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림시기의 신학과 영성 La théologie et la spiritualité de la période de la forêt
(→전례주년, →시간과 전례)
[베르가미니(A. Bergamini), 김인영 역]
I. 대림시기의 뜻과 역사
대림절(待臨節,Advent,'오다'라는 뜻의 라틴어 Adventus 에서 유래), 대림시기 또는 대강절은 성탄전 4주간 예수의 성탄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력 절기이다. 교회력은 대림절로 시작하기 때문에,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뜻도 있다. 대림절에 사용하는 예전색은 기다림을 뜻하는 보라색이다.
교회역사에서는 507년 투르 공의회에서 대림절이 지정되었으며, 이때는 성탄 전 40일간 지켰다. 하지만 9세기부터 성탄전 4주간 지키고 있으며,한국교회에서는 천주교, 성공회, 감리교, 장로교에서 지키고 있다.
대림절은 4주간 지키며, 각 주마다 다른 색상의 대림초에 불을 붙이며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린다.
- 1주: 1개 점화, 진보라색, 세상종말에 대한 준비와 경고(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대한 준비와 경고)
- 2주: 2개 점화, 진보라색, 연보라색,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것을 예고함.
- 3주: 3개 점화, 진보라색, 연보라색, 분홍색, 그리스도 탄생이 임박함에 대한 준비와 기쁨.
- 4주: 4개 점화, 진보라색, 연보라색, 분홍색, 하양색(또는 모두 흰색이나 보라색), 성모 마리아의 그리스도 수태에 대한 기쁨.
대림시기(참조 →전례주년, II)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들도 많지 않다. 대림시기 안에서 우리는 절제, 금욕주의적 관행과 관계된 요소들과 말 그대로 전례적인 성격의 요소들을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성탄을 준비하는 시기로서의 대림시기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도래(종말의 재림)를 지내는 대림시기로 구별할 필요가 있다. 대림시기는 서방교회의 전형적인 전례시기이다. 동방교회는 불과 며칠 간의 성탄을 준비하는 기간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4세기 이후에나 대림시기에 대한 자료가 남아 있는데, 이때 대림시기는 종말론적인 대림(재림을 기다림)과 성탄 준비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성탄을 준비하는 데에 대림의 원래 의미가 있다는 사람과 종말의 재림을 기다리는데 그 의미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한 전례개혁은 의도적으로 성탄 준비로서의 대림시기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의미로서의 대림시기의 성격을 보존하고자 하였다(전례력 지침 39).
II. 미사전례서의 대림시기 전례 구조
대림시기는 4주간으로 되어 있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전례는 6주간으로 되어 있다) 전례문들과 특히 이사야서를 거의 매일 읽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전례시기는 일관된 모습을 가지고는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다음의 두 시기로 구분된다: ① 대림 첫 주일부터 12월 16일까지 - 이시기는 종말에 대한 기다림을 뚜렷이 드러내면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도래를 기다리도록 신도들의 마음을 준비시킨다. ② 12월 17일부터 12월 24일까지 - 미사나 →시간전례의 모든 전례문들은 더욱더 직접적으로 성탄준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대림시기를 위한 두개의 감사송 역시 (대림시기의) 이 두 시기의 특성들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이시기에 →마리아, 세례자 요한, 이사야 예언자가 부각된다.
교회의 아주 오래고 보편적인 전통에 따르면 이 시기에 이사야 예언서를 읽는데, 다른 예언서들보다 이사야 예언서에서 아주 어렵고도 결정적인 상황에 처해 있던 선택된 백성(이스라엘)을 위로하였던 큰 희망이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사야서 가운데서도 더욱 의미 있는 부분들을 대림시기에 읽는데, 이 부분들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영원한 희망을 선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마지막 예언자로서 이제 완성을 향해 흘러가는 순간에 그 이전의 역사 모두를 자신의 말과 존재로 종합한다. 그 결과 기대하는 마음이 구체화된다. 그는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위해 (역사 안에) 개입하심을 드러내주는 표지이다. 메시아의 전령인 그의 임무는 주님의 길을 준비하고 이스라엘에게 '구원받는 깨침'(참조. 루가 1,77-78)을 제공하며, 이미 당신 백성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를 지적하는 것이다.
대림시기는 구원 신비와 마리아와의 관계, 그에 대한 마리아의 협조에 대해 강조하는 전례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은 전례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지 (마리아의 위치를 특별히) 부각시키거나 (마리아) 신심을 덧붙임으로 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지만 대림시기를 가장 좋은 '마리아의 달(月)'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한 의미로) 올바르지 않으니, 이시기는 본질적으로 주님 오심에 대한 신비, 마리아의 협조와 특히 연결되어 있는 신비를 지내는 때이기 때문이다.
대림시기 초반(12월 8일)에 지내는 무염시태 대축일이 대림시기와는 별개의 것이거나 대림시기의 일관성을 파괴하는 요소가 아니라 바로 신비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무염시태의 마리아는 구원된 인류의 원형이며,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얻어진 가장 뛰어난 열매이다. 무염시태 대축일 감사송에 나와 있듯이 하느님은 마리아 안에서 "티없고 흠 없이 아름다운 성자의 신부인 교회의 설립을 알리셨다."
III. 대림시기의 신학
대림시기가 주님께서 역사 안에 오심에 대한 모든 신비를 그 완성에 이르기까지 숙고한다는 점에서 대림시기의 신학은 풍부하다. 신비의 여러 측면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놀라운 통합을 이룬다.
대림시기는 무엇보다도 구원의 역사적-성사적 차원을 기념한다(참조 →구세사). 대림시기의 하느님은 역사의 하느님이시다. 즉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성부의 모습을 드러내신 나자렛 예수 안에 온전히 오신 하느님이시다. 계시의 역사적 차원은 모든 인간의 완전한 구원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졌음을 기념한다. 따라서 →복음화와 →인간계발 사이의 밀접한 연계를 기억한다.
대림시기는 그리스도교 신비의 '종말론적 차원'을 뚜렷이 드러내는 전례시기이다(참조 →종말론). 하지만 시간의 끝에 이르러서야 밝혀질 상속(약속)에 대해 다룰 뿐이다. 역사는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자리이며, '주님의 날'(참조. 1 고린 1,8; 5,5)을 향하여 나아간다. 우리 인간의 육(肉) 안에 오셨고, 죽으신 다음 하느님께서 미리 뽑으신 증인들과 사도들에게 부활하신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던 그리스도는 세상 끝날에 영광스러이 나타나실 것이다(사도 1,11). 이 지상에서 순례자의 삶을 살아가는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구원을 '이미' 체험하면서, 심판관이요 구세주로서 주님이 영광스러이 다시 오실 때 완전히 드러날 구원, 우리 안에서 완전히 실현될 구원을 기다리며 산다.
