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와 맑스
글쓴이 : Eugene Holland
옮긴이 : 김상운
1. 다음은 사유-실험이라는 성격을 띤다. 맑스가 스피노자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는 스피노자의 <정치신학논고>의 모든 구절들을 자신의 노트에다가 손으로 필사했다. 약간 분명하지 않은 것은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스피노자가 맑스의 사유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것이다.(주1) 여기에서 실험의 목적은 그 영향의 한도를 신중하게 추적하는 것이다. 즉 맑스의 노력의 핵심부에 스피노자를 위치지우는 것의 가능한 함의를 통해서 사고하는 것이다.
2. 그러한 사고-실험의 첫 번째 단계는 이미 착수되었다. 가장 주목할만한 것으로는 알튀세르의 노력이 있다. 그는 맑스의 저작에서 헤겔주의를 말소하기 위해서 많은 관점에서 헤겔을 스피노자로 대체하는 것에 몰두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 대한 알튀세르의 의존도와 신뢰감의 한도도 여전히 불명확하다. 더욱 극적인 것으로, 안토니오 네그리는 스피노자의 유물론에 찬성하여, 그것이 맑스의 충분히 근대적인 유물론의 근대 초기의 전조로서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피에르 마슈레이는 스피노자가 헤겔의 역사철학의 손아귀를 벗어나며 따라서 헤겔적 관점에 대한 중요한 대안을 표상하는 수준을 강조하면서 스피노자와 헤겔간의 직접적인 대결을 무대 위에 올려 놓았다. 마지막으로 질 들뢰즈는 헤겔에 대한 대안들을 통해 서구의 철학전통을 전복하고 있으며, 이 대안들 중에서 스피노자는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주2) 이러한 것들이 내가 헤겔적 맑스주의에 대한 스피노자적 대안을 개괄하는 과정에서 끌어들인 일차적인 자료들이다.
3. 우선 헤겔과 헤겔적 맑스주의에 대한 대안들이 최근 몇십년간의 과정에서 왜 그렇게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지에 대해 간략하게 개괄해 보기로 하자. 알튀세르의 경우에는 프랑스공산당 내에서 스탈린주의에 반하는 전투가 있었다.(주3) 들뢰즈와 많은 포스트구조주의의 경우 (스피노자를 자신의 선구자로 인용하곤 했던) 니체에 매혹당했다. 니체의 견해와 방법은 맑스 자신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헤겔의 견해와 방법과 날카롭게 대조된다.(주4)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프랑스에서 헤겔적 맑스주의를 재평가하려는 충동은 정치학과 학문 영역 모두에서 전후의 많은 발전들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났다. 즉 ‘계급의식적’ 정치 행위자로서의 프랑스 노동계급의 쇠퇴, 그리고 제5공화국의 정치와 사회에서 그 ‘혁명적’ 전위로서의 프랑스공산당의 쇠퇴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학문 내부에서는 철학자와 역사가들 사이에서 맑스주의의 어떤 헤겔적 요소들에 대한 불만족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주5)
4. 1789년 대혁명에 대한 해석은 역사가들의 불만족을 잘 드러내 주고 있는데, 수정주의적 학자들은 대혁명이 다가올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모델 역할을 할 수 있는 ‘부르주아지’ 혁명이었다는 맑스주의적 통념에 도전했다(주6). 논점은 대혁명의 결과 -- (비록 60여년이 지난 후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귀족제로부터 힘의 균형을 변동시켜 결국 부르주아지의 지배의 시작(installation)으로 나아가게 했다 -- 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결과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의 역할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는 프랑스 부르주아지들은 혁명을 만들지 못했다. 대혁명은 대부분 귀족제에 의해 ‘출발’해 파리 인민들에 의해 종결되는 방식을 취했다. 그리고 프랑스 부르주아지들이 행한 중요한 역할은 정치적 수단에 의해서 자신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행동을 의미하지도 못했다. 헤겔적인 주인-노예 변증법을 개인들간의 용어에서 사회적 용어로 변형시키고 있는 어떤 ‘유물론적’ 철학사관에서는 (‘절대정신’이라기 보다는) 사회계급을 역사의 주체로 만든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주체들로 남아있다. 즉 하나의 주체라는 모델 위에서 인식된 각 집단들은 -- 그리고 여전히 많은 개별 주체들로 이루어져 있는 각 집단들은 --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간에)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행동한다. 간단히 말해서 문제는 특수한 프랑스 상인들, 법률가들, 그리고 행정가들의 현실적인 다양한 동기와 행동이 (계급 규정과 기능이 상대적으로 별로 문제시되지 않는 곳인 경제적 장에서 자본의 인격화로서 행위하기 보다는) 역사적 장에서 (특이한) 정치적 행위자로서 행위하는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라는 통일된 통념에 부합하는가 하는 점이다.
5. 그러므로 알튀세르의 선제적인 동기는 매우 의미있는 것이다. 즉 역사를 ‘주체없는 과정’이라고 선언하고, 한편으로는 역사적 과정에서 구체적 행위자의 역할에 대한 ‘너저분한’ 서사적 설명과,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양식 내에서 계급기능에 대한 ‘엄격한’ 규정을 이간질시키는 것이 바로 그 동기이다. 그러므로 헤겔적인 ‘표현적 총체성’을 의심하려는, 철학 내부에서 알튀세르의 노력의 여러 가지 중요한 결과 중 하나는 그것이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역사서지학에 있어서 계급 행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즉 맑스주의는 역사주의가 아니라고 하는 것. 헤겔에 대한 공격의 또 다른 면모에 있어서처럼 알튀세르는 여기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끌어들인다. 스피노자는 (역사적 과정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인간적으로 결코 소진될 수 없는) 무한한 인과적 관계를 (인간이 그러한 과정의 법률과 메커니즘과 관련해서 산출할 수 있는) ‘명석판명한’ 관념과 구분한다(주7). 헤겔에게 실재적인 것은 합리적인 것이며 합리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과정에 관한 이렇게 매끄럽게 연결되고 명확한 설명이 이런 식으로 가능해진다. 이와는 반대로 스피노자에게 실재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은 그 대부분의 경우 서로 다른 것이다(distinct). 한편으로는 우리가 살고 있으며, 우리가 상상력, 추측, 미신 기타 등등의 양태 속에서 대부분 파악하는 결코 소진될 수 없는 풍부한, 그러나 불가피하게도 불투명한 세계가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추론이 제공할 수 있는, 그러나 단지 첫 번째 파악양식과 필연적인 거리가 있는 그 세계에 대한 오성(understanding)의 수준이 존재한다. (실재적인 것에 대한 완전히 합리적인 파악은 원리적으로 스피노자가 ‘직관’이라고 불렀던 세 번째 파악 양식에서야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신의 특권에 속할 것이다.) 이 두가지 범주적으로 상이한 종류의 사고에 관한 이러한 스피노자의 구별은 인간 정신 혹은 경험의 상징적 등록자와 상상적 등록자간의 라깡적 구별과 교차하며 초기 알튀세르의 사유에 아주 중심적인 것이었던 과학-이데올로기 다이어드(群)의 근간을 이룬다. (물론 그는 과학과 이데올로기간의 모든 절대적인 구별을 나중에 이론적인 오류라고 폐기한다.(주8)).
