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비판적 관점에서 해명된 폴 리쾨르의 주체성 복원의 전략
문 장 수 경북대 철학
I. 서 론
리쾨르의 모든 철학은 주체 개념의 정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주체 개념은 리쾨르의 해석학의 출발점의 동기이고 내용이고 도달점이다. 그러나 리쾨르의 텍스트를 읽은 본 자라면, 대부분의 철학 텍스트들이 그렇지만, 그 엄청난 역사적 지식의 박식함과 또한 난해함에 혀를 내두를 것이다. 말하자면, 리쾨르의 해석학적 주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체 개념에 대한 선행하는 연구들의 내용에 대해 최소한의 기본적인 사전적 지식 없이는 접근 불가능하다고 사료된다. 이에 논자는 리쾨르의 주체 개념에 접근하기 위한 사전적 조건으로 주체 개념의 역사적 변형들을 우선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의도에서, 논자는 역사-발생적 관점에서 주체 철학의 변형을 네 시기로 구분하고자 한다. 우선 제 1 기는 데까르트에 의한 주체 철학 정립기이다. 이는 의식, 사유, 주체가 동일한 지평의 것으로 이해되고, 나의 사유의 있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인식으로 정립되는 시기이다. 제 2 기는 칸트에서 시작하여 후설과 메를로-퐁티의 현상학과 싸르트르의 실존주의에까지 이어지는 시기로 이를 논자는 주체의 구조 분석기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 즉 자기 의식과 자기 인식의 분열의 구조와 이에 따른 인간의 비극적 운명의 의미가 제시되는 시기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아직 모든 의미는 의식의 지향성에서 정립되기에 인간이 여전히 의미의 담지자이다. 제 3 기는 실존주의 이후 등장한 프랑스의 구조주의적 흐름 속에서 해석된 주체 개념, 즉 정신분석학(프로이드와 라캉), 기호학(니이체에서 소쉬르를 경유하여 일반 기호학까지) 그리고 유물론(스피노자에서 시작하여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를 경유하여 알튀세르까지)에 의해 해석된 주체 개념으로 이를 논자는 주체 해체기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죽었다고 선언된 시기이다. 그리고 제 4 기는 바로 본 논의의 테마인 리쾨르의 해석학적 주체 개념으로 주체 복원기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방법론적 측면에서 볼 때, 제 1 기는 직관적 또는 내성법적 방법에 의한 접근이 지배적이었다면, 제 2 기는 인식론적, 분석적, 논리적 방법에 의한 접근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제 3 기는 인과적․과학적․체계적․구조적 방법에 의한 접근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비해 제 4 기인 해석학적 접근은 이러한 선행하는 모든 방법들을 수용하면서 특히 역사-비판적이고 변증법적인 방법을 지배적으로 활용한다. 리쾨르의 해석학적 관점에서 볼 때, 여기서 접근이란 근사법 또는 해석이라는 의미이며, 본질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접근이 본질과 전혀 무관한 환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해석 또는 접근이란 긍정적인 의미에서 상대적․진보적 인식의 확장을 함축한다. 말하자면, 이러한 시기 구분과 그들 사이의 변증법적 진보 관계를 강조하는 것은 단순한 논자 자신의 입장뿐만 아니라, 리쾨르의 해석학의 본질적이고 일관된 기조이다.
그러나 지면 문제뿐만 아니라, 논자의 지적, 시간적 한계로 주체 개념의 역사적 발생들의 구체적 내용을 세부적으로 철저하게 제시할 수는 없다. 단지 리쾨르의 주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예비적 조건의 차원에서 최대한 간략히 요약할 것이다. 그러나 두 개의 논문으로 나누어도 될 정도로 분량이 방대하여 정신을 집중시키기에는 어려울 것이라 사료된다. 게다가 대부분이 불명료함으로 가득 찬 것 같아서 논자의 공부에 도움은 되었을 지라도 독자들에게 얼마나 유익한 글이 될 지는 사실 의심스러울 뿐이다. 의미가 있다면, 본 논고는 주체 개념에 대한 개별적 이론들이라는 나무들이 구성하는 전체로서의 숲을 그려보려는 논자의 한 시도라는 것일 뿐이다.
II. 코기토와 제 1 확실성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첫 번째 지식은 무엇인가? 데까르트 이후 오늘날까지도 그 지식은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알고 있다. 즉 사유하는 나의 존재성, 사유하는 내가 있다는 사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사유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나의 존재가 나의 사유에 선행할 수 없다는 것, 즉 나의 존재와 나의 사유는 동시동연적이라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사유한다는 것이고 사유하는 것이 존재의 유일한 방법이다. 여기서의 사유는 근본적으로 너의 사유도 그의 사유도 아니라, 나의 사유이다. 사유가 있다면 그것은 나의 사유이고 따라서 내가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즉 사유, 나 그리고 존재는 삼위일체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라는 것이다. 이것보다 명석 판명한 지식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나의 사유의 있음과 동시에 나의 존재가 드러난다는 이 명제가 왜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가장 명석판명한 제 1 확실성인가? 이를 증명하기 위해 데까르트는 소위 방법적 회의를 수행했다. 그 방법은 문제의 인식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다면, 심지어는 가상적으로라도 의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확실하지 않는 인식으로 배제해 버리는 철저한 제거의 방법이다. 데까르트는 우리의 인식을 크게 세 가지 종류로 일단 구분한다. 감각-지각적 인식, 논리-수학적 인식 그리고 사유하는 나의 존재에 관한 인식이다. 감각적 인식들의 변화무쌍성은 도처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지만, 데까르트는 극단적으로 꿈의 가설을 가져와 감각적 지식들의 확실성을 제거한다. 즉 내가 꿈을 꿀 때, 내가 바라보는 동산과 집들의 실재성을 나는 조금도 의심 없이 확신하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그 동산과 집들은 환상이었다는 것을 자각한다. 마찬가지로 일체의 감각-지각적 지식들 자체가 그대로 실재하는 사물 자체의 모습이라고 확신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흔히 우리가 말하듯이, 우리들의 일체의 감각적 인식들은 일장춘몽일 수 있다. 감각적 인식의 진리성의 기준은 사유와 존재의 일치의 문제이기에, 꿈의 가설로서 그것의 확실성을 회의할 수 있지만, 논리-수학적 인식들의 진리성의 기준은 개념들 상호간의 내적 관계이기에 꿈의 가설은 회의의 좋은 방법이 아니다. 이에 논리-수학적 인식들의 필연성을 회의하기 위해 데까르트는 악신의 가설을 가지고 온다. 만일에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문자 그대로 전지전능을 자기의 속성으로 가지기에 그가 맘먹으면 하지 못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하여 우리 인간을 기만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우리를 기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a>b고 b>c이면, a>c이다”는 명석 판명한 필연성도 사실은 전혀 필연적인 것이 아닌데, 단지 우리들의 정신상에서 그렇게 느끼도록 신이 우리를 기만하고 있다는 가정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가정이 가능한 한 논리-수학적 인식의 필연성의 확실성도 회의할 수 있다. 그러나 데까르트에 따르면, 사유하는 나의 존재의 확실성은 꿈의 가설도 악신의 가설도 더 이상 효력을 미칠 수 없게 하는 확실성이다. 왜냐하면, 꿈 그 자체는 나의 사유의 한 모습이기에, 사유하는 나의 있음이 단순한 꿈 또는 환상이라고 해도, 꿈으로서의 나의 사유, 환상으로서의 나의 사유는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은 나의 사유가 없는데, 나의 사유가 있는 것처럼 신에 의해 기만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나의 사유의 존재가 또 다시 드러난다. 왜냐하면, 기만당한다는 것은 기만당할 수 있는 사유가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꿈이고 환상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일체의 논리-수학적 인식들의 필연성이 또한 허구라고 할지라도, 나의 사유가 있음은 더 이상 회의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이다. 이를 데까르트는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요약했다.
III. 주체의 구조 분석과 낙관과 비관의 이원성 : 자기 의식과 자기 인식의 분열
그러나 이처럼 명석 판명한 제 1 확실성으로 해명된 코기토 개념도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하부 구조들의 분석에 몰두하면, 엄청난 모순들을 새로이 만난다. 말하자면, 우리가 분석하고자 하는 이 장의 주제는 칸트에서 싸르트르로 이어지는 주체 철학의 제 2 기의 주요 내용, 즉 주체 개념의 하부 구조 분석과 그것에서 해명된 자기 의식과 자기 인식의 분열 또는 모순의 양상이다.
