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넓이와 깊이 / 김광규 (시인)
마로니에 공원 일대에 서울대 문리대가 있던 시절, 저는 이 캠퍼스에 다니던 학생이었습니다. 40년 전의 일로, 저는 60학번이었습니다. 오래간만에 여기에 와 근처를 거닐어 보았습니다. 마로니에 교정이 옛날 그대로 남아 있고, 그 마당에서 젊은이들이 농구를 하늘 걸 보니, 마로니에 그늘에 누워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생각이 떠오릅니다. 1960년에 4·19혁명이 일어났는데, 그때 학생들이 이 마로니에 마당에서 대오를 정비하여 스크럼을 짜고 밖으로 나갔었습니다. 또 길 건너에 학림다방이 있는데 그 다방도 굉장히 오래 되었습니다. 우리가 학생 시절에 강의를 빼먹고 거기에 가 앉아서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듣곤 하던 곳입니다. 거기에도 잠깐 들러서 커피도 한 잔 마셨는데, 옛날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고 커피 값만 올랐더군요.
바로 그 학림다방에서 학생 시절에 동급생이던 소설가 김승옥, 이청준, 박태순, 이런 사람들이 써온 글을 서로 돌아가면서 읽어 보고, 그 글을 신춘문예라든가 [사상계]지에 투고해서 화려하게 데뷔하곤 했습니다. 그 시절의 유적으로 아직도 남아 있는 건물이 여러분이 앉아 있는 문예진흥원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그 당시에는 문리대 행정본부였습니다. 그 건물의 내부는 바뀌었겠지만 외양은 옛날 그대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건물에 와서 등록금을 냈습니다. 지금은 대학의 등록금을 은행에서 지로로 내면 되지만 그 당시에는 줄을 서서 이 건물의 창구에 냈는데, 길게 늘어선 줄 탓에 한번 내려면 여간 오래 걸리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등록금을 내고 나면 이제 한 학기가 갔구나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또 개중에는 등록금을 까먹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부모님에게 등록금을 타와서는 정작 등록을 하지 않고 용돈으로 써버리고 마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까 그런 친구들이 다 크게 출세를 했더군요. 모범생 친구들은 샌님이 되고, 그런 사람이 정계의 거물이 되었으니 세상은 참으로 아이러니일 수밖에요.
제가 60학번으로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4·19가 일어났는데, 워낙 데모라는 게 1학년이 앞장서게 되어 있어서 곤욕을 치루었던 생각이 납니다. 그 당시에 우리 나라에 비틀즈의 노래가 처음 들어왔었습니다. 또 중남미의 보컬 그룹이 부른 루나 레나, 즉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노래가 유행했었는데, 제가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다음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라는 시를 발표했습니다. 이 시가 오랫동안 4·19세대의 만가(輓歌)로 지금까지 사랑을 받아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4·19세대는 이제 많이 늙었지만 20세기 후반기의 우리 사회를 움직여 왔고, 우리 나라의 오늘이 있게 하는 원동력의 역할을 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4·19세대는 대략 일제 시대 말기에 출생했습니다. 제가 41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다섯 살에 해방이 된 셈입니다. 네 살 무렵의 첫 번째 남는 기억으로는 배고픔입니다. 그러니까 일제가 침략전쟁 수행을 위해 쌀 등을 마구 공출해 가는 통에 우리는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쌀 대신 무죽을 먹고 그랬는데 어렸을 때 배고팠던 기억이 납니다. 또 해방을 맞아서도 그 기쁨을 누릴 사이도 없이 그로부터 5년 후인 10살 무렵, 6·25 동족상쟁이 일어나 멋모르는 피난길에서 배고픔과 전쟁의 공포 등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많이 느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해방 후에 초등 교육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제의 교육은 받지 않았습니다. 한글로 교육을 받은 첫 번째 세대가 우리 4·19세대일 겁니다. 그래서 '한글 일세대'라는 자부심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세대는 외국문학을 공부할 때 가령 일본어 번역서를 읽을 줄 모르니까 영어, 독일어, 불어에서부터 직접 읽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외국문학을 직수입하여 번역을 하고 그 외국문학의 영향을 우리 나라에 받아들인 첫 번째 세대라고 생각합니다.
