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시대 몸의 운명과 포르노그래피
- 이 왕 주(부산대 윤리교육과 교수)
나는 먼저 영상시대로 정의되는 현재의 문명상황의 형이상학적 근원을 살펴보겠다. 그것은 플라톤의 눈과 니체의 몸의 싸움이라는 구도 안에서 선명해진다. 포르노그래피는 이 싸움에서 눈이 몸으로부터 탈취해낸 기묘한 전리품이다. 포르노그래피의 이러한 상황적 맥락이 가려지면 그것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이 생겨난다. 현상론적 담론들로 회자되는 포르노그래피 안에는 문명사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해왔던 이성중심주의의 음모가 깊숙히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겠다. 나는 인간이 이 음모를 깨트리고 몸과 그 관능적 욕망을 긍정함으로써 대지 위에 삶의 주인으로 살아남으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것을 결론으로 제안하겠다.
1. 이성 혹은 시선
플라톤 철학은 흔히 ‘바라보는 시선’으로 환유되곤 하는 이성을 논리적인 방식으로 권력하는 데에로 모아진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인식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이성뿐이다. 이 이성은 다양한 메타포로 플라톤의 사유를 가로지른다.
바라본다는 것은 최소한 보는 자와 보여지는 것 즉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을 전제한다. 이 둘을 가르는 기준은 시선이라 할 수 있다. 시선의 발원, 혹은 출처가 주체이고 그것의 지향점 혹은 착지가 객체이다. 이렇게 본다면 주체의 모든 권력은 시선에서 나온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보여지는 것 즉 객체는 주체의 조망점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분석, 배치, 맥락화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주체의 자의성에 위탁되는 것은 아니다. 헤겔 식으로 표현하자면 객체에 대한 무지는 주체의 모순이다. 이러한 모순에 사로잡혀 있는 한 주체에게는 자유가 없다. 자의성을 방조할 수 있는 권력과 상관없이 우선은 제대로 보는 것이 문제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보는 것이 가능하려면 보여지는 우선은 객체가 눈으로부터 일정한 거리 저편에 떨어져있어야 하고 또 제대로 볼 수 있기 위해서는 내부에서 솟구치는 다양한 욕망, 정서들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육신을 갖고 있는 한, 그러한 냉철함을 얻는다는 게 지난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는 데에 있다. 플라톤이 육체를 영혼에서 분리하는 것이 현자의 길임을 다양한 논변을 통해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육체를 털어버린 투명하고 순수한 시선으로 대상과 세계를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이 플라톤의 경우에는 지혜를 사랑하는 현자의 과제였던 것이다. 그것을 플라톤은 ‘직관’이라고 명명했다. 이것은 몸을 벗어나서 영혼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한 눈만이 진짜 즉 이데아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제 영혼은 진리를 획득하게 되는가. 몸과 함께 어떤 것을 생각하려면 영혼은 언제나 속임만 당하니 말이다. 만일 참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사유 안에서만 밝혀져야 하는 게 아니냐. 정신이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을 때, 소리, 시각, 고통, 쾌락 등 그 어떤 것도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을 때, 그리고 정신이 그런 것들과 가능한 한 무관할 때, 말하자면 정신이 신체적인 감각이나 욕망을 전혀 지니지 않을 때, 정신이 참된 존재를 향해 고무될 때, 그때 사유는 최선의 상태에 있게 된다. 이런 점에서 철학자는 몸을 경멸하는 것이다. 철학자의 영혼은 몸에서 빠져 달아나서 저 혼자서 있으려 한다.