주체 개념에 대한 칸트적인 구조적 분석에로 나가기 전에 데까르트의 코기토 개념을 에워싸고 있는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할 것 같다. 우선 첫 번째 문제는 코기토와 신의 순환성의 문제이다. 사실 데까르트가 증명한 사유하는 나의 있음의 확실성은 순수 주관적 확실성일 뿐 전혀 객관적 확실성은 아니다. 즉 내가 사유한다는 것과 동시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은 오직 나의 사유상의 확신일 뿐, 나의 사유를 떠나서는 그것의 진리성을 전혀 보증받지 못한다. 나의 주관적 사유의 차원에서는 나의 존재가 아무리 필연적이라 할지라도, 객관적 입장에서 볼 때 나의 존재는 단순한 우연적인 한 사실일 수 있다. 실로 우리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생각할 수는 없지만(생각이 있자마자 존재가 동반되기에), 사실적 차원에서는 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리고 실로 항상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즉 우리가 죽을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다. 여기서 데까르트는 나의 존재성의 객관적 확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완전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증명해야만 했다. 그렇게 하여 전지전능한 신이 나의 존재를 보증한다면, 이보다 더 확실하고 객관적인 확실성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완전한 존재자로서 신의 증명은 데까르트에게 있어서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완전하다고 느끼는 경우는 결코 한 번도 없다. 즉 나는 항상 불완전하다고 자각한다. 그런데, 내가 이러한 불완전함을 자각하는 것은 내 안에 완전성의 관념이 있지 않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즉 배경 없이 전경의 인식이 불가능하듯이, 완전성 관념 없이 내가 불완전성의 관념을 가진다는 것은 모순이다. 따라서 나는 완전성의 관념을 지참하고 있다. 그런데, 완전성의 관념을 내가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내가 자작한 것일 수 없다. 왜냐하면, 불완전한 자가 완전성의 관념을 만든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가지고 있는 완전성의 관념의 원인은 실존하는 완전한 존재자라야 한다. 왜냐하면, 그 결과가 존재하는데, 그것의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원인이 결과보다 덜 완전한 것이라는 모순이 발생하며, 또한 신의 관념은 그 자체가 완전성 관념과 동의어이기 때문에, 그리고 완전한 것은 일체의 속성을 다 가져야 하기 때문에 존재성의 속성도 또한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순이다. 따라서 완전자로서 신은 존재하며, 신은 완전자이기 때문에 나의 존재도 창조할 수 있고 또 창조했다. 이렇게 하여 나의 존재는 이제 객관적 확실성을 보증받는다고 데까르트는 확신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순환성의 오류가 있다. 나의 사유와 존재의 객관적 보증이 신의 존재 증명에 의존한다면, 신의 존재 증명은 나의 사유와 존재에 의존한다. 즉 신의 존재의 증명은 나의 사유상의 확실성일 뿐이다. 여기서 코기토와 신의 순환성이라는 데까르트의 첫 번째 모순이 나온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보면, 내가 존재한다는 확실성은 내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즉 확실히 존재하는 나는 누구인가? 즉 나는 무엇인가? 말하자면, 나의 본질은 무엇인가? 여기서 데까르트는 확실히 존재하는 “나”는 나의 모든 표상들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자기 동일적으로 있는 실체라고 생각하다. 즉 여기서 데까르트는 “나”의 개념을 “자아”의 개념으로 바꾸고 “사유하는 주체”의 개념을 “실체”의 개념으로 바꾼다. 나의 표상들이 아무리 다양하다 하더라도, “의심하고, 이해하고, 의욕하는 것은 자아이다라는 것은 자명하며, 이를 설명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도 첨가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자명하다”. 뿐만 아니라, 이 사유 실체는 나의 육체와 외적 세계의 존재의 확실성보다 먼저 주어지는 확실성이며, 사실 후자들의 확실성은 여전히 의심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입장은 데까르트로 하여금 심신이원론을 주장하게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정신과 육체의 상호 통일의 문제는 그로 하여금 심신상호작용을 거부할 수 없게 했다. 여기서 심신이원론과 심신상호작용이라는 데까르트의 두 번째의 모순이 발생한다. 이러한 모순의 해결을 위한 시도가 나중에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 또는 정신과 물체는 한 실체의 두 속성이라는 스피노자식의 새로운 정의를 강요했다.
그런데, 코기토에 대한 데까르트적 자명성은 다시 칸트와 싸르트르의 분석 하에서 세 번째 종류의 모순 내지는 역설을 함축하는 것으로 해명된다. 데까르트는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의 진리성은 추론적 진리가 아니라, 직관적 진리라고 주장했다. 즉 “사유하는 모든 것은 존재한다(대전제)/ 나는 사유한다(소전제)/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결론)”라는 삼단 논법의 형식에서 나의 존재의 확실성이 증명된 것이 아니라, 사유하는 사람이라면, 자기의 사유와 동시동연적으로 자기의 존재를 직관적으로 확신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확신은 그 어떠한 종류의 확신보다도 우선적이고 회의불가능적인 확실성이라는 것이다. 즉 나는 내가 존재함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직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나 싸르트르가 보기에 나의 존재의 확실성의 직관, 즉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것과 나를 확실히 직관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말하면서, 데까르트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확실히 직관할 뿐, 나 자신을 확실히 직관한 것은 아니며, 실로 나는 나 자신을 직관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인간의 인식론적 운명이라고 주장한다.
보다 세부적으로 분석하면, 이러하다. 데까르트는 자아의 동일성을 실질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의식을 일종의 자기 동일적인 실체로 간주했다. 그런데, 이러한 자아의 동일성은 이미 동일화하는 의식의 활동의 결과이다. 동일화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양한 공간과 시간 안에 있는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잡다들을 추상화하여 하나의 의식으로 통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외적 세계의 표상이든 나의 내적 심적 상태의 표상이든 이러한 동일화의 활동 없이는 나의 의식으로 등장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순수 통일의 활동성 자체를 우리는 주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데까르트의 자아란 이런 사유의 가능성의 사전적 조건인 통일성의 기능을 지시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이러한 통일성 그 자체로서의 자기를 사유하고 표상하려고 하자. 이 때, 표상된 그 자기가 순수한 자기라고 할 수 있는가? 이미 구성된 자기이다. 즉 우리는 구성하는 자기와 구성된 자기를 구분할 수 있다면, 구성된 자기는 항상 구성하는 자기를 전제한다. 즉 내가 의식하는 나는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내가 아니라, 이미 의식의 구조에 의해 구조화된 결과로서의 나이다. 칸트가 제시하는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은 공간과 시간이라는 감성의 선천적 직관 형식과 오성의 12 범주의 종합이다. 따라서 결국 내가 공간화하고 시간화하는 능력이라면, 내가 나를 직관한다는 것은 공간과 시간이라는 직관 형식이 직관 형식 자신을 직관한다는 것이다. 이는 모순이다. 이를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 또는 자아는 주체의 종합 능력이라는 사전적 조건 하에서 가능적 인식의 대상일 수 있다. 이처럼 주체를 순수 종합 능력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주체의 활동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에 대한 모종의 인식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자기 의식은 자기 인식이 아니며 자기 인식일 수도 없다.
이러한 사태는 후설에 의한 의식의 구조 분석에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후설에 따르면, 일체의 의식은 무엇의 의식이다. 즉 모든 의식은 의식 내용을 갖고 있다. 의식 내용 없이는 의식도 없다. 그런데, 의식과 의식의 내용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의식 내용 또는 의식 대상은 의식 자체와는 다른 것이다. 이제 의식이 의식 그 자신을 의식하려고 할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의식은 항상 자기 자신과 다른 어떤 것에 관계할 경우에만 의식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데가르트적 코기토도 순수 의식 그 자체가 아니라, 순수 의식의 대상으로서의 자기이다. 즉 데까르트의 자기란 이미 사물화되고 대상화되고 개념화되고 시간화-공간화된 내용으로서의 자기일 뿐이다. 따라서 예를 들면, 내가 나의 과거를 표상할 경우, 이 과거는 나의 과거이기에 나는 이제 나 자신을 인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과거의 인식은 현재 여기서 그것을 표상하는 순수 의식의 활동성을 다시 전제한다. 그리고 내가 존재하려고 기투하는 것은 나의 기대이고 나의 미래적 의도 내용이다. 즉 나는 나의 미래의 의도를 내가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나를 인식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미래적 의도를 이해하는 나는 다시 그 하부 구조로 전제될 뿐 인식의 현전에 생생하게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를 싸르트르는 직접적(전반성적) 의식과 반성적 의식으로 구분하면서, 모든 자기 의식을 반성적 의식으로 간주한다. 그렇게 하여 그는 자기의 초월성, 즉 존재론적 자기와 인식론적 자기의 근본적인 분열을 우리의 운명으로 해석하는 비관론적 인간학을 구성했다. 즉 자기 이해는 단지 자기 의식일 뿐, 즉 왜곡되고 변형되고 매개된 자기일 뿐 직접적인 순수 모습의 자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의식은 자기 인식이 아니다”라는 칸트의 주장과 이것의 연장인 후설과 싸르트르적 의식의 현상학의 결과는 비관적 인간관의 본질을 구성한다손 치더라도, 아직 여기까지, 즉 칸트, 후설 그리고 싸르트르까지는 주체가 우주의 중심이다. 즉 칸트는 세계이든 자아이든 주체의 종합 능력의 사전적 조건 하에서만 가능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후설과 메를로-퐁티는 인식(connaissance)은 그것의 사전적 조건인 의미(sens)에 의존하는데 그 의미의 담지자는 바로 주체적 의식이라고 주장한다. 즉 모든 의식은 자기 자신과 다른 어떤 것에 관한 의식이지만 −이를 의식의 지향성이라고 한다− 동시에 그 의식 내용이 그 어떤 것이든 간에 이미 의식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면 의식은 자기의 어떠한 신출귀몰한 활동성을 통하여도 그것을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의식의 구조의 분석에 드러난 의식의 지위의 이원성을 극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 만사가 의식의 산물이지만, 의식은 그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맹인의 상태에 머문다. 이것은 분명 인간의 비극적 운명이다. 그러나 데까르트는 자기가 자기를 인식하는 것은, 거울이 거울 자신을 보는 것, 나의 눈이 나의 눈을 보는 것, 나의 손이 나의 손 자신을 잡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라 할지라도, 어떠한 대상적 인식보다도 직접적인 인식으로 이보다 더 확실한 인식은 없다고 생각했으며, 헤겔도 긴 변증법적 운동을 경유하지만 결국은 자기가 자기를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낙관론적 운명을 강조했다.
IV. 주체 해체의 세 가지 길
그러나 이러한 “주체” 개념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세 가지 방향에서 부정되기 시작하여 급기야 해체라는 선고를 받게 된다. 그 세 방향이란 프로이드에서 라캉으로 이어지는 정신분석학, 니이체와 소쉬르 이후 프랑스의 구조주의 언어학 그리고 이 양자를 참조하면서 마르크스를 재해석한 알튀세르의 유물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세 입장은 데까르트가 사물들의 실재성에 대해서 부여했던 동일한 회의를 의식 그 자체의 실재성에 부여했다.
