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1. 들뢰즈와 사르트르는 왜 헤겔의 즉자와 대자 개념을 끌어들였나?
Q2, 들뢰즈는 왜 즉자적 차이, 대자적 반복이라 하는가?
Q3. 헤겔을 이해하지 않고 변증법을 논할 수 없고,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이해할 수 없기에 헤겔철학 소논문을 올린다.
[1]들뢰즈는 왜 즉자적 차이, 대자적 반복이라 하는가?(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2]사르트르의 '무신론적 實存哲學'(이광래 교수) |
"천 갈래로 길이 나 있는 모든 다양체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 같은 목소리가 있다. 모든 물방울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바다가 있고, 모든 존재자들에 대해 존재의 단일한 아우성이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먼저 각각의 존재자와 각각의 물방을은 각각의 길에서 과잉의 상태를 도달했어야 했고, 다시 말해서 자신의 변동하는 정점 위를 맴돌면서 자신을 전치, 위장, 복귀시키는 바로 그 차이에 도달했어야 했다."
1절) 반복: 무엇인가 변하고 있다.
흄의 테제-‘반복되고 있는 대상 안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복을 응시하고 있는 정신 안에서는 무엇인가 변하고 있다.’(이것이 양태변화의 본질이다) 어째서 반복되고 있는 요소나 경우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일까? 반복을 지배하는 불연속성이나 순간성의 규칙은 어떤 것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것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반복은 생성하는 가운데 소멸한다. 즉자로서의 반복은 없다. 응시하는 정신 안에서는 어떤 차이 새로운 어떤 것이 발생한다. 대자적 측면은 반복을 필연적으로 구성하고 있어야 하는 어떤 근원적 주관성에 해당한다. (반복의 역설: 응시하는 정신 안에 차이나 변화를 끌어들이는 것은 반복이다. 하시만 반복은 그 차이나 변화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수축은 어떤 시간의 종합을 이루어낸다. 시간은 어떤 근원적 종합 안에서만 구성된다. 순간들의 반복을 대상으로 하는 이 종합은 독립적이면서 서로 안으로 수축한다. 이 종합을 통해 살아 있는 현재가 구성된다. (이 종합은 수동적 종합이며 구성적이다. 이 종합은 기억과 반성에 앞서 응시한 정신 안에서 이루어진다. 시간은 주관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수동적 주체의 주관성이다. 수축은 살아 있는 현재안에서, 지속으로서의 이 수동적 종합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시간은 현재 안에서 펼쳐진다. 선행하는 순간들이 수축을 통해 유지되는 한에서 과거는 현재에 속한다. 기대는 그런 똑같은 수축 안에서 성립하는 예상이므로 미래또한 현재에 속한다. 살아 있는 현재는 과거에서 미래로 가지만, 그 과거와 미래는 현재 자체가 시간 안에서 구성한 과거이자 미래이다. 살아 있는 현재는 특수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이행한다.
시간의 첫 번째 종합: 살아있는 현재
기억은 자신에게 고유한 ‘시간의 공간’안에 특수한 경우들을 보존하고, 그런 가은데 이 경우들을 구별되는 경우들로 재구성한다. 과거는 재현에 의한 반성적 과거, 반성되고 재생된 특수성이다. 미래는 예견에 의한 반성적 미래, 지성에 의해 반성된 일반성이다. 기억과 지성의 능동적 종합이 상상력의 수동적 종합과 중첩되고 또 능동적 종합이 수동적 종합에 의존한다.
반복의 구성에서 세 가지 층의가 함축되어 있다. 먼저 즉자의 층위가 있다. 그러나 사유 불가능하다. 그 다음 수동적 종합에 따르는 대자적 층위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 층위에 기초한 반성적 재현의 층위가 있다.
베르그손의 예 A A A A라는 요소의 반복(닫힌 반복)이다. 흄의 예 AB AB AB A...는 경우들의 반복(열린 반복)이다. 그러나 경우들의 반복이 열려 있다면, 그것은 이항 대립을 통해 요소들 사이에 폐쇄적 관계가 성립한 이후이다. 요소들의 반복이 닫혀 있다면, 그것은 그 배후에 경우의 구조들이 자리하고 있을 때이다. 수동적 종합 안에서 이러한 반복의 두 형식은 언제나 서로 의존하는 관계에 있다. 즉 경우들의 반복은 요소들의 반복을 가정하지만, 요소들의 반복은 필연적으로 스스로 자신을 넘어서서 경우들의 반복 안으로 들어간다.
습관, 수동적 종합, 수축, 응시
반복의 두 형식 사이의 구별보다 어떤 수준들의 구별이 중요하다. 한 형식과 다른 형식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서로 조합되는 수준들이 있다. 지각된 대상 그 자체는 두 가지 사태를 함축한다. 먼저 경우들의 수축이 있고, 이 수축을 통해 한 성질은 다른 성질 안에서 독해된다. 다른 한편 어떤 구조가 있는데, 이 구조 안에서 대상의 형식은 그 성질과 짝을 맺는다. 그러나 구성적 수동성의 질서 안에서 지각적 종합들의 배후에는 어떤 유기체적 종합들이 자리 한다. 이는 마치 감관들의 감성이 우리의 존재에 해당하는 어떤 원초적 감성에 의존하는 것과 같다. 모든 유기체는 수축(현재), 파지(과거), 기대(미래)들이 어우러진 어떤 종합이다. 체험된 현재가 이미 시간 안에서 어떤 과거와 미래를 구성하고 있다. 이 미래는 욕구 안에서 나타나며, 이 욕구는 기대의 유기체적 형식에 해당한다. 반면 파지의 과거는 세포의 유전에서 나타난다. 유기체적 종합들은 지각적 종합들과 조합되며, 기억과 지성의 능동적 종합 안에서 다시 자신을 펼친다.( 즉 각각의 수축, 각각의 수동적 종합은 하나의 기호를 구성하고, 이 기호는 능동적인 조합들 안에서 해석되거나 펼쳐진다) 감각이나 지각이 반복에 참여하는 방식, 욕구와 유전, 학습과 본능, 지성과 기억이 반복의 방식은 네 가지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반복의 형식들의 조합, 이 조합들이 정교화되는 수준들, 이 수준들의 연관성, 능동적 종합과 수동적 종합들의 상호 간섭등이다.
습관은 반복에서 새로운 어떤 것, 곧 차이를 훔쳐낸다. 습관의 본질은 수축에 있다. 수축은 응시하는 영혼 안에서 계속 이어지는 틱-탁(반복)의 융합을 가리킨다. 이것이 수동적 종합이다. 이 수동적 종합은 우리의 삶의 습관을 구성한다. 즉 그것이 구성하는 것은 ‘이것’이 계속되리라는 우리의 기대이며, 두 요소 중의 하나가 다른 요소 이후에 뒤따라올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이다. 그러므로 습관이 수축이라는 것은 응시하는 정신 안에서 일어나는 이런 반복의 융합이다. 우리가 습관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이는 우리가 수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수축하게 되는 것은 응시를 통해서이다. 이 둘은 동시적 사태이다. 우리는 오로지 응시하기 때문에 실존한다. 우리는 수축하기 때문에 비로소 존재한다.
쾌락의 요소들은 자극체들이 이완과 수축들을 이어나갈 때 발견될 것이다. 쾌락은 모든 경우 안에서 우리의 심리적인 삶을 지배하는 어떤 최고의 원리인가? 쾌락이 원리라면, 이는 그것이 어떤 충만한 응시의 흥분이기 때문이다. 응시는 이완과 수축으로 이루어진 경우들을 자기 자신, 안에서 수축할 때 충만해진다. 응시를 통해 우리는 쾌락을 맛본다. 그리고 우리 자신과는 다른 사물을 응시함에도 불구하고, 그 응시가 가져다 준 쾌락을 통해 모두 나르키소스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응시하는 것을 통해 언제나 악타이온이 된다. 응시한다는 것, 그것은 훔쳐낸다는 것이다. 모든 유기체는 반복의 요소와 경우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습관들을 서로 얽고 조여 매고 있다.
