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김영승의 '있음'에 대한 참회

나뭇잎숨결 2009. 1. 2. 08:22

 

'있음'에 대한 참회 / 김영승

                       

 

 

그저 곁에 함께 있는다는 것, 그
'있음'이 대류하는 스트레스, 폭력을
참회합니다 그저
마주보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가공할만한 불안,

 

긴장, 초조, 폭력일 수 있었음을
참회합니다 저는

 

그저 함께 있다는 것, 그
'있음' 자체가 가학입니다

 

만경창파 그 해변의
묵송도 그러할진대 너무

 

가까이 그렇게 지속적으로
있었다니

 

함께 밥 먹는 것도, TV보는 것도
섹스도 그저

 

상처투성이 피범벅의
공인된 고문일 수
있었음을

 

이 겨울
산 꼭대기 암벽을 타고 넘으며
냉이는, 달래는 저
아득한 지상에서 뾰족뾰족
돋고 있겠거니

 

생각하며

 

나, 사정하듯 쏟아지는 달빛, 별빛
허공중에 산화하니

 

그저 죄송합니다, 나와 함께 있었던, 있는, 있을
여인이여,

 

그 종신형의
나의 아내여,
그 푸른 하늘 은하수, 산꼭대기에서

 

일생을 전광처럼, 파바박!
참회 다 해버렸습니다.

 

 

 

 

 

 

화창/ 김영승

 

 


폭우 쏟아진 뒤
이 화창,

그게 죽음이리라
나의 죽음이리라.

고추잠자리는

疊疊 열두 폭 치마 찢어질 듯 짓푸른
얼음 같은 깊은 하늘과
1:1로 同等하고
자체로 沈默이다

-赤卒*아, 너 산타클로스냐?
나한테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구나

神의 음성이다.

 

 

 

 

 

 

 

