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헤겔의 변증법적 3기조직 비판

나뭇잎숨결 2021. 9. 1. 02:47

헤겔의 변증법적 3기조직 비판

 

 

박 인 성**** 전주대학교 교수

 

 

 

【주제분류】헤겔철학, 논리학

【주 요 어】헤겔, 변증법, 칼 포퍼

 

【요 약 문】

이 글은 헤겔의 변증법적인 3기조직에 의한 발전, 즉 정립, 반정립의 모순대립, 및 이 양자의 종합에 의한 발전이란 점을 칼 포퍼의 입장에서 비판한 글이다. 그리하여 ① 고대철학자들로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의 변증법적인 3기조직의 구체적인 내용이 형성되기까지의 변증법의 역사를 살펴보고, ② 헤겔의 논리학을 중심으로 하여 변증법적인 3기조직의 구체적인 내용을 고찰한다. 즉 변증법적 운동은 추상적, 직접적 규정에서 출발하여 그것의 “內在的 超出”로 인해서 자기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타자가 자기에게 대하여 대립한다고 하는 이른바 부정을 매개로 하여 다시 이 양자가 구체적 전체의 각 계기로서 종합됨으로서 최초의 직접성이 매개된 직접성으로서 회복된다고 하는 논리적인 율동을 밟고, 그리하여 헤겔 변증법의 이러한 율동은 통상 정립과 반정립과의 모순대립 및 이 양자의 종합이라고 하는 3기조직(Triplizität)으로 정식화된다는 과정을 고찰하고, ③ 헤겔의 변증법적 3기조직의 논리에 의한 발전이란 점은 그것이 사상의 역사적인 발전이란 점에서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하겠다. 정립과 반정립 사이의 모순이 종합의 형태로 진보를 산출하는 그 모순은 실로 사상의 진보의 동력이다. 그러나 헤겔은 이러한 모순들은 세계의 모든 곳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이것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헤겔은 전통논리학에서의 모순의 법칙을 무시하고 새로운 논리, 즉 변증법적 논리를 주장하여, 이것을 세계의 모든 논리적인 것, 또는 실재적인 것의 보편적 이론으로 제시했는바, 이것은 참으로 거대한 이론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전혀 기초를 결여한 이론임을 칼 포퍼의 입장에서 비판하고자 한다.

 

 

 

 

 

Ⅰ. 서 언

 

 

변증법이라고 하면 헤겔의 이름이 연상되고 헤겔이라고 하면 변증법이 연상될 만큼 양자의 결부는 대단히 깊다. 이것이 변증법의 역사에 있어서 헤겔의 위치와 의의의 중요성을 말하여 주기도 하거니와 헤겔이 변증법의 근본에 있는 것을 누구보다도 명백하게 통찰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겠다. 헤겔은 가장 빈틈이 없고 방법적 이론으로 통일되고, 내용적으로 가장 포괄적인 체계를 세웠고, 그리고 그의 사상체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변증법적 방법론으로 일관되고 있다. 이제 본고의 제2장에서는 헤겔의 변증법적인 3기조직의 구체적인 내용이 형성되기까지의 변증법의 역사를 살펴보고, 제3장에서는 헤겔의 ■■논리학■■(System der Philosophie, Erstel Teil, Wissenschaft der Logik, 1929)을 중심으로하여 변증법적 3기조직의 구체적인 내용을 고찰하고, 그리고 제4장에서는 K. Popper의 입장에서 헤겔의 변증법적 3기조직에 의한 발전에 대한 문젯점이 무엇인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Ⅱ. 변증법적 3기조직의 형성과정

 

 

변증법의 역사를 말할 때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전통을 따라서 엘레아학파의 제논을 그 시초로 보고 있음이 통속적이다. 엘레아학파의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만이 존재하고 비존재는 존재하지 않음과 동시에 생각될 수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파르메니데스의 제자인 제논은 그의 스승의 존재론을 옹호하였다. 그 전에 피타고라스학파에서는 사물은 數요, 물체는 점의 총체에서 성립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제논은 수를 多라는 형식으로 표하여 반박하였다. 분할될 수 있는 多, 분할된 최후의 원소들은 大를 가지지 않든지, 혹은 어떤 大를 갖든지 한다. 그러나 大가 없는 경우에는 원소는 무한히 분할될 수 있으므로 그 원소로 된 것은 무한히 크다고 하게 된다. 이렇게 모순에 빠지게 되니 物에는 多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제논의 운동의 부정은 너무나 유명하다. 운동체는 목표에 도달하기 전에 먼저 그 도정의 절반을 통과하지 안되고, 다시 그 남은 절반의 절반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그것은 무수한 거리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니 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어느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도달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운동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만일 트로이 전쟁의 용사인 아킬레스와 거북이가 경주를 하는데 거북이가 조금 앞에서 출발한다면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앞지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킬레스가 거북이가 있던 지점에 왔을 때에는 그 거북이는 아무리 짧은 거리일망정 그 지점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앞서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관계는 무한히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결코 앞서지 못할 것이다. 또 공중을 향하여 쏜 화살은 움직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화살은 언제나 그 길이와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여 있고, 그 길이와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여 있는 상태는 정지하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살은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세계를 처음으로 자기동일이라는 논리적인 견지에서 탐구한 것이 파르메니데스라면 제논은 자기동일의 부정적 측면을 지적하여 모순의 명제를 세계에 적용하는 한결 고차적인 논리적인 요구를 추구한 것이라고 하겠다.