습관의 문제
행위는 특수한 것을 변수로 취하고, 일반성을 요소로 삼는다. 일반성은 반복에 의존한다. 반복은 일반성이 구성되는 숨겨진 기저이다. 행위가 일반성의 질서 안에서, 이 질서에 상응하는 변수들의 영역 안에서 구성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반복 요소들의 수축을 통해서만 그러하다. 행위하는 자아 아래에는 응시하는 작은 자아들이 있다. 행위와 능동적 추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 작은 자아들이다. 우리가 ‘자아’를 말할 수 있다면, 이는 우리 안에서 응시하는 이 수많은 목격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반복은 본질상 상상적이다. 왜냐하면 상상만이 구성의 관점에서 반복적인 힘의 ‘계기’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참된 반복은 상상에서 나온다. 즉자의 상태에서 와해되는 반복과 재현의 공간 안에서 우리에 대해 펼쳐지고 보존되는 반복사이, 그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반복의 대자적 측면이고, 이 측면은 상상적인 것이다. 차이는 반복에 거주한다. 수평적 구도에서 볼 때 차이는 반복 안의 한 질서로부터 다른 질서로 옮겨가게 해준다. 이때 즉자적으로 와해되는 순간적인 반복에서 출발하여 수동적인 종합을 경유하고, 이를 통해 능동적으로 재현된 반복으로 이행한다. 수직적 구도에서 볼 때 차이는 어떤 반복의 질서로부터 다른 반복의 질서로 옮겨가게 해준다. 이때 수동적인 종합들 그 자체 안에서 하나의 일반성으로부터 다른 일반성으로 이행한다. 같음의 반복은 외피이다. 그것은 중핵에 해당하는 차이와 좀더 복잡한 내적 반복들을 감싸고 있다. 차이는 두 반복 사이에 있다 이는 역으로 반복이 또한 두 차이 사이에 있으며, 차이의 한 질서로부터 다른 한 질서로 이동하게 만든다.(가브리엘 티라트의 예-변중법적 전개는 반복이다. 이 반복은 어떤 일반적 차이들의 상태로부터 독특한 차이로 옮겨가는 이행이며, 외부적 차이들로부터 내부적 차이로 향하는 이행이다. 반복은 차이의 분화소이다.)
시간의 종합은 시간 안에서 현재를 구성한다. 오로지 현재만이 실존한다. 종합은 시간을 살아 있는 현재로 구성하며, 과거와 미래를 이 현재의 차원들로 구성한다. 그렇치만 이 종합은 시간 내적이다. 이는 이 현재가 지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응시 안의 수축은 요소나 경우들을 따르는 반복의 질서에 언제나 질적 변용을 가져온다. 수축은 필연적으로 특정한 지속을 띤 현재를 형성한다. 욕구의 반복과 이것에 의존하는 모든 것의 반복은 시간의 종합에 고유한 시간을 표현하며, 이 종합의 시간 내적 특성을 표현한다. 반복은 본질적으로 욕구 안에 기입되어 있다. 왜냐하면 욕구는 본질적으로 반복과 관계하는 심급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 심급은 반복(특정한 지속)의 대자적 측면을 형성하고 있다.(수동적 종합의 관점에서는 과거와 미래가 현재 자체의 서로 다른 차원들이다. 예-흉터는 부상에 대한 응시이다. 상처는 자아를 부상과 분리시키는 모든 순간들을 하나의 생생한 현재 안에 수축한다)
진정한 의미를 얻는 것은 자연적인 기호와 인공적인 기호의 구분이다. 자연적인 기호들(현재의 기호들)은 자신이 의미하는 대상 안에서 현재를 드러내는 기호들, 수동적 종합에 기초하는 기호들이다. 인공적인 기호들(과거나 미래의 기호들)은 능동적 종합들을 함축한다. 함축된 것은 자발적 상상력에서 반성된 재현, 기억, 지성 등의 능동적 인식능력들로 향하는 이행이다.
응시한다는 것, 그것은 묻는다는 것이다. 대답을 ‘훔쳐낸다’는 것. 응시들은 어떤 물음들이다. 응시들 안에서 이루어 지고 응시들을 채우는 수축들은 모두 어떤 유한한 긍정들이다. 이 긍정들이 발생할 때 현재들은 시간의 수동적 종합 안에서 영속하는 현재로부터 태어난다.(부정적인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욕구를 능도억 종합들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하려는 우리의 성급한 태도 때문이다)
살아 있는 현재는, 모든 유기체적이고 심리적인 삶은 습관에 의존한다. 우리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습관들(수축, 응시, 지망, 자만, 만족, 피곤들, 가변적 현재들)은 수동적 종합들의 기저 영역을 형성한다. 본연의 수동적 자아는 감각 작용들을 구성하기 전에 이미 유기체 자체를 구성하는 수축하는 응시에 의해 정의된다. 수동적 종합들의 세계는 규정되어야 할 어떤 존건들 안에서 자아의 체계를 구성한다. 하지만 그것은 분열된 자아의 체계이다. 자아는 그 자신이 어떤 양태변화이고, 훔쳐낸 차이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존재가 형성되거나 수동적 자아가 있는 것은 바로 어떤 소유를 통해서이다. 모든 수축은 자신이 수축하는 것에 대한 기대나 권리를 표명하고 자신의 대상이 자신을 벗어나자마자 와해된다. 분열된 자아는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피곤들 안에서, 모든 자기만족들 안에서, 모든 자만들 안에서, 자신의 비참과 가난 속에서 존재한다.(하지만 자신이 응시하고 수축하며 소유하는 것의 영광을 노래한다.)
시간의 두 번째 종합: 순수 과거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은 시간을 현재로 구성하지만, 그렇게 구성된 현재는 지나가버리는 현재이다. 현재의 역설은 현재는 시간을 구성하지만, 이 구성 된 시간에서 지나가버린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이 일어나는 어떤 또 다른 시간이 있어야 한다. 즉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은 필연적으로 어떤 두 번째 종합을 전제한다. 첫 번째의 종합은 습관의 종합이고, 이 종합은 시간의 정초이다. (정초와 근거를 구분해야한다) 즉 습관은 시간의 정초 지점이고 지나가는 현재에 의해 점유된 움직이는 땅이다. 하지만 현재를 지나가도록 만들고 현재와 습관을 전유하는 것은 시간의 근거로 규정되어야 한다. 시간의 근거는 본연의 기억에 있다. 기억의 능동적 종합은 습관에 정초를 두는 동시에, 기억의 수동적 종합에 의해 근거지어야 한다. 습관은 시간의 시원적 종합이며, 이 종합은 지나가는 현재의 삶을 구성한다. 기억은 시간을 근거짓는 종합이며, 이는 과거의 존재을 구성한다.(주8 정초는 시간의 첫 번째 종합에서 발생, 근거는 시간의 두 번째 종합에서 주어짐, 시간의 세 번째 종합에서 성립하는 토대는 바탕이라 불리고 이 바탕은 무-바탕과 근거와해로 이어짐.)
기억, 순수 과거, 현재들의 재현
과거는 사라진 현재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이 사라진 현재가 겨냥되는 요소이다. 또한 특수성도 겨냥된 것 안에 있다. 반면 과거 자체는 본성상 일반적이다.(파지와 재생을 구분해야 한다. 주11. 재생은 파지와 달리 능동적이고 재현적인 의식의 차원에서 성립하는 재기억의 기능을 말한다) 습관의 파지는 특정한 지속의 어떤 현행적 현재 안에서 수축되어 있는 계속적 순간들의 상태이다. 그 순간들은 특수성을, 다시 말해서 본성산 현행적 현재에 속하는 무매개적이고 직접적인 과거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기대를 통해 미래로 열려있고 일반적인 것을 구성하고 있고, 기억의 재생 쪽에서 보면 일반성은 오히려 과거(현재들의 매개로서 과거)이고, 특수성을 띠게 된 것은 현재(사라진 현재와 현행적 현재)이다.
사라진 현재가 과거 일반안에 보존되고 있다면, 사라진 현재는 현행적 현재 안에 ‘재현전화’되어 있다. 이런 재현이나 재생의 한계들은 실제로 유사성과 인접성의 가변적 관계들에 위해 규정되고, 이 관계들은 연상이라는 이름 아래 파악되고 있다. 사라진 현재가 재현되기 위해서는 현행적 현재와 유사해야 하고, 또 매우 다른 지속을 띠고 있지만 부분적으로는 동시적인 현재들로 분리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사라진 현재들은 서로 인접해 있고 극단의 경우에는 현재와 인접해 있다.