 .. 나 때문에도 우는 여인이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행복합니다.
나 때문에도 상처 받은 여인이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행복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주는 것이라 할 때
사랑한다는 것은 기쁨만, 행복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만 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주는 것이라 할 때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주는 것입니다.
슬픔도 고통도 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것은 그 모든 희로애락애오욕을 다 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탐스러운 열매를 따듯 그렇게 좋은 것, 아름다운 것, 편안한 것, 재미있는 것, 기쁘고 즐거운 것.....
그러한 것만 똑 따서 주는 사랑은 그래서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 사람이 통과해 온 시간과 공간의 전부를, 그 총량을 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확실히 그 사람이 통과하고 있는, 통과할 그 모든 시간과 공간이 함수하는 좌표 상의 한 점으로서의 그 모든 변화하는 그 사람의 모습을 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 어디에서의 그 사람의 모습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즐김>입니다.
사랑은 <즐김>이 아니며 사랑은 그렇다고 <즐김>이 아닌 어떤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그 <좋은 것>과 함께 그 <좋은 것>의 반대, 그러니까 <나쁜 것>, 절망, 고통, 좌절, 분노, 쓰라린 상처, 뼈저린 후회, 어리석음, 유치함, 모욕감..... 등등등까지도 동시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그 <좋은 것>만 기억하고 음미하며 즐기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 사람의 장점, 미덕, 곱고 순수한 마음, 위대한 희생과 헌신의 자기말살(resignatio), 겸손, 양보, 오래참음, 그러니까 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그 모든 놀라운 은총과 축복으로서의 그저 <있음>, 그 사람 자체, 그 삶 자체가 갖는 지극한 아름다움..... 등등등과 함께 그 사람의 단점, 약점, 실수, 죄, 잘못, 모자름, 토라짐, 이해의 부족, 편급(偏急)-소견이 좁고 성질이 급함-함, 완악(頑惡)-성질이 억세게 고집스럽고 모짊- 함, 강퍅(剛愎)-성미가 까다롭고 고집이 셈-함, 징그러움, 그 모든 그가 갖고 있는 한계와 모순, 변덕이 죽 끓듯 함, 종잡을 수 없음, 제멋대로임, 못말림, 사나움, 표독스러움..... 나아가서는 그의 그 추악한 구석까지도 동시에 함께 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만을 똑 떼어서 갖듯, 따먹듯 즐기는 사랑은 그러므로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악마>들의 소위 <주고 받기>(give and take)인 것입니다.
장삿꾼들의 거래(去來), 흥정, 저울질, 키재기.... 등등등일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번뇌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그 놀라운 은총과 축복으로서의 지극히 감사한 <즐거운 고통>이며 가시밭길보다도 더 험난한 어떤 의미있는 천로역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순례자이며 나그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사랑하는 그 순간만은 지극히 순수하고 경건하고 정중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전서 4장 8절)고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태양의 거대한 빛이 떠오르면 촛불은, 형광등 불빛은 빛을 잃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사랑은 그 사람의 크고 작은 그 모든 흉, 허물, 잘못 판단함, 실족(失足)함, 약속 어김, 투정, 응석, 엄살, 안달, 신경질, 뒤집어씌움, 몰아부침, 교만함, 자만함, 착각.... 등등등을 그 광대부변(廣大無邊)한 사랑의 빛으로 다 감싸고 덮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위대한 힘이며, 사랑의 위대한 창조의 기능, 생명의 기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고 있는 한은 인간은 외롭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등상장>을 주는 것이며 <표창장>을 <훈장>을 수여하는 것이라고 속삭여주고 있습니다.
달콤한 것, 낭만적인 것, 그저 좋은 게 좋다고 은근슬쩍 넘어가는 잘못된 부드러움, 그저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꾹 참고 견디는 비위맞추기, 교언영색(巧言令色)- 입에 발린 아부의 말과 상대한테 좋게 보이기 위해 그저 얼굴빛을 꾸미는 일-, 감언이설(甘言利說)... 등등은 사랑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본령(本領)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전서 13장 8절)고 성경은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은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가 처음부터 끝까지일 뿐인 <모든 것>입니다.
특히, 사랑을 하다고 하면서 어찌 모든 것을 바라지 않을 수 있습니까?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 주기를, 저렇게 해주기를, 이렇게 변화하기를, 저렇게 위대한 열매를 맺기를, 제발 그놈의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을 조금은 고치기를, 술 끊기를, 담배 끊기를, 돈도 잘 벌기를, 건강하기를, 명랑하기를, 품위를 유지하기를, <푼수>같은 짓은 집어치기를, 용서하기를, 이해하기를, 일거수일투족이 그저 평화이기를, 그 평화의 족적(足跡)이기를, 그 사는 동네에 도착하면 도착하자마자 엎드려 그 길에 친구(親口)할 수 있기를, 그 마음 언제나 맑고 찬 샘물처럼, 석간수(石澗水)처럼 영원토록 퐁퐁 솟기를, 넓고 깊기를, 넓고 깊은 그릇이기를.... 등등등 모든 것을 다 바라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사랑은 만절필동(萬折必東)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만절필동의 사랑은 만절필동의 사랑을 만나서만이 비로소 만절필동의 사랑으로 온전히 함께 완성되어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미완성입니다만 사랑은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완성이 아닌 사랑은, 중간에 포기하는 사랑은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사악한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랑을 내팽개치는 사람은 죽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은 그 사랑하는 사람한테 모든 착하고 아름다운,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좋은 것을 끊임없이 바라는 것입니다.
이러면 이러나 보다, 저러면 저러나 보다, 그러면 으례 그러나 보다.... 하는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고르거나 걸르지 않고 거친 쌍욕을 해댄다면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일차적으로 사랑입니다.
우울하고 그 심신이 피폐해져 있으면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일차적으로 사랑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랑은 언제나 자기를 돌아봅니다.
사랑을 하면서 자기를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은 이미 그러한 사랑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수준미달이며 함량미달의 영혼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행복합니다... 하는 말을 자주자주 화창한 미소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 네가 옳다, 내가 그러지 않았느냐 네가 그러지 않았느냐, 내가 언제 그랬어... 등등등 시끄러움은 그저 <음향(音響)>일 뿐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위대한 선언을 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方言)과 천사(天使)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가리가 되고 내가 예언(豫言)하는 능(能)이 있어 모든 비밀(秘密)과 모든 지식(知識)을 알고 또 산(山)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救濟)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有益)이 없느니라"(고린도전서 13장 1-3절)