6. 분명히 영어로 번역되어 가장 잘 알려진 <문학생산 이론(A Theory of Literary Production)>(1966)이라는 책에서 마슈레이는 문학 연구를 위해서 이러한 다이어드의 함의를 발전시킨다(주9). 하지만 이후에 나온 책인 (아직 영어로 번역되지 못한) <헤겔이냐 스피노자냐(Hegel ou Spinoza)>(1979)에서 마슈레이는 그러한 구별의 원천으로 되돌아가서 스피노자와 헤겔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문제들을 검토한다(주10). 알튀세르는 <자기비판 에세이(Essays in self-criticism)>에서 이미 헤겔적 관념론으로부터 맑스주의를 자유롭게 하려는 기획을 위해 스피노자적인 유물론이 가진 장점 중 몇가지를 개괄했다. 즉 이데올로기를 ‘상상적인 것의 유물론’으로 개념화하고, 과학을 기본적으로 (스피노자의 세가지 종류의 지식 중 첫 번째 두 개의 것에서 파생된) 수학적인 것으로 개념화하는 것; (‘부재하는’) 인과가 그 효과에 내재한다는 비-초월적 인과성 모델 (알튀세르는 나중에 이것을 ‘구조적’ 인과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 그리고 인간 행동과 역사는 반-주체적이며, 결단코 비-목적론적이라는 견해. 알튀세르의 작업을 배경으로 하고서(11쪽에서 인용), 하지만 맑스나 맑스주의에 대한 함의를 고려하지 않고서 마슈레이는 어째서 스피노자가 ‘헤겔적 철학에 대한 참된 대안’을 표상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헤겔이냐 스피노자냐>라는 작업에 착수했다.(11쪽)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우리의 사유-실험이 진행되어 나갈 것이다.
7. 마슈레이가 행한 스피노자와 헤겔간의 비교를 상세하게 다루기 전에 우리는 그의 주된 주장의 동력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특히 비-헤겔적 맑스주의에 대한 그 함의가 아직 자세히 설명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핵심적인 주장은 “스피노자가... 헤겔을 객관적으로 논박했다”(13쪽)는 것이다. 마슈레이는 스피노자와 헤겔이 많은 동일한 문제를 제기했으나 이를 매우 상이하게 해결했으며, 심지어는 정반대의 대립된 방향에서 해결했다고 주장한다. 헤겔은 스피노자가 자신의 강력한 선구자였음을 잘 알고 있었으나 자신의 주관적 관념론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스피노자를 자신의 진화론적인 철학사관에 통합시키기 위해서 스피노자를 오독할 수 밖에 없었다 -- 그럼으로써 모든 선구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는 열등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 고 마슈레이는 주장한다(11-13, 90-94, 107, 137-42, 157, 258). 그러므로 스피노자에 관한 헤겔의 수세적인 오독은 ‘징후의 가치’(12쪽)를 취하며, 이 속에서 그것은 ‘스피노자’를 불충분한 것으로 구성한다. 왜냐하면 목적론적-주관적-관념론적 전제들로 인해 헤겔은 자기 선구자의 비-종말목적론적, 반-주관적 유물론을 알아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겔의 스피노자 독해가 어떻게 그리고 왜 잘못되었는지를 검토함으로서 마슈레이는 헤겔에 대한 대안으로서 (그리고 나는 여기에다가 맑스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은데) 스피노자야말로 가장 가치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철학사를 복원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헤겔 자신의 철학사와, 따라서 헤겔의 역사철학이 잘못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스피노자는 철학적 과정의 행진에 의해서 단순히 폐기-보유-극복되는(지양aufgehoben) 하나의 계기나 혹은 그렇게 받아들여진 길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맑스주의를 포함하는 서구 철학에서 헤겔주의와 관념론의 (아마도 잠정적이고 확실히 지엽적인) 승리를 억누르는, 철학에서 객관적으로 이전에 존재했던 관점을 표상한다(주11). 마슈레이의 독해는 따라서 고전적인 알튀세르적인 이데올로기-비판이다. 그것은 헤겔이 스피노자를 잘못 받아들임으로써 일어났다는 주장이 아니라, 헤겔의 전제와 기획을 고려해 볼 때 헤겔이 특정한 방식과 특정한 이유 때문에 스피노자를 잘못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8. 그러므로 헤겔은 자신의 입장과는 반대로 (그리고 그 입장을 옹호하여) 스피노자의 철학을 자기 체계의 본질적이고 역동적인 특징인 부정성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긍정적이며 정적인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부정성은 정신(Spirit)을 실체로 설정하며(최초의 부정), 그리고 나서 역사의 종말에 절대정신 속에서 실체의 화해-재통합으로 궁극적으로 나아가는 어떤 (혹은 ‘유일한’) 역사적 과정에서 다시 정신으로 회복시킨다.(부정의 부정). 이러한 관점에 대한 비난은, 특히 맑스주의 내부에서는 아주 잘 알려져 있다. 즉 (그것은) 주요 행위자(agent) 혹은 작인(agency)은 정신 혹은 영혼이라는 점에서 관념론이다. 또 이러한 역사적 행위자, 즉 절대정신이 모든 구체적인 주체들과 심지어 역사 자체로 초월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초월적 주관주의이다. 그리고 역사의 종말이 부정의 부정이라는 변증법적 과정에 의해서 보장된다는 점에 있어서, 따라서 오류와 불운도 결국 역사를 통해서 절대정신의 현실화에 기여하게 된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목적론이다. 그리고 맑스주의적 역사철학이 -- (전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맑스 자신을 포함하여 -- 헤겔적 관념론을 ‘유물론’으로 번역하거나 전도하는 것은 대부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초월적 주관주의와 목적론을 지니고 있다. 즉 계급들이 계급투쟁의 역사적 ‘변증법’에서 초월적 주체들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서 역사의 종국에 가서는 자본주의 붕괴와 더불어 무계급 사회를 산출할 것이다.(주12) 역사에 관한 이처럼 거대한 종말론적(eschatological) 서사는, 내가 이미 주장했던 것처럼, 더 이상 맑스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전혀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비판을 다시 들려주기보다는 마슈레이의 연구는 스피노자를 ‘헤겔에 대한 참된 대안’으로, 그리고 비록 함의상 그렇기는 하지만 헤겔적 맑스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내세운다.
9. 하지만 참된 대안이 되기 위해서 스피노자와 헤겔은 공통적인 어떤 것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즉 마슈레이가 보여주었듯이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기초적인 원리는 사유와 질료가 ‘궁극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궁극적인 동일성’의 형태는 아주 다르다. (마슈레이가 지적하고 있듯이) 부정의 부정을 경유해서 질료를 사유에 종속시키는 헤겔의 관념론의 자리에 스피노자는 현실적으로 유물론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반-관념론적인 위치를 부여한다. 질료에 대해 사유를 치켜세우기 보다는 (혹은 관념론에 대한 단순한 ‘유물론적’ 전도의 경우에서처럼 사유에 대해 질료를 치켜세우기 보다는) 스피노자는 사유와 질료가 절대적으로 동등(co-equal)하다고 생각한다. 즉 사유와 연장은 실체의 상이하지만 대립되지는 않은(‘non opposita sed diversa’) 속성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똑같은 단일한 실체의 속성들로서 이것들의 동일성이 주어진다 -- 반면 헤겔에게 정신과 질료의 동일성은 단지 역사의 종말에서만 성취될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스피노자에게 사유는 실체의 특성이지 주체의 특성이 아니다. 즉 헤겔의 초월적 주관주의의 자리에 스피노자는 일종의 내재적 객관주의를 들어서게 한다. 이 경우 어떠한 부정성과 어떠한 모순도 가능하거나 필연적이지 않게 된다.(주13) (데카르트의 기하학과 스피노자 자신의 광학연구자로서의 실천의 성공은 분명히 세계는 그 자신의 용어로 알 수 있다(knowable)는, 세계는 그 태생적 특성들의 한가지로서 수학적인 ‘사유Thought’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에 기여를 했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적 세계는 객관적으로 알 수 있다. 즉 앎의 가능성(knowability)은 세계의 고유의 특징들 중 하나이다.
10. 하지만 그러한 객관적인 앎의 가능성(knowability)이 인간의 사고에서 주관적으로 실현되는가의 여부는 스피노자에게는 아주 다른 질문이다. 즉 그것은 비판적 성찰을 통해서 첫 번째 종류의 지식의 주관적 한계를 극복하는, 따라서 실체 자체에 고유한 ‘객관적인’ 사유(Thought)에 더욱 근접한 두 번째 종류의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적합한 관념들의 발전은 정신(Spirit)의 행진과 이성의 간계로부터 자동적으로 뒤따라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스피노자가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그리고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 스스로 주체중심적 사고의 왜곡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달려 있다. 이러한 능력은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으로) 다양하며, 결코 어떤 방식으로도 시간을 통해 당연하게 증가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헤겔의 목적론의 자리에 스피노자는 단순히 인간이 주체중심적 상상력의 착각을 삼가고 더욱 적합한 지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만을 놓을 뿐이다.