재현은 그 자신의 고유한 재현성을 재현한다. 현해적 현재는 필연적으로 또 하나의 차원을 포함하고 있고. 그 차원을 통해 현행적 현재는 사라진 현재를 재-현하고 또 그 차원 안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재현한다. 현행적 현재는 사라진 현재의 회상을 형성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반조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능동적 종합은 대칭적이지는 않지만 서로 상관적인 두 측면을 지닌다(재생과 반조, 재기억과 재인, 기억과 지성)
기억의 능동적 종합은 재현의 원리라 불릴 수 있다. 기억의 능동적 종합은 습관의 수동적 종합 위에 정초하고 있다. 왜냐하면 습관의 수동적 종합은 가능한 모든 현재 일반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습관의 수동적 종합은 현재라는 조건 아래 순간들의 수축을 통해 시간을 구성했다. 기억의 능동적 종합은 현재들 자체를 서로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시간을 구성한다. 사라진 현재가 재생될 수 있는 것은, 현행적 현재가 자신을 반조하는 것은 과거의 순수 요소에 의해서이다. 기억의 능동적 종합이 습관이 (경험저거인 수동적 종합 위에 정초하고 있다 해도 기억 자체의 고유한(초월론적인) 수동적 종합에 의해서만 근거지어질 수 있다. 습관의 수동적 종합은 시간 안에서 살아 있는 현재를 구성하고 과거와 미래를 그 현재의 비대칭적인 두 요소로 만든다. 반면 기억의 수동적 종합은 시간 안에서 순수 과거를 구성하고 사라진 현재와 현행적 현재를 본래적 과거의 비대칭적인 두 요소로 만든다.
과거의 네 가지 역설
들뢰즈는 베르그손의 시간론(순수 과거에 대한 이론)을 네 가지 역설을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첫 번째 역설은 동시간성의 역설(과거는 먼저 한때 현재였던 ‘동시에’ 과거로서 미리 구성되어 있지 않다면 결코 구성될 수 없을 것. 과거와 그것이 한때 구가했던 현재의 동시간성이라는 역설)로 순수 과거와 사라진 현재 사이에서 성립한다. 두 번째 역설은 공존의 역설(각각의 과거가 자신이 한때 구가했던 현재와 동시간적이라면, 사실 모든 과거는 그것이 과거이기 위해 지금 거리를 둔 새로운 현재와 공존함)로 순수 과거와 현행적 현재 사이에서 성립한다. 세 번째 역설은 선재의 역설(각각의 과거는 자신이 한때 구가했던 현재와 동시간적이고, 과거 전체는 그것이 과거이기 위해 거리를 둔 현재와 공존하지만, 과거 일반의 순수 요소는 지나가는 현재에 선재함)로 순수 과거와 지나가는 현재 사이에서 성립한다. 마지막으로는 순수 과거의 자기 자신과의 공존이라는 역설이다.
초월론적인 수동적 종합은 동시간성과 공존, 그리고 선재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이 순수 과거와 관계한다. 능동적 종합은 현재의 재현이며, 이 재현은 사라진 현재의 재생과 새로운 현재의 반조라는 이중적 측면에서 이루어진다. 능동적 종합은 초월론적인 수동적 종합에 근거지어진다.
계속 이어지는 현재들은 일관성을 결여하거나 서로 대립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 비일관성이나 대립이 아무리 크더라도 각각의 현재가 어떤 다른 수준에서 ‘똑같은 삶’을 펼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것이 운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운명이 계속 이어지는 현재들 사이에서 함축하는 것은 어떤 정위 불가능한 연관들, 원격 작용들, 재취함과 공명과 반향의 체계들, 객관적 우연들, 신호와 기호들, 공간적 상황과 시간적 계속성들을 초월하는 어떤 역할들이다. 운명을 표현하는 현재들은 수준의 차이를 제외하면 언제나 똑같은 사태와 똑같은 이야기를 펼쳐놓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운명은 결정론과는 그토록 부합하지 못하는 반면 자유와는 그토록 잘 부합한다.
우리는 우리를 형성하는 현재들 사이의 계속적 관계와 동시적 관계들을 경험적 특성이라 부른다. 이 현재들이 인과성, 인접성, 유사성 그리고 심지어 대립에 따라 연합하는 것도 경험적 특성이라 불릴 수 있다. 반면 어떤 순수 과거의 수준들 사이에 성립하는 잠재적 공존의 관계들을 본체적인 특성이라 부른다. 능동적 종합의 관점에서 서로 다른 현재들의 계속을 경험한다면, 그 계속의 사태는 또한 수동적 종합 안에서 일어나는 과거의 수준들의 공존이기도 하며, 그 공존은 언제나 증대해간다.
현재의 기호는 극한으로의 이행이며, 어떤 수준이든 하나의 수준을 선택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최대한의 수축이다. 하지만 그렇게 선택된 수준은 그 자체로 수축되어 있거나 팽창되어 있으며, 무한히 많은 다른 가능한 수준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의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복수의 삶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각각의 삶이 어떤 지나가는 현재라면, 하나의 삶은 다른 삶을 다른 수준에서 다시 취할 수 있다.(윤회: 서로 다른 수준에서 똑같은 과거를 연출하는 것)
물질적 반복과 정신적 반복
물질적 반복은 서로 독립적이면서 계속 이어지는 요소나 순간들의 반복이다. 정신적 반복은 공존하는 상이한 수준들에서 일어나는 전체의 반복이다.(*물질적 반복-헐벗은 반복, 부분들의 반복, 이어지는 반복, 현행적, 수평적 반복. *정신적 반복-옷 입은 반복, 전체의 반복, 공존하는 반복, 잠재적, 수직적 반복) 현재는 언제나 수축된 차이다. 물질적 반복의 경우 현재는 서로 무관심한 순간들을 수축한다. 반면 정신적 반복의 경우 현재는 극한에 이르고 그런 가운데 하나의 수준을 수축한다. 현재들 자체의 차이는 두 반복 사이에 놓인다. 하나의 반복은 요소적 순간들의 반복이며, 이때 차이는 이 순간들에서 훔쳐내는 그 무엇이다. 다른 하나의 반복은 전체가 지닌 수준들의 반복이며, 이때 차이는 이 수준들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 두 가지 반복 중 어느 것도 재현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물질적 반복은 성립하는 동시에 와해되기 때문이다. 물질적 반복은 오로지 능동적 종합에 의해서만 재현된다. 하지만 동시에 이 반복은 재현의 대상이 되자마자 요소들의 동일성이나 경우들의 유사성에 종속된다. 정신적 반복이 과거의 즉자 존재 안에서 성립한다면 재현을 통해 모든 반복은 반조 안의 현행적 현재의 동일성에, 그리고 재생 안의 사라진 현재의 유사성에 종속된다.
상기는 자발적 기억의 모든 능동적 종합과는 본성상 다른 어떤 수동적 종합이나 비-자발적 기억을 지칭한다. 과거의 즉자 존재가 출현하는 것은 바로 본연의 망각 안에서 이다. 과거에 즉자 존재가 있다면, 상기는 그것의 본체이거나 그 본체에 사로잡힌 사유이다. 순수 과거는 지나가는 현재들에 힘입고 또 그 현재들을 이용하는 가운데 재현 아래에서 나타난다. 그 안에서 현재들이 지나가고 서로 충돌하는 요소를 제공한다.
데카르트적 코기토와 칸트적 코기토: 규정되지 않은 것, 규정, 규정 가능한 것
시간 이론의 관점에서 데카르트적 코기토와 칸트적 코기토의 차이를 보면, 데카르트적 코기토는 규정과 규정되지 않은 실존이라는 두 가치에 기능한다. 규정은 규정되지 않은 실존을 함축한다. 그리고 그 규정되지 않은 실존을 사유하는 존재자의 실존으로 규정한다. 칸트는 규정을 규정되지 않은 것에 직접적으로 관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따라서 규정 가능한 것을 덧붙인다. 이것은 미규정자가 규정될 수 있는 형식이다.(규정에, 그리고 규정되지 않은 것에 규정 가능성의 형식을, 다시 말해서 시간을 덧붙인다.)그것은 본연의 차이 자체의 발견을 구성한다. 여기서 발견되는 차이는 본래적 규정 자체와 그것이 규정하는 것 사이의 초월론적 차이다.
