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라캉의 후기 정신분석학과 현대미술

나뭇잎숨결 2009. 1. 8. 14:19
충동(pulsion)과 희열(jouissance)의 공간
- 라캉의 후기 정신분석학과 현대미술
 
조선령
1. 
  정신분석학이 현대문화를 분석하는 유용한 도구로 자리잡은지도 적지않은 세월이 흘렀다. 섹슈얼리티, 물신주의, 신경증, 욕망 등의 용어는 각종 비평과 이론적 글의 단골메뉴가 된지 오래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다. 정신분석은 원래 신경증 환자의 치료방법의 하나로 시작되었다. 문화를 보는 눈이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의 시각 혹은 환자 그 자체의 시각과 유사하게 된 것은 어쩐 일일까? 특정한 이론이 특정한 현실에 이렇게 잘 밀착되기도 어려운 일이다. 이 유행, 그리고 이 친화성은 현대의 주체가 바로 정신분석의 주체와 다르지 않다는 정신분석학의 주장을 우리가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인간은 모두 신경증 환자라고 하는 프로이트의 급진적인 견해에 어떤 증명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우리의 문화는 신경증적이다. 사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모든 문화의 근거는 신경증적이다. 이때 신경증은 배척되어야 하는 악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정신병에 걸리는 것을 막아주는 삶의 '지혜'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 논의의 대상이 된지도 20년이 지난 세기말의 지금, 이 신경증은 다른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정신병으로의 추락을 막아주는 방패막 사이를 비집고 프로이트가 말한 '외상(trauma)'이 귀환하고 있다는 증거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소위 '엡젝트 아트(abject art)'의 유행이 미술의 영역에서 일어난 이 귀환의 한 예일 것이다.

  요컨대 오늘날의 문화에서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의미나 욕망이 아니라 신체의 적나라함과 도착적인 쾌락인 듯하다. 라캉을 비롯한 후기구조주의적 이론이 한계를 가진다는 주장 역시 이런 문화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무의식과 욕망마저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라캉의 이론의 '구조주의적' 한계는 신체와 쾌락의 영역을 분석하기에는 너무나 결정론적이고 비역사적이라는 것이 비판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현대문화를 읽어내는 도구로서의 정신분석학이 포기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딜레마에 직면한 몇몇 이론가들은 라캉 대신 프로이트로(혹은 페미니즘의 맥락에서는 줄리아 크리스테바나 멜라니 클라인으로) 돌아가려는 태도를 보인다. 더 정확히 말하면 라캉적으로 해석되지 않은 프로이트를 재발견하자는 것이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언어에 의해 세계를 해석하는 구조주의적 미련을 버리고, 즉 상징계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입장을 버리고 신체와 쾌락이라는 '생생한' 문제로, 또한 구조주의의 경직된 공시성 대신 유동적이고 역사적인 세계관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라캉이 프로이트를 다시 읽었듯이 라캉을 다시 읽어서 그의 다른 면을 강조하는 이론가들은 이것이 오류라고 말한다. 대표적인 이론가가 슬라보예 지젝과 조안 콥젝이다.(주1) 이들은 라캉 이론의 한계가 언어의 우월성에 대한 그의 강조에 있다는 비판자들의 주장을 반박한다. 이들은 비판자들이 라캉 이론의 상징계(le symbolique)적 측면만을 문제시삼는다고 말하면서 실재계(le r el)로 관심의 초점을 돌린 라캉의 후기 이론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라캉의 독자성은 상징계보다는 바로 이 실재계 개념에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보드리야르나 푸코 등 상대주의적 입장을 가진 이론가들과는 달리 라캉은 사회적 관계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어떤 '저편'의 존재, 즉 실재계를 강조한다. 이곳은 사회와 언어의 세계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한계 지점이다. 언어가 존재를 화석화시킨다는 라캉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실재계는 언어의 그물망에 걸러지지 않은 존재의 공간, 살아있는 신체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살아있는 공간은 결코 있는 그대로 경험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실재계는 상징계의 한계지점에서만 경험되기 때문이다. 실재계는 항상 부정적인 형태로만 경험되는 우리 존재의 '핵'이다.

