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 서정주

나뭇잎숨결 2022. 4. 4. 14:34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 서정주

 

 

아조 할 수 없이 되면 고향을 생각한다.
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옛날의 모습들, 안개와 같이 스러진 것들의
형상을 불러일으킨다.

귓가에 와서 아스라이 속삭이고는, 스쳐가는 소리들, 머언 유명에서처럼
그 소리는 들려오는 것이나 한 마디도 그 뜻을 알 수는 없다.

다만 느끼는 건 너희들의 숨소리. 소녀여, 어디에서들 안재하는지.
너희들의 호흡의 훈김으로써 다시금 돌아오는 내 청춘을 느낄 따름인 것이다.

소녀여 뭐라고 내게 말하였던 것인가?
오히려 처음과 같은 하늘 우에선 한 마리의 종다리가 가느다란 핏줄을 그리며
구름에 묻혀 흐를 뿐,
오늘도 굳이 닫힌 내 전정의 석문 앞에서 마음대로는 처리할 수 없는
내 생명의 환희를 이해할 따름인 것이다

섭섭이와 서운이와 푸접이와 순네라 하는 네 명의 소녀의 뒤를 따라서,
오후의 산그리메가 밝히우는 보리밭 새이 언덕길 우에 나는 서서 있었다.
붉고, 푸르고, 흰, 전설 속의 네 개의 바다와 같이 네 소녀는 네 빛깔의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하늘 우에선 아득한 고동소리, ......순네가 아르켜준 상제님의 고동소리, ......
네 명의 소녀는 제마닥 한 개씩의 바구니를 들고, 허리를 구부리고,
차라리 무슨 나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절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씬나물이나 머슴둘레, 그런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머언 머언 고동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었다.
후회와 같은 표정으로 머리를 수그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잡히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발자취 소리를 아조 숨기고 가도, 나에게는 붙잡히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담담히도 오래가는 내음새를 풍기우며, 머슴둘레 꽃포기가 발길에 채일 뿐,
쌍긋한 찔레 덤풀이 앞을 가리울 뿐 나보다는 더 빨리 달아나는 것이었다.
나의 부르는 소리가 크면 클수록 더 멀리 더 멀리 달아나는 것이었다

여긴 오지 마......여긴 오지 마......

애살포오시 웃음 지우며, 수류와 같이 네 개의 수류와 같이 차라리 흘러가는
것이었다.

한 줄기의 추억과 치여든 나의 두 손, 역시 하늘에는 종다리 새 한 마리,---
이런 것만 남기고는 조용히 흘러가며 속삭이는 것이었다. 여긴 오지마......
여긴 오지마......

소녀여 내가 가는 날은 돌아 오련가. 내가 아조 가는 날은 돌아오련가.
막달라의 마리아처럼 두 눈에는 반가운 눈물로 어리여서, 머리털로 내 손끝을
스치이련가.

그러나 내가 가시에 찔려 아파 할 때는, 네 명의 소녀는 내 곁에 와 서는
것이였다.
내가 찔렛가시나 새금팔에 베혀 아퍼헐 때는,
어머니와 같은 손가락으로 나시우러 오는 것이였다.

손가락 끝에 나의 어린 핏방울을 적시우며,
한 명의 소녀가 걱정을 하면 세 명의 소녀도 걱정을 하며, 그 노오란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하얀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빠알간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하든
나의 상처기는 어쩌면 그리도 잘 낫는 것이었든가.

정해정해 정도령아
원이왔다 문열어라,
붉은꽃을 문지르면
붉은피가 돌아오고,
푸른꽃을 문지르면
푸른숨이 돌아오고.

소녀여.
비가 개인 날은 하늘이 왜 이리도 푸른가, 어데서 쉬는 숨소리기에 이리도
똑똑히 들리이는가.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몇 포기의 씨거운 멈둘레꽃이 피여 있는 낭떠러지 아래 풀밭에 서서,
나는 단 하나의 정령이 되야 내 소녀들을 불러 일으킨다.
그들은 역시 나를 지키고 있었든 것이다.
내 속에 내리는 비가 개이기만, 다시 그 언덕길 우에 돌아오기만, 어서 병이
낫기만을,
그 옛날의 보리밭길 우에서 언제나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아조 가는 날은 돌아오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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