 

한편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유전하고 하나도 정지하여 있지 않다” “사람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변하는 자연은 동일상태에서 다시 잡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은 유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견지에서 보면 그것은 동일한 강이요, 동일한 흐름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새로운 명제가 성립한다. 그리하여 헤라클레이토스에 있어서 생성은 존재와 비존재가 하나가 되었을 때 일어난다. 있으면서 동시에 없고, 없으면서 동시에 있는 것이 생성이다. 말하자면 생성은 “반대의 일치”이다. 이 생성에 있어서 대립된 것이 일치하여 상이한 것의 아름다운 조화가 전개된다. 그리하여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요, 왕이다”라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한다. 결국 헤라클레이토스에 이르러 모순적 대립은 하나의 정립에 대한 진정한 반정립으로 확립되는 동시에 생성에 있어서 새로운 종합이 성립함을 보게 된다. 요컨대 헤라클레이토스에 있어서 변증법이 그 전체적인 과정에까지 발전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게된다.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은 항상 대화의 상대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들의 무지를 깨닫게 하여 다시 그들이 일반적으로 타당한 개념과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데 도움을 주려는 산파의 직분을 하는 것이다. 대화가 진행하는 가운데 대화자를 의외의 모순에 빠뜨려 스스로 거짓된 지식을 고백하고 무지를 자각하게 하는 그의 독특한 방법을 反語法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의 방법의 적극적인 측면은 助産術이다. 요컨대 소크라테스의 대화적인 방법은 반어법으로부터 다시금 조산술로 전개되었고 일상적인 개별적인 사례를 기초로 일반개념 내지 명제를 도출하는 귀납적인 증명의 길을 취하였다.

 