마로니에 그늘에서 불태우던 열정을 생각하며
4·19는 순수한 혁명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민주주의 교육을 받았는데, 그 민주주의와 다르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들고 일어나서 이승만 독재정권을 정복시켰고, 1960년을 기점으로 해서 우리 나라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의거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혁명이라고 격상되었지요. 학생들이 나가서 피를 흘리고 해서 얻어진 혁명이지만, 사실 그렇다면 혁명의 주체가 정권을 잡아야 완성된 혁명인데 그렇진 못했고, 시위가 끝난 다음 우리는 거리를 쓸고 청소하고 학교로 돌아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굉장히 순수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대학에서 학생회장 정도 하고 나면 다들 국회의원들이 되고, TV의 토크쇼에 나와서 얼굴 좀 팔리면 정치인으로 나서는 걸 심심찮게 봅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굉장히 순수했다고 믿습니다. 그 이후에 군사독재가 한 30년 간 이어지면서 우리 사회는 5·16 , 유신 독재,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짓밟은 신군부의 등장을 겪으면서 문민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우리는 또 30여 년을 병역관계로 복무를 했습니다. 학생시절에는 학도호국단으로 군사훈련을 받았고, 그 당시에는 병역이 정확히 36개월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향토예비군이라는 게 생겨서 그걸 또 했고, 그 다음에는 민방위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 또래들은 만 50세가 될 때까지 군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군복을 벗고 조금 있었더니 IMF가 덮쳤습니다.
50대 후반이 되어 이제 겨우 생활을 즐기려고 할 때에 조기 정년퇴직 해당자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4·19세대가 아주 불행한 세대입니다. 우리 나라의 모든 비극적 사건을 한몸에 겪고 살아온 불행한 세대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군들 자기 세대가 행복하다고 하겠습니까.
제가 대학로를 걷다보니까 4·19 시대 생각이 나고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쓰기는 1978년에 써서 79년에 발표를 하려고 했는데, 부산 동래의 하숙방에서 쓴 참담한 고백인 이 시는 1979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실릴 예정이었으나, 대통령 시해사건에 뒤이어 등장한 신군부의 탄압 조치로 이 계간지가 {문학과 지성}, {뿌리깊은 나무}와 함께 폐간됨으로써 발표의 기회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 바람에 지금 읽어보면 별 게 아닌데도 제 시도 그 당시에는 햇빛을 보지 못하다가, 나중에 제 개인 시집에 실릴 수 있었지요.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전문
지금 바로 우리가 있는 이 자리가 4·19세대의 만가의 작품의 현장으로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좋은 시는 내면과 현실을 함께 반영한다
시라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개인의 내면과 또는 사회 현실을 형상화한다든가 또는 반영하는 문학장르입니다. 그래서 아주 일반적으로 이야기할 때 우리가 시인과 독자, 둘로 나누어 본다면 시인은 무언가 발신(發信)을 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이고, 독자는 그것을 수용해서 받아들이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발신자의 입장에서 보면 되도록 자기가 보내는, 말하자면 전파라면 그 전파가 넓게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수신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 넓이가 거기에 생기게 마련입니다. 이 넓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진폭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그 힘이 작용하는 자장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또 수신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 전파를 자기가 수신해서 개인적인 공감의 편차는 있지만, 그 깊이를 아주 깊숙이 느끼는 사람도 있고, 또는 피상적으로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우리가 강연자와 청중으로 만났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저의 문학 세계의 넓이를 제 나름대로 정리를 해서 보여드리고, 그 다음 여러분이 거기에서 어떠한 깊이를 느끼는가 하는 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몫일 것입니다.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은 이야기꾼입니다. 이야기꾼이라면 우리는 먼저 소설가를 들 수 있습니다. 소설가야말로 아주 장강(長江)과 같이 길게 흘러가는 이야기를 풀어서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고, 소설가와는 배척적인 지점에 시인이 있을 것입니다. 시는 대개 긴 소리를 못합니다. 외마디 소리입니다. 비유를 들어 말한다면 시인은 우리 옛말로 하면 소리꾼이라고 볼 수도 있고 가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 나라의 옛날 소리꾼이나 가객의 무대는 판소리 마당이었는데, 거기서 소리꾼이 아주 멋들어지게 창을 하고 그 사이사이를 이어 주는 아니리와 추임새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건 서구에서 발달한 오페라도 마찬가지죠. 영창, 아리아라고 해서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이 아주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대목이 있는가 하면, 또 대사를 읊듯이 말을 하는 서창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영창에 해당되는 것으로는 시를 읽어드리고 그 사이사이에 서창처럼 추임새를 넣는 방식으로 전개해 나가겠습니다.