(칸트-규정되지 않은 실존이 ‘나는 생각한다’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형식은 시간의 형식) 규정되지 않은 나의 실존은 오로지 시간 안에서만 규정될 수 있다. 이때 나의 실존은 어떤 현상의 실존으로, 곧 시간 안에서 출현하는 수동적이거나 수용적인 현상적 주체의 실존으로 규정된다. 그것은 단지 수동적 자아의 변용으로만 이해해야 한다. (수동적 자아-‘나는 어떤 타자이다’ 혹은 내감의 역설로 집약된다. 사유의 능동성은 어떤 수용적 존재자에 적용되고, 따라서 이 수동적 주체는 능동성을 행사한다기보다는 표상한다. 그 능동성의 효과를 느끼며, 능동성을 자신 안의 어떤 타자로 체험한다.) 나는 시간의 텅 빈 형식에 의해 균열되어 있다. 이런 형식을 통해 볼 때, 나는 시간 안에서 나타나는 수동적 자아의 상관항이다. 수동적 자아와 균열된 나의 이 상관관계를 통해 초월론적인 것의 발견이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의 요소가 구성되고 있다.
균열된 나, 수동적 자아, 시간의 텅 빈 형식
데카르트는 시간을 연속적인 창조 작업중인 신에게 내맡겨놓는다. 나에 대해 가정된 동일성은 신 자신의 단일성 외에는 다른 보증이 없다. 하나가 보존하는 동일성은 정확히 다른 하나에 의존하는 동일성이기 때문이다. 신의 죽음은 나의 동일성을 존속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신의 죽음을 통해 어떤 본질적 비유사성. ‘표시 삭제’가 생겨나고 내면화 된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바로 이점을 꿰뚫어 보았다. 신의 사변적 죽음은 나의 균열로 이어진다. 초월론 철학의 위대한 창의성은 시간의 형식을 본연의 사유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있다. 순수하고 텅 빈 이 형식은 이제 죽은 신, 균열된 나, 그리고 수동적 자아를 의미하게 된다. 칸트는 이런 창의성을 끝까지 추구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수동적 자아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그 자체가 수동적인 어떤 종합(응시-수축)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을 보았다. 횔덜린은 순수한 시간의 공허를 발견한다. 이 공허 안에서 신성한 것의 연속적 전회, 나의 심화된 균열, 그리고 본연의 자아를 구성하는 수동적 정념을 동시에 발견한다.
기억의 불충분성: 시간의 세 번째 종합
플라톤의 상기는 이미 시간을 본연의 사유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상기는 어떤 형식을 통해 시간을 도입하는가? 시간은 이데아의 순수 과거 안에서 자신의 근거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이데아를 통해 현재들의 질서는 이상적인 것에 대한 유사성의 증감에 따라 원환적으로 조직된다. 이데아 자체를 정의하는 순수 과거는 필연적으로 현재의 관점에서 표현되고, 사라진 신화적 현재로서 표현된다. 이미 시간의 두 번째 종합이 지닌 애매성, 기억의 모호성은 이 점과 이어져 있었다. 그것(기억)은 근거, 즉자 존재, 현상 배후의 본체, 이데아이다. 하지만 그것(기억)은 자신이 근거짓는 재현에 묶여 있다. 므네모시네(기억)는 현재로 환원될 수 없고 재현보다 우월하지만 현재들의 재현을 순환적이거나 무한하게 만들뿐이다. 근거(기억)의 불충분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근거(기억)는 자신이 근거짓는 것에 상대적이고, 자신이 근거짓는 것에서 특성들을 빌려오며, 그 빌려온 특성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입증한다. 즉 근거(기억)는 사유 안으로 시간을 끌어들인다기보다 영혼 안으로 운동을 끌어들인다. 시간의 두 번째 종합은 또한 재현의 상관항으로 머물러 있는 즉자 존재의 가상을 폭로하는 세 번째 종합을 향해 자신을 넘어선다. 과거의 즉자 존재와 상기 안의 반복은 일종의 ‘기억 자체의 어떤 광학적 효과’(에로스적 효과)일 것이다.
시간의 형식, 순서, 집합, 계열
시간의 텅 빈 형식 혹은 시간의 세 번째 종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빗장(시간의 방위 기준점)이 풀린 시간은 미친 시간을 의미한다. 즉 자신이 텅 빈 순수한 형식임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이때 결코 어떤 것도 시간 안에서 펼쳐지지 않는다. 그 대신 시간 자체가 스스로 자신을 펼쳐간다. 이것이 시간의 순수한 순서다. 그 순서는 시작과 끝을 어긋나게 하는 ‘각운의 중단’이다. 나의 균열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이 각운의 중단, 그리고 그 중단이 결정적인 어떤 한 순간 순서를 부여하는 이전과 이후다.(그 중단은 정확히 균열의 탄생 점이다) 자신의 고유한 근거를 전복한 시간. 이 시간은 형식적이고 텅 빈 순서에 의해 정의되며, 또한 어떤 시간의 집합과 계열에 의해 정의된다. 각운의 중단, 이전과 이후를 모두 회집하는 한에서 이런 상징적 이미지는 시간의 집합을 구성한다. 하지만 그것들을 동등하지 않게 분배하는 한에서 이 상징적 이미지는 어떤 시간의 계열을 가능하게 한다. 각운의 중단 자체를 전제하는 두 번째 시간은 변신의 현재, 행위에 필적하게 되는 동등하게-되기, 자아의 이분화이다. 그것은 행위의 이미지 안에 어떤 이상적 자아를 투사하는 시간이다. [시간의 집합은 다음을 의미한다. 즉 각운의 중단은 언제나 어떤 행위의 이미지 안에서 규정되어야 하며, 시간 전체에 부합하는 단일하고 어떤 사건의 이미지 안에서 규정되어야 한다. 이 이미지 자체는 어떤 분열된 형식을 통해 동등하지 않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현존한다. 하지만 이 이미지를 통해 일체의 시간 전체가 회집된다. 이 이미지는 동등하지 않은 부분들을 포섭하고 회집하되 동등하지 않은 것들로서 회집한다. 이 이미지는 하나의 상징이라 불려야 한다]
미래를 발견하는 세 번째 시간의 경우-이 시간은 사건, 행위가 자아의 일관성을 배제하는 어떤 비밀스러운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이 일관성은 자아에 등을 돌리고 자아를 수천 조각으로 쪼개어 투사한다.(새로운 세계를 잉태한 자는 자신이 낳고 있는 파열하는 다양체에 의해 압도되고 탕진된다) 자아가 필적하게 된 것, 그것은 즉자적 비동등이다. 시간의 순서에 따라 균열된 나와 시간의 계열에 따라 분할된 자아는 바로 이런 방식을 통해 서로 상응하고 어떤 공통의 출구에 이른다.
[2]사르트르의 '무신론적 實存哲學'
이광래
1. 실존 철학자들
위대한 철학 사상이나 위대한 철학체계일수록 결코 끝나거나 완료되는 일이 없다. 위대한 철학은 언제나 연속적인 창조의 일익을 담당하게 마련이다. 그것은 시간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따라, 그리고 자기 정신의 고도에 따라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또는 새로운 철학적 변형들의 출현을 맞이할 뿐이다.
'본질', 또는 '이데아'들을 완전하고 참된 실재라고 간주한 플라톤의 본질주의도 역사와 실천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나 실존 및 현존재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사르트르와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새로운 세계의 도래와 더불어 철학적 반대 명제로서 출현시켰다. 본질주의와 실존주의는 대립되지도 않고 대립될 수도 없다. 본래 삶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이란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실존주의는 아주 깊은 연원을 갖는다.
안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며, 또한 정상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곧 자기가 믿는 확고한 진리를 위해 자기 자신의 실존을 희생시킬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소크라테스에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문제는 그와 같은 근본적인 인간정신이 시간과 환경을 달리할 때마다 어떻게 조율되는가 하는 점이다. 돌이켜보면, 인간 사회의 성장의 각 단계에는 모두 사상과 신앙이 거기에 대응해 있다. 그것들은 그 강도가 여럿 이기는 하나 분명히 언제나 잠재해 있다가 그 어떤 순간에 이 사회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상태에 대한 수정이나 첨가로서, 또는 이 사회의 에토스적인 요소로서 등장하곤 했다.