영혼에게 몸이란 벗어 던져버려야 할 무거운 짐 같은 것이므로 그것에서 빠져 나온다는 것은 동정 받아야할 불행이 아니라 축복 받아야할 행운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지상에서의 육신의 죽음은 현자가 자발적으로 선택할만한 현명한 선택지일 수 있다. 플라톤은 이런 맥락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탈육체를 위한 현자의 도약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이 현세의 삶에서 몸과 가능한 한 관계를 끊고 신체적인 기운들을 잘 다스려서 신이 우리를 몸으로부터 즐거이 풀어줄 때까지 우리 자신의 순수함을 지켜낼 때 우리는 참된 인식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몸의 이러한 어리석음을 제거함으로써만 우리는 순수해질 수 있고 순수한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고 어디든지 비추는 밝은 진리의 빛에 대해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플라톤이 몸에 대해 이렇게 조롱과 야유를 퍼부을 수 있었던 것은 피안 세계의 진리를 열렬한 마음으로 연모했던 소크라테스적 신앙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그가 볼 때, 이 지상에서 영혼은 육신의 감옥에 갇혀있고 육신은 또 그림자, 영상, 이미지의 감옥에 갇혀있다. 그는 저 유명한 두 개의 비유 즉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이 사실을 증명해보이려 했다.
플라톤은 인식의 층위를 뜻하는 수직으로 세운 선분을 넷으로 나누어 제일 아래는 그림자 단계, 다음은 영상 단계, 그 위는 이미지 단계, 최상위는 형상 즉 이데아 단계로 설정한다. 여기서 다시 플라톤은 아래 두 단계를 묶어서 ‘육체의 눈’에 배당했고 위 두 단계를 묶어서는 ‘영혼의 눈(이성)’에 배당했다. 그림자나 영상만을 보는 육체의 눈과 진리나 이념만을 보는 영혼의 눈의 대비는 플라톤 사유에 일관되어있는 액자다. 플라톤 철학의 핵심 개념인 ‘이데아’도 ‘본다’는 뜻을 가진 당대 희랍의 일상어 ‘이데인’의 명사형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이데인의 주체를 인간 혹은 육안에서 영혼 혹은 이성으로 바꾸어놓게 되자 저잣거리의 어휘였던 이데아는 신비한 플라톤적 아우라로 휩싸이면서 고도의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플라톤의 관심사는 육체를 털어버리는 눈으로 영원한 진리를 ‘보는 것’이었다. 그가 대지를 혐오하고 생성소멸하는 지상의 사물들을 경멸하며 그림자, 영상 등을 업신여겼던 것도 다 이 때문이다. 특히 우리가 앞으로 전개시킬 논의의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이데아를 영혼의 눈으로 보는 것과 영상을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 사이에 놓이는 대비일 것이다. 플라톤 사유에 일관되어 있는 것은 전자를 해방된 자의 삶, 후자를 죄수들의 삶으로 간주하는 메타포다.
플라톤은 이런 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대조적으로 시인, 예술가를 공격한다. 그에 따르면 그림자와 영상만을 만들어내면서 ‘육체의 눈’에만 아첨을 떨어대는 시인, 예술가들은 마땅히 공화국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그들은 진리로부터 이중삼중으로 멀어지는 가짜들만은 생산하며 민중을 현혹시키기 때문이다.
2. 사랑 혹은 몸
몸은 시선에 의해 언제나 속수무책으로 먼저 붙잡히는 불투명한 객체다. 타자의 시선 앞에서 무차별 노출되는 몸의 반응은 신의 부름을 받은 아담의 심리에 원형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그것은 숨을 곳이 없는 절망적인 조건 속에서 필사적으로 자신의 몸을 숨기고자 하는 죄수의 심리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저 단지 내 신체가 누군가에 보여진다는 사실만으로도 투명한 밧줄에 의해 온몸이 묶여드는 것 같은 구속을 느끼게 된다.
눈에 대한 타자로서의 몸은 보는 주체가 아니라 느끼는 주체다. 철학사에서 이러한 몸의 느낌에 대해 가장 심오한 통찰을 보여주었던 인물은 니체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대지에 대한 두 종류의 사랑법을 언급하는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하나는 ‘달의 사랑법’이고 다른 하나는 ‘태양의 사랑법’이다. 전자는 시선만으로 상대에 접근하는 자의 사랑법이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보여지는 거리 저편에 놓인 몸을 두고 수치심과 양심의 가책으로 비틀거린다. 니체는 시선의 사랑법 즉 달의 사랑법을 위선가들이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맹렬히 성토한다. 그것은 내장으로는 연모하면서 눈으로는 경멸하고, 심정으로는 갈구하면서 사유로는 배척하는 위선의 사랑, 욕정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스스로 그 욕정을 부인하고 비난하는 모순의 사랑. 이 이중성을 감추면서 버티어내기 위해 상대를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는 것이다.