[영산(靈山)]이라는 시는 1975년 발표작으로 저의 데뷔작입니다. 1975년 {문학과 지성}이라는 계간지에 처음으로 작품을 발표했는데, 네 편 중의 하나가 [영산]이라는 작품입니다. 어떻게 보면 제 문학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 어렸을 적 고향에는 신비로운 산이 하나 있었다.
아무도 올라가 본 적이 없는 영산(靈山)이었다.
영산은 낮에 보이지 않았다.
산허리까지 잠긴 짙은 안개와 그 위를 덮은 구름으로 하여 영산은 어렴풋이 그 있는 곳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영산은 밤에도 잘 보이지 않았다.
구름없이 맑은 밤하늘 달빛 속에 또는 별빛 속에 거무스레 그 모습을 나타내는 수도 있지만 그 모양이 어떠하며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영산이 불현듯 보고 싶어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에 내려갔더니 이상하게도 영산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이미 낯설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런 산은 이곳에 없다고 한다.
-[영산(靈山)] 전문
영산이라는 말은 불교의 [영산회상(靈山會相)]에서도 똑같은 단어가 나오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우리의 영혼에 잠재해 있는 어떠한 존재를 나타내기 위해서 영산이라고 붙였고, 나중에 영어나 독일어로 번역될 때도 영혼의 산이라고 직역이 되었습니다. 문학에 대한 제 나름의 이상과 삶의 현실 그것을 영산으로 형상화했고, 영산을 찾아서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가는 현실을 대조해서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의 오랜 꿈과 이상과 자아를 영산을 통해서 표현했다고 볼 수 있고, 그것을 상실해 버린 다음에 다시 그것을 찾는 작업에서 제 나름대로 제가 추구하는 문학의 정신을 표현해 보고자 한 것입니다.
저는 나중에 없어진 영산을 다시 찾는 작업을 다른 시편에서도 많이 되풀이했습니다. 가령 시중 [크낙산의 마음]이라는 것도 있는데, 크낙산도 제 시의 여러 곳에서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크낙산이 어디에 있는 무슨 산이냐고 질문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것도 이름을 그냥 붙인 산이니까 큰 산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크낙새가 사는 산이 아니고 큰 산. 그래서 큰 산을 찾아가는 작업을 하다보니 큰 산이 꼭 산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이나 자기의 마음 속에서도 자꾸 솟아오르고 태어나는 산이라고 몇 번에 걸쳐서 제 시 속에서 변형시켜서 표현한 바 있습니다.
저는 서른다섯 살 때 아주 늦깎이로 시인으로 데뷔했습니다. 제가 첫 번째 발표한 네 편의 시 데뷔작 가운데서 지금 이 [영산]은 제가 문학적으로 추구해야 할 어떠한 내용이나 주제라고 할까 이런 것을 자기의 문학적 지표를 표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와 함께 [시론] 이라는 시도 발표했는데, 시론이라면 시의 이론 아닙니까. 시의 이론은 사실 시로 쓰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첫 번째 데뷔작으로 [시론] 이라는 시를 썼는데, 그를 통해 제가 찾고자 하는 어떤 시적 형식에 관한 저의 지표를 나타낸 바 있습니다.