제가 그렇습니다. 아니 그러고 싶습니다. 저는 시인(詩人)입니다. 제 詩도 그렇습니다. 아니 그러고 싶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제가 쓰는 詩도 그러한 <....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가리>에 불과합니다.
저는 시인입니다. 시인은 시를 잘 쓰기 때문에 시인인 것만은 아닙니다. 시인은 그 지향하는 바 목표(?)가 <사랑>인 어떤 인간일 뿐입니다.



어젯밤 11시 50분 경 한 여인이 전화를 걸어 전화에다 대고 아주 서럽게 흐느껴 울었습니다.
"선생님, 지금 비가 와요...."
그렇게 말하며 거의 호곡(號哭), 통곡(痛哭)하고 있었습니다.
나이는 자꾸 먹어가고, 그 먹은 나이는 이제 거의 꼭 차 가고, 자기에겐 더 이상 던질 <승부수(勝負數)>가 없다고, 끝없이 하염없이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 비 내리는 깊은 밤에 말입니다.
그렇게 승부수가 없다고, 그렇게 나이는 이미 먹을 만큼 다 먹어버렸다고 탄식하며 흐느낄 수 있는 그 절망이, 좌절이 곧 승부수이며 희망입니다!
"지옥을 본 자만이 천국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절망을 해 본 자만이 희망을, 그 희망의 등대를, 북극성을 스스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호곡(號哭)은, 통곡(痛哭)은 어쩌면 차라리 <축하>한다고 말해주어야 할 횡재(?)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저는 밤새도록 실컷 우시라고만 말씀해 드렸습니다.
울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아직도 그렇게 맑은 눈물을 흘릴 수 있다니... 홀연 자기자신이 <선택된 인간> 같지 않습니까?

등대는, 북극성은 의외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등대는, 북극성은 언제나 멀리서 아름답게 반짝일 뿐 절대로 우리 가까이 다가와 그 항해하는 배의 키를 잡아주지는 않습니다.
작은 돛단배이건 거함(巨艦)이건 그 배의 선장은 자기자신이며 그 자기자신이 그 키를 굳건히 잡고 그 격랑(激浪)의 망망대해, 그 칠흑의 망망대해를 헤쳐나가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아니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랑을 줄 수 있는, 아니아니 그 사랑라는 것을 아직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충분히 힘차게, 그리고 멋지게 그 거친 파도를 헤쳐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자신부터 깊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은 마치 여성들 브래지어에 들어 있다는 그 <형상기억합금>처럼 그 어떠한 상황, 악조건, 폭력, 유혹, 의견 대립, 쌈박질, 삐짐, 토라짐, 섭섭해 함, 얼굴을 확 긋고 싶음, 따귀를 한 대 올려붙이고 싶음, 뇌물(賂物), 공갈,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용수철처럼 튀어 원래의 그 모습, 그 원래성을 회복합니다. <형상기억합금>은 아무리 찌그러뜨리고 새끼처럼 꼬고 발로 짓밟고 그래도 원래의 그 형상을 기억하고 정확하게 그 모습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렇듯 위대한 사랑은 절대로 <변형>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렇듯 <형상기억합금>과 같습니다.
모천(母川)을 회유(回游)하는 연어처럼 사랑은 그가 어디에 있든 어떤 일을 하든 어떻게 매를 맞든 부서지고 깨지든 반드시 그 모천(母川)과 같은 그 사랑으로, 그 사랑의 품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어젯밤 11시 50분 경에 나한테 전화를 걸어 흐느꼈던 여인이시여!
"내 사랑 또 가네....."
중얼거렸던, 중얼거릴 수 있었던 그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다른 사람의 사랑이 아닌 <내 사랑...>을, 그 꿈엔들 잊힐리오 하는 그 나의, 나만의 영원히 위대하고 순결한 어떤 사랑을, 그 지고(至高)한 사랑을 기억해서 잠시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추스려 소녀처럼 팔랑팔랑 뛰어 그 사랑으로 돌아가십시오!