그러면 실존주의의 현대적 형태는 이 시대와 어떻게 관계하면서 등장하는가?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파리에서 나타났다. 처음에 그것은 철학에 있어서 한 유행으로 간주되었고, 실존철학자들도 자신들의 사상을 대학강단이 아닌 카페에서 토론했다. 모든 유행이 그러하듯이 실존주의도 잠깐이면 망각 속에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철학에서뿐만 아니라 소설, 희곡, 시, 회화, 신학 등을 포함하는 모든 사유 형식과 표현양식에 침투해 들어감으로써 추진력을 획득했다. 짧은 기간 동안 실존주의는 현대의 어떤 철학사조보다도 폭넓은 호응을 얻으며 그 영향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기세였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무엇보다도 그것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전쟁이 가져다준 비인간화 현상 때문이었다. 인간을 돕기 위해 발생했던 과학기술은 곧 나름대로의 추진력을 획득했고, 오히려 이제는 인간의 삶을 기계의 리듬에 맞추도록 강요한다. 그것인 실존하는 인간적인 영역에 침투해서 인간을 기계에 속박시키고, 인간에게 조직화된 인간으로서 일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인간은 이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더욱더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역사적 사건들, 특히 두차례의 세계대전은 삶에 대한 개인의 열망이나 열정을 무참하게 빼앗아 갔다. 제 1 차 세계대전은 250만명의 사상자를 낳았으며 특히 가장 우수한 청년의 대부분을 상실함은 물론 만성적인 재정적자의 계기가 됨으로써 자긍심에 찬 프랑스인들에게 참기 어려운 불명예를 안겨주었다. 제 2 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이보다 더욱 비참한 것이었다. 전사한 병사와 점령 당시의 희생자, 공습으로 인한 사망자, 식량부족으로 인해 굶어 죽은 사람 등으로 인구는 1939년 이전보다 훨씬 감소되었고 약 200만 호의 주택이 파괴되었다. 대부분의 공장기계들은 철거되었고 프랑스의 젖줄이라 부르던 농업과 목축업이 농기구, 비료, 인력의 부족으로 완전히 황폐화되었다. 점령비란 명목으로 독일인에게 빼앗긴 3천억 프랑의 전비지출로 감당하기 어려운 인플레이션을 맞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전생의 참상은 전 국토를 완전히 유린했으며 전국민의 삶의 욕망을 불안과 조절감으로 바꿔놓았다. 전쟁은 끝났지만 개인적 삶은 그지없이 불확실하고 불안정하고 불투명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불안의 심연에 빠졌으며, 스스로를 무감각하고 제 멋대로인 우주에 버려진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인간은 초인간적 존재인 신과의 관계에 대한 반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신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또는 인간은 애당초부터 신과 무관하였으므로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실존주의는 오랫동안 유럽인들이 지녀온 종교적 믿음에 대한 붕괴를 드러내는가 하면, 어떤 실존주의자들은 절대자에게로 다시 돌아감으로서 상처받은 인간성을 치유받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들이 신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든 간에 그들이 취하는 공통적 태도는 인간과 사물의 표현만을 다루는 추상적이고, 체계적인 사고에 대한 거부이다. 그들의 주장은 유사점보다 차이점을 더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갖는 공통된 강령은 추상과 체계적 개념을 멀리하는 것, 또는 사물 그 자체에로 돌아가는 것, 아울러 의식의 매개되지 않은 자료, 곧 내적 삶의 실재적 흐름을 범주화, 일반화, 이전에 파악할 것, 그렇게 하여 인간에 대해 이해를 인간의 실존, 실존하는 개인의 조건과 특성에 대한 이해하에서 진행하는 것이었다.
2. 사르트르의 생애와 저서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 ~ 80)는 1905년 6월 21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해군장교인 Jean Baptiste Sartre였으며, 어머니는 Anne-Marie Schweitzer였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가 갑자기 죽자 사르트르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외가집으로 가서
1916년 어머니가 재혼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그는 어린시절 외할아버지로부터 독일어를 배우면서 문필과 학문을 숭상하는 명문 슈바이처
가문의 지적 분위기를 익혔다. 1916년 행양기사인 M. Mancy와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라 로셀로가 의붓아버지와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지만 그곳에서 지낸 4년 동안의 생활은 의붓아버지와의 불화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1924년 그는 파리 고등사범학교 (ENS)에 입학하여 4년 동안 주로 철학과 심리학을 공부했다.
1928년, 그는 교수자격 국가시험에 응시했으나 실패했다. 그 이듬해 그는 시몬느 드 보봐르와 만났다. 이때부터 이 두 사람은 세인의 주목 거리가 된 실험적인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그 해에 두 사람은 교수자격 국가시험에 응시하여 사르트르와 보봐르가 각각 1, 2등을 차지함으로써 다시 한번 주위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1929 ~ 31년까지 군복무를 마친 사르트르는 1931년부터 르 아브르에 있는 고등하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곳은 그의 소설 『구토』에 나오는 지명인 부비유의 모델이 된 도시였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는 그의 유학기간이었다. 독일의 베를린 대학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그는 후설의 현상학을 공부했다. 독일에서 돌아온 그는 파리에 있는 꽁도르세 고등학교에서 철학교수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1939년 그는 전쟁에 동원되었지만 1940년에 싸워보지도 못하고 포로가 되었다. 그 이듬해 풀려나자 그는 메를로-뽕띠와 함께
지식인 저항그룹을 결성했다. 이때부터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햇다.
1945년에는 「Combat」와 「Le Figaro」의 특파원으로 두 번에 걸쳐 미국을 여행하면서
'실존주의와 휴머니즘'을 주제로 한 강연을 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특히 그 해에 그는 훈장의 수여를 거부함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 또한 1945년은 그가 창간한 잡지 「현대 Les Temps Modernes」가 처음 출판되는 해이기도 하다. 1948년부터 그는 정치문제를 비롯한 현실문제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각종 탄원서와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스라엘의 국가 창설을 지지하는 선언문도 그 해에 나온 것이다. 1950년 한국동란이 일어난 이후에 그는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회의에 점점 깊이 빠져들면서 모택동주의에 대한 호의적인 관심을 더해갔다. 1964년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하여 다시 한번 세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1968년 5월 학생소요 때는 그들을 지지하고
나섰으며, 모택동주의자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그는 1974년 꽁도르세 고등하교의 교직생활을 끝으로 철학 교수로서 대학 강단에는 더 이상 섰던 적이 없다. 수많은 강연과 인터뷰들을 통해서 자신의 사상을 직접 토로하는 것 이외에는 평생을 저술활동에만 전념했다.
사르트르가 출판한 최초의 저서는 1936년에 자아에 관한 문제를 다룬 『상상력』이라는 책이었다. 1938년에는 그의 유명한 소설 『구토』가 출판되었으며, 『정서이론의 스케치』와 소설집 『벽』이 그 이듬해 나왔다. 1940년 그는 독창적인 이마쥬론인 『상상력 : 상상력의 현상학적 심리학』을 출판했다. 그가 사병생활 시절 병영에서부터 쓰기 시작한 대표적인 철학저서 『존재와 무』는 1943년에 출판됐다. 그 해에는 그의 희곡 『파리떼들』이 공연되었다. 1945년에는 두 권으로 된 소설『자유의 길』과 잘알려진 희곡 『닫힌 문』이 나왔다. 그의 유명한 강연인「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가 행해진 것도 같은 해였다. 1947년 그는 『보들레르 연구』를 출판했고, 그의 잡지 「현대」에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간의 논문을 모아 『상황들』이라는 논문집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이 논문집은 그 뒤 1948년, 49년, 64년, 65년, 72년, 76년에 걸쳐 10권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전집 가운데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2>, <68년을 전후하여>, <정치학과 자서전> 등이 실려 있다. 1952년 그는 Jean Genet의 저서에 대한 입문서인『성 쥬네 : 희극 배우와 순교자』를 출판했으며, 1950년 이제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태도 변화는 그로 하여금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을 시도케 하여 1960년 그 첫 번째 결실로서『변증법적 이성비판』의 제 1권을 그는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1964년에는 그의 노벨상 수상작품인 『말』이 나왔다. 1971년 그는 플로베르에 관한 방대한 연구서인 『가문의 얼간이』의 출판을 시작하여 그 이듬해까지 세 권으로 완성했다.