겨울밤
노천역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며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
온갖 부끄러움 감출 수 있는
따스한 방이 되고 싶었다
눈이 내려도
바람이 불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바깥이 되고 싶었다
-[밤눈] 전문
1988년에 나온 '좀팽이처럼' 이라는 시집에 실렸습니다. 시라는 것이 개인적인 독백에 의한 예술이 아닙니까. 개인적인 사적인 체험, 또는 감정, 감정의 대표적인 게 사랑일 겁니다. 사랑에 대한 체험이라든가 사랑의 기쁨, 슬픔, 욕망, 좌절 등을 쓴 시를 보통 연애시, 사랑시라고 말하는데 저는 늦깎이로 데뷔를 해서 사랑시가 거의 없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발표한 5백여 편의 시 가운데서 이게 유일한 사랑시일 겁니다. 그런데 이 유일한 사랑시가 강남의 어느 카페에 걸려 있다고 하는데 제가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35세면 처자식이 있는 몸이었고 살기에 바빠서 애틋한 사랑을 다시 체험할 나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사랑 노래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첫눈이 내릴 때 서울 동쪽 지붕이 없는 노천역에서 젊은이들 둘이 서 있는 걸 보고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글을 썼습니다. [영산]이라든가 [밤눈] 같은 작품은 제 경우에 개인적인 내면의 토로라고도 할 수 있겠고, 영상화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달동네 놀이터에서
코흘리개 꼬마들
미끄럼타기 바쁘다
미끄럼틀 계단을 종종종종 올라가
쭈룩 미끄러져 내려온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지 엉덩이가 해지도록
미끄럼탄다
너희들 왜 자꾸만 미끄러져 내려오느냐
아무도 묻지 않는다
머나먼 알프스 높고 높은 마터호른
근처까지 올라와서
눈부시게 하얀 빙하의 벌판
거침없이 미끄러져 내려간다
온 세상 곳곳에서 몰려든 스키어들
개미보다도 훨씬 작아 보이는
형형색색 장난꾸러기들
솟아오른 아버지의 드넓은 가슴팍에서
흐르는 어머니의 부드러운 겨드랑이에서
가파른 눈언덕 아래로
겁도 없이 미끄럼탄다
당신들 왜 자꾸만 미끄러져 내려가는 거요
묻지 않는다
-[미끄럼] 전문
우리가 어렸을 때 미끄럼을 탄 기억이 있고 또 스키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마 눈이 오기만 하면 스키를 타러 열악한 교통 상황을 가리지 않고 스키장을 찾으러 갈 겁니다. 그런데 미끄러져 내려온다는 자체는 인간의 유희 본능이라고 볼 수 있지 거기에 공리적 목적을 문제로 하지 않습니다. 물론 건강에 좋다고 할 수 있지만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으니까 반드시 공리적으로 이로운 것은 아니지요. 그냥 목적 없는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의 진지할 정도의 무목적성을 가지고 어린 아이들은 미끄럼을 타고 어른들은 스키를 탑니다. 칸트와 같은 철학자는 도덕의 무목적성까지 갈파한 적이 있으니까, 이것도 인간에게서는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통 예술의 자율성과 예술의 목적성을 얘기할 때, 아마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시는 무목적성의 무구한 유희 본능으로부터
우리의 삶과 문학에서 아주 중요한 하나의 요소로서의 유희 본능이 미끄럼 같은 것을 통해서도 나타난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고 했는데, 아무도 묻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미끄럼을 타고 스키를 타는 사람들 가운데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묻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타고난 천진성을 예술적 천재라고 생각한다면 어떤 혼돈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작아진다
자꾸만 작아진다
성장을 멈추기 전에 그들은 벌써 작아지기 시작했다
첫사랑을 알기 전에 이미 전쟁을 헤아리며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만 작아진다
하품을 하다가 뚝 그치며 작아지고
끔찍한 악몽에 몸서리치며 작아지고
노크 소리가 날 때마다 깜짝 놀라 작아지고
푸른 신호등 앞에서도 주춤하다 작아진다
얼굴 가리고 신문을 보며 세상이 너무나 평온하여 작아진다
넥타이를 매고 보기 좋게 일렬로 서서 작아지고
모두가 장사를 해 돈벌 생각을 하며 작아지고
들리지 않는 명령에 귀 기울이며 작아지고