대림시기는 하느님이 오심에 대한 참되고 깊으며 신비한 차원들을 우리에게 드러내 주는 한편,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교회와 각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선교적 임무에 대해서도 상기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해야하는 교회의 임무는 본질적으로 성부로부터 파견된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신비에, 성부와 성자로부터 파견된 성령의 오심의 신비에 기초하고 있다.
IV. 대림시기의 영성
대림 전례를 드리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본질적인 삶의 태도들을 가지도록 불린다: 기쁨 중에 항상 깨어 기다림, 희망, 회개.
기다리는 태도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이룬다. 왜냐하면 계시의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당신의 신실함을 드러내신 약속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참조. 2고린 1,20). 대림시기 동안 교회는 약속된 메시아를 기다리는 히브리인들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차원에서, 그 약속의 결정적 구현인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거울을 들여다보듯" 보고 있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얼굴을 맞대고" 바라다볼 날이 올 것이다(1 고린 13,12). 교회는 깨어 있으면서 기쁨 중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 따라서 교회는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여"(묵시 22,17.20)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 결과 대림시기는 '희망의 하느님'(로마 15,13)을 기념하며 기쁨에 찬 희망을 체험한다(로마 8,24-25 참조). 대림 첫 주부터 부르는, 대림시기를 특징 지우는 노래는 시편 24이다: "주여, 내 영혼이 당신을 우러러 뵙나이다. 내 하느님, 당신께 굳이 바라오니, 이 바람을 헛되이 마시옵소서. 원수들이 나를 두고 좋아라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당신께 바라는 자는 부끄러울리 없으리이다(시편 24, 1-3)."
역사 안에 들어오신 하느님은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하신다. 그리스도 안에 오신 하느님은 인간에게 끊임없는 회개를 요청한다. 복음의 새로움이란 꿈에서 결정적으로 깨어나도록 하는 빛이다. 대림시기는, 특히 세례자 요한의 선포를 통해서 본 대림시기는, 주의 길을 준비하고 곧 오실 주님을 맞을 수 있도록 회개하라는 초대의 시기이다. 대림시기는, 예수께서 복된 이들이라고 부르신 겸손한 이, 온순한 이, '야훼의 가난한 이'의 태도를 배우도록 가르친다.
V. 대림시기의 사목
산업사회, 소비주의 시대인 우리 시대에 대림시기가 성탄 대목을 노리는 상업주의가 판치는 시기와 맞물린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사목자는 우리 삶의 초월적, 종말론적 관점에 눈을 돌리게 하는 그러한 태도와 가치들을 전하는데 전념해야 한다. 절망이 배고픔과 저개발보다 더 널리 퍼져있는 듯한 이 사회에서 대림시기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기다림과 희망의 전언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각 신자들을 사회의 또 다른 표징이 되게끔 만들어야 한다. 그리스도교 삶의 초월적, 종말론적 차원을 참으로 인지한다면, 땅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의 질료를 준비하기 위한, 역사를 치유하기 위한 (우리의) 임무를 줄일 것이 아니라 더 증가시켜야 한다.
사실 그리스도는 당신 영의 능력으로 인간의 마음 안에서 활동하고 계신데, 이는 단지 미래 세상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지상에서의 삶을 더욱 인간적으로 만들기 위한 열의를 불러일으키고 정화하며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다. 만일 사목자가 이 같이 깊고 고무적인 신학적 전망으로 비추이고 인도되어 사목한다면, 세상의 마음이 되는 법을 아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기회와 수단을 이 대림시기의 전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프란치스코 교황 강론
하느님의 말씀은 세례자 성 요한의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복음은 두 가지 측면을 강조합니다 : 그것이 위치한 곳, 사막, 그리고 그 메시지의 내용, 개종. 사막과 회심: 오늘날의 복음은 이것을 주장하고 있으며, 너무나 많은 주장은 이 말씀들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합니다. 둘 다 환영합시다.
사막. 전도자 누가복음은 이곳을 특별한 방식으로 소개한다. 사실, 그는 당시의 엄숙한 상황과 위대한 인물들에 대해 말한다: 그는 황제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총독 폰티우스 빌라도, 헤롯 왕 및 그 당시의 다른 "정치 지도자들"의 열다섯 번째 해를 인용한다. 그런 다음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종교적인 자들인 안나와 가야바에 대해 언급한다(루카 3,1-2 참조). 이 시점에서 그는 "하느님의 말씀이 스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광야에서 임하였도다"(루카 3,2)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이 방금 열거 된 위대한 것들 중 하나를 다루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복음의 선에서 미묘한 아이러니가 나온다: 권력 보유자들이 거주하는 상층에서, 갑자기 사막으로, 알려지지 않은 고독한 사람으로 넘어간다. 하느님은 놀라우시며, 그의 선택은 놀랍습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예측에 맞지 않으며, 사람이 습관적으로 그와 연관시키는 힘과 위대함을 따르지 않는다. 주님은 작음과 겸손을 선호하십니다. 구속은 예루살렘, 아테네, 로마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막에서 시작됩니다. 이 역설적 인 전략은 우리에게 매우 아름다운 메시지를 전합니다 : 권위를 가지며, 교양 있고 유명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하는 보장이 아닙니다. 반대로, 그것은 insuperbirsi로 이어질 수 있고 그것을 거부 할 수 있습니다. 대신, 사막이 가난한 것처럼 내부가 가난해야합니다.