이와 같이 소크라테스는 지식의 일반성을 귀납적인 증명에서 구하였고, 개체에서 일반자를 도출하여 나가는 길을 택하였다. 플라톤의 변증법은 소크라테스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개체에서 일반자를 도출해 내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개체와 일반자를 분할하였다. 플라톤에 있어서 이데아는 이성의 세계이고 개물은 감성의 세계이다. 인간에게 먼저 존재하는 것은 개물이요, 최후의 일반적인 것은 이데아이다. 이데아야말로 참 존재요, 유일한 존재이다. 이렇게 감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사물의 경험적인 부분이요,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이데아이다. 이데아를 아는 것이 사물의 참된 진리인데 어떻게 해서 이성이 이데아를 알 수 있을까? 이성은 경험적인 것을 다시 분석하고 종합하여 더 높은 앎에 이르고 이 앎을 다시 분석하고 종합하여 그보다 더 높은 앎에 이른다. 이렇게 경험이 아닌 긴 思考의 길을 밟아 드디어 이데아를 알게 된다. 다시 이데아의 지식으로부터 낮은 단계를 따라 개별의 실재까지 하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르내리는 분석과 종합의 긴 과정을 거쳐 드디어 이데아에 대한 참된 지식에 이른다. 그리하여 플라톤의 변증법은 개별적인 것으로부터 일반개념에로 상승하여가는 종합, 그리고 일반적인 類槪念으로부터 種槪念의 多를 이끌어내는 분석의 양면에서 변증법을 다룬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관한 저술은 機關(organon)이라고 불리웠고,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의 예비문의 성격을 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오로지 형식적인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에게 있어서 논리학은 사유의 일반적인 구조와 동시에 존재인 한에 있어서의 존재의 구조를 현시하는 것이요, 논리의 모든 법칙은 그대로 바로 존재의 법칙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사물이건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고 또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에 동일한 관계에 있어서 동시에 속하며 또 속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모순율을 규정하였고 이것이 모든 원리가운데 가장 확실한 원리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믿었으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그대로 변증법은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학문단계의 첫 계단은 언제나 여러 관념의 규정에 의하여 생겨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난제를 남김없이 규명하는데 있었다. 그리고 그에 따르는 해결은 이 선행하는 난제를 충분히 통할하는데 달렸다고 본 점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학문의 테마취급에 있어서 우선 모순적인 면에 착안한 것이라고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형이상학에 있어서 전개된 잠세태와 현세태와의 관계에서 하나의 운동의 논리학으로서의 변증법을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질료는 잠세태요, 형상은 현세태이다. 질료는 다른 것으로 생성될 수 있는 존재이다. 그것은 형상을 받아들임으로서 현세태 즉 사물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형상은 현세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와 형상의 종합에 있어서 둘 중에 어느 하나가 사물에 따라 우세하다고 한다. 어떤 사물에 있어서는 질료가, 다른 사물에 있어서는 형상이 우세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형상없는 질료로부터 질료없는 형상에까지 계속적인 순서에 따라 존재의 등급이 생긴다. 그런데 만물은 보다 높은 형상이 되려고 노력한다. 이 노력이 세계진행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진행의 원동력을 부동의 원동자인 순수형상이라고 한다. 이 순수형상은 이미 운동할 필요가 없고 단지 가능성에 머무르고 있는 다이나믹스(dynamics)만으로도 운동은 있을 수 없다. 양자의 모순적 통일체로서의 個物이 그 생성적인 운동과정에 있어서 구체적인 존재로서의 규정을 가지게 되는 所以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aporia의 해결은 이와 같이 대립자사이에 깃들여 있는 모순의 종합적 통일에 있고 그의 개물은 다름 아닌 변증법적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모순의 종합적 통일 관계는 신적인 이성자체에 있어서도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존재질서의 최고봉에 절대적으로 질료가 없는 순수형상이 자리하고 있고 그것은 질료의 형상이 아니라 “형상의 형상”이요, “사유의 사유”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한다. 그리하여 이성은 오직 사유를 사유할 뿐 그의 사유의 대상은 사유자체요, 따라서 자기의식인 것이다. 그리하여 사유하는 것과 사유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이요, 하나라고 한다. 그러나 이 동일성은 무차별적인 동일이 아니요, 분리와 구별을 내포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궁극적인 입장에서 헤겔과 접근할 것을 볼 수 있다.

중세에 있어서 변증법은 기독교적 사상을 떠나서 생각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를 神人(Gott-Mensch)이라고 하였고, 창조자인 신과 피조자인 인간은 모순되는 것이 아닐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양자의 통일로서 그리스도를 규정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神人으로서 모순된 이중적인 성격을 소유한 속죄의 구세주였다. 그리스도는 수난을 당하여 죽은 인간인 동시에 모든 인간적인 것을 초월하여 부활함으로서 종교적 의의를 갖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신국론■■에 나타난 역사철학은 변증법적이다. 서양사상에 역사철학의 아버지로서 세계역사의 드라마를 그려내면서 지상의 나라(Civitas terrena)와 천국의 나라(Civitas Dei)의 대립을 거쳐 마침내 구원의 길이 열린다는 역사의 변증법이다. 신은 반드시 악과의 대결을 통해서 신의 선과 정의를 실현시킨다는 논리이다. 빛은 어둠과의 대조를 통하여 그 밝음을 드러낼 수 있듯이 현상계에서 신은 반드시 자기의 선을 증거하기 위해 악을 필요로 한데서 필요악의 개념이 연유한 것이다. 이 논리는 “역사 변증론”이라고 불리어 진다.

 

또 니콜라우스 쿠사누스(Nicolaus Cusanus)는 절대자를 “반대의 일치”로 요약하고 있다. 이것은 감성이나 오성의 힘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分別知를 초월한 신비적인 직관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무한한 곡선은 바로 무한한 직선이다. 물론 인간으로서 인식불가능한 線은 직선이든가 곡선이든가이요, 우리는 유한한 규정을 넘어서 인식할 수 없다. 그러나 우주의 궁극적인 본질인 신은 모든 유한한 규정을 초월한다. 신은 모든 존재하는 것의 통일이요, 모순된 온갖 것을 자기 속에 포함하는 전체이다. 따라서 신은 최대와 최소, 무한과 유한의 모순적 통일이요, 신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근대에 있어서 인간의 자연성의 자각은 데카르트의 이른 바 명석하고 판명한 오성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도 사유하는 오성의 시대에 속하는 것이었고 변증법이 철학의 주제로서 다루어진 사변적 이성의 단계에 이르기까지에는 칸트와 그의 후계자들을 기다려야 하였다.