제복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작아지고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며 작아지고
수많은 모임을 갖고 박수를 치며 작아지고
권력의 점심을 얻어먹고 이를 쑤시며 작아지고
배가 나와 열심히 골프를 치며 작아지고
칵테일 파티에 가서 양주를 마시며 작아지고
이제는 너무 커진 아내를 안으며 작아진다
작아졌다
그들은 마침내 작아졌다
마당에서 추녀 끝으로 나는 눈치 빠른 참새보다도 작아졌다
그들은 이제 마스크를 쓴 채 담배를 피울 줄 알고
우습지 않을 때 가장 크게 웃을 줄 알고
슬프지 않은 일도 진지하게 오랫동안 슬퍼할 줄 알고
기쁜 일은 깊숙이 숨겨둘 줄 알고
모든 분노를 적절하게 계산할 줄 알고
속마음을 이야기 않고 서로들 성난 눈초리로 바라볼 줄 알고
아무도 묻지 않는 의문은 생각하지 않을 줄 알고
미결감을 지날 때마다 자신의 다행함을 느낄 줄 알고
비가 오면 제각기 우산을 받고 골목길로 걸을 줄 알고
들판에서 춤추는 대신 술집에서 가성으로 노래 부를 줄 알고
사랑할 때도 비경제적인 기다란 애무를 절약할 줄 안다
그렇다
작아졌다
그들은 충분히 작아졌다
성명과 직업과 연령만 남고
그들은 이제 너무 작아져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다
-[작은 사내들] 전문
1970년대 후반에 쓴 거니까 초기작에 속하는 것이고, 돌이켜 보면 사반세기의 나이를 먹은 작품입니다. 기술 문명과 산업사회 발달과 반비례해서 인간이 소외되고 왜소화되어 가는 현상을 노래한 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에도 이른바 새로운 경제체제, 신경제주의의 등장과 함께 자본의 힘만 자꾸 커져가고 세계화가 이루어짐에 따라서 인간이 점점 더 왜소화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우리는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자본과 돈이 또는 부자가 이 세상의 20%를 차지하고 소외된 인간들이 80%를 점유하게 되는 세상이 온다고들 걱정하고 있습니다. 세계화로 국경이 전부 사라진 대신, 새로운 범세계적인 계급, 빈부로 양분되는 세계적인 양상이 나타나지 않나 걱정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점점 작아져서 마침내 없어지고 말 것인가, 무(無)로 환원되고 말 것인가. 아마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돈이나 자본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주인 노릇을 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무엇이 필요할 것인가, 새로운 변혁은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인가, 우리가 다 궁금하게 여기는 것들입니다. 다만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다는 데서 이 시는 그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품은 제가 사회적 관심이라고 할까 하는 것을 드러낸 시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음은 우리의 노동절이었던 3월 1일이었던 시절에 쓴 시입니다.
오늘은 주차장이 텅 비었다
관리인도 나오지 않았다
오일 자국으로 얼룩진 광장에
온종일 햇볕이 내리쪼이고
가끔 비둘기가 모이를 찾고
바람이 지나간다
일하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널려진 물건들 하나도 없이
하늘 아래 비어 있는 땅
부당한 온갖 점거를 벗어나
잠시 제자리를 찾아
쉬고 있는 이 빈터를
오늘은 주차장이라고 부르지 말자
-[노동절] 전문
노동절 하루 비어 있는 주차장을 보면서, 모든 사물에게는 자기 기능과 이름이 있기 마련인데 이 주차장 같은 경우는 인간이 그 땅의 기능과 이름을 빼앗아 간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유용성, 환금성에 의해서 사물의 본래의 기능을 소외시켜 버린 것입니다. 사실 주차장은 시멘트로 덮여 있을 수도 있고 그냥 흙으로 된 땅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땅과 흙이라는 것이 작게는 아주 미세한 박테리아나 곤충에서부터 시작해서 인간이 궁전도 거기에다 세울 수 있는 삶의 터전인데, 그 삶의 터전을 순수한 자연의 일부로 보지 않고 언제부턴가 우리는 부동산 투기의 대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자연을 수탈하고 자연의 기쁨을 왜곡한 자본주의의 폭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비단 주차장뿐만 아니라 우리가 제 이름을 돌려주고 제 기능을 찾게 해줘야 할 것은 이 세상에 굉장히 많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여기에 포함되겠지요.