사막의 역설에 머물자. 선구자는 위험으로 가득 찬 이 불멸하고 험난한 곳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한다. 이제 중요한 발표를하고 싶다면 그는 보통 사람들이 너무 많고 가시성이있는 아름다운 곳으로 이동합니다. 반면에 요한은 사막에서 설교합니다. 바로 그곳에, 건조한 곳에서, 눈이 볼 수 있는 한 멀리 뻗어 있고 생명이 거의 없는 그 빈 공간 안에서, 성경이 예언한 대로(이사 40,3-4 참조) 사막을 호수로, 건조한 땅을 물의 샘으로 변화시키시는 주님의 영광이 계시된다(이사 41,18 참조). 여기에 또 다른 가슴 아픈 메시지가 있습니다 : 하나님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슬픔과 외로움이 지배하는 곳에서 시선을 돌립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그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 우리가 박수 갈채를 받고 우리 자신만을 생각하는 동안 그는 종종 우리에게 다가 가지 못합니다. 특히 테스트 시간에 성공합니다. 그분은 어려운 상황에서, 그에게 공간을 남겨 두는 우리의 공허 속에서, 우리의 실존적 사막에서 우리를 방문하십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우리를 방문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한 사람이나 한 민족의 삶 속에는 사막에 있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주님이 임재하시는데, 주님은 종종 성공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지만, 성공할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에 의해 환영받습니다. 그리고 그는 친밀감과 연민과 부드러움의 말을 가지고 온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음이라. 길을 잃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내가 너희를 강하게 하고 너희를 도우러 오노라"(10절). 광야에서 설교를 하는 요한은 주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구속할 수 없는 상황에서, 출구가 없는 상황에서 정확하게 생명을 돌려주시기 위해 오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방문하기를 원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그분이 사막을 선택하시고, 그분이 사랑하시는 우리의 작은 모습과 우리의 갈증을 풀고 싶어 하시는 우리의 건조함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가시는 것을 보는 것에서만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작은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 질문은 작고 작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건조함을 두려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시며, 누가 우리를 방문하러 오시는가!
두 번째 측면 인 전환으로 넘어 갑시다. 침례교는 끊임없이 격렬한 어조로 설교했다(루카 3,7 참조). 이것은 또한 "불편한"주제입니다. 사막이 우리가 가고 싶은 첫 번째 장소가 아닌 것처럼, 개종에 대한 초대는 확실히 우리가 듣고 싶은 첫 번째 제안이 아닙니다. 개종에 대해 말하면 슬픔을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기쁨의 복음과 화해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려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회심이 마치 우리의 헌신의 열매 인 것처럼 도덕적 노력으로 축소 될 때 발생합니다. 문제는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의 힘에 기초하는 데 있습니다. 이거 좋지 않아요! 영적 슬픔과 좌절 또한 여기에 숨어 있습니다 : 우리는 개종하고, 더 나아지고, 단점을 극복하고, 변화하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할 수 없다고 느끼고, 선의에도 불구하고 항상 뒤로 물러납니다. 바로 이 땅들에서 온 성 바오로의 동일한 경험을 경험합시다: "내 안에는 선에 대한 갈망이 있지만,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이는 내가 원하는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요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악을 행함이니라"(롬 7:18-19). 만일 우리만이 우리가 원하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면, 우리가 개종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의 아름다운 언어인 그리스어는 복음 동사 "개종하다", 메타노에인의 어원으로 우리를 도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서 너머를 의미하는 전치사 반쪽과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noéin으로 구성됩니다. 개종하는 것은 그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 즉 일반적인 사고 방식을 뛰어 넘어 우리의 일반적인 정신 계획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나는 모든 것을 우리의 자존심, 자급 자족에 대한 우리의 주장으로 줄이는 계획을 정확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는 마비되는 강성과 두려움에 의해 닫힌 사람들, "항상 이런 식으로 행해졌는데, 왜 변하는가?"에 대한 유혹에 의해, 삶의 사막은 하나님의 임재가 아니라 죽음의 장소라는 생각에 의해서.
우리에게 회심하라고 권면하면서, 요한은 우리에게 더 나아가 거기서 멈추지 말라고 권유합니다. 우리의 본능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과 우리의 생각 사진을 넘어서는 것, 현실이 더 크기 때문에 : 그것은 우리의 본능, 우리의 생각보다 큽니다. 현실은 하느님이 더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종한다는 것은 익사한 희망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 인생에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반복하는 사람들, 즉 모든 시간의 비관론자들에게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평범함의 빠른 모래 속으로 가라 앉을 운명이라고 믿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시련의 순간에 일어나는 내면의 귀신들에게 항복하여 우리를 낙담시키고 우리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모든 것이 나쁘며, 성도가 되는 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신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저쪽에, 우리의 힘이시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장소를 그분께 맡기면 모든 것이 바뀝니다. 여기에 회심이 있습니다: 우리의 열린 문은 주님께서 사막에 들어오셔서 이적을 행하시기에 충분하며, 요한의 말씀은 그가 세상에 오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물이 변하고, 우리의 두려움을 치유하시고, 상처를 치유하시며, 건조한 곳을 물줄기로 변화시키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합시다. 희망의 은혜를 간구합시다. 신앙을 되살리고 사랑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것은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사막이 목마르다는 것은 희망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 만남이 예수의 희망과 기쁨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고,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하지만, 전신성하신 어머니이신 어머니께 우리가 그녀처럼 희망의 증인이 되고, 우리 주위에 기쁨의 씨를 뿌리는 자들, 즉 희망, 형제 자매들이 실망시키지 않고, 결코 실망시키지 않도록 도와주시길 간구합시다. 우리가 행복하고 함께 할 때뿐만 아니라 매일 우리가 살고있는 사막에서.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은 회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우리 내부나 환경의 많은 사막에서, 생명이 번성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와 용기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3] 기도하는 사람이란 깨어있는 상태로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희 공동체 전례 담당자이신 어르신 신부님께서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대림 시기 시작하는데, 대림환 어쩔거요?” 하고 물으셨습니다.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저는 부랴부랴 창고에서 아이 키 만한 큰 초들을 쇠톱으로 자르고 칼로 다듬었습니다. 시골스럽게 대성당과 소성당에 대림환을 설치해놓으니, 그제야 어르신 신부님 얼굴에 화색이 환하게 돌았습니다.
대림환 장식은 초기 양성기 형제들이나 젊은 형제들, 아니면 봉사 오시는 자매님들의 몫이라 생각했는데, 깊은 시골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웬만한 것은 직접 다 해야 합니다. 열심히 초를 자르고 깎던 제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번 대림 시기 초를 깎는 마음으로, 나를 깎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 하늘을 찌르는 교만을 깎고, 나태함과 게으름의 나를 깎고, 하느님께 대한 불신과 불충실한 나를 깎으며 그렇게 한 달을 살아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오늘 전례력으로 새해 첫날, 돌아보니, 지난 한 해도 어김없이 결핍과 상처투성이의 삶, 실패와 부끄러움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제 깊은 상처 그 틈 사이로 크신 주님의 자비가 흘러들어왔음을 실감합니다.
대림 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예수님께서는 각별한 당부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고 계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 날이 너희를 덫처럼 덮치지 않게 하여라.”(루카 복음 21장 34절)
돌아보니 참으로 많은 시간을 헛되고 의미 없이 보냈습니다. 내 인생 여정에서 앞으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금쪽같은 시간을 흥청망청 놀고, 먹고, 마시는데 소모했습니다. 모든 것 하느님 자비하신 손길에 맡겨드리지 못하고 부끄럽게도 오랜 시간 근심하고 걱정했습니다.