거짓말쟁이인 그대들의 정신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게 최고의 것은 욕망 없이 개처럼 혓바닥을 늘어뜨리지 않고 인생을 바라보는 것이다. 의지를 죽이고 이기심의 지배와 탐욕에서 벗어나 ―온몸이 싸늘한 잿빛으로, 그러나 도취된 달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행복해지는 것이다’.
유혹된 자는 자신을 이렇게 유혹한다. ‘내게 가장 훌륭한 것은 달의 사랑법으로만 대지를 사랑하고, 오직 눈으로만 대지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모든 플라톤주의자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방식이 바로 시선으로 대상을 음미하려는 달의 사랑법이다. 이러한 사랑법에 대상은 오직 권력의 객체로서 정립되고 조망되고 분석되고 향유될 뿐이다. 그러한 사랑은 오로지 위선자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태양의 사랑법’은 시선으로써 다가서는 사랑법이 아니다. 그것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고 소리죽여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솟구쳐 오르는 것이며 숨죽인 욕망이 아니라 거침없이 발산되는 창조적 욕망이며, 속타는 체념이 아니라 뜨거운 입맞춤이며, 어둠 속에서의 비겁한 겁탈이 아니라 대기 속에서 빛 자체가 되는 결합이다. 요컨대 이런 사랑을 위해 필요한 것은 눈이 아니라 몸이다.
달의 정사는 끝났다. 보라! 현장이 발각된 달이 창백하게 질려 저기 서 있다.아침의 서광 앞에. 이미 붉게 타오르는 태양이 솟아오르기 때문이다.대지에 대한 태양의 사랑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태양의 모든 사랑은 순수하며 창조적인 욕망이다. 보라, 태양이 얼마나 성급하게 바다를 건너오고 있는가를. 그대들은 태양의 사랑의 갈증과 뜨거운 입김을 느끼지 못하는가.
태양은 바다를 빨아먹기 원하며, 바다의 깊이를 자신의 높이까지 마시려 한다. 이제 바다의 욕망은 천개의 유방으로 부풀어오른다. 바다는 태양의 갈증에 의해 입맞춤을 받고 빨리기를 원한다. 바다는 대기가 되고, 높이가 되고, 빛의 길이 되고, 빛 그 자체가 되기를 원한다.
이것은 눈으로 하는 사랑아 아니라 몸으로 하는 사랑이다. 플라톤적 ‘직관’을 ‘거세된 자들의 곁눈질’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조롱하는 니체는 태양의 사랑법으로 자신의 몸을 사랑하고 대지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고 우리를 다그친다.
니체는 몸이 이성과 무관한 고기덩어리로 간주하려는 이성중심주의의 음모를 폭로하려 한다. 몸은 이성의 타자가 아니다. 몸이야말로 장난감 같은 정신이나 도구적인 이성보다 더 크고 위대한 이성이라는 것이다.
나는 온전히 몸이며 그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영혼이란 몸에 딸린 그 무엇을 나타내는 말일 뿐이다. 몸은 위대한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가진 복합체이며, 전쟁이고 평화이며, 양떼이고 목자이다. 형제여, 그대가 정신이라 부르는 작은 이성 역시, 몸의 도구이다. 큰 이성의 작은 도구이며, 장난감인 것이다.