또한 주체 문제에 대한 이러한 세 접근법은 이전까지의 단순한 내성법적 명상적 논리적 분석에 의한 접근과는 다르게 과학적․체계적․구조적 접근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1. 정신분석학과 주체 해체
먼저 정신분석학에서의 주체 해체의 내용을 살펴보자. 자기의 모든 행동과 욕망을 의식할 수 있고 그리고 그것들을 자유 자재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도덕적 책임감의 전제 조건이다. 실로 프로이드 이전까지는 이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은 우리는 우리들의 대부분의 행동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유와 욕망들을 의식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즉 이것들은 우리에게 무의식적으로 머문다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데까르트 이후 주체란 통상 의식 또는 사유와 교환적인 용어이다. 이 때 의식과 동의어로서 주체 개념은 자기 자신을 자기 스스로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를 무엇보다도 일차적인 특성으로 갖는다. 즉 의식, 사유 그리고 주체의 일차적 속성은 자유이다. 즉 그 누구도 사유하는데 구속을 느끼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나의 사유가 내 스스로 자유롭게 구성한 사유가 아니라,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그 어떤 무의식적인 것이 나로 하여금 이러저러한 의식적 사유를 갖게 한다면, 주체의 절대적 주권의 개념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주체의 전지전능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 주체적 자기와 전혀 다른 어떤 타자의 관점의 승리를 허락하는 것이다.
관념사 안에서 볼 때, 프로이드가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자는 아니다. 이미 라이프니츠가 지각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의식적 차원에서 선명한 지각을 갖기 이전에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미세한 지각이 있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라이프니츠는 무의식을 미세 지각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그 이후 베르그송이 또한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조금 직전에 우리의 의식에 현전시켰던 모든 기억을 생생하게 우리의 의식에 무한하게 보존시킬 수도 없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그때 그때 행동에 유효하게 사용하고 도움이 되는 기억만 가지면 된다. 사실 기억은 현전적인 한 의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한 번 지각한 것 또는 사유한 것은 저장되는데, 생생한 기억의 형태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형태로 저장된다. 만일 우리가 본 지각들을 생생하게 의식 상태에 그대로 누적한다면 우리의 의식은 무한하게 넓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의식은 저 무수한 지각들로 폭발할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베르그송은 의식 하부에 신비한 무의식의 저장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동시에 우리가 체험한 모든 것을 의식할 수도 없고 오직 시간적 질서를 따라 계기적으로 의식할 뿐이다. 결국 의식은 하나의 작은 출입문이고 그 하부에 무한한 무의식의 창고가 있다고 가정된다. 이렇게 하여 라이프니츠와 베르그송의 무의식의 정의는 현존하지 않는 것 또는 지금 의식할 수 없는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프로이드의 무의식은 의식의 부재 또는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소극적 의식을 단순히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프로이드의 무의식이란 능동적인 심적 힘이다. 따라서 프로이드에게 있어서는 의식이 무기력하고 수동적이고 타성적인 사유라면, 무의식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능동적 행동으로 실질적 사유이다. 의식적 사유도 자기 자신이 복종하는 그 나름대로의 규칙을 가지고 있듯이, 무의식도 의식적 사유 규칙과 다른 생생한 규칙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의식과 무의식은 각각 상호 독립적인 체계를 갖는다. 그러나 이 둘은 전체로서의 정신 현상에 공존하는 두 가지 양태의 기능이다. 그런데, 프로이드는 의식적 체계를 다시 전의식과 의식으로 세분한다. 결국 이렇게 하여 무의식, 전의식 그리고 의식이라는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의 첫 번째 삼분법이 도출된다. 그러나 설명 단위로서 구분되는 체계는 무의식적 체계와 전의식-의식 체계라는 이분법을 활용한다.
프로이드의 전문적 분석에 따르면, 일체의 의식적 사유뿐만 아니라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표정, 제스추어, 병적 행동, 신경병리적 행동, 꿈 등은 무의식의 드러난 상징들이다. 즉 무의식적 실질적 행동의 의미(sens en acte) 없이는 어떠한 현실적 심리 현상(상징적 의미화)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의식할 수 있고 관찰할 수 있는 행동이나 말들은 이미 상징적 의미화(signification symbolique)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적 의미화는 그 하부에 숨어 있는 의식되지 않는 실질적 행동의 의미가 드러난 모습이다. 즉 일체의 심적 생산은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무의식으로서의 이러한 실질적 행동 의미는 자기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자기를 숨긴다. 따라서 다양한 상징적 의미화들이 지시하는 정확한 실질적 행동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정신분석학적인 해석이 요구된다.
무의식이 이러한 모순적인 존재 방식을 드러낸다면, 그것은 무의식은 갈등적 대립 양상, 즉 대립적 힘들의 유희를 그의 본질로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심적 증상들은 이러한 무의식 단계에서의 모순적인 경향 내지는 힘들의 타협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사태를 설명하기 위해 프로이드는 이드(id), 자아(ego) 그리고 초자아(superego)라는 두 번째 삼분법을 상정한다. 첫 번째 삼분법과 두 번째 삼분법 사이의 관계는 이러하다. 이드는 무의식적이다. 이드를 구성하는 내용은 다양한 무의식적 욕망들, 성적 충동, 자기-보존 본능 등이다. 그런데 이드를 구성하는 이러한 다양한 요구들은 상호 대립적이다. 초자아도 무의식적이다. 초자아는 부모와 사회에 의해 강요된 금기들을 내면화하면서 구성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선천적 도덕 법칙을 지참하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사회가 강요하는 금지 조항들을 내면화하면서 소위 양심이라는 사회 가치적 자아(초자아)를 구성한다. 초자아는 무의식적 충동들의 요구가 지나치게 표출되어 주체의 존립을 위협할 때, 이들을 검열하고 억압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아는 한편에서는 무의식적 체계에 관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전의식-의식적 체계에 관여한다. 우리가 이전까지 주체라고 간주된 자기 의지적 사유 의식이 자아이다. 이런 점에서 자아는 의식적이지만, 그러나 그 자기 통일적 의식 자아는 선천적 이성도 아니며 영원불멸의 영혼도 아니라, 먼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나아가 사회적 일반적 타자에 나를 동일화시킨 무의식적 활동의 결과이다. 즉 세 가지 자아가 모두 무의식적 활동의 결과이다. 말하고 사유하는 자아는 이드적 자아의 욕구적 대립들과 초자아의 억압적 체계를 최대로 절충하여 타협적 방안을 무의식적으로 구성한다. 즉 무의식적 방어기재들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말하는 방어 기재란 완전 범죄에 상응할 수 있는 그런 완전한 속임수를 지시한다.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동이 교문 앞에서 배가 아파서 집으로 돌아와야 할 때, 의식적 자아는 배가 아프다는 것을 완전히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방어기재라는 것을 알자마자 더 이상 그것은 방어 기재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며, 이제 그보다 더 파괴적인 새로운 방어기재를 준비해야 한다. 이 세 자아들의 적절한 타협이 실패하면, 주체는 소멸의 위기를 갖는다. 신경증 환자들의 행동들은 사실은 자기의 상황에서 생존하기 위한 마지막 대안들인 것이다. 확대하면, 종교, 예술, 문학 활동들도 사실은 생물학적 요구들과 사회학적 가치들의 갈등에서 적절하게 적응하지 못한 자, 소위 사회적 부적응자들의 사회적 적응의 한 모습일 뿐이다.
2. 기호학과 주체 해체
이제 두 번째로 기호학적 경향에 의한 주체 해체의 내용을 살펴보자. 잘 알다시피,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가 제시한 인간 언어에 대한 구조주의적 해석 모델은 옐름슬레우에 의해 기호학적 모델로 일반화되었다. 그렇게 하여, 이러한 기호학적 모델은 언어에 대한 분석뿐만 아니라, 사회-문화 현상 연구의 방법론으로 확장되었다. 그런데, 언어학 연구에 고유한 협의의 기호학적 모델이든 이러한 언어학적 모델을 사회-문화적 현상의 연구에 적용한 광의의 방법론으로서의 기호학적 모델이든, 일체의 기호학적 모델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기본적인 전제 위에 서 있다.
첫째로, 언어는 랑그와 파롤로 구분된다. “파롤은 개인적이고 통시적이고 우연적이며, 나아가 단일한 과학이 다룰 수 없을 만큼 이질적”이다. 이에 반해 랑그는 약호 혹은 약호들의 집합이다. 즉 파롤에 메시지가 대응된다면, 랑그에는 약호가 대응된다. 따라서 메시지가 개인적이라면, 랑그는 집단적이다. 그리고 메시지가 시간의 통시적인 측면을 구성하는 사건들의 연속 속에 있는 시간적 사건이라면, 약호는 요소들의 집합, 즉 공시적 체계로서 시간 속에 존립한다. 그리고 “메시지는 의도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누군가에 의해 의미화된 것이다. 약호는 익명적이며 의도된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약호는 무의식적이다.” 그러나 이는 프로이드의 무의식과 다르다. 프로이드의 무의식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의식하지 못하는 “욕구”와 “충동”을 지시한다면, 랑그로서의 무의식은 비리비도적이며 문화적인 구조로서의 무의식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대립은 파롤로서의 메시지는 자의적이며, 우연적이다. 그러나 랑그로서의 약호는 체계적이며, 주어진 언어 공동체에 대해서 강제적이다. 이 때문에 언어학의 대상은 랑그이다. 그리고 랑그는 문집의 형태로 주어져 있는 사회적 약정 체계이기에, 랑그의 과학으로서의 언어학은 경험과학이다. 그러나 여기서 “경험적”이라는 용어는 단지 관찰 가능성의 우선적 역할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귀납적 조작들을 자기의 하부에 종속시키는 연역적 계산을 인정한다. 결국 언어학을 공시적 언어학과 통시적 언어학으로 구분할 때, 랑그의 언어학이 공시 언어학이라면, 파롤의 언어학은 통시 언어학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것은 상대적인 것이기에 절대적 객관성과 보편성을 이상으로 하는 과학의 이상에 부합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파롤의 언어학은 언어학에서 거의 무시되었다.