 

칸트는 판단은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으로 나누었다. 분석판단은 선천적이나 오직 개념의 분석에 불과한 것이고 종합판단은 경험에 의하여 새로운 지식을 준다. 따라서 칸트의 주된 관심은 선천적 종합판단의 성립문제였다. 이 때의 종합은 다양성의 종합통일인 것이다. 그리하여 헤겔은 종합판단에 관한 헤겔의 학설은 근대독일철학에 있어서 변증법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칸트의 종합의 형식인 오성은 다양한 객관적인 사물에 대한 직관형식과는 구별되는 인식작용에 있어서의 주관적 형식으로서의 범주이다. 이 4가지 사고방식은 각각 3분되어 12종으로 나눈다.

 

1. 분량 : 단일, 다수, 전체

2. 성질 : 실재, 부정, 한정

3. 관계 : 실체성, 인과관계, 상호관계

4. 양태 : 가능성, 현실성, 필연성

 

여기서 제1의 범주는 정립이라고 하면 제2의 범주는 반정립이며 따라서 제3의 범주는 종합인 것이다.

이와같이 칸트철학에 있어서 변증법적인 요소가 전개되어 있으나 칸트 자신은 변증법은 가상에 기인한 환상적인 추리로 보아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시각에도 착각과 같은 경험적인 가상이 있고 논리에도 궤변과 같은 가상이 있다. 칸트는 우리 인간에게는 경험을 초월하는 가상이 있다고 하고 이 초월적인 가상만을 이율배반으로 다루었다. 칸트에 있어서 “선험적 가상”(transzendentalen Schein)은 오성의 범주의 경험적 사용을 초월하는데서 일어나는 것인데 순수오성이 확장된 것과 같은 환영에 사로잡혀서 생기는 가상이다. 이러한 가상의 변증법적 성격은 칸트의 선험적 변증론 중 특히 순수이성의 안티노미에 있어서 현저하다. 대체 현상의 완전한 인식은 현상을 세계전체, 즉 현상의 총체와 관련시킴으로서 가능한 것이요, 따라서 하나의 이념으로서의 세계전체가 문제된다. 그러나 칸트에 의하면 이 세계에 관하여 2개의 대립된 주장이 가능한 것이니 그 대립을 곧 변증론적 대립이라고 부른다.

 

①제1안티노미

정립 : 세계는 시간에 있어서 시초가 있으며 또 공간상 한계가 있다.

반정립 : 세계는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 무한하다.

 

②제2안티노미

정립 : 세계는 단순한 부분으로서 성립된다.

반정립 : 세계에 단순한 것이라고는 없다. 원래가 복잡한 것이다.

 

③제3안티노미

정립 : 자연법칙에 따르는 인과관계 이외에 전적으로 자유로운 원인이 있다.

반정립 : 세계에는 자유원인이 없고 모두가 기계적인 필연성에 의해서 생기한다.

 

④제4안티노미

정립 : 세계의 원인의 계열에 있어서는 어딘가 필연적인 본질이 있다.

반정립 : 아무것도 필연적인 것은 없다. 모두가 우연이다.

 

이러한 모든 이율배반은 결국 그 본질에 있어서 유한과 무한과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고 칸트는 주의한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은 이성적 예지적 대상을 감성적 대상과 같이 다루는 데서 초래된 것이라고 하며 헤겔은 이성적인 것이 오성규정을 받을 때에는 본질적 필연적으로 이율배반에 빠진다라고 하였다. 헤겔은 이러한 이율배반에 관한 칸트의 주장을 오성이 분리하여 가지고 고집하는 제 규정의 사실적 통일을 무언중에 표시하는 점에서 비판철학의 극히 중요하고 칭찬할만한 성과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율배반의 지적이 오성형이상학의 독단론을 극복하고 이성의 변증법적 운동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것은 근대철학의 가장 중요하고 깊은 진보적인 사상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칸트는 변증법적 원리에 입각하여 이율배반을 논했으나 이미 말했듯이 칸트 자신은 변증법이라는 개념에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여 이것은 “가상의 논리”라고 하였으니 칸트 이후부터 헤겔에 이르는 변증법의 완성과정은 참된 이성인식으로서의 궁극적 절대인식을 실현코자 노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피히테의 철학체계인 “지식학” 전개의 기반은 一切有로서의 절대적 자아에 있다. 따라서 피히테의 변증법의 기반은 이 절대적 자아에 있는 것이다. 피히테에 있어서 우리 지식의 가장 필연적이고 궁극적인 원리는 자아이다.