니체가 몸의 복권, 신체성의 부활을 주창하는 것은 이런 맥락 안에서다. 그에 따르면 이성중심주의로 무장된 플라톤 형이상학은 기만과 거짓으로 가득찬 허구의 서사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진정 가치 있는 철학적 성찰의 주제는 이성이 아니라 몸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세기에 지속적으로 인류를 매혹시킬 비밀에 가득 찬 주제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거듭 강조하는 초인의 역사는 몸의 역사를 부활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이성중심주의의 틀거리 안에서는 존재는 하나의 신과 나머지의 가축 떼거리 같은 인간들로만 구성된다. 이제 이런 역사는 끝나야 한다고 니체는 주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축떼거리 같은 인간을 넘어서는 초인(超人), 새로운 인류를 처음으로 보여주는 초인(初人)의 역사가 시작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초인은 대지의 뜻을 긍정하는 자이고 태양의 사랑으로 몸을 사랑하는 존재다. 이제 우리의 목표는 인간이 아니라 초인이어야 한다.(WM 1001)
니체는 전통 형이상학의 핵심 개념인 ‘진리’에 대한 야유와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있는 것과 없는 것, 가짜와 진짜, 귀한 것과 천한 것을 뒤바꿔놓은 기만의 체계라는 것이다. ‘가짜 세계와 진짜 세계의 대립은 알고 보면 세계와 무의 대립에 지나지 않는다.’(WM 567), ‘참된 세계와 그림자 세계’라는 개념의 비판.여기서 참된 세계란 단순한 허구이며 완전히 날조된 것이다. 실재성은 그림자에 있다. 그림자는 이 실재성의 존재형식일 뿐이다.’(WM 568) 니체는 이러한 주장들로써 플라톤 형이상학이 원한감정에서 끝없이 홀대해온 저 그림자와 영상들을 구하려 한다. 그 구원자가 곧 예술이다. 결국 ‘진리’로부터 멸망당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예술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찰들을 통해 니체는 예술, 예술가에 대해 플라톤과 다른 결론을 끌어낸다. 시인, 예술가들은 추방되어야 할 자가 아니라 추앙되어야할 자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3. 시뮬라시옹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를 요약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정의하자면 그것은 플라톤 패러다임에서 니체 패러다임으로 전환된 삶의 형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때 플라톤 패러다임에는 진리, 이성, 원본, 토대, 본질, 물자체, 동일자, 일치, 큰 이야기 등이 귀속되고, 니체 패러다임에는 연대, 감성, 시뮬라시옹, 여백, 틈, 실존, 현상, 타자, 차이, 작은 이야기 등이 귀속된다.
지상의 척도가 긍정되면 이데아, 원상에 묶여있던 그림자, 영상 등도 풀려나게 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니체적 선언을 통해 해방되는 것들은 그림자의 그림자, 영상의 영상, 그림자의 그림자의 그림자.... 영상의 영상의 영상....에까지 두루 망라되기에 이른다.
예술의 자율성, 작품의 현실성, 이미지의 실재성 등은 이런 맥락 위에서 탄생되는 개념들이다. 니체 패러다임 안에서는 시인, 화가, 조각가는 더이상 추방되어야할 진리의 파괴자들이 아니다. 원본 이데아가 없으니 모조 가짜를 문죄할 근거도 없게 된다. 오직 그들이 생산해내는 작품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특히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려는 것은 이데아 원본주의의 몰락이 기술적 차원에서의 복제 문화를 확산시켰다는 사실이다. 사진, 영화, 텔레비전, 문서 복사 등 요철없는 납작한 평면 복제 기술들의 탄생도 플라톤적 영상의 해방사 안에서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특히 최근 추세에서 영상 문화는 시장 자본의 지원에 힘입어 주도적인 시대정신으로 가파르게 부상하고 있다. 이토록 당당해지게된 복제품들의 이면에는 니체의 이름이 서명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어떤 영상들이 특별한 방식으로 권력화되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니체 패러다임 안에서 그림자 혹은 영상에 대해 ‘무엇이 참으로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실재성 문제는 ‘그것이 내게 무엇인가?’