2.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1)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가브리엘 마르셀이나 야스퍼스와 같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이건, 하이데거나 사르트르와 같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이건 모든 실존주의자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것과 주체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실존주의자들은 예외 없이 실존의 확고한 우위성을 철학적 전제로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의 우위인가? 그것은 사실상의 우위인가? 또한 그것이 어떻게 인간본성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할까? 사르트르는 인간의 본성을 제조과정에 있는 한 상품에 대한 묘사와 같은 방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종이 자르는 칼의 제조과정을 예로 들었다.
'우리가 이를테면, 책이든가 종이 자르는 칼 같은 것은 생각할 경우, 그 물건은 기술자가
그의 머리 속에 있는 하나의 개념을 본떠서 만든 것이다. 즉 그 제조과정은 종이 자르는 칼에 대한 개념에 따른 것이며, 역시 그 개념의 일부분을 이루는 선행적인 제작기술에 따른 것이다. 이처럼 종이 자르는 칼은 일정한 방법으로 제조되는 것이며 동시에 한정된 효용을 가진 물건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물건이 무엇에 소용되는 것인지를 모르고서 종이 자르는 칼을 만드는 사람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이 자르는 칼에서는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내 앞에 있는 종이 자르는 칼, 또는 어떤 책의 현존이 결정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세계에 대한 기술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경우에는 제작이 본질에 앞선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종이 자르는 칼을 파악한다는 것은 그것의 사용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우리가 인간의 본성에 관해 생각할 때에도 그와 같이 생각하려는 경향을
보여왔다고 생각했다. 즉 우리는 인간을 하나의 제조자나 창조자, 또는 신의 산물로 간주해 왔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신을 최고의 기술자로 생각하고, 그는 자신이 창조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한다는 가정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신의 정신 속에서의 인간의 개념은 기술자의 정신 속에서의 종이 자르는 칼의 개념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개인은 신의 오성 속에 있는 그 어떤 개념을 구별하는 것이다. 18세기의 계몽철학자들이나 칸트 같은 사람들도 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질이 실존을 앞선다는 생각이 부정된 것은 아니다. 우히려 그들은 인간은 본성을 소유한다는 주장만을 되풀이 했다. 칸트에게 있어서도 사람은 인간성의 소유자이다. 이 사실은 사람마다 누구나 인간이란 보편개념의 특정한 표본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는 이러한 보편성을 통해서 원시인이나 미개인이나 부르조아나, 사람이면 모두 다 마찬가지로 같은 정의에 얽매여 있으며 동일한 기본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인간의 본질이 우리가 자연 속에서 만나는 역사적 실존에 앞선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이러한 주장들을 모두 역전시키고 있다. 그에 의하면, '만일 신이 없다면, 본질보다도 앞서는 하나의 존재 또는 어떠한 개념으로도 정의되기 전에 존재하는 하나의 존재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신이 존재하지 않는 다면 인간본성에 대한 개념을 먼저 지니고 있는 존재도 없을 것이므로 인간본성에 대한 주어진 개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미리 정의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미리 완전하게 전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단지 실존하고 그후에야 그의 본질적 자아로 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이 먼저 세계 속에 나타나 존재하고 떠오르며, 그 다음에야 정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실존한 뒤에야 비로소 무엇이 되고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 될 것이다. 이처럼 인간본성이란 본래 없는 것이거나 그것을 착상해낼 신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존재 이후에 스스로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의 제 1 원칙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또한 주체성이라고 부른다.
(2) 인간은 자유이다.
사르트르는 '신이 없다면 무엇이고 가능할 것이다'라고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빌려 '그것이 바로 실존주의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신이 없다면 인간에게는 모든 신이 허용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내부나 외부에 의지할 곳이 없어 고독하게 되어버린다. 우선 어떠한 핑계도 있을 수 없다.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정말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면, 인간은 절대로 일정하고 응결된 인간성에 의해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결론이 있을 수 없으므로 인간은 자유로우며, 자유 그 자체이다. 인간은 운명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인 것이다. 운명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인간이 이미 세계 속에 던져진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자유의 선고를 받은 존재라고 나는 표현하고 싶다. 인간은 스스로를 창조한 것이 아니므로 선고를 받은 것이요, 세상에 한번 내던져지자 그가 행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 책임이 있는 까닭에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 인간이 자유인 까닭은 그가 곧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되며, 자신의 모든 행위에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행동이 격정에 의해 움직여진다는 사고방식을 거부했다. 그러한 격정이란 어떤 행위에 대한 하나의 구실에 불과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은
자신의 격정들에 대해서조차도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그의 감정들도 그의 행위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자유는 또한 전율이다. 자유는 배후에서 나를 어떤 주어진 방식으로 행동하게 해주는 힘이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나를 미래로 유혹하는 어떤 형식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의 미래이다'라는 실존주의 문학자 퐁쥬의 말에 부연하여 사르트르는 '다만 거기서 미래라는 것이 하늘에 쓰여져 있고, 신이 그것을 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미래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나는 실존하는 유일한 어떤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유로우므로, 따라서 선택해야 한다. 즉 발명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보편적 도덕률도 우리에게 우리가 해야 할 것을 제시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선택은 우리의 선택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나의 병을 창피하고 굴욕적인 것으로 감추려고 생각하거나, 자랑거리 또는 실패의 정당화로서 내보이려고 생각하든가 하는 방향을 선택하지 않는 한에서는 나는 병자일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선택하는 자유이다. 즉 우리는 자유롭기를 선택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이도록 되어 있기때문이다. 또한 자유는 선택하는 자유이지만 선택하지 않는
자유는 아니다. 사실상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은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선택은 선택된 존재의 기초이지만 선택하는 행위의 기초는 아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동시에 부조리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자유롭도록 되어 있으며, 따라서 자유는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그것이 무가 아닌 한 순수하고 단순한 필연이다. 실존은 자유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부조리적 존재이도록 되어 있다. 한편 개인의 자유는 전인류에게로 열려 있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만인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선택한다.' '나의 거동은 전인류를
관여하는 것이 된다. 좀더 개인적인 문제에서 보더라도 내가 결혼하여 자식을 갖기를 원한다면 설사 그 결혼이 다만 나의 처지나, 정열이나, 욕망에 달려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로 인해 나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전 인류의 일부일처제와 관여하는 것이다. 이처럼 나는 나 자신과 모든 타인에 대하여 책임이 있으며 내가 선택하는 어떤 인간의 개념을 창조한다. 즉 스스로를 선택함으로써 나는 인간을 선택한다.'
인간은 결국 스스로를 결정하는 자일 뿐만 아니라 전인류를 선택하는 입법자인 동시에 자신에 대한 전적이고 심각한 책임의식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바로 여기에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유로운 앙가쥬망의 절대성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상황 앞에서 내가 이성과 관계를 가질 수 있고 자식을 가질 수 있는 존재라는 그런 상황에 직면해 나는 어떤 태도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으며 어떠한 선험적 가치도 나의 선택을 좌우할 수 없다. 나는 오직 나를 성실하게 관여함으로써 온 인류를 관여하는 선택의 책임을지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인 것이다. 이때 그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성실한 관여이다. 불성실성은 앙가쥬망의 전적인 자유를 은폐하는 것이므로 허위의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 존재의 두가지 양태
사르트르에 의하면, '선택은 하나이며, 우리가 저절로 갖게 되는 의식과 동일한 것이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의식이 우리 자신의 의식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또한 어떻게 無로서의 의식이 한 자아를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물론 우리가 對自的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를 위해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존재를 즉자(卽自)와 대자(對自)로 구분했다.