놀고,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듭니다. 한 치 앞만 내다보게 되니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게 만듭니다. 남아있는 시간, 남아있는 인생을 주님 권고에 따라 살아가야겠습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복음 21장 36절)
깨어있음은 언제나 기도와 연결돼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란 깨어있는 상태로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일정 시간은 잠을 자야 하는 인간이기에 항상 깨어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하루의 많은 시간을 생업에 몰두해야 하는 게 우리네 삶입니다.
그러나 잠드는 순간, 잠자는 순간조차도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깨어있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일할 때 역시 주님께서 내 옆에서 내를 지켜보시고 나를 도와주신다고 생각하고 일을 하면 그 역시 깨어있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결국 깨어 기도함을 통해 우리는 주님 재림의 날에도 굳건하고 기쁘게 서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출처: 원글보기; ◎▶ 글쓴이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4]대림절은 퓨처(future)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애드벤트(advent)를 기대하는 절기입니다
- 박태범 라자로 신부
찬미예수님!
오늘은 대림 제1주입니다. 전례력으로 달력이 바뀌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는 날입니다. 성당을 다니는 우리나라 사람은 세 번이나 연말연시를 지나칩니다. 첫 번째가 바로 대림시기를 지내는 오늘이고, 두 번째는 달력의 날짜대로 양력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음력설을 맞이합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전례력으로 한 해의 시작을 대림절로 정해 놓고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 달력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 기준은 예수님의 일생입니다. 예수님의 일생 중 중요한 사건은 역시 탄생과 죽음입니다. 그런데 신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음과 부활을 묶은 파스카사건입니다. 부활이 예수님이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특이점입니다. 부활에 관해서는 부활절에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교회력의 시작은 예수님의 탄생 즉 성탄을 기다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대림시기는 오늘부터 성탄 대축일까지 총 4주간인데, 이 4주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세주를 기다리던 4천년의 시간을 상징합니다.
대림(待臨)은 한자 그대로 “임하시기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복된 희망을 품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전례헌장」 102항)입니다. 대림 첫 주일은 교회달력 혹은 전례력에 의하면 새로운 전례주년의 시작입니다. 올해는 가나다 중 나해에 해당됩니다. 어제까지는 사제가 미사를 드릴 때 녹색 제의를 입고 녹색 영대를 맸는데, 오늘부터 성탄까지는 보라색 제의를 입고 보라색 영대를 맵니다. 이것은 대림시기가 속죄하고 보속하면서 기다리는 시기라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독서에서는 주로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 말씀을 듣고, 미사곡 중에 대영광송을 노래하지 않고 성당을 화려하게 꾸미지도 않습니다. 대림절은 사순절과 전례정신이 서로 통합니다.
대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심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심을 매년 경축하고 기념하는 것이다. 즉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의 성탄을 기념하면서 종말에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2천여년 전에 이 세상에 오시었고, 이 사건으로써 모든 사람은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되었으며 그 구원의 은총은 오늘을 사는 우리 각자에게도 이르고 있기 때문에 이 축일을 우리 모두는 당연히 경축해야 한다.
두 번째 오심은 예수께서 세상 마칠 때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때를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이다. “그때 사람의 아들이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욀 것이다” (마태 24, 30).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서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하고 기도드리고, 미사 때마다 “복된 희망을 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대림 제1주 미사 중에 이제 곧 바치게 될 오늘 대림 감사송에서는 그리스도의 두 차례 오심에 대하여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희망의 기쁨 속에서 권능을 떨치며 오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우리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는 것은 신앙인의 마땅한 자세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종말이고 종말은 심판이며 심판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신앙인에게 있어 새하늘과 새 땅의 개벽이며 더 이상 눈물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슬픔도 없는 새로운 세상의 시작입니다. 우리 신앙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것은 분명하고, 이 그리스도의 재림은 넓게 인류의 구원사안에서 볼 때는 이 세상의 종말이지만 각 개인의 구원사안에서는 각자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는 죽습니다. 바로 그날이 그사람에게는 세상의 종말이고 새로운 세상의 시작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오심을 고대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공동체와 우리의 착한 생활 속에 오셔서 함께 사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 23)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천여년 전에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성사 안에서 우리에게 다시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특히 성체성사로 주께서 친히 우리 각자에게 더욱 친밀한 방법으로 오십니다.
여기에서 특별히 베르나르드 성인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세 번째 오심으로 성체성사에 관해 강조합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은 말 구유 위에 나약한 육신으로 오심이고, 두 번째 오심은 마지막 날 재림 때 영광과 위엄으로 오심이며, 세 번째 오심은 성체 안에 오심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매일미사의 영성체 후 묵상에서 ‘우리가 받아 모신 성체는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예수님을 참되게 만나도록 우리를 준비시키는 양식입니다. 성체야말로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의 표징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양식으로 하여 초림과 재림 사이의 이미와 아직 아니의 긴장 안에서 인생살이를 해 나갑니다. 성체성사는 지금 여기의 삶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라틴어로는 대림절을 advent“애드벤트”라고 합니다. 이것은 “미래”라는 라틴어 '아드벤투스'(adventus)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사실 라틴어에는 “미래”라는 단어는 두 개가 있습니다. 이에 따라 신학자 몰트만은 기초신학적 입장에서 미래를 라틴어 푸투룸(Futurum, Future)과 아드벤투스(Adventus, Advent)로 구분합니다. '퓨투룸'(futurum)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미래라는 단어인 “future”의 어원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드벤투스'(adventus)인데 이것의 한자 번역어가 대림(待臨)입니다. 퓨투룸이나 아드벤투스나 모두 미래의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서로 대조되는 개념을 가집니다. Futurum은 형성되어 가는 것 혹은 형성해가는 것으로서의 연대기적 미래를 가리키며, Adventus는 수직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혹은 종말에서 현재로 도래해 오는 카이로스적 미래를 가리킵니다.