라는 해석학적 영향사의 문제로 대체된다. 이것은 곧 우리의 관심사가 진리에서 권력으로 이동해갔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되면 원본과의 핍진성에 따라 진리의 등급을 배당받던 복제, 영상들은 자율적인 존재로 해방될 수밖에 없다. 허구는 이제 더이상 부끄러운 명칭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허구들은 자신의 허구성을 권리화하며 우리 삶 안으로 간섭해 들어서려 한다. 이런 방식으로 실행력을 지닌 권력화된 허구를 시뮬라시옹이라고 부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전위 논객인 보드리야르는 이 허구들에게는 실재성이 없는 게 아니라 다른 실재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곧 플라톤적 실재보다 더 실재적이라는 의미에서의 초실재성(hyper reality)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은 우리로 하여 하나의 역설 앞에서 서게 한다. 니체의 이름이 서명된 이 그림자, 영상들이 오히려, 만지고 느끼고 흩어내고 애무하고 압착하는 니체적 체험 양식을 철저히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을 위해 필요한 것은 몸이 아니라 눈이고, 느끼는 게 아니라 보는 것이다. 니체의 이름으로 니체를 배반하는 이 역설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4. 포르노그래피
영상 이데아라는 말이 낯설지 않다. 이제 시뮬라시옹으로 권력화되던 영상들은 마침내 이데아의 권좌를 승계하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 형이상학의 차꼬로 함께 묶여있던 몸은 불행히도 바로 이 새로운 권력에 의해 다시 예속되는 운명에 내몰리게 되어있다.
시뮬라시옹의 권력화가 몸의 예속을 함축하는 이 상황은 매우 역설적인 것이다. 원래 영상은 몸이 복권된다는 조건 아래서만 가까스로 승인될 수 있는 부속적 존재자였던 까닭이다.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몸과 영상 사이에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살의 무게를 정직하며 감내하며 존재해야할 몸의 숙명에 속해있는 비극일 것이다. 여기서 몸의 숙명이란 곧 자본, 기술과의 영원한 불화다. 푸코가 분석했던 대로 문명사에서 몸이 줄곧 권력의 타자로서 감시와 처벌의 무력한 객체로 방기되어온 것은 어쩌면 플라톤의 망령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몸의 숙명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 사이버 세계 안에 놓여있는 몸의 상황을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역설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니체 패러다임에서 그림자, 영상은 초실재의 시뮬라시옹으로 복권되는데 반해, 니체가 그토록 열렬히 찬양했던 몸은 오직 담론 형태로만 설왕설래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 막강한 권력으로 부상하는 영상 이데아가 종종 몸과 불화관계에 놓일 뿐 아니라 몸을 순치시키려는 위협적 세력으로 다가선다는 것이다.
가령 총을 든 군인의 사정거리나 사복경찰의 감시망은 차라리 소박한 것들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언제나 우리가 도피해 들어설 수 있는 사각지대가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내 의식이 깨어있는 한, 잠재의식에까지 파고들어 내 몸을 규율하려드는 시뮬라크르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각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길항하고 갈등하는 몸과 영상의 긴장관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포르노그래피다. 형이상학적 맥락에서 보면 포르노 카메라는 지상의 모든 것을 감시의 권력망 안에 묶어두려 했던 플라톤적 이념의 빛나는 성취사례다. 이것은 플라톤 시대는 물론이고 니체 시대까지도 불가능한 것으로 남겨졌던 이상이었다. 왜냐하면 영상 포르노가 출현하기 이전에 커튼이 드리워진 침실은 언제나 이성의 저편에 놓였고 권력의 피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신체성의 신비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였고 눈이 틈입할 수 없는 투과성의 마지막 한계영역으로 남겨져 있었던 것이다. 푸코도 지적했듯이 그것은 고해성사의 경우처럼 귀로 위장한 눈(이성의 권력)이 종교적 의식을 빙자해서 가끔씩 염탐했던 정도였다.