11. 마지막으로 --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스피노자의 유물론이 작동하기 시작하는데 -- 그러한 적합성의 일차적 척도는 정신(Spirit)과 질료의 어떤 궁극적인 화해가 아니라 오히려 수준, 즉 인간의 역량이 실현되고 증가되는 그런 수준이다. 인류는 자연 속에 있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객관적인 실체(Substance)의 결정적 양태이며, (스피노자가 ‘코나투스’라고 부르는 원리에 따라서) 그 자체로 그것은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전시키려는 경향이 있다.(주14) 인간을 구별시켜주는 것은, 사유의 양태와 연장의 양태 속에서 행동함으로써, 인간이 자연의 힘들을 이해하고 그것에 복종하고 분유하고 따라서 그 힘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 그리고 여전히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남아있다. (자연 속에, 그리고 자연의 일부로서 인류가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주장은 데카르트적인 주체-객체 이원론에 대한 비판과 이것에 대한 그의 ‘일원론적’ 대안과 더불어서 스피노자를 근대적인 환경론자로 추앙받게 하고 있다.)(주15) 상상력과 달리 적합한 사고는 인간의-자연의 발전을 방해하기보다는 그것을 번창하게 한다.
12. 어떤 경우, 스피노자 자신의 ‘합리적인’ 비판적 성찰의 실천은 ‘상상적인’ 사고의 지배적인 양태로서의 종교를 겨냥한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엄격하게 말해서 인식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인 것이라고 평가한다.(주16) 유대교적-기독교적 전통은 -- 스피노자는 이 역사에 대해서 세속적인 관점에서 연구한 첫 번째 사람이다 -- 단순히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발전의 시기에는 어떤 집단에게 어떤 목적들로서 기능했다. 하지만 스피노자 자신의 시대에 이르면 그것은 그것이 갖는 유용함보다 더 오래 살아 남게 되어 이제는 인간의-자연의 힘들의 발전에 장애물로, 특히 자연과학에 대한 반대로 작용한다. 우리는 오늘날,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자본주의적 시장과 결합해 있는 소유권적 개인주의(possessive individualism)의 이데올로기와 실천들이 한동안 인간의-자연의 역량들을 증가시켜 왔으나 이제 이것들은 우리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 역량들의 계속적인 발전에 방해물이 되고 위협이 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13. 이제 우리는 마슈레이가 “관념론적 변증법과 유물론적 변증법을 구별시켜주는 것은 무엇인가”(259쪽)라는 질문으로 끝을 맺고 있는 <헤겔이냐 스피노자냐>의 결론부에서 (더 이상 논의를 전개하지 않고) 암시하고 있는 ‘유물론적 변증법’을 식별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스피노자를 읽은 후에, 그러나 그에 따르지 않고 헤겔은 우리로 하여금 비-헤겔적 변증법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게 했다... (비록) 그것이 그 자체로, 그리고 그 스스로 우리로 하여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게 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260쪽). 스피노자로부터 도출된 유물론적 변증법은 실제로 맑스 자신에게서 발견되는 역사철학들 중의 하나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역사의 동력’으로서 계급투쟁 대신에 생산력들과 생산관계들의 변증법을 설정한다. 이것은 아마도 맑스의 여러 가지 역사철학들 중에서 가장 덜 헤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계급투쟁 모델의 초월적 주관주의를 피하는 한에 있어서는 말이다.(주17)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필연적으로 무계급 사회라는 종합으로 나아가는 안티테제적인 계급-주체들간의 모순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주체성이 아닐 뿐만 아니라 또한 계급적 경계를 넘어서는 두가지 총체들(ensembles) -- 생산력들과 생산관계들 -- 간의 긴장이 문제이기 때문이다.(주18)
14. 하지만 스피노자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고려되는 이러한 맑스적 모델은 여전히 초월적 주관론과 목적론의 잔여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즉 이 모델에 따르면 정체되어 있는 생산관계들이 계속 발전하고 있는 생산력들과 어떤 지점에서는 필연적으로 갈등에 처하게 되고 따라서 결국에는 낡은 관계들을 제거해 생산력의 지속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더 나은 것으로 대체하는 혁명적 폭발을 야기한다고 하는 한에 있어서는 목적론이다.(주19) ; 그리고 이러한 인간중심적 생산력의 발전이, 초월적 주체로서의 계급보다는 ‘유적 존재’와 같은 어떤 것과 더불어서 여전히 역사의 동력으로 간주되는 한에 있어서는 (비록 그 필연적인 목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자유의 실현이 생산력의 발전에 의존한다고 가정한다는 점에서) 주관주의이다. 스피노자적 유물론은 두가지 방식으로 이러한 잔여들을 제거한다.
15. 우선, 스피노자의 경우 역사에서 문제로 되는 있는 ‘생산력’은 인류의 생산력을 배제하거나 인류의 생산력을 우선시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자연의 생산력이다. 그리고 인류는 이 자연의 통합된 일부이지만 단지 일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맑스주의로 하여금 ‘생산력주의’(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 생산력들에 대해서만 배타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를 벗어나게 하는, 따라서 (맑스 자신이 20대에 주장했던 것처럼) 인류를 자연의 지배자라기 보다는 자연의 일부로 간주하는 일종의 반-인간주의를 제공한다(이것은 알튀세르의 반인간주의보다 훨씬 나아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스피노자적 맥락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앙띠 오이디푸스>에서 “자연=산업...=역사”라고 긍정하는 것이다.(주21)
16. 두 번째로, 그리고 특히 폭넓게 파악된 자연의 생산력을 의미하는, 이렇게 이해된 ‘생산력’과 더불어 (즉 [생산력은] 인류를 포함하지만 인류에게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의 유물론은 혁명의 불가피성과 역사적 과정 자체의 진보주의를 완전히 제거해 버린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게는 인간의 사고가 생산력의 발전을 방해하기보다는 그것에 도움을 줄 것을 요구하는 객관성을 계속적으로 혹은 심지어 일관되고 성취할 것이라는 어떠한 보증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 생산력들을 발전시키는 것이 필연적으로 정체되어 있는 생산관계들의 족쇄를 파괴할 것이라는 어떠한 보증도 없으며 심지어 넓은 의미에서 생산력들이 계속 발전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만일 정체된 생산관계들이 혁명을 예방할 정도로 굳건해지고, 또한 심지어 생산력들이 발전을 계속하는 대신 감소하게 만들 정도로 굳건해진다면? 사실 이것이 이미 그 경우라고 말할 수 없지 않을까?(주22) 맑스주의의 경우 엄격할 정도로 비목적론적인 역사철학은, 결국 현재의 생산관계들이 생산력들의 발전보다는 파괴를 증진시킬 가능성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혹은 그것은 이미 오늘날의 현실아닌가?). 이것들이 고전적인 맑스주의에서처럼 (이 경우 파괴는 인간노동의 생산적 잠재력을 겨냥하며, 인종차별, 기아,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저실업과 실업, 부적합한 교육을 통해 발육이 멎은 지적인 성장 등등과 같은 아주 우세한 형태를 취하게 된다) 협소하게 이해되든지, 아니면 스피노자적 유물론에서처럼 (이 경우 우리는 전체로서의 자연의 생산적 잠재력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환경의 퇴보, 거주지 상실, 종의 고갈 등등의 전세계적인 생태파괴의 동등하게 우세한 패턴에 대해 말한다) 혹은 보다 넓게 이해되든지 간에 말이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스피노자적 맑스주의는 두가지 방식으로 생산력/관계 모델로부터 목적론을 제거할 것이다. 