둘째로, 랑그의 체계에 한정하여 분석할 때, 문제의 그 체계에 속해 있는 그 어떠한 요소도 절대적인 요소는 없다. 즉 일체의 요소들은 상호의존적 관계에서만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언어는 상관관계적 형식일 뿐, 결코 어떠한 실체를 지시하거나 실체 자체가 아니다. 따라서 언어 속에는 오직 차이들만이 있다. 즉 일체의 언어적 표현들은 어떤 실체를 그 자체적으로 온전히 지시하거나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용어를 둘러싼 다른 용어들과의 대립성과 차이성의 조건에서만 소극적으로 모종의 대상을 지시한다. 즉 음운적 단계에서 “어”는 “아”와 “오”의 대립 속에서만 변별력을 행사할 수 있듯이, 어휘적 단계에서 “어머니”는 “아버지” 또는 “아들” 등과의 대립 속에서 모종의 의미를 제시할 수 있을 뿐, 그 자체가 직접 외적으로 실존하는 구체적 여인을 온전히 지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이중적 자의성 개념이다. 우선 외적 사물과 기호는 직접적 필연적 관계가 없다. 즉 “개”라는 소리와 글자는 외적 실존물로서의 구체적 “개”와 아무런 필연적 관계가 없다. 즉 언어는 약정적 체계일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언어 기호 내에서 기호는 “기표”(능기)와 “기의”(소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분석할 수 있다. 즉 기호 형식과 기호 내용 사이에도 아무런 필연적 관계가 없다. 즉 “개”라는 소리 또는 글자의 모습이 그것이 지시하는 의미, 즉 “네 다리를 가지고 있는 포유동물로서 애완 또는 식용으로 사용되는 가축”이라는 의미와 구조적 측면이나 형상적 측면에서 어떠한 필연성도 없다.
셋째로, 그런데, “개”의 의미를 구성하고 있는 이 표현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또 다른 표현들일 뿐 그 자체 아무런 실체들도 아니다. 즉 기의란 사실 상대적 구분일 뿐, 사실은 다른 종류의 기표일 뿐이다. 즉 우리가 의미라고 생각한 것은 기표의 기표이다. “외적 세계”, “본질”, “원초적인 것”, “체험”, “경험” 등은 언어로 번역되기 전의 어떤 대응물이 아니라, 언어적 기호가 구성한 또 다른 기표이다. 이런 맥락에서 “기표 우선성” 또는 데리다의 “흔적” 개념 등이 유래했다. 확장하면, 세상만사는 기표들의 유희이다. “기호학적”이라는 용어는 바로 “기표주의적”이라는 용어와 거의 교환적이다. 즉 기호학에서 정의하는 광의의 기호 개념은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자연적 현상으로서의 “지표”, 자연적 현상을 생략하거나 축소시킨 따라서 상대적으로 자의성이 거의 없는 “아이콘”, 도로 표지판이나 몰스 부호처럼 자의성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신호 체계” 또는 “상징 체계”, 그리고 완전히 자의적 관계인 “언어적 기호”를 포괄한다.
넷째로 따라서, 주체란 단순한 기호적 대립이 만든 하나의 기호일 뿐이다. 우리의 일체의 사유는 기호에 의존해서만 가능하기에 순수 의식, 순수 사유, 정신, 주체 등도 단순한 관계 개념이다. 즉 아버지의 의미가 어머니, 아들 등의 관계를 떠나서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듯이, 주체나 정신도 물질 등과 같은 대립적 기호에 의해 발생되는 기호 대립적 가치만 가질 뿐이다.
3. 유물론과 주체 해체
유물론적 전통에서 주체 해체는 스피노자의 기계론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어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를 경유하면서 심화되어 알튀세르의 우발적 유물론에서 그것의 완성된 개화기를 맞이할 것이다. 그러나 논자는 알튀세르의 마르크스 해석에서 구성된 주체 해체의 내용만 간단히 살펴보는 데 만족하고자 한다.
우선 알튀세르가 해석하는 마르크스의 반인간주의에 대해서 말하자면, 마르크스는 사회적 생활로부터 독립적인 의지의 자유 주체로서의 인간 혹은 인간의 본질 개념을 더 이상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논의의 장에서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마르크스 그 자신의 모든 논의를 사회학적 전체성의 인과성에서 진행시키지, 여기에 인간학적 본질들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는다. 즉 알튀세르는 라깡이 심리학적 차원에서 심리학적 자아 개념의 허구성을 잘 해명했듯이, 마르크스는 사회학적 차원에서 사회적 자아의 허구성을 잘 해명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유주의 인간 개념에 따르면 나 스스로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사회적 삶에 참여하거나 거부하거나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사회적 행동들의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주관 자신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행동은 사회적 구조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성, 선험적 자아 등은 언어적 상징적 관념의 산물이고, 인간은 사회적 환경 속에서 살아 남으려고 투쟁하는 생물체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들의 사유란 대부분 자기의 육체를 존속시키려는 생존적 전략들이다. 이런 점에서 이데올로기적 환상에 대한 비판 위에서 성립되는 인간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인과성의 무지에 대한 스피노자의 비판, 상상적 단계 또는 상징적 단계에서 구성된 환상적 이상적 자아 개념에 대한 라깡의 비판, 인간의 종말을 고하는 푸코의 비판에 대응될 수 있다고 알튀세르는 평가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알튀세르가 해체한 것은 목적론적, 선험적,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주체 개념이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현실적 주체, 즉 생물학적, 심리학적 그리고 사회학적 장 안에서 행동하는 개인이 아니다. 오히려 쾌락과 부를 의욕하고 분노를 느끼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출세를 지향하는 구체적 상황에서의 개인, 소위 실존적 주체를 강조한다. 그의 “실천”이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실존적 주체의 다른 표현이다. “실천은, 항상 자기자신의 존재조건들에 종속하는 전화의 과정이다. 이 전화의 과정은, 자신의 존재조건들의 장 바로 그 안에서, 유일 절대의 진리가 아니라, 절대적일 수 없는 복수의 진리들 또는 부분적인 진리를 생산하는, 말하자면, 결과들 또는 인식들을 생산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실천은 담지자들을 갖지만 자신의 목표, 기획의 존재론적 또는 선험적 기원으로서의 주체를 갖지 않으며, 자신의 과정의 진리인 목적을 갖지도 않는다. 그것은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이다.” 우리 각자는 우리의 생의 구체적 과정의 전체이다. 그러나 이 생적 현실, 즉 실천적 전체 과정은 아무리 탁월한 문필가도 아무리 전체적인 개념도 드러내거나 표상할 수 없을 것이다. 전통적인 우리의 이성, 선험적 주체, 영혼 개념은 조야하게 말하면, 귀신 개념에 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알튀세르가 해체하고자 하는 것은 영원불멸의 이러한 영혼 개념으로서의 주체이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서로 의사소통하고 의지적 결단을 내리는 그런 구체적 개인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의지적 결단이란 사실 유기체의 생적 본능으로 환원할 수 있고, 유기체의 모든 과정은 선적 인과성은 아니라 할지라도 구조적 인과, 생물학적 차원이든 심리학적 차원이든 혹은 사회학적 차원이든, 소위 중층결정으로 환원하여 설명할 때 우리는 보다 과학적 설명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 실체란 생존의 공동 장인 사회 안에 있는 개별적인 생물학적 인간 종들에게 이데올로기의 작용이 만들어 낸 효과이다. 말하자면, 라깡의 정신분석학과 푸코의 고고학이 잘 해명하듯이, 주체란 거울적 현상들의 실재성을 믿는 상상의 환상 또는 언어적 상징체계가 만들어낸 개념적 체계에 대응되는 어떤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는 착각에 기인한다.
V. 리쾨르와 주체성 복원의 전략들
리쾨르의 주체성 복원의 전략은 그 용어의 가장 철저한 의미에서 변증법적 방법과 역사 비판적 방법을 활용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리쾨르는 데까르트적 코기토의 명증성, 칸트와 싸르트르에 의한 자기 의식과 자기 인식의 분열적 구조, 그리고 급기야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 의한 무의식 개념, 구조주의 언어학에 의한 주체 해체, 알튀세르에 의한 인본주의의 이데올로기 비판 등의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너무나 잘 인식하고 있다. 주체 개념의 이러한 역사적 운명에도 불구하고 리쾨르는 어떻게 그것을 다시 복원하려고 시도하는가? 그 방법은 역사-비판적 방법과 변증법적 방법을 종합하는 리쾨르식의 방법, 소위 해석학적 방법이다. 즉 그는 한편에서는 데까르트적 코기토에 대한 칸트적 비판의 의미를 인정한다. 그러나 칸트적 해석은 오직 한 측면의 해석이다. 즉 인식론적 해석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해석의 결핍을 피히테와 나베르에 의한 존재론적 해석으로 보완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후설의 지각의 현상학에 의한 주체의 해석의 결핍을 리쾨르 자신의 의지의 현상학으로 보완한다. 그리고 피히테와 헤겔에 의한 관념론적 주체 해석의 결핍을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 의한 유물론적 해석으로 보완한다. 그리고 정신분석학적 해석의 결핍은 구조주의 언어학에 의한 주체 해석에 의해 보완되고 다시 구조주의 언어학(기호학)에 의한 주체 개념의 결핍은 리쾨르 자신의 담화의 언어학(의미론)에 의해 보완된다.
이러한 그의 역사비판적 변증법의 주요 내용들을 분석하기 전에 설명과 이해의 편이를 위해 우선 리쾨르로 하여금 주체 개념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을 추진케 한 그의 근본적인 신념을 요약하는 것이 좋겠다. 첫째로 리쾨르에 있어서 주체는 완결되어 있는 실체가 아니다. 둘째로 우리는 주체를 직접적으로 직관할 수 없다. 셋째로 따라서 시간과 역사에 따라 드러나는 다양한 모습들을 통해 우리는 주체를 이해해야 한다. 넷째로 이해한다는 것은 직접적 담화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학적 논의의 장에서의 이해란 본질적으로 텍스트를 독서하는 것이다. 즉 텍스트 해석이 중요한 문제이다. 이렇게 하여 그의 해석학적 방법이 탄생한다. 다섯째로 직접적 담화이든 텍스트에 의한 독서이든 일체의 사유의 운동은 언어 기호에 의해 진행된다. 따라서 주체의 이해는 주체가 수행하는 담화들과 그것들의 역사적 결과들인 텍스트들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텍스트들에 대한 분석은 다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즉 기호학적 분석과 의미론적 분석이다. 이 양자는 철저한 배타적 관계이면서 동시에 상호의존적 관계이다.