그러나 마침내 카메라의 눈은 성교 중인 남녀의 성기를 화면 가득 클로즈업시킴으로써 커튼 드리워진 침실 안쪽을 카메라의 권력망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했다. 이것은 감시 권력에 저항하던 최후의 성채인 몸이 결국 이성의 권력 앞에서 어떻게 몰락되어갔는가를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결과다.
포르노그래피 안에서 몸은 철저히 탈신화화 된다. 카메라 앵글이 속옷 안의 몸, 몸 안의 성기를 차례대로 까발리면서 커튼 뒤의 알몸이 지니던 신비의 아우라는 안개처럼 걷혀버린다.
포르노의 카메라는 신비, 이상, 존귀 등만 무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흔적을 무화시키고 마침내 몸자체를 무화시킨다. 영상 포르노그래피 안에서 아파하고 절망하고 괴로워하고 쾌감에 들뜨는 육체는 증발해버린다. 거기서 남겨지는 것들은 합성되고 변조된 음성과 이 리듬에 맞춰 작동하는 교합 기계들 뿐이다.
5. 포르노그래피에 관한 세가지 오해
인구에 회자되는 포르노그래피에 관한 담론들에는 해소되어야 할 세가지 오해가 있다.
첫째는 포르노그래피가 예술의 변종이라는 오해다. 예술이냐 외설이냐. 이 귀에 익은 물음이 우리를 종종 이러한 치명적인 오해 속으로 몰아넣는다. 정말 포르노는 예술과 같은 뿌리에서 생겨난 변종인가. 포르노그래피는 예술과 외설의 가이드라인에서 출발하여 위반의 탈주선을 따라 깊어져간 표현의 장르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예술과 포르노그래피는 탄생의 토양부터가 다르다. 몸을 시뮬라시옹으로서 카메라의 프레임 안에 가두어두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포르노그래피는 몸, 감성, 상상력의 해방을 도모하는 예술과 출발점에서 이미 모순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예술은 비은폐성으로서의 존재의 빛남이 아름다움으로서 깃드는 것’이다. 그러나 포르노그래피 안에서 몸에는 어떤 비밀도 남겨지지 않는다. 존재의 신비가 사라지면 존재의 아름다움도 사라진다. 카메라의 앵글로 무차별 난자된 몸은 능욕된 채로 카메라의 시선 아래로 추하게 내팽개쳐질 뿐이다. 포르노의 카메라가 느끼려 하지 않고 오직 보려고 하듯이 그것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포르노그래피 관객들의 시선도 향유하려 하지 않고 오직 관망할 뿐이다. 헤겔의 어법에 따라 말해본다면 ‘관망자의 눈에는 예술이 없다. 예술이 예술 아니어서가 아니라 관망자가 관망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포르노그래피가 예술과 혼동될 수 있는가.
둘째는 포르노그래피가 에로티시즘의 일종이라는 오해다. 포르노그래피에도 성교가 있고 에로티시즘에도 성교가 있다. 하지만 두 가지 형태의 성교가 놓이는 콘텍스는 다르다. 에로티시즘에서 그것은 노동, 질서, 일상성들에 대한 근원적인 일탈과 위반이라는 맥락이 스며있다. 오르가슴의 쾌락이 종종 정치적 혁명이나 종교적 해탈을 견인해내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바타이유는 <에로티즘>에서 성을 세 가지 축을 잡아낸다. 첫째는 단조로운 노동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역동적인 휴식이고 둘째는 사회적 금기나 질서정연한 이성의 해체라는 의미에서 참가자가 한데 뒤엉키는 카니발과 같은 축제성이며 셋째는 삶의 경건함부터의 탈주라는 의미에서 죽음이다. 이중에서 마지막 죽음으로서의 에로티시즘은 약간 우리의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한다. 바타이유에 따르면 모든 동물들은 성적 쾌감의 절정 뒤에 작은 죽음들을 신체성에 구현한다. 밀려드는 피로감은 포유동물의 경우 수컷은 정자를 암컷은 난자를 잃는 상실감 혹은 생명의 소진과 겹쳐진다. 결국 관능적 쾌락을 극대화시키는 자발적 성행위에는 개체의 고립을 파괴하고 삶의 질서인 노동과 금기를 깨트리는 죽음의 신성한 제의적 성격이 함축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르노그래피에서 이러한 에로티시즘의 세 가지 축은 여지없이 부정된다. 그것은 몸을 도구로 하는 노동이고 카메라의 권력에 통제된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며, 결국 삶의 본능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포르노그래피 안에 영상 이미지로 구현된 성은 완벽한 허구의 에로티시즘이고 그러면서도 몸을 순치시키는 힘으로 권력화되어 있는 기형적인 시뮬라시옹이다.