즉자란 그 자체 안에 존재하는 존재이며, 그 자신의 의식을 갖고 있지 않아서 다른 의식의 대상이 되는 존재이다. 마치 돌멩이가 존재하는 방식과 다름이 없는 존재이다. 이에 반해 대자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며, 자기 의식을 떠나서는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것은 그를 돌멩이와 구별해주는 하나의 의식적인 주체임을 사르트르는 이와 같은 두가지 종류의 존재양태 가운데서도 대자존재에 대한 설명으로 『존재와 무』의 대분분을 할애했다. 그의 본질적인 관심이 인간의 자유문제라고 한다면 그의 자유이론이 근거하고 있는 것이 바로 대자에 대한 분석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모든 의식은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다. 그것은 현상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의식이다. 이 경우에 그것은 존재와는 다른 것, 즉 비존재이어야 한다. 그것은 본래 존재의 부정이나 무화를 통해 생겨나야만 한다. 그가 보기에 즉자는 곧 자신과 일치하며, 따라서 사적, 폐쇄적, 과거적이며 완결된 존재이다. 즉자는 어떤 無도 품고 있지 않다. 이에 반해 대자, 즉 의식은 일종의 활동과정이다. 대자는 즉자의 전체적인 무화이다. 대자는 존재의 무화 과정에서의 실재성 이상의 실재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의식은 어떤 무엇에 의해 부정이나 무화가 야기되는 그런 것이다.
본질과 개입하거나 분리하는 것이 전혀 없다. 의식 자체는 비존재이면서 무화 과정으로서의
활동을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이 종이 한 장을 인지한다 할 경우, 나는 나 자신을 그것 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거나 분리되는 것이다. 나는 그 종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그것 이외의 어떤 것도 부정함으로써, 즉 다른 현상들을 무화함으로써 그 종이를 출현시키며, 그것의 배경에 관여하지 않는다. 의식은 다른 것들을 무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미술전시관 안에서 내가 어떤 특정한 그림에 관심을 고정시킴으로서 다른 것들을 배제시킨다는 것과 같은 활동이다.
사르트르에 있어서 의식은 자신에 관한 실체적인 어떤 것도 소유하지 못하면서도 그것이 단지 자신에게 명백해질 때에 실존한다. 그러므로 의식은 결핍과 공허와 무를 자신의 중심부에 전제하는데 無란 의식이 즉자가 아니라는 바로 그 증명인 것이다. 의식은 無를 창조하며, 이는 의식이 無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無는 존재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존재에 내재하며 '기생충처럼 존재의 가슴에 기생해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 無는 그 자신을 폐기하거나 무화되거나 한다. 따라서 無는 세상에 나타나게 된 수단적 존재이며, 존재 그 자체는 결핍, 즉 일종의 無인 것이다.
이미 언급한 바이지만 대자의 발생을 가능케 하는 것도 즉자의 무화이다. 대자는 즉자의 무화에서 발생되며, 이는 즉자를 향한 기투의 형태를 취하는데, 이 무화된 즉자와 기투된 즉자 사이의 대자는 無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無적인 것을 목적하는 대자로부터 無적인 것에 의해 분리된, 또는 무화된 즉자를 소유한다. 즉 우리는 사실상 無적인 것에 의해 분리된, 또는 무화된 즉자를 소유한다. 즉 우리는 사실상 無적인 것에로 지향된 대자를 소유한다. 본래 즉자와 대자는 결코 합의될 수 없다. 그것들은 대자가 더 이상 대자이기를 그만 두고 즉자 속으로 떨어질 때만 결합될 수 있다. 무화된 즉자인 대자가 그것을 지향하는 대자와 융화될 때에만 완전한 전체성을 기대할 수 있다. 의식이 결여된 채 응결된 즉자는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존재와 분리되어 있는 대자(즉 의식)는 즉자에 의해 결정될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다. 사르트르에게 있어 자유는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그것은 의식적 존재의 구조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인간 실재의 존재와 구별될 수 없다. 다른 사물들과 달리 인간은 먼저 실존하고, 그 뒤에 본질을 구성한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도 인간의 본질을 설명한다. 인간은 기성품이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만든다.
(4)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사람은 자유로운 앙가쥬망의 바탕 위에서라면 무엇이고 선택할 수 있다.' 선택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며 어떠한 토대도 없이 형성되었다. '선택은 모든 이유가 자유선택에 의해 세계내에 존재하게 되는 충분한 이유에 대한 충분한 이유없이 이루어진다.' '인생에 뜻을 부여하는 것은 우리들이 선택하는 그 뜻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로서 여러분은 인간의 공통성을 창조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처럼 사르트르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을 가치창조의 장본인으로 내세웠다. 그러자 사람들은 '당신은 구토에서 휴머니즘을 조롱까지 하고서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휴머니즘을 운운할 게 뭐냐'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때의 휴머니즘은 불합리한 것이다.
'왜냐하면 개나 말만이 인간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내려 인간을 훌륭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지만,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개나 말이 그럴 것 같지는 않다.'사르트르는 인간이 인간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실존주의는 이런 종류의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란 스스로를 만드는 존재이므로 인간을 목적으로 삼지는 않는다. 이 말은 인간에 중심을 두고 신을 포기하는 세계관을 의미한다. 그는 분명히 신에 반대하는 결단을 했다. 그는 니이체처럼 이미 미지의 신을 찾지 않았다. 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신의 존재는 증명할 수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존재라는 개념, 즉 자기원인적 존재는 자가당착이기 때문이다. 그가 신을 거부하는 이유는 분방한 자유에의 열망에 있다. 그는 미래의 모든 가능성에 개방되고자 한다. 어떠한 신의 도덕률, 어떠한 선천적 가치, 어떠한 본체, 따라서 인간의 어떠한 본질, 어떠한 본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했다. 인간은 실존할 뿐이지만 인간은 그가 되려고 하는 것, 그가 바라는 것, 곧 기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버려진 채 세게 안에 던져져서 인간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그의 실존에 대해 홀로 책임지고, 자기 자신을 선택하고, 자기 자신의 상에 따라 자신을 창조하고, 자신의 가치를 선택하고, 선악을 결정하고, 헌신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입법한다. '실존주의를 휴머니즘이라 부르는 것도 사람에게 그 자신 이외에는 다른 입법자가 없으며, 그가 그 자신을 결정한 것은 그 초월 속에서라는 것을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또한 초월성과 인간이 자신 속에 얽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인간은 우주 속에 처해 있다는 의미로서의 주체성과의 관계, 그것을 그는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의 실존주의는 인간을 탈자적 존재로 간주하는 휴머니즘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 밖에 있다. 인간은 자신을 외부로 투기하면서, 그의 밖에서 자신을 상실하면서 인간이 실존하게 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 자신이 그의 초월의 중심이며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탈자적 인간이 신으로부터 탈락한 데 대해 치러야 할 대가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우주, 즉 인간의 주체성이 우주인 이상, 다른 우주가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다. 초월, 인간을 구성하는 것으로서의 초월―신을 초월적이라고 할 때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기 이상의 것으로 향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과 인간은 그 자신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인간적 우주 속에 현존하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주체성고의 결합을 우리는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끝으로 그의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은 탈자적 존재론에서 행동과 윤리학으로 발전한다. 그에 의하면, 실존주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로서의 무신론이 아니다. 그것은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달라질게 없다고 선언한다. 그에게 있어 신의 존재 여부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그가 강조하려는 것은 신이 존재한다는 유효한 증명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 자신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실존주의를 낙관론이 동시에 행동의 이론이라고 생각했다.