1. 인식론적 주체와 존재론적 주체
이제 주체성 복원을 위한 리쾨르의 첫 번째 전략을 살펴보자. 이 첫 번째 전략은 데까르트의 코기토에 대한 칸트, 후설, 하이데거에 의한 인식론적 해석과 이것에 상반되는 피히테, 나베르에 의한 존재론적 해석을 해석학적으로 종합하는 것이다. 코기토에 대한 인식론적 해석의 요점은 이미 앞에서 충분히 분석되었기에 여기서 더 이상 분석할 필요는 없겠지만, 다시 간단히 요약하면, 자기 의식이든 대상 의식이든, 일체의 사유에 이미 자기 의식이 동시에 동반되지 않은 의식은 없다는 차원에서 ‘나’는 모든 의미의 담지자이며 일체의 인식의 중심이다. 즉 나의 의식과 나의 인식 사이에 완전 일치는 없다손 치더라도, 인식에 관한 한 ‘나’ 없이는 어떠한 논의도 의미가 없다. 일체의 것은 나의 사유이다. 따라서 나의 존재도 나의 사유이다. 즉 나는 사유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
그런데, 코기토 개념에 대한 이러한 해석과 완전히 상반되게 해석한 자들을 리쾨르는 관념사 안에서 찾아내는데, 그들이 피히테와 장 나베르이다. 데까르트의 코기토에 대한 후자들의 독서법에서는 데까르트적 코기토는 더 이상 인식론적 주체가 아니라, 완전하고 충만한 밀도(density)에서 “나는 존재한다”는 것의 확인이다. 즉 리쾨르에 따르면, 피히테에 있어서, 자기 정립이란 존재 정립이면서 동시에 사유 활동의 정립이다. 즉 여기서는 사유가 존재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는 존재와 동시적이다. 즉 나는 나의 존재를 정립하는 유일한 방법이 사유이다. 나에게 있어서 존재하는 것은 사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데까르트에게 있어서 주어인 사유는 술어가 되고 술어인 존재가 주어가 된다. 얼핏 미묘한 차이인 것 같지만, 분석하면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진리에서는 나의 존재는 주관적 확실성만 보장할 뿐 어떠한 객관적 확실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데까르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지만, 다시 순환성의 오류에 빠졌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사유한다”는 것을 피히테는 첫 번째 진리라고 했다. 여기서는 나의 존재가 우선이고 그 존재가 드러나는 유일한 방식이 사유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피히테도 데까르트와 같이 나는 내가 사유하는 것만큼 존재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리쾨르는 피히테의 이러한 존재론적 진리는 아직 불충분하며 따라서 자기의 해석학적 해석에 의해 다시 보완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피히테 그 자신이 이 첫 번째 진리를 명제적 진리라고 했듯이, 이는 경험적 사실도 아니며, 연역적 결론도 아니라, 단순한 명제적 한 표현, 심지어는 영원히 정복불가능할 정도로 공허하고 텅 빈 한 문장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첫 번째 진리는 오직 반성(사변) 속에서만 자기의 진리성을 정립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피히테의 존재론적 해석을 달리 반성 철학이라고 말한다.
리쾨르도 철학의 출발은 반성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긍정한다. 그러나 리쾨르는 이 반성을 어떤 과학적 진리의 정당화 또는 어떤 절대적 윤리의 정당화을 위한 도구로 간주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발생시키고 드러내는 끊임없는 노력들을 이해라는 과정으로 해석한다. 이 이해를 리쾨르는 전문 용어로 전유 또는 재전유(reappropriation)라고 말한다. 일체의 과학들과 다양한 인식론들도 이러한 광의의 전유적 과제의 한 부분, 즉 존재론적 과제의 한 부분일 뿐이다. 말하자면, “나는 존재한다”는 이 진리성의 정립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공허한 한 명제일 뿐이다. 이 진리성에 의미를 주기 위해서는 나의 구체적인 경험 내용들을 부여해야 한다. 여기서 이러한 구체적 경험 내용을 부여하는 과업을 수행하는 장본인이 바로 반성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반성 철학을 의식에 관해 탐구하는 철학으로 사용하면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의식 그 자체 미리 온전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반성에 의한 능동적인 작업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를 데까르트의 코기토에 적용하면 이러하다. 말브랑쉬가 데가르트에 반대하면서 나의 자아와 나의 행동들에 대한 직접적 포착이란 명증적 관념이 아니라, 단순한 정서일 뿐이라고 주장할 때, 말브랑쉬는 옳다고 리쾨르는 해석한다. 왜냐하면, 나는 처음부터 온전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씨앗이 시간의 경과를 통해 점진적으로 떡잎이 나고, 줄기가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하듯이, 이러한 전체적 과정 속에서 한 부분적 인식을 가지고 전체를 직관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는 것이다. 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즉 의식의 흐름에 따라 부분적 단편으로만 드러난다. 그러나 그렇게 드러난 나는 사실 이미 사물화되고 대상화되고 의식화된 부분적 나이지 전체적 온전한 나는 아니다. 즉 나는 나의 모든 단편적 표상들 속에도 그러한 다양한 표상들의 연합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대상들 속에 나를 잃어버렸다. 나의 조건은 망각의 조건이다. 따라서 반성 철학은 대상들 속에 잃어버리고 망각된 나를 찾아내어야 하는 과제를 갖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의 반성 철학은 플라톤과 스피노자의 철학 이념에 연결된다. 즉 지식의 근원(반성적 사유)을 플라톤은 에로스라고 했고 스피노자는 욕구라고 했다. 왜 우리는 반성을 하는가? 그것은 우리 자신을 알고자 하는 욕구이며 곧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들 속에 상실되고 망각되어 있는 흔적들에서 나 자신의 원형을 찾아내려는 노력이다. 나의 이러한 노력은 결코 충족될 수 없기 때문에 영원한 욕구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는 단순한 존재 결여가 아니라, 단편적이긴 해도 모종의 존재 정립이기 때문에 의미 있는 노력이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는 이 첫 번째 진리도 욕구와 노력이라는 반성 철학의 두 견인차에 의해 생산된 결과이다. 따라서 반성철학의 과제의 관점에서 볼 때, 철학은 소외에서 나를 구원하고 해방시키는 것이다. 플라톤이 철학을 애지학이라고 하고 스피노자가 철학을 윤리학으로 명명한 이유도 바로 여기, 즉 반성 철학의 과제에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데까르트, 스피노자, 칸트, 피히테, 나베르, 헤겔, 후설, 하이데거 등의 철학자들 중에는 인식론적으로 전향된 자들도 있고, 존재론적으로 전향된 자들도 있고, 데까르트처럼 둘 영역을 대등하게 고려하는 자들도 있지만, 이들은 모두 광의의 의미에서 반성철학자들이고 내성법을 그들의 철학의 중요 방법론으로 사용했다. 물론 이들 모두 직관적 태도와 논리적 엄밀성을 강조하지만, 그들의 직관이란 이미 명제화된 진술들이며, 그들의 논리란 심리적 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결과 이들은 우리의 의식적 반성이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직접적 직관도 아니며, 자기-투명성도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이를 자각케 한 역사적 계기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과 현대의 구조주의 언어학이다. 즉 우리의 의식은 그 자체 투명한 것도 아니며 명증적 직관도 아니다. 우리는 그 근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의식을 항상 만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의식이 어떠한 의식이든 이미 기호로 배열되지 않은 의식은 우리에게 의미가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의 결과를 따라,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면, 현재에 드러난 이러한 모든 의식들은 무의식의 그 무엇이 발생하고 드러난 모습니다. 드러나려 하고 모습을 내밀려고 하는 무의식의 이러한 노력들 혹은 욕구들을 우리는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반성이란 존재하려는 우리의 노력과 욕구에 대한 전유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유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기호를 사용하지 않고 우리는 어떠한 이해도 갖지 못한다. 그러나 기호는 애매하고 모호하며 다의적이다. 뿐만 아니라,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무의식은 의식적 기호로 드러나면서 자기의 본래적 의미를 숨기면서 드러난다고 한다. 해석학이 요청되는 것은 바로 여기이다. 즉 이렇게 하여 반성철학과 해석학의 상호 의존성이 요청된다. 즉 언어적 의미의 다의성과 해석의 수다성은 반성에 의해 종합되어야 하지만, 일체의 반성은 언어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다양한 사회의 다의적 기호들의 사용법과 문화의 의미를 해석하는 해석학에 다시 의존해야 한다.