 

피히테의 지식학의 제1원리에 의하면 “자아는 근원적 단적으로 자기자신의 존재를 정립한다.” 제2원리는 “자아에 대하여 非我가 단적으로 반정립된다”이다. 제3의 원리는 “자아는 자아 속에 가분적인 자아에 대해서 가분적 비아를 반정립한다”이다. 이러한 대립의 상호제한으로서의 종합명제의 출현은 하나의 획기적인 것이다. 피히테의 변증법의 논리적인 형식인 동일률(A는 A이다). 모순률(A는 非A가 아니다) 종합률(A는 부분적으로 非A가 아니며, 非A는 부분적으로 A가 아니다)에서 의식의 구조를 자아의 형이상학으로 발전시켰다. 요컨대 피히테에 있어서 변증법의 기본적인 원리가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Ⅲ. 변증법적 3기조직의 성립

 

 

변증법은 이와 같이 오랫동안의 역사적 과정을 거치고 난 후 헤겔에 와서야 비로소 가장 정연하고 빈틈없는 이론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헤겔이야말로 변증법의 그 근본에 있는 것을 누구보다도 명료하게 파악했던 것이다. 이제 헤겔의 ■■논리학■■의 예비개념을 중심으로 하여 변증법의 논리구조를 살펴보겠다.

 

 

1. 추상적 또는 오성적 측면

 

“오성적 사유라는 것은 고정한 규정성 및 이 규정성과 기타 규정성과의 구별을 고집하는 것이다......” 이처럼 오성은 단순한 자기관계를 원리로 하여 A를 A와 동일시하고, A를 非A와 구별하는 형식논리의 입장이요, 칸트의 Kanon의 입장이다.

 

사람들은 흔히 오성적 사유는 추상적, 일반적이니 이것을 관철하면 유해하고 위험한 결론에 이른다고 비난하지만 이것은 오성을 감각이나 감정과 대립시키는 데서 생기는 비난이다. 이 비난은 그 내용상으로 보아 그른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비난은 사유일반이나 좀더 따져 말하면 이성적인 것이 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다만 오성적 사유만이 받아야 하는 것이다. 과연 인간의 모든 사유는 그처럼 완고하고 일면적인 오성적인 사유에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점에서 오성적 사유에도 그 권리와 공적은 사실상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먼저 이론적인 영역에 있어서 인식은 우선 대상의 특정한 구별과 명확한 규정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자연을 관찰할 때에 여러 가지 질료, 힘, 類 등을 구별하며 따라서 그것들을 구별된 채로 고립시켜 고정시킨다. 여기서는 사유일반이 오성으로서의 자태를 취하고 있으며 동일성을 원리로 삼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실천적 영역에 있어서도 오성이 없을 수 없다. 그것은 일정한 목표를 지향하여 나아가는 성격의 형성에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오성이 전부요, 최후의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성은 최후의 것이 아니요, 유한한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너무나 극단에까지 나아가면 오히려 반대물로 전화하여 버린다는 변증법적인 사상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2. 변증법적 또는 부정적인 이성의 측면

 

“변증법적 또는 부정적 이성의 측면은 그러한 유한적 규정이 자기자신을 버리고 자기자신과 반대되는 규정으로 옮아가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유한한 것은 단지 외부로부터 제한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자신 모순된 것이요, 그 때문에 자기를 지양하는 법이다. 따라서 변증법의 진정한 특징은 그것이 오성규정 즉 사물이나 혹은 유한적인 것 전반의 진정한 본성에 속한다. 예컨대 생명 속에는 이미 그 자체 속에 죽음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유한적인 것은 어떤 외부로부터 제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시자신의 본성에 의하여 지양되는 것이며 따라서 자기자신을 통하여 자기의 반대물로 전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오성적 규정 자신의 “내재적 超出”(das immanente Hinausgehen)인 것이다. 그러므로 변증법적 계기는 무엇보다도 오성적 규정의 추상성, 일면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폭로하는데 성립하는 것이요, 이것은 변증법의 논리구조상 그 중심개념이라고 하겠다. 헤겔은 정신의 이러한 부정적인 기능이야말로 “학적 진행을 속으로부터 움직여가는 혼”이요, 그것은 학문의 내용 속에 내재적인 관련과 필연성을 넣어주는 원리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변증법은 모든 자연계와 정신계의 특수한 영역과 형태 속에서 찾아진다. 예를들면 천체의 운동, 자연의 제 원소, 기상학적 과정 등 모든 자연적 과정의 기초는 변증법의 원리이다. 정신계의 영역인 법률, 도덕, 감정의 영역에 있어서도 극단적인 상태나 행위가 그 반대에로 전화하는 것은 모두 변증법이다. 이러한 轉化의 운동은 모든 유한자가 내포하고 있는 “자기부정”, “자기모순”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다.