즉 생산력들이 제한적이거나 파괴적인 생산관게에 직면해서도 계속 발전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으며, 설령 그렇게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발전이 인간의 자유를 증진시키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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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이것들은 맑스주의가 헤겔과 스피노자 사이에서 선택을 한다는 함의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마슈레이의 중요한 연구는 기본 바탕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슈레이의 <헤겔이냐 스피노자냐>가 출간된 지 2년 후에 이탈리아의 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안토니오 네그리는 <야생적 변종(L'anomalia salvaggia. Saggio su potere e potenza in Baruch Spinoza)>(1981)이라는 스피노자에 관한 매우 상이한 종류의 책을 발간했다.(주23) 마슈레이가 스피노자(와 헤겔)에 대한 순전히 철학적이고 ‘내부적인’ 독해를 제공하고 있는 곳에서 네그리는 (여러 번에 걸쳐 마슈레이를 우호적으로 인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스피노자와 그의 철학적 진화를 17세기 네덜란드 사회의 맥락 속에 위치시키면서 스피노자적인 유물론과 현대의 맑스주의의 연관을 분명한 주제로 만들어 버렸다. 이 책의 중요성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프랑스어판 번역(L'anomalie sauvage: Puissance et pouvoir chez Spinoza, 주24)이 세 개의 서문을 달고 즉각 출간되었다. 그 중 하나는 마슈레이의 것이고, 다른 두개는 마찬가지로 유명한 프랑스 스피노자 연구자인 질 들뢰즈와 알렉상드르 마트롱의 것이었다. 짧은 서문에서 마슈레이는 네그리가 스피노자의 사유를 현재의 정치적 관심사와 연결지어 ‘살아있는 것’으로 만든 방식을 강조하고 칭찬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끝에서 네그리의 독해가 여전히 너무 목적론적인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과 관련된, 아주 짧지만 핵심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유보하고 있다. 그러나 그 해의 나중에 출간된 (“De la mediation a la constitution: description d'un parcours speculatif”라는 제목이 붙은)(주25) 더 긴 에세이에서 마슈레이는 네그리의 스피노자 해석을 더욱 상세하게 다루고 그 잔여적 헤겔주의라는 질문으로 돌아간다. 마슈레이의 독해에 따르면 네그리는 헤겔적 사유양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하고 또 그를 위해 노력하고 있기는 하나 이것에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18. 네그리의 근간을 이루는 독해의 핵심은 네그리가 스피노자에게서 끌어들인 구별, 즉 열등하고 초창기의 범신론 (그는 이것을 유토피아적이고 신-플라톤적이라고 생각한다)과 네그리가 맑스의 선구자로 간주한 보다 성숙한 유물론간의 구별이다. 논쟁과 난점들은 이러한 독해와 더불어 생겨난다. 왜냐하면 네그리가 스피노자 사유의 첫번째 ‘근거’와 두번째 ‘근거’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나누는 분리선은 스피노자의 주요 저작인 <에티카>의 중간부분을 향해 직접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에티카>의 구성을 중단했으며, 자신의 최대 역작을 개정하고 완성하기에 앞서서 <신학정치학논고>의 초안을 썼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완성된 텍스트와 관련지어 볼 때 ‘초판’이 정확하게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개정되었는가는 불분명하다. 너무도 유명하게 사용한 후에 버릴 수 있는 ‘첫번째’ 스피노자와 절대적으로 필요불가결한 ‘두번째’ 스피노자간의 분명한 역사적 단절을 세우기 위해서 스피노자의 사유의 진화를 드라마화함으로써 네그리는 이미 어려운 문헌학적인 문제를 더욱 최악의 것으로 만들고 있다고 마슈레이는 주장한다.(주26)
19. 네그리의 드라마화는 너무 헤겔적라는 점에서 마슈레이를 놀라게 한다 -- 네그리가 스피노자를 참된 유물론자라고 주장하고 맑스주의에서 헤겔적 변증법과 목적론을 근절시키길 원한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또한 너무도 아이러닉하다. 마슈레이는 두가지 ‘근거들’에 대한 네그리의 이전의/이후의 서사적 설명에 대해 의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스피노자로 하여금 첫번째 근거를 넘어서서 두번째 근거로 나아가게 한 것은 첫번째 근거에 있는 ‘내부적’ 모순들이었다고 하는 네그리의 주장을 더욱 의심한다. 왜냐하면 마슈레이에게 그러한 모순들은 고전적인 헤겔 변증법적 전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슈레이는 네그리가 스피노자 사유의 진화의 근거로 내부적 모순 대신에 ‘외부적’, 역사적 환경들을 인용할 때 더욱 확고한 기반 위에 서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네그리의 독해가 지닌 독특한 강점은 그가 스피노자의 사유를 초기 네덜란드 자본주의의 잠재적으로 민주적인 사회관계들의 맥락 속에 아주 조심스럽게 위치지운다는 점이다. 즉 침략적인 국가 절대주의의 매우 실재적인 위협을 피하려는 것이 스피노자의 분명히 정치적 저술들의 주요 동기들이었으며, 아주 명백한 것은 아니지만 스피노자가 자신의 <에티카>를 개정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적 과정에 대한 설명에서 헤겔적인 모순들을 제거하길 원한다고 하더라도 -- 마슈레이가 분명하게 행했듯이 -- 모순 개념은 철학적 사유에 대한 설명과 그 책의 개정에 대한 동기에 있어서 어떤 타당성도 보유하고 있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특히 <에티카> 자체에 있어서) 이 두가지 ‘근거들’간의 절대적인 단절보다는 오히려 어떤 긴장에 대해 말하는 것이 마침내 더욱 확실한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이용할 수 있는 텍스트적 증거를 고려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두번째 근거의 발전은 첫번째 근거에 있어서의 모순들의 인식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기인한 것은 아닐까? 특히 (네그리의 맥락적 설명이 주장하고 있듯이) 그러한 인식이 드라마틱한 역사적 사건들에 의해서 자극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면 말이다.(주27) 적절하게 제기하고서는 제기한 것에 비해 빈약하게 대답하는 이러한 질문은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즉 그 문제를 제기할 때 요점은, 역사적 과정에 대한 설명에서 변증법적 모순이라는 통념을 제거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담론과 사유에 대한 분석에서 그것(변증법적 모순이라는 통념)을 제거하는 것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역사가 사유를 반영하거나 혹은 그 역으로 생각할만한 하등의 이유란 없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이다.
20. 어쨌든 마슈레이는 바로 이러한 첫번째 심급에서 네그리는 잔여적 헤겔주의이라고 그를 비난한다. 왜냐하면 네그리는 여전히 사유의 수준에서 모순이라는 통념을 포함하는 서사적 설명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슈레이가 진단하는 두번째 심급은 네그리의 입장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다소간 더 기술적이며 확실히 멀리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스피노자의 사유에 있어서 속성들이라는 개념의 역할과 관련되어 있다.(마슈레이는 자기 책의 95-136쪽에서 이 속성들에 대해 엄청나게 주목하고 있다). 마슈레이에 따르면 네그리는 헤겔이 행했던 것과 똑같이 오해를 하고 있다. 두 사람(네그리와 헤겔)에게 속성들은 순수 실체와 그 양태들 간의 매개항으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의식에 이용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헤겔의 경우 스피노자적 속성들은 일차적이고 불충분한 변증법을 표상한다. 네그리에게 속성들은 이미 너무도 변증법적이어서 ‘두번째 근거’에서 스피노자 자신이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적 속성들에 대한 네그리의 오독은 스피노자의 사유의 진화에 대한 그의 헤겔적인 드라마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마슈레이에 따르면 그러한 분기점(ramifications)은 더욱 멀리 나아간다. 실체와 그 양태들의 (변증법이라기보다는) 동일성 내부에서 속성들의 구성적 기능을 거부함으로써 네그리는 스피노자적 관점을 두가지로 쪼개고 있다. 즉 한편으로는 (첫번째 근거에 상응하는) 순전히 지적이고 금욕적인 프로젝트와, 다른 한편으로는 (두번째 근거에 상응하는) 유물론적인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 이것의 현실화는 네그리의 저술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생산력들의 발전 동안에 연기되고 있을 것이다.
