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독서하는 여인-윤덕희'

나뭇잎숨결 2008. 9. 30. 11:28

 

 

[우리그림 한국화] '독서하는 여인-윤덕희' / 박영대(화가)

 

 


'고요한 뜰에 앉아 책 읽는 평화로움'

 

한 여인이 있습니다. 시원한 파초가 있는 뜰에서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책을 읽고 있네요.

조용하고 한가한 모습이지만 마음 속에는 수많은 대화가 있답니다.

책을 쓴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책 속에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놓았지요.

따라서 책을 읽는 것은 책을 쓴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입니다.

단정한 머리 맵시와 옷차림을 한 여인을 그린

이 그림을 보면, 책을 읽는 고요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여인 뒤에 있는 가리개가 그 마음을 말해 주는 듯 합니다.

그림 속에는 구름이 둥실 떠 있고, 구름 사이로

달님이 막 나타났습니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가지에는 꼬리를 늘어

뜨리고 얌전하게 앉아 있는 새 한 마리가

있습니다. 평화로움을 말해 주지요.

 

책을 읽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책 속의 지은이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책에 휘둘리게 됩니다.

대개 재미만을 추구한 책들에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읽고 나서 남는 게 없다면 좋은 책이라 할 수 없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무언가 남는 책,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책이 바로 좋은 책입니다.

이런 경우는 대개 책을 읽을 때 지은이와 대화를 하고, 요리조리 생각해 보는 경험을 갖게 됩니다.

 

조선 초기의 학자 중에 서경덕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개성의 동문 밖 화담이라는 곳에 서재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화담 선생'이라고

불렀지요.

선생은 어린 시절에 몹시 가난하였습니다. 들에 나가서 나물을 캐다 먹어야 하는 때도

많았습니다.

하루는 호미와 바구니를 들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들에 나오자 궁금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작은 풀꽃을 관찰하느라 한낮이 되었고, 나비를 따라다니느라 해가 지는 줄 몰랐습니다.

당연히 바구니는 비어 있었습니다. 텅 빈 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돌아올 때가 많았습니다.

책 읽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책을 읽다가 의문이 나거나 애매한 곳이 있으면 반드시 답을 구하고 나서야 넘어갔습니다.

14 세 때는 서경(書經)이라는 책을 읽다가 의문이 생기자 책을 덮고 보름 동안 궁리를

거듭한 끝에 깨달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 책을 읽다가 좀더 알아 보아야 할 낱말이나 구절이 나오면 쪽지에 적어서 서재의 벽에

붙여 놓고 틈만 나면 들여다보고 생각하기를 즐겼습니다.

이런 끈기와 노력으로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큰 학자가 되었습니다.

재치가 있고 슬기로워 전해지는 일화도 많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화담 선생이 길을 가고 있는데, 웬 젊은이가 길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이 보게,젊은이 무슨 일인가?"

젊은이는 울음을 멈추고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5 세 때부터 앞을 볼 수 없어 지팡이에 의지해 살아왔습니다. 그런 세월이 이십 년이나 되었지요. 그런데 오늘 아침 집에서 나와 예전처럼 더듬거리며 길을 걷는데,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며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니, 그렇다면 아주 잘 된 일이 아닌가!"

젊은이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좋아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눈을 비비고 꿈인지 생시인지 의심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곧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주 기뻐 집으로 서둘러 돌아가려는데, 도무지 집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골목길은 여러 갈래이고, 대문은 비슷비슷했으니까요.

저는 도저히 집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선생은 이야기를 다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게나."

젊은이는 그제서야 다시 눈을 감고 지팡이에 의지해 집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선생이 젊은이에게 다시 장님으로 돌아가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지 말고, 자신이 깨달은 방법을 따르라고 한 것이지요.

책 읽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은이가 써 놓은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태도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견주어 보고 따져 보는 능동적인 태도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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