의 모습을 물이라는 상징(象徵)을 통해 아름답고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우선, "處衆人之所惡(뭇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라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얘기를 시작해 보자.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곳? 그것은 어떤 곳일까? 아마도 그것은 낮은 곳, 더러운 곳, 추한 곳, 좁고 길이 협착한 곳 등일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이러한 곳을 싫어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 반면에 높은 곳, 깨끗한 곳, 넓고 길이 평탄한 곳 등을 사람들은 좋아한다. 그리하여 언제나 그러한 자리에 자신을 두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은 그와 같은 우리들의 관심과 노력과는 반대로 언제나 낮은 곳에 자신을 두기를 즐겨 한다. 그리고 그런 물을 두고 우리의 노자는 "道에 가깝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處衆人之所惡"를 우리의 내면의 얘기로 바꿔보면 어떨까? 사람들이 처하기 싫어하는 곳은 밖(外)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內)에도 많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불안이나 의심, 회의, 부족함, 미움, 성냄, 밴댕이 등등, 이를 달리 말하면, 번뇌(煩惱)와 망상(妄想), 무지(無知), 중생(衆生) 등일 것이다.사람들은 이러한 자신을 싫어하고 못견뎌 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 반면에 당당함, 확신에 찬 모습, 완전함, 사랑, 자유, 자애로움, 넉넉함 등등, 이를 또한 달리 말하면, 보리(菩提), 지혜, 깨달음, 부처(覺者) 등등일진데, 사람들은 언제나 이러한 것을 좋게 여겨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이 되려 한다. 그러나, 보라! 물은 언제나 낮은 곳 ― 우리가 결코 처하고 싶어하지 않는 바로 그 곳에 자신을 둔다. "그러므로 道에 가깝다(故幾於道)!"

    정말 그러하다. 진리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道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고 외면하는 바로 그 곳, 그 낮은 곳 ― 아아, 번뇌(煩惱)와 망상(妄想) 속에, 중생(衆生) 속에,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 속에 있다. 그것은 결단코 수많은 노력과 수고와 수행을 통해 도달해야 하는 '미래'의 완전한 곳, 높은 곳, 넓고 평탄한 곳 속에 있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끝없이 끊임없이 낮은 곳을 버리고 높은 곳으로, '현재'를 버리고 '미래'로, 번뇌를 버리고 보리(菩提)를, 중생(衆生)을 버리고 부처[깨달음]를,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버리고 미래의 '완전한 나'를 구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곧 진리를 버리고 진리를 찾으며, 道를 버리고 道를 구하는 격이 아닌가? 이 무슨 어리석음인가! 그러고서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철석같이 믿고서 달려나가고 있으니, 아아 이를 어찌 하리오?

    자, 그렇게 바삐 길을 떠나지만 말고 잠시 앉아 가만히 생각해 보자. 만약 내가 지금 진리를 구하려 하고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아직 내게는 진리가 없으며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다. 그렇지 않은가? 만약 내가 지금 진리를 알거나 깨달아 있다면 나는 그것을 구하려는 어떠한 몸짓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지금 그 모두에 대해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찌 그리도 쉽게 ― 모르면서도! ―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에게는 진리도, 깨달음도 없다고 단정지을 수 있으며, 그것을 또한 그리도 쉽게 '미래'에다 몽땅 투영해 놓을 수 있는가? 아니, "현재에는 없고, 열심히 수행하고 노력하다 보면
미래에는 있을 수 있다"라는 그 앎, 그 모호하고도 맹목적인 믿음 ― 그리하여 나를 줄곧 깨달음과 '완전'을 향해 달려나가게 만드는 ― 은 도대체 어찌된 것인가? 그것은 정녕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바로 그것이, 아니, 바로 그것만이 허구(虛構)다!

    그러니, 이제 눈을 떠라! '현재(現在)' 혹은 '현재의 나'는 '부족'이니 '완전'이니 하는 것으로,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것으로, 지금 이 순간의 '나'의 감정과 느낌과 생각들 또한 번뇌(煩惱)니 보리(菩提)니 하는 것으로 규정되거나 정의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그러한 모든 '구별'은 전적으로 우리의 무지(無知)와 분별심(分別心)이 만들어낸 허구다! 그러한 것은 있·지·도·않·다! 그냥 다만 모든 것은 ― '나'를 포함하여 ―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일 뿐이며, 그 낱낱의 것은 우리가 만든 그 어떠한 분별(分別)로부터도 떠나 있다.
    그러니, 그냥 살라. 우리의 생각과 관념 속에만 있지 실재(實在)하지 않는 현재의 '부족'을 메우려 하지도 말고, 그것에 저항하지도 말며, 또한 있지도 않은 미래의 '완전'이나 깨달음을 추구하지도 말라. 그냥 다만 현재의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살라. 그렇게, 다만 무분별(無分別)의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 ― 이를 '이름하여' <깨달음>이라 한다. 그러니 따로이 해야 할 일이 있는가? 그냥, 주어지는 현실을 열심히 살 뿐[無事人]이다.