21. 그러므로 근대적 시장 사회의 여명기에 (스피노자의 ‘야생적인’) ‘위기의 철학’은 단지 1세기 이후인 근대적 시장 사회의 황혼녘에, 즉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위기에서 유용한 결과를 낳을 수 있을 뿐이라고 하면서 스피노자를 ‘야생적’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네그리는 자신과 마슈레이가 맑스주의적 사유로부터 제거하려고 하는 일종의 후험적인 헤겔적 목적론에 빠져있다. 이러한 판본의 맑스주의적 역사철학에 따르면, 참된 민주적 자유는 생산력들의 충분한 발전이 마침내 인류를 긴박한 필연성의 수중에서 벗어나게 할 때에만, 단지 그럴 때에만 가능하다. 우리는 스피노자가 처음으로 참된 민주주의를 근대적인 의제로 설정한 이후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 적어도 그 순간에 도달하고 있다... 이러한 금욕적 목적론에는 두가지 문제들이 있다. 한가지는, 스피노자에게는 반쯤은 ‘유물론적인’ 윤리적 기획의 성취가 그 자체로 필연적으로 반쯤은 ‘금욕적인’ 것의 성취(즉 해소)를 획득할 것이라는 어떠한 보증도 있을 수 없으며, 금욕적인 인성(personality)이 네그리가 ‘세계의 즐거움’이라고 부르는 것을 먹어치우기 위해서 그 자신의 화음(accord)을 ‘시들게 할’ 것이라는 보장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For one thing, there can be no assurance for Spinoza that accomplishment of the "materialist" half of the ethical project would in itself necessarily procure the accomplishment (viz. the dissolution) of the "ascetic" half, no assurance that the ascetic personality will "wither away" of its own accord in order to partake of what Negri calls the "pleasure of the world"] 즉 이미 위에서 지적했듯이 인류는 단지 적합한 관념들이 참된 사유를 획득하고 따라서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만을 가질 뿐이지 이를 보장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앙띠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획이 중요한 것이다. 이들은 스피노자적인 유물론적 관점에서 금욕적인 인성과 자본주의적 잉여-억압 중 어느 하나에 우선성을 부여하지 않고 이 둘을 동시에 진단할 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마도 (네그리와 보조를 맞추어) 스피노자적 유물론이 ‘유물론적’ 기획들과 ‘금욕적인’ 기획들 간의 그러한 모든 ‘변증법’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생산적 힘들을 포함하는) 실체의 생산력들은 어떤 주어진 순간에는 항상 정확히 그 자신들과 동등하며, 효과적으로 실현적 자유의 양과 동등하다. (비록 이 생산력들이 항상 역사 속에서 실현될 수도 있고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는 발전을 위한 더 나은 가능성들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실체 내에서는 어떠한 부정성도 없으며 결코 있어 본 적도 없다. 즉 실체는 항상 생산력으로 가득차 있으며, 발전할 수 있는 순전히 긍정적인 잠재력으로 꽉 채워져 있다.
22. 이것은 실체의 잠재성(potential)이 항상 도처에서 실현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며, 실체가 달성하는 실현의 수준들이 단순하거나 조화롭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스피노자는 실체의 발전이 끊임없이 복잡성과 혼란과 갈등의 증가를 수반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네그리의 독해에 따르면 17세기 네덜란드 사회에서 시장 시장자본주의가 출현한 것이야말로 스피노자에게 이것을 가장 통렬하게 일깨워주었다. 이것은 개인들로 하여금 봉건주의의 정형화된(corporate) 질서가 결코 지니지 못했던 정도에 이르기까지 서로 경쟁하게 만들며, 그리하여 사회질서의 구조를 위협할 정도에 이르게 된다. 네그리는 이러한 발전을 근대 사회의 시장이 끌어들인 ‘위기’라고 언급하는데, 네그리의 견해에 따르면 스피노자만이 바로 이것에 대해 적합한 반응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슈레이는 네그리가 잔여적 헤겔주의라고 비난하면서도 네그리가 스피노자의 정치적 중요성을 오늘날 정확하게 지적해 낸 방식을 분명히 높게 평가한다. 위기에 대한 다른 반응들을 연구한 논문에서 마슈레이는 (자신의 책에서 했던 것처럼) 스피노자가 헤겔, 그리고 근대 유럽 정치사상의 전통과 공유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며 그리고 나서 스피노자를 급격하게 분리시켜 주는 것을 조명한다.(주28) 그리고 여기에서 또한 (마슈레이의 독해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중요한 지점에서 홉스나 루소보다 훨씬 더 헤겔을 닮아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홉스나 루소가 구성하고 있는, 비록 이들의 차이점들을 모두 고려할 때에도, 여전히 지배적인 전통에 대한 악의에 가득찬 비판과 그에 대해 존립할 수 있는 대안으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마이클 하트(네그리의 책의 영역자) 또한 지적하고 있듯이, 스피노자를 분리시켜 주는 것은 ‘힘’과 ‘역량’(potentia와 potestas)간의, 효과적으로 결합된 인간 활동성에 있어서의 정치권력의 토대와 정치적 제도와 명령에 있어서 매개된 그 표현간의 정치적 관계에 대한 독창적이고 유물론적인 개념화이다.(주29) 이것은 더욱 상세하게 검토해야만 한다.
23. (인간사회의) 봉건적-결사체적(feudal-corporatist) 토대가 시장의 출현과 ‘소유적 개인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고 가정하게 되면 스피노자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의 기초에 관한 질문을 수립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토대가 인간 사회 자체로부터 다소간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거부한다 -- 이전에 존재했던 ‘자연권’의 형식(이것은 이후 홉스와 루소의 사회계약이론들에 의해서 정치사회의 기초로서 방어된다)이든, 혹은 초월적 정신과 이성의 간계의 형식(이것은 헤겔의 경우에서처럼 인간사회를 단지 자신들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이용할 뿐이다)이든 간에. 홉스와 루소와는 반대로 스피노자에게 인류의 자연상태는 완화될 수 없는 전쟁(un-mitigated war ; 홉스)도 고독한 청렴성(solitary purity ; 루소)도 아니며, 항상 이미 정치적이다. 즉 인간 존재들은 항상 사회적으로 살아간다. 게다가 사회성은 인간이 협력적 집단들에 결합되어 있는 개인들의 우월한 힘을 고립된 개인들, 그리고 비협력적 집단들과 관련하여 실현하는 (즉 인정하고 현실화하는) 한도를 제외하면 적대적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 사회는 고유하게, 그리고 소위 태생적으로 정치적이다. 실제로 스피노자는 마슈레이가 지적하고 있듯이, 개인은 그 자체로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단지 그 개인이 일부를 이루고 있는 집단(들)로부터 추상화된 것으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가장 단호하게 반-루소적이다. 그리고 마슈레이가 지적하듯이 “개인들은 자신들과 타자들간에 정립된 상보적인 관계들의 토대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의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들은 개인들로 하여금 최초로 (서로서로) 의사소통하게 만든다.”(SID, p.343).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경우에는, 헤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것이 개인적인 것(the personal)에 선행하며, 따라서 이미 존재하는 개별들간의 자발적인 계약 모델에 기초하여 인식될 수 없는 것이다.
