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사실은 도덕 관찰의 인과적 전제인가?
조 현 아*서울대학교
요 약 문
이 논문은 우리가 도덕 관찰을 설명하기 위해 도덕 사실의 존재를 상정할 필요가 없다는 길버트 하만의 주장에 대한 도덕 실재론자들의 반론을 검토한 글이다. 하만은 도덕의 경우에는 과학의 경우와 달리, 도덕 관찰을 하는 사람의 심리적 배경 및 사회화 과정에 의해서 그 사람의 도덕 판단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도덕 사실에 호소하는 모든 도덕 실재론의 시도는 틀렸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도덕 실재론자들은 도덕 사실들이 도덕적 확증을 위해 요구되는 설명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반론을 제시한다. 하만의 반실재론에 맞서는 도덕 실재론자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도덕 관찰이 보고하는 외부 세계의 도덕적 실체를 가정함으로써 도덕적 관찰이라는 일상적인 도덕적 경험을 최선으로 설명할 수 있다. 둘째, 우리가 도덕 사실이 비도덕 사실들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 실재론자들의 노력이 하만 식의 도덕 반실재론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는 주장들이 있는데, 주요 주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도덕 실재론은 도덕 사실이 도덕적 관찰을 일으키는 인과적 관계 뿐 아니라 인과성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유발시키는 원인에 대하여 보다 본격적인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 둘째, 도덕적 측면, 속성, 사실 등을 실체로서 가정하는 도덕 인과론 논의는 애초부터 성립되기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에, 메타윤리학적 담론에서 도덕 존재론, 도덕 인과론에 대한 논의를 중단해야 한다.
도덕 실재론의 가장 큰 의의는 그간 메타윤리학에서 논의의 맥락을 떠난 것으로 치부되어 온 도덕 존재론의 영역을 그 중심주제로 끌어들임으로써 새로운 메타윤리학의 영역을 개척하고자 한 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 실재론의 주장이 보다 강력하게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것은, 도덕 실재론이 그 존재론의 핵심이 되고 있는 도덕 인과성 개념 자체에 대한 보다 적극적이고도 철저한 논의를 하지 않은 데에 있다. 도덕 실재론자들은 도덕 사실이 어떻게 도덕 관찰을 일으키는지, 또 우리가 그 방식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등에 관하여 보다 본격적인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
※ 주요어 : 도덕 실재론, 하만, 도덕 관찰, 도덕 사실, 도덕 인과성
1. 들어가며
도덕 실재론자들은 무엇이 평범한 사람들로 하여금 일상을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이 도덕 경험을 일으키는가의 문제에 대해, 그 인과적인 원인으로서 도덕적 사실의 존재를 확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도덕 실재론은 도덕적 사실이 어떻게 우리의 도덕 관찰을 일으키는지를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도덕 사실을 어떻게 직접 인식할 수 있는지에 대한 도덕 관찰(moral observation)의 문제와 도덕적 사실이 어떻게 도덕 관찰을 일으키는지에 관한 도덕 인과성(moral causation)의 문제에 대한 해명이다.
도덕 인과론(a theory of moral causation)은 도덕적 특징이나 사실들이 어떻게 도덕 관찰을 일으키는가, 도덕적 측면들이 도덕적 지각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비물리적인 도덕적인 특징들(moral aspects)이 어떻게 정상적인 인식상태를 산출할 수 있는가 등의 문제를 그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메타윤리학의 한 영역이다.
도덕 관찰과 도덕 인과론의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도덕 실재론의 쟁점으로 첨예화시키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대표적인 도덕 반실재론자 길버트 하만(Gilbert Harman)이다. 본고에서는 하만의 도덕 인과론적인 반실재론에 반대하는 주장을 미국 실재론자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도덕 실재론에서 도덕 관찰과 도덕 인과론의 주제가 갖는 의의와 한계를 검토하고자 한다.
2. 도덕 인과론에 대한 문제제기: 하만의 도덕 반실재론
에이어, 스티븐슨 등의 초기 반실재론자들이 도덕 진술이 ‘관찰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의미론적’ 접근 방법을 채택하는 데 그쳤다면, 하만(G. Harman)은 관찰 검증을 가능하게 하는 도덕 실재나 도덕 사실의 존재 여부를 묻는 “존재론적 의문”을 제기한다. 하만은 자신의 주저 ?도덕성의 본질?(The Nature of Morality)』의 서두를 “도덕 원칙들은 과학 원칙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검증되고 확인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하만은 도덕 원칙들이 과학 원칙들과 같은 방식에서 검증되고 확인될 수 있는지를 고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을 제안한다. 당신이 길을 가다가 어린이들이 모여서 고양이에게 기름을 붓고 그 위에 불을 놓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이때 당신은 그 아이들이 도덕적으로 그른 일을 한다고 판단하는 ‘도덕 관찰’을 경험한다. 하만이 문제삼으려 했던 것은 이러한 경험 자체가 아니다. 우리는 분명 그 아이들이 도덕적으로 그르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하만이 우리에게 숙고하기를 요구한 것은 “무엇이 우리에게 그러한 도덕 경험을 하게 했는가?”이다. 이제까지 많은 실재론자들은 도덕 사실이 존재함으로 해서 우리가 그러한 도덕 관찰을 한다고 설명해 왔다. 하만은 이러한 설명 방식의 타당성을 묻는다. “당신의 반응은 실제적인 그름(wrong)의 속성에 기인하는가? 아니면 당신의 도덕적 감각(sense)의 반영에 불과한가?” 이 물음은 “우리가 도덕 관찰을 설명하기 위해 도덕 사실의 존재를 상정해야 하는가”에 관한 물음이다.
하만에 의하면, 우리는 과학의 경우에는 우리의 ‘관찰’을 야기하고 설명해주는 어떤 물리적 사실(physical facts)에 비추어 그에 관한 믿음을 설명할 수 있지만, 도덕의 경우에는 도덕 관찰을 하는 사람의 심리와 도덕 감수성(moral sensibility)과 같은 비도덕적(nonmoral) 사실들을 상정하는 것만으로 도덕 관찰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도덕 판단과 도덕 믿음은 관찰하는 개인의 심리적 배경에 의해서만 그리고 이 심리적 배경을 만들어낸 사회화 과정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의 도덕 관찰을 설명하기 위해서 도덕 사실(moral fact)에 호소하는 실재론적 시도는 “완전히 부적절한”(totally irrelevant) 것에 다름 아니다.