돈을 몇 푼 찾아가지고
은행을 나섰을 때 거리의
찬 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려놓았다
대출계 응접 코너에 앉아 있던
그 당당한 채무자의 모습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 일대를 지나갈 수 없었다
인조 대리석이 반들반들하게 깔린
보도에는 껌자국이 지저분했고
길 밑으로는 전철이 달려갔다
그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시뻘건 바위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지진이 없는 나라에 태어난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지
50억 인구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의 한 귀퉁이
1,000만 시민이 들끓고 있는
서울의 한 조각
금고 속에 넣을 수 없는
이 땅을 그 부동산업자가
소유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그가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 땅 위에서 나는 온종일
바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고
좀팽이처럼
그것을 아껴가며 살고 있었다
-[좀팽이처럼] 전문
이 시가 1980년대 후반에 씌어진 것인데 10여 년 동안에 바뀌어야 할 곳이 생겼습니다. 가령 50억 인구가 아니지요. 작년 이맘 때부터 세계 인구가 60억이 되었습니다. 서울도 천만이 아니라 천 이백만이 넘어섰지요. 1980년대 중반에 우리의 경제 현실을 그린 겁니다. 그 당시는 군부독재가 무르익을 무렵인데, 군부독재에 수반되는 사람이 이천억을 부정축재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지요. 작년인가 독일의 통일을 이룩한 헬무트 콜 수상이 부정한 돈을 처분했다고 해서 수상에서 퇴장당하지 않았습니까. 그 때 헬무트 콜 수상이 쓴 돈이 우리 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몇 천만 원 정도입니다. 아주 가소로운 액수입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우리 나라가 독일보다 선진국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정경유착이 막 제도화되었던 때의 이야기이고, 지금도 정경 유착이나 부정부패의 고리 같은 것이 많이 달라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집권기간 동안 한밑천 장만하려는 생각에서 나온 게 아닐까 합니다.
결국은 권력과 돈을 거머쥔 20% 미만의 지배계층이 나머지 80%의 서민 대중을 좀팽이로 만들어버린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무슨 공적 자금을 조성한다든가 할 때 결국 좀팽이들의 혈세와 노동으로 만드는 것이지 뭡니까. 그 맨 아래의 80%의 보병들이 달려가고 있는 셈입니다. 저도 대표적인 좀팽이입니다. 제가 시를 한 편 쓰면 3만원에서 5만원 정도를 받는데 어떤 때는 못받습니다. 왜냐하면 '출판사의 사정으로 인해서 이번에는 드릴 수가 없으니 너그러이 양해하십시오.'라는 사연이 적힌 편지를 대신 받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좀팽이입니까. 아마 저나 여러분들이나 다 선량한 좀팽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떻게 보면 좀팽이들이 많아져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좀팽이처림]이나 [노동절] 같은 시는 우리 나라의 경제적 현실을 다루고자 했던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그들은 눈을 비비며 깨어나는 모양이다. 그들 가운데는 내가 아는 얼굴도 많다.
장악원장 할아버지는 거실 안락의자에 앉아 근엄하게 수염을 쓰다듬고 있다. 누하동 할머니는 끊어진 전구를 양말 속에 넣고, 구멍 뚫린 뒤꿈치를 깁고 있다.
정치에서 손을 뗀 뒤부터, 아버지는 옛날 책력을 뒤적거리거나, 앞뜰 채마밭을 가꾸며 소일한다. 큰 항아리에서 바가지로 쌀을 떠내다가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는 아직도 광 문 앞에 쓰러져 있다. 누님은 큰절을 되풀이하며, 자꾸만 지장보살을 되뇌인다.