 

 

3. 사변적 또는 긍정적 이성적 측면

 

“사변적인 것, 또는 긍정적 이성적인 것은 대립 제 규정의 통일, 즉 대립된 제 규정의 화해와 그 이행 중에 포함되어 있는 긍정적인 것을 파악하는 것이다.” 변증법에는 긍정적인 성과가 있다. 왜냐하면 변증법에는 일정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변증법의 성과는 공허하고 추상적인 무가 아니라 일정한 규정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증법의 성과는 직접적인 무가 아니라 바로 한 성과이기 때문에 그 속에 일정한 규정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성적인 것은 가령 그것이 사유된 추상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동시에 구체적인 것이다. 헤겔에 있어서 사변적인 것은 그 원래의 의미로 따진다면 일시적으로나 궁극적으로나 결코 주관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변적인 것은 오성적 分別智에 머무르고 있는 모든 대립을 지양한 것 따라서 주관과 객관의 대립까지도 지양된 것으로 자기 속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이며 전체적인 것이다. 실로 헤겔에 있어서 긍적적․이성적인 것 즉 사변적인 것은 대립된 두 규정의 통일을 다시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대립된 두 규정의 화해와 이행 속에 내포되어 있는 긍정적인 것을 파악한다. 이처럼 두 개의 다른 규정의 통일이므로 그것은 단순한 형식적 통일이 아니요, 동시에 구체적이며 전체적인 것이다. 따라서 철학은 단순히 추상적이거나 형식적인 사상을 취급하는 게 아니라 오직 구체적인 사상만을 취급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사유과정의 사변적, 긍적적, 이성적 측면은 제1단계와 제2단계에 있어서의 대립된 규정들의 통일을 긍정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이것은 상이한 규정들의 통일이므로 구체적인 것이다. 헤겔은 이러한 통일을 “止揚”(Aufheben)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변증법적 사유를 가능케하는 것은 이 지양이라 하겠다. 유한한 오성적 규정의 자기지양은 한갓된 부정이 아니라 자기를 보존하면서 부정하는 운동이었던 것이다. 지양되는 것은 지양됨으로 해서 무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는 직접적인 것이다. 그에 반해서 지양된 것은 매개된 것이다. 이것은 비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有에서 출발한 성과로서의 비존재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출발 전에 가지고 있었던 규정성을 아직 즉자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면 한 개의 알이 애벌레가 되고 애벌레는 번데기를 지나서 성충이 된다. 그러므로 곤충은 지금도 번데기이고 다음은 성충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알에서 애벌레를 거쳐서 번데기를 지나 성충이 될 때까지의 과정전체인 것이다. 이 때의 곤충은 그의 他在 즉 알과 애벌레인 타재에의 과정에서 자기자신을 구성하며 보존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곤충의 개념에서 알과 애벌레와 번데기와 성충을 잠재적으로 봄으로서 곤충의 개념은 객관적인 현실적인 형식을 재현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곤충은 他在中에서 대립의 과정을 통해서 자기발전, 자기보존, 자기를 실현하는 실존의 한 양태인 주체로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존하는 모든 것은 그 실존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모순된 관계를 통해서 하나의 자기로서 작용하는 한에 있어서 현실적이고 각각에 고유한 모순을 전개함으로서 전진하여 나가는 일종의 주체로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곤충은 자기부정의 요소를 胚胎하여 가지고 곤충이 아닌 것 즉 돌도 되고 물도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를 발전시킴과 동시에 자기를 보존하는 알도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어떤 추상적 규정이 자기를 지양하고 다른 대립적 규정에로 이행한다함은 그 추상적 규정이 똑같이 추상적인 다른 규정에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 대립적인 양 규정을 통일적으로 포유하는 보다 높고 풍부한 개념에로 전화함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렇게 해서 유한한 규정이 자기를 지양하여 대립적 규정에로 이행하는 변증법적 운동은 대립된 규정들의 종합통일이라는 하나의 긍정적 적극적 성과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사변적 내용이다. 그러므로 사변적 내용이 대립의 통일에 있어서 성립한다함은 그것이 대립 없는 통일, 무차별적 동일의 인식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립과 구별이 존속되면서 통일되고 그러한 통일이 대립에로 분화되는 과정이 곧 사변적 진리요, 여기에 지양이라는 개념의 깊은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 3계기는 모든 논리적인 존재, 따라서 모든 개념 또는 진리의 계기라고 본다.