옛날에 유행하던 <Without You>(당신 없이는)라는 팝송 아시죠?
"당신 없이는 더 이상 살 수 없어요..."(I can`t live anymore...)하는 그 절규에 가까운 그 노래가 또 뭉클 가슴을 울립니다.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이 불가능하거나 필요없는 사랑은 분명 가짜 사랑이며 그리고 매우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그저 <쾌락>의 배설일 뿐인 것입니다.

詩를 놓고 그 <Without You>라는 팝송의 가사와 같은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면, 그러니까 당신 없이는 단 하루도 한 시간도 더 이상 살 수는 없다는, 내면의 그 깊고 깊은 가장 맑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러한 영혼의 떨림이 자기자신을 인도한다면, 우는 여인이시여, 눈물을 닦고 그 詩를 쓰시기 바랍니다. 아니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詩人>이십니다!

오늘로써 제가 술을 끊은지 꼬박 187일째, 그렇게 6개월 여(餘)가 넘어가다보니까 그 술 없는 나날은 제 몸의 일시적인, 그러면서도 꽤 장기적인 불균형을 초래했었나 봅니다.
몸의 저항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저를 덮친 감기는 제 자신을 고스란히 허물어뜨려 완전 무기력 상태로까지 몰고 갔습니다. 이번 감기 몸살로 저는 죽을 뻔 했는데 그 말은 그냥 죽을 뻔 했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 감기 몸살로 저는 이대로 그냥 죽는 것은 아닌가, 죽어버릴 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느낌까지도 받았던 것이지요. 감사한 일입니다.
친구가 말해주더군요. 그나마 술을 끊은 상태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이라고. 술을 끊었기 때문에 몸의 불균형이 초래되었지만 거꾸로 그 술을 끊었기 때문에 그쯤 해서 다시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아픔에는 다 그 아픔의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을 제대로 헤아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만 <행복>과 <평화>는 눈웃음치며 손짓하며 다가올 것입니다.
보름을 꼬박 아프다보니 끔찍한 우울증!
감기 몸살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거의 사경을 헤매면서도, 술 끊은 지 6개월이 넘어가니까 정신은 유리알 같이 맑고 신경은 서릿발처럼 곤두섰는데.... 그러다보니 그 극단의 극심한 우울증과 함께 지난 날이 한꺼번에 몰려왔습니다.
기쁜 일도 행복한 일도 더러는 있었지만, 제가 당한 폭언, 욕설, 폭행, 치욕.... 등등이 아주 서럽게, 정말 너무나 서럽게 한꺼번에 그야말로 해일처럼 덮쳐 저는 그냥 그 우울한 환청에 엄청난 고통을 당하며 속으로 울고 있었을 뿐입니다. 가령,
"주면 주는대로 넙죽넙죽 받아처먹더니... 감사할 줄도 모르지? 개새끼..."
훗날 무수한 여자들이 그렇게 빈정대며 깔깔 웃는 환청에 말입니다.