시역의 총탄에 맞아 피를 흘리는 김구 선생과 교수형을 당한 죽산의 데드 마스크도 보인다. 사일구 때 죽은 친구들이 여전히 젊은 모습으로 왔다갔다 하고, 분신 자살한 투사들은 중화상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이처럼 한밤중에는 우리 집안이나 마당뿐만 아니라, 서울과 시골, 산과 들, 강과 바다가 온통 죽은 이들로 가득차 있어 이들을 피하여 발걸음을 옮기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캄캄한 어둠 속을 걸어가기는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어둠 속 걷기] 전문
돌아보면 20세기 한국의 역사가 죽음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일제의 국권찬탈에서부터 시작해서 2차대전 한국전쟁, 남북대립에 따른 여러 가지 분쟁, 군부독재, 자기의 인생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기의 죽음을 죽지 못한 사람들이 중음신(中陰身)으로 허공을 떠돈다고 합니다. 우리의 암담한 어둠의 역사를 제가 형상화해본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어둠 속을 혼자서 걸어가시면 힘들 겁니다. 하지만 이처럼 많은 죽은 이들의 혼령이 여러분들의 발을 막고 있다고 생각지는 마십시오.
봄에는 연록색 물결 북쪽으로
북쪽으로 펴져 올라간다
철조망도 군사분계선도 거리낌없이
북상한다
산맥을 넘고
들판을 지나서
진달래도 개나리도 월북한다
여름이면 뻐꾸기 노래 소리
개구리 우는 소리
어디서나 똑같다
가을에는 황금빛 물결 남쪽으로
남쪽으로 퍼져 내려온다
비무장 지대도 민통선도 거리낌없이
남하한다
강을 건너고
계곡을 지나서
코스모스 단풍도 월남한다
겨울이면 시원한 동치미 맛
얼큰한 해장국 맛
어디서나 똑같다
동서남북 가리지 않고
온 세상을 하나로
하얗게 뒤덮는 눈보라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이것도 제가 80년대 중반에 쓴 시입니다. 남북의 분단과 그에 따른 비극을 우리가 어떠한 방법으로 해결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제 나름대로 자연의 형상에 의탁해서 그려본 작품입니다. 인간이 이 지구를 지배하게 되면서부터 지구의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키고 여러 가지 나쁜 짓을 많이 했고 또 나쁜 것을 많이 만들어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을 두 개 든다면 하나는 돈이고 다른 하나는 이데올로기일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나쁜 구상인 이데올로기 때문에 반세기를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고생해 왔습니다. 이제 남북관계가 순리적으로 해결될 기제를 찾기는 한 것 같습니다만 앞으로 가령 어떻게 통일이 이루어질지는 미지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자연 현상을 보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그러한 모습을 우리한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철조망이나 지뢰로 막을려고 하는데, 그것이 자연의 순리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막을 수 없게 되겠지요.
일년에 한 번쯤 한 사람이
드나들기 위하여
저렇게 커다란 정문을
한가운데 만들어놓고
열두 명의 수위가 밤낮으로 지킨다
<정문 사용 금지>
보통사람은 절대로
드나들 수 없는
저 으리으리한 정문을 보아라
한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너무 크게 열려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닫혀 있다
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닫기 위해서 있는
드나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로막기 위해서 있는
저것은 우리에게
문이 아니라
벽이다
우리를 가로막는
저 벽을
허물어뜨리자
아무도 밟지 못하게 하는
저 대리석 계단을
없애버리자
아무도 가까이 갈 수 없는
저 화강암 기둥을
뽑아버리자
아무도 드나들 수 없는
저 육중한 쇠문을
부숴버리자
그리하여 없애버리자
우리가 사용할 수 없는
저 큰 문을
없애버리고 차라리
거기에다 벽을
만들자
그리고 그 벽에다
새로 문을
만들자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그런 문을 만들자
-[새 문] 전문
이 작품은 제가 쓴 시 가운데 가장 구호적인 시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실제로 고급 관청에 청사의 정문이 문민정부 이후에는 모든 사람의 출입이 개방되었는지는 몰라도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보통 사람은 우단을 깔아놓은 정문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대통령이나 장·차관까지만 드나들고 그랬습니다. 그걸 보고 착상을 얻어서 쓴 시입니다. 말하자면 억압체제를 타파하자는,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문을 만든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읽었던 [밤눈]이라든가 아주 친밀한 개인적 내면을 토로한 시에 비하면 이러한 구호적인 시는 비록 여기에 나와 있는 시적 자아가 1인칭으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집단의 제언으로 된 경우입니다.