하만은 도덕 관찰이 일어난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만에 의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관찰은 윤리학에서보다 과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앞의 사례의 경우 그 장면을 본 사람은 의식적인 추론 없이 즉각적으로 도덕 판단을 내리면서 그 아이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도덕 관찰의 근원으로서의 ‘도덕 사실’을 반드시 가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과학의 경우에는, 관찰 진술들이 참이고 또 그들이 보고하는 사건이나 일의 상태가 부분적으로 관찰 자체에 책임이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아주 잘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도덕의 경우에는, 도덕 관찰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것을 표현하는 관찰 진술이 참이고 그것이 보고하는 도덕 사실이 일으켰거나 그 도덕 관찰을 책임 짓고 있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하만에 의하면, 우리는 관찰자의 마음, 심리 또는 감수성 등만으로도 충분히 그리고 쉽게 도덕 관찰을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내적 조건들만으로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intelligible) 것으로 만드는 데 충분하다는 것이다. 하만에 의하면, 과학적 관찰의 경우에 우리는 관찰에서 물리이론으로, 그리고 관찰에서 물리적 사건으로, 그래서 거기서 다시 관찰로 돌아오는 과정을 밟을 수 있지만, 도덕의 경우에는 상당히 다르다. 워너(R. Werner)가 분석한 하만의 논증 전략은 다음과 같다.
하만에 의하면, 도덕적 관찰(moral observation)과 과학적 확증(scientific confirmation)의 과정은 과학 이론(ST) ⇔ 과학 원리(SP) ⇔ 과학적 관찰(SO) ⇔ 과학적 관찰보고(RSO) 라는 관계를 갖는다. “안개방을 관통하는 프로톤은 수증기 자국을 남겨 놓는다”라고 하는 과학 원리(SP)는 ‘양자물리학’이라고 하는 과학 이론(ST)으로부터 도출된다. 한편 “내가 보고 있는 안개방을 관통하고 있는 프로톤이 수증기 자국을 남겨 놓고 있다”라는 과학적 관찰(SO)과 “저기 프로톤이 간다”라는 과학적 관찰보고(RSO)는 “안개방을 관통하는 프로톤은 수증기 자국을 남겨 놓는다”라고 하는 과학 원리(SP) + 모종의 관찰(안개방의 자국)로부터 도출된다. 과학적 관찰(SO)은 과학 원리(SP)의 검증을 돕고, 과학 원리(SP)는 다시 과학 이론(ST)의 검증을 돕는다. 따라서 과학 이론(ST)과 과학 원리(SP)에서 가정된 실재들은 과학적 관찰(SO)에서 관찰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하만의 생각이다.
그러나 하만에 의하면 도덕적 확증(moral confirmation)의 과정은 이와 다르다. 도덕 관찰이 과학적 관찰의 경우에서처럼 “도덕 이론”(MT) ⇔ “도덕 원리”(MP) ⇔ “도덕 관찰”(MO) ⇔ “도덕 관찰보고”(RMO)의 구조를 갖는다고 해 보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생물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도덕적으로 나쁘다”라는 도덕 원리(MP)는 도덕 이론(MT)으로부터 도출된다. 이 도덕 이론의 예로는 공리주의 이론이나 칸트주의 이론 등이 있을 것이다. 한편, “아이들이 이유 없이 고양이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라는 도덕 관찰(MO)과 “고양이에게 불을 지르는 것은 나쁘다”라는 도덕 관찰보고(RMO)는 도덕 원리(MP) + 모종의 관찰(고양이에게 이유도 없이 불을 지름)로부터 도출된다. 그러나 이 경우 도덕 관찰(MO)은 도덕 이론(MT)의 검증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도덕 관찰보고(RMO)에 대한 최선의 합리적 설명은 관찰자의 심리장치에 의존하기 때문에, 즉 도덕 사실의 존재를 요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과학적인 관찰들은 과학 이론들을 확증하고 세계에 관한 정보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왜냐하면 이 경우 최선의 설명을 위한 추론이 적어도 원리상으로는 아무런 갭(gab)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적 확증의 경우에는 경우가 다르다. 도덕적 확증은 도덕 사실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도덕 관찰이 도덕 원칙을 확증한다는 점, 그래서 도덕 사실을 설명할 수 있음을 가정하고 있지만, 하만에게는 “원리에서 관찰로 이르는 설명의 고리(explanatory chain)가 도덕에서 끊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하만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덕 원칙은 아이들이 고양이에게 불을 놓는 것이 왜 그른지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행위의 그릇됨(wrongness)의 속성은 당신이 목격하고 있는 그 행위 자체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도덕 관찰이 도덕 이론을 확증한다 할지라도 이것이 도덕 사실들의 실재를 입증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하만(G. Harman)의 반실재론 논의는 옥캄의 면도날에 따라 설명상의 불필요한 가정을 제거해야 한다는 설명상의 단순성(explanatory simplicity)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것 같다. 하만은 “소위 도덕적인 관찰들의 발생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떤 도덕 사실들에 대한 가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당신이 도덕 감수성에 기초해서 당신의 판단 속에 잘 반영되는 그러한 원리들을 지니고 있음을 가정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 사실을 존재론적으로 가정하고 시작하는 모든 도덕 실재론의 논의는 “부적절하다.” 우리가 행위자의 마음 장치나 도덕 감수성만의 관점에서 도덕 관찰을 설명할 수 있는 한,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도덕 사실을 전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3. 도덕 실재론자들의 도덕 인과론 논의
가. 일상적인 도덕적 경험에 의거한 설명: 워너, 스터젼, 랠튼