셋째는 포르노그래피가 남성 권력에 의해 여성의 박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퇴폐문화의 한가지 증거라는 오해다. 특히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주도되는 이런 류의 담론들에 결핍되어있는 것은 문명사에 대한 맥락적 해석과 메타포적 상상력이다. 포르노그래피 앞에서 우리가 절망한다면 그것은 여자로서 느끼는 열패감 때문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느끼는 모멸감 때문이다.
우리가 앞에서 살핀 대로 포르노그래피의 정체가 발본적인 지평 위로 드러나는 것은 성역할의 불평등과 성권력의 불균형이 아니다. 포르노그래피의 형이상학적 맥락은 니체적 몸에 대한 플라톤적 시선의 승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포르노그래피 안에서 여체를 유린하는 남성의 성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성, 권력, 감시하는 눈의 메타포 혹은 시뮬라시옹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사회에서 성교하는 기계같은 남성 성기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꼽히고 쑤셔지고 난타되고 더럽혀지는 여성 성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대로 응시하는 시선 앞에 모독되는 몸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몸은 계산적 이성에 의해서도 쉽게 거부되고 모독되고 파괴된다. 포르노그래피 안에서의 성은 이러한 과정을 가시화해준다. 이점에서 포르노그래피는 자신의 타자로서의 몸을 저주하는 영상적 이성의 집요한 폭력이다. 그러므로 포르노그래피 안에서 남성의 몸은 가해자가 아니라 또다른 피해자라고 해야 한다. 맡겨진 배역이 다를 뿐 그의 몸도 예외없이 모독과 파멸의 궤도 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6. 기술 시대의 진리와 포르노그래피
현대를 기술시대로 규정했던 하이데거는 기술의 본질은 보편적 강요(Ge-stell)로 정의했다. 이 기막힌 어휘를 다시 포르노그래피의 본질을 정의하는 데에 활용해보겠다. 포르노그래피는 시선의 권력을 상징하는 이성의 보편적 강요 앞에 소환되어 더럽혀진 몸들의 시뮬라시옹이다. 하이데거 자신이 숙고 끝에 주조해낸 보편적 강요는 어떤 것을 시선 앞에 세우고 욕망 아래 굴복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다.
포르노그래피를 생산하는 기술은 그것을 상품으로 판매하려는 이윤추구나 자본축적의 욕망보다 더 발칙한 욕망아래 신체를 예속시킨다. 그것이 몸과 삶을 무화시킴으로써 그것들이 놓이는 대지를 파괴시키려는 형이상학적 욕망 곧 이성적 근본주의이다. 이것은 성적 욕망, 지배 점유 향락의 욕망, 남성의 욕망은 ≪욕망보다≫ 더 근원적인 욕망으로서 이미 독배를 마시는 소크라테스의 영웅적 죽음 안에 구현되어 있다. 이 철학자는 몸을 경멸하고 몸으로부터 빠져나와 순전한 영혼으로 홀로남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피할 수도 있었던 독배를 기꺼히 받아마심으로써 그가 그토록 경멸했던 몸을 공공의 시선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영웅적인 방식으로 파괴시킨다.
이 소크라테스의 욕망과 포르노그래피 제작자의 욕망은 몇 개의 매개항을 거쳐서 연결되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니체가 주장했듯이 이성주의자들에 의한 몸의 경멸과 능욕과 파괴는 가장 교활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맥락이 아니고서야 오늘날 포르노그래피가 서사도 논리도 의미도, 흥미도 없는 저 천편일률을 불가해한 인내로 생산해 내는 이 기술세계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한다는 말인가.