2. 관념론적 주체와 유물론적 주체
a. 지각의 현상학과 의지의 현상학
반성철학 내부에서 인식론적 경향과 존재론적 경향은 정립과 반정립의 관계에서 철저하게 종합되어야 한다면, 그렇게 종합된 상위의 반성철학 그 자체는 일종의 관념론 철학(정립)으로 이는 다시 정신분석학과 구조주의적 언어학을 그 하부 구조로 가지는 유물론적 철학(반정립)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극단화된 관념론과 극단화된 유물론 그 중간에 현상학과 이것의 연장인 실존주의 철학이 있다. 이에 리쾨르는 후설의 현상학에 의해 해석된 주체의 개념을 정립하고서 이것의 반개념으로 자기의 의지의 현상학에 의해 구성된 주체 개념을 다시 대비시킨다. 즉 리쾨르에 따르면, 후설은 주체를 그 무엇보다도 표상활동으로서의 의식으로 해석한다. 즉 후설에게 있어서 주체란 객관화하는 활동성이며, 주체와 지각 활동은 거의 교환적이다. 그렇게 하여 후설의 현상학은 지각의 현상학이다. 정감적 정서나 의지 등은 이러한 표상적 지각 활동, 즉 객관화하는 활동 그 다음에 주어지는 부차적인 것이다. 그러나 리쾨르는 표상적 지각이 일차적인 것이고 정감이나 의지는 이러한 표상적 지각 위에서만 존립할 수 있다는 후설의 입장은 편견이라고 주장하면서 정감적 체험 또는 의지적 체험 등은 그 자체 지향적 분석의 대상일 수 있으며 또한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렇게 하여 1950년에 출판된 그의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은 바로 후설의 지각의 현상학에 대비되는 의지의 현상학을 전개시키려는 야심을 보여준다. 리쾨르에 따르면, 의지란 “결단”, “행동” 그리고 “동의” 등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의지는 객관화하는 활동인 표상 활동보다도 더 근원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지야말로 비의지적인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조명이다. 즉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 사이의 상호적 관계는 자유와 자연, 의식과 신체라는 전통적인 문제를 새롭게 정립하게 한다. 코기토의 경험, 그것을 데까르트는 완전한 자유의 경험으로 말한 바 있는데, 그러나 온전한 전체로 체험된 코기토는 “나는 욕구한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지향한다” 등의 지평을 포함한다. 그런데, 의욕, 가능성, 지향성 등은 신체의 의욕이고 신체의 가능성이고 신체의 바램이다. 내가 어떤 바램이나 가능성을 포착한다면, 그것은 나의 육체와의 관계성을 제외하고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즉 내가 자유적 의지로서의 코기토를 경험한다면, 그것은 바로 비의지적이고 부자유적인 신체로서의 나의 존재를 동시에 체험하는 것이다. 결코 주체성이라 하는 것은 의지적 구조와 비의지적 구조를 동질화하기 위한 공통 지반인 것이다. 기획하고 결단하고 행동하고 자기의 세계-내-존재의 처지를 동의하고 수용하는 능력이 의지라면, 이러한 모든 결단력의 동기들의 근원은 신체이다. 결국 신체는 힘의 중심이며 모든 의지적인 것들의 동기화의 근원이다. 그러나 이 신체는 비의지적이다. 그러나 나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한 요소이다. 이러한 의지의 현상학은 표상활동 개념으로 환원된 후설적 코기토 개념의 편협성을 벗어나 데까르트의 코기토 개념을 그 완전한 밀도에서 재복원시키는 계기를 마련한다고 리쾨르는 평가한다. 의지의 현상학에 의해 정립된 이원론, 즉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의 이원론은 정신과 육체라는 전통적인 존재론적 이원론을 극복하고 존재의 이원성, 즉 한 존재의 두 속성으로서의 이원론을 강조한다. 이런 지평에서의 인간의 자유란 능동성이면서 동시에 수동성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의존적 독립, 독립적 의존이 바로 인간 자유의 본질이다. 물론, 리쾨르의 의지 개념의 형성은 실존주의자들인 마르셀, 싸르트르 그리고 야스퍼스와 인격주의자인 무니에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b. 정신의 목적론과 주체의 원형학
정신의 목적론적 경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의지의 현상학은 다시 주체의 원형학(정신 분석학)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 즉 지각의 현상학을 보완 극복하고 있는 의지의 현상학의 단계에서도 주체는 아직 추상적이고 관념론적이다. 그러나 이는 프로이드에 의한 주체의 원형론(archeology of subject)에 이르러서는 주체의 비자율성, 주권 상실, 노예성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정신분석학에 의한 주체 개념 해체의 구체적 내용은 이미 앞장에서 충분히 분석했으므로 여기서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지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한 사실은 이것이다. 주체성의 완전한 복원을 위해서 적절한 절충적 타협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리쾨르의 입장이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프로이드적인 이러한 주체의 원형론에 의해 해명된 유물론적 주체 개념은 관념론적 주체 개념의 극단적 모습인 헤겔의 목적론적 주체 개념에 의해 다시 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헤겔의 주체 개념이 미래 지향적 목적론적 분석에서 구성된다면, 프로이드의 주체 개념은 인과적 퇴행적 분석에서 구성된다. 즉 헤겔은 우리의 현재의 행동을 결정하는 원인은 미래적 가치, 즉 목적인이라고 주장한다면, 프로이드는 바로 직전의 전체성의 구조, 즉 기계론적 원인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주체의 원형학을 정당하게 언급하게 하는 욕구의 우선성 또는 원형성은 의식, 언어, 상징적 기능 등을 욕구의 일차성에 종속시키게 한다. 말하자면, 의식적으로 의지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립하기 이전에 우리의 욕구가 우리를 정립시킨다. 이러한 사태는 헤겔의 목적론적 주체 개념의 자율성을 무색케 한다. 그러나 이는 리쾨르의 해석학의 관점에서는 새로운 의미로 해석된다. 즉 본능이 의지적 자각에 선행한다는 것은 한편에서는 기계론적 관점의 승리나 주체의 노예성을 지시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반성적 지평에 대한 존재적 지평의 우선성을 지시한다. 즉 ‘나는 사유한다’는 것에 대한 ‘나는 존재한다’는 것의 우선성을 지시한다. 이 말은 ‘내가 말한다’는 것보다는 ‘내가 있다’는 것이 보다 더 근본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데까르트적 코기토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경유하면서 관념론적 해석에서 존재론적 해석으로 방향을 바꾸게 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c. 기호학에 의해 조명된 정신분석학과 유물론
여기서 리쾨르의 해석학은 이제 인간 개념은 이 양 계기를 다 포함하는 것으로 주장하려고 한다. 인간은 신체적 조건과 목적 지향성의 전체이다. 나의 현재의 행동은 신체적 욕구이기도 하고 의지의 지향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체의 존속의 욕구의 현실적 실현은 마르크스와 함께 다시 사회학적, 사적 유물론적 주체 개념으로 확장된다. 결국 리쾨르는 진정한 주체, 즉 해석학적 주체는 무의식적 욕구와 사회학적 전체성에 의해 다시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목적론적 주체 개념과 유물론적 주체 개념을 직접적으로 종합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추상적 관념론적 사변일 뿐이다. 이에 목적 개념과 무의식 개념을 매개하고 통일시켜 줄 새로운 매개자를 리쾨르는 상징 기호론, 즉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발견한다. 이를 위해 일단 리쾨르는 메를로-퐁티의 프로이드 해석을 높이 평가한다. 메를로-퐁티는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프로이드의 이러한 구분을 정신과 육체라는 전통적 이분법의 단순한 연장으로 간주하는 것은 프로이드를 잘못 본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사실 프로이드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결정적인 경계벽을 설정하지 않는다. 이드와 초자아는 결정적으로 무의식이고 자아는 결정적으로 의식인 것이 아니다. 자아의 대부분도 무의식이다. 그리고 이드와 초자아의 의식화가 자아라면, 사실 이드와 초자아도 의식가능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드, 초자아 그리고 자아 사이의 구분과 의식과 무의식의 구분 그리고 이들 다섯 변이들 사이의 관계는 설명의 편리를 위한 상대적 구분일 뿐이다. 그리고 알랭과 같이 프로이드의 “무의식은 무시무시한 동물성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인간을 천사적 본성과 동물적 본성이라는 이분법의 관점에서 고려하면서 프로이드의 인간관을 생물학주의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사실 프로이드의 무의식은 다른 나이며, 랭보가 말하는 것처럼 “나는 타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우리의 의식 안에서 기만적인 무의식의 계략과 환상만을 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리쾨르는 말한다. 즉 우리의 의식은 오직 기만적인 무의식의 속임수일 뿐 거기에 더 이상 어떠한 진실도 없기 때문에 의식을 인간의 인간성의 본질로서 간주하는 모든 입장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사실을 망각한 것이라고 리쾨르는 주장한다. 즉 일체의 무의식적 사유는 그 자체 무에서 갑자기 탄생한 것이 아니라, 광의의 의미 체계이다. 그런데 일체의 의미들은 언어적 기호들에 의해 구성되며, 일체의 기호 체계들은 주체의 담화사용에서 주어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의미를 지참하지 않고는 어떠한 무의식적 체계도 불가능하며, 일체의 의미의 담지자는 기호이다. 그런데, 기호 그 자체는 스스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고안하고 사용하는 근원적 작인은 인간적 주체이다. 즉 일체의 무의식은 광의의 인류학적 주체 개념을 다시 전제한다. 결국 이러한 역사적 과정은 순수 이성적 합리성으로서의 주체 개념 또는 인식론적 주체 개념이라는 전통적인 주체 개념이 프로이드의 무의식 개념을 통하여 완전히 해체된 것이 아니라, 프로이드의 타자로서의 무의식을 일종의 변증법적 반개념으로서 수용하면서 보다 확장된 주체 개념을 구축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리쾨르는 해석한다. 이제 주체는 순수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비합리성을 동시에 지참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인간을 신체와 정신이라는 이원적 복합실체로 간주하는 전통적인 이원론을 다시 받아들이자는 것은 아니다. 신체의 정신성과 정신의 신체성이라는 말이 함축하듯이, 양자는 오직 하나의 주체를 설명하기 위한 언어 기호적인 두 개념일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리쾨르는 관념론적 주체 개념은 알튀세르에 의한 유물론적 주체 개념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기호학에 의해서든, 정신분석학에 의해서든, 유물론에 의해서든, 일체의 해체는,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새로운 관점에서 종합적 구성을 위한 예비적 단계일 때에만 의미가 있다. 이런 차원에서 알튀세르의 주체 해체도 해석학적 현상학에 의해 다시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리쾨르에 따르면, 알튀세르의 주체 해체는 다음과 같은 논리적 구조에 근거한다. 인본주의는 이데올로기이다. 그런데 인본주의를 구성하는 중심개념은 주체 개념이다. 따라서 주체 개념은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장본인이다. 말하자면, 주체 개념과 이데올로기 개념은 상호 구성적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 해체는 바로 인본주의 해체이며 그것은 바로 주체 개념 해체라는 것이다. 조금 뒤에서 리쾨르는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이데올로기가 거울적 단계의 상상력에, 예속된 주체에 연결되어져야만 한다면, 국가적 장치에 저항할 수 있는 진정한 시민적 주체를 가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나는 알 수 없다.” 말하자면, 우리의 주체가 환상적이고 허구적이라면, 국가 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힘과 환상적 이데올로기로부터 단절할 수 있는 힘을 어떻게 우리가 가질 수 있는가? 라고 그는 반문한다. 뿐만 아니라, 알튀세르에 있어서는 모든 이데올로기는 해체되어야 하기 때문에, 일체의 인식론적 주관도 해체되어야 하며, 따라서 알튀세르에게는 인식론적 주관의 변증법적 발전도 없다는 것이다. 사실, 보편적 인식론적 주관이 없다면, 우리 인간들 사이에 대화와 교류가 어떻게 가능하며, 또한 의지의 자유 주체가 없다면 인식론적 단절이나 혁명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결국 리쾨르는 자기와 알튀세르 사이의 이러한 대립은 근본적으로 상징체계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근거한다고 해석한다. 리쾨르는 우리의 언어적 상징 체계가 실재 그 자체와 분명 다르고 따라서 실재와 기호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심연이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상징적 기호 체계와 이 기호 체계의 일반적 속성을 매개로 하지 않고는 실재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징적 체계가 아무리 실재와 다른 차원이라 할지라도 실재에 대한 우리의 근원적 체험과 무관할 수는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알튀세르의 ‘실천’이라는 용어도 이미 철학적 인류학의 범주 안에서가 아니라면 달리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부터 과학적인 것을 구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인 배경이 아니라, 인류학적인 배경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류 인식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참 인식을 배경으로 가질 때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근본적인 것은 “상징적 행동 이론”이라는 것이다. 즉 프로이드의 무의식 이론도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도 “동기와 상징을 포함하는 철학적 인간학”의 배경에서만 이해 가능적이라는 것이다. 리쾨르가 여기서 말하는 철학적 인간학이란 결국 자유 의지로서의 주체, 실재와 무관하지 않는 근본적인 체험 그리고 그 체험의 기호화인 상징 등을 긍정하는 개념이다.