설에, 추석에, 스승의 날에 받았던 그 아이들 코 묻은 돈 같은 그 돈을 받았다는 것이 저를 아주 왜소하게 만들었습니다. 한 때는 제 사무실 미추홀창작문화연구소에서 한 명에 5만원씩을 받고 강의를 했었다는 사실이 제 무릎을 꺾게 만들었습니다. 곱고 순수한 마음에 표시한 그야말로 보석 같이 아름다운 마음인데도 말입니다. 지금은 다 지나갔지만 그렇게 한꺼번에 제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전 영토, 영해, 영공을 침범한 그러한 망상은 사실은 저를 흐느끼게 했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좀 약하다 싶으면, 잘못 했다 싶으면, 우습게 보인다 싶으면 마치 탁구나 배구에서 약하게 빌빌거리며 넘어오는 공을 때는 이때다 하고 강스파이크를 때리듯 그 악마적인 속성으로 뒤통수를 가차없이 후려갈겨버리는데, 저도 그렇게 어리석게도 스매싱(smashing)을 당했구나 하는 그야말로 칠뜨기 같은 생각에 걷잡을 수 없이 서러워졌던 것입니다.


아플 때도, 방황할 때도, 아프고 방황하여 술을 마실 때도, 그리고 무엇을 바래 아쉬운 소리 할 때도 다 약한 때입니다. 술 안 마시기로 하고 약속했으면 마시지 말아야지, 약속을 해놓고 어긴 것은 잘못이야, 잘못했으니까 이런 꼴을 당해도 싸.... 하면서 모진.... 아아, 눈을 부리리고, 그 치껴뜬 두 눈을 아래 위로 굴리며, 이를 악 물고, 그 악문 입으로 질겅질겅 씹듯 이... 이 개새끼를 그냥 어쩌구 일시에 욕설을 퍼부을 듯..... 떠올리기 싫은 그 치를 떨 만큼의 부끄러움.....괜히 살아 온 지난 날이 한없이 바보 같았고 뭔가에 홀려 눈까풀에 콩깍지 같은 것이 끼어 그 뭔가에 시달리고 휘둘린 듯한 그러한 처량한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제 그 <형상기억합금>처럼, 신독(愼獨)하고 극기복례(克己復禮)하여 원래의 저의 모습, 그 어름치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저에게는 그렇게 한량없이 복잡하고 난마처럼 뒤엉킨 제 영혼을 포근히 감싸주고 쓰다듬어 줄 그러한 사랑, 그러한 여인, 그러한 천상(天上)의 여인 같은 심오한 여인이 필요하다.... 라고 막연히 중얼거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불경한 말이지만, 가령 쓰러지고 또 쓰러지던 그 십자가 진 예수한테 달려나와 그 예수의 그 찢어진 이마에 흐르는 피를 손수건으로 닦아준 베로니카와 같은 여인을! 로마 병정, 유대 병정의 그 삼엄하고 살벌한 경계를 뚫고 예수한테 달려간 그 용기있고 슬기로운 아름다운 여인.... 그 <베로니카의 손수건>은 아직도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지요. 그런 여인을 그리며 찾아 헤매었다니.... 저는 꿈도 참 야무졌던 것일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니까요.