하만의 이러한 도덕 사실의 부재(absence) 논증에 맞서서 도덕 관찰과 도덕 인과론적 입장에서 실재론을 옹호하는 논증은 주로 워너, 스터젼, 랠튼, 브링크 등의 미국 실재론자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그들은 우선 도덕 사실들이 도덕적 확증을 위해 요구되는 설명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을 여러 각도에서 진행시켜 왔다. 하만과 도덕 실재론자들이 도덕 관찰을 바라보는 시각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도덕 관찰’ 자체에 인식론적 비중을 부여하는 정도의 차이에 있다 할 수 있다. 하만은 도덕 관찰을 추론의 결과로서 이해하지 않고 감각적 자극에 기초해서 도덕 판단이 내려질 때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앞서 거명된 미국의 도덕 실재론자들은 도덕 관찰을 도덕 실재에 대한 즉각적이거나 직접적인 근접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들은 만일 관찰에 대한 최선의 설명이 그것을 참(true)인 것으로 여기게 한다면, 관찰은 우리에게 도덕 실재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이들 미국 실재론자들은 우리가 도덕 관찰이 보고하는 외부 세계의 도덕적 실체를 가정함으로써 어느 개인이 왜 그러한 방식으로 도덕 관찰을 경험하는가를 최선으로 설명해줄 수 있다면, 이는 우리가 도덕 관찰이 참이라고 믿을만한 근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들 주장대로라면, 우리가 도덕 실재를 가정함으로써 도덕 경험의 다른 측면들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래서 도덕 인과론을 정립할 수 있다면, 이것은 곧 도덕 반실재론을 반대하고 도덕 실재론을 옹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될 것이다. 이제 이를 증명하는 것은 도덕 실재론자들의 몫이다. 이에 대한 도덕 실재론자들의 논증을 워너(R. Werner), 스터젼(N. Sturgeon), 랠튼(P. Railton), 브링크(D. O. Brink)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워너(R. Werner)는 우리가 도덕 사실(moral facts)을 가정하지 않고서는 도덕적 개심(moral conversion)이나 도덕적 진보(moral progress)와 같은 인간 경험과 역사의 중심적인 특징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실재론적 가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워너(R. Werner)는 조야한 공리주의에 심취해서 노예 제도의 정당화를 믿는 프레드(Fred)라는 젊은이의 예를 들고 있다. 하만은 이 경우 프레드의 공리주의에 대한 집착은 조건화되고 사회화된 그의 심리적 배경 때문이며, 이것은 도덕 사실(moral fact)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워너는 프레드가 “뿌리”(The Root)라는 영화를 통해 노예제도에 대한 자신의 도덕 믿음을 완전히 뒤바꿈으로써 도덕적 개심을 경험하였다면, 과연 하만의 심리적 조건에 의한 설명 방식으로 이를 어떻게 설명하겠느냐고 묻는다.
워너에 의하면, 하만은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도덕 사실의 실재를 인정해야 한다. 즉, 프레드가 좋은 결과의 총합만을 도덕적 고려의 기준으로 삼는 조야한 공리주의의 도덕 원리를 포기하게 된 것은, 프레드의 심리적 장치나 도덕적 감수성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공리주의 이론과 원리를 반증해 주는 사례, 즉 도덕적 사실(moral fact)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도덕적 개심이 가능하려면 우리가 기존에 견지하고 있는 도덕 이론과 도덕 원리가 반증되어야 하고, 그것들이 반증되기 위해서는 그 반증 사례로서 도덕 사실이 실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도덕적 개심’과 같이 중요한 우리의 도덕 경험 그리고 우리의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믿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도덕 사실의 존재를 확언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논증을 펼치고 있는 또다른 도덕 실재론자로는 스터젼(N. Sturgeon)이 있다.
스터젼의 도덕 실재론 역시 하만의 반실재론을 비판의 대상으로서 염두에 두고 있다. 스터젼은 우리의 일상적인 담론에서 도덕적 설명(moral explanation)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고 또 자주 목격되는지에 주안점을 두고, 도덕 사실의 존재 확언이라는 도덕 실재론의 기본 테제를 옹호하고자 한다. 스터젼은 우리가 어떠한 자연 속성이 도덕 속성을 수반하는가를 명백히 밝혀줄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럴수록 우리는 우리가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일상적인 도덕 경험과 담론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에게 설명적 적실성(explanatory relevance)의 역사실적 테스트(counterfactual test)를 제안한다. 이는 어느 한 사실이 설명적으로 적절한가(explanatorilly relevant)를 보기 위해서 임시적으로 설명적인 사실이 획득되지 않았을 때조차도 그 설명이 발생할 것인가를 테스트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들 대부분은 히틀러가 도덕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그런 잔인한 행동들을 범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미국의 노예제도는 특히 사악한 제도였기 때문에 당시 미국의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심각한 수준의 운동이 일어났다는 가정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별다른 무리를 느끼지 않는다. 이와 같이 우리가 도덕 판단을 내리면서 도덕 속성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그 어떠한 부자연스러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도덕 사실이 세계 내에 존재하며, 이러한 도덕 사실들이 신비적이거나 비자연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점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스터젼과 유사하게 하만을 비판한 실재론자로 우리는 피터 랠튼(Peter Railton)을 들 수 있다. 랠튼은 도덕 사실의 인과적 효력과 설명적 능력이 그에 대한 우리의 인식(recognition)을 선행하는 경우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나’는 ‘나’의 사고를 지배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효력 때문에, 실제로 부정의한 법과 제도가 운용되는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는 지배자들은 사회 성원들의 중요한 사회적 재화와 기회를 체계적인 방식으로, 즉 이데올로기적으로 가장된 방식으로 박탈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나’의 사회가 기본적으로 정의롭고, 사회 성원들 각자의 사회적 지위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각 개인에게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다가 ‘나’는 ‘나’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 차츰 분노를 느끼기 시작할 수 있다. 이 때의 분노는 아직 ‘내’가 합리적으로 숙고하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다. ‘나’는 또한 불이익을 당하는 ‘나’와 같은 계층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상황을 알게 되면서 그들에게 동정심을 느끼기 시작한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나’는 이러한 분개와 동정심에 대한 숙고를 시작하고, ‘나’와 같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의 사회 내에서의 상대적인 지위와 이 합당함 여부에 대한 설명들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러한 숙고 과정을 통해서 결국 ‘나’의 사회가 근본적으로 부정의하다는 믿음을 갖게 되고, 다양한 종류의 사회 저항에 참여하게 된다.