7. 어떻게 할 것인가.
카뮈의 <이방인>에는 아주 스쳐지나듯 언급되는 시선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다. 뫼르소가 해변에서 아라비아 사람을 죽이기 전 그가 늘 다니는 식당(셀리스트의 식당)에 갔다가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된 ‘몸짓이 앙증스럽고 능금 같은 얼굴에 빛나는 눈을 갖고 있는 재킷을 입은 키 작은 여자’다. 물론 뫼르소는 이 여자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거나 의미있는 눈길을 서로 주고받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녀는 재킷을 벗고 열에 들뜬 듯이 메뉴를 살펴보더니 셀레스트를 불러 곧 명확하고 빠른 목소리로 먹을 요리를 전부 주문했다. 그러고는 핸드백을 열고 네모진 종이조각과 연필을 꺼내어 미리 합산을 해보고는 지갑에서 팁까지 덧붙여 정확한 금액을 앞에 놓았다.'
나중에 뫼르소가 사형을 언도받는 방청석에서 뫼르소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바로 빛나는 눈을 가진 재킷을 입은 그 여자였다. ‘언젠가 레스토랑에서 보았던, 키가 자그마한 여자가 그 재킷을 입고 정확하고 결단성 잇는 자세로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뚫어지게 나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뫼르소나 카메라에 의해 투시되는 포르노배우는 같은 운명에 처해진다. 그것은 언제나 바라보는 시선 저편에서 헤아려지고 저울여지고 계산되고 판단되고 마침내 처분되는 볼거리 이상이 아니다.
니체에 <차라투스트라>에서 거듭 ‘위대한 정오의 시간’을 기다린다. ‘오고 있다. 가까웠다. 위대한 정오가’ 신은 죽었으나 아직은 정오의 시간이 아니다. 그래서 대지의 의미가 긍정되고 몸의 가치가 승인되는 삶의 가치들이 우리에게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정오의 시간을 마침내 증거해야 하는 우리는 저 빛나는 눈을 가진 재킷 입은 여자의 눈으로부터, 포르노 카메라의 눈으로부터 우리의 몸을 지켜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사랑하는 방법부터 바꿔야 한다. 훔쳐보는 사랑, 시선의 사랑, 감시하는 사랑, 관음증적 사랑, 교환조건부의 사랑, 인간의 신체를 보편적 강요의 도마 위에서 무차별 예속시키는 포르노그래피의 사랑 등등 오직 눈으로만 관조하고 계산적 이성으로만 판단하는 이 모든 ‘달의 사랑법’을 폐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정오는 아직 멀었고 포르노 카메라 같은 빛나는 시선 앞에서 인간의 몸들은 부서질 듯 연약하게 흔들리고 있다. 사랑하는 법을 다시 배우자. 몸은 태양의 사랑을 원한다. 이것은 살과 뼈가 정직하게 만나고 숨결과 향기가 빛의 축복 속에서 교감하며 육체와 관능과 욕망들을 그 자체로서 조건없이 긍정하는 당당한 사랑이다. 이것은 희미한 달빛 아래서 대지를 훔쳐보는 시선의 사랑이 아니라 빛으로 대지를 밝히고 열로써 대지를 달구는 헌신과 증여의 과정 안에서 구체화되는 사랑이다.
저 위대한 정오에 이르지 않아도 우리의 몸은 저 앙징맞은 능금같은 여자의 빛나는 시선을 꺾을 수 있다. 태양의 축복을 받아 당당해진 몸, 천 개의 유방으로 부풀어오를 수 있는 몸, 높이가 되고 빛의 길이 되고 빛 그 자체가 되는 몸은 저 차가운 응시의 눈길을 꺾고 그 아래에서 속수무책으로 포르노그래피 배우들의 살코기처럼 포박된 타자로서의 신체들을 해방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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