 

그리고 사변적이라면 흔히 종교의식과 그 내용에 관해서 신비적이라고 부르던 것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점이다. 신비적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불가사의한 것 심지어는 迷妄되는 것같이 생각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신비적이란 불가사의한 것이기는 하나 그러나 오성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다. 하지만 추상적 오성사유는 고정불변한 것,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부단히 자기자신을 지양하며 자기자신의 대립물로 전화하는 것이며 이성적인 것 그 자체는 그와 반대로 이 대립물을 관념적 계기로 삼아서 자체 중에 내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이성적인 것을 동시에 신비적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성적인 것이 오성을 초월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이성적인 것을 본래 사유일반이 근접할 수가 없고 또 이해할수 없는 것같이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상의 변증법적 전개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변증법적 운동은 추상적, 직접적 규정에서 출발하여 그것의 “內在的 超出”로 인해서 자기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타자가 자기에게 대하여 대립한다고 하는 이른바 부정을 매개로 하여 다시 이 양자가 구체적 전체의 각 계기로서 종합됨으로서 최초의 직접성이 매개된 직접성으로서 회복된다고 하는 논리적인 율동을 밟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헤겔변증법의 이러한 율동은 통상 정립과 반정립과의 모순대립 및 이 양자의 종합이라고 하는 3기조직(Triplizität)으로 정식화되고, 그것이 다시 변증법이란 모순대립의 통일의 논리라고 하는 일반적인 이해를 낳게 되었다.

 

 

 

Ⅳ. 비판적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가 성립되기까지의 과정과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를 살펴보았다. 헤겔에 있어서 변증법적인 발전이란 변증법적 3기조직 즉 정립-반정립-종합에 의한 발전이다. 맨 처음에 정립인 어떤 관념이나 이론, 혹은 운동이 있고 그러한 정립은 종종 반을 산출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은 그것이 아마도 제한된 가치를 가지고 그리고 어떤 약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반대되는 이론이나 운동은 그것이 정립에 대립하여 있으므로 반정립이라고 부르고 정립과 반정립과의 투쟁은 어떤 해결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되고 그 해결은 정립과 반정립의 각자의 가치를 인정하고 각자의 장점을 보존하고 그 한계점을 피함으로서 정립과 반정립을 초월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결이 바로 종합이다. 한번 얻어진 종합은 다시금 그것이 변증법적 3기조직의 처음 단계로 돌아가고 그것은 일면적이거나 혹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판명되면 여기에서 다시금 반이 일어나서 그것은 새로운 반을 산출한다. 그리고 변증법적 3기조직은 더 높은 단계로 진행하여 새로운 종합을 얻게 될 것이고, 이러한 변증법적 발전의 논리는 무한히 되풀이하여 계속된다.

 