24. 헤겔의 경우 정치적인 것은 역사(사람들, 그리고 국가의 발전을 통해서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실현하는 주체적인 정신의 역사History)를 가지는 반면 스피노자에게 정치적인 것은 역사 속에 내재적으로 존재한다. -- 이것(역사)은 자연의-인간의 역량들의 실현의 (비-목적론적) 총체(ensemble)로 인식될 수 있다. 그리고 헤겔의 경우 초-개인적인 정치적 심급은 정신이라는 초월적인 주체성인데 비해, 스피노자의 경우 이것은 동등하게 자연적이지만 역사적으로 집단들 속의 개별들의 우발적인 결합에 의해 증대되는 단순히 자연적 힘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한 결합은 역사상에서 사회-정치적 형태들의 잠재적으로 무한한 다양성을 산출하지만, 항상 개인 상호간의 관계를 밀착시키고 집단들을 형성하려는 인간의 정념의 기초적인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들의 사적인 이해관계를 보호하고 정치사회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서 주권적 권력(Power)에 자신들의 권리를 ‘양도’하지 않게 된다. 즉 개인상호간의 관계들은 이미 출발부터 정치적이며, 이들의 정치적인 힘은 자신들의 정념들로 가득 찬 관계들을 얼마나 잘 -- 얼마나 폭넓고 광범위하며 조화롭게 -- 구성하는가에 달려 있다. 사회계약에 대한 이러한 거부는 초월적 권위(potestas)에 대한 모든 필요를 제거하며, 대신 정치학을 집단의 힘(potentia multitudine ; 다수자의 역량) 속에 내재적으로 근거지운다(주30). 따라서 인간관계들이 불가피하게 정치적인 형태를 띠는 정념에 근거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는 외부적 명령이나 국가의 중재에 봉족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도 없고 또 그럴 동기도 없게 된다. 그러한 정념들이 국가 속에서 시민들간의 이해관계로 모순적으로 승화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동시에, 물론 스피노자의 반-목적론적 역사관은 인간의 동기들보다 더 지혜롭고 어떤 헤겔적인 “이성의 간계”를 허용하지 않으며, 객관적 정신의 표방으로서의 그러한 정치 형태들이 더욱 개선될 것이라는 것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스피노자에게 정치학은 이성의 장이라기 보다는 정념들의 장이며, 정치학은 정념들을 지배하거나 억누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정치조직을 개선하는데 있어서 자연적-인간적 정념들의 대부분을 이해하고 활용하기 위해 이성에 의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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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스피노자에 관한 마슈레이의 논의의 정치적 함의는 여기서 고려하고 있는 철학책에서는 결코 분명하게 말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헤겔에서 정점에 이른 부르주아적 전통과 스피노자를 비교하는 것은 반헤겔적인, 그리고 심지어 ‘비-변증법적인’ 맑스주의 정치학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적 영감을 받은 정치학은 여러가지 관련된 의미에서 비-변증법적이다(주31). 그 중 하나는 주체와 객체라는 변증법적 대립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변증법적 대립)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는 생산력과 (우리 자신의 ‘인간본성’을 포함하여) 본성의 인간적 향유(enjoyment)를 대가로 하여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 생산력의 금욕적 발전을 통해서 자연으로부터 짜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에 따르면]오히려 자유를 위한 투쟁은 그 정복자와 지배자라기보다는 자연의 발전의 일부로서, 그리고 그 내부에 위치지워지는 것이다. 마슈레이가 지적하고 있듯이,
해방(liberation)은 주체들이 실재성에 부여한 배치들의 외부에다가 자신들(주체들)을 위치시키는 주체들에 의한 실재성의 조작이 아니다. 즉 (해방은) 독립적인 개인들로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행위가 각인되는 상호관계의 네트워크 내부에서 집단적 체계의 (가장) 다방면적인 요소들로서의 주체들 자체를 구성하는 존재론적 힘의 표현이자 노력(exertion)이다.(CS, 27-28)
물론 스피노자에게 모든 인간 행동이 발생하는 ‘집단 체계’는 인간 사회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생명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슈레이는 여기에서 스피노자의 자유관을 요약하고 있다)
26. 또 하나는, 스피노자적-맑스주의적 정치학은 -- 국가나 정당과 같은 -- 보다 고차적인 평면(plane)에서 갈등들이나 차이들의 변증법적인 종합/해결이라는 의미에서의 중재를 피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고차적인 평면’을, 마치 힘(potentia)에 대해 권력(potestas)이 그러하듯이, 갈등이나 차이 속에서 제 당파들에 대해 자기 이해관계를 가진 지배로서 재-부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치적 조직화는 (‘상향’적이라기 보다는) 외향적인 민중들로부터 작동하며, 위계적인 피라미드를 형성한다기보다는 다른 민중 집단들과 수평적으로 접속하는 ‘대중(the multitude)’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들은 이미 프랑스에서는 ‘자주관리(autogestion)’와 ‘미시정치’의 전략들이며, 이탈리아에서는 (네그리 자신이 저명한 대변인이자 이론가인) ‘아우토노미아’의 전략이며, 미국에서는 ‘직접적인’, ‘급진적인’ 혹은 참여민주주의와 동맹의 정치학의 전략들이다. -- 이 모든 것들은 제도적인 형태와 이론적인 형태 모두에서 ‘대의제적’ 정치학을 극히 의심하며 이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를 갈등하는 사회세력들의 초월적, 종합적 매개라기보다는 이러한 갈등 사이의 내재적인 투쟁의 영역으로 이해한다.
27.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스피노자-맑스주의적 정치학은 모든 형태의 목적론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역사’가 ‘우리의 편에 있다’는, 정신(Spirit) 혹은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 생산력들의 발전이 필연적으로 인간 자유의 실현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혹은 개연적으로 그럴 것이라는) 어떠한 -- 헤겔적이거나 헤겔-맑스주의적인 -- 증거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치 투쟁은 생산성의 어떠한 수준이 힘을 얻게 되든 간에, 이러한 수준과 더불어서 도처에서,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즉각적으로 자유를 실현한다는 부담감을 -- 매우 크게 -- 떠맡야만 한다. (이 입장은 물론 투쟁의 일부로서의 인간적-자연적 생산력을 증가시키는 것을 방해하지 못한다. 그러한 증가가 자유의 실현에 종속되어 있는 한에 있어서는 말이다.) 우리는 “역사는 항상 진보한다”, 성취라기보다는 재앙에 의해서 “설령 나쁜 측면으로 향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라는 자기만족적인, 심지어 신비적이기까지 한 헤겔적인 믿음을 없애버려야 한다. -- 변증법적 요술(부정의 부정, 이성의 간계)에 의하면, 그러한 재앙은 장기적으로 볼 때에는 어느 날, 설령 우리가 죽었을 때에도, 이로운 것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없애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자본주의에 적용된, 헤겔에 의해 고무된 ‘변증법적’ 역사철학은 아마도, 불명확한 (그리고 점점 더 가망이 없어 보이는) 미래에는 최후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구원을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려고 하는 고상하고 비극적인 감수성에 의해 대체된 순진한 낙관주의와 더불어서 19세기의 진보라는 신화에 다름 아닐 것이다.
28. 그러므로 헤겔적-변증법적 목적론이 없어진 역사는, 그러나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간에 어떤 모양이나 방향을 상실할 것이다. 맑스가 진단한 자본주의적 발전의 몇가지 ‘법칙들’은 여전히 적용된다. 즉 이윤율 하락 경향과 더불어 ‘최종적인’ 이윤위기는 결코 도래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하는 반대-경향들과 함께 존재한다 ; 부와 빈곤의 간극이 끊임없이 증가하는 경향은, 효과적인 정치적 저직화의 범위 외부에 남아있는 세계의 모든 지역들에게로 떠넘겨진 immiseration과 함께 존재한다 ; 축적하고 집중하려는 자본의 경향, (심리적으로 강화하며) 지리적으로 팽창하려는 시장의 경향, 사회적 삶의 더욱 커다란 희생을 포함하려는 상품-생산 (그리고 상품 소비)의 경향, 과잉-생산/저-소비라는 주기적인 위기들을 수반하는 경제적 성장의 경향 등등. 생산양식으로서의 자본주의는 다시 말해서 이 점에 있어서, 그리고 다른 방식에서 매우 모순적인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들은 (혹은 적어도 그 중 몇몇은) 역사의 동력을 구성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더 이상 헤겔적 맑스주의에 의해 이해된 목적론적 의미에서의 변증법적 모순으로, 즉 어떤 빛나는 미래의 순간에서 종합/해결될 운명에 있다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확실히 모순적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어떠한 부정성도 없이 그러하다. 즉 그 경향들과 그 반대경향들 모두가 현실적인 힘들이며, 어떤 부정의 부정이 아니라 전적으로 긍정적인 힘의 관계들이며, 바로 이러한 관계들만이 그 적대 속에서 그 결과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맑스가 언젠가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계급투쟁의 역사”가 아니다. 또한 그것은 (맑스가 주장했다고 이미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달리) 힘들의 생산력들과 생산관계들의 변증법도 아니다. 왜냐하면 목적론이라는 마술적 사고를 제외하면 어떤 것도 이들 두가지 중 어떤 것이 해결을 향해 변증법적으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즉 혁명적인) 모순에 다다를 것인지 확신시켜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영감을 받은 맑스주의에게 유일한 보편적인 역사는 생산양식으로서의 자본주의의 역사이다. 그리고 더욱 좋기도 하고 더욱 나쁘기도 한, 역사의 동력은 자본 자체의 계속적인 (그리고 모순적인) 자기팽창인 것이다. 즉 주체없는 역사인 것이다. 그 주체가 계급주체 (프롤레타리아트)이든 아니면 초월적 주체 (유적 존재)이든 간에 말이다.