  그러나 콥젝이나 지젝에 의하면, 라캉이 후기 이론에서 실재계를 강조한 것은 결코 초기이론의 관점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다만 위상학적 위치변경이 이루어진 것뿐이라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실재계를 강조하는 것은 상징계의 우월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실재계는 상징계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상징계의 우월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상징계를 강조할 때 라캉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기표가 세계를 구조화하는 근거라는 것이었다면(그래서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깨뜨리고 싶었다면), 실재계를 강조할 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기표의 세계가 결정론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불안하고 유동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징계는 항상 실재계에 의해 침범되며 기표는 그 사이에 난 틈에 의해서 단절되기 때문이다. 실재계는 말하자면 언어 사이에 드러나는 침묵이다. 이 침묵은 언어로 인해 생겨났지만 언어의 단일성을 위협하는 공백인 것이다. 상징계의 불안정성과 유동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들은 라캉의 비판자들이 보내는 의혹, 즉 라캉 시각이 역사적 시각을 결여하고 있다거나 결정론적이라는 의혹을 반박한다.

  콥젝에 의하면 실재계에 대한 강조는 라캉 이론의 역사적 추이이기도 하지만 실제의 역사적 추이와도 일치한다. 상징계를 강조할 때 라캉 이론의 중심 용어는 욕망이었지만, 실재계를 강조할 때는 충동이었다. 욕망의 공간이 모더니즘의 공간이었다면, 충동의 공간은 포스트모니즘적인 공간이다. 라캉 이론 속에서 욕망과 충동은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다. 콥젝은 이 대립이 결코 비역사적인 장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오늘날 욕망의 공간을 대신하는 것은 충동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충동의 공간은 오늘날의 진정한 '포스트모던한' 문화를 정의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욕망의 공간이 결핍과 금욕의 공간, 사회적인 공간이라면 충동의 공간은 쾌락과 만족, 사적인 공간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충동의 공간 속에서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이라는 대립구도는 해소된다.

 

 

 

2.


  프랑스 이론가들이 흔히 그렇듯이 라캉은 미술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세미나에 종종 미술작품을 예로 등장시킨다. 특히 그의 세미나 XI권은 시각경험과 미술에 대해 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시선(l'oeil)'과 '응시(le regard)'의 변증법이라는 시각경험론을 펼친다. 그리고 이 이론은 미술이론과 곧바로 연결된다. 분량이 많지 않기는 하지만 라캉은 욕망의 관점에서 미술사를 다시 쓰기도 하고, 세잔느의 정물화에 대해 논하기도 한다. 홀바인의 <대사들>을 예로 들어 미술에서 작용하는 시선의 기능에 대해 논한 것은 이미 유명하다. 이런 점을 참고하지 않더라도 라캉의 이론은 80년대부터 실제 미술비평가와 미술이론가에 의해 미술계에 활발히 도입되었다. [옥토버(October)]지를 중심으로 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비평가들은 라캉을 주로 사진을 중심으로 하는 시각매체의 분석에 이용하였다. [옥토버]의 이론가들은 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차용, 복제, 혼성모방이라는 기법을 통해 현대 미디어문화를 비판하는 작가들을 분석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라캉을 비롯한 후기구조주의 이론가들을 도입했다, 사진이라는 매체가 후기구조주의 이론가중에서도 특히 라캉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즐겨 논해졌던 것은 라캉의 욕망이론이 이미지와 시각경험을 중요한 매개체로 다룬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물론 사진이 복제성과 혼성적 성격이 포스트모던 문화의 상징처럼 여겨졌으며 라캉의 주체이론이 가진 반데카르트적 측면이 포스트모던적으로 해석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이다.