여기서, 랠튼은 ‘나’의 모든 믿음과 그 변화과정을 설명해 주는 것은 바로 사회 부정의(social injustice)라는 도덕 사실(moral fact)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부정의한 사회 현실을 보여주는 여러 사건들을 도덕적으로 설명해 가는 이 도덕 사실 - 사회적 부정의- 에 기초해서 위 ‘나’의 사례에서의 개인들의 행위 그리고 사회적 사건들을 잘 설명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들 도덕 실재론자들은 도덕적 특징(moral features)과 도덕 사실(moral fact)을 일상의 도덕 경험이나 도덕 판단의 설명적 원인(explanatory causes)으로 가정하는 것은 완전히 합리적(reasonable)이며, 적어도 다른 경쟁적인 메타윤리이론보다 결코 부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제, 도덕 인과론적 전제로서 도덕 사실을 인정할 것인가의 여부를 두고 벌이는 도덕 실재론자와 도덕 반실재론자의 논쟁을, 하만과 스터젼의 견해 차이를 중심으로 분석한 톰슨(Judith J. Thomson)의 논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도덕의 사례에서 첫 번째 해석(하만)은 행위의 도덕 속성이 실제로 존재하든 않든, 설명적으로 부적절하다(explanatory irrelevant)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양이를 발견한 어린이가 단지 재미 삼아 고양이에게 불을 지르는 경우, 우리는 그 행위에 도덕적으로 그른 속성이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도 그 어린이의 행위를 나쁜 행위로 생각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한편, 이 경우에 대한 두 번째 해석(스터젼)은 그 어린이의 행위가 실제로 그른 행위가 아니라면 그렇게 부정적인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고 본다. 스터젼이 두 번째 해석을 선호하는 것은 도덕적 확증과 과학적 확증의 차이점을 굳이 상정하지 않으려는 그의 과학적 방법론과 관련이 있다.
이제 하만이 들었던 과학적 사례에 대한 서로 다른 두 해석을 살펴보자. 어두운 칸막이 안에서 프로톤을 관찰하는 과학자가 안개방에 생긴 수증기 자국을 보고 “저기 프로톤이 간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과학적 사례에 대한 첫 번째 해석은 프로톤이 거기에 없다고 해도 과학자가 프로톤이 있다고 계속해서 믿을 것이라고 보는 경우이다. 이는 하만과 스터젼이 모두 거부하는 해석이다. 한편, 두 번째 해석은 프로톤이 거기 없었다면 실험 환경에 무슨 착오가 있지 않는 한, 과학자는 프로톤이 거기 있다는 믿음을 갖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과학의 경우에서는 하만과 스터젼이 두 번째 해석을 선호하는 점에서 의견을 같이 한다. 스터젼이 윤리학과 과학에 대해서 똑같이 두 번째 해석을 선호한 반면, 하만은 윤리학의 경우에는 첫 번째 해석을 원하고, 과학의 경우에는 두 번째 해석을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스터젼은 도덕 사실의 도덕적 인과성에 대한 설명 능력을 옹호하기 위해서 도덕적 사실(moral fact)에 대한 설명은 자연적 사실(natural fact)에 대한 설명과 무관하지 않으며, 도덕 사실은 비도덕 사실 위에 수반하며 의존한다는 생각을 이끌어낸다. 스터젼에 의하면, 도덕 사실은 비도덕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앨리스(이하 A)가 버트(이하 B)에게 바나나를 준 것은 공정했다.”는 잠정적인 도덕 사실(putative moral fact)은 “챨스(이하C)는 A가 B에게 바나나를 준 것은 공정했다고 믿는다.”는 비도덕 사실(nonmoral fact)을 설명해줄 수 있다.
그러나 도덕 반실재론자들은 이 경우에도 비록 처음에는 도덕 사실(moral fact)이 비도덕 사실(nonmoral fact)을 설명해주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거기에는 늘 설명적 기능을 하는 여타의 다른 비도덕 사실(nonmoral fact)이 있다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예컨대,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C는 A가 B에게 바나나를 준 것은 공정했다고 믿는다”라는 비도덕 사실(E'm)에 대하여 설명적 기능을 하는 것은 “A가 B에게 바나나를 준 것은 공정했다”는 잠정적인 도덕 사실(putative moral fact)이 아니라, 또다른 비도덕 사실(E's), 예컨대 “A가 B에게 바나나를 준 것은 A가 과거에 했던 약속을 지킨 것이다”라는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이들 반실재론자들에 의하면, 도덕 속성이 인과적 효력을 갖기 때문에 위의 도덕 판단이 참인 것이 아니라 도덕 속성을 수반해주는 비도덕 속성들 때문에 참인 것이다. 따라서 도덕적 속성이 설명적 인과력을 갖는다는 도덕 실재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실재론적 논증은 불필요한 존재론적 가정을 제거함으로써 논리상의 하자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도덕 실재론자들은 위 논증의 중요한 논리적 허점을 지적한다. 하만이 우리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한 도덕 감수성(moral sensitivity)에 대한 고려들이 그 자체로 우리가 도덕 실재론을 거부할만한 독립적인 이유가 되는가 묻는 것이다. 톰슨은 “도덕 사실이 도덕적 인과력을 갖지 못한다”는 논증을 ‘비설명 논증’(no-explanation arguments)이라 부르면서, 비설명 논증이 적절하다 할지라도 이것이 “도덕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실재론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즉, ‘비설명 논증’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도덕 사실이 존재한다고 보아야 할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정도의 결론만 옹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설명 논증’을 통해 도덕 반실재론 테제를 천명한 하만은 중요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반실재론자들은 우리가 그 존재를 확실히 증명할 수 없다면, 우리의 존재론을 단순화시켜서 차라리 도덕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톰슨에 의하면, 이런 식의 도덕 반실재론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비설명(no-explanation)의 결론으로부터 그 이상의 결론을 이끌어내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나. 도덕 사실의 설명적 능력에 의거한 설명: 브링크
바로 앞에서 살펴본 도덕 실재론자들(워너, 스터젼, 랠튼)은 일상적인 도덕 경험에 의거해서 도덕 관찰의 전제로서의 도덕 사실을 확언하고 있다. 이제 이와는 다소 다른 관점에서 하만의 반실재론을 극복하고자 하는 또다른 미국 실재론자, 브링크의 주장을 살펴볼 차례이다.
브링크(D. O. Brink)는 하만과 마찬가지로 인식정당성에 관한 정합론자이다. 따라서 브링크는 정합성이 1차적으로 설명적 관계라는 하만의 견해에는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브링크는 우리의 도덕 믿음이 정합적이기 위해서 왜 도덕 사실이 비도덕 사실들을 반드시 설명해야 한다고 보는지는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브링크에 의하면, 도덕 사실이 존재한다면 그 도덕 사실은 비도덕 사실을 설명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설명적일 수 있다. 브링크는 도덕 실재론이 스스로 옹호되기 위해서는 도덕 사실이 비도덕 사실을 설명해야만 인과론적 효력을 가질 수 있다는 하만의 기본 전제를 받아들이지는 않으면서도, 실제로 도덕 사실(moral fact)이 비도덕 사실(nonmoral fact)을 설명해줄 수 있다고 말한다.