'퓨투룸'(futurum)은 인간이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상의 물리적 시간관념입니다. 푸투룸의 시간은 양으로 측정할 수 있으며 순간의 연속으로 수평적으로 물 흐르듯이 흘러갑니다. 이 흐름은 어떤 인간이나 그 무엇도 돌려놓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숫자로 표시할 수 있고 인간이 만들고 달려나가고 형성해가는 미래입니다. 우리는 달력을 한 장 넘길 때마다, 일주일 뒤 또는 열흘 뒤 무슨 날엔 어떤 일을 하리라고 동그라미를 쳐 표시하고, 수첩에 약속을 미리 하여 기입해두는 일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채워 넣어야 하는 연중 계획표나 월중 계획표의 시간입니다. ‘타불라 라사(tabula lasa ‘아무것도 씌어있지 않은 종이’이라는 의미의 라틴어)의 미래입니다. 아직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 위에 계획에 따라 그림을 그려 넣거나 글씨를 써가는 흰 칠판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들의 의지와 결단과 행동을 기다리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영역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속하고, 인간의 형성의지에 속하고,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미래란 운동장을 달려나가는 행위나 산에 오르는 등산과 같이 쟁취하는 시간으로 이해됩니다. 경쟁자들에 지지 않으려고 앞만 보고 달려나가느라고 주위를 돌아볼 시간이 없는 미래입니다.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퓨투룸은 인간의 모방욕망에 따라 상품처럼 소비되기 쉽습니다. 이때 시간은 맘몬 즉 물신(物神)이 사회 구조 전체를 장악하고 지배하는 형국으로 흘러갑니다. 딴 사람 장에 가니까 거름지고 장에 가는 격입니다. 참된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서 자아초월을 위한 미래가 아닙니다. 광고에 나오는 타자의 소비유혹에 따라 혹은 옆에 있는 짝패의 욕망을 모방하여 시간표를 짜고 정량화된 시간을 재화나 재물처럼 소진하는 시간의 미래를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미래는 한 인간이 임의대로 처분할 수 있는 '소유'로 소비됩니다. 이 때의 미래는 가난한 사람들은 신분상승과 재산 증식의 호기로 삼게 되고 부유한 사람들은 사치와 낭비를 즐기며 방탕한 삶을 살기 쉽습니다.
헐벗은 반복의 고된 삶에서는 시간이 잘 흐르지 않습니다. 제대 말년의 젊은 박병장에게 시간은 또오오딱 또오오딱 천천히 흐릅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즐겁게 살아갈 때 시간은 땍땍ㄸㄸ땍 시간이 빨리 흐릅니다. 통시적인 관점에서 헐벗은 반복의 고된 삶에서는 시간이 잘 흐르지 않고 즐기는 삶에서는 시간이 빨리 흐릅니다. 아인시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절대적 시간은 없습니다. 블랙홀 근방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릅니다. 여기로 우주 여행을 갔다 오니 지구에 있던 딸은 늙어 있다는 주제는 우주공상영화의 단골메뉴입니다. 심리적 시간 뿐만 아니라 물리적 시간 역시 상대적입니다. 군대생활은 블랙홀과 같아서 국방부 시계는 분명 돌아가지만 천천히 돌아갑니다. 뉴턴의 수학적 객관적 시간이나 아인쉬타인의 상대적 시간 등은 다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현재에서 미래로 통시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미래의 일 역시 막연히 언젠가 발생할 수도 있는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 현실화되어 부분적이고 파편적이지만 현실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미래의 일이지만 완성된 거룩한 일은 이미 여기에서 현실화되어 그 창조적인 힘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미래의 일은 질료적으로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실재적으로는 지금 여기 부분적이고 파편적이지만 현실화되어(actualisé) 지금 현재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과거는 이미 지나가서 기억과 추억 속에만 있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서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현재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현재도 실제로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려 시대의 작가로 충숙왕 때의 우탁(禹倬, 1262~1342)의 '탄로가(嘆老歌)’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 하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이 작품은 전해지는 시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또한 가장 오래 패러디되어 불리고 있는 시조이기도 하다, 춘향전에 ‘탄로가’가 나오고, 잡가 ‘백발가’도 이 시조의 발상을 그대로 따와 ‘오는 백발 막으려고 우수에 도끼 들고 좌수에 가시 들고 오는 백발 두드리며 … 가는 홍안 절로 가고 백발은 스스로 돌아와 귀 밑에 살 잡히고 검은 머리 백발되니’로 노래한다. 최고 최장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시조라고 하겠다.
늙는 것은 가는 시간으로 묘사하고 백발은 오는 시간으로 의인법으로 은유하고 있습니다. 백발이 인격화(personificatio)되어 있지요. 자연히 찾아오는 세월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막아보려는 인간의 솔직한 감정을 처절하게 노래합니다. 종말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는 않고 자연주의적인 삶의 태도가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인간은 다가와서 도래하는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 없습니다. 시간은 가는 것이지만 동시에 도래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프랑스어권 종교학자 미르케아 엘리아데는 시간의 흐름을 인간 의식의 흐름으로 생각합니다. 엘리아데는 그 시간의 흐름을 현재를 기준으로 방향을 거꾸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르는 것으로 의식되지만 다른 차원 즉 성스러운 차원에서 보면 미래 현재 그리고 과거로 흐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역시 쌍방향으로 영향을 끼치고 현재를 구성합니다.그리고 하늘에서 땅으로 수직적으로 내리 꽂히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성스러운 시간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시간은 하늘에서 땅으로 수직적으로 내리 꽂히는 시간입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땅으로 흐르는 시간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르는 시간이 영원에서 현재로 흐릅니다. 하느님은 순수현실태(Actus purus)이기에 항상 현재 진행형이고 그분의 존재는 명사형이 아니라 동사형입니다. 그런데 순수 현실이신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미래를 선취(先取, l’anticipation)하여 현재화하고 현실화(actualisation)시키는 초월적 능력을 주셨습니다.
아드벤투스는 시간이 주인이 인간이 아니고 하느님이심을 잘 드러내줍니다. 시계가 대중화된 후 소유 자본주의 시대의 인간은 시간 역시 소유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미래 역시 소유하고 장악하기 위해 달려가지만 아드벤투스는 이러한 인간에게 그것이 덧없음을 일깨워줍니다. 하느님이 공간과 시간을 창조하신 주인이시고 인간은 그것 안에서 살아가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아드벤투스는 잘 알려줍니다. 그렇지만 개인적 차원에 있어 종말인 죽음은 기다리지 않는데도 노화와 함께 엄청나게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달려옵니다. 그리고 죽음은 곳곳에서 시시때때로 시한폭탄처럼 째깍거리고 다가오고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 젊을 때의 푸투룸은 더디 형성되어 가지만 노년의 아드벤투스는 백발과 함께 성큼성큼 진격해 옵니다. 오는 시간은 쏜살처럼 점점 더 가속도가 붙어서 빨리 옵니다. 시속 10킬로 시속 20킬로 시속 30킬로로 늘어납니다. 이것은 나이가 많을수록 시간은 흰 도화지를 채워 나가기 보다 달려오는 것임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청소년의 가는 세월은 더디 가지만 노년의 덮쳐오는 세월은 빨리 옵니다.