좌우지간 먹고 사느라고, 욕망에 지배되어, 소(牛) 갈 데 말(馬) 갈 데 다 가며, 진 자리 마른 자리 가려 딛지 못하고, 똥오줌 못 가리고, 무식한 변론과 악다구니, 그 문전걸식(門前乞食)과 문전박대(門前薄待), 문전축객(門前逐客), 소금 뿌림, 하얗게 눈흘김, 어린네 다루듯함을 당함.... 모든 것이 그저 프랑시스 잠의 詩 그 <나는 나귀가 좋다...>에 나오는 그 나귀가 못된 주인을 만나 곡마단에서 광대들과 함께 묘기나 부리며 채찍으로 맞듯..... 아아, <나>라고 하는 못된 주인을 만나 고생을 한 <나>라고 하는 가엾은 <나귀>여..... 자기연민에, 환멸(幻滅)에 잠시... 그러니까 한 1주일 정도를 그런 소용돌이치는 격정(激情)에 제 심신은 그저 빨래처럼 하염없이 펄럭였던 것이지요.
때로는 이 지상에서 입에 풀칠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마치 간도 쓸개도 다 빼놓고 키스 한 번 할려고 입에 발린 아쉬운 소리를 하며 온갖 수모를 다 겪으면서도 재롱을 떨고 있는, 그 여자에 오랫동안 궁한 쪼다 같은 사나이 같았다면 이해가 쉬울까요?
<Sailing>이라는 노래를 좋아하는 시인이, 그 가사처럼 <자유하기 위해서>(to be free) 항해를 한다는 시인이 자유는 커녕 주권(主權)을 상실한 채 질질질질 끌려갔다니...... 문득 제 자신이 참 어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 어마어마한 폭풍우가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듯 합니다.
제 마음은 다시금 평화로와졌습니다.
그때 저는 우는 여인이시여, 당신의 전화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 비오는 밤 저한테 전화를 걸어 흐느꼈던 여인이시여, 그 비오는 밤 저한테 전화를 걸어 흐느껴주셔서 감사합니다.
"싫으면 마라..."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존재에 대해서도, 그 어떤 권력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기를 저는 간절히 그리고 강력히 비는 것입니다.
저는 분명 이런 저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네들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그 사랑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자신의 틀로 자기자신의 방식대로만 사랑해줄 것을 강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들을 사랑합니다!
그 안타까움, 그 울화통, 분노, 화병(火病), 그러면서도 마른 샘에 물이 괴듯 괴어가는 그 어쩔 수 없는 사랑, 진심으로 수줍어질 만큼 손끝이 떨려오는 감사함, 눈물이 핑 돌 만큼 전신을 애무하는 행복감 .... 등등을 저는 또 詩로 쓰는, 아니 쓸 수 있는, 아니아니 쓸 수밖에 없는... 저는 詩人이니까요!

이상(以上)은 제 인생 최대, 최악의 감기 몸살에 악전고투하며, 몸은 오그라들고 혀는 도르르 말리어 참으로 엉망이었을 때, 해일처럼 동시에 저를 덮친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우울증에 시달릴 때의 저의 심경입니다.
내일은 발걸음도 가볍게 저는 또 걸을 것입니다!

오늘은 거의 하루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그리고 중국 민항기가 추락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슬픈 소식도 들었습니다. 비온 뒤에 땅은 더 굳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조심조심하여 <추락>하지는 말아야겠지요.

"눈 먼 아이처럼, 귀 먼 아이처럼, 조심조심 징검다리 건너던...."
저는 또 제가 좋아하는 노래 그 <긴 머리 소녀>를 불러봅니다.
사랑은 <조심>하는 것이라는 뻔한 생각도 또 듭니다.
사랑은 그 어떠한 경우에라도 절대로 무례(無禮)히 행치 않는 어떤 고귀한 행위니까요.


2002년 4월 16일 화요일 비온 뒤 갠 날 오후 11시 25분경 단숨에 일사천리로 김영승이 자기자신한테 하소연하듯 쓰고 헥헥 숨가뻐 하며 기뻐합니다.



--------------------------------------------------


 연작시 ‘반성’으로 잘 알려진 김영승(50) 시인이 여덟 번째 시집 ‘화창’(세계사)에서

 

  “그동안 치사량에 가까운 방대한 양의 시 수만  편을 썼다”면서 “날 ‘반성’의 시인이라며  현실비판과 풍자 등등에만 초점을 맞추지만, 반성 연작시는 빙산의 일각이라 날 대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투명하게 노출한 시집 ‘무소유보다도 찬란한 극빈’(2001) 이후 7년 만이다. ‘…찬란한 극빈’ 역시 1994년 ‘몸 하나의 사랑’을 발간한 이후 7년의 공백을 거쳤다. 같은 7년을 소비했는데, ‘화창’은 전작에 비해 두께가 절반이다. 시인은 “당시는 늘 술이 과해서 시를 선별할 짬이 없었다”고 정직하게 말한다. 2001년 10월 6일 술을 끊은 시인은 이번엔 또렷한 정신으로 시 63편을 골랐다. 쟁여둔 시 수천 편 중 ‘화창’한 빛을 뿜는 것들만 건졌다.