하만은 도덕 믿음이 관찰적 테스트에서 벗어나 있기(immune) 때문에 설명력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브링크는 도덕 믿음이 과학적 믿음과 마찬가지로 관찰적으로 검증될 수 있다고 본다. 브링크는 도덕 믿음이 다만 전체론적인 또는 이론-의존적인 방식으로만 검증될 수 있다는 하만의 생각을 받아들이면서도, 이것은 과학적 믿음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응수한다. 과학 이론이 보조적인 과학 원칙들과 결합될 때에만 관찰적 결과를 갖는 것처럼, 도덕 원칙들 역시 보조적 도덕 원칙과 결합될 때에만 관찰적 결과를 갖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브링크는 도덕 믿음이 관찰적 검증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는 하만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브링크에 의하면, 예측적 결과(predictive results, 성공 또는 실패)의 해석을 둘러싼 어려움들은 어떤 이론의 확증에 관하여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지만, 이는 도덕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특별한 난점이 아니다. 이는 자연과학, 사회과학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브링크의 도덕 인과성에 대한 실재론적 견해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브링크는 도덕 사실에 기초해서 도덕적 설명을 할 수 있다고 보는 도덕 인과론의 정당성을 다음 세 가지 근거에서 옹호한다. 첫째, 사회적, 경제적 어휘 등과 같은 비도덕적(nonmoral) 어휘로 가득한 일련의 비도덕적 설명들이 도덕적 설명을 대체한다고 해도, 이것이 도덕 실재론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즉, 그러한 어휘들이 우리가 신빙성 있는 설명적 범주로서 선호하는 도덕 이론(moral theory)에 의존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는 도덕 진술들의 참에 대한 증거가 된다. 물론, 도덕 이론이 이러한 방법론적 역할을 얼마나 할 지는 경험적인 문제이기는 하나, 브링크는 도덕 이론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는 좋은 경험적 이유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우리는 남아프리카의 불안정과 국민 저항을 그 나라의 인종차별이라는 부정의(injustice)에 호소하여 설명한다. 이때 우리는 인종차별의 부정의함에 관한 도덕 이론에 의존하면서, 이러한 부정의가 존재하는 사회, 정치, 경제적 구조를 그 설명적 요소로써 인용한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의자’라는 단어(word)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편안히 앉아서 사용할 수 있는 대상들의 기능적 본질과 물리적 본질에 호소하여 ‘의자’를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의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의자가 설명적 범주(explanatory category)에 들지 않는다고는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도덕적 어휘를 피해서 비도덕적 어휘를 사용한다고 해서, 이것이 곧 도덕적 범주(moral category)가 비설명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셋째, 구성적 사실(constituting facts)에 의한 설명과 구성된 사실(consti- tuted facts)에 의한 설명이 서로 대립적인 설명일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도덕 사실의 설명적 능력은 보존된다. 예컨대, 나의 아이스크림이 왜 바지에 떨어졌는가를 실내 온도에 호소하여 설명하는 것은 실내 온도와 아이스크림의 분자 에너지 운동간의 관계라는 설명에 의해 대체, 논파되는 것이 아니라, 보완된다. 마찬가지로 도덕 사실을 구성하는 자연적 사실들에 호소하여 설명하는 것이 도덕적 설명에 보탬이 안 된다고 해도 도덕 사실은 여전히 설명적일 수 있다.
이상은 브링크가 도덕 사실이 설명적이라고 볼 수 있다고 본 세 가지 이유이다. 그러나 브링크가 도덕적 설명의 정당성에 대하여 훨씬 더 강력한 논증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본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각 하위 수준에 대한 설명으로 환원될 수 없는 여러 고차적 설명에 대한 논증, 즉 고차적 사실들과 하위 수준의 사실들간의 관계에 대한 상술(construal)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의 정신 상태와 그 결과로 일어나는 행위들에 관한 흥미로운 일반화가 제시되었다고 해보자. 그러나 유물론적 해석이 참이고 또 모든 정신 상태가 그 사람의 신경 상태에 의해 구성된다고 해서, 사람들의 신경 상태와 그의 행동들에 관한 일반화가 존재한다는 결론이 바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정신 상태는 전반적으로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정신 상태를 구성하는 물리적 상태의 배열이 신경생리학이나 미시물리학의 관점에서 그 어떠한 “자연적인 종류”(natural kind)를 보여준다고 할 필요도 없다. 다양한 종류의 정신 상태에 상응하는, “투영 가능한”(projectable) 종류의 신경상태나 미시물리학적 상태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브링크는 이 경우 하위 수준에서의 설명보다 고차적 사실의 수준에서의 설명이 보다 잘 일반화된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고 말한다. “행동에 대한 설명은 당연히 구성적(compositional) 사실보다는 구조적(structural) 사실을 인용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인과성 그 자체는 종종 구조적이며 단지 구성적인 것이 아니라는 테제를 정립할 수 있다면, 도덕적 설명의 필연성과 환원불가능성에 관하여도 이와 유사한 결론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브링크는 보다 구체적으로 도덕 인과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분석을 시작한다.
어떤 사실이나 사건 E를 어떤 고차적인 사실이나 사건 H에 호소하여 설명하는 세계 w1을 고려하는 것에서 시작해보자. 그리고 우리가 H가 E의 원인이었다고 제대로 생각한다고 해보자. 이제 H는 어떤 하위 수준의 사실이나 사건 L1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 사건 L1에 의해 구성된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E를 L1에 호소하여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우리는 L1을 옹호하는 설명에서 H가 제거 가능한지 물을 수 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능한 세계 w1에서 H는 이러한 L bases 중 하나에 의해 구성된다. 이때 H가 E의 원인이 되었고 그래서 E를 설명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H의 인과력이 L1의 인과력과 동등하다거나 그로부터 도출된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L1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E가 발생했다는 것은 참이다. 이러한 역사실적 사실은 우리가 H의 인과력은 L1의 인과력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주장하게 하지 않고 H와 not L1이 E-의 원인이라는 점만 이야기하게끔 해준다. 즉 E의 원인은 구조적 사실 H이지, 구성적 사실 L1이 아니라는 것이다. … 실로, 설명적 범위에 관한 이러한 사실은 위 사례들에서 고차적인 설명적 범주를 선호해야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된다.