29. 맑스주의의 지적인 타당성에 대한 기여에 덧붙여 목적론이라는 최후의 흔적을 폐기하는 것은 맑스주의자들이 다른 행동주의자들과 거리를 거의 두지 않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모든 인간성에 대한 자본주의의 부정에 대한 최종적인 부정으로서의 세계 공산주의를 향한 불가피한 진보라는 이름으로 인간성에 반하는 비-자본주의적 범죄들을 감내하는 것을 더 이상 정당화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적 맑스주의자들에게 유일하게 보증할 수 있는 역사적 경향은 자본이 확장하고 자본주의가 강화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수반하는 모든 모순들을 확장하고 강화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 ‘불가피하다’는 자신만만한 버팀목이 없이도, ‘변증법적’인 역사적 진보에 관한 자기만족적이고 비극적인 의미없이도 -- 대중(multitude)이, 무엇보다도 이미 주어진 생산력들의 수준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수준의 자유이든 간에 누구나 그 자유를 실현한다는 목적을 주장함으로써 도전받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불법과 모든 불법을 결코 용서할 수 없게 되며... 따라서 그 어떤 공범의 외양은 잘못된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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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맑스에 대한 스피노자의 가능한 영향에 관해서는 다음의 논문들을 참조하라. Maximilien Rubel, “Marx a la rencontre de Spinoza” 7-28 ; Alexandre Matheron, “Le Traite Theologico-Politique vu par le jeune Marx” 159-212 ; Albert Igoin, “De l'ellipse de la theorie politique de Spinoza chez le jeune Marx” 213-28. 이 글들은 모두 Cahiers Spinoza 1 (Summer 1977)에 실려 있다.
2. 들뢰즈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아직 철학적인 낙인이 찍혀져 있지 않는 사람으로는 베르크손과 니체가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들뢰즈가 2권의 책을 써낼 만큼 열심히 연구했던 유일한 인물이다. 들뢰즈의 가장 맑스주의적인 저작이라고 설득력있게 논해지고 있는 <앙띠 오이디푸스>에 대해서 스피노자가 어떠한 기여를 했는가를 검토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이러한 방향으로 작업하는데 몇가지 암시를 하고 있는 것으로는 내가 쓴 <분열분석입문(Introduction to Schizoanalysis)>(London: Routledge, 1999), 특히 제4장을 보라.
3. Fredric Jameson, “The Re-invention of Marx,” Times Literary Supplement, 1975년 8월 22일, 942-43을 보라.
4. 니체와 헤겔간의 핵심적인 차이는 헤겔이 자신의 현상학을 동등하지 않는 것들(주인/노예)간의 관계들에 기초를 두었다고 한다면, 니체는 그의 계보학을 동등한 것들간의 관계와 더불어 출발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Nietzsche의 <도덕의 계보학(The Genealogy of Morals)>, 특히 첫번째 에세이를 보라).
5. 맑스주의에 대한 재평가를 하려는 이유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평가와 토론에 관해서는 Stanley Aronowitz, The Crisis in Historical Materialism: Class, Politics, and Culture in Marxist Theory, 2nd rev. ed. (London: Macmillan, 1990)을 보라.
6. 1789년 프랑스 대학명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에 관해서는 Francois Furet, Marx and the French Revolutio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8) ; George Comminel, Rethinking the French Revolution: Marxism and the Revisionist Challenge (London: Verso, 1987)을 보라.
7. 알튀세르가 스피노자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는 것에 관해서는 Essays in self-criticism (London: NLB; Atlantic Highlands, N.J.: Humanities Press, 1976)을 보라.
8. Essays in self-criticism, 특히 제2장을 보라.
9. A Theory of Literary Production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78).
10. Hegel ou Spinoza (Paris: Francois Maspero, 1979). 이 글에서는 이 책의 쪽번호만을 인용함. 마슈레이는 이 책에서 헤겔을 대신한 것으로서 스피노자가 맑스주의에 대해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하고 있다기 보다는 단순히 질문을 제기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공평하다.
11. 마찬가지 맥락에서 Stephen J. Gould는 Wonderful Life: the Burgess Shale and the Nature of History (New York: W.W. Norton, 1989)에서 진화론에 있어서 목적론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12. 이것은 맑스에게 있어서 나타나는, 분명하든 암묵적이든 간에, 유일한 역사철학은 아니다. 구체적인 역사적 탐구들은 분명히 더욱 복잡하다. 하지만 <브뤼메르 18일>처럼 복잡한 설명도, 불가피한 혁명에 대한 조건을 준비하기 위한 저지대로서 작동하는 역사의 ‘몰(mole)’이라는 형상으로, 분명히 변증법적인 역사적 진보라는 통념을 보유하고 있다. 맑스에게서 역사에 관한 철학들에 대한 연구에 대해서는 Walter Adamson, “Marx's Four Histories: an approach to his intellectual development,” History and Theory 20:4 (1982) 379-402을 보라.
13. 헤겔은 스피노자를 일원론자라고 간주한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질료를 그 모든 복잡성 속에서 파악하는데 필수적인 부정성이라는 역동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마슈레이는 그 복잡성이 이후에 정신과 상호작용하는 존재보다는 스피노자적인 실체 속에서 즉각 실현된다고 읽는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들뢰즈는 실체를 그 자체로 차이를 생산하는 것이라고 본다. 들뢰즈의 Expressionism in Philosophy : Spinoza (New York: Zone Books, 1990); Michael Hardt, Gilles Deleuze: an Apprenticeship in Philosophy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3)을 보라.
14. ‘코나투스’에 관해서는 G. Deleuze, Spinoza, practical philosophy (San Francisco: City Lights Books, 1988); 그리고 스피노자적인 줄기에서, M. Hardt, Gilles Deleuze; on the expansion of human-natural powers in a Spinozan vein, see Deleuze and Guattari's Anti-Oedipus (New York: Viking, 1977)를 보라.
15. 스피노자와 환경론에 관해서는 Arne Ness, “Spinoza and ecology,” Speculum Spinozanum, 1677-1977, Siegfried Hessing, ed.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77) 418-425을 보라. 네스는 “어떤 위대한 철학자도 바루흐 스피노자만큼이나 기본적인 생태학적 태도의 명료화와 분절화의 방식을 제공하지 못했다”(423)고 주장한다 ; 또 네스의 Freedom, Emotion and Self-subsistence (Oslo: Universitets-forlaget, 1975); Andrew Collier, “The Inorganic Body and the Ambiguity of Freedom,” Radical Philosophy 57 (Spring 1991) 3-9을 보라.
16. Spinoza, Tractactus Theologico-Politicus [Gebhardt edition, 1925] (Leiden; New York: E.J. Brill, 1989)을 보라.
17. 맑스에게서는 여러가지 역사철학들이 있다.(위의 주석 12번을 보라). (알튀세르가 했던 것처럼) 맑스에게서 분명한 입장을 가르는 명확한 ‘단절’을 찾기보다는 그의 저작 내부에서 상이한 혹은 ‘경쟁하는’ 관점들간의 긴장을 인정하는 것이 더욱 엄밀한 것이자 유용한 것일 것이다.
18. 생산력들은 확실히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력(labor-power)을 포함한다. 하지만 또한 자본주의가 제공한 지식, 기술, 조직화도 포함한다. 생산관계들은 분명히 계급들간의 관계를 포함한다. 그러나 또한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에게 공통적인, 따라서 이 양자의 이해관계에 결코 복무하지 않는 (소유적 개인주의나 금욕주의처럼) 문화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들도 포함한다. 계급을 초월적-주관적 용어와는 다르게 이해하려는 시도에 관해서는 Nicos Poulantzas, Classes in Contemporary Capitalism (London: New Left Books, 1975)과 Guillermo Carchedi, On the Economic Identification of Social Classes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78)를 보라.