  그러나 90년대에 와서 '비판적'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과 미디어 아트는 세력이 약화되었다. 언어를 매체로 도입하거나 사진, 포스터 등 '깔끔한' 외양을 가지는 작품 대신 미끈미끈하거나 끈적끈적한 질감을 가진 작품, 신체 내부와 배설물의 충격적이고 혐오스러운 장면을 촉각적으로 제시하는 작품들이 유행의 대열에 합류했으며 활발한 이론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사진은 여전히 중요한 매체의 하나지만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미디어 아트 시대의 사진이 시각이라는 감각의 우위를 충실하게 유지하고 있다면 90년대의 사진은 시각보다는 오히려 촉각적인 면을 전면에 내세운다. (신디 셔먼의 초기작과 후기작의 차이를 비교해보라.) 아예 촉각적인 면과 신체 '내부적인' 영역을 강조하는 작업(키키 스미스가 대표적인 예이다)이 유행하고 비디오 인스털레이션과 같이 다중감각적인 예술이 대중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론의 대입방식 역시 달라졌다. '욕망' '시각경험' '이미지'라는 단어들은 더 이상 핵심적인 키워드로 작용하기 힘들어졌다. 셔먼의 초기작품이나 셰리 레빈, 로버트 롱고, 바바라 크루거 등 80년대의 소위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보여준 사회와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은 가장 개인적인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신체 속으로 사라졌다. 80년대와 90년대가 여전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묶일 수 있고,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의 전복이라는 의미에서 정의된다면, 80년대와 90년대는 그 전복의 방법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미디어 아트의 시대가 모더니즘의 상징체계를 내부로부터 전복하는 차용의 전략을 보여주었다면, 엡젝트 아트의 시대는 모더니즘의 상징체계에 포착되지 않는, 혹은 그 체계에서 누락된 세계를 드러낸다.

  상징계의 우월성과 큰타자의 욕망에 관한 이론은 미디어 아트의 전략을 분석하는 데 분명 친화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모더니즘적 세계를 유지해온 상징적 체계의 힘 그 자체를 드러내보이기 위해 그 체계의 형식을 차용한다는 것이다. 라캉은 데카르트적 철학의 '자아'와 '주체' 개념이 가진 허구성을 비판하기 위해 바로 그 개념들 속으로 깊숙히 들어갔다. 마찬가지로 미디어 아트는 상징적 세계의 외관상의 자연스러움을 폭로하고 그 인위성을 드러내기 위해 작가의 개성, 작품의 진정성, 미술의 고급문화적 속성 등 모더니즘의 언어들을 역설적으로 이용했다.(예를 들어 신디 셔먼의 <무제 영화스틸> 시리즈가 자화상이라는 모더니즘의 아우라를 가진 장르를 대중문화적 이미지 속에서 어떻개 해소하는가를 생각해보라)

  반면 엡젝트 아트는 상징계가 억압해온 것들을 무의식의 수준에서 펼쳐보이는 것이 아니라 상징계 그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라캉에 따르면 상징계는 언어의 세계이고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두 기표 사이의 차이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징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 '차이'이다. 이 차이가 욕망을 발생시키고 욕망은 그 대상과 일정한 아우라를 부여할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한다. 그러나 라캉의 실재계는 이 아우라, 이 거리가 상실된 세계이다. 욕망이 이 거리 속에서 만족의 지연을 경험하게 한다면, 거리의 상실은 즉각적인 만족을 문제시하게 만든다. 이 만족 혹은 쾌락을 요구하는 것은 욕망이 아니라 충동(pulsion)이다. .