이에 비해 아드벤투스의 미래는 '오고있는 것'으로서의 장래의 시간입니다. 아드벤투스 즉 대림은 시간이 하늘에서 땅으로 수직적으로 내려꽂히는 때입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영원에서 현재로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아드벤투스는 수평과 수직이 만나는 시간입니다. 이것은 수직적으로 지펴 오르거나 내리 꽂히는 시간입니다. 퓨투룸이 나아가는 시간이라면 아드벤투스는 기다림 즉 대림의 미래입니다. 한자어 대림은 라틴어 ‘아드벤투스’(adventus)를 번역한 말입니다. 아드벤투스는 나타남, 도착을 의미합니다. 아드벤투스는 로마인들의 신화 세계에 기원을 둔 용어로 신이 자신의 신전을 찾아오는 일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황제가 즉위한 후 지역을 처음으로 ‘공식방문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미 기원전 3세기경에 ‘파루시아’가 “황제의 지방 순시”를 의미하는 단어였다고 밝혔습니다. 이 용어가 그리스도교로 들어오면서 ‘하느님께서 연례적으로 성전을 방문하심’의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345년 <로마 연대기>에 따르면,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즉위일을 ‘아드벤투스 디비’(adventus Divi, 신의 오심)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황제의 신격화에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아드벤투스의 성서적 언어는 그리스어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입니다.
파루시아를 인수분해하면 παρα(파라, 곁에 가까이)+ουσία(우시아, 있음)입니다. 우시아는 철학에서 보통 실체 혹은 본체로 번역됩니다.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위격으로는 셋이고 본체로는 한 분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본체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단어가 우시아입니다. 이 우시아는 “있다”를 의미하는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에이미(ειμι)에서 파생되어서 존재 혹은 실재 등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파루시아는 문자적으로 “곁에 가까이 있음” 즉 “임재”를 의미합니다. 장소적으로 다른 곳에 있다가 곁으로 오게 됨을 의미하면서 또한 시간적으로 다른 시간에 있다가 현재로 오게 됨을 의미합니다. 또한 관계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함께 하나가 되는 알리앙스(alliance, 결합, 일치)를 위해 오게 됨을 의미합니다.
희랍어 파루시아가 라틴어 아드벤투스로 번역되면서 뉘앙스의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이 말을 차용해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오는 일을 설명합니다. 이후 아드벤투스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온 것, 그리고 세상 끝 날에 구원 사업을 완성하기 위해 다시 오는 재림을 표현하는 용어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스어 문화가 라틴어 문화로 융복합이 이루어지면서 토착화가 됩니다. 임재의 뜻에 도래의 뜻이 더 보태어져서 강화됩니다. 3세기를 지나면서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부재 기간이 길어지고 임재가 지연됨에 따라 즉 종말 혹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됨에 따라 아드벤트스의 의미 중에 도래의 의미가 부각됩니다.
아드벤투스는 도래의 미래이며 기다림의 미래입니다. 그런데 아드벤투스로서의 시간관념은 이성이 지배하던 근대를 지나오면서 많이 희박해졌습니다. 현대인에게 지금 여기 이리로 달려 오고 있는 미래라는 개념을 거의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존재보다 소유의 관점에서 시간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아드벤투스의 시간 개념을 회복해야 합니다. 퓨쳐(future)의 미래는 불확실하고 불안한 미래입니다. 우리가 계획을 세우고 해도 우리의 발길을 이끄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내일 일 아니 지금 이후의 일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이 계획하고 설계한 미래는 절대로 그 계획대로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사목계획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각 본당에서 사목 계획서라는 것을 만들어서 내년 2월까지 제출해야 합니다. 내년 계획을 내년 2월이라니? 참 빠르기도 합니다. 우리 옥산 성당에 부임해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로 사목위원들에게 각 파트별로 사목계획서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난감해하는 신자들에게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미니멀리즘을 제안하였습니다. 어차피 실천하지 않거나 실천하기 어려운 것은 다 빼라고 했습니다. 기본에 충실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잘 모르는 부분은 본당신부와 의논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4차 산업혁명의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 오장육부가 아니라 오장칠부의 인간이다. 일곱 번째의 장기로 스마트폰을 장착하고 살아가는 신인류) 시대의 바뀐 패러다임과 팬데믹의 뉴노멀을 염두에 두고 새로운 것을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청소년위원회는 이미 작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본당에 선교위원회와 선교위원장이 없다는 것은 아주 특이한 점입니다.
요즘 와서 보면, 안타깝게도 거저 습관적으로 헐벗은 반복(répétitions déshabillées)으로 1년 혹은 10년 계획을 세우는 것은 이미 기저질환이 된 사회병리현상입니다. 10년간 일어날 일이 1년 만에 일어나는 예측하기 어려운 큰 변화의 시대에, 옛날 방식으로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지나가는 소도 웃을 넌센스입니다. 바보가 아니면 어차피 세운 계획대로 안된다는 것을 다들 압니다. 10년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정말 뚱딴지같은 시도입니다. 이것은 기계적으로 세우는 계획입니다. 계획을 위한 계획입니다. 이렇게 수립된 계획이라는 것을 보면 대개 미래는 없고 과거에 했던 것을 그냥 재탕 삼탕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딴 본당이나 다른 교구에서 했던 것 중에 그냥 베껴오는 것도 있습니다. 어쨌든 미래는 없고 과거만 잔뜩 들어있는 좀비 사목신학이 그 배경에 있습니다. 좀비는 현재 살아있지도 죽지도 않은 존재입니다. 좀비에게서 기시감(旣視感, Déjà Vu 데자뷔)만 있지 기대감은 생기지 않습니다. 우격다짐으로 주리를 틀면서 강요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실천이 안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작년 계획에 있던 것을 또 반복하여 사목계획서에 넣어봤자 에너지 낭비가 됩니다. 이것은 매년 연초에 다이어트 계획을 세우고 시작하지만 해가 갈수록 몸무게는 늘어나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누구보다 다이어트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잘 알지만 몸무게는 줄지 않는 사람의 헛된 망상입니다. 연간 사목계획 혹은 교구 10년 사목계획이라는 것을 만든다면서 인력과 예산을 낭비하는 것은 요즘 트렌드 아닙니다.