  “폭우 쏟아진 뒤/ 이 화창,// 그게 죽음이리라// 나의 죽음이리라.// 고추잠자리는// 疊疊(첩첩) 열두 폭 치마 찢어질 듯 짓푸른/ 얼음 같은 깊은 하늘과 1:1로 同等(동등)하고/ 자체로 沈默(침묵)이다//―赤卒(적졸·고추잠자리의 별칭)아, 너 산타클로스냐?/ 나한테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구나// 神(신)의 음성이다.”(‘화창’ 전문)

  시인은 소박한 생활시에 숨탄것들의 존재론적 당당함을 담았다. 전능한 신이 미물 고추잠자리에게 외려 감사하는 장면은 뒤집힌 성화(聖畵)다. 신비한 후광과 오색광선은 조물주가 아닌 피조물에서 뻗치고 있다. 시인은 한계와 모순 가득한 인간 역시 그 자체로 떳떳하고, 신성하다고 도발적인 선언을 하는 것이다. 절대자와 1:1로 마주하는 단독자의 기상은 김 시인이 평생 지녀온 삶의 태도다. 시 ‘화창’은 여기에 인류애를 덧댔다.

  스스로 존엄하려는 시인의 의젓함은 시집 전반에 드러난다. 쉰이 된 시인은 고독했지만 치열했던 지난날을 담담하게 반추한다. 가끔 술독이나 극빈에 빠졌어도 스스로 당당했기에 아쉬움은 없다.

  “그것이 自招(자초)한 고독이건/ 不遇(불우)의 고독이건/ 一生(일생) 고독했다는 것은 참/ 장(壯)한 일이다// 더욱 고독해야 하는데/ 이 비 오는 날/ 주전자 물이 끓는다.”(‘고독’에서)

  이번 시집에서 눈에 띄는 건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다. 시집 ‘반성’(1987)에서 소설가 이외수를 향해 “대가릴 저 지랄로 해야만 글이 나오다던? 저 드러운 저 똥 콧수염 저 으……”하며 푸근하게 잔소리했던 어머니는 2006년 3월 돌아가셨다. 슬픔과 허전함을 주체하지 못한 그는 금주 다짐을 깼다. 28세 때 홀로 된 어머니는 그에게 부성과 모성을 한꺼번에 쏟아준 든든한 뒷배였다. 어머니의 구두까지 그리워하는 그의 시는 어느 사모곡보다 애절하다.

  “구두 속엔 발이 있는 게 아니라/ 구두의 어떤 알이/ 核(핵)이/ 胎兒(태아)가/ 들어 있는 것이다 구두 속엔/(…)/ 어머니 구두를 유품으로 모셔오지 못한 게// 恨(한)이다.”(‘구두’에서)

  그는 내년 어머니에 대한 시편을 묶어 어머니께 헌정할 계획이다. 김 시인의 시에는 과장된 제스처가 전혀 없다. 평생 아웃사이더였던 그는 스스로 아름답고, 존엄했기 했기에 허영이 필요치 않았다. 그의 시에는 몸치장을 모르는 두 개체, 성인(聖人)과 아이가 숨어 있다. 육두문자가 섞여 있어도 그의 시가 해사한 이유다.

  “숨길 것도, 꾸밀 것도 없습니다. 예쁘게 꾸미거나 장막을 쳐서 보호할 것이 내겐 없어요. 그런 개방성이 파괴적으로 발현되지 않는 선에서 다른 시인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살기를 바랍니다.”

 

 

 

--------------------------

 

 

 

김영승, 우리 시대 또 한 사람의 카프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