브링크는 이러한 자신의 인과론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회적 사례를 든다.
예를 들어, 중국의 한 자녀 출산 정책 E를 근대화를 위해 인구성장률이 제한되어야 한다는 사실 H에 호소하여 설명한다고 해보자. 물론 H는 어떤 특정 출산율에 있고, 이는 어떤 시점과 장소에서의 출산 L1에 있다. 그러나 동일한 H를 실현시킬 수 있는 다른 L bases들, 인구통계학적 사실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H가 E를 야기했다는 것은 L1이 E를 야기한다는 것으로 분석될 수 없다. 여기서 L1보다는 H를 인용하는 것이 더 나은데, 그것은 L1을 인용하는 것이 단지 매우 어렵고 부담이 되는 일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출산 체계와 출생률이 어떤 방식에서 매우 달랐다 해도 E와 H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것이 특수한 L의 출생에 관한 구성적 사실(compositional fact)이기 보다, 어떤 출생률과 그 사회적 중요성이라는 구조적 사실(structural fact)임을 보여준다. 이는 중국의 한 아이 정책의 구조적 원인에 대한 호소는 구성적 원인에 대한 호소보다 더 큰 설명적 범위를 갖는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브링크는 이를 토대로 해서 이러한 인과론적 설명이 윤리학의 경우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만일 ‘인종 억압’과 같이 인과적으로 유관하고 설명적으로 도덕적인 사실들이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법적 조건들에 의해 실현되어 왔다면, 그 억압의 인과적 효율성은 그 억압이 실제로 일어나는 특정 사회적, 경제적, 법적 조건의 인과적 효율성으로부터 도출되거나 환원될 수 없다. 브링크는 이 논증을 고차적 사실들과 동일하지는 않은, 또한 고차적 사실들을 구성하는 하위 수준의 사실로 환원될 수 없는 사실, 즉 구조적 사실(structural fact)에 대한 생각을 정립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브링크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도덕 실재론을 옹호하기 위해서 도덕 사실들이 비도덕 사실들을 설명해야 한다고 보아야 하는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도덕 사실이 비도덕 사실들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할 이유는 충분히 존재한다.” 이상은 하만의 반실재론을 비판하고 도덕 실재론을 옹호하는 브링크의 견해였다.
4. 도덕 실재론의 도덕 인과론에 대한 비판적 논의
가. 도덕 실재론의 하만 비판이 갖는 한계
하만은 도덕 사실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고서도 도덕 원리에 대한 최선의 설명 추리가 가능하다는 도덕 반실재론을 편다. 그는 도덕 속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도덕 속성이 도덕 관찰을 일으킨다고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하만을 비롯한 도덕 반실재론자들에 의하면, ‘행위자 A는 x를 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았기 때문이다’는 말은 곧 ‘행위자 A는 x를 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도덕적 속성이 행위 동기유발력을 갖는다는 주장을 난센스(nonsense)라는 것이다. 이들은 도덕 실재론이 ‘왜 그가 그것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판단했는가’에 관하여 분명한 대답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심각하게 불완전한 이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도덕 실재론은 지식을 설명주의적(explanationist)으로 해석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 도덕 실재론자들은 ‘옳음’과 ‘좋음’의 도덕 사실 및 속성의 존재가 우리의 도덕 믿음에 대한 설명적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설명하고자 한다. 도덕 실재론의 이러한 논의는 주로 하만을 비판하는 도덕 인과론을 개진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이제, 이러한 도덕 실재론자들의 노력이 하만 식의 도덕 반실재론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는 주장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도덕 실재론자는 도덕 사실의 존재를 확언함으로써 우리의 도덕적 실천과 도덕적 믿음을 그 자체로 더 잘 설명해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행위자 A는 행위 x를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옳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는 “정부 G는 대대적인 반대를 받았다. 왜냐하면 그 정책이 그릇되었기 때문이다.”와 같이, 실재론자에게 옳음과 그름의 속성은 동기 유발과 행위에 인과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우리가 최선의 설명 추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도덕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마치 과학 원리가 과학적 사실의 관찰에 의해서 검증되듯이 도덕 사실의 관찰을 위해서 도덕 원리도 검증 가능하다는 것이다.
도덕 실재론자는 우리가 도덕 판단을 내리면서 도덕 속성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도덕 속성과 행위간에 직접적인 인과 고리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도덕 실재론에서 도덕 속성(moral property)과 행위(action)간의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은 행위자의 믿음(belief)에 의해 중재되고 있다.
그러나 도덕 실재론자들의 이와 같은 주장은 그 인과 고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다소 무리를 범하고 있다는 비판에 노출되어 있다. 도덕 실재론의 하만 비판을 재비판하는 사람들의 지적에 의하면, 도덕 실재론자들은 설명 이론에서 그 장점을 발휘하는 수반 이론을 수단으로 해서 도덕적 사실 및 속성의 존재를 추론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과성(causality)의 개념에 강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도덕 실재론자들이 인과성 자체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인과성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무엇인지, 즉 무엇이 도덕 속성과 비도덕 속성을 서로 연결짓는가에 대하여 형이상학적으로 충분히 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문제제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를 가장 대중적이고도 강력하게 비판하는 대표적인 반실재론자로 맥키를 들 수 있다. 맥키(J. L. Mackie)는 자연적 사실과 도덕적 사실간의 수반적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연적 사실과 도덕적 사실을 관련짓는 것은 결코 논리적 필연성이나 의미론적 필연성과 같은 종류의 관계일 수 없다. 그것은 수반적(supervenient)이거나 어떤 면에서 결과적으로 일어나는(consequential)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행위가 고의적인 잔인성을 가졌다”는 자연적 사실과 “그것이 나쁘다”는 도덕적 사실 사이의 관련성에 비추어 볼 때, 그 행위는 고의적 잔인성을 가졌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고 판단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적 수반론은 어떤 종류의 자연 속성이 있기 때문에(그것에 수반해서) 그 행위가 나쁜(혹은 좋은) 도덕 속성을 지녔다고 판단된다고 이해한다.