그러나 이러한 변증법적인 3기조직에 의한 발전은 정신의 역사, 특히 관념과 이론에 대한 어떤 발전과 관념과 이론에 기초한 사회적 운동의 어떤 발전에는 꾀 잘 적용이 되지만 ― 역사세계에는 하나의 관념이 나타나면 대개 그와 반대되는 이념이 나타난다. 인간중심의 그리이스시대에 대한 반동이 신중심의 중세종교사상에 나타나 있듯이 사상의 발전과정은 대개 정-반-합에 이르는 끊임없는 3항의 운동으로 모델화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 그것은 과학정신이 아닌 많은 隱喩(metaphor)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헤겔은 정립이 반정립을 산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반정립을 산출하는 우리의 비판적 태도일 뿐이지 그런 비판적 태도가 결여된 곳에는 반정립은 산출되지 않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종합을 산출하는 것이 정립과 반정립 사이의 투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투쟁은 마음의 일부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들은 새로운 관념들을 산출해야만 한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의 역사에는 공허한 無로 끝난 효과가 없었던 수많은 투쟁의 실례들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어떤 종합에 도달했을 때일지라도 그것이 정립과 반정립, 兩者의 좋은 부분만 유지한다고 말하는 것은 종합에 대한 비교적 거칠은 記述인 것이다. 이러한 기술은 비록 그것이 옳게 표현되었다고 해도 그 기술자체가 그릇된 것이다. 왜냐하면 종합이 이미 있었던 관념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그 경우에 발전의 그보다 이전단계에는 환원시킬 수 없는 새로운 어떤 관념도 포함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 종합은 정립과 반정립에 의해 공급된 재료에 의해 만들려진 구조(construction)보다도 항상 훨씬 많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러한 사실을 고려해 볼 때 변증법은 설사 그것이 타당하게 적용될 수 있는 영역에 있어서까지도 종합이 정립과 반정립 안에 포함된 관념으로부터 구축되어야 한다는 제시에 의해서는 사상을 발전시키는데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변증법은 미래의 사상의 발전을 추진하거나 혹은 적어도 예언하도록 하는데 도움을 줄 기술로서 사용되어질 수 있다고 언제나 가정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중대한 오해와 혼란은 “모순”(contradictions)에 대한 불투명한 사고방식이다. 정신의 역사에서는 모순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비판”도 역시 모순 못지 않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비판”은 어떤 모순을 찾아내는 가운데 언제나 성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지적 발전의 중요한 충동력이다. 모순 없이, 비판없이 지적 진보는 있을 수가 없다. 정립과 반정립 사이의 모순이 종합의 형태로 진보를 산출하는 그 모순은 실로 사상의 진보의 동력이다. 그리고 헤겔은 이러한 모순들은 세계의 모든 곳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이것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전통논리학의 “모순의 법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모순의 법칙에 있어서는 2개의 서로 모순되는 명제를 다같이 眞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한 적절한 실례로서 중국 고전인 “韓非子”에서 모순의 고사가 실려있다. 초나라의 사람이 창(矛)과 방패(盾)를 팔면서 먼저 방패를 들고 “이 방패는 어떤 창으로도 뚫을 수 없을 만큼 단단하다”고 소리쳤다. 다음에는 창을 들어 “이 창은 예리해서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다”고 외쳤다. 이를 보고 있던 구경꾼이 “당신의 창으로 당신의 방패를 뚫어 보시오. 어떻게 되나!” 이러한 고사에서 모순은 “반대”나 “대립”과 구별되는 것으로 그것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대립이며, 따라서 서로 용인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두 개의 관념이 모순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판정할 수 없는 문제라 하되 논리적인 모순을 화해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논리적인 모순은 절대로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논리학에서 인정되는 절대적인 진리이다. 결국 헤겔은 전통논리학에서의 모순의 법칙을 무시하고 새로운 논리, 즉 변증법적 논리를 주장하고 이것을 세계의 보편적인 이론으로 제시했는데 변증법이 세계의 보편적 이론이란 것은 참으로 거대한 이론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전혀 기초를 결여한 이론(a loose and wooly way of speaking)이라고 K. Popper는 비판하고 있다.

 

K. Popper는 인간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과학적인 방법은 “시행착오의 방법”이라고 제시한다. 과학적 방법이란 제기된 이론을 비판하고 검증하는 것인데 비판된 이론 속에 있는 모순이거나 혹은 우리가 승인할 수 있는 이유를 가지고 있는 이론과 다른 이론 사이의 모순이거나 혹은 더 정확히 말해서 이론과 어떤 사실의 진술사이의 모순이다. 그러한 어떤 모순을 지적해 냄이 없이는 비판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사실 비판은 어떤 모순을 지적 하든가 또는 비판은 반정립의 제시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 이론과 정반대의 주장을 한다. 이러한 비판을 하고 검증한 결과 그 이론에 어떤 잘못이 있으면 그것은 폐기되어야 한다. 즉 “시행착오의 방법”(the method of trial and error)은 본질적으로 “폐기의 방법”(a method of elimination)이다. 그리하여 모순을 포함하는 이론은 피하여야 한다는 결단이 있어야 하고 이 결단이 곧 “모순의 배제의 법칙”과 일치되며 그것이 곧 시행착오의 방법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2개의 모순되는 명제를 인정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2개의 모순되는 명제가 승인된다면 그 어떠한 명제라도 승인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즉 다시 말해서 한 쌍의 모순되는 명제로부터는 어떠한 명제라도 타당하게 추론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 보이면서 따라서 모순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모든 종류의 과학적 활동의 포기”(to give up any kind of scientific activity) 즉 다시 말해서 “과학의 완전한 와해”(a complete break down of science)를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요컨대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는 그것이 사상의 역사적인 발전이란 점에서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보겠으나 헤겔이 말 한대로 변증법적 논리가 세계의 모든 논리적인 것, 또는 실재적인 것의 보편적인 이론이 되기에는 문제성이 있다는 K. Popper의 비판적 입장에 필자도 동의하는 바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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