  라캉의 충동 개념은 프로이트의 개념을 직접적으로 계승한 것 중의 하나이다. 프로이트는 충동이란 유기체를 그 목적으로 향하게 만드는 압력, 즉 에너지의 충전 속에 본질이 있는 역동적 과정으로 정의내린다. 충동의 목적은 근원에서 획득하는 긴장의 상태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때 긴장의 방출은 심적 장치에 만족을 주고 만족은 쾌락을 낳는다. 라캉은 심적 장치의 긴장 해소라는 프로이트의 경제적 관점 대신 기표와 신체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충동을 재해석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심적 장치의 긴장을 최소화하여 만족을 얻으려는 쾌락원칙 (Lustprinzipe / principe de plasir)이 인간을 지배한다. 반면 무의식을 언어의 영역과 동일시하는 라캉은 쾌락원칙을 곧 현실의 원칙으로 본다. 라깡에게서 쾌락원칙의 기능은 "심적 장치의 모든 기능을 조절하는 긴장을 최저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필요한 양의 기표를 투입하는 가운데 주체를 기표에서 기표로 이동시키는 것"(주2)이다. 그러나 긴장을 절대적으로 감소시킨다는 것은 곧 유기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쾌락원칙은 어느 한계를 넘어가면 더 이상 쾌락원칙이 아니게 된다. 이 경계선은 오히려 쾌락원칙의 장애물이다. 경계선 너머는 "쾌락원칙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머무는 곳이다. 이곳은 곧 실재계이다. 실재계의 쾌락은 상징계 내에서는 단지 고통으로만 경험된다. 결국 극도의 쾌락을 원하는 것은 곧 고통을 원하는 것이라는 역설적인 결과가 나온다. 라캉은 단지 고통으로만 경험되는 이 모순된 쾌락을 "희열(jouissance)"이라고 이름붙였다. 희열은 쾌락원칙 가운데 있는 이 '불가능한'(견뎌내기가 불가능한, 또는 상징계 내에서 상상하기가 불가능한) 영역에 존재하는 쾌락이다. 이 영역은 결국 죽음의 영역이다. 충동은 이 영역으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항상 부분적으로 작동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라캉은 "모든 충동은 부분적 충동이다."(주3)라고 말한다.

  충동이 부분적이라 할지라도 무조건적인 만족을 요구하는 충동의 속성은 상징계에 충분히 위협적이다. 오늘날 충동에 의해 정의된 공간 속에서 사회에 위협이 되는 것은 이처럼 충동이 유기체의 파멸을 향해 간다는 것이다. 신체의 경계선을 뒤집어서 내부를 드러냄으로써 신체는 더 이상 인간이 견뎌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다. 토사물과 배설물의 세계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혐오과 고통을 유발시킨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고통은 실재계의 쾌락인 희열이다. 상징계가 문화와 사회의 세계라면 이 희열을 선택하는 주체는 사회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큰타자의 권위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 속에서 희열은 금지되어 있고 이 금지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안전하게(신체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깨끗한 신체를 유지하고) 살수 있도록 지켜주는 일종의 안전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충동에 의해 지배되는 탈외디푸스적 사회에서 큰타자는 더 이상 이러한 안전장치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안전장치가 풀린 상태에서 인간은 사회로부터 자신을 연결하는 끈을 놓아버리게 되며 항상 사회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는 욕망 대신 그 사회로부터 자신을 갈라놓는 사적인 영역에 전적으로 머물게 된다. 이 사적인 영역은 외설적인 영역이기도 한데, 그것은 큰타자가 금지하고 있는 희열이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근친상간적인 남근적 어머니와의 결합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충동의 공간이 전적으로 사적인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공적인 공간으로부터 보호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욕망의 공간 속에서 사적인 '저 너머'(즉 욕망의 대상)는 보호된다. 반복되는 욕망의 표류 속에서 욕망의 대상은 끊임없이 주체의 손을 빠져나기 때문에 은폐되어 있고 그래서 그 가치를 갖는다. 좀 길긴 하지만 콥젝의 말을 들어보자. "욕망이 충동에 길을 내줄 때 이 사적인 저 너머는 더 이상 숨겨진 채 남아 있지 않다. 라캉은 충동 안에 포함된 것은 자기 자신을 들리게 하는 혹은 자기 자신을 보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의미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는 우리 존재의 내밀한 핵심은 가정된 것이기를 그치고 갑자기 노출된 것이 된다...이 말은 단지 가정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텅 비어 있는 사적 존재의 영역이 베일을 벗고 등장해서 그 내용이 어떤 사람에게든 완전히 보인다는 뜻이 아니다. 위상학적 위치를 바꾸는 가운데 존재는 의미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자신의 본질적 속성을 잃지 않는다. 들리게 되는 혹은 보이게 되는 것은 내용없고 의미없는 공백 그 자체이다. 충동이 "자기 자신을 들리게 하는" 혹은 "자기 자신을 보이게 하는" 것은 들으려는/들리려는 욕망 혹은 보려는/보이려는 욕망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욕망이 암시하는 바로 그 상호성은 충동 속에서는 부인되기 때문이다. 우리 존재의 내밀한 핵은 숨겨진 형태 속에서도 드러난 형태 속에서도 "객관적" 지식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을 드러내지만 자기 자신을 전달하려고 하지 않는다. 혹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다. 사적 존재 혹은 '희열'은 현상적 장 내에서 표면에 드러나지만 현상적 형태를 띠지 않는다...그것은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자기 자신을 전달하지 않는다."(주4)