3. 기호론적 주체와 의미론적 주체
그것이 직관 철학이든 반성철학이든, 지각의 현상학이든 의지의 현상학이든, 주체의 원형학이든 정신의 목적론이든, 포괄적으로 말해서 관념론이든 유물론이든, 이러한 모든 이론들은 언어적 상징 기호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이론들이 모종의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기호학적 구조에로 다시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주체 문제까지 포함해서 일체의 것이 언어적 유희의 산물, 즉 단순한 언어 게임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데리다식의 해체론을 리쾨르는 거부한다. 그러나 우리가 언어적 기호를 사용하지 않고는 어떠한 의미 있는 객관적 사유도 교환할 수 없기 때문에 언어 바깥에 세계 실체와 인간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 그 자체 이미 언어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주체성의 복원을 위한 리쾨르의 전략의 가장 어려운 상황은 바로 기호론적 저항에 있다.
잘 알다시피, 이 기호론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소쉬르의 랑그의 언어학이다. 이에 리쾨르는 이러한 랑그의 언어학에 저항하기 위한 한 반명제로 담화의 언어학을 제안한다. 따라서 담화의 언어학은 리쾨르에 고유한 한 특별한 의미론이다. 조금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소쉬르는 언어를 구성하는 두 차원, 즉 랑그와 파롤을 구분했지만, 랑그만이 언어학의 대상이 될 수 있고, 파롤은 언어학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랑그는 보편적, 공시적, 불변적, 동질적, 구조적이라면, 파롤은 개별적, 통시적, 가변적, 이질적, 사건적(발생적)이기 때문이다. 즉 발화 사건으로서의 파롤은 일시적 발생이고 따라서 발생되자마자 시간과 함께 사라진다. 그러나 그 어떠한 파롤도 의미 있는 파롤이 되려면, 그것은 자기의 가능성의 토대인 사회적 인습 체계인 랑그의 규칙에 의존해서만 기능할 수 있다. 따라서 랑그만이 그가 가지고 있는 공시적 체계의 구조적 특성으로 때문에, 언어 과학의 유일한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리쾨르는 소쉬르가 버린 이 파롤도 언어학의 한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파롤이라는 이 용어를 담화라는 용어로 대체하면서, 담화의 언어학을 제창한다. 나아가 리쾨르는 소쉬르적인 랑그의 언어학을 기호학이라고 하고, 자기의 담화의 언어학을 의미론이라고 정의하면서, 양자를 대비시킨다. 리쾨르에 따르면, 이 담화가 랑그의 언어학보다 더 근원적인 언어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근거는 담화의 존재론적 선착성, 담화의 사건성과 명제성의 변증법, 담화 의미(meaning)의 두 측면인 관계 의미(sense)와 지시 의미(reference) 사이의 변증법, 그리고 말하기로서의 담화에서 글쓰기로서의 담화에로 발달될 때, 등장하는 이해와 설명의 변증법, 그리고 명제, 은유, 상징 그리고 주체의 생적 체험 사이의 상호 의존성과 순환성에 근거한 변증법 등을 심오하게 해명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결국 리쾨르는 소쉬르 이후 발전되어 온 기호학적 모델은 언어학에서 “약호를 다루기 위해 메시지를, 체계를 다루기 위해 사건을, 구조를 다루기 위해 의도를, 그리고 공시적 체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조합의 체계성을 위해 행위의 자의성”을 괄호치고 무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리쾨르는 구조주의적 언어 이론을 무시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조주의는 이 시대의 최고의 과학이라고 평가한다. “구조주의는 과학에 속한다. 현재로서는 나는 구조적 방법보다도 더 엄밀하고 더 유용한 어떠한 접근법을 알지 못한다 (…) 해석학이 상징체계 안에 매달려 있는 의미를 해명한다고 고려된다면, 해석학은 구조적 인류학의 작업을 해석학의 상반자로서가 아니라, 오직 해석학의 지지자로서 만난다.” 그리고 리쾨르는 데카르트적 코기토도 후설의 현상학적 기술도 기호학적 조건의 제한 한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즉 우리들의 일상적인 세계 개념과 주체 개념은 처음부터 직접적으로 직관된 것이 아니라, 언어적 상징의 산물임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처음에 거리를 두고 지지된 것과 검토된 것만을 오직 전유한다.” 따라서, 리쾨르의 해석학적 현상학은 구조주의 언어학의 모든 성과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주의 언어학이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한 “메시지”, “사건”, “의도”, “행위”의 측면을 언어 이론에서 새롭게 부각시키려고 노력할 뿐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리쾨르는 담화(Discours)의 언어학을 제창한다. 여기서 말하는 담화란 문장(Phrase, sentence)보다는 다소 외연이 넓지만, 담화를 구성하는 대부분이 문장이기에 일단은 문장과 거의 교환적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리쾨르는 구조주의 언어학은 진정한 담화의 언어학을 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 구조주의 언어학이 문장론, 즉 통사론과 문장의 의미를 탐구하는 의미론을 해명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조주의 언어학은 음소들이 모여서 어휘가 되고 어휘가 모여서 다시 문장이 되고, 문장의 의미는 계열체적 관계(la relation paradigmatique)와 결합체적 관계(la relation syntagmatique)라는 두 관계 축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리쾨르는 “음소에서 어휘소로, 다시 문장으로, 나아가 문장보다 더 큰 전체로 이어지는 단선적인 진행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문장은 좀 더 크거나 복잡한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실체이다. 문장이 단어들로 분해될 수는 있다. 그러나 단어들은 짧은 문장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다. 문장은 그 부분들의 총합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전체적인 그 무엇이다 (…) 문장은 기호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자체는 기호가 아니다.” 따라서 문장을 어휘로 어휘를 다소 음소로 환원하는 구조주의 통사론과 의미론은 기호학의 범주에 속할 뿐, 진정한 문장의 의미를 탐구하는 의미론이 아니다. 진정한 문장론 그것은 어휘나 음소로 환원될 수 없는, 따라서 이들 지평과는 전혀 다른 지평의 새로운 전체성을 해명하는 작업이다. 이런 맥락에서 담화론과 의미론은 교환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의 의미론의 과제를 수행하고자 하는 것이 리쾨르의 해석학적 현상학이다.