19. 이 모델은 Communist Manifesto (Marx and Engels, Basic Writings on Politics and Philosophy, Lewis Feuer, ed. [Garden City, New York: Doubleday, 1959])에 나타난다. 즉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의 어떤 특정한 발전 단계에서는, 봉건 사회가 생산하고 교환하는 조건은 더 이상 이미 발전된 생산력들과 양립할 수 없게 된다. 그것들은 족쇄가 되어 버린다. 그것들은 번개를 맞아 폭발해야 하며, 폭발했다.”(84쪽). -- 여기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투쟁으로서의 역사는 가장 놀라운 공식 중의 하나로 또한 나타난다. “지금까지 존재한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81쪽). 맑스의 천재성은 헤겔의 주인과 노예라는 주객변증법을 변혁적 인간노동과 자연환경간의 변증법으로 대체했다는 데 있다. 하지만 헤겔에 대한 이러한 ‘유물론적’ 전도는 (보드리야르가 <생산의 거울(The Mirror of Production)>[St. Louis: Telos Press, 1975]에서 지적하듯이) 단순히 맑스적인 ‘생산의 형이상학’을 산출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리고/또는 주객변증법을 재생산하는 것 -- 이 속에서 단순히 인간이라는 종의 운명은 자연의 지배와 변경할 수 없을 정도로 결부되어 있다 -- 에 불과했다. 어쨌든 생산력의 발전이 그 자체로 그리고 저절로 인간의 자유를 산출한다는 가정은 계속 의심을 받고 있다. 이미 1950년대에 마르쿠제는 (<에로스와 문명(Eros and Civilization)> [Boston: Beacon Press, 1974)에서) 생산력들의 발전과 자유의 실현간의 지체를 지시하기 위해서 ‘잉여-억압(surplus-repression)’이라는 중요한 용어를 만들어 냈다. 더욱 최근에는 레지 드르베(Regis Debray)가 (<정치적 이성 비판(Critique of Political Reason)>[London: Verso, 1983]에서) 생산력들의 발전과 정치적 진보의 번영, 그리고 자유의 실현간에는 어떠한 관계도 없다는 식으로 훨씬 멀리 나아갔다.
20. 가장 주목할만한 것으로는 <고타강령비판>이 있다. 여기에서 맑스는 처음부터 가치는 인간노동력은 물론이고 자연으로부터 파생된다고 올바르게 주장했다. 또한 <1844년 수고>에서 소외에 관한 구절에서 그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고 주장했다.(예를 들어 Marx, Early Writings, Q. Hoare, ed. [New York: Vintage, 1975] 327-28을 보라).
21. 들뢰즈와 가타리는 인간과 자연의 분리불가능성을 <앙띠 오이디푸스>에서 자신들의 맑스주의의 핵심적 성격으로 만든다. 특히 25쪽을 보라. “자연 = 산업, 자연 = 역사”
22. 이것은 네그리와 폴 브릴리오가 든 예이다. 이들은 1917/1929년을 자본주의적 위기가 그 생산력 잠재력을 해방시키는 자본의 전복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여가와 사회적 사치 대신에 영원한 전쟁이라는 형태로 그러한 잠재력의 자기파괴로 나아가는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생각한다. Antonio Negri, Revolution Retrieved: Writings on Marx, Keynes, Capitalist Crisis, and New Social Subjects (London: Red Notes, 1988) 와 Paul Virilio, Speed and Politics (New York: Semiotext(e), 1985), 특히 제4부인 “The State of Emergency”를 보라.
23. Milan: Feltrinelli, 1981; 영역판 - The Savage Anomaly: the Power of Spinoza's Metaphysics and Politics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1).
24.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82.
25 Cahiers Spinoza no.4 (1982-83년 겨울) 9-37; 이하 이 글에서 인용된 논문들은 쪽수만을 (‘CS’와 함께) 표기한다.
26. 그러므로 스피노자에 관한 네그리의 독해는 맑스에 관한 알튀세르의 독해를 반영한다. 이 두사람은 모두 중요한 문헌학적인 난점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와 맑스의) 저작 내부에서 ‘단절’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한다.
27. 들뢰즈는 <에티카>의 초반부와 후반부간의 차이들에 대해 매우 상이한 이유를 제시할 것이다. 이것은 사변적인 것에서 실천적인 고려로 이동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들뢰즈의 Expressionism in Philosophy를 보라.
28. 피에르 마슈레이, “Spinoza, la fin de l'histoire et la ruse de la raison,” Spinoza: Issues and Directions (Leiden, The Netherlands: E.J. Brill, 1990) 327-46을 보라. 여기에서는 “SID”라는 축약어와 함께 쪽수만을 표기했다. 들뢰즈의 스피노자 독해에 관한 마슈레이의 평에 관해서는 마슈레이의 “Penser dans Spinoza", Magazine Litteraire 257 (1988년 9월호) 40-43를 보라.
29. 하트가 영역한 Savage Anomaly의 영어판에 쓴 “역자 서문”(주 26)을 보라. 그리고 마르샬 게루(Martial Gueroult)가 쓴 두 권의 연구서인 Spinoza (Hildesheim: Georg Olms Verlag, 1968/1974)을 보라. 게루는 대부분의 번역자들과 주석가들이 부정하고 있을 때에도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potentia/potestas라는) 구별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증명한 사람으로 인용되곤 한다. 하지만 동시에 말해야만 하는 것은 네그리와 하트가 potestas에 대해 potentia를 특화시킴으로써, 그리고 스피노자가 potestas에 대해 아주 많은 관심을 보였고 또 정당화했다는 것을 부정함으로써 스피노자가 현실적으로 그랬던 것보다 훨씬 더 스피노자를 아나키스트로 만들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네그리의 견해에 따르면, 그러한 정당화를 필요로 한 것은 스피노자의 시대에서는 상대적으로 저 발전된 사회에서 였다고 한다. 즉 potestas는 사회가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 발전된 현재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30. potentia와 potestas간의 구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국식 축구와 미식 축구간의 차이들, 혹은 즉흥 재즈와 심포니 오케스트라간의 차이를 생각하면 된다. 또한 내가 쓴 “‘Introduction to the Non-Fascist Life’: Deleuze and Guattari's ‘Revolutionary’ Semiotics,” Esprit Createur XXVII:2 (1987년 여름) 19-29을 보라. 그리고 내가 쓴 Introduction to Schizoanalysis (London: Routledge, 1999)의 서문을 보라.
31. 다른 몇가지 중요한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것은 여전히 ‘변증법적’일 것이다. 물론 이것들 중 어떤 것도 역사적 과정 자체에 변증법을 귀속시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특히 역사적 사건들이나 경향들에 관한 판단을 막아버리기 보다는 균형잡게 한다는 점에 있어서, 그리고 정치적이고 지적인 입장을 역사적 조건과 기획들에 관련시킨다는 점에 있어서 말이다.
32. 몇가지 다른 방식은 제한된 자본주의적 경제적 유통의 도구적 합리성과 전체로서의 체계의 비합리성간의 모순을 포함한다. 임금을 억제하고/거나 일자리를 없애려는 경향과 생산된 상품에서 이윤을 실현하기 위해 증가된 권력추구를 위한 필요간의 모순. 이러한 연결에서, 스피노자는 그의 모든 유물론에도 불구하고 맑스가 헤겔로부터 얻었던 것 -- 즉 모순이라는 통념 -- 을 결여하고 있다는 알튀세르의 애도는 상기할 만하다.(<자기비판 에세이(Elements d'autocritique)>, 81를 보라). 마슈레이에게, 맑스주의적 철학에 남아 있는 한가지 임무는 변증법적 부정성 -- 이것은 불가피하게 주관성과 관념론을 수반한다 -- 으로부터 자유로운 역사적 모순 개념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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