여기서 맥키가 문제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에” 수반하는 도덕 속성의 존재론적 성격과 이 미심쩍은 존재를 인식하는 능력에 관해서 이다. 즉 맥키는 도덕 실재론의 수반론대로라면 우리에게 ‘잔인함’을 구성하는 자연적 특성과 ‘그릇됨’이라는 도덕적 특성 사이의 연결을 즉각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어떤 것’이 가정되지 않을 수 없는데, 우리는 무엇으로 그것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단 말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실재론자는 이 물음에 대해 도덕적 사실과 자연적 사실간의 어떤 특별한 관계에 호소함으로써 답하여야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실재론자는 우리가 어떻게 그 관계를 발견하는지를 설명함에 있어서 기이한 인식론에 의존할 것이라는 것이 맥키의 지적이다.
둘째, 도덕 실재론자들의 인과론 논의에 대한 또다른 비판은 도덕 실재론자들이 도덕 사실과 속성이 존재함을 확언하기 위해 도덕적 진보(moral progress)와 도덕적 수렴(moral convergence)의 사례를 자주 인용한 것에 모아진다. 실재론자는 사회적인 수준에서의 진보와 도덕 판단의 전 사회적인 역사적 수렴을 실재론적 의미에서 도덕 진리를 향한 움직임의 징표로 호소하곤 한다. 예컨대 우리는 금세기에 들어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부당한 억압이 도덕적으로 그르며, 이를 개선시키려는 운동이 성공해야 한다는 도덕적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도덕 실재론자들은 사회의 이러한 도덕적 변화의 잠재력은 피억압 집단들이 자신들의 상태를 인식하고 그 압제가 그르다는 믿음을 분명히 형성하기 이전에도 ‘이미’ 존재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즉, 실재론자는 이러한 잠재력(potential)을 그릇됨(wrongness)이라는 도덕 속성 그 자체의 현존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적인 수준에서의 도덕적 진보를 이끄는 잠재력은 도덕 실재론자가 아닌 사람들도 충분히 예상하고 설명할 수 있는데, 굳이 도덕 속성을 상정하지 않고서도 우리는 부당한 인권 억압은 피억압자들 사이에서 저항의 잠재력을 창출시킬 것이며,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무시되는 경우 보다 쉽게 그 그릇됨을 감지할 수 있음을 예측하는 데 있어 별 무리가 없다는 지적이 있다.
셋째, 과학 실재론의 입장에서 도덕 사실의 존재를 확언하려는 미국 실재론의 (도덕 인과론에서의) 도덕 사실은 도덕 이론의 설명 체계를 위해 설정된 인식론적 방편일 뿐, 존재론적으로 입증된 것이 아니라는 지적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미국 실재론자들이 도덕 인과론에 대한 설명에 많은 비중을 할애한 것은 영국 실재론의 직관주의를 논박하고, 도덕 실재론을 보다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도덕 판단을 이론적인 도덕 속성과 사실로 해석하는 비약을 범했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이는 도덕 인과론과 도덕 실재론을 무리하게 연결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물음과 연결된다. 이 경우 도덕 실재론자는 도덕 인과론적 설명에서 도덕 사실을 규범적 진리로서 즉, “어떤 이유가 존재해야 한다는 요구는 규범적인 요구이지, 설명적 요구가 아니다”라는 네이글(T. Nagel) 식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 더 솔직하고 타당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 도덕 인과론 무용론
이쯤에서 필자는 도덕 관찰에서의 인과론적 전제조건으로서 도덕 사실을 확언하는 것이 도덕 실재론을 옹호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보다 기초적인 질문을 언급할 필요를 느낀다. 이제, 도덕 인과론적 증명을 통하여 도덕 실재론을 공고히 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용하다고 주장하는, 또 도덕 인과론 자체는 우리가 논의할 수도 없고, 또 논의할 필요도 없는 주제라고 보는 애링턴의 견해를 소개하고자 한다.
애링턴은 “도덕적인 측면들(moral aspects)이 도덕적 지각(moral perception)을 야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면서 실재론적 논의들을 비판한다. 우선, 도덕적 측면, 속성, 사실들의 외형은 실체(reality)가 아닌 개념적 투영(perceptual projection)인데, 이것을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것이다. 애링턴에 의하면, 도덕 실재론이 도덕 속성을 실체로서 가정하는 한, 도덕적 인과성의 문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다. 또한 과학적 세계관에 의거해서 도덕을 바라보는 물리주의적 도덕 반실재론 역시 도덕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애링턴은 우리가 원점으로 돌아가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을 받아들여 사안을 바라볼 것을 권한다. 그의 제안은 우리가 과학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절대적으로 완전한 설명”이라는 관념을 굳이 끌어들이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의미 있는 사고를 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자는, 그리하여 이제 더 이상 진부하게 끝없이 진행되는 도덕 존재론 내지는 도덕 인과론의 주제에서 빠져나오자는 제안이다.