    그렇게 '무분별(無分別)의 현재(現在)'에 눈 뜬 사람은 이제 물과도 같다. 그에게는 '나'니 '너'니 하는 나눔도 없고, '부족'이니 '완전'이니 하는 구별도없다. '앞'이니 '뒤'니 하는 것도 그에게는 없기에, 앞서거나 높아지려는 모든 몸짓과 마음의 작용도 정지한다. 아, 이제 그에게는 그 모오든 '다툼(爭)'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축복이어라! 그 모든 '다툼'들이 사라져 버린 자리에는 이제 무엇이 남을까? 거기에는 우리가 그토록 애틋하게 갈구하던 영혼의 쉼과 안식이, 꿈에도 그리던 영원한 평화와 자유가, 강물처럼 흐르는 은혜와 진리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이 있다! 그리하여 이제 그는 진정으로 만물을 이롭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水善利萬物而不爭]! '너'와 구별되고 분리된 '나'라는 것이 없기에, 너의 아픔이 곧나의 아픔이 되고 너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 되는, 아아 이제 그는 저절로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렇다! 자타불이(自他不二)니, 대자대비(大慈大悲)니, 이타(利他)
니 하는 것은 공허한 이론이나 율법 혹은 계명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다. 아니, 눈 한 번 뜨면 오직 그것만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은 저절로 내 안에서흘러나오고―!

    우리의 노자는 계속해서, 그렇게 모든 '다툼(爭)' ―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보는 미망(迷妄)과 무명(無明)으로 인한 내·외적 갈등과 긴장 ― 이 끝난 사람의 구체적인삶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그리고 있다.

    居善地(거하는 곳마다 거기가 곧 좋은 땅인 줄을 알며)……물은 장소를 가려가며 흐르지 않는다. 그냥 흐를 뿐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좋은 땅'이라는 것이 없다. 그런데도 노자는 '善地'라 했다. 왜일까? '善地'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 사실 물에게는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등의 분별(分別)이 없다. 그렇지 않은가? 그는 그냥 흐를 뿐인 것이다. 그 '무분별(無分別)의 마음'을 이름하여 '善地'라 한다.따라서 '居善地'를 '무분별의 마음에 거하고'라고 풀이해도 좋으리라. 그렇게 무분별의 마음으로 담담히 흘러가는 물의 모습을 노자는 '居善地'라 했다.

    자, 이를 다시 우리의 내면의 얘기로 바꿔보자. 우리 안(內)에도 생각과 감정과 느낌이라는 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마음의 흐름을 경험하는가! 그것들이 그냥 그렇게 물처럼 흐르도록 내어버려 두라. 그것들을 구별하여 또다시 취(取)하거나 버리려(捨) 하지 말라. 그러한 분별(分別)만 내려지면 그 모든 것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사랑스런 '나'요, '좋은 것'이다! 居善地! 그리하여, 수처작주(隨處作主)요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어딜 가나 거기가 내 자리요, 내가 선 자리마다 진리로고!)

    心善淵(마음은 깊은 연못과도 같이 고요하고)……그렇다. 그렇게 무분별의 '善地'에 거할 줄 아는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어느 때나 깊고도 고요하다. 커다란 연못의 표면이 아무리 격렬하게 파도친다 하더라도 그 깊은 내면에서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그저 고요할 뿐이듯이 말이다. 그런데 이 '고요하다' 라고 하는 것은 결코 어떤 '모양'에 있지 않다[無相]. 다시 말하면, 그것은 격렬한
파도처럼 잠시도 가만 있질 못하고 끊임없이 흔들리거나 요동하는 모양과 구별되고 대비된 의미의 '고요'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때의 '고요함'이란, 정확히 말하면 '격렬한 파도 그 자체가 되는 것', '흔들리고 요동침 그 자체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아, 이를 어떻게 하면 보다더 섬세하게, 그 민감한 부분까지를 함께 느끼고 나눌 수 있도록 표현할 수 있을까? 
   