제가 쓴 시가 이러한 시 쪽으로 발전해 왔다고 말씀드리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이런 시도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릴 따름입니다. 오히려 제가 간접적인 암시를 많이 포함하고 있는 정치 시는 제 초기 시에 오히려 많습니다. [어둠 속 걷기], [동서남북], [새 문] 같은 것은 우리가 살아온 정치적 현실에 대한 증언이요 형상화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새마을 회관 앞마당에서
자연보호를 받고 있는
늙은 소나무
시원한 그림자 드리우고
바람의 몸짓 보여주며
백여 년을 변함없이 너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송진마저 말라버린 몸통을 보면
뿌리가 아플 때도 되었는데
너의 고달픔 짐작도 못 하고 회원들은
시멘트로 밑둥을 싸 바르로
주사까지 놓으면서
그냥 서 있으라고 한다
아무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해도
늙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
오래간만에 털썩 주저앉아 너도
한 번 쉬고 싶을 것이다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기에
몇백 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너의 졸음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백여 년 동안 뜨고 있던
푸른 눈을 감으며
끝내 서서 잠드는구나
가지마다 붉게 시드는
늙은 소나무
-[늙은 소나무] 전문
막힘없이 분방한 중얼거림에 시의 새 지평이 최근에 와있는 지점이라고 할까 최근에 우리의 현대시가 가지고 있는 어떤 위상 같은 것을 쓴 시를 한 편 읽어드리면서 저의 말을 끝내기로 하겠습니다. 1998년 비교적 최근에 나온 저의 시집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이라는 시집에 실린 시입니다. 시집에 대한 생각을 최근에 피력한 것입니다.
차렷!
한마디로 연대병력을 움직이고
목숨을 바쳐 싸우겠습니다 여러분!
목쉰 부르짖음으로 군중을 열광시키고
사랑해 당신을
달콤한 속삭임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사로잡고
짜장면 하나에 짬뽕 둘!
경제 성장률 하향 조정! 임금 총액 동결!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자반 고등어나 먹갈치 사려!
저마다 목청 높여 부르짖는데
중얼중얼
혼자서 지껄이는 말
누가 들으려 하겠는가
어디를 가나 그래도 바람결에 실려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소리
들리지 않는 곳 없고
한평생 중얼거리는 사람 또한
없지 않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중얼중얼중얼.............
-[중얼중얼] 전문
우리는 언어를 여러 가지로 사용합니다. 가령 명령, 유혹, 거짓말, 음식주문, 경제정책 발표, 선동, 행상들의 구호, 이런 특정 대상과 목적을 부르짖는 높은 목소리가 있고, 그런가 하면 사랑시처럼 독백을 하는 낮은 목소리, 중얼거림, 때로는 침묵, 침묵도 일종의 의사 표시 아닙니까.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목청 높여 외치기만 하며 이 세상을 살겠습니까. 중얼거리는 소리도 필요하고 때로는 침묵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창(敍唱)이 없는 명창, 레디타티프가 없는 아리아를 우리가 생각할 수 없고, 아니라나 추임새가 없는 판소리를 생각할 수 없듯이 시 역시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걱정과는 관계 없이 계속해서 살아남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계속 중얼거려왔습니다. 앞으로도 또 중얼거릴 것입니다. 그런데 또 제 후배 시인들 가운데서 또 중얼거리기 시작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틈틈이 중얼거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 우리 앞으로 중얼거립시다. ◈
나뭇잎 하나 / 김광규
크낙산 골짜기가 온통
연록색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그러니까 신록이 우거졌을 때
그곳을 지나가면서 나는
미처 몰랐었다
뒷절로 가는 길이 온통
주황색 단풍으로 물들고 나뭇잎들
무더기로 바람에 떨어지던 때
그러니까 낙엽이 지던 때도
그곳을 거닐면서 나는
느끼지 못했었다
이렇게 한 해가 다 가고
눈발이 드문드문 흩날리던 날
앙상한 대추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 하나
문득 혼자서 떨어졌다
저마다 한 개씩 돋아나
여럿이 모여서 한여름 살고
마침내 저마다 한 개씩 떨어져
그 많은 나뭇잎들
사라지는 것을 보여 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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