  상징계에 들어오는 순간 존재는 사라지고 남는 것은 의미뿐이다. 반면 상징계에서 탈락된 이 '저 너머'의 공간은 의미없는 존재의 영역이다. 따라서. 욕망과 충동간의 선택은 의미와 존재간의 선택이다. 이 두 가지는 양립할 수 없다. 우리의 욕망은 겉보기에는 매끈한 세계 속에 숨은 어떤 끔찍한 진실(사적인 것, 나 자신의 신체, 기의)을 얻고자하는 끊임없는 움직임이다. 그러나 너무나 감추어져 있어야 할 것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신디 셔먼의 토사물 사진에서 우리는 해석을 유발하는 가리워진 '간격'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다. 이 세계는 더 이상 은폐하고 있는 것이 없기에 '무의미한' 세계이다. 콥젝은 이 모든 것이 드러나 있는 세계는 역설적으로 밀실공포증적으로 닫혀 있는 세계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가장 충동의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나 자신'의 공간 속에만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에 이 '나 자신의 영역'은 곧 상징계 속에 포착되지 않은 살아있는 존재의 세계이자 신체의 세계이다. 상징계에서 배제된 신체의 세계란 고전주의 미술이 묘사하는 우아한 신체일 수가 없다. 의미의 해석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신체, 실재계의 신체는 절대적 만족을 원하는 충동의 궁극적 목적이다. 라캉은 충동을 기표가 신체에 가해지는 효과라고 정의내린다. 라캉에 따르면 전거울단계의 어린아이는 신체 내부와 외부를 아직 구별하지 못한다. 어린아이가 신체의 내부와 외부를 인식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의 대상의 이미지를 '내사(introjection)'를 통해 신체 내부에 가져옴으로써 가능하다. 반대로 어린아이는 '투사(projection)'를 통해 외부의 대상을 자신의 이상적 신체모습으로 파악한다. 신체 내부와 외부를 가로지르는 이 왕복운동을 통해서 충동은 인간의 신체와 큰타자의 장소, 곧 상징계를 연결한다. 신체를 상징계를 통해 의미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라깡의 충동 개념은 결코 생물학적인 개념이 아니다. 충동은 생물학적 만족의 기능을 뜻하는 '본능(instinct)'과 대조되는 상징계의 산물이다. 라캉은 충동을 통한 신체의 기표화라는 이론을 통해서 현실의 동일성을 구축하는 것이 선험적 자아가 아니라 신체의 내부와 외부의 구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실재계의 이미지가 '신체 내부의 이미지'라는 것이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희열을 발생시키는 충동의 만족은 엡젝트 아트가 보여주는 혐오스러운 세계를 이론적으로 설명해준다. 예를 들어 키키 스미스는 고전주의적인 여성의 신체와는 대입되는 '불쾌한' 신체, 즉 배설과 생식에 관계된 신체기관이나 죽은 듯한 인체를 묘사한다. 토사물, 정액, 월경혈 등의 '깨끗하지 못한' 신체는 인간이 주체성의 경계선을 만들기 위해 신체에서 몰아낸 잉여물이다. 인간은 이 잉여물을 신체에서 몰아내었기 때문에 하나의 주체로서 상징계 속에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라캉은 욕망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진실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 자신이 모른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말해 욕망의 공간 속에서 타자와의 진실한 의사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큰타자를 향해 말하는 주체의 언어는 항상 목표를 빗나간다. 큰타자는 자아가 존재하는 상상계의 벽 너머에 있고, 이 벽은 '언어의 벽'이라고 물리운다. 언어는 욕망을 왜곡시키고 인간은 자신이 무의식이 수준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므로 투명한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욕망의 공간은 어긋난 의사소통이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타자를 향한 요구, 라캉의 표현대로라면 사랑의 요구가 존재하는 공간이다. 항상 소외될 수밖에 없을지라도 자신의 상상계적 타자를 향항 나르시시즘적 사랑은 사회적 함의를 갖고 있다. 그러나 충동의 공간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타자와의 변증법적이고 상호적인 관계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쾌락의 무조건적인 요구는 큰타자의 희열을 위해 자신을 대상으로 환원시킬 것을 요구한다. 그 속에서 타자와의 상호관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다만 숭고한 '사물(la Chose)'과의 비상호적인 관계이다. 충동의 공간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공동체로부터 떼어놓는 희열을 물신화시킨다. 충동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사적인 공간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침해를 받는 것은 사적인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공적인 공간이다. 라캉의 말로 번역하면 충동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큰타자로부터의 위안을 구할 수 없게 된다.