그리고 리쾨르의 분석에 따르면, 담화는 사건성과 명제성이라는 두 차원을 가지는데, 이 두 극은 주체, 즉 발화자의 존재를 다시 돌려준다는 것이다. 사실, 우선 의미한다는 것은 문장이 무언가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확인 기능과 술어 기능이라는 명제의 내적 연결이 무언가를 산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의미한다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 무언가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발화 의미는 곧 발화자의 의미를 지시한다. 우리는 발화 의미가 발화자의 의미를 지시한다는 것을 사건과 의미의 변증법에서 특히 사건 극의 측면에 연결시킬 수 있다. 말하자면, “나”라는 개념을 단순히 이 단어에 연결되는 다른 단어들의 대립 관계로 완전히 환원할 수는 없다. 물론 “나란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기호학적으로, 즉 기호 관계로 다시 쓰기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 표현조차도 “나”를 완전히 번역하거나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즉 “나”라는 일인칭 대명사의 기능은 그 단어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술어와의 관계가 전부가 아니다. 즉 내가 “나는 행복하다”라고 발화할 때, 이때의 “나”의 기능은 “행복하다”라는 술어와의 관계로 완전히 소진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여기서의 “인칭 대명사의 유일한 기능은 전체 문장을 발화 사건의 주체에게 귀착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칭 대명사는 그것이 사용될 때마다 매번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유일한 주체를 가리킨다. 즉 ‘나’란 항상 두 가지 계기를 갖는다. 통사론적 언어학적 계기로서의 ‘나’, 즉 보편 술어에 대한 한 개별적 주어로서의 ‘나’와 문제의 그 통사적 문장을 총 지휘하면서도 그 뒤에 함축적으로 지시될 뿐, 항상 그 문장에 대해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심판자로서의 ‘나’, 소위 ‘의미론적 계기’로서의 ‘나’이다. 화자에 대한 이 지위를 청자에 대해서도 대칭적으로 적용하면, 언어학적 계기로서의 ‘너’와 그러한 ‘너’를 포함하는 담화를 발화하는 현실적 ‘너’를 또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또는 그녀’(he or she)는 단순히 언어학적 계기일 뿐이지 더 이상 진정한 의미론적 주체는 아니다. 즉 벤베니스트나 리쾨르에게 있어서, 나와 너의 이 짝은 공통적으로 3인칭에는 대립적이다. 왜냐하면, 3인칭은 엄밀히 말하면 비인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Guillaume이 보여주듯이, 인칭 대명사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나타내는 많은 부사와 지시사들 그리고 동사의 시제 등도 발화 사건과 발화자의 지금을 가리킨다. 이처럼 문장의 내적 구조는 문법적 과정을 통해 그 문장의 화자를 다시 지시하는데, 이를 언어학자들은 변천(shifters)이라고 부르는데, 담화의 의미가 담화자의 의미로 변천되는 이 사태를 두고 리쾨르는 “담화의 자기 지시성”이라고 한다. 담화의 자기 지시성이라는 이러한 차원의 해명은 단적으로 자아 실체를 가정하거나 전제하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실체주의의 난점을 피하고 순수 언어학적 의미론의 차원에서도 주체의 실존을 다시 말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주체가 회복될 때, 이제 “언어는 사적인 경험이 공적인 것으로 바뀌는 과정 자체이다. 언어는 외재화이며, 이 덕분에 하나의 인상은 초월되어 하나의 표현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나와 타자 사이에 통교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나의 사적 체험이 아니라, 그 체험의 의미이다. 그리고 이때의 의미란 공적인 것이다. 즉 ‘나’가 ‘나’가 되고 ‘너’가 ‘너’가 되는 ‘나’와 ‘너’를 동시에 초월해 있는 우리들의 사회적 전체성인 언어적 표현과 구조의 한계 내에서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적 체험이 공적 의미로 소통될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바로 언어가 어떻게 가능했는가에 대한 질문에 상응할 것이다. 리쾨르는 “바로 여기서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리쾨르는 언어의 가능성을 하나의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는 않는다. 이를 위해 그는 후설의 현상학을 언어의 현상학으로 재해석하면서, 언어의 가능성의 한 토대를 마련하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후설의 현상학을 언어 철학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이러한 리쾨르의 해석학적 현상학은 후설 현상학에 대한 관념론적 해석의 난점을 보완해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리쾨르에 따르면, 후설 현상학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근본적인 명제 위에 근거한다. 1) 의미는 현상학적 기술의 가장 심오한 범주이다. 2) 주체는 의미의 담지자이다. 3) 환원은 어떤 존재가 의미를 갖고 탄생하도록 하는 철학적 행위이다. 결국 현상학은 의미론이다. 그런데, 그 의미란 주체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상학에서 말하는 주체란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같이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직관의 대상으로서의 Ego가 아니라, 자연 실체론적 모든 관점을 중단시키는 긴 여정, 소위 현상학적 환원의 과정의 결과로 주어진 주체이다. 즉 환원은 존재에 관한 모든 질문을 존재 의미에 관한 질문으로 변경시키는 과정이며, 바로 이러한 환원의 과정에 의해 현상학적 기술의 장이 마련된다. 그런데 여기서 환원을 수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즉 누가 환원을 가능하게 하는가? 여기서 후설 현상학에 대한 대부분의 관념론적 해석들은 환원 그 자체를 일종의 독립적이고 전체적인 신출귀몰한 조작으로 고려하면서 그 조작의 주체를 상정했다. 그리고 그 주체는 그러한 환원 작업, 소위 일체의 실체론적 존재들을 해체하면서 끝까지 진행될 때, 그 최후의 보루로 드러나는 주체이기도 하다. 여기서 리쾨르는 의미 이론, 주체 이론 그리고 환원 이론이라는 이 삼자가 상호 간에 분리 불가능하게 긴밀하게 연관된 전체성을 구성한다는 것과 그러한 연관에서 주체의 역할을 강조한 후설의 현상학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현상학의 업적이다. 그러나 후설 현상학에서 말하는 환원이 모종의 단적인 조치 속에서 자연적 태도에서 현상학적 태도로 나아가게 하고 존재에서 의식을 가지게 하는 직접적 이행으로 해석하는 모든 관념론적 해석을 반대한다. 환원은 어떤 신출귀몰한 조작이 아니라, 언어 기호에 의한 조작이다. 환원이 의미 관계의 필연적인 조건을 해명하는 과정이라면, 그것은 기호들의 상징적 기능을 떠나서 논의될 수 없다. 환원이 일체의 실체론적 존재들을 추상화하는 어떤 영적이고 신비적인 조작이고, 그러한 신비적 조작의 최후의 보루, 즉 환원의 결과물이 의식적 주체인 것은 아니다. 환원은 언어의 끊임없는 초월, 즉 언어 게임이다. 즉 리쾨르에 있어서는 환원의 초월성은 언어의 초월성으로 이행된다. 이런 언어 철학적 맥락에서 해석된 환원은 “기호를 통해서 실재를 지시함으로서 실재와 우리 인간을 관계시키는 가능성”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연물 속 있는 단순한 한 자연물과는 다른 어떤 것이 될 가능성을 가진다. 주체의 획득은 처음부터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즉 선험적 환원의 결과이다. 그런데, 그러한 현상학적 환원은 현상학적 기술을 통해서만 주어진다. 그렇다면, 현상학적 기술의 가능성의 토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언어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가능성의 토대는 무엇인가? 위에서 언급한 맥락에서 본다면, 사실 이 질문은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 될 것이다. 여기서 잘 알다시피, 모스 이후 대부분의 사회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언어적 상징 체계의 근원은 사회적 전체성이다. 말하자면, 언어는 사회와 함께 동시에 출현했다. 여기서 말하는 언어란 단순한 상징 체계라는 광의의 언어이다. 그리고 이 때의 상징 체계로서의 언어는 지식 체계로의 언어와 대비된다. 다 같이 언어지만, 지식은 연속성을 그 특성으로 갖는다면, 상징은 불연속성을 그 특성으로 갖는다. 상징의 불연속성이란 달리 말하면, 모종의 의미나 대상을 지시하기 위해서 등장하는 상징 기호의 순간 찰나적인 출현을 지시한다. 지식 체계는 논리적 체계로 불연속적인 기호적 체계와는 달리 연속적이다. 그러나 원초적인 언어인 상징으로서의 기호는 사회적 맥락에서 갑자기 출현하며, 따라서 다른 사회적 맥락에서는 동일한 기호라도 다른 의미를 지닌다. 간단히 말하면,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언어란 상징이라는 광의의 언어이며, 이러한 불연속적 상징 체계로서의 언어의 기원은 상대성의 의미로서의 사회적 전체성에 관련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리쾨르는 언어의 기원을 사회적 전체성으로 환원시키는 모스나 레비-스트로스의 입장을 지지하면서도, 반대로 사회 그 자체의 가능성의 토대를 상징적 언어 체계의 가능성에서 해명해야 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리고 이 점은 모스나 레비-스트로스도 인정한다. 그런데, 리쾨르는 다시 상징 체계의 가능성의 토대를 다시 묻는다. 여기서 주체의 의도성의 개념을 사용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언어의 기원이 사회라면, 사회의 기원은 언어이다. 즉 사회란 처음부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상징적 의사소통을 수행하면서 구성된 것이다. 그리고 상징적 의사 소통은 생의 사적 체험들의 담지자인 주체가 화자로서 그 지위를 바뀌면서 그 체험을 타자로서의 청자에게 소통시키려는 의도에 근거한다. 이렇게 하여 상호주관성의 개념이 구성되며, 사회란 바로 이러한 상호 주관성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리쾨르는 Edmond Ortigues의 입장을 지지한다.
그러나 이 때의 의도성이란 후설의 지향성의 개념이지만, 이 지향성은 정신이 본래부터 갖고 있는 신비적 능력이 아니라, 언어적 기호화의 의지이다. 즉 그것은 내가 타자와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간단히 말하면, 리쾨르는 언어에 의한 “외재화와 소통 가능성은 하나이며 동일한 사물이다”고 말하면서, 후설의 노에시스 개념에서 이러한 소통 가능성의 토대를 찾고자 한다. 즉 우리가 일상에서 대화하는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의 그 언표 행위 또는 언표 수행 행위가 개별성 확인인지, 보편적인 술어인지, 선언인지, 명령인지, 바램인지, 약속인지를 상대방에게 인식시키려는 의도를 함축하고 있다. 물론 이 의도는 화자만이 그렇게 경험하는 심리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의도는 타인의 의도를 배려하는 의도이다. 즉 타인에 의해 그런 것으로 확인되고 승인되고 인식되고자 하는 의도이다. 리쾨르에 따르면, 이 의도가 후설의 노에시스 개념이다. “후설의 용어로 말하면 이것(의도)은 정신적인 것 속에 들어 있은 노에시스적 경향이다.” 따라서 후설의 노에시스적인 것의 기준은 소통 가능성의 의도이며, 의도된 행위 자체에 내재한 인식에의 바램이다. 즉 사적인 것으로서의 우리 정신은 그 사적 체험을 소통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 이 의사소통의 의도가 바로 노에시스이다. 따라서 노에시스는 대화로서의 담화의 정신이다. 결국 리쾨르는 언어에 의한 정신의 구성을 인정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우리 주체의 의사소통의 의지가 언어적 보편자를 가능케 했다는 전통적인 언어관을 지지한다. 결국 이러한 모든 주장은 주체적 의도와 언어의 변증법의 역설에로 귀결된다.
리쾨르의 담화론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논자가 도달한 최종적 결론은 다음과 같은 역설이다. 명제적, 논리적 담화는 은유적 담화의 빙상일각이라면, 은유적 담화는 상징적 담화의 빙?/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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