애링턴은 과학적 형이상학자나 도덕적 형이상학자나 서로 더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이 문제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 둘을 벗어나는 것이 윤리학자의 일차적인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애링턴이 메타윤리학적 담론에서 도덕 존재론, 도덕 인과론에 대한 미련을 떨쳐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바로 그의 도덕 반실재론의 문제의식에 기인한다. 이에 대한 애링턴의 논증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우선, 애링턴은 인과성(causality)의 개념은 환경 내의 물리․화학적 사건들과 관찰자의 심리적 사건들 사이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다고 보면서, 다음의 예를 가정해보자고 제안한다. 누군가가 자신의 지갑에서 10달러 짜리 수표를 보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가 보고 있는 그 10달러 짜리 수표는 매우 복잡하고 문화적인 통화 체계의 한 아이템으로서 그 체계(system)에 의해 정의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이때 수표를 보는 관찰자의 심리적인 지각 조건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경험적으로 발견된 문화적 속성의 체계가 아니다. 또 관찰자가 그 대상을 10달러 짜리 수표로 지각하는 것을 그 어떠한 물리․화학적 속성의 용어 체계로 분석 내지는 환원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10달러 짜리 수표로 기술된 그 대상은 그 물리․화학적 속성의 용어로 기술될 수도 있고, 이들 속성이 개념적 반응의 한 원인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애링턴은 우리가 그 관찰자가 10달러 짜리 수표를 지각하는 것을 설명함에 있어서, 대상의 재화적 속성이 관찰자의 개념적 작용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fact)에 호소할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이제 애링턴은 위의 경우와 도덕의 경우를 함께 고려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애링턴에 의하면, 도덕적인 일의 상태를 한정짓는 도덕적인 속성들과 관찰자의 심리적 조건들 간의 인과 관계의 관점에서 도덕적인 상태의 지각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것은 애링턴이 도덕적인 경우와 앞서의 10달러 짜리 수표와 같은 문화 또는 상식적인 경우가 서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링턴이 우리가 문화적․상식적 대상에 대해 물리․화학적으로 기술할 수 있고, 이들 속성을 인과적으로 관찰자의 물리적 상태와 연결 지을 수 있음을 부인한 것은 아니다. 또한 애링턴은 잔인함의 속성을 지니는 어떤 행위가 그 행위의 지각을 인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개입될 수 있는 물리 화학적 속성을 지닐 수 있다는 점도 부인하지도 않았다. 애링턴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도덕 속성들이 이들 도덕 관찰들을 야기한다고 봐야 한다는 방식의 이해이다. 애링턴에 의하면 이것은 관찰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는 도덕 관찰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도덕 속성을 가정해야 한다는 모든 실재론적 요구와 시도에 반대한다. 우리가 10달러 짜리 수표의 관찰을 인과적으로 설명해주는 속성을 확언하기 힘들다 해서 그 관찰의 객관성을 의심하지는 않듯이, 우리가 도덕적 특징과 사실들이 그 자체로 도덕 관찰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기술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도덕의 객관성(objectivity)을 위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애링턴에 의하면, 인과성(causality)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상당히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다. 그런데도 즉, 도덕 사실과 관련 있는 심리학적, 물리적 메커니즘의 이론을 확보했다고 자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규범적인 도덕 사실들이 어떻게 인과적 효력을 수행하게 되는가를 문제삼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잘못되었다는 것이 애링턴의 지적이다.
그러나 도덕 실재론자들은 도덕 사실의 존재를 부정하는 도덕 반실재론이 문제가 있듯이, 이와 같이 도덕 사실의 존재론적 언급 자체를 회피하려는 입장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예로, 피터 랠튼(P. Railton)은 많은 철학자들이 그들 스스로를 실제적, 물리적 대상에 관한 실재론자라 부르는 데 만족하면서도 가능한 대상들, 관찰 불가능한 대상들, 숫자, 보편자, 인과적 힘에 관한 실재론에 관하여는 날카롭게 대립된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일상적인 경험 대상만 받아들이고 그 나머지 것은 대충 얼버무리고 마는 이런 식의 철학은 “채무불이행”을 범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5. 맺으며
필자는 도덕 실재론의 가장 큰 의의는 그간 메타윤리학에서 논의의 맥락을 떠난 것으로 치부되어 온 도덕 존재론의 영역을 그 중심주제로 끌어들임으로써 새로운 메타윤리학의 영역을 개척하고자 한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 실재론의 주장이 보다 강력하게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도덕 실재론이 그 존재론의 핵심이 되고 있는 도덕 인과성 개념 자체에 대한 보다 적극적이고도 철저한 논의를 하지 않은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도덕 실재론자들은 도덕 사실이 어떻게 도덕 관찰을 일으키는지, 또 우리가 그 방식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등에 관하여 보다 본격적인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일상적인 도덕적 경험을 설명하기 위하여 도덕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만큼 분명한 것이 어디 있느냐는 방식의 논리는 하만의 반실재론을 극복하기에는 너무도 소극적이다.
도덕 관찰과 도덕 인과성에 대한 도덕 실재론과 도덕 반실재론간의 논쟁은 결국 도덕 속성과 비도덕 속성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모아진다. 그렇다면, 도덕 실재론이 하만의 반실재론을 극복할 수 있기 위해서는 도덕 인과성 자체에 논의를 모아야 할 것이며, 여기에 도덕 실재론과 도덕 반실재론간의 논쟁의 핵심이 존재한다. 이에 대하여는 브링크를 중심으로 도덕적 수반 개념을 매개로 한 설명이 있어 왔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도덕 실재론자들이 도덕 속성과 비도덕 속성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에 대한 실재론자들의 본격적인 논의를 밝히지 않았다. 이것이 본고의 주요 한계이기는 하나, 하만의 도덕 인과론적 반실재론에 대응하는 도덕 실재론자들의 논의를 밝히는 것이 본고의 주제였기에 도덕적 수반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본고의 범위를 넘어선다고 판단하였고, 따라서 이에 대하여는 다음 논문에서 밝힐 것을 기약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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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Moral Facts as causal preconditions of moral observations?
― CHO, Hyeon-A ―
This paper deals with moral realists' opposing arguments against Gilbert Harman's moral anti-realism. Harman asserts that we do not need to concede the existences of moral facts in order to explain 'moral observation'. According to Harman, because we can explain moral judgments or moral beliefs of someone who experiences moral observations on the basis of his psychological background or his socialization process, the moral realists' efforts which would rely on moral facts is in the wrong way. The realists try to refute Harman's anti-realism like this way:
First, we can explain ordinary moral experiences (i.e., moral observation) by affirming moral realities which are reported by moral observations. Second, although it is unclear whether moral facts have to explain nonmoral facts in order to defend moral realism, there are sufficient reasons for us to believe that moral facts can explain nonmoral facts.
But, many moral philosophers doubt whether these efforts of moral realists completely overcame Harman's moral anti-realism or not. They said that moral realism needs to argue about not only the causes which brings about metaphysical idea of moral causality but causal relations of moral fact with moral observation. Besides, those who criticise moral realism asserts that moral realism have to give up the mention of the subjects in moral ontology and in moral causation theory because it is difficult and even impossible for us to discuss moral ontological concepts (e.g., moral aspects, properties, facts) as realities.
It seems to be meaningful that moral realism confirms the metaphysical status of moral realities and its recognizability through arguments regarding moral ontology. That status had been degraded by early metaethics theorists. But in spite of the moral realists' efforts, there are subject to criticism. I think the key weakness of moral realism is that it has not an exhaustive discussion about the very idea of moral causality which is central to moral ontology in moral realism. Moral realism needs to devote itself to moral causality.
※ Key Words : moral realism, Gilbert Harman, moral observation, moral facts, moral causa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