  큰타자로부터의 보호를 더 이상 구할 수 없으므로 충동의 공간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견딜 수 없는 불안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인간은 일종의 대리물을 만들어 자신의 희열을 양도하고 대신 즐기게 만든다. 콥젝은 필름 누아르를 분석하면서 누아르의 전형적인 등장인물인 팜므 파탈을 이 대리물의 예로 제시한다. 팜므 파탈은 주인공이 원하는 희열을 대신 떠맡아주는 '비윤리적' 등장인물이며, 주인공은 이 팜므 파탈과의 일종의 계약을 통해 희열이 자신의 주체성을 파괴하는 것을 막으면서도 쾌락을 누리고자 한다. 미술에서도 이러한 '비윤리적' 도상의 존재는 쉽게 발견된다. 예들 들어 앙드레 세리노의 사진작품에서 우리는 성스러운 이미지를 포르노적으로 제시하거나 오줌 속에 잠긴 예수상을 내놓는 그의 신성모독적 이미지에 충격을 받지만 사실 이 충격은 일종의 대리체험이다. 외설스럽고 혐오스러운 이미지 속에 기독교적 도상을 담아내는 그의 작품은 충동의 공간인 '신체의 내부'에 대한 탐사로 볼 수 있지만 이 탐사는 상징계 전체를 붕괴시킬 만한 힘을 갖지 못한다. 그것은 희열의 대리물로서의 신성모독적 이미지가 관객으로 하여금 "너무 많이 즐기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막아주는 안전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3.