  이를 혜능(慧能)은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於六塵中에 不離不染하야 來去自由가 卽是般若三昧며 自在解脫이니……육진(六塵)을 떠나있지도 않고 그것에 물들지도 않아 육진이 오고 감에 자유함이 곧 반야삼매(般若三昧)며
자재해탈(自在解脫)이니……"라고. 여기에서 육진(六塵)이란, '격렬한 파도' 혹은 '흔들리고 요동치는' 온갖 번뇌와 망상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하루의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온갖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감정과 느낌과 생각들을 말한다. 그 속에는 '불안'도 있을 수 있고, 미움, 짜증, 성냄, 기쁨, 의심, 회의 등등 온갖 것들이 있을 수 있는 바, 그것들을 떠나있지도 않고[不離] 또한 물들지도 않아[不染] 그것들이 오고 감에 자유함 ― 그 모든 것들이 그냥 그렇게 물처럼 흐르도록 내어버려 둠 ― 이 바로 진정한 '고요함'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요동치는' 번뇌를 버리고 따로이 보리(菩提)라는 '고요함'을 구하고 있지 않은가?

    與善仁(줄 때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준다)……물을 보라.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끝없이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주기만 할 뿐이다. 거기 어디에 자신의 행위에 대한 주목이나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가? 물은 언제나 그·냥·그·렇·게·할·뿐·이·다! 아아, 그것은 바로 '나 없음[無我]'이 아닌가! 그 '나 없음'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이 바로 사랑이며, 與善仁이다. 우리는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그 무아(無我)와 무한한 사랑이 바로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며,우리의 본질은 바로 사랑이다! 아아,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자신의 이토록 아름다운 본래 모습을 망각한 채 안타깝게도 유리(遊離)하는 백성이 되어 있구나!

    言善信(말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를 말하며)……언제나 있는 그대로를 말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그것은 이를테면,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혹은 있는 것을 있다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 그리고 인 것은 이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다 하는 것이다. 얼마나 단순한가? 진리 혹은 진실은 이토록 단순한 것이다! 아아, 그런데 그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이 되어버렸는가?
   

  예수도 말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태복음 5:37)

공자도 논어(論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앎이니라."(爲政篇 第二)

    政善治(최선의 다스림을 베풀고)……무엇이 '최선의 다스림'일까?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잘 다스리는 것일까? 그것은 다·스·리·려·하·지·않·는것이다!내 안(內)을 '다스리려' 하지 말라. 그냥 두라. '완전함'과 '깨달음'이 좋다 하여 끝없이 끊임없이 자신을 채근하여 자신 안의 온갖 다양한 생명들을 주눅들게 하지말라. 그 하나의 '좋아보이는 것'을 위하여 현재(現在)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닦달하고 통제하고 조절하지 말라. 아아, 그렇게 자신을 억압하지 말라! 이제 그만 하라. 진리는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다. 그냥 단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현재'를 살라. 다만 그것이면 족(足)하다! 道常無爲而無不爲……도(道)는 언제나 함이 없으되 되어지지 아니하는 바가 없구나!(도덕경 37장)

    事善能(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최선(最善)'이라는 것도 내 밖(外)에 따로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無相]. 언제나 어느 때나 모두가 본받아야 할 '최선'이란 우리의 관념과 생각 속에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허구(虛構)다. 그렇다면 '事善能'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모든 일'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내 밖(外)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매일 매일의 일과나 사람과의
관계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내 안(內)의 일들 곧 하룻동안의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온갖 다양한 느낌과 감정과 생각 등등의 마음의 작용과 흐름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다(事善能)'는 것은 내면의 그 어떤 것도 거부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또한 왜곡하거나 미화(美化)하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올올이 살아낸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곧 '무분별(無分別)의 현재(現在)'를 산다는 것이며,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냥 사는> 모습이다. 진리는 바로 거기에 있다.

    動善時(움직일 때는 최선의 때를 따라 움직인다)……마찬가지로, 진정한 의미의 '최선의 때'란, '최선의 때'라는 것을 따로이 두거나 따로이 가리는 바로 그러한 분별(分別)만 내려지면 모든 때가, 모든 순간 순간이, 아아 우리네 삶 그 전체가 온통 '최선의 때'임을 알리라! 얼마나 가슴 벅찬 우리네 '삶'인가! 夫唯不爭, 故無尤……대저 오직 다투지 않기에 허물이 없다. 다시 더  무엇을 말하리오!

 

 출처 :쓸쓸히 채워져 있고 따뜻이 비워진 숲 원문보기 글쓴이 : 들이끼속의 烏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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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상선약수. 수선이만물이부쟁, 처중인지소악.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고기어도. 거선지, 심선연, 여선인, 언선신,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정선치, 사선능. 동선시. 부유부쟁, 고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