(5) 실존주의적 마르크스
'철학이 달성하려는―세계에 대한 완전한 이해―을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을 그것을 명상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유명한 문구처럼 철학을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다……마르크스주의는 자유와 개인을 용인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유물론으로서의 그것은 인간에게 일종의 현기증 나는 책임을 부과한다.' '생동하는 마르크스주의는 실존주의자의 탐구를 구제해야 하며, 그것을 질식시키지 말고 통합해야 한다.' 이상의 인용문은 『존재와 무』에 대한 메를로 뽕띠의 서평에 나오는 글들이다. 이 구절들은 아마도 그 서평에 나오는 것들 가운데서 사르트르의 생각에 가장 자극을 주는 것들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변증법적 이성비판』은 메를로 뽕띠의 말대로 『존재와 무』에서 겪은 허무한 관념론을 극복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에다 실존주의적 토대를 삽입해보려는 사르트르의 자구책이었다. 이것은 인간을 역사의 흐름 속에 위치시키고, 인간을 쓸모없는 정열로서가 아니라 역사 창조의 의미 있는 참여자로서 간주하게 해보려는 시도였다. 사르트르도 실존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인 반면에 현대를 지배하는 철학은 마르크스주의 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실존주의를 '자신이 처음에는 대항하다가 이제는 자신이 통합되기를 운하는 한 지식체계의 외곽에 살고 있는 기생적 체계'라고 토로한 바 있다. 그러므로 그는 그 책에서 『존재와 무』에 표현된 견해들과 마르크스주의의 조호를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그것은 어떻게 개인이 자신의 고립을
파기하며, 공존의 확실한 의식을 발전시키며, 자신의 개인적 양심을 순수히 무화하는
자유로서가 아니라 타자의 자유를 반영하며, 그것에 의해 반영된 자유로서 간주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는 시도였다. 또한 거기에는 타자의 자유의 실존의 결국 인간을 자유롭게 할 행위, 또는 실천을 유발하는 역사적 힘들의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의도도 담겨져 있다.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를 통해서 모든 의미의 원천으로서 대자를 나타내려 했다면,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통해서는 즉자로서의 역사를 과학적 지식을 나타내는 인간 정신에 의해 식별 가능한 것으로 해독하려 했다. 사실상 그가 철학으로서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이었다.
1946년 「현대」에 실린 <유물론과 혁명>에서 이미 그는 마르크스의 인간소외론과 혁명의 필요성을 인정한 바 있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노동자는 살기 위해서 노동할 뿐이다. 그리고 그가 노동의 생산물에 대한 소유권을 빼앗겼다고 푸념하는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는 노동의 의미까지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회를 위해서 생산하지만 그 사회와의 연대성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계공이라도 좋고 인부라도 좋다. 그는 자기가 대체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의사나 법률가의 일은 그 질에 의해서 평가되지만 노동자의 일은 오직 양에 의해서 평가된다. 그가 놓여 있는
상황의 여러 국면에서 그는 자기가 동물학의 어느 종족에 속하는 짐승이라는 것을 의식한다. 그가 여러 국면에만 머물러 있는 한 그의 조건마저도 자연적으로 보인다.'
이러한 노동자의 인간소외 현상은 결국 혁명의 조건이 된다 사르트르가 생각하기에 혁명가는 이러한 상황을 초월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전계급을 위해서 변혁하려고 한다. 그에게 신성한 권리를 가진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사회조직을 변혁하려고 하기 때문에 신의 섭리가 그 사회조직의 구성을 관할한다는 생각부터 배격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르트르는 혁명가의 사상을 휴머니즘이라고 했다. '우리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주장이 모든 혁명의 기반'이라는 것이다.
혁명가는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반대로 권리라는 개념 자체를 파괴하는 사람이며,
그는 그것을 습관과 권력의 산물로 보았다. 그의 휴머니즘은 인간적 위신에 자리잡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어떠한 특정한 위신도 부정하고, 그가 자기와 그의 동족을 섞어버리는 통일은 인간의 지배로서의 통일이 아니라 인간적 종족으로서의 통일이다. 그가 보기에는 하나의 인간 종족만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정당화될 수 없는 우연한 출현이다. 단지 그 발전의 여러 사정들이 인간에게 일종의 내적 불균형 상태를 극복하고 더욱 합리적 균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처럼 마르크스의 소외이론과 혁명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유물론에 대해서는 반대를 분명히 했다. 그의 주장에 다르면, 유물론은 일종의 신화에 불과하다. 더구나 종래의 유물론에서는 인간을 자유로운 자기 초월적 주체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들의 유물론을 변증법적이라 주장하면서 그것을 과거의 유물론과 구별하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관념론이 기존의 권리와 가치를 내세워 인간을 속박하고 기만하듯이 유물론도 인간에게서 자유를 빼앗으면서 인간을 속이고 있다. 혁명가는 그러한 기만적 학설들이 주장하는 것 가운데서 특히 자유를 믿지 않는다. 인간의 자유를 주장하는 예언자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그들은 예외 없이 인간을 속였다. 스토아학파의 자유, 기독교의 자유, 베르그송의 자유도 쇠사슬이
없는 척하면서 인간을 훨씬 더 강한 쇠사슬로 동여맸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러한 것은
모두 다 내적 자유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순전한 관념론적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자유를 행동의 필요조건으로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것은 관념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유물론이 약자에 의한 강자의 설명으로서 우리 사회의 실제적인 구조에 대한 적절한 영향을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한낱 플라톤적 의미를 가진 시화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혁명가는 현재의 상황에 상징적 표현을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 혁명가는 그것보다도 그로 하여금 미래를 만들게 하는 사상을 요구한다. 강자도 약자도 없을 계급 없는 사회에서 유물론의 신하는 모든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사르트르는 관념론과 유물론을 부정하는 혁명의 철학으로 초월의 철학을 요청한다. 그는 열광적인 자유를 목적으로 하는 새로운 휴머니즘을 요구한다. 그가 기대하는 것은 부르조와의 관념론적 사상은 물론 일시적이지만 피억압 대중에 접합할 수 있었던 유물론적 신화를 동시에 초월하여 인간 일반의 철학이 될 수 있는 혁명의 철학이다. 한편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소외이론과 혁명의 필요성뿐만 아니라 그것이 사용하고 있는 변증법적 이성도 수용하려 했다. 물론 그는 그것을 역사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보면 '나는 변증법적 유물론만이 역사에 대한 가장 중요한 해석이라고 말했고, 지금 다시 되풀이하여 말한다.'
사르트르는 이를 위해 우선 분석적 이성주의와 변증법적 이성주의를 구별한다. 18세기의 이성주의와 실증주의에 의해 대표되는 분석적 이성은 구경꾼의 입장과 같은 객관적 입장을 취한다. 더구나 그것은 새로운 사실들을 과거의 사실들로 환원시킴으로써 그것들을 설명하려 한다. 따라서 그것은 새로움의 출현을 이해할 수 없다. 이에 반해 변증법적 이성은 새로운 것을 묵은 것에 환원시키지 않을뿐더러 전체를 부분에로 환원시킴으로써 전체를 설명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새로움의 출현을 지향하는 불가역적 운동을 표현한다. 사르트르는 그것을 환원 불가능한 새로움에 대한 절대적인 인지 가능성이라고 표현했다. 도한 그것은 완성된 전체성의 입장에서가 아니다.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전체호의 진행고정이라는 입장에서 부분을 특정한 역사적 상황으로 이해한다. 사르트르가 변증법적 사고에 의해서만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동조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사르트르의 주장에 따르면, 변증법이라는 단어는 두가지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 방법이라는 의미와 사유 대상 속에 있는 운동이라는 의미가 그것이다. 그러나 두가지 의미도 하나의 과정에 대한 두가지 측면에 불과한 것으로 그는 보았다.
사실상 변증법적 이성은 자기 자신을 반성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증법적 사유의 기본구조를 파악한다는 것은 동시에 역사운동의 기본구조를 파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변증법적 이성의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은 스스로를 의식하고 있는 역사로서 파악될 수도 있다.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사르트르가 시도하는 것도 인간의 활동은 선행조건에 속하는 동시에 그것에 의해 제한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역사를 만드는 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변증법을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사르트르는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역사적 유물론과 계급투쟁에 관해서도 여전히 커다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역사적 유물론만이 유일하게 옳은 역사해석을 제공한다고 믿는 동시에 실존주의가
현실에 대해 유일하게 구체적인 태도라고 확신했다. 나는 이러한 입장에 내포되어 있는 모순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내가 확언하는 것은 루카치가 이 점을 결코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게다가 많은 지식인과 학생들이 이러한 양면적인 요구의 압박에 시달리며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한때는 마치 달이 만물을 끌어들이듯 우리를 매혹시켰던 마르크스주의가 갑자기 우리의 관심을 잃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주의는 더 이상 우리의 인식 욕구를 채워주지 못했다. 우리가 처해 있는 특수한
영역에 대해 아무런 새로운 것도 가르쳐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발전 도중에
정체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사르트르는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존재라는 개념을 다시 도입하고 개인의 인식을 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하려 했다.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자신의 비평이 뉴턴 물리학에 대한
칸트의 비판과 같은 것이 되길 바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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