  라캉은 충동의 공간인 실재계와의 만남이 상징계의 한계지점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우리는 여전히 '언어의 감옥'에 갇혀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라캉의 후기이론은 이 언어의 감옥이 우리의 생각처럼 그렇게 철통같이 경비되는 것은 아니며 감시의 허술함을 틈타 감옥 바깥의 세계가 감옥의 질서를 위협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라캉의 이론을 받아들이자면 오늘날 미술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재계의 귀환'은 상징계의 우월성을 무너뜨리는 현상이 아니다. 엡젝트 아트가 실재계의 신체를 보여준다는 말은 있는 그대로의 실재계와 우리가 만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실재계는 상징계의 한계지점에서 항상 부정의 형태로만 경험된다. 그러나 실재계와의 만남이 잦으면 잦을수록 우리가 상징계의 한계지점을 발견하는 횟수가 늘어나는 것만은 분명하다. 콥젝에 따르면 상징계의 불안정성은 역사적인 개념이다. 오늘날은 상징계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도 약화되어있는 시대이다. 상징계의 힘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덮어가리기 위해서 오늘날의 문화는 또 다른 '가짜'를 만들어낸다.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와 같은 테마파크는 바깥의 공간은 현실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일부러 인위성을 강조하여 만들어낸 공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충동의 공간 역시 의미와 거리가 상실되었음을 은폐하기 위해 인위적인 거리를 만들어낸다. 콥젝은 필름 누아르에서 사용되는 딥 포커스, 키아로스쿠로 등의 조명효과는 깊이의 결여를 은폐하기 위한 가짜 장치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조명효과는 진짜같이 그럴듯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어딘지 인공적인 느낌을 준다. 선글라스와 바바리코트와 같은, 필름 누아르에 즐겨 등장하는 우스꽝스러운 변장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콥젝에 따르면 완벽한 변장이 아니라 어설픈 위장은 충동에 의해 정의되는 공간 속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충동은 자기 자신을 보이게/들리게 만드는 것을 특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술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위적 공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늘날의 작품들(적어도 이론의 테두리 안에서 관심대상이 되는 작품들)은 또한 더 이상 자연스러운 듯 보이는 것(사회, 언어, 성 등)의 내재된 인위성을 파헤치는 데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인공적인 세계를 창조하기를 즐긴다.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자연스럽게 보이는 현실의 인위적 속성을 폭로하기 위해 세계를 몽타주했다면, 90년대의 아티스트 마리코 모리나 매튜 바니의 비디오 작품 속에서 공상과학 만화와 같은 화려한 의상과 인공적인 공간은 스스로가 너무나 확연한 '공상'의 소산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비현실적인 조명과 물들인 머리, 우주복과 같은 의상은 스스로가 유치한 상상력의 소산이라는 것을 고의적으로 밝힌다. 이 공간들은 엡젝트 아트 이상으로 무조건적인 희열의 추구라는 충동의 요구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상징계의 단일성이 위협받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은 충동의 공간을 확대시키는 현대미술 속에서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1. 이 글은 조안 콥젝의 책 Read My Desire: Lacan against the Historicists, The MIT Press, 1995을 주로 참고했다.
    라캉의 실재계 개념을 강조하는 지젝의 책으로는 Looking Awry, The MIT Press, 1993이 있다.
2. Jacques Lacan, S minaire VII(1959-60) : L' thique de la psychanalyse, Seuil, 1986, p.143
3. Jacques Lacan, trans. Alain Sheridan, Seminar XI: The Four Fundamental Concepts of Psychoanalysis,
    Penguin Books, 1979, p.175
4. Joan Copjec, Read My Desire: Lacan against the Historicists, The MIT Press, 1995, p.190.


참고문헌

Jacques Lacan, Ecrits, Seuil, 1966
Jacques Lacan, S minaire VII(1959-60) : L' thique de la psychanalyse Seuil, 1986
Jacques Lacan, trans. Alain Sheridan, Seminar XI: The Four Fundamental Concepts of Psychoanalysis, Penguin Books, 1979
Joan Copjec, Read My Desire: Lacan against the Historicists, The MIT Press, 1995
Slavoj Zizek, Looking Awry, The MIT Press,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