오늘날 하느님 백성의 신앙감(Sensus fidei)을 예감하지 않고 세우는 형식적인 장기 사목 계획은 없는 것만 못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장기 계획에서는 실생활과 동떨어진 거대담론이 생활밀착적인 미시담론을 억누릅니다. 장기 계획을 세우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너무 멀리 그리고 너무 자세하게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틀릴 거니까요. 현재의 계획대로 사목이 되어간다면 발전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지요. 현 시점에서 작성되는 사목계획은 경험칙상 대개 과거 사례들의 헐벗은 반복이며 시대정신(Zeitgeist)에 부응하지 못하니까요. 전체적으로 사목의 방향성을 수립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계획을 장기(長期)로 세우면 환경변화에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한 번 계획을 세우면 융통성 없이 군사작전 하듯 밀어붙이는 집단에게는 오히려 계획이 사람을 잡는 경우가 더러 있지요.
어차피 시대정신에 역주행하는 ‘답정너’의 장기적인 사목계획을 세우는데 시간과 돈과 인력을 소비하기보다 단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하는 데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당장 내년의 일도 모르는데 5년씩 10년씩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놓고 좋아하는 것은 우스꽝스런 옷을 입고서 좋아하는 광대들의 모습입니다. 계획의 주기는 짧을수록 좋습니다. 장기 계획이 아니라 단기 계획을 세우고 일이 어떻게 풀리는지를 봐가며 잽싸게 계획을 애자일(agile, 변화에 대응해가며 순발력있게 일의 방향을 유연하게 바꾸는 방식)하게 수정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특히 팬데믹의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실시간으로 외부상황을 살피는 부지런하고 깨어있는 슬기로운 자세가 필요합니다. 몇 사람이 모여 10년 계획을 한꺼번에 세워놓고 그대로 하겠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적인 집단사고(集團思考, Groupthink)의 오류가 되기 쉽습니다. 그것은 대개 사목적인 게으름의 극치이거나 사목신학적인 무지의 소산입니다. 본당사목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이 가지는 지적인 한계이기도 합니다.
수평적인 크로노스 시간의 흐름 안에 낡은 잡동사니들을 늘어놓는 계획을 세워놓고 그것 자체로 그 계획을 다 이룬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고 대단한 일을 이미 성취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새시대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새술은 새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누빔점과 변곡점을 잘 가늠하면서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조감(鳥瞰, birds eye view)이 필요합니다. 서울의 어느 대리구 사목 연구 발표에서 나온 ‘리좀 교회 시대의 사목에 대한 성찰’을 참고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현대교회는 리좀교회입니다. 이것은 팬데믹으로 더욱 가속화되어 앞당겨지고 있습니다. 변화가 시대의 특징인 우리나라 교회에서 장기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인력낭비이고 예산낭비가 될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 군사독재개발 시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흉내내는 유사 사목계획을 세우는 시대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거시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장기계획은 그 종료(終了)를 선언해야 합니다. 정말 그럴 것인가? 장기계획이 끝나는 시점에서 돌아보면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있겠지만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사목 계획은 크로노스의 시간관에서 벗어날 때 살아있는 계획이 됩니다. 아드벤투스의 시간관념과 크로노스의 시간관념을 병행하여 따라 움직이는 예지가 필요합니다. 공부 못하는 학생은 진도는 안 나가고 조금 하다가 그만 두고 조금 진도를 나가다가 다시 그만 둡니다. 성문종합영어나 수학의 정석 앞부분만 계속해서 보고 끝납니다. 창의적인 해법이 없는 사람은 늘 제1과만 반복합니다. 수학 싫어하는 사람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풀었던 문제 또 풀고 또 풀었던 문제 또 풀다가 끝납니다. 이제 정석보다 해법수학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스스로 문제의 해결점을 사유하고 해법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가보지 않은 길에서 처음 경험하는 일에 대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헐벗은 반복을 계속하는 계획서에 투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4차산업 혁명에 수반되는 시대적 변화와 팬데믹의 뉴노멀이 반영되어야 합니다. 컨택트나 언택트, 온택트를 포괄하면서 뛰어넘어 복음적 딥텍트(Deeptact)로 가야 합니다. 이것이 반영되지 않은 것은 당장 폐기처분해야 합니다. 그래도 고집한다면 그것은 단지 하고 있다는 것을 외부에 보여주기 위한 면피용 레토릭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1년만 지내보면 압니다. 짜 놓은 계획대로 된 본당이 하나라도 있는지? 장기 계획은커녕 단기 계획이라도 신자들이 제대로 알고는 있는지? 사람들이 회개하고 변화되고 있는지? 본당마다 선교가 얼마나 되고 있는지? 복음을 뉴노멀 시대에 실천하고 있는지? 복음화가 얼마나 되었는지? 공동선을 위한 가톨릭 교리가 얼마나 먹혀들고 있는지? 주일 미사에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는 신자들이 얼마나 늘었는지? 비대면 시대에 활용할 콘텐츠가 얼마나 제작되었는지? 젊은이들이 본당에 와글와글한지? 등.
사목계획은 구체적인 질문에 대한 현실적인 답입니다. 비전과 목표에 대한 대안입니다. 정해진 답을 그냥 서술하는 것이 계획서가 아닙니다. 그냥 과거에 했거나 지금 하고 있는 것을 끌어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입체적인 배열과 배치가 이루어질 때 창조적인 파괴가 일어나고 창조적 파괴 없는 계획은 헐벗은 반복입니다. 사목의 핵심적 가치에 대한 고려가 프로젝트의 전 과정에 스며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친교, 소공동체, 선교 등 지속이 요구되는 복음적 가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순간에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며 강조되어야 합니다. 순차적으로 처음 2년 동안은 말씀을 부각하고 나중에 계획의 마지막에 한 6년 쯤 지나서 선교를 하면 된다는 식의 단세포적인 계획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전반기에는 공동체의 친교와 선교 등은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핵심적 가치와 그것에 이르는 수단 등이 잡동사니로 같은 레벨에서 뒤죽박죽 섞여진 계획은 지양되어야 합니다. 계획에는 처음부터 복음화의 핵심적 가치가 현실화되는 방식으로 기획되어야 하고, 프로젝트 진행 중간에도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문제가 있으면 해결책을 만들고, 추가로 수단이나 방법을 모색하여 제도나 장치를 마련하도록 대비해야 합니다. 핵심가치와 그 가치를 실현하는 수단을 구별해야 합니다. 사목에 있어 핵심가치는 하느님과 백성간의 내밀한 신인관계와 회심, 하느님 백성 상호 간의 소통과 친교,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공정에 관한 시대적 요구 그리고 복음화 및 선교 등입니다. 그리고 말씀, 성사, 액션활동 등 나머지는 모두 이 핵심가치를 구현하여 이 땅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수단입니다.
