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강가에서/고정희

나뭇잎숨결 2022. 1. 18. 02:03
              강가에서 
              - 고정희
              할 말이 차츰 없어지고 
              다시는 편지도 쓸 수 없는 날이 왔습니다 
              유유히 내 생을 가로질러 흐르는 
              유년의 푸른 풀밭 강둑에 나와 
              물이 흐르는 쪽으로 오매불망 
              그대에게 주고 싶은 마음 한쪽 뚝 떼어 
              가거라, 가거라 실어보내니 
              그 위에 홀연히 햇빛 부서지는 모습 
              그 위에 남서풍이 입맞춤하는 모습 
              바라보는 일로도 해저물었습니다 
              불현듯 강 건너 빈 집에 불이 켜지고 
              사립에 그대 영혼 같은 노을이 걸리니 
              바위틈에 매어놓은 목란배 한 척 
              황혼을 따라 
              그대 사는 쪽으로 노를 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