교구의 장기 사목 계획은 그야말로 핵심가치를 위한 비전을 제시하는 정도로 끝나야 합니다. 구체적인 목표의 설정도 중요하나 그 목표는 외부에 설정되지 않고 교회 자체인 그리스도의 몸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시대착오적인 단순 나열이 아니라 체계와 구조의 혁신 즉 그리스도 몸인 교회의 회개가 수반되는 계획이어야 합니다. 통제 처벌 만능에서 벗어나 힐링과 신바람 중심의 생활이 되어야 한다. 신자들과 사목자가 다 행복할 수 있는 영성에서 올바른 사목계획서가 수립되고 그것이 실천될 수 있습니다. 냉담하는 신자는 늘고 신영세자는 줄며 사목자에게 우울증이나 극단적 선택의 충동이 생기게 하는 교회는 희망이 없는 자가당착(自家撞着)의 교회입니다. 지금과 같은 추세로 가면 교회는 더 짜부러들고 앞으로 불행한 일은 계속 더 많이 생겨날 것입니다. 웰빙을 위한 장기계획보다는 지금 당장의 아픔을 치유하는 힐링사목이 현장교회에서는 요구됩니다.
사목 계획을 위해서는 먼저 진단이 나오고 그에 대한 복음적 처방이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몸보신과 성장을 위해 보약이나 운동이 처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성령에 의한 신바람과 행복 바이러스가 퍼져나가게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가치의 혁신과 시대 정신의 발현은 없고, 과거의 잡동사니를 잔뜩 모아 놓는 것만으로는 한과 원한만 더 쟁여질 따름입니다. 우리 본당 사목 계획서는 기시감이 아니라 기대감이 있는 하느님의 구원경륜의 조감도(鳥瞰圖)가 되면 좋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대림절은 푸투룸이나 정량적(定量的, quantitative)인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찰라와 영원순간과 순수현실이 만나는 정성적(情性的, qualitative) 시간이며 공시적인 시간입니다. 대림 즉 아드벤투스는 화석화된 회로에 갇히지 않은 채 덮쳐오는 미래이며 비선형적(非線型的, nonlinear)인 천둥 울림입니다. 비선형적인 운동은 통시적인 카오스모스입니다.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혼재해 있습니다. 질서 속에서의 변화가 아니라 변화 속에 질서가 있습니다. 질적인 차원에서는 부분의 합이 전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퓨투룸은 인간이 예상하거나 짐작할 수 있고 기투할 수 있지만 아드벤투스 앞에 인간은 피투됩니다. 희망과 기대, 개봉박두의 긴장감과 설레임을 안고 있습니다. 오고 있는 미래가 사건과 인물에 관한 이야기면 지금 현재에 큰 영향을 줍니다. 특이점(le point singular)의 부분 속에 전체나 다른 부분에 대한 모든 존재내용이 다 주어져 있으므로 찰나 속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정보와 사건이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주체로 형성해나가는 미래보다 훨씬 역동적입니다.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 오고 낡은 것은 소멸시킵니다. 주님의 아드벤투스는 시행착오가 없는 새로운 세계를 발현시킵니다. 이런 미래에서는 현재의 인간이 시간의 주체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인간이 사건 발생의 주인공이 되지 않습니다. 오고 있는 님은 모셔드려야 할 뿐이지 인간이 어떻게 손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독히 우연적이면서도 섭리적인 하느님의 경륜입니다. 아드벤투스의 미래는 은총이며 선물입니다. 그냥 오는 것이고 그냥 주어지는 진리이고 성스러움입니다. 그것도 인격화된 성스러움입니다. 느낌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대림은 하느님께서 예비하신 완전하심이 사람에게 점점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예비한 미래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재림입니다. 루카는 예언하였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행전 1,1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제자들이 본 그대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드벤투스라는 대림절의 미래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불완전한 미래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완전한 미래가 인간에게 달려옵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인들은 참혹한 박해를 파루시아 즉 주님의 대림을 기다리는 아드벤투스종말신앙으로 인내하고 견디어 냈습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주께서 오심이 가까웠다”라는 소망으로 모진 박해를 이겨냈고, 인생살이의 모든 근심과 염려를 파루지아 신앙으로 이기며 살아왔습니다. 오시는 그 날과 그 때는 예수님 본인도 모르는 것이요,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는 것이라고 하였기에, 그 날을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주님이 오실 날이 점점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 있는 신자들은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소서” 라는 갈망으로 아드벤투스를 깨어 기다리면서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갔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깨어 있어라"는 세 번씩이나 나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어라(Be on guard! Be alert, keep watch)”라고 명령하십니다. 짧지만 선명하고 강렬합니다. 현재진행형중에 있어라는 정언명령입니다. 주님께서 파루지아와 함께 홀연히 재림하실 때 우리가 쿨쿨 잠들어 있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깨어있지 않은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성경에서 ‘깨어 있으라 ’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γρηγορεω’인데 음역하면 ‘그레고레오 (gregoreo)’입니다. 들어올리다’의 뜻을 가진 ‘에게이로(ἐγείρω)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역사에 등장하는 그레고리오 교황님의 이름입니다. ‘그레고리오’는 문자적으로 잠에서 깨우다, 죽음에서 눈을 뜨게 하다, 병에서 또는 누운것에서 일어나게 하다, 나타나게 하다, 선동하다, 건축하다, 자리를 차고 일어나다, 상징적으로 불확정함, 비활동, 비존재에서 다시 일어나다 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 로 ‘깨어 있다, 지켜보다, (문자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정신차리다, 엄하게 정성을 기울이다, 신중하다, 경계하다, 주의하다’라는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난 2014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우리나라 순교자들 시복식과 아시아 청년 대회에 참석하시기 위해서 오셨을 때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그중에서 청년들에게 하신 말씀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일어나 깨어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이신 말씀은 잠자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잠자면서 춤을 춤을 출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사실 잠자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춤을 출수도 연애를 할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깨어 있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두 눈에 힘을 줘서 부릅뜨고 졸린 눈을 억지로 참으며 눈꺼풀을 버티고 잠 한숨도 자지 않는 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까? 다니던 학교나 직장 그만 두고 기도원에 모여 기도만 하고 있는 것이 늘 깨어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청년들에게 “깨어있으라”고 호소하시면서 또 삶에서 진정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깨달으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 보면 깨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고백이 나옵니다. “주님, 당신은 저희 아버지십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모두 짝퉁이 아니라 명품입니다. 우리는 진흙이지만 하느님께서 빚어 만드신 작품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셨으니 얼마나 잘 만들었겠습니까? 우리 인생살이에서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바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걸작품이라는 것을 깨닫고 걸작품답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우리가 깨어있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아주 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이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아버지께서 빚어낸 자식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답게 창조주 하느님의 걸작품답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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